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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짓고, 내가 만든 삶
이서후 님과의 인터뷰를 마치면서, 문득 두부가 떠올랐습니다. 어린 시절 연이은 부모님과의 이별, 새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맡게 된 조카들의 양육, 그리고 가장 존경하던 오빠마저 세상을 떠난 일까지. 그 모든 고통과 인고의 시간이, 마치 콩을 맷돌에 갈고, 비지를 걸러내고, 뜨거운 물에 데워 식히는 두부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닮아 있었습니다. 지금의 이서후 님은, 불법을 만나 점점 단단한 두부가 되어가는 그 어딘가쯤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은 내가 만들고, 내가 짓는다”는 그 한마디 속에서, 이제는 묵직하고 단단해진 삶의 태도가 느껴졌습니다. 가족의 넘치는 사랑 저는 아버지가 마흔다섯, 어머니가 마흔셋에 나은 늦둥이 막내입니다. 늦게 본 자식이기도 하고 손도 귀한 집안이라 그런지 딸임에도 엄청 귀하게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날씨가 궂은 날은 저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고, 추운 겨울철에는 방안까지 세숫물, 양칫물을 떠다주었습니다. 부모님이 불을 떼어 큰 대야에 물을 따뜻하게 데워놓고 제가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엄마가 때를 밀어주었습니다. 중학교 때까지 그랬습니다. 나이 차가 많아서 일찍 사회 생활을 시작한 오빠와 언니가 옷이나 학용품을 사서 보내줬습니다. 집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사랑만큼은 정말 넘치게 받으며 자랐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 연꽃 만들기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께서 중풍으로 쓰러지신 뒤 1년 동안 병상에 누워 계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다음 해에는 아버지 병수발로 고생하시던 어머니께서, 이제 좀 편안해지시나 싶던 시점에 갑자기 쓰러지셨고,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연이어 떠나보내고 나니, 제 마음이 어떤 감정이었는지도 모른 채 그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그저 무서웠습니다. 수원에 사는 오빠 집에 들어가 살다가 몇 달이 지나 거처를 옮겨 언니와 함께 지냈습니다. 뭐라도 배워봐야겠다 해서, 학원에 다니며 캐드를 배웠고, 토목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처음 경험하는 도시 생활과 사회 생활은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회사에서는 늘 바쁘게 움직였지만, 막내라서 예쁨도 많이 받으며 지냈습니다. 어느새 사람들과 잘 어울리게 되었고, 술을 배운 뒤에는 퇴근 후 타 부서 여직원들과 어울려 열심히 놀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떠안은 어른의 자리 제가 한창 회사 생활에 몰두하고 있을 때, 새언니가 우울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빠는 다리가 불편한 1급 장애인이고, 조카 둘은 겨우 초등학교 1학년과 3학년이었습니다. 서운하고 안타깝고, 무엇보다 답답했습니다. 가족을 돌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다시 오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빠의 손과 발이 되겠다는 각오로 돌아왔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저는 살림을 제대로 해본 적도 없었고, 힘든 일을 감당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물건 하나 스스로 사본 기억이 없었고, 돈 관리는 늘 언니가 맡아줬습니다. 보호받는 가족 안에서만 살던 제가, 갑자기 어른이 되어야 하는 현실은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조카들은 매일 씻겨야 했고, 학교 숙제와 준비물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동시에 직장 생활도 계속해야 했기에 몸과 마음이 점점 지쳐갔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을 나이였지만, 그럴 여유조차 없었고, 버거울 때는 술에 기대기도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처음 겪는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한겨울, 아파트 하수도가 얼어 터진 날이었습니다. 오빠가 부품 사진을 보여주며 사 오라고 했지만, 어디서 파는지도 몰랐습니다. 발품 팔며 이곳저곳 찾아다녀도 아는 사람은 없었고, 끝내 구하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습니다. 형광등 하나 갈아 끼우는 일조차, 오빠는 할 수 없었고 저는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쁘띠팝업 모둠장 교육때 수원지회 도반들과 함께 회사를 그만두고는 돈을 많이 주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날을 새우고 며칠씩 잠도 못 자며 일하다 보니 점점 지쳐갔습니다. 그 시기에, 매일 집 앞에서 기다리고, 쉬지 않고 저를 따라다니던 남편의 청혼을 받았습니다. 저는 남편의 청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외모가 뛰어나다거나, 특별히 강하게 끌렸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빠나 제가 할 수 없던 일들을 살뜰히 챙겨줄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만의 기준과 판단으로 한 선택이었습니다. 13살 터울인 오빠는 어릴 때부터 제가 자립할 수 있도록 엄하게 가르쳤습니다. 제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고,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은 2015년 8월, 오빠가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모님을 여의었을 때보다 더 힘든 이별이었습니다. 얼마나 불편하고 힘들었을까. 오빠를 좀 더 챙기지 못한 아쉬움과 제대로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 같은 죄송함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이고 큰 슬픔이라 오빠를 보내고,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들은 등교하고 혼자 남은 집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수원지회 정토불교대학 홍보때 도반들과 마음 자리를 찾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가을쯤 정토회를 다니던 막내 시누이가 일산의 한 법당으로 불렀습니다. 남편과 함께 일산 정토 법당으로 갔습니다. 불교도, 법륜스님도 몰랐기에 사이비일까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법문이 너무 좋았습니다. 오빠의 죽음 후 언니의 제안으로 안성에 있는 일반 사찰에서 오빠 이름을 올리고 천도재를 지냈습니다. 영가에게 좋을 거라고 해서 뜻도 모르면서 정성 들여 천도재 책을 읽었습니다. ‘오빠가 좋은 곳으로 가셨겠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 인연으로 백중 때마다 사찰에 찾아갔고 불교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불교가 알고 싶다고 시누이에게 넌지시 말했습니다. 3월 불교대학 입학식 전날 시누이가 입학금을 내주겠다며 불교대학에 접수하라고 했습니다. 입학식 당일 직접 법당 주소를 검색해서 찾아갔습니다. 단지 궁금해서였습니다. 법당에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 봉사자가 직접 써준 이름표를 달아주었습니다. 그 순간, 낯설던 공간이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입학 법문은 물론 환영식도 좋았습니다. 나누기 시간에 저는 솔직한 마음을 내어놨습니다. 각자 고민을 말하기도 하고 우는 분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여려선지 나누기를 계속 듣다 보니 감정이 복받쳤습니다. 울다가 눈이 퉁퉁 부었습니다. 조원모둠 모둠활동때 도반들과 나는 행복한 사람 2020년, 인도 성지 순례를 진짜 여행으로 생각하고 갔습니다. 숙소 앞에 딱 섰는데 깜짝 놀라서 앉지도 서지도 못했습니다. 인도처럼 사는 곳은 처음 봐서 놀랐습니다. 화장실 볼일도 못 보겠고 침대에 눕지도 못할 것 같았습니다. 짐도 못 풀고 안절부절 하다가 은박매트를 깔고 겨우 잤습니다. 그렇게 못 사는 나라는 처음 가봤습니다. 계속 떠오르는 생각은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 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편한 것들에 익숙해졌습니다. 길거리 쓰레기 더미, 도로 상태, 사람들 모습을 보며, 나 혼자만, 내 나라만 잘 살아서 될 게 아니구나. 생각했습니다. 정토회에서 배웠던 연기법, 인연법이 확 와닿았습니다. 마지막 날 호텔에 와서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다시 4명이 한 방에 잤는데 바닥에서 자겠다고 먼저 나섰습니다. 거부감이 사라져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수원지회 jts거리홍보 연습하면 됩니다 경전 대학 다닐 때만 해도, 꾸준히 공부해서 법사까지 가는 것도 어렵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마음도 나누는데 봉사는 못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토회에 뼈를 묻겠다고 생각할 정도였고 소임 욕심이 많았습니다. 성지순례에 같이 갔던 도반이 희망 리포터를 해보라고 해서 ‘예’하고 했습니다. 해보라고 해서 시작했는데, 사실 어려웠습니다. 경전대학생으로 경전반 온라인 돕는이가 됐습니다. 희망 리포터도 하고 불사 소임도 했습니다. 자잘하게 여러 소임을 하다 보니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든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매일 입술이 터지고 잠도 못 자면서 견뎠습니다.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습니다. 알면 알수록 부족함을 깨달았습니다. 정토회에 이바지하고 싶었는데 자괴감도 들고 화도 났고 우습게 봤던 도반에게 미안했습니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어서 못 하면 못하는 대로 하면 됩니다. 주변이 다시 보였습니다. 소임을 맡은 모든 도반이 커 보이고 멋졌습니다. 희망 리포터는 회향했고, 돕는이와 진행자는 계속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다행히 물러날 생각은 없습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면 되지 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행히 욕심이란걸 알고 있고 적당히 들 수 있는 정도면 계속 갈 수 있습니다. 못하니까 스트레스긴 하지만 결국 연습하면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수원지회 모둠장소임을 3년째 하고 있습니다. 모둠 활동은 전법, 환경 실천 등을 위주로 합니다. 아이디어는 모둠원 회의를 통해 정합니다. 정토회 봉사자들을 보면 존경스럽고 멋있습니다. 모자이크 붓다는 못돼도 메꾸는 정도만 돼도 훌륭합니다. 혼자서는 어렵고 도반과 부딪히고 돌이키며 배우고 성장합니다. 도반들을 정말 좋아합니다. 수원지회 체육대회에서 모둠원들과 당연한 일이 아닌 감사한 일 많은 이별을 견디게 해준 힘은 감사함이었습니다. 일어난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니, 마음엔 감사만 남았습니다.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이 감사로 느껴지고, 공부를 통해 그것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과정이 놀랍고 즐겁습니다. 정토회 활동가인 저는 남편의 배려로 존재합니다.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봉사할 때 짐을 실을 수 있도록 차도 사줬습니다. 자주 쓸 일은 없지만 그 마음이 고맙습니다. 정토회에 와서 마음을 돌이키고 편안해지니 남편과 싸우지 않습니다. 남편은 “언젠가 법륜스님을 뵈면 삼배해야겠다.”고 합니다. 제가 화가 나서 돌면 눈빛이 바뀌곤 했는데 지금은 달라졌다며 감사하다고 합니다. 남편은 제2의 부모처럼 저를 대해줬습니다. 본인이 해줄 수 있는 일도 제가 직접 해보게 했는데, 그땐 원망스럽고 얄미웠지만 돌이켜보면 그게 저를 키운 것이었습니다. 자녀가 셋인데 못 챙겨줄 때 많아서 항상 미안합니다. 정토회 활동이 애들에게 방해가 될까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남편이 잘 살펴주었고 아이들도 스스로 잘 해냈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녀올 때도 아이들이 수술하고 입원한 상태였는데 남편이 잘 챙겼습니다. 큰 딸 중학교 졸업식도 못 갔지만 아이는 별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남편은 가끔 “이 활동을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묻고, 냉장고를 열어보며 잔소리도 합니다.그냥 들을 만하니까 듣는 거라고 지나갑니다. 각자 자기 할 일 잘하고 있고, 저도 제가 할 일을 합니다. 가족에게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집은 대체로 평화롭습니다. 부처님 오신날 공양간 야채썰기 봉사 만든 것도, 짓는 것도 전부 나 23년 전, 애들이 다 크면 문경 정토수련원에 들어갈 거라고 남편에게 선언했습니다. 남편이 정색하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너랑 살 수 없다’라고 하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남편이 제가 한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저를 꿈에서 깨웠습니다. 그러고 나니 그동안 법륜 스님 말씀도 잘못 들었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아, 내가 뜬구름 잡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딱 알아차린 순간입니다. 경전 대학에 다니고 일반회원으로 활동할 때는 그냥 법문을 받아적기에 바빴습니다. 요새 배우는 점이 많고 공부에 재미를 느낍니다. 지금 왜 불편한지, 짜증이 나면 왜 그럴까 곰곰히 돌아봅니다. 알아차리는 순간 기분이 나아지고 마음이 편안합니다. 제게는 큰 발전입니다. 소임으로 수행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알아준 것도, 만드는 것도, 짓는 것도 전부 나라는 걸 알았습니다. 전부 내가 하고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터뷰가 미뤄지면서 취소되는 게 아닌지 염려했습니다. 마음을 내어준 이서후 님께 고맙습니다.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면서 한결같이 든 생각은 무엇일까요? 제가 마주치는 일상, 내게 주어지는 당연한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사회, 가정에서 동료와 가족의 배려가 있습니다. 정토회에는 모자이크 붓다, 도반이 있습니다. 그들과 만나서 행복하고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글여수연 편집김난희
공주에 간 젊은 그대
2025년 9월 20일, 충남 공주의 마곡사에서 전주지회의 날 행사가 열렸습니다. 비도 내렸습니다. 완벽한 가을입니다. 전주에서 마곡사까지는 1시간 반 정도 걸립니다. 50명이 넘는 회원이 참가하니, 버스를 빌렸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는 군산모둠, 익산모둠 전주지회의 ‘전주’는 전북특별자치도를 대표하는 이름일 뿐, 전주지회에는 전북에 있는 모든 도시의 회원들이 속해있습니다. 오늘처럼 함께 모이는 날을 일부러 만들지 않으면 다른 모둠의 회원들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마곡사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색깔로 자신을 표현하여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재치 있는 회원들이 많아 이름과 얼굴이 쉽게 기억에 남습니다. 어느새 버스 안에 무지개가 뜬 한폭의 풍경화가 그려졌습니다. 천년고찰 마곡사 마곡사 주차장 도착 버스 주차장에서 마곡사까지 천천히 걸으면 25분 정도 걸립니다. 계곡을 따라 놓인 데크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비가 슬슬 내려 생각보다 물이 많습니다. 마곡사는 643년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천년 고찰입니다.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우리나라의 7개 사찰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비가 그치지 않아 고찰의 은은한 나무 냄새가 회원들을 감쌉니다. 마곡사는 한국전쟁 당시 외국군은 물론 국군도 들어오지 못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의 은둔 사찰로 유명합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약 1년간 승려가 되어 피신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성보박물관으로 향합니다. 문화재가 많은 사찰에는 사찰 문화재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지어진 성보박물관이 더러 있습니다. 마곡사에는 지정문화재인 ‘세조대왕연’을 비롯해 22건의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문화재 해설사 님의 잔잔한 해설을 들으며 오전을 보냅니다. 조선의 천재 문인이었던 김시습을 만나기 위해 세조가 직접 행차했지만, 그가 먼저 떠나버리자 이곳에 임금의 연을 남긴 채 소를 타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김시습이 나를 버리니 가마를 타고 갈 수 없다.” 500년의 세월이 흘러 파손된 부분도 있고 채색도 희미해졌지만, 위용이 단단합니다. 반 천년의 먼지와 습기도 역사로서 가마를 이루고 있습니다. 국보 제348호, 마곡사 오층 석탑 앞에서 사찰 순례와 자유 관람을 마치고 조금 일찍 식사 장소로 향합니다. 먼 길을 이동해 다들 배가 고픕니다. 점심 공양 식사 장소는 사찰 주차장 뒤편의 공터입니다. 주변에 공사 자재도 보이고 몇몇 모기와 풀벌레도 함께 있지만, 막상 돗자리를 깔고 앉아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은 나를 둘러싼 회원들뿐입니다. 오늘 행사에는 어린이 회원들이 4명이나 같이 왔습니다. 6살부터 10살까지 다양합니다. 아이들도 울퉁불퉁한 바닥에 함께 앉았습니다. 전주지회가 이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은, 친구와 만나 집에서 싸 온 간단한 먹거리를 나눠 먹기 위해 꼭 멋진 공간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청정히 하고 누우면 여기가 내 집 안방이지 어울림마당 곽미정 님의 진행으로 오후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입정하는 회원들의 머리 위로, 보슬보슬 비가 내립니다. 눈을 감으니 이 고요한 숲에 아무도 없는 것만 같습니다. 적막을 깨는 첫 순서는 모둠별 구호 자랑입니다. 버스에서는 자기를 소개했지만, 이번에는 자기 모둠을 소개합니다. 전주지회에는 7개 모둠이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다른 모둠의 회원들을 봐 왔지만 이렇게 직접 눈앞에 있으니 그 존재가 생생하고 뚜렷합니다. 목소리는 덕진모둠이 가장 컸습니다. 익산모둠은 휴대전화로 아이돌을 응원하듯 모둠을 소개했습니다. 언제나 준비성이 좋은 효자모둠은 전속 댄서 어린이와 함께 카드섹션을 선보입니다. 완산모둠은 춤을 준비했습니다. 두 번째 순서는 백일장입니다. 김시습이 머무른 마곡사에서 시 한 수 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목 갱년기 오늘도 집에 가기 싫다. 꽃보다 아름답던 우리 여보. 호랑이도 잡겠네 라는 시구가 인상적입니다. 가정의 평화를 빕니다. 제목 부처님 남원 모둠 부처님들 큰일 났다. 아무 생각이 없어. 를 읽고 나니 가슴이 뜨끔합니다. 더 큰 일 나기 전에 생각을 해야겠습니다. 제목 코스모스, 정읍모둠 제목 하늘, 군산모둠 하트 하트 하늘에 가득하네, 우주 속으로 날아가네라는 시구가 문미라 님의 목소리와 어울려, 현실을 떠난 느낌을 주었습니다. 심사를 맡은 전주지회장 고경희 님과 명일법사 님이 심사숙고합니다. 장원을 발표하는 명일법사 님 제목 추석, 완산모둠 장원은 ‘추석’을 쓴 완산모둠입니다. 어린이들이 직접 참여한 작품인데, ‘보름달 아래 몸과 마음 고요히 앉아요’부분을 보니 아이들은 어른들에게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부상으로 부침가루를 수여합니다. 두 번째 게임은 ‘몸으로 말해요’ 입니다. 출제자는 동작으로만 문제를 표현하고, 문제를 풀러 나온 회원들은 스무고개로 답을 찾아갑니다. 게임을 시작하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를 표현해 보는 김경남 님 바로 정답 배가 아프면 똥이죠. 마지막 게임은 OX 퀴즈입니다. 상식으로는 풀 수 없는 퀴즈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생각할 시간도 충분히 주지 않습니다. 법륜스님은 개띠다. 맞으면 오, 틀리면 엑스. 하나 둘 셋” 어차피 생각으로도 풀 수 없습니다. 뒤늦게 답을 바꾸려는 자와 온몸으로 저지하는 지회장님 모두 다 이어져 있다 아쉬우니 마지막으로 연기법을 체험하는 몸놀이를 한 판 하고 헤어집니다. 전주지회의 심장, 영상감독 배기숙 님이 준비한 율동에 맞추어 몇 바퀴 춤을 춥니다. 오늘의 노래는 김수철의 ‘젊은 그대’. 숲이 떠나가도록 젊은 그대를 깨워봅니다. 젊은 그대, 잠 깨어 오라 태양같은 전주지회 2025년 9월 20일, 전주지회의 날 영상제작 배기숙 정토의 어린이들은 오늘을 어떤 모습으로 기억해 줄까요. 50인의 젊은 그대들이 왜 좋은 식당을 마다하고 지붕도 없는 바닥에 앉아 비를 맞으며 밥을 나눠 먹었는지. 상품으로 빛나는 물건 대신 부침가루를 골랐는지. 왜 우리가 고요히 함께 앉아 눈을 감았을 때, 이 숲에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았는지. 알려 주고 싶은 게 많습니다. 글이승준 영상배기숙 사진고경희, 구정주, 김경순, 김순자, 김형기, 배기숙, 전경병, 전미정, 전옥진, 이승준, 이효진, 최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