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70년

백중기도

입재 : 7월8일(수) 오전10시 / 회향 : 8월 27일(목) 오전 10시
기도접수 : 7월 1일(수) ~ 8월 29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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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년 프로그램

바라지 전국 모집

2026년 7월 15일(수) ~ 17일(금) / 2박 3일 또는 부분참여
장소 : 정토사회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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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찬 하루, 꽉찬 한달

한 달 농부

참여 기간 : 한 달
모집 기간 : 수시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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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법륜스님과 함께하는

생방송 여름 명상

4박5일 / 7월 24일(금) ~ 7월 28일(화) *한국시간 기준
6박7일 / 7월 24일(금) ~ 7월 30일(목) *한국시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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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을 위한 정토불교대학

정토담마스쿨

2026년 하반기 신입생 모집
마감 : 2026년 8월 4일 / 개강: 2026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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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프로그램 : 도심 속 절캉스 / 1080배 정진 / 명상
장소 : 정토사회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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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오픈!

오늘, 첫 만남 입니다

정토회가 처음인 분을 위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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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행자의 하루

걱정마, 당신과도 잘 지낼게!

이진희 님은 남편 직장을 따라 베트남 하노이 근교 시골 마을에서 5년째 살고 있습니다. 집에서 차로 20분만 달리면 해변에 닿는, 눈앞에 푸른 자연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온라인으로 모둠원을 만날 때마다 잔잔한 미소로 맞이하는 모둠장 이진희 님은 그곳 풍경을 닮아 편안하면서도 생기 넘칩니다. 하지만 늘 평온해 보이는 이진희 님에게도 그 평온함을 얻기까지는 쉽지 않은 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의 스승님 제게 정토회를 소개한 사람은 노희경 작가입니다. 2009년 미용실에 들렀다가 우연히 한 여성지에서 평소 좋아하던 노희경 작가의 ‘나의 스승님’이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글을 읽으며 ‘나도 법륜스님을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정토회를 찾아보았고, 집 근처 일산 가정법당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새벽 정진을 한다는 이야기가 반가워 곧바로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인도 성지순례 중에도, 호스피스 병동에서 아버지를 간호할 때도, 또 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정진만은 놓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걱정마, 당신과도 잘 지낼게 남편은 딱히 취미가 없고 친구도 많지 않아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토회 활동으로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자 남편의 불만도 커졌습니다. 베트남에 오기 전에는 법당 총무를 맡아 저녁과 주말까지 바쁘게 지냈는데, 참다못한 남편이 헤어지자며 집을 나간 적도 있었습니다. 다행이 남편이 회사 업무로 해외 출장이 잦았고, 집에 돌아오면 정성껏 챙겼기에 고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5년 전 베트남에 오면서 갈등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사택에서 함께 생활하다 보니 남편은 오후 5시 반이면 퇴근해 집에 있었고, 평일 저녁과 주말을 거의 함께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교대학 수업과 회의 일정이 제게 큰 부담으로 다가 왔습니다. 즉문즉설 수업이 있던 주말이었습니다. 남편과 집 근처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수업 준비할 생각을 하며 산책에 나섰습니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자고 재촉하자 남편이 화를 냈습니다. “내가 이래서 정토회를 싫어하는 거야” 남편에게 “세 시간만 기다려 줘. 수업 끝나고 같이 놀자”라고 했지만, 남편은 화를 풀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불만을 들어주다 수업 시간을 놓칠까 봐 조급해졌고, 더는 기다릴 수 없어 서둘러 혼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로 남편이 싫어한다면 다음 학기에는 불교대학 진행자 봉사를 잠시 쉬고, 남편이 원하는 대로 100 맞춰 보는 게 좋겠다.’ 이후 지회장의 배려로 한 학기 동안 불교대학 진행자 소임을 내려놓고 남편에게 맞춰 살았습니다. 2024년 하노이 모둠 JTS 거리모금 해보고 안 되면 또 다른 방법이 한 학기가 지난 후, 남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정말 정토회 활동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는 있지만, 활동하는 게 너무 즐겁고 의미 있어. 저녁 회의나 주말 수업도 있겠지만, 그 외 시간에는 당신과 재미있게 잘 지낼게.” 그렇게 진심을 담아 부탁했습니다. 남편은 몇 마디 하더니 허락했습니다. 그 뒤로는 저녁이나 주말에 일정이 생기면 일주일 전부터 언제 무엇을 하는지 미리 이야기합니다. 하노이에서 매월 진행하는 JTS 거리 모금이나 모둠 활동이 있을 때는 남편과 함께 갑니다. 금요일 저녁 회사 버스를 타고 늦은 밤 하노이에 도착하면, 저는 토요일 아침에 나가 봉사에 참여하고 남편은 숙소에 머물거나 주변을 산책합니다. 함께 버스를 타고 오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좋습니다. 활동을 함께 하지는 않지만, 먼 길을 기꺼이 함께해 주는 남편이 든든하고 고맙습니다. 알아보지 못한 상처는 뿌리를 내리고 정토회와 인연을 맺기 전부터 남편과의 관계에는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말하다가도 수시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남자 형제들과 자란 남편에게는 그저 익숙한 말투였지만, 저는 남편이 큰 소리로 말하면 화내는 것 같아 무섭기도 했고, 저를 무시한다고 생각해 화가 났습니다. 남편이 싫어 같이 살고 싶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남편은 제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같은 일이 반복되자 ‘혹시 내게도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전대학을 다니던 때, 에 가 보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상하게도 남편 이야기가 아니라 친정아버지 이야기만 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아버지는 술과 친구를 좋아했고, 보증을 여러 번 서는 바람에 집안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어머니는 양장점을 하며 생계를 책임졌고,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쉴 새 없이 일했습니다. 시골에서는 이웃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속마음을 털어놓기 어려웠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은 맏이인 제 몫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가장이 짊어질 경제적 부담을 대신하면서도 아버지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힘들게 하는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차라리 부모님이 이혼하면 마음이 편할 것 같기도 했습니다. 두 분이 싸운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볼 때면 너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아버지를 못마땅해하며 제게 흉을 보던 어머니의 모습은 제 안에 상처로 남았지만, 그때의 저는 그것이 상처인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2023년 아시아지회 회원의 날 잘못한 사람은 없다 에서 법사님이 “아버지가 그래서 어쨌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이진희 님에게 뭘 잘못했다는 건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저에게 잘못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나는 한쪽 이야기만 듣고 엄마 편만 들었구나. 아버지를 이해해 보려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구나’ 하는 생각에 미움은 온데간데없고 참회의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한순간에 달라진 제 마음이 놀랍기만 했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가 막내 여동생을 무릎에 앉히면 괜히 싫었는데, 그 마음은 저 역시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아차렸습니다. 나눔의 장에서 30여 년간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풀리자 아버지에게 미안했고, 평생 감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남편이라는 거울에 아버지를 비추고 그로부터 1년쯤 지난 뒤, 아버지에게 편지를 받았습니다. 교회 ‘아버지학교’에서 받은 과제로 맏딸인 제게 처음 쓴 편지였습니다. 편지의 첫 문장은 “제일 미안한 사람에게 편지를 쓰라고 해서 우리 큰딸에게 쓴다.”였습니다. 편지를 읽으며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눔의 장에서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풀어낸 뒤 편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친구를 좋아해 가정을 충분히 돌보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특히 저에게 더 잘해 주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고 썼습니다. 저는 곧바로 “아버지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저희를 잘 키워 주셔서, 그리고 엄마 곁에 계셔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긴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날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너, 아버지한테 뭐라고 보냈니? 아버지가 지금 울고 계신다.”라고 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아버지와의 관계가 남편과의 관계에도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남편은 저를 이해시키려다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가 커졌는데, 저는 그 이유는 보지 못한 채 큰 목소리만 서운해하고 미워했습니다. 엄마를 힘들게 했던 아버지의 말투나 모습이 남편에게서 보이면, 어릴 적 아버지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남편에게 쏟아냈습니다. 그동안 남편이 제 감정을 받아 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그렇게 미웠던 남편에게 미안했습니다. 2024년 베트남 모둠원들과 평화서원 영상 촬영 가장 화 났을 때 보지 못한 밑마음 불교대학 진행자 소임을 맡았을 때의 일입니다. 법문도 꼬박꼬박 듣고 수행 연습도 빠짐없이 했습니다. 수행 연습 과제로 ‘가장 화가 났던 일’을 써야 했는데, 예전 일을 떠올리기 싫어 과제를 미뤘습니다. 그러다 문득 시아버지의 중풍으로 힘들어하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매주 30분 거리의 시댁에 가서 부모님을 돌봤습니다. 부모님 식사를 챙기는 것도 쉽지 않았고, 주말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야외에 놀러 가고 싶은 마음에 괜히 남편에게 툴툴댔습니다. 그때 남편이 “내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라고 했는데,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자기 부모님 일인데 나보고 힘들다고? 그럼 나는?’ 이라는 생각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닫은 채 며칠 동안 남편을 미워했습니다. 수행 연습을 하며 그일을 다시 떠올리니 ‘젊은 가장으로서 병든 부모님의 아들이자 어린 아이들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남편의 어깨가 참 무거웠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외롭고 안쓰러운 남편을 따뜻하게 받아주지 못했던 제가 떠올라 목이 메고 눈물이 났습니다. ‘그동안 내 고집대로 나만 생각하며 사느라 힘든 남편을 보지 못했구나. 내가 그렇게 돌아보기 싫어했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수행연습 과제를 하며 그동안 외면하던 제 밑마음을 마주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이번 학기에도 경전대학 돕는이 소임을 맡아 기쁜 마음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붓다의 길 나눔의 장, 명상수련, 바라지 봉사와 법당 활동 경험은 온라인 활동이 대부분인 베트남에서도 꾸준히 수행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여름과 겨울 온라인 명상 기간에는 한국 일정을 맞춰 새벽 2시에 일어나는 일도 어렵지 않습니다. 처음 베트남에 왔을 때는 1월이라 춥고 흐린 날이 이어졌고, 습도까지 높아 적응이 쉽지 않았습니다. 날씨를 탓하지 말고 그냥 웃자.’라며 수행 삼아 지내 보았습니다. 햇살이 잠깐이라도 비치면 참 반가웠습니다. 베트남에서 이렇게 햇살을 기다리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늘 햇볕이 쨍쨍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안다고 생각했지만 아는 것이 아니었구나.’ 더는 내가 옳다고 고집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모든 괴로움이 제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 불편한 일이 생겨도 예전만큼 힘들지 않습니다. 주어진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니,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온 것들이 사실은 모두 고마운 것임을 압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저를 도와주는 보살입니다. 부처님 법을 만나 도반들과 함께 붓다의 길을 걸어갈 수 있어 오늘도 든든합니다. 2025년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입재식 글을 쓰고 다듬느라 기사를 수십 번 읽었습니다. 저 역시 남편과의 갈등을 겪었기에 이진희 님의 이야기가 더욱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나는 과연 남편 앞에 무릎을 꿇고 부탁할 수 있을까? 따뜻한 말을 건넨 적은 있었을까?…’ 하고 돌아보니 아쉬움이 컸습니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 남편에게 “오늘 수고 많았지.”라는 말을 건넬 수 있었고, 그 안에서 작은 희망을 보았습니다. 글 윤은주 희망리포터 편집곽도영

아시아지회 2026.07.08. 1,471 읽음

정토행자의 실천

나라를 위해 자신의 심장을 터트린 젊은 영웅을 찾아_천안지회 현충일 역사 기행

유독 높고 청명한 6월 현충일 아침, 천안지회 도반들은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으로 향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삶을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대전충청지부 지회 단위로는 첫 역사 기행입니다. 목적지는 윤봉길 의사 생가지와 사당, 기념관이 모여 있는 덕산면이었습니다. 이른 시간에 방문객은 많지 않았고, 주차장 옆 태극기가 바람에 조용히 흔들렸습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비 오늘 이곳을 찾은 이유 10시가 되자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나타났습니다. 실천활동담당 김순자 님에게 이 자리를 마련한 사연을 물었습니다. 천안지회는 천안에서 서천까지 넓은 지역에 퍼져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교과서에서 스쳐 가듯 배우는 독립운동가잖아요. 반면 사람들은 그의 정신, 농촌 계몽운동 등은 잘 모릅니다. 이번 기회에 더 자세하게 알면 좋겠다는 취지로 시작했습니다.“ 천안 주변에는 이순신, 유관순, 김시민, 이동녕, 홍대홍 등 걸출한 인물이 많습니다. 누구나 윤봉길 의사를 잘 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모른다는 것이 이번 여행의 출발점이며 예산군 덕산면을 택한 이유입니다. 월진회 회원 해설사, 정토회와의 인연 첫 마음 나누기를 마칠 무렵, 월진회 회원인 해설사 김선자 님이 도착했습니다. 월진회는 윤봉길 의사가 직접 조직한 농촌 개혁단체입니다. 여기서 해설하는 동안 정토회 회원들이 많이 다녀갔어요. 그래서 저도 법륜스님 팬이 됐습니다. 웃음 섞인 말 한마디에 회원들의 어깨가 풀렸습니다. 아이랑 같이 오신 사람은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는 그냥 두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듣고 갑니다. 해설사의 말 속에는 아이도 어른도 각자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가져갈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충의사 앞에서 숭고한 희생과 용기를 기리며, 감사의 마음을 담아 묵념하는 천안지회 회원들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세 개의 문과 계단을 지나면 충의사가 나타납니다. 법의 법사님이 대표로 향을 올리는 동안, 도반들은 고요히 묵념했습니다. 배용순 여사 무덤 앞에 있는 분수 연못 충의사 옆문을 나서는 길에 분수 연못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앞이 배용순 여사의 무덤입니다. 해설이 조용히 이어지는 가운데, 발걸음을 잠시 멈췄습니다. 남편과 따로 모셔진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남편 사당이 여기 있으니 내가 잘 지키겠다라는 유언을 남겼거든요. 남편을 먼저 보내고, 곁에서 지키겠다고 다짐한 여인. 잘 깎인 봉분이 말없이 그 아픔을 대신하는 것 같습니다. 기념관 안에서, 독립운동가 이전에 농촌 계몽가였다. 장부출가생불환, 윤봉길 의사가 집을 떠나면서 남긴 유서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자, 정면을 가득 채운 글자가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장부출가생불환 ’ 은 장부가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김선자 님은 전시된 대들보 앞에 서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울림 때문인지 목소리가 한층 커졌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독립운동가로 알려졌지만, 이전에 농촌계몽 운동가였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오치서숙이라는 서당을 찾아 한학을 공부했어요.“ 어느 날 윤봉길은 공동묘지에서 여러 개의 묘표를 손에 들고 헤매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글을 읽지 못해 아버지 무덤을 찾지 못한 청년은 누군가에게 물어볼 생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그 장면이 윤봉길 의사를 바꿨습니다. 무지가 나라를 잃게 한 원인이라 생각하고, 지식과 깨어있는 의식이 없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부흥원 상량문이 적힌 대들보 사연은 충의당 사랑방 야학으로 이어졌습니다. 작은 촛불 하나로 시작한 배움의 자리는 점차 커져 부흥원 건립으로 계승되었습니다. 대들보 상량문에는 당시 관례이던 일본 연호 대신 단기 조선 개국 4,261년이라고 써넣었습니다. 이런 부분도 윤봉길 의사의 대범함이 느껴지지요. 해설사의 말에 회원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듬해 윤봉길은 농촌 개혁운동 단체인 월진회를 조직했고 지금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소녀와 기념관 영상 1932년 4월 29일 도시락 폭탄을 들고 농촌계몽만으로는 진정한 행복이 이어질 수 없다라고 판단한 윤봉길은 거사를 택합니다. 떠나기 전 아내 배용순에게 물 한 잔을 부탁했지만, 차마 얼굴을 보고 떠나기가 힘들어, 그냥 집을 나섰습니다. 그가 남긴 문장, 장부출가생불환에 모든 결의가 담겨 있습니다. 한인 애국단에 입단 후 찍은 윤봉길 의사 사진과 해설사 윤봉길은 예산군 삽교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 칭다오로 건너간 후, 장사하며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일왕 생일날 일본군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상해사변 전승식을 거행한다는 첩보를 입수합니다. 김구 선생을 만나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고, 김홍일 장군이 주선한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을 지니고 단상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폭탄은 정확히 떨어졌고, 윤봉길 의사는 그 자리에서 체포됩니다. 5월 25일 사형 선고, 같은 해 12월 19일 아침 미간에 총을 맞고 순국했습니다. 향년 스물다섯이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묶였던 형틀과 처형당하는 모습 이 일이 있고 중국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 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라고 말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파장은 훗날 카이로 회담까지 이어집니다. 설명을 끝내자, 주변이 잠시 고요해졌습니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지만 기념관에서 들으니 그 시절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14년 동안 사람들이 밟고 다니다 해방이 되고 윤봉길 의사 유골을 수습하고자 김구 선생님이 수습단을 꾸렸는데,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수소문 끝에 당시 교도소 간수였던 분의 협조를 얻어 위치를 찾았는데, 공동묘지 입구 계단 밑에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매장했다는 거예요. 14년 동안이나 사람들이 밟고 다녔다는 거지요.“ 말이 끊긴 자리에 침묵이 내려앉습니다. 아직도 손뼈 7개는 수습하지 못한 채 일본 암장지에 있습니다. 지금은 서울 효창공원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으며, 예산군 덕산면과 서울, 중국 상하이에 기념관이 있고, 일본 가나자와 공동묘지 입구에도 기념비와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많은 나라에 흩어진 그 흔적들이, 윤봉길 의사의 삶이 얼마나 넓은 세상에 큰 울림을 주었는지 말해줍니다. 저한당·광현당, 그리고 도중도에서의 점심 기념관을 나와 약 300m를 걸으면 저한당과 광현당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건지겠다는 신념을 품고 사람들과 함께 글을 읽던 작은 초가집 해가 잘 드는 마당을 둘러보며, 아직도 글 읽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저한당과 광현당 도중도는 삽교천 상류의 물길이 바뀌며 생겨난 섬 안의 섬입니다. 회원들은 그늘에 자리를 잡고 점심 공양을 함께 했습니다. 그동안 들은 윤봉길 의사 이야기를 떠올리며 복습 겸 퀴즈 게임을 펼쳤습니다. 무엇보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6월 현충일이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저물어갑니다. 도중도 다리 도중도 다리에 새겨진 글귀 함께 걸었기에 지회장 박은숙 님에게 오늘 역사 기행의 의미를 질문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오프라인으로 만나는 기회가 많이 줄었어요. 모둠 활동으로는 만나지만, 지회 단위로 함께하는 시간은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자리가 더없이 소중합니다. 온라인이 너무 익숙해진 지금, 이렇게 자주 만나고 즐겁게 지내다 보면, 더 많은 분이 자연스럽게 함께하지 않을까요.“ 정토회 일정이 워낙 촘촘하고, 오랜 온라인 생활이 몸에 밴 탓일까? 소수의 참여 인원으로 시작한 발걸음이 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역사 기행은 함께 걸으며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이야기를 듣고, 같은 감동을 나누는 경험이 되고 그것이 쌓이면서 지회는 단단해지고, 도반의 의미는 더욱 깊어집니다. 그 평화가 지금 우리에게 닿아 있다 윤봉길 의사의 생을 따라 걸으면 한 가지 선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폭탄을 던진 사람이기 전에, 글을 모르는 이웃을 보며 마음 아파하던 청년이었습니다. 지식으로 사람을 깨우고, 깨어난 사람들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야학을 열고, 작은 초가집에서 함께 글을 읽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이 윤봉길 의사를 거사로 이끌었고, 그의 희생이 임시정부를 살리고, 카이로 회담에 영향을 미치고, 평화의 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 어록 탑 윤봉길 의사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글을 읽고 서로 알아볼 수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그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사는 곳입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많은 이들의 헌신 위에 우리가 누리는 평화가 있습니다. 그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기억하고, 이어가는 것이 우리가 현충일에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 될 것입니다. 내년 현충일에는 더 많은 도반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싶습니다. 글, 사진김종호 편집여수연

통일 2026.07.10. 367 읽음

정토불교대학

삶을 바꾸는 공부
정토불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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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체득하는
정토경전대학

※ 정토불교대학 졸업 후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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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생 이야기

우연히 찾아온 정토불교대학과의 만남

윤정숙 님 - 2018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지금까지 남보다 더 가지고, 더 빛나고, 더 잘 입고, 더 잘 살기 위해 살았는데, 어느 날 문득 이게 무슨 큰 의미가 있나? 싶었죠. 우연히 친구와 얘기하다가 알게 된 정토불교대학.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삶의 기준점을 찾고 싶어 입학하게 되었지요. 집착과 이기심이라는 어리석음으로 내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지금은 주변의 모든 것에 감사하며 제 삶에 만족해요.

부부에서 도반으로

이용준·김서화 님 - 2019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부부의 인연으로 만나 이제는 도반으로 서로 힘이 되어 주고 있어요. ‘아내는 이러한 사람’, ‘남편은 이러한 사람’라는 고정관념이 내 삶을 고단하고 힘들게 만들었음을 불법공부를 통해 알게 되었어요. 잘 풀리지 않는 부분도 법문을 들으면 해소가 되고 처방전을 받은 듯 시원해요.

이혼소장을 멈추게 한 정토불교대학

최영미 님 - 2015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13년 내내 총성없는 전쟁과 같았던 결혼생활. 이혼장을 쓰던 중에 정토불교대학 입학홍보문자를 받게 되었어요. 남편과의 싸움은 제 인생의 풀지 못하는 숙제 같았는데, 그게 해결되니까 풀지 못하는 숙제가 없어졌어요. 제가 변하고 나니 남편이 불교대학 홍보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