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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뉴저지 법당에서 차로 1시간 30분 떨어진 커네티컷 주에 삽니다. 2시간 정도가 아닌, 1시간 30분이라고 정확히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대학 다닐 때는 커네티컷으로부터 별로 멀지 않게 느껴졌던 뉴저지 법당이 불대를 졸업하고 나니 갑자기 너무 멀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깨달음의 장> 동기인 도반 한 명과 매주 같은 요일과 시간에 둘의 중간 지점에서 만나 ‘둘이 하는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해외100 강, 반야심경, 새꽃시리즈 등, 닥치는 대로 듣고 나누고 공부했습니다. 그 시간이 어느새 6년이 흘렀습니다.
그럼에도 불법에 대한 갈증은 가시지 않았고, 2020년 1월, 저는 오래도록 벼르고 벼르던 인도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제가 저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곳에 가면, 뭔가 명확한 것이 잡힐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2014년 8-2차에 입재한 이후, 여러 해 법당을 가지 못했던 시기에도 천일결사 기도를 매일 빠지지 않고 했습니다. 스님의 법문은 더 이상 들을 것이 없을 만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나름, 자신이 있었습니다. 인도성지순례 버스 안 즉문즉설 시간에 호기롭게 지도 법사님께 질문을 드렸습니다.
“해외는 법당이 차로 2시간 이상 떨어져 있는 경우, 국제국에서 진행하는 온라인 불교대학과 경전반을 수강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집에서 법당까지 100KM입니다. 쉼 없이 달리면 1시간 30분이 걸리고, 길이 많이 막히면 2시간이 넘을 때도 많습니다. 법당이 너무 멉니다. 저도 온라인 경전반을 다닐 수 있겠지요?”
원칙이 2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지도 법사님께 제 상황을 허락받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도법사님께서는 제가 상상도 못한 답을 주셨습니다. '차가 막히지 않는 시간대에 일찍 출발해서 미리 법당청소 다 해놓고, 법회 듣고, 끝나면 또 봉사하다가 차가 밀리지 않는 시간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 그날 하루는 법당에서 법문 듣고 봉사하는 일정으로 아예 잡아라. 그 정도 각오는 있어야 한다.'라 는 요지의 말씀이셨습니다.
머리가 아득했습니다. 지도 법사님께서 제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제가 그동안 그 2시간이라는 것에 사로잡혀,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서 참회의 눈물이 팍 쏟아졌습니다.
인도에서 돌아온 다음 주부터 저는 바로 실천했습니다. 아침 일찍 출발해 법당에 갔고, 도반들이 오기 전에 법당청소를 하고 도반들을 맞았습니다. 이리 가볍고 바삭한 것을, 그동안 저는 뜨거운 것을 놓지도 못하고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바꿔가며 허우적거렸습니다.
그렇게 저는 인도에 가면 찾을 것 같던 ‘파랑새’를 결국 찾았습니다. 도반들과의 대화도 깊어졌습니다. 제 마음을 나누고 또 나누었습니다. 따뜻하지만 매섭기도 한 선배 도반과의 대화는 알을 깨고 나오듯 저 스스로 깨고 나올 힘을 주었습니다.
두 달이 채 못된 기간, 법당을 오가는 4시간이 아무렇지 않을 무렵,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이미 나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았기에 개인 법당에서 법문 듣고, 수행하는 이 시간 또한 너무 감사합니다. 나누기 때마다 감사함에 울컥하고, 감동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저는 엄마의 공생적 존재였습니다. 엄마의 착한 딸, 엄마의 괴로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딸, 엄마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는 딸... 그러면서 제 마음은 점점 피폐해져 갔지만 제 괴로움의 원인을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엄마가 겪는 괴로움은 제 의식 세계를 부정적으로 형성시켰습니다. 엄마의 부부 갈등은 이성에 대한 적대감과 부부 생활의 혐오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또 오빠의 알콜 중독으로 고생하시는 엄마를 보며 자식은 원수에, 암적인 존재, 즉 살 가치가 없는 존재로 인식되어 심한 우울증에 빠지곤 했습니다.
유학생으로 미국에서 음악치료 석사과정 중 ‘내가 내 삶을 살고 있지 않구나!’를 알았습니다. 내 삶을 살아야겠다라는 강한 의지가 생겼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오로지 제 결정으로 ‘외국인’과 결혼했습니다. “너는 내 딸이 아니야!” 엄마가 이렇게 선언하셨을 때, 저는 이상하게도 그제서야 숨통이 트이며 저만의 삶이 시작되는 것 같았습니다.
부모님은 제 결혼 선언에 ‘내 딸이 아니야’라고 하셨지만 미국까지 오셔서 결혼식에 참석하셨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거리가 먼 덕분으로 1년 내지 2년에 한 번씩 부모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여전히 착한 딸이었지만 공생적 존재가 아닌 독자적 존재로 관계를 잘 유지했습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지만, 법을 공부하는 수행자로서 제 삶은 날로 자립해 가벼워졌습니다. 결혼한 지 6년 후, 아이를 계획해서 가졌습니다. 평생 직장 생활을 한 엄마와는 정 반대로 저는 제 딸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오로지 아이만 돌봤습니다.
기복 불교가 아닌 철학적 불교를 처음 접하면서 '형성된 나는 바뀔 수 있다'라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또 법륜스님은 가르침을 통해 ‘다 있을 수 있는 일이 일어났을 뿐’이고, 부모님은 ‘다만 감사한 존재일 뿐’임을 알게 해주셔서 저는 더 자유로워졌습니다.
그 무렵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제가 도반들과의 나누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 깊이 묻어두었던 과거 상처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왔듯이, 뉴저지를 떠나 커네티컷으로 도망쳤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달았습니다.
코로나 덕으로 스님의 가르침이 온라인으로 가능해졌습니다. 매주 일요일 아침, “법륜스님과 함께 하는 일요명상”을 남편과 같이 합니다. 우리 부부는 53주째 명상을 하고, 딸아이는 얼마 전부터 직장 가기 전 짧은 명상을 하는 듯 합니다.
요즘은 저보다 남편인 라파엘 거사가 더 유명한 것 같습니다. 라파엘 거사도 드디어 목마르던 풀이 생명감을 얻듯이 생기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집에서 저와 수행하면서 장님 코끼리 다리 더듬는 심정으로, 궁금증이 생길 때마다 제게 끊임없이 질문했습니다. 하지만 10-4차 영어 입재식에 입재하면서 이제 더이상 제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매주 일요명상에서 지도법사님께서 귀찮지 않으실까 생각할 정도로 질문을 많이 합니다.
오늘 저희 거사는 예비입재자를 회향하고, 많은 외국인 입재자들과 함께 정식 입재를 합니다. 이제 저와도 천일결사 도반이 되었습니다.
공립학교 2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제 딸은 천일결사 때 만들어진 저의 개인 법당을 참 좋아합니다. '매일 아침 아이가 눈 떴을 때, 엄마가 평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는, 나중에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심리적 안정을 얻는다.'라는 지도법사님의 말씀을 몸소 체험하는 요즘입니다. 그저 감사합니다.
저는 현재 북미 동부 불교대학 진행자입니다. 제가 그만한 자격이 되는지, 그런 감사한 소임을 받아도 되는지 여러 번 물었습니다. 요즘 저는 많이 바쁘지만, 어느 때보다 즐겁고 활기찹니다. 몇 년 전, 법당에서 들었던 그 불교대학을, 매주 듣고, 도반들과 나누기하며 소임이 복이라는 말을 알아갑니다. 부디 우리 불교대학 학생들도 함께 가는 도반으로서 이 법의 가피를 듬뿍 받기를 발원합니다.
‘전법활동가’ 라는 말이 제게는 아직 낯섭니다. 하지만, 이 좋은 법의 가피를 제 남편인 라파엘이 받고, 제 딸인 하나가 받았듯이, 그렇게 주변에 널리 널리 전하는 것이라 짐작해봅니다.
“나는 행복을 전하는 수행자입니다.”
글_김연경(북미동부지회 뉴저지 모둠)
편집_김난희(기획홍보시스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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