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새길

정토불교대학

학사일정 : 2026년 9월 20일(일) ~ 2027년 1월 30일(토)
접수마감 : 2026년 9월 3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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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70년

백중기도

입재 : 7월8일(수) 오전10시 / 회향 : 8월 27일(목) 오전 10시
기도접수 : 7월 1일(수) ~ 8월 29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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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을 위한 정토불교대학

정토담마스쿨

2026년 하반기 신입생 모집
마감 : 2026년 8월 4일 / 개강: 2026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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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프로그램 : 도심 속 절캉스 / 1080배 정진 / 명상
장소 : 정토사회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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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오픈!

오늘, 첫 만남 입니다

정토회가 처음인 분을 위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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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행자의 하루

로또 거사, 붓다피아에 몰방

천룡사 보리수 8기로 활동하고 계시는 정종석 님을 만나러 천룡사로 향했습니다. 등산로 초입에 걸린 “사랑하고 사랑받는 출발점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임을 잊지 마세요”라는 문구와 산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바람이 먼저 반겨주었습니다. 인연 따라 이 글을 펼친 분 모두, 끝까지 읽는다면 글의 마지막에서 자신만의 희망을 찾아내실 겁니다. 2025. 3. 천룡사 연등달기 동물원에서 가장 강한 동물 1960년 4·19 혁명, 1961년 5·16 쿠데타로 나라가 흉흉했습니다. 195060년대는 혼란과 왜곡이 만연했던 혹세무민의 시대였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당신에게 액운이 끼어 있으니 100만 원으로 지성을 들이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한다.”라거나 특정 종교 지도자가 “세숫대야 물에 손을 담그고 기도한 뒤 그 물을 나누어 마시면 모든 병이 낫는다”라는 식의 기복신앙이 많았습니다. 옛날 어른들이 다 그랬듯이, 저의 아버지 역시 종교라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태극도에 심취했습니다. 제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부모님은 태극도 본부가 있는 부산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저는 종교단체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모습을 직접 보고 자랐습니다. 그로 인해 부모님과 종교적인 갈등이 컸습니다. 2025. 7. 천룡사 보리수 역사기행 반구대암각화 저는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동생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직업을 가졌습니다. 이후 뒤늦게 학업을 병행하여 20세에 야간중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35세에는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방송통신대학까지 졸업했습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사는 게 참 재미없다는 생각에 방황도 많이 했습니다. 한 번은 동물원에서 여러 동물을 보았습니다. 그중 곰, 사자, 코끼리, 호랑이 등은 태어날 때부터 강한 유전자를 타고났지만, 멧돼지는 그런 것에 기대지 않고도 강인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움직이는 생명력을 지닌 멧돼지를 내 인생의 마스코트로 삼고 열심히 살아보자’라고 다짐했습니다. 2026. 3. 멧돼지 방어막 설치 바른 법, 바른 스승을 만날 운명 바른 믿음의 대상을 찾던 중 불교를 알았습니다.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다 법륜스님의 저서 《실천적 불교사상》을 읽었습니다. 차를 마시고 붓글씨를 쓰며 멋으로 하는 불교, 산수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시나 읊조리는 도피주의, 글자 풀이로 먹고사는 학문주의, 오래 살기 위해 참선하는 건강주의, 가끔 조용한 산사를 찾아 심신을 달래는 이기주의, 세속의 이익에 눈이 어두운 출세주의, 병 고침을 내세우는 신비주의 등, 나름대로 삿된 길을 추구하며 자기 합리화에 급급한 것은 수행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불교는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실천하며 부처님의 삶을 닮아가는 것이라는 구절를 읽었습니다. 제가 그때까지 알고 있었던 ‘부처를 믿어라’가 아니라 ‘부처가 되어라’는 말이었습니다.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2025. 5. 천룡사 초가집 보수작업 2004년 2월 15일 해운대 법당 개원 때 법륜스님의 100일 법문을 들으며 본격적으로 정토회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2004년 149차에 입재하여 지금은 천룡사지 보리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60세쯤 편두통, 견비통, 퇴행성 관절염으로 고생했습니다. 병원을 방문하여 의사에게 하루에 108배 절을 한다고 하니, 너무 무리하면 큰일 난다 하여 처방약만 복용했습니다. 석 달간 병원에 다니며 약을 먹었지만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아파도 매일 200배 정진을 했습니다. 아픈 증상이 자연스레 나았습니다. 새벽 정진으로 몸이 건강해지자 살아갈 의욕도 생겼습니다. 매일 부처님의 가피와 공덕 속에서 특별한 관리 없이도 웬만한 병은 자연 치유되었고, 지금까지 건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2025. 7. 천룡사 예초작업.right 수행은 애써 하는 숙제가 아닌 일상입니다. 잠을 자듯이, 밥을 먹듯이 수행합니다. 주중에는 담당 구청 시니어클럽에 참여하여 매월 60시간씩 폐품 재활용을 위한 페트병 수거 봉사를 합니다. 주말에는 천룡사에서 보리수 회원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일요일에는 통일의병 238번으로 통일만보를 걸으며 주택가와 민주공원에서 쓰레기를 줍습니다. 법 보시의 그물 보시는 법 보시, 법공양이 최고의 공덕입니다. 스님이 지은 책 《행복한 출근길》은 내용이 좋아서 영업사원들에게 선물했습니다. 기대고 싶어 사랑한다는 《스님의 주례사》도, 《기도》도 내용이 좋았습니다. 정토 신서 《불교를 알면 21세기가 보인다》에서 서원은 넓고 깊게, 선행은 낮고 지속적으로 실천하여야 한다라는 말씀이 특히 마음에 남았습니다. 정토 총서는 열심히 줄을 그어 가며 읽었습니다. 《인생 수업》은 사위와 손자의 생일을 맞아 주변의 소중한 분들에게 나눴습니다. 책 공양을 할 때는 표지 뒷장에 법공양 발원 내용과 발원자를 기재합니다. 항상 가방에 책을 넣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법륜스님 아세요? 잘 알지요 책 선물 드릴까요? 아 좋죠 하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명함.right 수행프로그램.right 그리고 정토회의 수행 프로그램이 안내된 명함도 함께 건네며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 달라고 말합니다. 매월 《월간정토》 20부와 스님의 저서들을 인연 닳는 모두에게 선물합니다. 이제 남은 인생은 법을 전하는 수행자로 살겠다 서원했습니다. 정토회 활동을 시작했을 때는 기도하라는 말이 상당히 부정적으로 들렸습니다. 기복신앙에서는 “열심히 빌면 한 가지 소원은 이루어진다”라며 기도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비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저는 빌어서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지 않았기에 기도라는 말 자체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정토회에서는 기도를 제가 알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을 나중에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2026. 4. 천룡사 예초작업 후 정토회에서는 화에 대한 인식도 보통의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유교적인 집안에서 배우기를 “참을 인 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 참아라“라고 가르쳤지만, 정토회에서는 참지 말라고 합니다. ‘평생 참으며 살았는데 세상에 안 참고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참지 말라가 아니라 ‘참을 것이 없으니 화낼 일이 없다’였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까지 십 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서구 문명의 유토피아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향이라는 생각에 인류 문명의 한계를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정토회 활동이 제 인생관을 바꾸었습니다. 저의 고민도 해소되었습니다. 유토피아는 실현이 불가능한 이상향이지만, 붓다피아는 구현이 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붓다피아에 저를 몰방해도 후회가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믿음이 형성된 후에는 법을 실천할 뿐 다른 문제는 없었습니다. 2025. 7. 사천왕사지 통일기도 후 가장 으뜸이 되는 가르침 둘째 아들은 저를 무서운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제 눈과 마주치기만 해도 야단맞았다고 합니다. 야단치는 것이 부모의 할 일이고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에게 정토회에 와서 보니 해볼 만하더라. 불교대학 공부를 해봐라”라고 권했습니다. 아들이 단호하게 “아버지 하는 거 보고요”라고 했습니다. 그때 ’내가 먼저 보여줘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정토총서는 35년 전에 쓰였습니다. 수정 없이 수행, 복지, 평화, 환경의 과제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조금씩 고치기 마련인데, 처음 계획한 그대로 실현되고 변형이나 보완 없이 꾸준히 이어지는 모습이 저에게 큰 가르침이 되었습니다. 2025. 8. 천룡사 초가집 보수작업 고집이라는 단어는 굳을 고, 잡을 집 자로, 굳게 잡는다는 뜻입니다. 저는 굳게 붙들 만한 어떤 가치 기준도 없이 고집만 있어 상종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혈연, 지연, 학연으로 연결된 관계가 중심인 사회에서 그런 관계가 없었던 저는 피해의식과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지금은 정토회를 만나 다른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함께 호연지기를 키워가고 있습니다. 정토회 덕분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법과 많은 스승이 있지만, 바른 법과 바른 스승을 만난 인연은 로또 당첨보다 더 큰 인생 역전입니다 2025. 4. 천룡사 점등식 후 공양 인터뷰를 마치고 천룡사를 내려오는 배웅 길에 연세도 많고 혼자 지내시는데 생활이나 식사는 어떻게 챙기시는지 물었습니다. “밥은 밥솥이 하고,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하지”라고 답했습니다. 지금 잘 살아 있으면서도, 죽음이 궁금한 저에게 그건 “아무 문제 없네”라고 들렸습니다. 앞서 걸어가는 정종석 님 주변은 가볍고 밝은 기운으로 가득했습니다. 정종석 님은 인연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며, 인터뷰 내내 빼고 버릴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휴대전화에 정종석 님을 로또 거사님으로 저장했습니다. 이번 인터뷰도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내가 세상의 희망입니다. 내가 세상의 희망입니다. 내가 세상의 희망입니다. 글구선우 희망리포터 편집최미영

사하지회 2026.07.22. 305 읽음

정토행자의 실천

나라를 위해 자신의 심장을 터트린 젊은 영웅을 찾아_천안지회 현충일 역사 기행

유독 높고 청명한 6월 현충일 아침, 천안지회 도반들은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으로 향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삶을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대전충청지부 지회 단위로는 첫 역사 기행입니다. 목적지는 윤봉길 의사 생가지와 사당, 기념관이 모여 있는 덕산면이었습니다. 이른 시간에 방문객은 많지 않았고, 주차장 옆 태극기가 바람에 조용히 흔들렸습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비 오늘 이곳을 찾은 이유 10시가 되자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나타났습니다. 실천활동담당 김순자 님에게 이 자리를 마련한 사연을 물었습니다. 천안지회는 천안에서 서천까지 넓은 지역에 퍼져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교과서에서 스쳐 가듯 배우는 독립운동가잖아요. 반면 사람들은 그의 정신, 농촌 계몽운동 등은 잘 모릅니다. 이번 기회에 더 자세하게 알면 좋겠다는 취지로 시작했습니다.“ 천안 주변에는 이순신, 유관순, 김시민, 이동녕, 홍대홍 등 걸출한 인물이 많습니다. 누구나 윤봉길 의사를 잘 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모른다는 것이 이번 여행의 출발점이며 예산군 덕산면을 택한 이유입니다. 월진회 회원 해설사, 정토회와의 인연 첫 마음 나누기를 마칠 무렵, 월진회 회원인 해설사 김선자 님이 도착했습니다. 월진회는 윤봉길 의사가 직접 조직한 농촌 개혁단체입니다. 여기서 해설하는 동안 정토회 회원들이 많이 다녀갔어요. 그래서 저도 법륜스님 팬이 됐습니다. 웃음 섞인 말 한마디에 회원들의 어깨가 풀렸습니다. 아이랑 같이 오신 사람은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는 그냥 두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듣고 갑니다. 해설사의 말 속에는 아이도 어른도 각자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가져갈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충의사 앞에서 숭고한 희생과 용기를 기리며, 감사의 마음을 담아 묵념하는 천안지회 회원들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세 개의 문과 계단을 지나면 충의사가 나타납니다. 법의 법사님이 대표로 향을 올리는 동안, 도반들은 고요히 묵념했습니다. 배용순 여사 무덤 앞에 있는 분수 연못 충의사 옆문을 나서는 길에 분수 연못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앞이 배용순 여사의 무덤입니다. 해설이 조용히 이어지는 가운데, 발걸음을 잠시 멈췄습니다. 남편과 따로 모셔진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남편 사당이 여기 있으니 내가 잘 지키겠다라는 유언을 남겼거든요. 남편을 먼저 보내고, 곁에서 지키겠다고 다짐한 여인. 잘 깎인 봉분이 말없이 그 아픔을 대신하는 것 같습니다. 기념관 안에서, 독립운동가 이전에 농촌 계몽가였다. 장부출가생불환, 윤봉길 의사가 집을 떠나면서 남긴 유서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자, 정면을 가득 채운 글자가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장부출가생불환 ’ 은 장부가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김선자 님은 전시된 대들보 앞에 서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울림 때문인지 목소리가 한층 커졌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독립운동가로 알려졌지만, 이전에 농촌계몽 운동가였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오치서숙이라는 서당을 찾아 한학을 공부했어요.“ 어느 날 윤봉길은 공동묘지에서 여러 개의 묘표를 손에 들고 헤매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글을 읽지 못해 아버지 무덤을 찾지 못한 청년은 누군가에게 물어볼 생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그 장면이 윤봉길 의사를 바꿨습니다. 무지가 나라를 잃게 한 원인이라 생각하고, 지식과 깨어있는 의식이 없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부흥원 상량문이 적힌 대들보 사연은 충의당 사랑방 야학으로 이어졌습니다. 작은 촛불 하나로 시작한 배움의 자리는 점차 커져 부흥원 건립으로 계승되었습니다. 대들보 상량문에는 당시 관례이던 일본 연호 대신 단기 조선 개국 4,261년이라고 써넣었습니다. 이런 부분도 윤봉길 의사의 대범함이 느껴지지요. 해설사의 말에 회원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듬해 윤봉길은 농촌 개혁운동 단체인 월진회를 조직했고 지금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소녀와 기념관 영상 1932년 4월 29일 도시락 폭탄을 들고 농촌계몽만으로는 진정한 행복이 이어질 수 없다라고 판단한 윤봉길은 거사를 택합니다. 떠나기 전 아내 배용순에게 물 한 잔을 부탁했지만, 차마 얼굴을 보고 떠나기가 힘들어, 그냥 집을 나섰습니다. 그가 남긴 문장, 장부출가생불환에 모든 결의가 담겨 있습니다. 한인 애국단에 입단 후 찍은 윤봉길 의사 사진과 해설사 윤봉길은 예산군 삽교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 칭다오로 건너간 후, 장사하며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일왕 생일날 일본군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상해사변 전승식을 거행한다는 첩보를 입수합니다. 김구 선생을 만나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고, 김홍일 장군이 주선한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을 지니고 단상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폭탄은 정확히 떨어졌고, 윤봉길 의사는 그 자리에서 체포됩니다. 5월 25일 사형 선고, 같은 해 12월 19일 아침 미간에 총을 맞고 순국했습니다. 향년 스물다섯이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묶였던 형틀과 처형당하는 모습 이 일이 있고 중국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 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라고 말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파장은 훗날 카이로 회담까지 이어집니다. 설명을 끝내자, 주변이 잠시 고요해졌습니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지만 기념관에서 들으니 그 시절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14년 동안 사람들이 밟고 다니다 해방이 되고 윤봉길 의사 유골을 수습하고자 김구 선생님이 수습단을 꾸렸는데,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수소문 끝에 당시 교도소 간수였던 분의 협조를 얻어 위치를 찾았는데, 공동묘지 입구 계단 밑에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매장했다는 거예요. 14년 동안이나 사람들이 밟고 다녔다는 거지요.“ 말이 끊긴 자리에 침묵이 내려앉습니다. 아직도 손뼈 7개는 수습하지 못한 채 일본 암장지에 있습니다. 지금은 서울 효창공원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으며, 예산군 덕산면과 서울, 중국 상하이에 기념관이 있고, 일본 가나자와 공동묘지 입구에도 기념비와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많은 나라에 흩어진 그 흔적들이, 윤봉길 의사의 삶이 얼마나 넓은 세상에 큰 울림을 주었는지 말해줍니다. 저한당·광현당, 그리고 도중도에서의 점심 기념관을 나와 약 300m를 걸으면 저한당과 광현당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건지겠다는 신념을 품고 사람들과 함께 글을 읽던 작은 초가집 해가 잘 드는 마당을 둘러보며, 아직도 글 읽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저한당과 광현당 도중도는 삽교천 상류의 물길이 바뀌며 생겨난 섬 안의 섬입니다. 회원들은 그늘에 자리를 잡고 점심 공양을 함께 했습니다. 그동안 들은 윤봉길 의사 이야기를 떠올리며 복습 겸 퀴즈 게임을 펼쳤습니다. 무엇보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6월 현충일이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저물어갑니다. 도중도 다리 도중도 다리에 새겨진 글귀 함께 걸었기에 지회장 박은숙 님에게 오늘 역사 기행의 의미를 질문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오프라인으로 만나는 기회가 많이 줄었어요. 모둠 활동으로는 만나지만, 지회 단위로 함께하는 시간은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자리가 더없이 소중합니다. 온라인이 너무 익숙해진 지금, 이렇게 자주 만나고 즐겁게 지내다 보면, 더 많은 분이 자연스럽게 함께하지 않을까요.“ 정토회 일정이 워낙 촘촘하고, 오랜 온라인 생활이 몸에 밴 탓일까? 소수의 참여 인원으로 시작한 발걸음이 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역사 기행은 함께 걸으며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이야기를 듣고, 같은 감동을 나누는 경험이 되고 그것이 쌓이면서 지회는 단단해지고, 도반의 의미는 더욱 깊어집니다. 그 평화가 지금 우리에게 닿아 있다 윤봉길 의사의 생을 따라 걸으면 한 가지 선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폭탄을 던진 사람이기 전에, 글을 모르는 이웃을 보며 마음 아파하던 청년이었습니다. 지식으로 사람을 깨우고, 깨어난 사람들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야학을 열고, 작은 초가집에서 함께 글을 읽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이 윤봉길 의사를 거사로 이끌었고, 그의 희생이 임시정부를 살리고, 카이로 회담에 영향을 미치고, 평화의 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 어록 탑 윤봉길 의사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글을 읽고 서로 알아볼 수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그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사는 곳입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많은 이들의 헌신 위에 우리가 누리는 평화가 있습니다. 그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기억하고, 이어가는 것이 우리가 현충일에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 될 것입니다. 내년 현충일에는 더 많은 도반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싶습니다. 글, 사진김종호 편집여수연

통일 2026.07.10. 1,021 읽음

정토불교대학

삶을 바꾸는 공부
정토불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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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체득하는
정토경전대학

※ 정토불교대학 졸업 후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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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생 이야기

우연히 찾아온 정토불교대학과의 만남

윤정숙 님 - 2018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지금까지 남보다 더 가지고, 더 빛나고, 더 잘 입고, 더 잘 살기 위해 살았는데, 어느 날 문득 이게 무슨 큰 의미가 있나? 싶었죠. 우연히 친구와 얘기하다가 알게 된 정토불교대학.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삶의 기준점을 찾고 싶어 입학하게 되었지요. 집착과 이기심이라는 어리석음으로 내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지금은 주변의 모든 것에 감사하며 제 삶에 만족해요.

부부에서 도반으로

이용준·김서화 님 - 2019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부부의 인연으로 만나 이제는 도반으로 서로 힘이 되어 주고 있어요. ‘아내는 이러한 사람’, ‘남편은 이러한 사람’라는 고정관념이 내 삶을 고단하고 힘들게 만들었음을 불법공부를 통해 알게 되었어요. 잘 풀리지 않는 부분도 법문을 들으면 해소가 되고 처방전을 받은 듯 시원해요.

이혼소장을 멈추게 한 정토불교대학

최영미 님 - 2015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13년 내내 총성없는 전쟁과 같았던 결혼생활. 이혼장을 쓰던 중에 정토불교대학 입학홍보문자를 받게 되었어요. 남편과의 싸움은 제 인생의 풀지 못하는 숙제 같았는데, 그게 해결되니까 풀지 못하는 숙제가 없어졌어요. 제가 변하고 나니 남편이 불교대학 홍보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