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방 한 칸 내줄 수도 있답니다
인터뷰 일정을 잡기 위한 첫 통화에서 나경자 님은 “저는 특별히 할 얘기가 없어요.”라고 합니다. 수화기 너머 나경자 님의 표정과 절레절레 손 흔드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평탄하게 살아와 기사 쓸 내용이 없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터뷰가 시작되고, 물 흐르듯 덤덤히 말하는 이야기에 잔잔한 감동이 느껴졌습니다. 지금부터 정토회에서 마음공부를 하며 나를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진 나경자 님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한 번은 더 가보자 2011년 봄, 친구가 《스님의 주례사》의 한 단락을 메일로 보내 법륜스님을 처음 알았습니다. 계산원으로 일하는 저는 슈퍼 안, 서점에 진열된 《스님의 주례사》 책을 발견하고 틈틈이 읽었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깨달음의 장〉각주7이 아주 궁금했습니다. ‘왜 거기만 가면 사람들의 마음이 변할까?’ 너무 궁금하고, 가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토법당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가 원주에서는 가정법회가 열린다고 알려주어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불교대학 홍보 기간이었는지, 법문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누군가가 “정토불교대학에 다닐 생각은 없냐?”라고 물었습니다. 스님의 법문이 워낙 좋아 ‘법문만 들으면 되지’ 하는 마음이었고, 그때는 마음의 여유도 없어 “생각해 보겠다”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왔습니다. 이후 다음 법회에 다시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많이 고민했지만, 결국 ‘그래, 한 번만 더 가보자’라는 생각으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인연이 지금까지 정토회와 이어졌습니다. 법회에 참석했을 때, 연세가 지긋한 한 노보살님께서 매일 은행에 가서 보시금을 입금해야 하는 일을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ATM기에 입금하면 되지 않나요?”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해 달라고 하셔서 보시금을 대신 입금해 드렸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회계 소임을 맡게 되었고, 그것이 제 소임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컴퓨터로 메일을 열거나 간단한 검색을 하는 정도밖에 할 줄 몰라 무척 서툴렀습니다. 딸에게 하나하나 물어가며 배우느라 23년 동안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2024년 여름, 오프라인 수행법회 태어나서 제일 잘 한 일 당시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아르바이트하며 경제적으로 어려웠기에 불교대학에 갈 만큼 여유가 없었습니다. 불교대학 입학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입학이 어려워진 한 보살님이 입학금을 지원해 주어 1년간 불교대학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경전대학까지 졸업하고 2013년 5월 〈깨달음의 장〉에 다녀왔습니다. 〈깨달음의 장〉은 정말 좋았습니다. ‘앗 뜨거워, 앗 뜨거워’ 하면서 이쪽저쪽 손을 옮겨가며 살아왔던 저는 그냥 놓으면 된다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확 놓고 나니 마음이 너무 편안해졌습니다. 〈깨달음의 장〉에 다녀온 일은 ‘태어나서 제일 잘 한 일’이었습니다. 〈깨달음의 장〉을 다녀와 다니던 마트에서 경리에 지원했습니다. 내가 부족한 부분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당시 계산기에 숫자를 지우는 화살표가 있는 줄도 몰라 1년간 일 배우느라 고생했습니다. 힘들어도 배우면서 보람도 느껴 열심히 했습니다. 정토회가 온라인으로 바뀌면서 불교대학 돕는이 소임을 맡았습니다. 돕는이를 하면서 웹자보 만들고 영상 편집하고 공유하는 것까지 유튜브로 열심히 배웠습니다.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너무 기뻤습니다. 알고리즘에 뜨면 또 하나 알게 되고, 내가 배운 것을 다른 도반들에게 알려주면서 참 재미있었습니다. 소임이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일입니다. 수업 시간에 화면을 공유할 때는 어찌나 긴장했는지 마우스에 올린 오른손 집게손가락에 힘이 잔뜩 들어갔습니다. ‘틀리면 안 돼, 1분 1초도 차이가 나면 안 돼, 잘 넘어가야 해’라며 틀린 걸 들키기 싫어하는 제 마음을 보았습니다. 제가 완벽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제가 예민한 것도 알았습니다. 어느 날 나누기 때 제가 예민한 줄 몰랐는데, 돕는이 소임을 하면서 알게 됐다라고 하니, 한 거사님이 “보살님만 몰라요.”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예민한 걸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정토회에서 봉사하며 조금씩 알았고, 지금도 알아가고 있습니다. 2025년 어린이날 JTS 거리캠페인 오빠로부터 해방? 결혼 저는 4남 1녀 중 넷째입니다. 아버지는 매우 엄했고, 오빠들의 감시도 심했습니다. 특히 큰오빠의 간섭이 심했습니다. 제가 체육과에 진학할 때 남녀공학은 못 가게 했습니다. 마음대로 외출할 수 없어 친구도 몰래 만나야 했고, 남자 친구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제 결정은 중요하지 않았고, 오빠의 결정이 제일 중요했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마음에 깊이 남아, 엄한 아버지도 싫고 제 행동을 규제하는 오빠도 싫었습니다. 또 ‘끝에서 두 번째’라는 서열도 늘 불만이었습니다. ‘왜 나는 끝에서 두 번째, 여자로 태어나 이렇게 살고 있나. 첫째로 태어났다면 여자라 해도 이렇게까지 눌려 살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공부를 못한 것도, 하고 싶은 일을 못 한 것도 결국 제 노력 부족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억눌린 채 살아서,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시집가면 오빠에게 해방된다는 생각에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너무 잘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러워, 집에서 권하는 선 자리는 모두 사양하고 같은 직장에 다니던 언니의 소개로 만난 남편과 스물여섯 살에 결혼했습니다. 오빠들에게서 해방된다는 생각만으로도 너무 기뻐 서둘러 시집갔지만, 결혼 후에 알게 된 남편은 제가 바라던 가정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결혼 당시에는 오빠들에게 벗어나는 것만 생각해 ‘직업만 안정적이면 잘 살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상대를 세밀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2024년 여름, 새싹 모둠장 맨발 걷기, 불교대학 홍보 남편은 은행에 다녔습니다. 많은 돈을 다루다 보니 그런지, 돈을 비교적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100만 원이면 큰돈이라고 느끼는데, 남편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딸이 백일쯤 되었을 무렵, 친정 부모님도 돈을 맡겼는데 남편은 그 돈마저 모두 써버렸습니다. 부모님은 검소하고 성실한 분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퇴직하면서 차곡차곡 모은 돈을 사위가 다 써버리는 바람에 서울에 부모님 집을 마련하면서 대출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제 입장이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습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탓인지, 그 후로도 돈 문제로 저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 잦았습니다. 계속해서 어디선가 돈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은 더 이상 손 벌릴 곳도 없고 앞이 막막해 눈물만 흘리고 있는데, 남편은 “운다고 해결되냐?”라며 저를 다그쳤습니다. 그 말이 제 가슴에 깊이 박혔습니다. 방 한 칸 내줄 수도 〈깨달음의 장〉에서 그렇게 미워하고 원망했던 남편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 이 사람도 그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첫 단추를 잘못 끼워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여기까지 와버렸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비로소 원망 대신 이해의 마음이 생겼습니다. 처음 정일사를 할 때, 유수스님은 3년 동안 남편에게 참회 기도를 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 사람에게 절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예”하고 했습니다. 첫날 108배를 하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억울했습니다. 억울한 마음이 너무 커서 절하는 내내 소리 내 불평했습니다. 그렇게 떠들며 절을 절반쯤 했을 때, 저도 모르게 가슴에서 뜨거운 열기가 한순간에 훅 빠져나가는 경험을 했습니다. 어떤 날은 200배를, 어떤 날은 300배를 하며 하루도 빠짐없이 정진했습니다. 그렇게 3년을 채우고 나니, 이혼한 남편과 다시 함께 살 수는 없더라도 ‘방 한 칸은 내어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주변 사람들은 저에게 미쳤다고 하지만, 그 마음은 여전합니다. 딸이 곧 아이를 낳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기 몫을 묵묵히 해내며 잘 자라 주었고, 지금도 자기 삶을 잘 살아가고 있어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혼 후 제가 남편을 나쁜 사람이라고 이야기한 탓에, 딸은 아빠를 절대로 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만약 제가 불법 공부를 하지 않았고 이런 경험도 없었다면, 아마 계속해서 ‘아빠는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공부하며 깨달은 바가 생기면서, 요즘에는 딸에게 아빠와의 좋은 추억, 아빠의 좋은 점만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딸에게도 아빠가 좋은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2024년 가을, 오프라인 실천활동 활기찬 외침 이해와 감사 아버지는 퇴근 후, 집에 오면 짜증과 화를 자주 냈습니다. ‘왜 우리 아버지는 집에만 오면 짜증과 화를 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공부하다 보니 저도, 주변 사람들도 힘들 때면 짜증을 내고 화를 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 우리 아버지도 힘드셨구나. 혼자서 5남매를 키우려니 책임감 강한 아버지가 부담이 컸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이해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참 평탄하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때는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하지?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지었나? 하며 살았는데, 지나고 보니 그런 것들이 경험되었습니다. 그 경험 덕분에 오빠도 아버지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엄마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딸이 중학교 2학년 때 남편이 사고를 치면서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었는데, 엄마가 저와 딸을 받아주어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엄마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냈습니다. “왜 나를 낳았어? 나를 낳지 말지. 왜 여자로 태어나게 하고, 왜 끝에서 두 번째로 태어나게 했어?” 하며 엄마에게 모든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지금도 너무 미안합니다. 그런 말을 들어도 엄마는 묵묵히 저를 응원했습니다. 나를 받아주고 이만큼 살게 해준 엄마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엄마의 큰 사랑만큼 제가 보답을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도 큽니다. 사랑을 많이 주셔서 감사하고 태어나게 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2024년 613대법회 모둠에서 함께 배우고 익히고 저는 원주지회 반곡모둠장을 맡고 있습니다. 반곡모둠은 오래 활동한 분들이 많아 60대 후반에서 70대 중반의 노보살님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키오스크로 물건을 구매하는 것들을 힘들어합니다. 정토사회문화회관에 갈 때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햄버거 가게에 들어가 키오스크로 주문하는 방법을 함께 배우고, 원주에서는 JTS거리캠페인 후 유명 샌드위치 가게에서 함께 주문해서 배운 걸 익히기도 했습니다. 도반들이 뒤에 줄을 서 주니, 키오스크에서 천천히 주문해도 문제없으니 여유롭게 해볼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드라이브 스루도 한번 해보자 했는데 아직 못했습니다. 온라인으로 법회가 진행되면서 미트와 줌 사용도 어려워했습니다. 학교 운동장 나무 그늘에 앉아 알려드리니, 모두 법회에 잘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연세가 있어 금방 잊어버려 일주일 뒤 다시 만나면 처음 알려드릴 때처럼 같은 설명을 반복하게 됩니다. 아홉 번, 열 번까지는 괜찮았는데, 열한 번째는 제가 “공부하세요”라고 하니, 한 보살님이 저보고 쌀쌀맞다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런 활동이 참 재미있고 뿌듯함을 느낍니다. 제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모둠의 한 도반이 공간을 마련해준 덕분에, 34개월 동안 한 달에 한 번은 수행법회를 오프라인으로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여법하게 법회를 마친 뒤에는 예전 법당에서처럼 집주인이 마련해 준 밥에, 각자 한 가지씩 반찬을 가져와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밥도 먹고 수다도 떨어야지, 너무 잘했다.”라며, 노보살님들이 특히 좋아했습니다. 2025년 여름, 용기 내어 용기 내 실천활동 도반과 함께라면 어느 날 모둠원들이 오프라인 법회에 참석하기 어렵다고 하여, 온라인으로 진행해야 하나 망설이다 예정대로 오프라인 법회를 열었습니다. 두세 명만 참석할 정도로 참석률이 저조할 때는 오프라인 법회를 그만두어야 하지 않냐?라고 의견을 물었는데, 한 도반이 한 명이 오더라도 그냥 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얼굴 보고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나 봅니다. 모둠 소통방에 공지문을 올려도 반응이 없으면, 봉사활동 진행이 어렵지 않을까? 고민할 때도 있습니다. 지난 2025년 6월 JTS캠페인 때도 모두 참석이 어렵다고 해서 ‘혼자라도 나가야 하나?’ 했는데 한 도반이 나왔습니다. “내가 도와줘야지 누가 도와주냐?”라는 그 한마디에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이렇게 도와주는 도반이 있으니 다시 힘이 납니다. 원주지회 나경자 님 2011년부터 지금까지 활동해 오면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45년 전부터 갱년기로 잠을 잘 이루지 못하다 보니 면역력이 떨어져 여기저기 아픈 곳이 늘었고, 절도 예전처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몸이 아프니 소임도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순간순간 올라왔지만, 그래도 계속 활동해 온 것이 가장 잘한 일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마음공부를 꾸준하게 하는 게 제 소원입니다. 제 마음을 잘 살피며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고 남을 도우며 살겠습니다. 나경자 님은 자신을 예민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인터뷰를 마치고 난 뒤의 인상은 참으로 따뜻하고 여유로웠습니다. 노보살님들을 인솔해 햄버거 매장 키오스크 앞에 서 있던 모습, 수행법회가 끝난 뒤 도시락을 나누어 먹으며 하하호호 웃고 있는 나경자 님과 도반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지금까지 꾸준히 정토회에서 활동하며 수행을 이어온 점이 가장 본받을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수많은 어려움을 지나오며 이제는 편안한 미소로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들려주는 나경자 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앞으로의 활동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글배해정 희망리포터 편집박선희 각주7 깨달음의 장 4박 5일 기간의 정토회 수련 프로그램. 평생에 한 번만 참여할 수 있음.
"그 길을 걷다, 그 뜻을 잇다"_2025년 아시아지역 평화 실천 릴레이 2탄
2025년 가을, 아시아 곳곳에서 평화를 향한 작은 발걸음들이 이어졌습니다. 베트남, 필리핀, 중국, 홍콩 등 각지의 회원들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역사의 현장을 마주하고, 선조들의 희생과 연대의 의미를 되새기는 평화 실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민의 역사, 독립운동의 흔적, 그리고 식민과 전쟁의 상처가 깃든 장소를 따라 이어진 기록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평화는 어떻게 지켜져 왔으며, 오늘 우리는 무엇을 이어가야 하는가? 역사의 무게와 선조들의 용기를 가슴으로 체험한 아시아지회 회원들은 평화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감사함으로 실천해야 할 작은 용기임을 깨달았습니다. 지난 9월 14일부터 11월 30일까지 이어졌던 아시아지역의 평화 실천 릴레이, 그들의 진정성 있는 두 번째 여정을 지금 전합니다. 베트남 호찌민, ‘기록이 이어준 감사, 이민의 시간에서 평화를 배우다’ 호찌민, 10월 22일 배미령 베트남 호찌민 활동 인원이 많지 않은 호찌민 모둠은 오프라인 실천보다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2025년 10월 22일 수요일 오후 8시 30분, 현장 참석자 3명과 온라인 참석자 2명이 함께 모여 KBS 광복 80주년 특별기획 영상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를 시청하고, 그 의미와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하와이 이민자 선조들의 삶을 돌아보며 평화를 성찰한 오후 1903년부터 시작된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한국 이민자들의 삶을 다시 바라보며, 그 고단했던 삶 속에서도 조국을 향한 마음을 잃지 않고 독립 자금 모금에 참여했던 선조들의 뜻을 되새기는 시간이었습니다. 전문 연구자가 부족했던 시대에 한 개인이 꾸준히 자료를 발굴하고 기록을 보존해 준 덕분에, 지금 우리가 그 역사와 감동을 직접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깊은 감사로 다가왔습니다. 당시 제작된 포스터 한 장에서도 전해지는 울림을 통해 기록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민 세대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찾아가 진행한 인터뷰를 통해, 힘든 삶 속에서도 한국인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며 살아온 분들의 강인함과 따뜻함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의 가치, 일상의 기쁨이 선조들의 희생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일깨웠습니다. 오늘 함께한 시간은 우리 민족의 강한 생명력, 그 시대 여성들의 놀라운 용기와 저력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귀한 여정이었습니다. 선조들의 발자취를 기억하며, 앞으로도 평화를 위한 실천을 이어가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했습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온라인과 현장을 병행하여 특별기획 영상 「나는 한국사람입니다」를 시청하고 소감을 나누다 필리핀 마닐라 리잘 파크, ‘국경을 넘어선 우정과 희생, 평화를 새기다 ’ 마닐라, 11월 8일 윤보연 필리핀 마닐라 마닐라 모둠은 2025년 11월 8일 토요일, 모둠원 가족들과 함께 필리핀의 상징적인 역사 공간인 리잘 파크를 방문하여 평화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이날 참여 인원은 회원 5명, 일반인과 어린이 6명으로 총 11명이었으며, 모두가 가벼운 마음으로 공원을 걸으며 뜻깊은 역사의 현장을 경험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다시는 전쟁이 없는 한반도와 세계평화의 구호를 외치다 리잘 파크는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호세 리잘의 업적을 기리고자 조성된 국립공원으로, 그의 동상과 기념비가 자리한 중요한 역사 교육 공간입니다. 많은 현지 학생과 관광객이 찾는 곳이지만, 이름과 장소가 지닌 본래의 의미는 언제나 깊고 엄숙합니다. 호세 리잘은 무력보다 교육과 문학을 통한 계몽을 선택해 스페인 식민 정부의 억압과 부패를 고발했으며 35세의 젊은 나이에 처형되었습니다. 그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필리핀 국민의 의식과 자부심을 일깨우는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공원 한편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의해 강제 동원된 한국인을 추모하는 평화기원탑이 있었습니다. 또한 6·25 전쟁에 세 번째로 참전해 7,500여 명이 파병되었던 필리핀 전투부대의 희생을 기리는 우정의 탑과 조형물이 함께 자리하고 있어, 한국과 필리핀의 깊은 인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곳을 둘러보며 우리는,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과 지금 누리는 삶의 바탕이 된 수많은 희생에 대한 감사로 마음이 숙연했습니다. 작은 발걸음이지만, 이러한 기억과 성찰이 모여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에 더 가까이 나아가길 기원합니다. 6.25전쟁 참전용사의 희생을 기리는 추도와 평화 기원의 탑 상하이 모둠, ‘ 따로 또 같이 평화 실천 활동’ 중국, 11월 9일11월30일 상하이 모둠은 중국 각지에 소수로 넓게 분포되어 활동하고 있는 특성상, 각자 거주 지역에서 ‘따로 또 같이’ 평화 실천 릴레이 활동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난징, ‘항일 항공 열사기념관 역사 탐방 보고’ 이보미 상하이 첫 활동으로, 난징에 거주하는 이보미 회원은 역사적 장소를 직접 찾아 그 의미를 되새기고, 모둠 소통방에 탐방지 사진과 소감을 공유했습니다. 난징은 1937년 일본군 점령 시 민간인과 포로를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난징 대학살 사건으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곳입니다. 전쟁범죄의 상징적 사례를 확인하고 평화와 인권의 중요성을 알리며 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하기 위해, 11월 9일 아침 난징 대학살 희생자 기념관 방문을 계획하고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당일 방문 예약이 모두 찼고, 다음 날부터 한 달간 보수공사 예정이라는 안내를 받아 아쉽게도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미리 정보를 확인하지 못한 점을 참회하며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난징 항일 항공 열사 기념관을 견학할 수 있었습니다. 난징 항일 항공 열사 기념관은 중일전쟁 당시 중국을 도와 싸우다 희생된 한국인 파일럿을 비롯한 전 세계 항공 영웅들을 기리는 뜻깊은 공간입니다. 난징 항일 항공열사기념관에서 홀로 평화를 염원하다 다양한 국가의 희생자를 기리는 전시와 추모는 단순히 한 나라의 역사에 국한되지 않고, 국제 연대와 항일 항쟁을 함께 기억하려는 의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한국인 전사들을 기리는 전시관을 통해 우리의 평화정신과 연결되는 의미를 느꼈으며, 중국, 러시아, 미국 등 각국 추모비 사이에 위치한 한국군 추모비 앞에서 묵념했습니다. 일제에 항거한 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여러 나라의 평화를 지키려는 노력과 희생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이번 탐방을 통해 선조들의 숭고한 희생에 감사하며, 현시대의 내부 화합과 한반도 평화 유지의 중요성을 곱씹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항공 영웅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평화와 국제우호를 기리는 기념탑 상하이, ‘만국공묘 역사 탐방 보고’ 류유신 상하이 2025년 11월 21일 상하이 모둠은 상하이 거주 회원 4명과 행복학교 신청자 1명, 총 5명이 함께 상하이 만국공묘를 방문하여 평화 실천 릴레이 활동을 진행했습니다. 탐방 장소인 만국공묘는 송칭링 기념관 안에 위치하며, 일제 강점기 항일투쟁을 펼치다가 타국에서 돌아가신 한인 독립 열사들의 묘가 옮겨진 역사적 장소입니다. 이 묘역은 단순한 묘지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국외에서 희생된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투쟁을 기리는 공간입니다. 원래는 징안스루에 위치했으나, 중국 문화 대혁명과 도시 재개발 등으로 인해 일부가 이전되었습니다. 이러한 이동 과정은 역사적 기억을 유지하려는 노력과, 다양한 시대적 어려움 속에서도 선조들의 발자취를 보존하려는 중국 정부의 의지를 보여주어 무척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만국공묘는 과거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묘지 중 일부이며 표지석만 남아 있기도 하였다 현재 확인 또는 추정되는 한국인 묘는 총 14기이며, 노백린, 박은식, 신규식, 안태국, 김인전 등은 1993년, 윤현진, 오영선 등은 1995년에 국내로 봉환되었습니다. 묘지를 둘러보며 우리는 머나먼 타국에서 독립운동의 험난한 길을 걸으신 열사들의 외로움과 고통, 시련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해방된 조국을 직접 보지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눈을 감으셔야 했던 안타까움이 가슴을 저미게 했습니다. 비록 표석은 침묵하고 있지만, 그 아래 묻힌 분들의 못다 이룬 꿈과 염원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습니다. 이러한 표석은 단순한 돌이 아니라, 조국 독립을 향한 염원이 뼈아프게 새겨진 우리 민족의 아픔 그 자체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번 활동을 통해 선조들의 희생을 기억하며, 지금 누리는 평화와 자유의 소중함을 마음 깊이 되새길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선조들의 희생을 기억하며,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이 새깁니다 자싱, ‘김구 선생 피난지 역사 탐방 보고’ 류유신 상하이 2025년 11월 28일 늦가을의 차분한 햇살 아래, 상하이로 여행을 온 조카와 함께 우리 부부는 중국 가흥의 김구 선생 피난지를 방문했습니다. 김구 선생 피난지는 저장성 자싱 남호 메이완가에 위치합니다.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의 감시로 더 이상 상하이에 머물 수 없게 된 김구 선생이 중국인 정치가이자 사회활동가인 저보성의 도움으로 지냈던 곳입니다. 메이완가 골목을 따라 들어서면 보이는 2층 기와집에서 김구 선생은 몸을 숨기며 생활했습니다. 겉모습은 평범한 고택이지만, 하루하루 일본 순사에게 들킬지 모른다는 긴장과 불안 속에서 지내야 했던 선생의 마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애잔했습니다. 외롭고 답답한 피난 생활 속에서도, 조국 독립을 향한 간절한 바람과 사명감이 선생을 지탱했을 것이라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 저장성 자싱 메이완구에 위치한 김구피난처 1층 전시관에 전시된 기록물을 통해, 저보성의 아들 저봉장과 양자 진 동생 부부 등 온 가족이 위험을 무릅쓰고 김구 선생을 도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 순사가 오면 즉시 탈출할 수 있도록 마련된 비상구와 24시간 대기 중이던 조각배를 보며, 당시 선생이 느꼈을 긴박함과 숨죽이는 순간이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2층 방에서 창문을 통해 외부의 세상을 마주했을 김구 선생의 뜻을 기리며 2007년부터 시작된 보존 사업 덕분에 지금은 저장성 성급 문물 지역으로 잘 보존되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피어난 한·중 우의와 조국 독립을 향한 불굴의 의지를 온전히 느꼈던 뜻깊은 방문이었습니다. 회원들과 함께 다시 찾아 오기를 기원하며 홀로 김구 선생을 기립니다 항저우, ‘ 대한민국 임시정부사적지 역사 탐방 보고’ 류유신 상하이 자싱에서 다시 1시간을 달려 항저우라는 아름다운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항저우는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수저우와 항저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인들이 특히 사랑하는 도시입니다. 자연경관, 역사, 문화, 경제까지 모두 갖춘 도시라 여행자들에게도 매우 인기가 높습니다. 경관이 빼어난 서호라는 호숫가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사적지가 있습니다. 임시정부는 상하이자싱항저우창사광저우류저우충칭 등으로 이동하며 독립운동을 이어갔는데 그중 항저우 시기는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서 활발히 활동이 이루어진 시기였습니다. 항저우에는 세 군데 임정 사적지가 있는데 제가 방문한 호변촌 청사는 다행히 관광지 근처여서 방문객이 있고 항저우시 정부의 역사 문화 보존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안심이 되었습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1층에는 당시 사용했던 태극기가 걸려 있고, 부엌과 응접실 등 생활공간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공간에서 김구 선생과 동지들이 생활하며 독립운동 전략을 논의했을 모습을 상상하니, 지금의 내가 그 상황에서 과연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과 고뇌가 떠올랐습니다. 20대 조카 또한 같은 생각을 하며, 그 삶의 무게를 함께 느꼈습니다. 당시 사용 하던 태극기와 응접실 역사적 배경과 여러 자료가 전시된 2층을 천천히 살펴보며 몰랐던 사실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공간 하나하나에서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과 그들의 결연한 의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번 방문을 통해 저는 역사적 공간 속에서 과거 인물들의 삶과 마음을 깊이 이해했으며, 독립을 향한 간절한 바람과 그 속에서 피어난 한·중 우의는 안도감을 주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이 할 일을 해낸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떠올리며, 저 또한 현재의 위치에서 작은 책임과 용기를 실천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항주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의 사진이 벽면에 걸려있다 홍콩 역사박물관, ‘과거와 현재를 마주하며 ’홍콩, 11월 26일 송정민 싱가포르 싱가포르 모둠 홍콩 지역 거주 회원들은 한 달에 한 번 오프라인 법회를 통해 도반애를 다지며 정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1월 26일 오전에 법회를 마치고 평화 실천 릴레이 활동을 위해 홍콩 역사박물관을 찾았습니다. 박물관 안에는 중·고등학생들이 진지하게 전시를 관람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며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움직이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영국식민지 홍콩을 점령한 일본군은 1945년 8월 15일 패망하여 홍콩은 영국의 통치가 재개되었다 첫 전시 섹션은 국가보안법과 공산당 관련 내용이 중심이었습니다. 과거 홍콩 시위를 배경으로 제정된 이 법은 반체제 활동을 강력하게 통제하여 홍콩 시민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해당 영상은 짧게 시위를 다루고, 중국이 가져다준 평화와 번영을 강조했습니다. 많은 학생이 구경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과거의 홍콩과 미래의 홍콩이 교차하는 순간을 마주하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회원들과 평화 실천 활동 영상을 찍고 사진을 남기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랜만에 역사박물관을 돌아보면서, 평범한 일상과 함께할 수 있는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금 느꼈습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홍콩역사박물관에서 베트남 하노이, ‘호아로 수용소에서 느낀 역사와 평화의 순간’ 하노이, 11월 30일 박주석 하노이 11월의 마지막 날, 하노이 모둠은 하노이 중심부 호아로 수용소를 찾았습니다. 화창한 날씨 속에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모여 있었고, 우리도 그 속에서 역사의 무게를 느꼈습니다. 이곳은 19세기 프랑스 식민지 시절 만들어진 수용소로, 독립운동가와 혁명가들이 겪은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수감자들은 족쇄를 채운 채 좁은 평상에서 생활해야 했고, 당시 사람들은 이곳을 ‘지옥 속의 지옥’이라 불렀습니다. 20세기에는 전쟁 시 미군 포로들도 수감되었으며, 그들은 이곳을 풍자적으로 ‘Hanoi Hilton’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지옥 속의 지옥, 과거의 상처 속에서 피어난 평화를 배우다 회원이 준비한 해설을 들으며 수용소 내부를 돌아보는 동안, 우리는 역사 속 수감자들의 삶과 독립을 향한 의지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건물 밖 평화 상징 사진 전시 앞에서는 벤치에 마주 앉아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준비한 평화 문구 피켓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Peace for all Together for peace Stop the war, start the peace”를 외쳤습니다. 회원의 어린 아기와 함께 박수치며 평화의 순간을 몸소 느낀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준비한 역사 퀴즈와 게임, 10분 평화 명상은 역사의 공간 속에서 평화를 마음으로 느끼고 연결되는 경험이었습니다. 역사 속 걸음, 호아로에서 새긴 평화의 마음을 함께 한 시간 이번 활동으로 우리는 한 장소에서 피해자이기도, 가해자이기도 했던 역사를 마주했습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올렸습니다. 베트남이 먼저 민족 통일을 이루고 화합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 한민족도 평화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바람을 다시 마음에 새겼습니다. 평화를 향한 마음을 환한 미소로 함께 모았습니다. 사진 찍는 회원도 함께 있네요 2025년 하반기 아시아지회 평화 실천 릴레이 활동을 통해 우리는 평화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실천하며 만들어 나가야 할 삶의 방식임을 느꼈습니다. 베트남 하노이 호아로 수용소에서 역사의 아픔을 마주하고, 중국 자싱과 항저우 독립운동가들의 용기와 헌신을 떠올리면서, 평화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연대를 통해 지켜지고 쌓여왔는지 깨달았습니다. 여정 속에서 회원들과 나눈 대화와 명상 시간으로, 평화가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함을 알았습니다. 이번에 느낀 교훈을 일상에서도 이어가고 싶었습니다. 이제 작은 순간에도 상대를 배려하고, 갈등보다는 이해와 소통을 선택하며, 평화를 위한 작은 실천을 꾸준히 이어가겠습니다. 릴레이 활동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앞으로도 아시아지회와 함께 평화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역사의 아픔을 기억하며,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다집니다. 글해외지부 아시아 지회 배미령, 윤보연, 이보미, 류유신, 송정민, 박주석 사진해외지부 아시아지회 편집여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