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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보건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친절한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대하던 제가 그 '친절'때문에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2017년 6월, 화장실에서 한 학생이 엄마와 통화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를 달래주기 위해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을 뿐인데, 전화기 너머 제 목소리는 아이를 윽박지르는 것으로 들렸나 봅니다. 상황을 오해하고 화가 난 학부모는 교감선생님을 찾아와 항의했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학부모는 상황을 이해하기는 커녕, 오히려 교감선생님의 대응에 불만을 가지며 교육청에 민원을 넣었습니다. 민원이 해결되는 한 달 동안 저로 인해 교감선생님마저 곤란에 빠뜨린 것 같아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친절한 보건교사'였던 저는 한 순간에 문제 교사가 된 듯 했습니다.
저는 제가 무얼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그러면서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잘못했다 말하는 비굴한 '나'와 잘못된 상황을 바로 잡지 못하는 자신감 없는 '나'의 모습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현실의 나'와 '이상의 나'의 차이를 느낀 겁니다. 문득, '<깨달음의장>에 가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는 친구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스스로 기준을 높게 정해놓고, 이에 미치지 못하면 자신에게 실망하고 괴로워하며 힘들어했습니다. 현실의 자신과 이상의 자신이 너무나 달랐고, 이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친절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공부하기 싫어서 보건실에 온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보건실을 습관처럼 찾아오면 안된다는 잣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저의 이상적 기준으로 잣대질하며 살았고, 이상의 나는 잘나야하는데 현재의 나는 그렇지 않으니 나를 타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제 모습을 <깨달음의장>에서 알았습니다. 저는 잘나야 한다는 과대망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모습을 깨닫고 나니 자연스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잘하고 못하고'가 없다는 것,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요.
이후 정토불교대학에 등록했습니다. 미신으로 알고 있던 불교에 대한 관념이 깨졌고, 신세계였습니다. 저는 공부를 하면서 부처님 법이 정말 좋았습니다. ‘일체유심조’, ‘나에게서 나와 나에게 돌아간다’는 원리가 가슴에 다가왔습니다. 인연과보와 평등사상에 매료되었습니다. 제 안에 있던 ‘위로 받고 싶은 아이’가 경전대학에 다니면서 줄어들더니, 지금은 아예 사라졌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를 칭찬하지 못했던 것은 남들과 비교하며 생긴 열등감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정토회 와서는 이런 감정 낭비를 하지 않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이 줄었습니다.
전에는 건강 때문에 오후 9시면 잠자리에 들어야했습니다. 퇴근하고 정토회 소임을 하다 보면 오후 11시에 자고 아침 4시 반에 일어나서 천일결사 정진을 해야하니 대여섯 시간 밖에 못자는데도 전보다 에너지가 많습니다.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경전대 학생 겸 담당을 맡은 이후 봉사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부터 환경, 통일, 복지에 관심이 많았기에 통일의병도 되었고, 봉사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정토회에 깊이 발을 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개인의 행복을 넘어서 통일, 복지, 환경활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2017년 가을, 불교대학 시절부터 JTS 거리모금은 매달 빠지지 않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부끄럽고, 아는 사람 만날까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부끄러울 게 뭐 있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모금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분별심이 일었습니다. 스님 법문으로, 거리모금은 'JTS를 알리는 게 목적인데, 동참하지 않는 이들에게 분별하는 것은 내가 간섭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분별심은 사라지고 상대방의 어떤 반응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모금활동을 하면서 제 고정관념도 보였습니다. 잘 차려입은 사람보다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이 모금함에 더 많이 기부하고, 남자도 여자 못지 않게 기부했습니다. 봉사를 통해 제 자신을 알고 배웠습니다.
지금은 일산지회 복지꼭지와 영양꾸러미 연탄봉사 꼭지를 하고 있습니다. 2019년에는 통일의병으로 동북아역사기행도 다녀왔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웅대한 발자취와 독립운동사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심양박물관 홍산문명전시관 유물에 대한 설명에 한글표기가 있었습니다. 황하문명보다 2천년 정도 앞선다는 홍산문명을 중국도 속으로는 우리의 선조들이 세운 문명임을 인정하는 것같아 기분 좋았습니다. 우리의 역사교과서에는 배달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고조선부터 시작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 북한 땅을 가까이 바라보면서도 갈 수 없는 안타까움, 북한 난민을 돕는 분들의 경험담은 독립운동사를 듣는 것 만큼이나 감동적이고 감사했습니다.
천일결사 기도 정진은 9-4차부터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2018년 신년맞이 임진각 1만 배 정진 때 저는 3일간 3천배를 했습니다. 그 이후 허리와 골반에 무리가 왔고 점점 안좋아지다가 통증으로 절 할 수 없는 날도 생겼습니다. 2019년에는 아픈 날이 많아 이 치료 저 치료를 해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건강이 무척 나빠진 겁니다. 절을 해서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제 몸이 척추 측만과 후만 등 원래 많이 틀어져 있는데 바른 자세를 하다보니 통증이 온 것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3년째 장침을 맞고 있습니다. 장침 맞으며 몸이 좋아져서 절을 할 수 있습니다. 절 수행 음원이 나올 때 남들은 108배 이상을 하는데, 몸이 안좋아진 이후 60배 정도 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침 맞은지 3년 되니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음원에 맞줘 90배 정도는 합니다. 절 할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35년 교직생활을 마감하고 내년에 퇴임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작은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정토회 봉사를 할 수 있지만 내년에 큰 학교로 발령이 날 예정입니다. 하루에 100여 명의 아이들이 보건실을 찾기 때문에 정토회 봉사를 하기 힘들어집니다. 사실 정토회 봉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남편을 출근시키고 놀아보고 싶습니다.
남편이 다정다감하지 않고 부부끼리 시간을 같이 보내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불만을 표하면 남편은 “당신이 하고 싶은 거 다 하는데 뭐가 불만이야”라고 했습니다. 그 대답도 불만이었는데, 수행을 하니 남편의 좋은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나하고 살아줘서 고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불교대학 수행연습 중 나의 장점과 고쳐야할 한 가지를 가족이나 지인에게 물어보기가 있었습니다. 저의 언니가 말했습니다. "팔랑귀를 가졌다. 귀가 얇아 이 사람 저 사람 말에 너무 잘 휘둘린다”고. 그게 저 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옳고, 저 말을 들으면 저 말이 옳다 느껴지는, 줏대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명심문도 ‘내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겠습니다’로 했다가, ‘내가 문제삼지 않으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로 했다가, ‘나는 들에 핀 한송이 풀입니다’로 했다가 왔다 갔다 합니다. 좋게 말하면 집착하지 않고 인연 따라 달라진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지금 명심문은 ‘나는 잘하고 있습니다’ 입니다. 가끔씩 안되는 저를 보며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깨달음을 얻고도 45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정진하신 부처님을 생각하며 마음을 돌이킵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유훈을 생각하면서요.
글_임현주 희망리포터(인천경기서부 덕양지회)
편집_김난희(강원경기동부 원주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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