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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행복합니다. 당신도 행복하십시오.” 오래전 천일결사1 명심문으로 지금까지 제가 자주 되뇌이는 문구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과거의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리워한다는데 나이가 60 중반을 넘은 저는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 어느 곳으로도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없습니다. 50대보다 60대가 편안하고 작년보다 올해가 더 여유롭습니다.
제가 첫돌이 되었을 때 이혼한 엄마는, 먹고 살기 위해 아들을 낳는 조건으로 스무 살이나 더 많은 남자와 재혼하였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내리 다섯 명의 여자 동생을 낳았고 두 분 부부싸움의 화풀이 대상은 대부분 저였습니다. 어린 시절 행복함을 느껴 본 적이 없었고 차라리 죽으면 편하겠다는 생각을 늘 할 정도로 많이 맞으면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중3이 되었을 때 겨우 아들을 낳았습니다.
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자립하기 위해서인지 돈을 벌기 위해서인지 아무튼 집을 나왔습니다. 고등학교에 가고 싶고 공부를 더 하지 못하는 아쉬움도 컸지만 그래도 집을 벗어날 수 있었던 그 순간은 오히려 가벼웠습니다.
시흥에 있는 전자 회사에 취직한 저는 책을 읽고 편지를 쓰는 것이 취미였습니다. ‘샘터’라는 월간지가 있었는데 그 월간지 펜팔란에 적힌 주소를 보고 군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제 일상을 독백처럼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는데 위안이 되었습니다. 남편과의 인연은 그렇게 편지로 이어졌습니다. 편지를 주고 받았지만, 남편은 감히 제가 쳐다볼 수도 없는 대단한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중학교만 나온 저에 비해 서울의 좋은 대학을 다니는 남편은 기타도 잘 치고 노래도 잘 부르고, 무엇이든 물어보면 모르는 것이 없어 제겐 과분한 남자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연로한 부모님의 막내아들이라 결혼을 서두르게 되었고, 그 당시 마땅한 사람으로 저를 선택했습니다.
행운으로 여겼던 결혼은 제 불행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란 결핍 때문에 일곱 살이 많은 남편에게 사랑받으며 남편을 아버지처럼 의지하고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금방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친정으로 돌아가기도 싫었던 저는 자살을 시도하는 어리석은 경험도 했습니다.
남편은 자유분방하여 마음 가는 대로 생활하는 스타일인데 저는 소소한 일에도 경직되고 열등감이 심해 서로 잘 부딪쳤습니다. 제게 답답함을 많이 느낀 남편은 큰아들을 낳은 후부터는 기분만 나쁘면 이혼하자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결혼 생활이 힘들었지만, 친정 부모님의 이혼을 경험했기에 저는 제 가정만큼은 꼭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이혼하자고 말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무작정 용서를 빌고 그다음부터는 남편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며 긴장하고 살았습니다.
남편은 제가 밖에 나가 일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결혼한 지 25년이 되던 해 줄어드는 살림에 돈을 벌겠다고 겨우 허락 받아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돈을 벌어보니 이제 남편 눈치 보며 살지 않아도 되겠다는 마음과 이혼해도 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더 이상 일방적으로 맞추며 살고 싶지 않았고, 그때부터 남편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남편 눈치 보지 않고, 말 안 하고 살아보니 편하고 좋은 것 같았는데 한편으로는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당시 도서관에서 ‘스님 마음이 불편해요’란 책을 우연히 발견하여 읽고 그 길로 정토회를 찾아갔습니다. 인터넷 ‘정토TV’에서 생소한 법문을 들으며 2007년엔 깨달음의 장2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쌓았던 업식이 두터워서인지 약간 가벼워지는 느낌만 받았습니다. 그 후 2008년도에 서초법당으로 불교대학을 다녔습니다. 송탄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초법당으로 다녔는데 막차가 9시 50분이라 법문 듣고 나면 나누기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물론 법문 듣는 것이 좋았지만 법문만 듣고 나누기를 못 하니 워낙 무겁고 어두웠던 제 마음은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후에 들었지만 당시 도반들은 제가 말 붙이기도 어려울 만큼 표정이 어두웠다고 합니다.
그래도 2009년도에 경전반 공부를 이어갔고, 그 후로도 나름 정토회에서 소임을 맡아 꾸준히 활동했는데, 2015년 경전반을 담당하던 중 법문을 듣고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경전 수업 중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5년 10년 후에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지금 아는 것이 지혜다"라는 법문이 들어왔습니다. 한집에 살면서도 10년째 남편과 대화하지 않고 살아오고 있는 제 행동이 5년, 10년 뒤에 어떤 과보로 돌아올까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무관심하게 사는 것이 편하고 오히려 남편 눈치 보며 살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꾸민 제 마음의 헛헛함은 이미 제가 알고 있었습니다. 정말 한편으로는 날개를 단 새처럼 자유로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제 웃는 표정은 가식이었고 위선이었던 것도 더 이상 속일 수 없었습니다. 소임 덕분에 법문을 들었고 또 그 덕분에 이제는 달라져야겠다는 돌이킴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은 허리 수술을 해야 했고 저는 어쩔 수 없이 간호를 해야 했습니다. 남편을 간호하려니 10여 년을 미워했던 마음도 내려놔야 했습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갑이 되고, 을이 된 남편은 저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 서로 자연스럽게 미움이 녹았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남편도 배다른 형제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 외롭게 자랐고, 저는 결핍과 열등감으로 뭉쳐있어 남편 아닌 다른 누구와 만나도 순탄한 결혼 생활은 하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허리 수술 후 남편은 당뇨 합병증으로 투석을 시작하였고 그 뒤 발가락 절단, 발 절단, 다리 절단 등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을 함께했습니다. 남편은 간병으로 힘든 저에게 무척 미안해했지만, 저는 이렇게 미움을 풀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안도감에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 화해와 치유의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남편은 70여 년 인생을 늘 세상 탓하며 살았지만 투병 생활 마지막 6년은 스스로 늦복이 많아 걱정할 것이 없고 행복하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남편의 표정은 어린아이처럼 선하고 순수했습니다. 그 평온함이 제게도 전해져 저도 편안하고 행복했습니다.
남편이 하늘로 돌아간 지 이제 22개월이 지났습니다. 요즘 남편의 모습이 떠오르면 고맙다고 혼자 말을 합니다. ‘나랑 살아줘서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에 아들 둘을 낳아 고맙습니다. 아들들이 자립할 수 있게 돈을 많이 못 벌어 줬던 것도 고맙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무지해서 미워하고 원망했던 시간들을 녹여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가서 고맙습니다.’
이제는 자식들에게 당당한 엄마입니다. 40여 년 동안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그대로 겪고 바라본 아들들에게도 떳떳하고 든든한 엄마로 있어 줄 수 있어 안도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께 많이 맞았던 그 습관으로 저도 제 큰아들을 어려서부터 많이 때렸습니다. 매를 맞으면서 가르침을 배운다고 여긴 탓입니다. 정말 이렇게 어리석었던 엄마 밑에서도 잘 자라준 아들에게 참회하고 감사합니다. 작은아들이 “난 종교를 믿지 않지만 엄마가 믿는 종교는 인정해.”라는 말을 해주었을 때 더는 여한이 없는 마음이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마음 한 자락 바꾸어 내가 만드는 것임을 왜 이리 돌고 돌아 힘들게 깨달았는지 부끄럽습니다.
돌아보니 15년간의 새벽기도와 수행법회를 빠지지 않았던 것이 제게는 힘이 되었고, 길이 되었습니다. 이젠 5년 뒤나 10년 뒤 어떤 과보를 받을지 불안하지 않습니다. 제가 대단한 존재가 아님을 아는 것이 깨달음인 것을 먼 길을 돌아와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더 이상 낭비하지 않고 세상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어 전법 활동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한계에 부딪치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 주어지는 대로 해보려 합니다.
저는 이제 결핍이 없고, 미움이 없고, 원망이 없고, 괴로움이 없습니다. 가끔은 어리석음으로 돌아가는 순간도 있지만, 알아차리고 지켜보고 내려놓습니다. 부처님 법 만나 행복합니다. 저는 참 복이 많습니다. 이 복을 회향하며 살겠습니다.
“나는 지금 행복합니다. 당신도 행복하십시오.”
글_김미화 (강원경기동부지부 화성지회)
편집_서지영(강원경기동부지부 수원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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