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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그냥 살아도 괜찮다!
‘꾸준한 수행’은 정토행자라면 누구에게나 가장 큰 과업일 것입니다. 저는 ‘묵묵하고 끈기 있게 활동을 이어온 분’이라는 양정숙 님의 소개 글에 두 눈이 번쩍 뜨여, 꾸준함의 비기를 듣겠다는 결심 하나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소탈하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전하는 양정숙 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수행 비법 획득’ 이라는 욕심 가득했던 저의 첫마음이 슬며시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양정숙 님의 ‘꾸준한 수행 비법’, 지금부터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산골에서 쉰에 가까운 어머니와 오십 중반의 아버지 사이에서 늦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는 결혼했고, 오빠는 경주 시내로 유학을 가 혼자 조용하고 소심하게 자랐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방 밖으로도 잘 못 나가는 저를 보며 아버지는 학교나 제대로 다니겠나 싶어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말도 거의 하지 않고, 앉혀 놓으면 그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아이였는데도 학교는 잘 다녔습니다. 나이가 들어 회사에도 다니고 결혼도 하며,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2019년 동북아 역사기행 중에 양정숙 님 결혼 후에는 경제적 어려움이라든가, 남편의 헤픈 씀씀이, 직업상 타지 근무가 많았던 점 등으로 남편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남편에게 특별히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무언가를 따지고 드는 성격도 못 될뿐더러,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도 길게 끌고 가지 않는 성격이라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그랬습니다. 갈등이 생겨도 남편이 뭐라 말하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마음을 덮었습니다. 세 아이를 키우고 직장 생활에 취미 생활까지 하느라 고민할 시간도 별로 없었습니다. 남들에게도 큰 관심이 없었고, 그저 하루하루 제 삶에만 집중하며 살았습니다. 취미활동으로 시작한 정토회 2020년 인도성지순례 양정숙 님.right 2010년 6월 6일, 아이들 친구 엄마가 “만 원 들고 놀러가자 도시락은 내가 싸 갈게” 라고 해서 지인들을 따라나섰습니다. 버스를 타고 큰 체육관에 모였는데, 가 보니 1차 만일결사 69차 입재식이었습니다. 정토회도 처음 들었고, 법륜 스님도 처음 봤습니다. 그냥 어떤 스님이 오셨나 보다 생각하고 뒤에 앉아 아는 사람과 잡담하고 있는데, 제 귀에 스님의 딱 한 말씀이 꽂혔습니다. “입재식에 참석했으니 회향식은 꼭 와야 한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아, 회향식에 가야 하나 보다’ 싶어, 기도가 뭔지도 모른 채 당연히 기도도 하지 않고 회향식에 참석했습니다. 2011년이 되어서 그 지인의 권유로 에 입학했습니다. 직장 동료와 함께 세 명이 입학했는데, 함께했던 두 명은 굉장히 열심히 했습니다. 너무 열심히 해서 그랬는지 중도에 그만두었습니다. 저는 그냥 왔다 갔다 하는 재미로, 일주일에 한 번만 가면 되니까 퇴근하고 그냥 갔다가 오는 식으로 열심히 하지 않았는데, 결국 저만 졸업을 했습니다.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에서 모두 개근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경전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법당에 가야 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만 가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불교대학을 졸업한 동기 두 명이 법당에 봉사자가 필요하다며 연락을 주었습니다. ‘보살님, 여기 봉사자 필요하니까 와주세요.’ 하면 ‘안 되는데요, 바쁜데요.’라고 말하다가도, 한 번 가고, 또 가고, 그냥 가야하나 보다 하고 가고, 이런 식으로 왔다 갔다 하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했기에 도반들과 특별한 갈등도 없었고, 책임감도 별로 없었습니다. 2023년 어린이날 거리모금 봉사 보통 퇴근하고 법당에 가면 시장 근처에서 밥을 사 먹고 들어가곤 해서 돈이 좀 들었습니다. 집에서 그 얘기를 하니 아이가 “엄마, 그거 취미 생활이네” 라고 말했습니다. 돈도 들고 시간을 보내는 게 취미 생활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구나, 이건 내 취미 생활이구나 하면서 정토회 활동을 이어 갔습니다. 쉬어가더라도 가볍게 함께 계속 경전대학을 졸업하고 발심행자가 됐는데, 수행법회에 잘 참석하지 못해 발심행자 자격이 정지되었습니다. 발심행자 자격이 정지되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법당에 가고 싶으면 가고, 안 가고 싶으면 안 갔습니다. 그 무렵 경주법당에 토요법회가 생겼습니다. 거사들이 주축이 되어 진행하는 법회였는데, 홍일점으로 참석했습니다. 그때부터 보시함 정리 같은 작은 소임을 맡았습니다. 토요법회를 마치고 거리모금을 나갔는데, 거리모금에서도 소임을 맡다 보니 알게 모르게 점점 책임감이 생겼습니다. 2023년 여름 두북수련원 피뽑기 봉사 중에 꾸준히 토요법회에 참여한 덕분에 다시 발심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즈음 남편과 이혼했습니다. 힘들긴 했지만 남편이 원했던 일이고, 아이들도 다 커서 막내가 대학교 4학년이었기에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크지 않았습니다. 새물정진으로 주말마다 대구법당에 갔는데, 그때 함께 다닌 도반과의 대화가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었습니다. 그 해인 2019년 8월에는 동북아역사기행을 다녀오고, 다음 해인 2020년에는 인도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 일상이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도반들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정토회와의 인연을 이어 오지 못했을 겁니다. 작은 소임이라도 맡겨준 불교대학 동기 도반, 함께 모둠장 소임을 하며 모르는 것을 물었을 때 자기 일처럼 도와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도반, 전법교육부터 전법행자로서 잘 적응하도록 도와준 경주지회 지회장 등 많은 이들이 제가 꾸준히 활동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저는 수행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기도도 100일 채우기가 쉽지 않고, 꼭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여전히 듭니다. 하지만 ‘소임이 복이다’ 라는 말처럼 도반들이 맡겨준 소임 덕분에 수행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퇴직 후에도 취미 생활하듯 정토회 활동을 이어 오다 보니 그룹장에 이어 모둠장 소임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해 주고, 서로 모자란 부분을 채워 가며 모든 일을 함께 해내는 우렁각시 같은 도반들에게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2025년 겨울방학 영양꾸러미 봉사 중에 무엇보다 회사 퇴직 후 전법교육을 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불교대학이나 경전대학 돕는이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학사 돕는이 소임을 할 때 마음이 가장 가볍고 좋았습니다. 불교대학을 다시 공부할 수 있어서 좋았고, 무엇보다 학생 도반들에게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처음 정토회에 입문해 아직 수행이 뭔지 모르는 학생들이었지만, 오히려 저를 많이 돌아보게 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것도 뜻깊었습니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 수동적인 것을 넘어 피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돕는이 소임을 하면서 그런 태도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진행자의 그림자 같은 역할을 하면서 제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가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남에게도 나에게도 미소짓는 사람 저는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것도, 연락을 받는 것도 잘 못합니다. 워낙 소심하고 타인에게 무관심한 성격 때문인데, 지금은 그룹장과 모둠장 소임을 하면서 텔레그램 소통방에 이모티콘도 잘 보내고, 전화도 잘 받고, SNS에서 좋아요도 잘 누르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어서 시비하는 마음조차 없었다면, 지금은 관심을 가지면서도 시비하지 않고 ‘저 사람은 본래 저렇구나’ 하며 편안하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2024년 인도성지순례.left 정토회에서 꾸준히 해 온 봉사와 보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내 마음을 살피는 일이구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점에 감사합니다. 돌이켜보면 사람들을 만날 때 항상 정성을 다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봉사에 임할 때만큼은 매사 작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정토회에서 활동한 이후 제 일상은 그저 편안합니다. 물론 마음에 안 드는 순간도 많고, 이러면 안 되는데, 저러면 안 되는데라는 자책도 하지만, 그럼에도 스스로를 인정하려고 노력합니다. 정토회에 들어와 저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말은 ‘그냥 살아라’였습니다. 늘 모자라고 부족한 삶을 살아온 것 같지만, 그래도 이제는 이 나이에 어쩌겠나 하며 조금은 너그럽게 바라보려 합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스스로에게도 언제나 위안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는 물론, 저 자신에게도 이건 부족하지만 이만하면 잘하고 있다며 미소 지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할 일이 있는 제 일상이 고맙고 좋습니다. 2024년 두북수련원 요일농부 봉사 중에 내밀한 힘을 가진 한 사람이 공동체를 만났을 때 어떤 힘을 낼 수 있는지 들을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특별할 것 없다는 양정숙 님의 수행담 속에서 저는 매일을 살아가는 용기를 느꼈습니다. 나를 인정하는 것도 용기이고, 가벼워지는 것도 용기겠지요. 양정숙 님 수행담처럼 쉬어 가더라도 매일을 가볍게 걸어간다면 조금 더 멀리 걸어갈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함께라면 더욱 괜찮을 겁니다. 자, 오늘도 가볍게 합니다 우리 함께. 글이소정 희망리포터 편집박선희
나라를 위해 자신의 심장을 터트린 젊은 영웅을 찾아_천안지회 현충일 역사 기행
유독 높고 청명한 6월 현충일 아침, 천안지회 도반들은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으로 향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삶을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대전충청지부 지회 단위로는 첫 역사 기행입니다. 목적지는 윤봉길 의사 생가지와 사당, 기념관이 모여 있는 덕산면이었습니다. 이른 시간에 방문객은 많지 않았고, 주차장 옆 태극기가 바람에 조용히 흔들렸습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비 오늘 이곳을 찾은 이유 10시가 되자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나타났습니다. 실천활동담당 김순자 님에게 이 자리를 마련한 사연을 물었습니다. 천안지회는 천안에서 서천까지 넓은 지역에 퍼져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교과서에서 스쳐 가듯 배우는 독립운동가잖아요. 반면 사람들은 그의 정신, 농촌 계몽운동 등은 잘 모릅니다. 이번 기회에 더 자세하게 알면 좋겠다는 취지로 시작했습니다.“ 천안 주변에는 이순신, 유관순, 김시민, 이동녕, 홍대홍 등 걸출한 인물이 많습니다. 누구나 윤봉길 의사를 잘 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모른다는 것이 이번 여행의 출발점이며 예산군 덕산면을 택한 이유입니다. 월진회 회원 해설사, 정토회와의 인연 첫 마음 나누기를 마칠 무렵, 월진회 회원인 해설사 김선자 님이 도착했습니다. 월진회는 윤봉길 의사가 직접 조직한 농촌 개혁단체입니다. 여기서 해설하는 동안 정토회 회원들이 많이 다녀갔어요. 그래서 저도 법륜스님 팬이 됐습니다. 웃음 섞인 말 한마디에 회원들의 어깨가 풀렸습니다. 아이랑 같이 오신 사람은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는 그냥 두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듣고 갑니다. 해설사의 말 속에는 아이도 어른도 각자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가져갈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충의사 앞에서 숭고한 희생과 용기를 기리며, 감사의 마음을 담아 묵념하는 천안지회 회원들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세 개의 문과 계단을 지나면 충의사가 나타납니다. 법의 법사님이 대표로 향을 올리는 동안, 도반들은 고요히 묵념했습니다. 배용순 여사 무덤 앞에 있는 분수 연못 충의사 옆문을 나서는 길에 분수 연못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앞이 배용순 여사의 무덤입니다. 해설이 조용히 이어지는 가운데, 발걸음을 잠시 멈췄습니다. 남편과 따로 모셔진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남편 사당이 여기 있으니 내가 잘 지키겠다라는 유언을 남겼거든요. 남편을 먼저 보내고, 곁에서 지키겠다고 다짐한 여인. 잘 깎인 봉분이 말없이 그 아픔을 대신하는 것 같습니다. 기념관 안에서, 독립운동가 이전에 농촌 계몽가였다. 장부출가생불환, 윤봉길 의사가 집을 떠나면서 남긴 유서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자, 정면을 가득 채운 글자가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장부출가생불환 ’ 은 장부가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김선자 님은 전시된 대들보 앞에 서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울림 때문인지 목소리가 한층 커졌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독립운동가로 알려졌지만, 이전에 농촌계몽 운동가였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오치서숙이라는 서당을 찾아 한학을 공부했어요.“ 어느 날 윤봉길은 공동묘지에서 여러 개의 묘표를 손에 들고 헤매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글을 읽지 못해 아버지 무덤을 찾지 못한 청년은 누군가에게 물어볼 생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그 장면이 윤봉길 의사를 바꿨습니다. 무지가 나라를 잃게 한 원인이라 생각하고, 지식과 깨어있는 의식이 없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부흥원 상량문이 적힌 대들보 사연은 충의당 사랑방 야학으로 이어졌습니다. 작은 촛불 하나로 시작한 배움의 자리는 점차 커져 부흥원 건립으로 계승되었습니다. 대들보 상량문에는 당시 관례이던 일본 연호 대신 단기 조선 개국 4,261년이라고 써넣었습니다. 이런 부분도 윤봉길 의사의 대범함이 느껴지지요. 해설사의 말에 회원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듬해 윤봉길은 농촌 개혁운동 단체인 월진회를 조직했고 지금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소녀와 기념관 영상 1932년 4월 29일 도시락 폭탄을 들고 농촌계몽만으로는 진정한 행복이 이어질 수 없다라고 판단한 윤봉길은 거사를 택합니다. 떠나기 전 아내 배용순에게 물 한 잔을 부탁했지만, 차마 얼굴을 보고 떠나기가 힘들어, 그냥 집을 나섰습니다. 그가 남긴 문장, 장부출가생불환에 모든 결의가 담겨 있습니다. 한인 애국단에 입단 후 찍은 윤봉길 의사 사진과 해설사 윤봉길은 예산군 삽교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 칭다오로 건너간 후, 장사하며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일왕 생일날 일본군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상해사변 전승식을 거행한다는 첩보를 입수합니다. 김구 선생을 만나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고, 김홍일 장군이 주선한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을 지니고 단상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폭탄은 정확히 떨어졌고, 윤봉길 의사는 그 자리에서 체포됩니다. 5월 25일 사형 선고, 같은 해 12월 19일 아침 미간에 총을 맞고 순국했습니다. 향년 스물다섯이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묶였던 형틀과 처형당하는 모습 이 일이 있고 중국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 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라고 말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파장은 훗날 카이로 회담까지 이어집니다. 설명을 끝내자, 주변이 잠시 고요해졌습니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지만 기념관에서 들으니 그 시절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14년 동안 사람들이 밟고 다니다 해방이 되고 윤봉길 의사 유골을 수습하고자 김구 선생님이 수습단을 꾸렸는데,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수소문 끝에 당시 교도소 간수였던 분의 협조를 얻어 위치를 찾았는데, 공동묘지 입구 계단 밑에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매장했다는 거예요. 14년 동안이나 사람들이 밟고 다녔다는 거지요.“ 말이 끊긴 자리에 침묵이 내려앉습니다. 아직도 손뼈 7개는 수습하지 못한 채 일본 암장지에 있습니다. 지금은 서울 효창공원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으며, 예산군 덕산면과 서울, 중국 상하이에 기념관이 있고, 일본 가나자와 공동묘지 입구에도 기념비와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많은 나라에 흩어진 그 흔적들이, 윤봉길 의사의 삶이 얼마나 넓은 세상에 큰 울림을 주었는지 말해줍니다. 저한당·광현당, 그리고 도중도에서의 점심 기념관을 나와 약 300m를 걸으면 저한당과 광현당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건지겠다는 신념을 품고 사람들과 함께 글을 읽던 작은 초가집 해가 잘 드는 마당을 둘러보며, 아직도 글 읽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저한당과 광현당 도중도는 삽교천 상류의 물길이 바뀌며 생겨난 섬 안의 섬입니다. 회원들은 그늘에 자리를 잡고 점심 공양을 함께 했습니다. 그동안 들은 윤봉길 의사 이야기를 떠올리며 복습 겸 퀴즈 게임을 펼쳤습니다. 무엇보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6월 현충일이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저물어갑니다. 도중도 다리 도중도 다리에 새겨진 글귀 함께 걸었기에 지회장 박은숙 님에게 오늘 역사 기행의 의미를 질문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오프라인으로 만나는 기회가 많이 줄었어요. 모둠 활동으로는 만나지만, 지회 단위로 함께하는 시간은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자리가 더없이 소중합니다. 온라인이 너무 익숙해진 지금, 이렇게 자주 만나고 즐겁게 지내다 보면, 더 많은 분이 자연스럽게 함께하지 않을까요.“ 정토회 일정이 워낙 촘촘하고, 오랜 온라인 생활이 몸에 밴 탓일까? 소수의 참여 인원으로 시작한 발걸음이 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역사 기행은 함께 걸으며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이야기를 듣고, 같은 감동을 나누는 경험이 되고 그것이 쌓이면서 지회는 단단해지고, 도반의 의미는 더욱 깊어집니다. 그 평화가 지금 우리에게 닿아 있다 윤봉길 의사의 생을 따라 걸으면 한 가지 선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폭탄을 던진 사람이기 전에, 글을 모르는 이웃을 보며 마음 아파하던 청년이었습니다. 지식으로 사람을 깨우고, 깨어난 사람들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야학을 열고, 작은 초가집에서 함께 글을 읽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이 윤봉길 의사를 거사로 이끌었고, 그의 희생이 임시정부를 살리고, 카이로 회담에 영향을 미치고, 평화의 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 어록 탑 윤봉길 의사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글을 읽고 서로 알아볼 수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그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사는 곳입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많은 이들의 헌신 위에 우리가 누리는 평화가 있습니다. 그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기억하고, 이어가는 것이 우리가 현충일에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 될 것입니다. 내년 현충일에는 더 많은 도반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싶습니다. 글, 사진김종호 편집여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