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새길

정토불교대학

학사일정 : 2026년 9월 20일(일) ~ 2027년 1월 30일(토)
접수마감 : 2026년 9월 3일(목)
자세히 보기

외국인을 위한 정토불교대학

정토담마스쿨

2026년 하반기 신입생 모집
마감 : 2026년 8월 4일 / 개강: 2026년 8월 27일
자세히 보기

불기 2570년

백중기도

입재 : 7월8일(수) 오전10시 / 회향 : 8월 27일(목) 오전 10시
기도접수 : 7월 1일(수) ~ 8월 29일(토)
자세히 보기

군청년 프로그램

바라지 전국 모집

기간 : 2026년 8월 / 1박 또는 2박 또는 부분참여 가능
장소 : 정토사회문화회관
자세히 보기

2026 청년 직장인 출가

청년붓다 8기

기간 : 8월 1일(토) ~ 8월 19일(수)
장소 : 정토사회문화회관
자세히 보기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프로그램 : 도심 속 절캉스 / 1080배 정진 / 명상
장소 : 정토사회문화회관
자세히 보기

페이지 오픈!

오늘, 첫 만남 입니다

정토회가 처음인 분을 위한 안내서
자세히 보기

정토행자의 하루

남을 살리려는 마음이 나를 살렸습니다

정토회 직능 모임 중에는 의료인정토회가 있습니다. 의료 현장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과 마주하며 수행을 이어가는 분들입니다. 환자를 진료하고 돌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고통을 덜어주는 일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 노력하는 의료인정토회 회원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들의 수행과 삶, 그리고 인연의 여정을 담고자 특집을 기획했습니다. 의료인의 다양한 경험이 의료인 도반들에게 용기를 붇돋우고, 더 많은 의료인이 수행자의 길에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분노하고 폭발하는 업식 아버지는 19세 어린 나이에 ‘군함도’에 징용되었다가 그곳에서 해군으로 파견되어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 트라우마 때문인지 아버지는 거의 매일 술에 취해 지냈습니다. 지독히 가난한 시골에서 저는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주걱만한 큰 숟가락을 가슴에 품는 태몽을 꾸고 저를 낳았다는데, 그 때문인지 제가 태어나고부터는 밥이라도 제대로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자주 말했습니다. 저는 매사에 솔선수범하고 학업 성적도 좋아 “뭐가 돼도 될 사람”이라는 주변의 기대와 칭찬을 받으며 어엿한 청소년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에서 누군가에게 둘러싸여 매를 맞고 있는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누가 때리는지 몰랐는데, 그게 친척들인 것을 알고 너무나 놀라고 심장이 떨렸습니다. 문중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가 친척들에게 맞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 자신에게 큰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그날의 충격은 제 마음속에 뜨거운 불덩이처럼 남았고, 그 속에 갇혀 가끔씩 폭발하고 분노하는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오용태 님.right 그럼에도 따뜻한 가족이 있어 삐둘어진 마음을 어르고 달래며 성공의 꿈을 키워갔고, 반드시 성공해서 저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자꾸 화가 났습니다. 마음속에 눌러놓은 분노와 열등감을 들킬까 두려워 불안을 안고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어른이 된 뒤에도 마음속 울렁거림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운 좋게도 저를 편안한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한 사람을 만나 결혼하였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도 태어났습니다. 불안하던 제 삶에도 서서히 단비 같은 편안함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진짜가 나타났다 서초동에서 학원을 운영하며 단란한 가족 울타리 안에서 마음속 울렁임이 잦아들 즈음, 아내의 권유로 가족의 49재에 참여했다가 한 스님을 만났습니다. 성치 않은 한복에 흰 고무신을 신고 홀연히 나타나 법문을 해주는 그분은 막 출가한 듯한 젊은 스님이었습니다. 스님의 투명한 눈빛에서는 당당함과 따뜻함이 느껴졌습니다. 저를 위한 법문이 아니었음에도 법문을 듣는 내내 제 모습을 비추어볼 수 있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기를 살고 있다고 착각했는데, 빠른 성공과 출세를 좇아 조급하게 살고 있는 것이 당시 제 진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굴레에서 벗어나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그전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이었습니다. 마음을 깊이 흔들어 제 정체성과 정신마저 뒤흔들어놓고는, 친필 사인이 담긴 책을 주면서 불교 공부를 계속하라고 권하고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제 인생 최고의 선물인 법륜 스님, 그리고 정토회와의 첫 만남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날 저는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아내에게 “여보 나 마음이 참 편안해졌어. 젊은 스님이 완전 큰스님 같은 법문을 하시네. 저 스님은 진짜야. 우리 이번 생은 저 스님만 따라다니자”라고 말했고, 아내 역시 제 말에 격하게 공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그게 당연한 최선이라 여기며 살아갔습니다. 스스로를 해치는 독인 줄도 모르고 그런 일상을 살아내던 중,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건강 회복을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다 ‘중국으로 건너가 한의학을 배워 스스로 고쳐보자’는 결심을 했고, 다른 삶에 도전해보기로 하였습니다. 평화리더쉽아카데미 8기 기념 사진 ‘우롱타이’ 그리고 ‘스님’ 가족의 응원을 받으며 떠나온 중국 유학길이었지만, 성치 않은 몸에 유학생이라고 하기엔 좀 늦은 나이였습니다. 성공을 향한 마음이 앞서 저는 또다시 조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욕구와 결핍은 학업에 열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성적은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습니다. 성실하고 유연한 태도로 교수들에게 인정받으며 앞날이 창창한 ‘우롱타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중국에서 맺은 인연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지도교수에게 “중국에서 교수로 자리 잡는 건 걱정하지 말고 넌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라”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학생활이 안정될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헛헛했습니다. 잘못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한과 살면서 저지른 실수에 대한 기억과 원망, 증오, 불안, 좌절 등이 밀려왔습니다. 겉으로는 자리가 잡혀가는데, 실제 제 마음은 안정과는 다른 끝을 향해 달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때 이런저런 핑계로 미뤄오던 깨달음의 장에 다녀오기로 결심하고, 깨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인생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성공만을 목표로 삼던 삶에서 벗어나 욕심 없이 살겠다는 의지를 굳게 다지며 베이징으로 돌아왔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깨장에 참여했다가 새털처럼 가벼워진 마음으로 베이징 정토법회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법회라고 해봐야 TV를 통해 스님의 법문 비디오테이프를 함께 본 뒤 나누기를 하고 공양을 하는 게 전부였지만 집에서 법회를 진행하며 마음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 혼자 법회를 하는 날도 있었지만, 어떤 날은 한 명 또 어떤 날은 여러 도반과 함께하며, 행복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함께하는 마음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통일의병 53번으로 활동 중에 법륜 스님은 베이징에 방문하실 때마다 “호텔에서 숙식하는 게 불편하다”며 좁고 지저분한 제 하숙집에서 머물기를 청하셨습니다. 스님이 오신다는 연락을 받으면 저는 부랴부랴 집으로 가서 이부자리를 개고, 미뤄둔 설거지를 하며 집안을 정리했습니다. 그 무렵에는 스님이 한 달에 한 번꼴로 집에 오셨는데, 그때마다 집을 치우면서 법륜 스님이 오실 때와 평소 모습의 차이가 커서 스스로 부끄러웠습니다. 스님 앞에서 한껏 지식 자랑을 하고 있을 때 스님의 촌철살인 한마디에 깨닫기도 하며, ‘앞으로도 스님께 항상 점검받는 마음으로 생활해야 하니, 이 기회에 나도 스님처럼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저의 생활이 달라지자 학교에서는 나이 어린 친구들이 저를 ‘스님’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저 한 생각이 나의 운명을 바꾸다 정토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인연도 깊어졌습니다. 어느 날 중국 공안에 잡혀 있는 탈북자 10여 명의 안부를 확인해달라는 정토회 실무자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는 곧장 낡은 배낭을 챙겨 메고 톈진에 있는 국가보위대로 향했습니다. 만약을 위해 다음 학기 학비로 준비해둔 250만 원 정도의 돈도 챙겼습니다. 그러다 문득 한국에 있는 아내와 세 살짜리 아들이 떠올랐습니다. 탈북자를 돕는 활동가로 중국 공안에 알려지면 교수가 되기 위한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은 물 건너가고, 최악의 경우 한국으로 추방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이 엄습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내 ‘만일 내가 지금 그들이라면 어떨까?’, ‘그때 세상 사람들이 나와 내 아이를 외면하면 얼마나 서글플까?’라는 생각을 하며 용기를 냈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은 시간이 꽤 많이 지난 지금도 상세히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그때의 저는 그곳에 갇힌 분들을 무사히 구해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원하던 결과를 얻긴 했지만, 그 뒤에는 반갑지 않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기 전이던 중국은 5가구 감시제가 살아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2박 3일간 국가보위대에 갔다 돌아오니, 누군가 제 집에 들어와 뒤졌는지 현관문이 부서진 채 열려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저는 이전의 촉망받는 ‘우롱타이’가 아닌 감시받는 ‘미운오리새끼 오용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정부와 학교의 감시와 왕따 등 노골적으로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고,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노력하며 매 순간을 모면하고자 하였으나 한번 찍힌 이상 더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 자리는 제가 가야죠” 중의과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베이징에 오신 법륜 스님이 제게 앞으로 진로를 물었습니다. 당시 저는 스스로 최고 실력을 갖춘 의사라고 믿고 있었고, 세상에 제가 고치지 못할 병은 없을 거라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발급된 중의사 면허는 한국에서 인정받지 못하기에 사실상 무용지물이었고, 국가보위대에 찾아간 일로 중국 정부에 찍혀 중국 내 입지도 불안정한 처지였습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스님이 갑자기 진로를 물으니 왠지 모를 오기가 발동해 “술장사나 하면서 살랍니다”라는 답을 내놓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어처구니없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동안 행복한 수행자의 삶을 산다고 해놓고,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산다고 해놓고, 법륜 스님의 삶을 존경하며 닮아간다고 해놓고 그런 말을 하다니 스님은 그때 제 마음을 알아차린 듯 뜻밖의 제안을 했습니다. 5년 전에 인도에 지어놓은 병원이 있는데 환자는 많지만 돌볼 의사가 없고, 인도 정부에서도 외면하는 지역이라며 그곳에 가서 진료 봉사를 해보지 않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스님, 그런 자리는 제가 가야죠”라고 답했습니다. 그렇게 2006년, 의사로서 제 인도 생활이 시작됩니다. 지바카 병원 제1호 의사가 되다 2006년 5월 정토회 인도 자원활동가 중 의료팀으로는 처음으로 제가 인도 땅을 밟았습니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폭염에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보드가야로 향했습니다. 목적지인 수자타 아카데미 옆 지바카 병원에 도착하고 보니 그곳이 바로 부처님께서 6년 동안 고행을 하셨다는 그 유명한 둥게스와리입니다. 유영굴을 지나 부처님께서 오르셨다는 전정각산 돌산 위에 올라 아래로 펼쳐진 마을을 보면서 평화로움을 느꼈습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찾아오는 이들은 결핵환자가 다수였고, 그것도 내성이 생겨 치료가 쉽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바카 병원에서 기르던 개 ‘검둥이’가 코브라에 물린 일이 있었습니다. 몸에 독이 퍼지면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고통스러워하는 검둥이에게 어떤 처치라도 해주고 싶어 침을 놔줬습니다. 그랬더니 검둥이가 정신을 좀 차리는 것 같았고, 이내 다시 의식을 놓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죽었습니다. 검둥이를 살리지는 못했지만, 이를 통해 저는 침술이 의식을 깨우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깊이 체감했습니다. 쁘리앙카지 마을 방문 중에 사람들과 스물대여섯 살이지만, 겉모습만 보면 중년 여성처럼 보이는 결핵환자가 있었습니다. 병원 진료를 아주 오랜만에 왔고, 그동안 약도 잘 먹지 않아 상태가 나아지지 않는다 생각하여 자주 병원에 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타박하며 보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그 환자가 심근경색으로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그 여인은 남편과 시아주버니가 돌아가셔서 친자식과 조카를 포함해 23명의 아이들을 돌보며 힘들게 살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신 게 나의 꾸지람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죄책감이 밀려왔고, 환자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심리적으로 굉장히 위축되었습니다. 인간의 생명력이 강인하지만 동시에 참 약하다는 것을 깨닫고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며 연구하였고, 진료만큼이나 환자의 삶에 대한 이해를 우선으로 했습니다. 환자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 소통한 결과 제가 결핵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기회로 삼아 결핵에 효과가 좋은 한약 처방을 찾아내는 기쁨도 맛보았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결핵으로 고생하고 있는 둥게스와리의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며 그들이 건강해지는 것을 지켜보니, 모든 존재가 다 이어져 있다는 부처님의 연기설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행복을 배워야겠다 인도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더위에 익숙해지는 일이었습니다. 병원의 진료 체계는 안정이 되어갔지만, 4244℃까지 치솟는 기온에는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습니다. 하루에 아홉 번 열 번씩 물을 몸에 뿌려봐도 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음까지 지쳐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았습니다. 칭찬에는 기분이 좋아지다가 누가 불만을 표현하면 금방 분노가 끓어오르곤 했습니다. 어느 날 동료의 실수로 치료실 문이 잠기면서 저 혼자 그 안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 진료실 유리창을 깨고 탈출하여 주변 사람들을 많이 놀라게 했습니다. 그 후로 새벽마다 500배 정진을 했지만, 원망하는 마음과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인도에 온 지 3개월이 지났을 즈음 거울을 보니 그 속에 비친 제 모습이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몸은 깡마르고, 얼굴에는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쳐보겠다고 인도까지 와서 진료했건만 정작 뒤돌아보니 그들은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가진 것에 감사하고 매일 방긋방긋 웃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저보다 더 잘살고 있는 사람들을 고치겠다는 생각 자체가 기고만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 속에서 오히려 저 자신은 행복하지 않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때 비로소 스님이 왜 저를 이곳에 보내셨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 내가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 여기로 오게 됐구나’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그래, 행복을 배워가야겠다.’ 소를 타고 노는 동네 아이들 모습 그때부터 저는 그들과 똑같이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동네 일곱 살 꼬마가 소똥을 주물러 벽에 바르다가 저를 보고는 손을 들어 ‘나마스떼 브라더’라고 인사하며 환하게 웃습니다. 행여라도 반갑다고 소똥이 묻은 채 저에게 달려들어 안길 것을 걱정하여 가까이 가지는 못하지만 저는 똑같이 손을 들어 인사했습니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만나는 사람마다 환한 웃음으로 인사하는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무엇에든 ‘상을 짓지 말라’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돌아보면 미운 사람 투성이지만 내가 행복을 배우겠다고 결심한 이상 일곱 살 꼬마가 저에게 보낸 환한 미소처럼 동료들에게 상냥하게 인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 날부터인가 동료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밉기만 하던 그들이 저와 함께 동행하는 귀한 존재로 보였고, ‘인도에 의사가 없어 힘든 스님을 돕기 위해 내가 기꺼이 스님의 제안을 수용했다’는 오만방자한 마음에서 ‘내 꼴을 보고 스님이 나를 살리기 위해 기회를 주었다’는 마음이 보였습니다. 모든 것은 나로 시작해 나로 돌아오는 이치를 깨닫고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뾰족뾰족하던 제 성격도 둥글어지고, 매사에 겸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한층 성숙해졌습니다. 또 다른 소임으로 쓰이다 2007년, 지바카 병원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처음에는 인도에 길게 남아 의술을 전할 생각이었지만, 아내와 자식이 있는 상황에서 그 결심을 끝까지 이루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정토회 회원 중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교류하여 의료팀을 구성하고 소임을 이어갔습니다. 입재식에 참여하러 온 정토회원들을 돌보며 그 소임 속에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러다 한국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중의사 면허를 가지고 환자를 돌본다는 것이 혹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의료인 소임이 아닌 또 다른 소임을 찾게 되었습니다. 소똥으로 연료를 만드는 아이 이후 평화재단의 리더십아카데미 활동, 초창기 통일의병 창립과 교육본부장으로서 소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의 기초를 다지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은 일상으로 돌아와 재가 수행자로서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의사로서 사람 목숨을 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그 안에는 인도에서의 경험, 스님의 말씀, 정토회와의 모든 인연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지금에야 과거를 돌이켜보니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제가 너무 분석하고 계산하며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추진력 있게 일을 해나가다가도 문제가 생기면 멈춰버리는 게 저라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언젠가 묘덕 법사님이 수행을 멈칫거리는 사람들에게 ‘안 가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가는 만큼 내게 유리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정말 운 좋게 법륜 스님 그리고 정토회와 인연이 닿아 남들은 경험해보지 못한 많은 일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때론 가시밭길이라 느껴지는 외로운 길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걸어온 그 길은 걸어온 만큼 저에게 유익했습니다. 이미 일어난 모든 일은 다 좋은 일이었습니다. 한번 맺은 정토회와의 인연으로 언제든 돌아갈 것이고, 그 자리가 제일 행복한 자리라고 믿습니다. 이 글은 2026년 1월 호에 수록된 의료인정토회 특집입니다. 글오용태 편집월간정토 편집팀

월간정토 2026.08.03. 188 읽음

정토행자의 실천

무비판적 순응에 희생된 수많은 이웃, _ ‘순이 삼촌’을 기억하며 _2026년 6월 제주 4·3 평화역사 기행

2024년, 제주 4·3의 역사 속으로 평화 기행을 다녀온 후, 이 역사를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2년 후 현충일을 기해 3일간의 여정으로 다시 ‘제주’로 향했습니다. 역사 기행 전부터 준비팀에 합류하여 사회자의 진행 글을 작성하며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역사 기행 날이 다가와도 막상 사전 학습 도서, 현기영 작가의『순이 삼촌』을 읽는 것은 자꾸만 미뤘습니다. 잔인한 역사를 마주하며 그 슬픔을 느끼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제주 공항에 도착하여 회원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그 마음은 한결 밝아졌습니다. 첫 번째 장소 관덕정으로 이동하며 비로소 역사 기행이 시작되었음이 실감 났습니다. 안내를 맡은 법음 법사님은 역사 이해를 위해 사건의 배경과 진행 과정을 알고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라고 당부하듯 말했습니다. 이번 기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조천읍 북촌리’에 위치한 ‘너븐숭이 4·3 기념관’과 그 주변 일대입니다. 북촌리는 제주 4·3 사건 당시 하루에 400500여 명의 마을 주민이 학살당한 단일 마을 가운데 가장 큰 희생이 발생한 곳입니다. 기념관에는 피해자 증언을 바탕으로 그려진 여러 그림과 강요배 화백의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사진 자료가 거의 남지 않아 이러한 기록들은 더욱 귀중했습니다. 천명, 하늘의 울음 너븐숭이 4·3 기념관에서 제주 4·3 사건의 유족인 이상언 해설사의 설명을 통해 희생의 규모와 그 아픔을 더욱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희생자들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하면서 그들은 단순 희생자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실제 처절했던 한 시대의 삶을 살아 내었던 사람들이었음을 가슴 깊이 느꼈습니다. 기념관을 나온 뒤 마을 길을 걸으며 소설『순이 삼촌』의 배경이 된 장소와 북촌 초등학교 등 희생자들의 터까지 둘러보았습니다. 삼촌은 여인이다. 소설 중에서 순이 삼촌 기념비 제주 4·3 사건으로 희생된 제주 도민이 약 3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에 해당합니다. 해설사가 일일이 그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 3시간이 넘도록 호명과 해설이 이어졌습니다. 그때의 모습은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둘째 날은 아침부터 서둘러 제주 동쪽의 ’광치기 해변‘으로 이동했습니다. 아름다운 성산 일출봉이 보이는 이곳 역시 무고한 주민 400여 명이 군경 토벌대와 서북 청년단에 의해 집단 학살당한 장소입니다. 광치기 해변과 성산 일출봉 성산 일출봉은 여러 차례 여행 왔던 곳이지만, 재작년 역사 기행에 참여하기 전까지 이러한 아픔이 있음을 전혀 몰랐습니다. 더욱이 올해는 기행의 사회자 역할에 집중하니 현장의 느낌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기원하는 평화 발원문을 두 사람이 낭독하고, 한 사람의 목소리가 떨리며 끝내 울음을 참지 못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우리는 제주 4·3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억울하게 희생된 모든 생명과 오랜 세월 슬픔을 안고 살아온 유가족들의 아픔을 깊이 새깁니다. 두려움과 혐오, 침묵과 폭력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게 만들었고, 결국 제주라는 이 섬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오늘 제주의 아픔 앞에서 개개인의 삶을 돌아봅니다.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하며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대화와 이해로 갈등을 풀어가는 삶을 살겠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 국가 폭력과 전쟁, 증오와 학살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발원합니다.” 그 순간, 제주 동쪽의 바다는 더 이상 아름다운 풍경으로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희생자는 3만 명이지만, 그들의 유족은 몇 명이며, 또 그 유족들의 가족은 얼마나 많을까요…… 다시 왜?라는 질문을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이 살육의 피해를, 입어야 했던 이유는 끝내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외에도 기억에 남는 특별한 순간이 있습니다. 4·3 평화 공원에 안치된 행방불명인 묘역에서 명상할 때입니다. 행방불명인 묘역 흐린 하늘 아래를 걷고 있는데, 묘지 위에 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앉았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가도 날아가지 않는 그 까마귀는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습니다. 그때 법사님이 명상을 제안했습니다. 잠시 당황했지만, 자리를 찾아 묘지를 등지고 산을 바라보며 앉았습니다. 눈을 감고 몸으로 들어오는 감각에 집중했습니다. 새소리가 들리고 숲의 향기가 느껴졌습니다. 숨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몸이 커졌다가 작아지는 듯했습니다. 여러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내 알아차렸습니다. 명상하는 모습 어느새 이곳이 특별한 장소라는 생각마저 사라지고 고요한 순간이 한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명상이 언제 끝났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눈을 뜨자 구름이 걷히고 햇살은 따뜻이 묘역에 내렸습니다. 그 밝음에 모두가 탄성을 지르며 기뻐했고, 누군가는 희망을 얘기했습니다. 아픈 역사와 고통 속에만 머무르지 않고 내면의 평화를 경험했던 순간의 기억이 신비로웠습니다. 함께 걸으며 끝없이 이어지는 묘지를 바라보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에 마음은 먹먹했습니다. 이번 역사 기행을 통해 도반의 존재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함께하는 그들이 있었기에 슬픔에 압도되지 않았고, 그 마음을 함께 잔잔히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3조, 우리는 도반 일정이 끝난 뒤, 조원들과 마음 나누기를 하며 하루의 감정을 풀어내고 서로를 다독였습니다. 특히 제주를 주제로 시를 쓰고 낭독했던 시간은 그날의 경험을 정리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치유의 시간이었습니다. 이후 같은 숙소를 사용했던 프로그램 팀과 산책하고 체조하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을 떠올리며 함께 웃었습니다. 회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기행 내내 따라다녔던 왜?라는 질문의 답을 어느 정도 찾은 것 같습니다. 프로그램 팀원들과 산책길에서 문득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이 떠올랐습니다. 마침, 마음 나누기 시간에 다른 회원이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악의 평범성’에서 아이히만은 약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을 실행한 실무 책임자였지만, 특별한 악마가 아니라 자신의 업무를 성실히 수행한 평범한 공무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역할을 의심하지 않는 태도, 관성적이고 습관적인 사고방식이 어떤 맥락에서는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느꼈습니다. 이것을 ‘사유의 무능과 무비판적인 순응’의 결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학살을 지시한 사람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묻게 됩니다. 극단적인 공격성은 때때로 내면의 두려움과 상처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는 어떤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것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마지막엔 ‘무감각과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남았고, 여기에 대한 해독제는 무엇일지 질문을 던져 봅니다. 그 질문에 ‘수행’이라는 단어가 해답처럼 바로 떠올랐습니다. 먼저 바른 법 만난 자신이 행복할 수 있어 기쁘고, 수행자의 길을 더 많은 사람에게 잘 전하는 것이 세상의 평화를 위하는 길임을 느꼈습니다. 아직도 계속되는 전쟁과 분쟁, 사람들의 갈등과 증오를 마주할 때면 여전히 무력해지고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이제는 그런 마음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평화를 위해 아픔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자 합니다. 먼저 꾸준히 수행하면서 내 안의 두려움과 화를 알아차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과 경계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삶에서 평화를 만들며 제주 4·3 사건을 잊지 않고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제주에는 ‘속솜허라’라는 말이 있는데, ‘숨을 죽이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당시 동굴로 피신했던 부모가 아이들에게 했던 말이었습니다. 사건 후에는 피해자였지만,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살았던 제주도민들이 들었던 말입니다. 오랫동안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 했고, 지독한 그 시절이 지났어도 살면서 애써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고,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평화를 위한 발걸음, 제주에서 단체 사진 작은 실천으로, 역사 기행 참가자들이 쓴 시를 시집으로 엮어 제주를 안내하는 해설사들에게 전하는 싶은 마음입니다. 많은 사람이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알아 평화의 소중함을 느끼고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 토대 위에서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넘어 세계 평화까지 큰 꿈을 품어봅니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 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 p.536』 제주 4·3 평화 재단 홈페이지 게시글 글김수영 사진김민성 편집황재윤

통일 2026.07.24. 1,205 읽음

정토불교대학

삶을 바꾸는 공부
정토불교대학

자세히 보기

행복을 체득하는
정토경전대학

※ 정토불교대학 졸업 후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자세히 보기

졸업생 이야기

우연히 찾아온 정토불교대학과의 만남

윤정숙 님 - 2018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지금까지 남보다 더 가지고, 더 빛나고, 더 잘 입고, 더 잘 살기 위해 살았는데, 어느 날 문득 이게 무슨 큰 의미가 있나? 싶었죠. 우연히 친구와 얘기하다가 알게 된 정토불교대학.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삶의 기준점을 찾고 싶어 입학하게 되었지요. 집착과 이기심이라는 어리석음으로 내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지금은 주변의 모든 것에 감사하며 제 삶에 만족해요.

부부에서 도반으로

이용준·김서화 님 - 2019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부부의 인연으로 만나 이제는 도반으로 서로 힘이 되어 주고 있어요. ‘아내는 이러한 사람’, ‘남편은 이러한 사람’라는 고정관념이 내 삶을 고단하고 힘들게 만들었음을 불법공부를 통해 알게 되었어요. 잘 풀리지 않는 부분도 법문을 들으면 해소가 되고 처방전을 받은 듯 시원해요.

이혼소장을 멈추게 한 정토불교대학

최영미 님 - 2015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13년 내내 총성없는 전쟁과 같았던 결혼생활. 이혼장을 쓰던 중에 정토불교대학 입학홍보문자를 받게 되었어요. 남편과의 싸움은 제 인생의 풀지 못하는 숙제 같았는데, 그게 해결되니까 풀지 못하는 숙제가 없어졌어요. 제가 변하고 나니 남편이 불교대학 홍보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