정토행자의 하루

대전지회
할 일이 있으면 그저 할 뿐

대전지회 대덕 모둠장 홍화숙 님을 화상으로 만났습니다. 유쾌하고 당당한 기운이 넘쳤습니다. 인생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면서, 온갖 도전에 당당히 맞서고, 후회 없이, 용감하게 헤쳐 온 것 같습니다. 뜻대로 안 되거나 힘든 파도를 만나면 '아, 그래? 그럼, 어디 한번 해보지' 하며 온 힘을 다했고, 지금은 험한 항해를 끝내고 목적지에 도착한 베테랑 선장처럼 보였습니다.

경전대학 졸업식 홍화숙 님
▲ 경전대학 졸업식 홍화숙 님

20대의 고뇌, 자살 시도

20대 초, 저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발령을 기다리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저를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올라왔습니다.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것이 인생인데, 뭐 하러 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아무 이유 없이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다행히 어머니가 저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데려가 목숨을 건졌습니다. 어머니는 그때 저에게 "왜 살기는, 그냥 사는 거지"라고 말하였지만, 저는 그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이 길이 내가 갈 길이구나!

2015년 4월, 5월 친정어머니와 저를 그토록 아꼈던 시아버지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사람의 연이은 죽음을 겪으면서 저는 다시 한번 깊은 슬픔과 인생의 의미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해 7월, 우연히 유튜브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었습니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을 가볍게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라는 내용의 법문을 듣는 동안, 오랫동안 마음 깊이 품고 있던 의문들이 풀렸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 ‘이 길이 내가 평생 가야 할 길이구나.’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후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매일 들었고, 이듬해 3월, 불교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2016년 1월 8-8차 입재식에서 도반과 함께 (왼쪽 홍화숙 님)
▲ 2016년 1월 8-8차 입재식에서 도반과 함께 (왼쪽 홍화숙 님)

부모님의 유산, 당당하고 활동적인 성격

어릴 적 부모님은 사이가 좋았습니다. 아버지는 술을 자주 마셨지만, 반주 수준이라 술로 인한 갈등은 없었습니다. 어릴 때 저는 할머니와 같은 방을 썼고, 고등학교 때부터 혼자 방을 썼습니다. 할머니는 남아선호 사상이 심해 늘 큰오빠를 챙겼지만, 저는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마을의 이장을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자기 도장을 아버지에게 맡길 정도로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했습니다. 우리 마을은 시골 농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천안시에 볼일 보러 가 아무리 늦게 귀가해도 다음 날 새벽이면 어김없이 소죽을 쑤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라 해야 할 일, 하기로 한 일은 반드시 하는 태도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성실한 성격으로 자랐습니다.

어머니도 매우 부지런하고, 오랫동안 마을 부녀회장을 할 만큼 활동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척 따뜻하고 자상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입학 때, 시골에서는 드물게 코트와 장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또한 가방 메고 학교에 온 학생이 저를 포함해 단 두 명으로 저를 귀하게 키웠습니다. 덕분에 저는 공부를 잘했고, 아이들이 '사팔뜨기'라고 놀려도 내가 사시라서 남에게 피해 준 것은 없기에 기죽지 않았습니다. 친구와 잘 어울려 놀고, 할 말은 하는 아이로 자랐습니다.

2017년 경전대학 특강수련 (오른쪽 네 번째 홍화숙 님)
▲ 2017년 경전대학 특강수련 (오른쪽 네 번째 홍화숙 님)

새로운 일?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을 수도 있지!

남녀 차별이 없을 거라 여겨 공무원이 되었지만, 예상과 달리 아주 실망스러웠습니다. 여자 직원은 일찍 출근해 청소하고, 손님에게 차를 대접했습니다. 일요일 당직도 2주에 한 번꼴로 시켰습니다. 그런 차별이 싫어 2년 만에 과감히 그만두었습니다. 이후로 여러 경험을 하고자 제과점이나 우유 회사에서 일했습니다.

중매로 만난 남편은 첫 만남부터 말이 잘 통했습니다. 결혼 후 함께 여러 직종을 거쳤습니다. 남편이 "회사 과장님에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만두어요. 할 일이 어디 그것뿐이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힘들어도 견뎌야 한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퇴사하여 저와 함께 꽃가게를 시작하였습니다.

15년 동안, 동네에서 꽃가게를 운영하다 문을 닫고, 식당을 열었습니다. 식당은 적성에 맞지 않았고 수입도 여의찮았습니다. 어린이집과 요양원의 조리사로 일했는데, 몸이 아파 그만두었습니다. 결국 다시 꽃가게로 정착하기까지 우리는 시도하고 애쓰고, 다시 도전하며 노력하였습니다. "꽃가게 사장님이 어떻게 조리사를 할 수가 있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고 생각하여 자존심 상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은 경험하는 것이고, 새로운 일에는 내가 모르는 무엇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래, 한번 해보자.’라며 도전을 계속했습니다.

일할 사람이 필요하고, 할 수 있으면 내가 하면 되지

대전에서 시작한 꽃가게는 운영이 쉽지 않았습니다. '아는 이 없는 낯선 도시에서 가게가 잘 되려면, 사람을 많이 사귀어야 손님을 많이 확보할 수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사회단체에 들어갔습니다. 라이온스 클럽, 로터리 클럽, 주민자치 위원회, 재향군인회, 여성회 등에서 활동했습니다. 미망인 군인 가족이나 6.25 참전용사들에게 연말에 김장하여 주고, 무료 급식 봉사 등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바쁘게 활동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열성적으로 활동하니 총무나 회장 역할을 맡았습니다.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니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2019년 대전법당 천배 정진 후 (왼쪽 세 번째 홍화숙 님)
▲ 2019년 대전법당 천배 정진 후 (왼쪽 세 번째 홍화숙 님)

하지만 총무나 회장은 계획과 준비, 실행까지 할 일이 끊임없었고, 잦은 회의와 늦은 귀가가 반복되어 매우 바빴습니다. 집안일과 꽃가게 운영, 바쁜 사회 활동을 동시에 하니 몸과 마음이 고단하고 지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누군가 해야 할 일이고, 할 사람이 없으면 내가 하면 되지.’라며 '내가 나서서 하는 것이 맞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정토회 수행과 봉사

정토회에 와서도 하기로 한 것은 하는 저의 성격대로 할 일이 있다는 요청을 받으면 기꺼이 했습니다. 저는 불교대학과 경전대학 모두 개근하였습니다. 불교대학에 다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둠장이 갑자기 그만두어 모둠장 요청을 받았습니다. 할 사람이 필요하니 모둠장을 했습니다.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경전대학에 다닐 때도 담당자가 필요하다고 하여 학생이면서 담당자 역할도 하였습니다.

2022년 2월부터 일 년 정도 지원 담당을 맡아 연탄 자원봉사, 영양꾸러미 전달 등을 했습니다. 지원 대상자를 선정하고, 사전 만남부터 봉사자들을 모으고 실행까지 무척 힘들고 어려웠지만, 일을 잘 마쳤습니다. 지금은 대덕 모둠장을 하고, 필요한 일이면 누군가는 해야 하니 할 수 있는 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합니다.

수행에서 편안함으로

정토회에서 수행자가 되기로 결심한 후 불교대학, 경전대학, 법회, 깨달음의 장, 나눔의 장, 백일기도, 명상 수련, 여러 가지 봉사와 일등 정토회의 모든 수행 과정에 빠짐없이 참여하였습니다. 일상에서 또는 일하는 중에 일어나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내려놓기를 꾸준히 연습합니다.

2021년 경전대학 학생들과 으뜸절 방문 (오른쪽 첫 번째 홍화숙 님)
▲ 2021년 경전대학 학생들과 으뜸절 방문 (오른쪽 첫 번째 홍화숙 님)

덕분에 어느덧 제가 바뀌었습니다. 수행하면서 삼십 년 동안 마시던 술을 딱 끊었습니다.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잠을 청하기 위해 마시던 것이 습관이 되어 술을 마시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아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새벽 기도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으니 일어나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살아오는 동안 남 일에 간섭하거나 남을 고치려 하지 않으니, 인간관계에서 거슬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남편과 오랫동안 같이 살았지만, 뭔가 불편하고 남편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불같이 화내며 저를 부릅니다. 부랴부랴 달려가면, 꽃에 물 주기 위해 틀어 놓은 수돗물을 잠그지 않아 물이 좀 흘렀을 뿐입니다. 별일 아닌 일에 화내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남편이 화를 낼 때마다 제가 사과하고 넘어갔지만, 마음은 불안했습니다.

깨달음의 장에 갔을 때입니다. 법사님이 ”남편이 화내는 것은 나를 해 하거나, 피해를 주거나,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할 때, 예전에 시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남편은 가난한 집안의 육 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초등학생 때부터 지게 지고 안 해본 농사일이 없었다"라고 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들은 꼭 진학해야 한다고 담임 선생님이 시아버지를 설득했기에 고등학교에 갔습니다. 꼼꼼하지만 괄괄하고 화를 잘 내는 아버지와 자주 대립했던 남편은 결국 그 성격을 물려받아 자신도 모르게 버럭 화를 냈던 것입니다. 남편을 확연히 이해한 그때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2023년 부처님 오신 날, 모둠원들과 (앞줄 가운데 홍화숙 님)
▲ 2023년 부처님 오신 날, 모둠원들과 (앞줄 가운데 홍화숙 님)

꽃가게나 식당을 할 때, 사람들이 도와 달라는 하소연을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 감당할 여력을 따지지 않고 돈을 빌려주어 낭패를 겪곤 했습니다. 심지어 제가 빌려줄 형편이 못 되면 남의 돈을 빌려 상대에게 빌려주는 무리도 했습니다. 이제는 처지와 형편에 맞게 할 만한 일은 하고, 못하는 것은 편안하게 거절도 할 수 있습니다.

'인맥을 쌓아야 꽃가게에 손님이 많을 것이다'라는 강박도 내려놓았습니다. 내일을 불안해하지 않으며, 할 수 있는 만큼 하면서 쓰이니 감사합니다. 아들의 미래를 염려하는 마음도 내려놓았습니다. 제가 편안하게 잘살면, 아들은 자신이 알아서 살아가리라 믿습니다.

요즘은 정일사 기간으로 하루에 300배 정진을 하면서 제 마음을 살펴봅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몸이 이렇게 아프니 그만둘까? 아니지, 마무리해야지' 마음이 왔다 갔다 합니다. 밀어붙이는 식의 일하는 습관으로 제 마음을 살피는 일에 소홀했음을 반성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고, 내려놓으며 사니 단순하고 편안할 따름입니다.

2024년 부처님 오신 날 모둠원들과 (오른쪽 홍화숙 님)
▲ 2024년 부처님 오신 날 모둠원들과 (오른쪽 홍화숙 님)

컴퓨터와 블로그, 동영상 편집의 꿈

꽃가게를 시작했을 때, 블로그 활동이 보편화되기 전 매일 블로그에 꽃에 관한 글을 올렸습니다. 그로 인해 인터넷 검색창에 저의 가게가 3년 연속 포털 상단에 노출되었습니다. 덕분에 널리 알려지고 손님이 많았습니다. 그 경험으로 나이에 비해 컴퓨터 활용이 익숙하여 정토회 일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꽃가게 일을 그만두면, '스님의 하루' 동영상 편집을 하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동영상 편집 교육 일정이 나오면 신청하고 싶지만, 지금 하는 모둠장 일을 잘 감당하고자 신청을 미룹니다. 적당한 때를 기다립니다. 이 나이에 잘 쓰이고 있으니, 이만한 보람이 어디 있을까요? 가진 것도 없지만, 빚도 없으니,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봉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그 자체가 뿌듯하고 감사합니다.


은색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머리카락처럼 홍화숙 님의 얼굴은 생기가 넘치고 당당해 보였습니다. 홍화숙 님의 “괜찮아, 큰일 나지 않아.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돼.”라는 말은 산전수전 겪은 사람이 상대의 불안을 이해하고 진정시키는 힘으로 느껴졌습니다. 홍화숙 님처럼 상대를 편하게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에 고마워하는 사람으로 늙어가기를 소망합니다.

글_이경희 희망리포토 (서울제주지부 서대문지회)
편집_최미영 (국제지부 아태지회)

전체댓글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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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님

너무 멋진 태도로 인생을 사셔서 감탄이 납니다.

저도 본받도록 하겠습니다...!

2024-08-20 13:25:30

서나윤

감사합니다. 🙏

2024-08-16 23:29:22

나비

함께 해서 영광이고 정말 뭉클합니다.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최고

2024-08-16 19: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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