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새길

정토불교대학

접수 : 1월 30일(금) ~ 3월 16일(월)
5개월 과정 (26년 4월~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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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일년, 농부로 어때?

일년농부

참여 기간 : 2026년 3월 16일(월) ~ 12월 20일(일)
접수 마감 : 2026년 2월 28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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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세계관의 이해와 체득

정토경전대학

수업기간 : 2026년 3월 ~ 2026년 8월 (5개월 과정)
접수기간 : 2026년 2월 19일(목) ~ 3월 9일(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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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청년 직장인 출가

청년붓다 7기

접수 : 1월 21일(수) ~ 3월 18일(수)
장소 : 정토사회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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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오프라인

주말명상 & 월명상

온라인 : 2월 20일(금) ~ 2월 22일(일) / 2박3일
오프라인 : 3월 18일(수) ~ 3월 22일(일) / 4박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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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세계 명상의 날 포럼

The Unified Mind

일시 : 2026년 3월 20일(금) ~ 21(토)
장소 : 정토사회문화회관 대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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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도심속 절캉스

일정 : 1월 15일(목) ~ 3월 31일(화)
장소 : 정토사회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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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오픈!

오늘, 첫 만남 입니다

정토회가 처음인 분을 위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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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행자의 하루

청주 실상화 보살님의 법문 따라 걸어온 길

좋은 법문 하나가 한 사람의 삶을 바꾸고, 그 삶이 다시 한 공동체의 뿌리가 되기도 합니다. 실상화 보살님의 이야기는 부처님의 삶이 알고 싶다는 한 가지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질문은 법륜스님과의 인연으로 이어졌고, 가정법회를 거쳐 마침내 청주 법당이라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 글은 한 사람의 간절함이 어떻게 오랜 시간 이어진 수행과 실천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이어진 그 인연의 길을 따라가 봅니다. 법문을 듣고 홀딱 빠졌지요 실상화 님은 오랜 불자였습니다. 초하루와 보름마다 절에 다니며 부처님 일대기를 공부할만큼 신심이 깊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늘 지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어떻게 살다 가셨는지, 그 삶의 내력이 정말 알고 싶었어요.” 다니던 절 스님께 여러 차례 법문을 청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늘 “책을 보라”는 답뿐이었습니다. 경전 공부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 속에서 실상화 보살님은 삶으로 들려주는 불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정토회에 젊은 스님이 있는데, 법문을 정말 잘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실상화 보살님은 직접 서울로 그 스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서울에서 만난 스님은 당시 ‘최석호 법사’라 불리고 있었습니다. 법륜스님과 실상화 보살님 실상화 보살님은 법륜스님께 청주로 와서 법문을 해주실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여쭈었습니다. “법문을 듣겠다는 사람 한 명이라도 있다면 얼마든지 가겠습니다.” 청주 금강회관에서 열린 첫 법문. 그날 실상화 보살님은 배움에 대한 갈증이 해소되며 깊은 환희를 느꼈습니다. 그 감정은 지금도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따로 뭐가 좋았다기보다, 법문을 너무 잘하셔서 홀딱 빠졌지요. 스님 법문을 듣고 나면 다른 스님 법문이 귀에 안 들어와요. 스님 입만 쳐다보면서 ‘아, 세상에, 이렇게 좋을 수 있구나’ 이러면서 감탄했지요.” 단순한 경전 풀이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을 꿰뚫는 불교였습니다. 실상화 보살님은 그날 이후 계속해서 법문을 청했습니다. 이후 한 달에 한 번, 일요일마다 청주 금강회관에서 법륜 스님의 금강경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법문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실상화 보살님의 자제인 김승수 님 역시 정토회와 인연을 맺어 경전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김승수 님은 곁에서 지켜본 어머니의 삶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다 겪은 세대예요. 좌익이다, 빨갱이다 하는 이념 때문에 가족이 죽고 흩어지는 걸 겪은 분이죠.” 어머님의 사진을 보여주며 과거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아들 김승수 님 일제강점기와 전쟁, 혼란의 시대 야마시로 하루꼬로 남아있는 실상화 보살님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 김승수 님 두 오빠를 따라 음성수봉소학교에 다니셨던 어머니는 공부를 아주 잘하셨어요. 큰오빠가 반장이여서 반장네 집으로 불렸다고 해요. 청주상고 재학 중이던 둘째 오빠가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일본 해군이 되었고, 태평양 전쟁 중 전사했습니다. 해방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청주고보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교사로 있던 큰오빠는 북쪽으로 간 뒤 소식이 끊겼습니다. 그 후로 어머니 집안은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이 찍혔어요. 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항상 말조심하라며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쉿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있습니다. 단어 하나만 잘못 말해도 빨갱이라며 서로 신고하고 잡혀가던 그런 시절이었지요. 어머니의 혼담이 오가던 시기는 할아버지께서 면장으로 재직 중이던 때였습니다. 장남이었던 아버지께 집안일을 맡기고 싶어 하시던 상황이었습니다. 좌우 갈등이 극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총명하고 한 인물 하는 어머니를 큰 며느리로 맞이하는 데에 빨갱이 집안이라는 딱지는 할아버지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나 봅니다. 결혼 후 저를 낳고, 1년이 갓 넘은 때에 한국 전쟁이 터졌습니다. 돌잡이인 저를 업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청주를 향해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밤고개를 앞에 두고 아버지가 잠깐 담배를 태운다고 거리를 두고 걷는 사이 청주에 폭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돌잡이를 품에 안고 있던 어머니는 그렇게 아버지와 갑작스런 생이별을 당했습니다. 어머니에게 그 순간은 아마 공포 그 자체였을 겁니다. 피난길에서 저에게 줄 젖이 없어, 밭에 버려진 참외를 주워다가 어머님이 잘게 씹어 참외죽으로 만들어 제 입에 넣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옥천까지 내려갔다가 세 달 뒤, 한국군이 서울을 수복하면서 어버지와 다시 만났습니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모순과 갈등은 어머니의 가슴 깊숙이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을 거예요. 1953년, 한국전쟁 끝무렵에 어머니와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세상의 혼란과 아픔은 어머니 몸으로 나타났나봐요.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심한 배앓이로 생사를 오간 적이 있으셔요. 병원에 갔다가 복막염을 진단 받고 자궁 제거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제가 외아들이 되어 버렸지요. 어머님의 지난 삶을 풀어내는 김승수 님의 목소리에는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을 수밖에 없던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그 고통을 치유하고 단단하게 삶을 지켜내 온 어머님에 대한 존경심이 진하게 묻어있었습니다. 법정 스님이 실상화 보살님께 보낸 편지 혼란과 모순의 시대를 살아온 실상화 보살님은 법정스님을 만나며 삶의 방향을 잡았고, 이후 법륜스님을 만나면서 수행과 삶이 하나로 맞아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996년 8월, 동북아 역사기행 중 백두산 천지에서 어머니께서는 법륜스님과 함께 백두산을 여행하던 중 압록강에서 북한을 바라보며 깊은 대화를 나누셨다고 합니다. 전쟁과 분단으로 찢어진 민족의 현실을 마주하며, 부처님의 가피로 그러한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을 돕는 수행 정진의 삶을 살기로 뜻을 모으셨다고 해요. 어머니께서는 법명 실상화처럼 불교, 특히 실천 불교를 지향하는 법륜스님의 정토회를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수행 정진하며 치유의 삶을 살아가신 거지요. 만일결사, 멈추지 않는 수행 실상화 보살님의 나이 65세였던 1993년, 제1차 만일결사에 입재합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제1차 만일결사를 회향하기까지 30년이 걸린다는 걸 알기에 잠시 망설였습니다. 회향하지 못할 게 다분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만일결사에 입재하기를 권하던 무변심 법사님에게 “내가 지금 몇 살인데 어떻게 만일을 채우느냐.”라고 반문하던 실상화 보살님은 만일결사 초창기 입재자로 수행의 길을 끝까지 걸었고, 정말로 만일결사를 회향했습니다. 1997년부터는 청주 실상화 보살님 집에서 법륜스님을 모시고 매주 법회를 열었습니다. 스님은 반야심경을 강의하셨고 매주 서른 명이 넘는 인원이 청강했습니다. 공간이 부족해 미닫이 문을 모두 떼어내 앉을 자리를 마련했고, 실상화 보살님은 서른 명이 넘는 참석자들을 위해 매주 국수를 삶았습니다. 1999.6.21 백일법문 회향식 2003년 8월, 백담사 활동가 수련회. 맨 왼쪽 묘수 법사 옆 실상화 님 4개월 정도 진행하다가 10월 경에는 날이 추워져 다른 회원의 집으로 옮겨서 법문을 진행했고, 법륜스님과 유수스님이 번갈아 오시며 육조단경, 반야심경, 신심명, 법성게, 부모은중경 등을 강의해 주셨습니다. 2017년, 실상화 보살님의 여든여덟 번째 생신.right 보수 법사님은 매주 화요일 저녁에 오셔서 불교대학 강의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청주 법당의 초석이 만들어졌습니다. 청주 법당 부총무를 맡았을 때도 신실한 마음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총무를 하면서 힘든 점은 없었는지 묻는 질문에 “내가 좋아서 한 건데, 힘들 게 뭐가 있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연화회 활동에서도 실상화 보살님은 자연스러운 중심이었습니다. 무엇인가 하자고 하면 연화회 보살님들이 기꺼이 따라주었습니다. 아들 김승수 님이 옆에서 한 마디 덧붙이셨습니다. “어머니는 타고난 리더 보살이셨어요.” 스님은 저의 스승입니다 1998년, 실상화 보살님은 법륜스님의 미국 5개주 강연에 동행했습니다. 독일과 미주 지역을 오가며 스님의 전법 여정을 곁에서 지켜본 시간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스님이 얼마나 검소하게 전법 활동을 이어가는지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교포들의 집에 머물며 비용을 아끼고, 음식도 사서 드시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대중을 위한 법문에 집중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때의 한 장면을 김승수 님이 풀어주었습니다. “제가 마일리지가 있어서 어머니 비즈니스석 표를 끊어드렸는데, 어머니가 ‘내가 어떻게 그걸 타, 스님이 타야지’ 하시면서 그 표를 스님께 드리고 본인은 이코노미석에 앉아 가셨어요.” 실상화 보살님에게 법륜스님은 아들처럼 정을 주는 존재이자, 분명한 스승이었습니다.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스님은 저의 스승입니다.” 2003. 2. 223. 1 미국 LA정토수련원 개원식에 동행한 실상화 보살님 10년의 시간, 하나의 법당 무엇보다 실상화 보살님은 정토회 청주 법당이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입니다. 청주 금강회관에서의 강연이 중단된 뒤 약 3년 반 동안 청주 활동가들이 서울로 올라가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법륜스님과 유수스님이 번갈아 청주로 오시며 가정법회를 운영한 4년의 시간이 이어집니다. 공간이 부족해 미닫이 문을 떼기도 하고, 마당에 천막을 치기도 했습니다. 조립식 건물을 세웠을 때는 추운 데서 법문을 들을 아내가 걱정된다며 한 거사님이 보일러 시공비를 보시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뜻밖의 공간을 보시받게 되었고, 청주 법당을 마련할 수 있는 준비가 갖춰졌습니다. 서울 활동가들이 오가며 시멘트를 나르고, 지업사를 운영하는 회원으로부터 도배장판도 보시받으며 재정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 역할을 나누었습니다. 2001년 3월 11일 일요일, 1년이 넘는 준비 끝에 청주법당 개원식을 열었습니다. 법륜스님, 유수스님, 묘당 법사님과 청주 활동가 등 170여 명이 함께했습니다. 실상화 보살님이 맺은 작은 법문 인연이, 10여 년의 시간을 거쳐 하나의 법당으로 자리 잡은 날이었습니다. 2001. 3. 11 청주법당 개원식에서 사회를 맡은 실상화 보살님 실상화 보살님의 필기 노트, 사회자 멘트와 법문을 들으며 쓴 메모가 있다. 보시는 조건 없는 믿음 실상화 보살님은 2004년 정토회 보시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도 끝까지 사양했습니다. “내가 상 받을 자격이 없는데…” 그러나 실상화 보살님에게 보시는 공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살고 있던 집을 보시한 이유도 단순했습니다. “법륜스님 하시는 일이 너무 좋았어요. 대중을 위해 전법하시는 게 좋았고, 잘 써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지요. 무엇보다 보시를 해야 내 마음이 편했어요. 그리고 우리 아들이 너그럽고 착해서, 내가 보시하는 데 일절 간섭하지 않았어요. 아들 덕분에 마음 편하게 살았지요.” 2004.12.12 정토행자 보시상 수상 상패 2025년, 실상화 보살님 문안 온 법사님들 옆에서 김승수 님이 어머님 말씀에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집 말고도 서울에 정토사회문화회관 짓는다고 할 때 2천만 원 보시하셨어요. 경제 활동도 안하시는 분이 언제 그렇게 살뜰하게 돈을 모으셨는지 제가 깜짝 놀랐어요. 한번은 저한테, ‘내가 정신이 왔다갔다 하는데, 보시할 때 되면 꼭 입금해달라.’라고 말씀하셔서 제가 입금하고 그랬지요. 몇 달 전, 법륜스님과 유수스님이 병문안을 오셨습니다. 그 때 스님이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숟가락, 밥그릇도 없던 시절에 실상화 보살님이 다 챙겨주셨어요. 쌀도 보시하시고, 그 덕분에 법회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원망과 분노가 아닌 치유 김승수 님이 한 역사학자와 만나 어머니의 삶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역사학자는 실상화 보살님의 집안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사의 비극을 한 집안이 온전히 감당한 듯합니다. 깊은 위로를 전하며, 이러한 비극이 다시는 이 땅에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머니께서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가족과 정토회, 그리고 법륜스님과의 인연 속에서 조건 없이 내어놓으며 살아오신 분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주상보시로 삶을 실천하며,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 나가신 것 같습니다. 손녀의 혼례식. 뒤에는 실상화 보살님이 1981년에 수놓은 반야심경 병풍. 2025년 11월, 리포터와 대화 중인 실상화 보살님 일제 강점기와 전쟁, 이데올로기의 갈등 속에서 실상화 보살님은 가족과의 생이별을 겪고 여러 죽음을 보며 깊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상처는 불법을 만남으로써 삶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실상화 보살님은 고통을 원망이나 분노로 남기지 않고, 불법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전법으로 풀어내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개인의 비극을 수행과 나눔으로 전환한 그 삶은, 트라우마를 넘어서는 한 인간의 조용하지만 단단한 실천의 기록입니다. 글김난희 편집이주현

[특집] 결사행자 이야기 2026.02.25. 1,806 읽음

정토행자의 실천

10년째 이어온 서원, 임진각 만배정진

2026년 1월 1일, 정토회 회원들은 어둠이 가시기 전부터 분단의 상징인 파주 임진각 망배단에 모여 새해맞이 만 배 정진을 시작했습니다. 한 배 한 배 올린 절마다 전쟁과 갈등을 넘어 평화로운 미래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겼습니다. 차가웠던 새벽, 만 배로 올린 만 번의 서원, 그 뜨거웠던 현장으로 들어가 봅니다. 어둠이 가시기 전에 시작된 만 배 정진 새해 첫날, 인천경기서부 회원들은 파주 임진각 망배단에 모여 만 배 정진을 시작했습니다. 2025년 12월 30일부터 2026년 1월 1일까지 사흘간 이어진 만 배 정진은 온라인과 현장에서 함께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새벽 정진의 첫 출발 새벽 6시, 참가자들은 몸과 마음을 가다듬은 뒤 절을 시작했습니다. 몸을 숙였다가 일어서는 동작을 거듭하며 머리와 얼굴, 겉옷 위에 맺힌 작은 이슬은 그대로 얼어붙어 매서운 새벽 추위를 고스란히 전했습니다. 새벽 망배단 정진 이윽고 동쪽 하늘이 밝아오며 해가 떠오르자, 망배단을 감싸던 차가운 공기에도 서서히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참가자들의 정진을 조용히 응원하듯, 햇살은 절하는 이들의 등을 따뜻하게 비추었습니다. 해돋이 후, 망배단에 비치는 해 평화 통일을 위한 만 배 정진 정진 중간중간,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자리에 앉아 쉬는 참가자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습니다. 서로 말없이 물을 건네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나누는 짧은 순간들 속에서, 함께 걸어온 신뢰와 연대가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만 배 후, 명상으로 숨을 고르다. 회향 개인의 다짐에서 공동의 서원으로 정진의 시간이 어느덧 마무리를 향해 가자, 현장에는 서서히 회향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더해졌습니다. 마지막 절을 올린 뒤 참가자들은 조용히 자리를 정리하며, 그동안 이어온 만 배의 시간을 마음속에 차분히 되새겼습니다. 절 방석을 정돈하고 외투를 여미는 손길마다 긴 정진을 끝냈다는 안도와 수행 뒤에 찾아온 고요한 여운이 스며 있습니다. 3일 간의 만 배 정진 회향 준비 인천지회 신현금 님의 사회로 회향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어 인경지부 지부장 대행 허순 님은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끝까지 정진을 이어온 참가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오늘의 만 배는 단지 절의 횟수가 아니라 평화와 통일을 향한 우리의 간절한 약속입니다.”라고 그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인경지부 지부장 대행 허순 님 이후 평화와 통일을 발원하는 발원문 낭독이 이어졌습니다. 김미애 님과 김현진 님이 차분한 목소리로 발원문을 읽고, 임진각 망배단에는 분단을 넘어 화해와 공존을 바라는 마음이 잔잔히 퍼져 나갔습니다. 만 배의 절이 개인의 다짐을 넘어 공동의 서원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인천지회 김미애 님,김현진 님 곧이어 법주 한혜자 님과 집전 허익선 님의 수고로, 독립을 위해 생을 바친 모든 영가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는 천도재가 봉행 되었습니다. 참가자들은 합장한 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리는 마음으로 의식을 함께했습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올려진 천도재는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고, 그 위에 평화로운 미래를 세우고자 하는 다짐의 시간이었습니다. 과거의 아픔과 평화로운 미래를 위한 천도재 만 배 정진에 담긴 10년의 서원 마지막으로 차를 올리는 의식이 진행된 뒤, 인천경기서부지부 담당 법사인 향왕법사님의 정리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향왕 법사님은 만 배 정진과 회향식의 의미를 짚으며, “오늘 이 자리에서 올린 절과 발원이 일상의 실천으로 이어질 때, 통일과 평화는 비로소 현실이 됩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만 배 정진을 함께해 온 향왕 법사님은 해마다 새해를 앞둔 추운 날이면 참여를 잠시 망설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도반들과 함께 정진하며 새해를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새삼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향왕법사님 한편으로는 장소와 환경에 대한 아쉬움도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코로나 이후 공사 문제로 만 배 정진 장소를 이전보다 더 협소한 곳으로 옮겨야 했을 때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눈비가 오던 해에는 미리 눈을 치우고 방수포를 깔며 준비했는데, 그때는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몹시 추울 때는 ‘조금이라도 몸을 녹일 방법이 없을까?’라는 마음이 들었고, 온라인 중계 장비나 통신이 끊기는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누군가 원을 세우면 결국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참 감동적입니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만 배 정진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 소중합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향왕 법사님 말씀을 들으며, 만 배 정진이 단지 해마다 반복되는 하나의 행사가 아님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만 배 정진에는 추위 앞에서 잠시 망설이지만 결국 발걸음을 옮기게 되는 마음, 도반들과 함께 새해를 기도로 시작할 수 있는 고마움, 그리고 통일을 향한 염원이 사라지지 않도록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다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만 배의 절은 그렇게 누군가의 의무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해 이어가는 책임이자 희망이었습니다. 인경지부 망배단 단체사진 글윤보경 사진장회경. 장수린, 윤보경 편집허인영

통일 2026.02.06. 1,889 읽음

정토불교대학

삶을 바꾸는 공부
정토불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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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체득하는
정토경전대학

※ 정토불교대학 졸업 후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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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생 이야기

우연히 찾아온 정토불교대학과의 만남

윤정숙 님 - 2018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지금까지 남보다 더 가지고, 더 빛나고, 더 잘 입고, 더 잘 살기 위해 살았는데, 어느 날 문득 이게 무슨 큰 의미가 있나? 싶었죠. 우연히 친구와 얘기하다가 알게 된 정토불교대학.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삶의 기준점을 찾고 싶어 입학하게 되었지요. 집착과 이기심이라는 어리석음으로 내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지금은 주변의 모든 것에 감사하며 제 삶에 만족해요.

부부에서 도반으로

이용준·김서화 님 - 2019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부부의 인연으로 만나 이제는 도반으로 서로 힘이 되어 주고 있어요. ‘아내는 이러한 사람’, ‘남편은 이러한 사람’라는 고정관념이 내 삶을 고단하고 힘들게 만들었음을 불법공부를 통해 알게 되었어요. 잘 풀리지 않는 부분도 법문을 들으면 해소가 되고 처방전을 받은 듯 시원해요.

이혼소장을 멈추게 한 정토불교대학

최영미 님 - 2015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13년 내내 총성없는 전쟁과 같았던 결혼생활. 이혼장을 쓰던 중에 정토불교대학 입학홍보문자를 받게 되었어요. 남편과의 싸움은 제 인생의 풀지 못하는 숙제 같았는데, 그게 해결되니까 풀지 못하는 숙제가 없어졌어요. 제가 변하고 나니 남편이 불교대학 홍보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