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70년

백중기도

입재 : 7월8일(수) 오전10시 / 회향 : 8월 27일(목) 오전 10시
기도접수 : 7월 1일(수) ~ 8월 29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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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년 프로그램

바라지 전국 모집

2026년 7월 15일(수) ~ 17일(금) / 2박 3일 또는 부분참여
장소 : 정토사회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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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법륜스님과 함께하는

생방송 여름 명상

4박5일 / 7월 24일(금) ~ 7월 28일(화) *한국시간 기준
6박7일 / 7월 24일(금) ~ 7월 30일(목) *한국시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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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을 위한 정토불교대학

정토담마스쿨

2026년 하반기 신입생 모집
마감 : 2026년 8월 4일 / 개강: 2026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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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프로그램 : 도심 속 절캉스 / 1080배 정진 / 명상
장소 : 정토사회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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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오픈!

오늘, 첫 만남 입니다

정토회가 처음인 분을 위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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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행자의 하루

이 음식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입니다!

조연옥 님은 오랫동안 이어온 사업을 정리할 즈음, 개인적 어려움까지 겹치면서 우울한 마음을 혼자 버티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라는 아들의 메모를 보고 정신이 퍼뜩 들어 행복학교에 입학했고, 깨달음의 장까지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조연옥 님 부부는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남편은 깨달음의 장, 조연옥 님은 바라지장에 참석하였는데요. 그곳에서 조연옥 님은 어떤 음식을 준비하며 무려 30년간 쌓아온 마음의 화를 감사함으로 바꾸게 되었다고 합니다. 과연 그 음식은 무엇일까요? 바라지장에 가기까지 10여 년을 유지해 오던 자영업을 정리하고 개인적 어려움까지 겹치면서 6개월 정도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우울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입대하기 위해 휴학하고 집에 있던 막내의 책상에서 우연히 우리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라는 메모를 보았습니다. 퍼뜩 정신이 들어 행복학교를 이수하고, 바로 깨달음의 장을 신청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1년 전 일입니다. 아무런 정보 없이 가볍게 다녀오겠다는 마음으로 임한 깨장은 힘들면서도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라는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했다는 알림과 함께 먹었던 식사는 너무 정갈하고 맛있었습니다.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관심이 많은 저는 기회가 된다면 꼭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연옥 님.right 올해가 결혼 30주년이고 남편의 만 60번째 생일이라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남편은 흔쾌히 그러자고 했고, 정토회 일반회원으로 활동 중인 남편은 깨장에, 저는 바라지장에 갔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남편을 위해 바라지장에 간다는 조금 우쭐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는 달리 바라지장도 깨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예불을 올리고 나면, 아침 공양을 준비합니다. 긴장되고 서툰 발우공양을 마치고 나면 다시 공양간으로 가서 수련생의 오전 공양을 준비합니다. 처음에는 분위기 파악도 안 되고 나서면 안 될 것 같아서 뒤로 물러나 있었습니다. 소임을 정할 땐 그나마 어렵지 않아 보이는 과일을 담당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팀장님이 제 소임을 보고는 아니, 조연옥 님이 왜 과일을 하세요? 일 잘하게 생겼구먼, 반찬을 하세요.라고 하고 그때부터 제 소임은 반찬 만들기가 되었습니다. 팀장님은 내가 일 잘하는 줄을 어떻게 아셨을까? 내 얼굴이 일 잘하게 생겼나? 지금도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공양간에서 화의 원인이 감사함으로 돌아옴 익숙하지 않은 공양간에서 처음 만난 도반들과 어색함도 잠시, 원래 가지고 있던 무수리 기질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물은 다듬고 데쳐서 조물조물 무치고, 채소는 착착 채를 썰어서 프라이팬에 볶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오랜만에 칼질을 많이 해서 그런지 손가락에 물집이 크게 잡혔습니다. 다른 도반들도 밥, 국, 김치, 과일 등 각자 맡은 자리에서 말없이 소임을 완성했습니다. 거의 100인분의 음식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너무 신기했습니다. 한 번도 맞춰본 적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잘 훈련된 정예부대처럼 뚝딱뚝딱 100인 분을 만들어 내다니, 놀랍고 감탄스러웠습니다. 바라지장에서 2일째 되는 날, 팀장님이 추석도 다가오니 연근을 올린 김치전을 준비하자고 했습니다. 뜨거운 불 앞에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열심히 전을 부쳤습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이 해온 전이라 별로 힘들다는 생각 없이 오로지 얇게 부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집중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감사한 마음이 불쑥 올라왔습니다. 어 이게 뭐지? 울컥했습니다. 그리고는 나를 여기에 쓰려고 그렇게 단련시켰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외며느리로 30년 동안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제사가 가까워져 오면 억울한 마음과 스트레스가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우리 엄마 아버지도 아니고 얼굴도 모르는 조상의 제사를 모셔야 하는 게 신경이 곤두서고 화가 났습니다. 유별난 시숙부들에게 책잡히지 않으려고 신경 쓰다 보니 제사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할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습니다. 예민해지고 말이 곱지 않으니, 남편과 싸움도 잦았습니다. 바라지장에서 그런 제 화의 근원이었던 제사, 그 조상들께 감사의 마음이 올라오다니,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 도반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칼질을 잘하세요? 그래서 외며느리로 30년 동안 제사를 지내면 잘하게 된다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했습니다. 30년 동안 지속된 마음의 화가 감사의 마음으로 바뀌다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마음이 가벼워지고 편안해졌습니다. 언제까지 제사를 지낼지 모르지만, 지내는 동안은 공양간 명심문처럼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다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남편을 위하는 척 바라지장을 가겠다고 마음을 내서 왔는데, 오히려 저를 바라보는 바라지장이 되었습니다. 새벽 예불을 올리러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발우에 밥을 담는 순간, 채소를 다듬고 칼질하는 순간순간이 깨어있는 수행이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저를 살피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깨어있지는 못했습니다. 공양 마치고 몇 시까지 어디로 모이세요. 하는 말을 들었는데, 기억이 안 나서 도반에게 되묻기를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마지막 날 나누기에서도 제대로 듣지 못해 팀장님에게 잘 듣고 합니다라는 주의를 듣고 바로 참회했습니다. 나누기는 바라지장의 꽃입니다. 식사 준비를 마치고, 그사이 일어난 마음을 나누면서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시간입니다. 저녁 시간 동그랗게 둘러앉아 나누기할 때는 배꼽 빠지게 웃기도 하고, 눈물·콧물 흘리면서 함께 울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속 깊은 이야기를 어디 가서 이렇게 시원히 내어놓을 수 있을까요? 나눠주고 들어주고 공감해 주신 모든 도반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3일째 되는 날, 점심 공양을 챙겨서 동네 정자로 나들이도 하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 그날 비바람 속에서 라면과 과자를 먹으며 행복해하던 순간이 떠올라 저절로 미소 지어집니다, 휴식 중에 어떻게 살 것인가 제 나이 50대 중후반,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많이 고민했습니다. 힘든 시기에 행복학교를 시작으로 깨장, 바라지장을 다녀오고 지금은 경전 대학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정토회를 만나 많이 가벼워지고, 편안하고, 당당해져 불안감이 줄고 제 삶의 중심을 찾았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돼라,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다. 할까 말까 망설이지 말고 가볍게 마음을 내라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마음에 새깁니다. 진정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잘 살아보겠습니다. 지금 여기에 깨어있고, 주어진 것에 항상 감사하며, 어디에서든 잘 쓰이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바라지장을 함께한 도반님들 너무 감사합니다. 함께라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씩씩한 장군 같은 권순녀 팀장님 항상 말없이 지켜봐주고 기다려주신 류양희 팀장님 두 분이 계셔서 너무 든든했습니다.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 글은 2025년 12월에 수록된 바라지장 소감문입니다. 글조연옥 편집월간정토 편집팀

월간정토 2026.07.13. 192 읽음

정토행자의 실천

나라를 위해 자신의 심장을 터트린 젊은 영웅을 찾아_천안지회 현충일 역사 기행

유독 높고 청명한 6월 현충일 아침, 천안지회 도반들은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으로 향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삶을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대전충청지부 지회 단위로는 첫 역사 기행입니다. 목적지는 윤봉길 의사 생가지와 사당, 기념관이 모여 있는 덕산면이었습니다. 이른 시간에 방문객은 많지 않았고, 주차장 옆 태극기가 바람에 조용히 흔들렸습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비 오늘 이곳을 찾은 이유 10시가 되자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나타났습니다. 실천활동담당 김순자 님에게 이 자리를 마련한 사연을 물었습니다. 천안지회는 천안에서 서천까지 넓은 지역에 퍼져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교과서에서 스쳐 가듯 배우는 독립운동가잖아요. 반면 사람들은 그의 정신, 농촌 계몽운동 등은 잘 모릅니다. 이번 기회에 더 자세하게 알면 좋겠다는 취지로 시작했습니다.“ 천안 주변에는 이순신, 유관순, 김시민, 이동녕, 홍대홍 등 걸출한 인물이 많습니다. 누구나 윤봉길 의사를 잘 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모른다는 것이 이번 여행의 출발점이며 예산군 덕산면을 택한 이유입니다. 월진회 회원 해설사, 정토회와의 인연 첫 마음 나누기를 마칠 무렵, 월진회 회원인 해설사 김선자 님이 도착했습니다. 월진회는 윤봉길 의사가 직접 조직한 농촌 개혁단체입니다. 여기서 해설하는 동안 정토회 회원들이 많이 다녀갔어요. 그래서 저도 법륜스님 팬이 됐습니다. 웃음 섞인 말 한마디에 회원들의 어깨가 풀렸습니다. 아이랑 같이 오신 사람은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는 그냥 두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듣고 갑니다. 해설사의 말 속에는 아이도 어른도 각자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가져갈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충의사 앞에서 숭고한 희생과 용기를 기리며, 감사의 마음을 담아 묵념하는 천안지회 회원들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세 개의 문과 계단을 지나면 충의사가 나타납니다. 법의 법사님이 대표로 향을 올리는 동안, 도반들은 고요히 묵념했습니다. 배용순 여사 무덤 앞에 있는 분수 연못 충의사 옆문을 나서는 길에 분수 연못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앞이 배용순 여사의 무덤입니다. 해설이 조용히 이어지는 가운데, 발걸음을 잠시 멈췄습니다. 남편과 따로 모셔진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남편 사당이 여기 있으니 내가 잘 지키겠다라는 유언을 남겼거든요. 남편을 먼저 보내고, 곁에서 지키겠다고 다짐한 여인. 잘 깎인 봉분이 말없이 그 아픔을 대신하는 것 같습니다. 기념관 안에서, 독립운동가 이전에 농촌 계몽가였다. 장부출가생불환, 윤봉길 의사가 집을 떠나면서 남긴 유서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자, 정면을 가득 채운 글자가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장부출가생불환 ’ 은 장부가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김선자 님은 전시된 대들보 앞에 서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울림 때문인지 목소리가 한층 커졌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독립운동가로 알려졌지만, 이전에 농촌계몽 운동가였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오치서숙이라는 서당을 찾아 한학을 공부했어요.“ 어느 날 윤봉길은 공동묘지에서 여러 개의 묘표를 손에 들고 헤매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글을 읽지 못해 아버지 무덤을 찾지 못한 청년은 누군가에게 물어볼 생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그 장면이 윤봉길 의사를 바꿨습니다. 무지가 나라를 잃게 한 원인이라 생각하고, 지식과 깨어있는 의식이 없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부흥원 상량문이 적힌 대들보 사연은 충의당 사랑방 야학으로 이어졌습니다. 작은 촛불 하나로 시작한 배움의 자리는 점차 커져 부흥원 건립으로 계승되었습니다. 대들보 상량문에는 당시 관례이던 일본 연호 대신 단기 조선 개국 4,261년이라고 써넣었습니다. 이런 부분도 윤봉길 의사의 대범함이 느껴지지요. 해설사의 말에 회원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듬해 윤봉길은 농촌 개혁운동 단체인 월진회를 조직했고 지금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소녀와 기념관 영상 1932년 4월 29일 도시락 폭탄을 들고 농촌계몽만으로는 진정한 행복이 이어질 수 없다라고 판단한 윤봉길은 거사를 택합니다. 떠나기 전 아내 배용순에게 물 한 잔을 부탁했지만, 차마 얼굴을 보고 떠나기가 힘들어, 그냥 집을 나섰습니다. 그가 남긴 문장, 장부출가생불환에 모든 결의가 담겨 있습니다. 한인 애국단에 입단 후 찍은 윤봉길 의사 사진과 해설사 윤봉길은 예산군 삽교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 칭다오로 건너간 후, 장사하며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일왕 생일날 일본군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상해사변 전승식을 거행한다는 첩보를 입수합니다. 김구 선생을 만나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고, 김홍일 장군이 주선한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을 지니고 단상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폭탄은 정확히 떨어졌고, 윤봉길 의사는 그 자리에서 체포됩니다. 5월 25일 사형 선고, 같은 해 12월 19일 아침 미간에 총을 맞고 순국했습니다. 향년 스물다섯이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묶였던 형틀과 처형당하는 모습 이 일이 있고 중국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 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라고 말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파장은 훗날 카이로 회담까지 이어집니다. 설명을 끝내자, 주변이 잠시 고요해졌습니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지만 기념관에서 들으니 그 시절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14년 동안 사람들이 밟고 다니다 해방이 되고 윤봉길 의사 유골을 수습하고자 김구 선생님이 수습단을 꾸렸는데,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수소문 끝에 당시 교도소 간수였던 분의 협조를 얻어 위치를 찾았는데, 공동묘지 입구 계단 밑에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매장했다는 거예요. 14년 동안이나 사람들이 밟고 다녔다는 거지요.“ 말이 끊긴 자리에 침묵이 내려앉습니다. 아직도 손뼈 7개는 수습하지 못한 채 일본 암장지에 있습니다. 지금은 서울 효창공원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으며, 예산군 덕산면과 서울, 중국 상하이에 기념관이 있고, 일본 가나자와 공동묘지 입구에도 기념비와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많은 나라에 흩어진 그 흔적들이, 윤봉길 의사의 삶이 얼마나 넓은 세상에 큰 울림을 주었는지 말해줍니다. 저한당·광현당, 그리고 도중도에서의 점심 기념관을 나와 약 300m를 걸으면 저한당과 광현당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건지겠다는 신념을 품고 사람들과 함께 글을 읽던 작은 초가집 해가 잘 드는 마당을 둘러보며, 아직도 글 읽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저한당과 광현당 도중도는 삽교천 상류의 물길이 바뀌며 생겨난 섬 안의 섬입니다. 회원들은 그늘에 자리를 잡고 점심 공양을 함께 했습니다. 그동안 들은 윤봉길 의사 이야기를 떠올리며 복습 겸 퀴즈 게임을 펼쳤습니다. 무엇보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6월 현충일이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저물어갑니다. 도중도 다리 도중도 다리에 새겨진 글귀 함께 걸었기에 지회장 박은숙 님에게 오늘 역사 기행의 의미를 질문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오프라인으로 만나는 기회가 많이 줄었어요. 모둠 활동으로는 만나지만, 지회 단위로 함께하는 시간은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자리가 더없이 소중합니다. 온라인이 너무 익숙해진 지금, 이렇게 자주 만나고 즐겁게 지내다 보면, 더 많은 분이 자연스럽게 함께하지 않을까요.“ 정토회 일정이 워낙 촘촘하고, 오랜 온라인 생활이 몸에 밴 탓일까? 소수의 참여 인원으로 시작한 발걸음이 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역사 기행은 함께 걸으며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이야기를 듣고, 같은 감동을 나누는 경험이 되고 그것이 쌓이면서 지회는 단단해지고, 도반의 의미는 더욱 깊어집니다. 그 평화가 지금 우리에게 닿아 있다 윤봉길 의사의 생을 따라 걸으면 한 가지 선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폭탄을 던진 사람이기 전에, 글을 모르는 이웃을 보며 마음 아파하던 청년이었습니다. 지식으로 사람을 깨우고, 깨어난 사람들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야학을 열고, 작은 초가집에서 함께 글을 읽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이 윤봉길 의사를 거사로 이끌었고, 그의 희생이 임시정부를 살리고, 카이로 회담에 영향을 미치고, 평화의 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 어록 탑 윤봉길 의사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글을 읽고 서로 알아볼 수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그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사는 곳입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많은 이들의 헌신 위에 우리가 누리는 평화가 있습니다. 그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기억하고, 이어가는 것이 우리가 현충일에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 될 것입니다. 내년 현충일에는 더 많은 도반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싶습니다. 글, 사진김종호 편집여수연

통일 2026.07.10. 720 읽음

정토불교대학

삶을 바꾸는 공부
정토불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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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체득하는
정토경전대학

※ 정토불교대학 졸업 후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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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생 이야기

우연히 찾아온 정토불교대학과의 만남

윤정숙 님 - 2018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지금까지 남보다 더 가지고, 더 빛나고, 더 잘 입고, 더 잘 살기 위해 살았는데, 어느 날 문득 이게 무슨 큰 의미가 있나? 싶었죠. 우연히 친구와 얘기하다가 알게 된 정토불교대학.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삶의 기준점을 찾고 싶어 입학하게 되었지요. 집착과 이기심이라는 어리석음으로 내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지금은 주변의 모든 것에 감사하며 제 삶에 만족해요.

부부에서 도반으로

이용준·김서화 님 - 2019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부부의 인연으로 만나 이제는 도반으로 서로 힘이 되어 주고 있어요. ‘아내는 이러한 사람’, ‘남편은 이러한 사람’라는 고정관념이 내 삶을 고단하고 힘들게 만들었음을 불법공부를 통해 알게 되었어요. 잘 풀리지 않는 부분도 법문을 들으면 해소가 되고 처방전을 받은 듯 시원해요.

이혼소장을 멈추게 한 정토불교대학

최영미 님 - 2015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13년 내내 총성없는 전쟁과 같았던 결혼생활. 이혼장을 쓰던 중에 정토불교대학 입학홍보문자를 받게 되었어요. 남편과의 싸움은 제 인생의 풀지 못하는 숙제 같았는데, 그게 해결되니까 풀지 못하는 숙제가 없어졌어요. 제가 변하고 나니 남편이 불교대학 홍보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