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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따라 강남 왔지
달서지회 봉덕모둠장으로 2년 동안 봉사해 온 윤득기 님은 인터뷰 내내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라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뭔지도 모르고 친구 따라 덜컥 천일결사 입재부터 했고, 뭔지도 모르고 백일 동안 새벽정진을 했습니다. 그렇게 십여 년을 하다 보니, 지금은 마음에 걸리는 것 없이 아주 가벼워졌다고 합니다. “친구 따라 강남 잘 왔다.”는 윤득기 님의 수행담입니다. 입재? 그게 뭔데예? 2011년 3월, 직장 동료가 동생이 권했다며 법륜 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또 다른 동료도 함께 가자고 해서, 그렇게 우리 셋은 정토회 버스에 올랐습니다. 먼저 버스에 타고 있던 분들이 저희에게 “처음 오셨으니 예비 입재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대전컨벤션센터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천일결사각주26 제71차 예비 입재자로 선 저희에게 법륜스님은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기도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예, 하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약속을 했으니 다음 날부터 새벽에 일어나 기도책자를 보고 기도했습니다. 입재식에서 나눠준 수행일지에 간단히 자기 마음을 적으라고 해서 ‘오늘은 하기 싫었다. 절하기 너무 힘들다.’ 이렇게 적었습니다. 기도를 하기는 했지만 정토회가 어떤 곳인지, 왜 새벽에 일어나 절을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용성조사 오도법회 때 도반들과 함께 혼자 했으면 아마도 중간에 그만두었을 겁니다. 그런데 함께 입재한 직장동료들과 매일 얼굴을 마주치니, “오늘 기도했어?” 하고 묻는 게 인사였습니다. 좀 늦게 일어났거나 하기 싫어서 그냥 출근한 날이면 “나 오늘 기도 못했는데, 저녁에 집에 가서 해야지.” 하곤 늦더라도 꼭 기도했습니다. 입재식에 저희를 데려간 동료는 2019년 전법행자상을 받은 달서지회 박진희 도반이고, 우리 셋은 지금까지도 함께하는 도반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평상시보다 일찍 일어나 기도하고, 출근해서 일하고, 저녁에 집안 살림까지 해야 하니 솔직히 그 백일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다만 평소 예민한 성격이라 잠들기까지 한 시간은 뒤척이던 제가 기도하기 시작한 후에는, 저녁에 녹초가 되어서 눕기만 하면 바로 잠에 빠졌습니다. 그것만 해도 저한텐 참 좋은 거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백일을 빠지지 않고 기도했지만, 다음 입재식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입재식에 가면 또 기도하겠다 약속할 텐데, 계속해야 한다는 게 두려웠습니다. 2024년 6.13 국민대법회 평화사전행동 아버지를 원망하던 병약한 어린 시절 저는 1남 4녀의 둘째로,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병치레가 잦았습니다. 가난한 살림에 자주 병원에 다니는 것이 너무 죄송해서, 부모님이 원하는 것만 하는 착한 아이였습니다. 부모님은 근면성실했지만 돈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하느라 안기부에 끌려가기도 하고, 닭장차에 실려가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엄마가 여기저기 아버지를 찾으러 다니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는 왜 저렇게 엄마를 고생시키나? 싶어 아버지가 정말 싫었습니다. 그런데 정토회에 오고 나서 아버지를 내 좁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특히 동북아역사기행을 갔을 때 아버지가 많이 떠올랐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고 고생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아버지도 자신과 가족의 안위보다 그 시대의 고통을 먼저 꿰뚫어 본 분이었구나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의 가족이 겪은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공감되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 뒤로는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보다 감사한 마음이 커졌습니다. 정토회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버지를 가정을 돌보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원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2017년 동북아역사기행 중 국동대혈에서 결혼이 이런 거라면⋯ 같은 직장 동료였던 지금의 남편과 스물여섯 살에 결혼했습니다. 진중하고 점잖은, 그야말로 양반이라 할 만한 남자였습니다. 그리고 효자였습니다. 남편은 막내였지만 결혼하면서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시어머니는 예민하고 까다로운 분이었고, 모든 것을 당신 중심으로 살아왔던 터라 저에게도 가시 돋친 말로 상처를 주었습니다. “넌 부모한테 그렇게밖에 못 배웠냐?”라는 말을 자주 듣다 보니 저는 점점 작아졌고 주눅이 들었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첫아이를 임신했지만, 내가 꿈꾸던 결혼생활은 온데간데없고 퇴근 후 집에 가는 것이 두려울 만큼 힘들었습니다. 늘 어머니에게 부족한 며느리로 평가받다 보니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마음은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임신 8개월이던 어느 날 직장에서 쓰러졌습니다. 눈 떠 보니 응급실이었습니다. 연락을 받고 남편이 부랴부랴 달려왔지만, 임신한 몸이라 별다른 검사나 처방은 받지 못했습니다. 한 번 더 쓰러지면 곧바로 병원으로 오라는 말만 듣고 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저를 보자마자 “내가 이래서 튼튼한 며느리 보려고 했는데, 어째 저래 비쩍 말라서 골골하는 며느리가 들어왔는지? 난 저런 약한 며느리 싫다 당장 친정으로 보내라”라며 막 퍼부었습니다. 2018년 인도성지순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도저히 이런 집에선 못 살겠다. 당장 나를 데리고 나가든가, 나 없이 어머니하고 살든가 양자택일을 하라.”고 남편을 몰아세웠습니다. 돌아온 답은 “어머니가 살면 얼마나 더 사시겠노? 당신이 좀 참으면 안 되겠나?”였습니다. 다음 날, 다시는 이 집에 오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짐을 싸서 나갔습니다. 갈 곳이 없어 친정집 앞까지 갔지만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대문 앞에서 한참을 쳐다보다 결국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시부모님과 7년을 살다가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분가했습니다. 주말이면 시댁에 불려갔지만 이 정도쯤이야. 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큰 집에서 혼자 지내던 시어머니는 뇌경색에 치매까지 와서 5년 정도 요양병원 생활을 하다 2013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방언처럼 터져 나온 비밀 이듬해인 2014년에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함께 입재했던 직장 동료들이 하나둘 입학했지만, 시어머니가 요양병원예 계시는 동안 형님과 교대로 수발을 들다 보니 여유가 없었습니다. 공부하면서 어머니 인생을 새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어머니가 저에게 한 말과 행동을 떠올리며 미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는 마음만 있었지, 그분의 삶을 이해하려는 생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다 그때 어머니도 많이 힘드셨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서서히 응어리가 풀려가는 줄 알았습니다. 2025년 동지기도를 마치고 그런데 뜻밖의 반전 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경전대학 재학 중 법당에서 정초 순회법회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보수법사님이 오셔서 모두가 돌아가며 인사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차례가 되자 생각지도 않은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법사님, 제가요, 이런 못된 짓을 했습니다. 예전에 어머니가 저를 너무너무 힘들게 해서요.” 1988년 무렵의 아주 까마득한 옛날 일이 왜 갑자기 폭발하듯 터져 나왔을까요? 저조차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첫아이를 낳은 뒤에도 어머니는 계속 비난하는 말로 저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평일에는 직장으로 피할 수 있지만, 주말엔 하루 종일 함께 있어야 해서 주말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끊임없이 퍼붓는 어머니의 폭언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어머니의 저 입을 막으려면 주무시게 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어머니도, 나도 숨 좀 돌리려면 그 방법밖에 없겠다 싶어 약국에 가서 수면제를 샀습니다. “그래, 그걸 드렸나?” 법사님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습니다. “아니라예, 결단코 드리지는 않았어예.” “그래, 그럴 것 같더라.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괜찮다 괜찮아.” 그 순간, 비 오듯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마음속에서 무언가 쑥 내려갔습니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오랜 죄책감, 스스로 용서하지 못했던 마음이 녹아내린 것 같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미움도 사라지고, 마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숨기고 싶고 외면했던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야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을 그때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제 죽어도 정토회는 못 떠나겠구나.’ JTS 거리홍보 중에 도반들 덕에 여기까지 불교대학, 경전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정회원이 되어야 한다고 해서 통일의병각주29 교육도 받고 활동가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초조함과 불안함, 긴장 같은 것이 금세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때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못하면 바보 같다고 자책하곤 했습니다. 변화는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왔습니다. 불교대학 때 다시 입재하며 꾸준히 이어온 아침 수행 덕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이 길로 이끌어준 직장 동료이자 도반들 덕분이었습니다. 남이 장에 간다 하니 거름 지고 나선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 그런 말이 있는데, 저는 친구 따라 강남 가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아침 정진을 마치면 그 도반들과 따로 만든 정진방에 나누기를 올립니다. 그 사이 두 명이 늘어 모두 5명이 되었습니다. 수행도 욕심으로 하다 보면 제풀에 넘어져 며칠 엎드려 있을 때가 있는데, 이 도반들이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방석으로 돌아올 힘을 얻곤 했습니다. “자기들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다, 너무 고맙다.” 그런 말을 자주 합니다. 저는 해보고 싶은 게 있어도 두려워하고 시작을 잘 못하는 성격입니다. 그런데 도반들이 옆에서 딱 저를 일깨우며 같이 가자 하니 용기가 났습니다. 시작하는 건 어려워도 일단 끝까지 해야 하는 성격이어서 이렇게 뚜벅뚜벅 가고 있습니다. 모둠원들과 행복학교 홍보 할 수 있는 만큼 가볍게 하겠습니다 봉덕모둠장을 2년 했는데, 침체된 모둠을 이끌어가기가 힘들었습니다. 특히 모둠원의 참여도가 저조하고 무반응일 때, 내가 모둠을 잘 이끌지 못하는 건 아닐까라는 자책하는 마음이 먼저 올라왔습니다. 가장 괴로운 것은 반응 없는 모둠원이 아니라, ‘함께해야 한다’는 나의 집착이었습니다. 그렇게 괴로워하다 보니, 갈수록 몸과 마음이 약해져 전법활동가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많았고, 겉으로는 괜찮은 척해도 자꾸 위축되었습니다. 모둠장 하라고 뽑아 놓고 왜 도와주지도 않는지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1년쯤 지나서야 잘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조급했고, 결과에 매달려 괴로워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참여하는 사람이 적으면 적은 대로 하고, 아무도 안 오면 혼자 하면 된다는 마음을 내니 불안함도 초조함도 줄고 가벼워졌습니다. “너무 애쓰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 하세요.”라는 법사님 말씀이 그제야 이해되었습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을 살짝 내려놓으니 상황은 그대로여도 마음은 편안해졌습니다. 목탁 기초 교육 후 2023년부터는 아도모례원 부전팀 꼭지 소임도 맡고 있습니다. 예전 법당 시절, 경전대학생인 저에게 8대 행사 담당이라는 소임을 주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받은 소임이어서 부랴부랴 목탁 교육을 받고, 사시기도 하는 법과 염불도 배웠는데 해보니 너무 좋았습니다. 8대 행사 시 약식이지만 천도재도 진행해 보았던 터라 부전팀 꼭지를 가볍게 받았습니다. 하지만 갈 길이 멀었습니다. 시타림과 사십구재, 천도재, 사시기도 등을 하려면 다시 교육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배워서 지금은 잘 쓰이고 있습니다. 사시기도 당번 날에는 아도모례원에 가서 청수 올리고 앉아 40여 분 기도하고 나면 마음이 정화되고 가벼워집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소임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어떤 일이든 나에게 인연되어 온다면 물러나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포기하지 않고 그냥 가볍게 해보려 합니다. 북한이탈민에게 추석 선물 전달 윤득기 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업장이 탁 깨지는 그 순간의 시원함과 그때까지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저 자신을 많이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물러나려는 마음, 이리저리 간 보고 머뭇거리는 태도, 게으름에 빠진 요즘의 제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모자이크 붓다의 한 점으로, 나 역시 가볍게 잘 쓰이자는 용기를 얻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글김옥자 희망리포터 편집박선희 각주29 새로운 100년을 여는 통일의병은 화해·상생의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비영리민간단체. 통일의병학교 과정을 수료하고 강령과 정관에 동의하면 가입 가능하며, 정기회비를 내고 각종 통일의병 활동에 참여할 수 있음. 홈페이지 httpwww.tongilkorea.kr 각주26 천일결사 정토회는 개인의 행복과 정토세상 실현을 위해 1993년 3월 만일결사를 시작. 3년을 정진하면 개인의 의식 흐름이 바뀌고, 30년을 정진하면 한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으로 3년 단위로 천일결사 정진을 이어오고 있음.
천년을 넘은 말발굽 소리의 기상 _대한민국의 평화를 넘어 세계로 _경주 사천왕사지 새해 통일 정진
2026년 1월 1일 새해, 새벽이 밝았습니다. 아직 세상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무렵, 부울지부 7개 지회 회원은 대형 버스를 타고 새해맞이 통일 기도처로 향했습니다. 도로는 이미 새해 첫 해돋이를 보기 위해 동해안으로 달리는 차들로 가득했습니다. 수많은 자동차 불빛을 뒤로하고 도착한 곳은 신라 사람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간절한 마음을 모았던 호국의 성지, 경주 사천왕사지입니다. 선조의 숨결이 스며든 땅 위에 통일을 염원하는 등불을 켭니다. 어둠과 겨울 추위는 우리를 막지 못합니다. 경주 사천왕사지는 부울지부 7개 지회 정토회원이 지난 10여 년 동안, 매주 일요일 새벽마다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우리 민족의 평화 통일을 위해 기도하며 선조들의 얼을 이어온 곳입니다. 1,300년 전 나라를 지켰던 신라 사람들의 마음이 전해져 오늘의 평화 통일을 바라는 정성으로 거듭거듭 피어나고 있습니다. 사천왕사지는 칠흑 같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미리 도착해 행사 준비하는 봉사자들은 연이어 모여드는 회원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이날 기온은 영하 9.9도까지 떨어졌고, 탁 트인 절터에는 유난히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쳤습니다. 추위를 막기 위해 모자와 목도리로 온몸을 감싸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지만, 정진을 준비하는 도반들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단단했습니다. 어둠을 밝히고 발원문 낭독 새해 통일 기도, 우리가 시작합니다. 사계절 흘린 땀방울이 통일의 씨앗이 되길 소망합니다. 현장에는 56명, 온라인으로 60명이 참여하여 한마음으로 정성을 모았습니다. 아침 6시, ‘통일 발원문’을 낭독하며 본격적인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차갑고 딱딱한 땅에 이마를 맞대며 올리는 500배는 자신을 낮추는 수행이자, 남과 북으로 갈라진 우리나라를 하나로 잇는 간절한 몸짓입니다. 처음에는 추위에 몸이 꽁꽁 얼어붙었지만, 한배 정성을 다할 때마다 마음속 번뇌는 새벽 공기 속으로 흩어지고 평화를 향한 일념만 남았습니다. 쉬지 않고 절이 이어지는 동안, 저 멀리 남산의 능선 위로 2026년의 첫 태양이 저녁노을처럼 붉게 물들이며 피어올랐습니다. 해돋이 명소의 환호성은 없었지만, 고요한 절터에 남아 있는 초석 사이로 스며드는 첫 햇살은 그 어떤 빛보다 밝았습니다. 유가승 12명이 신라를 지켰듯 이곳에서 흘린 땀방울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소중한 씨앗이 되기를, 새해 첫날 새출발의 마음으로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기도의 염원은 산 너머 떠오르는 붉은 새해와 닮았습니다. 영하 9.9도의 추위를 녹인 평화의 몸짓은 날이 밝도록 이어졌습니다. 국경을 넘나드는 자매의 발원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장에서 특별한 인연을 만났습니다. 집전을 맡은 남울산지회 이순연 님, 온라인으로 참여한 해외지부 호주유럽지회 영국모둠의 이순조 님, 남울산지회 이귀남 님 세 자매입니다. 이들의 통일 기도 정진은 영국에 있는 큰언니 이순조 님이 먼저 시작했습니다. 영국에서 온라인으로 자주 함께해 온 이순조 님의 감회는 남달랐습니다. 지난 2024년 6월 13일, 만인 대법회 참석차 한국을 찾은 이순조 님은 처음으로 동생들과 현장에서 함께 기도했고, 그때의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합니다. 세 자매의 통일 정진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호주유럽지회 이순조 님의 통일 정진 소감입니다. “6.13 만인 대법회 참석을 위해 한국에 왔을 때 동생들과 처음으로 현장에서 기도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우리나라를 위한 기도가 제 마음의 그릇을 키웁니다. 결국 나에게 제일 큰 이로움을 주는 기도입니다. 언젠가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어 통일된다면 어려움에 부닥친 북한 주민들을 도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남울산지회 이순연 님입니다. 영국에 있는 언니가 통일 의병 교육을 받을 당시 사천왕사지 기도에 참여하고 싶다며 온라인 주소를 물었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울산에 사는 동생과 매주 일요일 기도에 동참했습니다. 처음에는 절이 힘들었고, 오늘은 집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긴장했지만, 멈추지 않고 기도하는 도반의 힘과 응원 덕분에 마음이 점차 편안해지고 무사히 행사를 마쳤습니다.” 셋째, 남울산지회 이귀남 님의 소감입니다. “통일 기도를 꾸준히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함께 하는 도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천왕사지에서의 여름은 더위에 지친 동포가 생각나고, 겨울은 추위에 떠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제가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제일 크게 감동했던 때는 작년 8.15 광복 통일 기도입니다. 함께 기도하고 강강술래를 할 때, 통일된 우리 민족이 손에 손잡고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통일의 믿음도 굳건해지고 깨달음도 있습니다. 그때의 감동이 오랫동안 남습니다.” 우린 세 자매입니다. 세 자매는 멀리 떨어져 있어 온라인으로 참여도 하지만, 마음은 하나였습니다. 현장에서는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보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한 목소리로 불렀습니다. 그렇게 모든 정토회원이 하나로 이어져 새해 아침을 맞았습니다. 이들은 사천왕사지 통일 정진을 통해 개인의 수행을 넘어 민족의 미래를 그려갑니다. 손에 손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크게 외칩니다. 정진하는 도반은 서로에게 힘이 됩니다. 현장에는 새로운 정진의 주역도 함께했습니다. 전법 교육 중인 사하지회 서영준 님의 활기찬 새해 다짐을 짧게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날은 어둡고 너무 추웠지만, 절을 하니 해가 떠오르듯 제 마음이 밝아지고 몸과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덕분에 올해도 잘 해낼 수 있다는 긍정의 힘이 생겼습니다. 동참하는 마음, 이제 시작입니다. 어두웠던 주변이 서서히 밝아지고, 어느새 꽁꽁 얼었던 몸이 녹듯, 남과 북의 얼어붙은 관계가 따뜻하게 녹아 함께 웃을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합니다. 1,300년 전의 호국 정신은 오늘날 부울지부 회원과 그 속에서 함께 정성으로 기도하는 세 자매에게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경주 사천왕사지에서 한반도의 새벽을 따뜻하게 밝혔습니다. 이 땅이 하나의 나라로 통일될 때까지 기도는 계속됩니다. 말발굽의 기상이 백두산을 넘고 세계로 향합니다. 올해는 병오년 붉은 말의 해입니다. 달리는 말을 떠올리면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이 연상됩니다. 백두산을 넘어 중국 요동을 지나 넓은 대륙을 내달렸던 기상은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정신 속에 깊이 깃들어 있습니다. 언젠가 철갑을 두른 견고함과 유연함이 문화의 힘으로 찬란히 빛나, 민족의 통일과 동북아의 평화를 넘어 세계 평화를 이끄는 대한민국으로 우뚝 서기를 기원합니다. 글신정순 사진신정순, 이두남 편집황재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