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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학 졸업하고 학원강사를 했습니다. 성적을 잘 올려주어 꽤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당시 학부모들이 상담하러 오면 대부분 자기 아이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우리 아들은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거나, 학원에 다니면 성적이 알아서 오를 거라고 여기기도 했습니다. 참 의아했습니다.
그래서 제 아이들은 학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내 아이는 내가 안다’고 생각했고 ‘내가 시키는 대로 공부하면 중간은 갈 테지’하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아이들은 제가 특별히 화를 내거나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데도 꾸준히 공부했습니다.
아들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춤 동아리를 만들어 춤을 추겠다”고 선언 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춤은 대학 가서 추라고 말리셨고, 저도 그냥 공부하는 게 어떻겠냐고 설득했지만, 아들은 공부도 열심히 하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말릴 수도 없어서, 허락도 반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름 성적도 좋았고 그간 부모 뜻에 어긋나지 않게 잘 자라준 아들이라, ‘성적이 떨어지면 올려 주면 되지’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저러다 말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완전한 착각이었습니다.
아들은 주말마다 춤을 추러 다녔습니다. 학교 갈 때는 맨날 깨워야 일어나면서 춤추러 가는 날은 깨우지 않아도 이미 새벽같이 나가고 없었습니다.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 행복해 보이는 아들이 못마땅했습니다. 아들의 춤 사랑이 깊어질수록 스멀스멀 속이 끓어 올랐습니다.
‘춤은 대체 뭔 춤이고? 춤은 아무나 하나? 춤을 잘 춘다 한들 그게 공부 잘하는 것에 비하면 특별히 어디 가서 내세울 일은 아니지 않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민이 점점 더 깊어졌습니다. 아들을 생각하면 제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제 아이를 제가 잘 몰랐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 인생인데,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더 이상 아이 때문에 울고 웃는 삶은 살고 싶지 않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 보아도 길이 안 보였습니다. 법륜 스님 책을 읽어 보면 ‘아이들은 그냥 놔둬라. 그냥 지켜보라’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해는 되는데 정작 내 아들에게 적용하려니 어려웠습니다. 모른 척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대학 동기가 <정토불교대학>에 다녔습니다. 그렇게 답답하면 불교대학에 가보라고 권했습니다. 시댁 식구들이 불교 신자이고 제가 대학 때 학생운동을 했기 때문에, 불교에 대한 제 나름의 판단과 비판적인 시각이 있었습니다. 불교는 사회의 부조리를 해결한다든지 민주화에 앞장서기보다, ‘개인적인 복을 비는 기복신앙 아닌가?’ 생각한 것입니다.
“아유 됐다. 안 다닌다”고 말했더니 그 친구가 불교 대학에 다니면서 마음이 편안해 졌고, 천일결사1에 입재해서 매일 기도하길 벌써 100일이 다 돼 간다고 했습니다. 또 정토불교대학에서는 ‘실제 부처님이 어떻게 가르치셨는지’를 배운다고 했습니다. ‘아니, 부처님이 실제로는 무엇을 어떻게 말씀하셨길래?’ 하는 궁금증이 일어났습니다.
불교대학 입학 원서를 들고 정토 법당을 찾아갔습니다. 입학법문은 ‘내가 바뀌면 내 주변도 바뀌고, 마침내 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실천적 불교사상이었습니다. 그동안 불교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이 아니라 내가 문제’인데 ‘내가 바뀔 수 있다’고 하니, 불교를 한 번 공부해 보려는 결심이 섰습니다.
불교대학을 다닌다더니 <깨달음의 장2>까지 신청했더니 남편이 “좀 이상한 대학 간 거 아니야?”하고 걱정했습니다. “이왕 가려면 반야심경3을 다 외우고 가”라고 하기에, 며칠에 걸쳐 정말 다 외우고 갔습니다.
수련장에서 엄청나게 울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옳다’라고만 생각하고 제 기준으로만 세상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깨달음의 장에 다녀와서 바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기도가 너무나 하고 싶었습니다. 아침이 빨리 오길 기다렸고, 기도할 때마다 나를 더 잘 알게 되는 기쁨이 컸습니다. 제일 먼저 만난 것은 아들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금광에서 보석을 분리하는 기술자였습니다. 금광 근처 시골에 살아서 병원이 너무 멀었습니다. 엄마한테 “너 낳는 날까지 입덧으로 열 달 내내 물밖에 못 먹었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래서 약하게 태어났는지 저는 자주 아팠습니다.
어릴 때 병원에 가려고 아침에 집을 나서면 돌아올 때 해가 질 정도로 산골 마을이었습니다.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제가 장녀이고 몸이 약해서 ‘아들 대접’을 받았습니다. 수박도 제일 잘 익은 부분을 제가 먹었고 없는 형편에 고기반찬도 저만 먹었습니다. 제 몸이 아프기도 했으니 다소 편애를 받아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생에게 먹어보란 소리를 한 번 안 했습니다.
엄마에게는 아들이 없는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다른 친척 집에 아들 형제가 있는 것을 부러워했고 질투했습니다. 그들보다 우리 자매가 뭐든 더 잘해야 했습니다. 엄마가 살아온 세상에는 아들이 없으면 노후를 보장받기 어려웠습니다. 제게는 엄마의 불안이 보였고, 고스란히 느꼈습니다. 스스로를 ‘아들 못 낳은 맏며느리’로 여기고 부끄러워하는 마음도 보였습니다.
‘내가 잘해야 한다. 아들이 없는 집에서도 애들이 다 공부를 잘하네. 엄마가 이런 말을 듣고 싶어 하니 내가 맞춰드리자. 반듯하게 살자’
그런 생각으로 엄마한테 반항 한 번 안 하고 컸습니다. 집 밖에서는 쾌활하고 친구도 많고 할 말을 똑 부러지게 잘했지만, 집 안에서는 그저 책임감 있고 든든한 ‘큰아들 같은 딸’로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엄마는 지금도 병원에 입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아들이 있는 척’을 합니다. 주변 환자들이 “요즘 엄마를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딸들이 어디 있나. 그런데 아들은 어디 있어요?” 물으면 “아들은 미국 산다”고 대답합니다.
그 ‘아들 대접’이 제 삶과 제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지금도 완전히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수행하며 돌아보니, 엄마는 저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묵묵히 제 할 일을 잘하는 아들 같은 딸’이 아니라 ‘명랑하고 활발한 딸’을 엄마에게 보여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보고 싶어 하는 모습만을 보여준 것은 저였지, 엄마가 그 모습을 강요한 것이 아닙니다.
엄마는 그저 아픈 제가 죽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히 돌보았습니다. 몸에 좋다는 것은 다 구해다 먹였습니다. 그걸 ‘아들 대접’이라는 말로 깎아내리기에는 엄마의 사랑은 온전히 저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열 아들 안 부러운 딸이 되어야지’라고 마음먹고 최선을 다한 제 선택도, 누구에게 강요받은 결과가 아니라 온전히 엄마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정토회에서 공부하며 이렇게 성찰하고 참회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와 제 아들의 관계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몰랐는데, 제 아들도 집 밖에서는 무척 활발했습니다. 우리 엄마가 저를 몰랐던 것처럼, 저도 제 아들을 잘 몰랐습니다. 아들은 제가 ‘얌전하고 착한 아들’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맞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에게도 아들을 통해서 남들한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구나. 아들이 저렇게 건강한데 내가 뭘 더 바라고 못마땅해했을까’라고 참회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화를 잘 내지도 않고, 항상 부드럽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춤추는 걸 못마땅해하고 실제로는 공부하기를 원하면서 무슨 말을 꺼낸들, 아들에게는 다 잔소리일 뿐이지 대화가 될 리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어려운 엄마’였을 지도 모릅니다.
제가 우리 엄마보다 나은 엄마가 되는 방법은 아들에게 ‘어떤 모범적인 모습’을 원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강요하지 않고 제가 원하기만 하더라도 아들은 그걸 알아차릴 것이고, 저를 아들의 본래 모습으로 편하게 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잘 성장하고 있는 아들에게 은연중에 주입했던 말과 행동들이 미안했습니다. 아들의 인생을 존중하고 응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저를 돌이키는 기도를 하고 아들은 춤을 추는 사이,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서로 존중하는 엄마, 아들의 자리 말입니다.
고등학생이었던 아들에게 지회의 JTS 거리 모금에 같이 가자고 권하니 선뜻 나서주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저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가볍게 다가옵니다. 여자 친구랑 헤어지더니 정토 법당에 전화해 고민 상담을 시도 하기도 하고, 힘들면 알아서 법륜스님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기도 합니다. 이제 집에서나 밖에서나 그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은 청년이 되었습니다.
제 딸도 마찬가지입니다. 딸이 대학을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던 때에 거리에서 정토불교대학 홍보 현수막을 발견했습니다. 친구들이 딸에게 “저기 가라. 정토불교대학”이라고 농담하자, 딸이 웃으며 “정토불교대학 무시하지 마라. 저기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오기는 힘들다”고 말해줬다고 합니다.
저는 여전히 책임감 강하고 부모님을 잘 살피는 맏딸입니다. 어쩌면 ‘아들 역할’을 하다보니 다져졌을지 모를 강한 책임감은, 저를 정토회에서 무슨 역할로든 두루두루 잘 쓰이게 합니다.
지회의 지원 담당을 하면서 ‘내가 다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마음을 냅니다. 필요한 실무를 익혀 다른 도반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알아야 지원할 수 있습니다. “하다가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걱정 말고 편하게 물어보세요”라고 말하면 도반들의 얼굴이 편해집니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저도 편해집니다. 어떤 소임을 하든 든든한 지원군이 되고자 합니다.
오늘도 그냥 해봅니다. ‘나한테 도움이 됐는데 당신도 좋다니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계속 가 보겠습니다.
양경난 님은 춤을 못 추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백화점 문화센터의 요가 강사로 20년을 일했습니다. 아들이 춤을 좋아하는 게 당연합니다. 제가 보기에 몸을 잘 쓰는 이 두 사람은 많이 닮았습니다. 엄마의 수행이 요가처럼 더 유연해지기를, 마음이 편해진 아들이 삶에서 더 멋진 춤을 추기를, 리포터도 응원합니다.
글_장수린 희망리포터(인천경기지부 인천지회)
편집_이승준(광주전라지부 전주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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