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새길

정토불교대학

학사일정 : 2026년 9월 20일(일) ~ 2027년 1월 30일(토)
접수마감 : 2026년 9월 3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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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70년

백중기도

입재 : 7월8일(수) 오전10시 / 회향 : 8월 27일(목) 오전 10시
기도접수 : 7월 1일(수) ~ 8월 29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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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법륜스님과 함께하는

생방송 여름 명상

4박5일 / 7월 24일(금) ~ 7월 28일(화) *한국시간 기준
6박7일 / 7월 24일(금) ~ 7월 30일(목) *한국시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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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을 위한 정토불교대학

정토담마스쿨

2026년 하반기 신입생 모집
마감 : 2026년 8월 4일 / 개강: 2026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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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프로그램 : 도심 속 절캉스 / 1080배 정진 / 명상
장소 : 정토사회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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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오픈!

오늘, 첫 만남 입니다

정토회가 처음인 분을 위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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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행자의 하루

100번이 99번이 되기까지

열심히 살았지만 그럴수록 더 불행해졌다는 김성민 님. 깨달음의 장을 시작으로 정토회에 발을 들였고, 백일출가를 마치고 지금은 수련원 행자원에서 스태프로 있습니다. 이번 백일출가 소감문에는 그동안 단골 소재였던 만 배 정진 이야기는 없습니다. 대신 백일출가를 하면서 겪은 분별 에피소드와 함께 백일출가를 마치고 나서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잘 보여 줍니다. 소제목을 붙이자면, 백일출가, 그 후 이야기 쯤이 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의 변화를 잘 보여줘서 저런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나도 백일출가를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가득 들게 만드는 글입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더 불행해지는 역설 배수로 청소 중에.right 사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수험 생활을 4년이나 했으나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어렵사리 이른바 명문 대학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했고, 장학금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더 불행해지는 것만 같았고,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학점과 스펙을 쌓으면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왜일까? 오히려 더 불행해졌습니다. 과연 취업해서 대기업에 들어가면 행복해질까? 매달 월급이 꼬박꼬박 들어오면 행복해질까? 지금도 불행한데, 직장에서 일에 치이고 월급날만 기다리며 부품처럼 쓰이다가 나가라는 말 한마디에 나가야 하는 삶이 행복할까? 자취방에서 그런 생각을 하며 1년을 보낸 탓인지, 공부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탓인지 심한 번아웃이 왔습니다. 학교 수업을 들어도 머리가 멈춘 듯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억지로 머리에 구겨 넣으려 몇 번을 써가며 공부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행의 길에 발을 담그다 수험 생활을 하면서 유튜브에서 법륜 스님 즉문즉설을 보았습니다. 당시 제 생활의 숨구멍이었습니다. 즉문즉설에서 스님이 질문자들에게 ‘깨달음의 장’에 가보라고 권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왔습니다. 그 말씀이 자주 떠올랐고, 공부도 안되고 학교 다닐 기력도 없던 어느 날, ‘이럴 바엔 깨장에 가보자’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휴학을 신청하고 깨장에 참여했습니다. 처음 신청할 때는 많이 망설였습니다. 당시 법륜 스님은 ‘즉문즉설 하시는 분’ 정도로만 알았고, 정토회가 어떤 곳인지도 몰랐습니다. 살아갈 방법을 찾지 못해 절박했습니다. 사이비라도 속는 셈 치고 해보자는 절박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깨장 수련을 계기로 정토회에 깊이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수련을 마친 후 마음이 가뿐해졌습니다. ‘내가 별문제 없는 사람이구나’, ‘이 문제의 뿌리가 부모님과의 관계에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내자인 법사님이 백일출가를 권유하셨습니다. 시기가 맞지 않아 ‘바라지장’과 ‘49일 문경살이’를 거쳐 백일출가를 마쳤고, 지금은 수련원 행자원에서 스태프로 있습니다. 불교박람회에서 백일출가에서 발견한 어머니의 손길 백일출가에서 설거지, 걸레질, 걸레 빨기, 해우소 청소, 분리수거 등 여러 일을 했습니다. 백일출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께 감사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30일, 50일이 지나면서 정말 감사하는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이곳에서 하는 일들은 사실 어머니가 그동안 계속 해주시던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집은 늘 정리되어 있었고, 밥은 차려져 있었습니다. 화장실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은 입고 나갈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일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아 그 모든 것이 누군가의 손을 거친 것이었고, 어머니가 늘 해준 것이구나’ 어머니가 씻은 그릇에 담긴 밥을 먹으면서도 어머니가 해준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직접 설거지를 하고 밥을 짓고, 밥상을 차려 함께 먹어보니 알겠습니다. ‘아, 이 모든 것을 그동안 어머니가 대신 해주었구나. 밥을 지으면서 이 밥을 먹고 아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겠구나’하는 마음이 비로소 들었습니다. 지켜야 할 규칙 vs. 깨야 할 아집 백일출가 수련을 마치고 행자원 스태프로 있으면서 유독 한 도반과 성격이 맞지 않아 갈등을 겪었습니다. 서로 생활 습관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 도반은 백일출가 때 배운 생활 규칙을 자기 마음대로 적용했습니다. 저는 ‘왜 저러지?’ 분별하며 다른 도반들에게도 그 도반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규칙은 나와 남이 서로 편하게 지내기 위해 만드는 것인데, 그 도반은 그걸 무시하고 자기 편할 대로 했습니다. 빨래 건조대를 방에 가져와 옷들을 널기도 하고, 땀에 젖은 티셔츠를 사물함 앞에 걸어두어 방에 들어오면 땀 냄새가 나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건물 내부 화장실이 환자용으로 사용 금지되어 있는데도, 그 도반이 사용했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복도에 나가자 화장실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 도반에게 화장실을 사용했느냐고 묻자 “급해서 그랬다. 그만큼 급해서 사용하면 내가 환자지 뭘 그러냐”며 적반하장격으로 말했습니다. 그 순간, ‘아, 이 사람은 말이 안 통하는구나. 그냥 제멋대로구나’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때부터 마음 나누기는 ‘분별 나누기’로 변질되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은 모두 말했고, 그 도반이 한마디 던지면 저도 바로 맞받아쳤습니다. 그 도반이 제가 절 할 때 관음정근 소리가 거슬린다고 하기에, 저는 땀냄새가 거슬린다고 했습니다. 관음정근을 일부러 더 크게 했습니다. 제 말투가 거칠다고 하기에 “자기 말투는 재수 없는 거 모르나?”라고 비꼬았습니다. 여래원에서 그때 저는 비난하는 제 모습이 정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규칙을 어겼으니 비난받을 만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설사 그렇다 해도 저의 반응이 과하다고 했습니다. 도반과 갈등에 대해 다른 보살님과 도반들에게 상담했으나 돌아오는 반응은 비슷했습니다. “분별 낼 시간에 네 마음을 들여다봐라”, “어떤 경우에도 화합이 최우선이다”, “너나 잘해라” 등. 여러 사람의 반응을 들으며 깨달았습니다. 이건 내 문제였습니다. 제가 옳고 그름의 기준이 너무 강한 탓이었습니다. 마음 나누기 시간에 그 도반은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하는 만큼 상대도 해야 한다는 내 기준을 들이댄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 도반은 자기가 해결하고 싶은 만큼 공부를 잘했습니다. 그렇게 그 도반은 자기가 공부하기로 정한 시간만큼 공부하고 회향했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이해하는 마음을 내어 “도반님도 잘 안돼서 힘들지요?”라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넸으면 어땠을까. 저 역시 고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처럼 상대도 그랬을 겁니다. 같은 길을 걷는 도반으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기다려주었다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내가 안 고쳐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상대방의 이해를 바라면서, 정작 상대의 부족한 모습에는 견디지 못하는 저 자신을 보았습니다. 효율 뒤에 숨긴 ‘내가 옳다’ 다른 도반이 일수행 안내를 하는 모습에 분별심이 일어났습니다. 일을 시키려면 구역을 나누고 시간을 정해 “언제까지 끝내주세요”라고 안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도반은 그런 설명없이 그냥 “일하세요” 하고 던져두었습니다. ‘그러면 수련하는 행자님들이 어떻게 일을 하라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모호하게 지시하면서 “시간없다”는 말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분별심이 더 일었습니다. “아니, 그러면 사람들이 해놓은 양을 보고, 적게 한 사람은 더 빨리하라고 안내하고, 어떻게 하면 더 빨리 할 수 있는지 알려줘야지. 말로만 ‘시간없다’고 하면 어쩌자는 거냐?”고 도반에게 따져 물으며 열을 올렸습니다. 이후 300배 정진을 하면서 참회했습니다. 그 도반은 이전에도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게 쉽지 않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건 그 도반의 성향이었습니다. 혼자 맡은 일은 누구보다 잘했습니다. 저를 포함해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단지 그 사람의 특성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막상 그 순간에는 분별심이 생겨 거침없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 크게 잘못된 일도 아니었고, 그 사람이 모르면 그냥 알려주면 될 일이었습니다. 괜히 열 올릴 필요는 없었습니다. ‘아, 내가 또 밖을 향했구나. 나도 못하는 게 있으면서 남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못 하면 분별하고 나 잘났다고 그렇게 쏘아댔구나. 나는 뭐 그리 잘한다고 그랬을까. 또 눈이 확 돌아가면서 그랬구나.’ 그 도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만 옳다’는 생각으로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 상대에게는 냉정하게 구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일수행 중에 숙이고 또 숙이기 내 마음을 보겠다고 백일출가를 했으면서 밭일을 같이하는 도반에게 분별합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매번 참회하면서도 또 그렇게 합니다. 그러고는 또 참회합니다. 도반들도 이런 제 꼴을 압니다. 그런데도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스스로 탓하고 우울해하던 마음이 이제는 밖으로 향하며 독이 묻어나옵니다. 정신이 들면 도반에게 미안하다고 합니다. 저와 함께 살아줘서 고맙다고 고개를 숙입니다. 도반은 저에게 자주 말합니다. “행자님은 별일도 아닌 걸 가지고 참 화를 많이 낸다”고. 맞는 말입니다. 저 역시 제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고 있고, 아마 앞으로도 또 그럴 겁니다. 정진을 꾸준히 하며 돌이키다 보면 100번 하던 게 99번 되고 98번 되고 합니다. 단시간에 100번 하던 것이 한 번 하는 수준으로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정말 천천히, ‘되는 게 맞긴 해?’ 싶을 만큼 서서히 됩니다. 그래서 제가 또 그렇게 할 거라는 걸 압니다. 그 도반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화내더라도, 늦게라도 알아차리고 미안하다며 확 숙이는 것으로 택했습니다. 그러면 도반은 이해해줍니다. 그렇게 살고 있고, 이렇게 사는 게 재밌습니다. 특별한 것 없는 행복 농사 일수행 중에.right 수련원에서는 어느 것 하나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제시간에 밥을 하고 밥을 먹습니다. 걱정할 것도 별로 없어서 예전에는 뭘 그렇게 걱정하며 살았을까 싶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함께 밭에서 풀을 뽑으며 웃을 때도 있고, 같이 밥을 하다가 다툴 때도 있습니다. 그냥 이런저런 일을 하며 별걱정 없이, 특별한 일 없이 살아갑니다. 그래도 살아집니다. 오히려 이렇게 사니 더 좋습니다. 예불문에 ‘명훈가피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식하지 못하나 사실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고있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인식하지 못한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커지면서 예전의 분노는 줄었습니다. 그때 ‘힘들었구나, 그래도 참 감사한 일이 많았네’를 알고 나니 그 일이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실제로도 별일이 아닙니다. 못해도 큰 일이 생기지 않고, 못한다고 욕을 좀 먹어도 별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하다 보면 잘하게 됩니다. 그리고 욕하는 사람을 보며 ‘저 부분은 왜 저리 못하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그 모습을 보며 저도 욕합니다. 또 어떤 때는 화가 나서 씩씩대다가도 밥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다 지나갑니다. 뭐 대단할 일이랄 게 없습니다. 사는 게 별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냥 밥 먹고, 청소하고, 때 되면 잡니다.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합니다. 불안하지 않습니다. 충분합니다. 제가 부족하다고 스스로 학대해 온 일들이 내가 그랬었나? 싶을 만큼 남의 일처럼 느껴집니다. 지금은 충분하고, 이대로 제가 좋습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좋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부럽지 않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사는 게 좋고, 이런 마음으로 쭉 살고 싶습니다. 이 글은 2025년 12월 호에 수록된 백일출가 소감문입니다. 글김성민 편집월간정토 편집팀

월간정토 2026.07.20. 188 읽음

정토행자의 실천

나라를 위해 자신의 심장을 터트린 젊은 영웅을 찾아_천안지회 현충일 역사 기행

유독 높고 청명한 6월 현충일 아침, 천안지회 도반들은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으로 향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삶을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대전충청지부 지회 단위로는 첫 역사 기행입니다. 목적지는 윤봉길 의사 생가지와 사당, 기념관이 모여 있는 덕산면이었습니다. 이른 시간에 방문객은 많지 않았고, 주차장 옆 태극기가 바람에 조용히 흔들렸습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비 오늘 이곳을 찾은 이유 10시가 되자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나타났습니다. 실천활동담당 김순자 님에게 이 자리를 마련한 사연을 물었습니다. 천안지회는 천안에서 서천까지 넓은 지역에 퍼져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교과서에서 스쳐 가듯 배우는 독립운동가잖아요. 반면 사람들은 그의 정신, 농촌 계몽운동 등은 잘 모릅니다. 이번 기회에 더 자세하게 알면 좋겠다는 취지로 시작했습니다.“ 천안 주변에는 이순신, 유관순, 김시민, 이동녕, 홍대홍 등 걸출한 인물이 많습니다. 누구나 윤봉길 의사를 잘 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모른다는 것이 이번 여행의 출발점이며 예산군 덕산면을 택한 이유입니다. 월진회 회원 해설사, 정토회와의 인연 첫 마음 나누기를 마칠 무렵, 월진회 회원인 해설사 김선자 님이 도착했습니다. 월진회는 윤봉길 의사가 직접 조직한 농촌 개혁단체입니다. 여기서 해설하는 동안 정토회 회원들이 많이 다녀갔어요. 그래서 저도 법륜스님 팬이 됐습니다. 웃음 섞인 말 한마디에 회원들의 어깨가 풀렸습니다. 아이랑 같이 오신 사람은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는 그냥 두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듣고 갑니다. 해설사의 말 속에는 아이도 어른도 각자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가져갈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충의사 앞에서 숭고한 희생과 용기를 기리며, 감사의 마음을 담아 묵념하는 천안지회 회원들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세 개의 문과 계단을 지나면 충의사가 나타납니다. 법의 법사님이 대표로 향을 올리는 동안, 도반들은 고요히 묵념했습니다. 배용순 여사 무덤 앞에 있는 분수 연못 충의사 옆문을 나서는 길에 분수 연못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앞이 배용순 여사의 무덤입니다. 해설이 조용히 이어지는 가운데, 발걸음을 잠시 멈췄습니다. 남편과 따로 모셔진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남편 사당이 여기 있으니 내가 잘 지키겠다라는 유언을 남겼거든요. 남편을 먼저 보내고, 곁에서 지키겠다고 다짐한 여인. 잘 깎인 봉분이 말없이 그 아픔을 대신하는 것 같습니다. 기념관 안에서, 독립운동가 이전에 농촌 계몽가였다. 장부출가생불환, 윤봉길 의사가 집을 떠나면서 남긴 유서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자, 정면을 가득 채운 글자가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장부출가생불환 ’ 은 장부가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김선자 님은 전시된 대들보 앞에 서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울림 때문인지 목소리가 한층 커졌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독립운동가로 알려졌지만, 이전에 농촌계몽 운동가였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오치서숙이라는 서당을 찾아 한학을 공부했어요.“ 어느 날 윤봉길은 공동묘지에서 여러 개의 묘표를 손에 들고 헤매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글을 읽지 못해 아버지 무덤을 찾지 못한 청년은 누군가에게 물어볼 생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그 장면이 윤봉길 의사를 바꿨습니다. 무지가 나라를 잃게 한 원인이라 생각하고, 지식과 깨어있는 의식이 없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어요. 부흥원 상량문이 적힌 대들보 사연은 충의당 사랑방 야학으로 이어졌습니다. 작은 촛불 하나로 시작한 배움의 자리는 점차 커져 부흥원 건립으로 계승되었습니다. 대들보 상량문에는 당시 관례이던 일본 연호 대신 단기 조선 개국 4,261년이라고 써넣었습니다. 이런 부분도 윤봉길 의사의 대범함이 느껴지지요. 해설사의 말에 회원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듬해 윤봉길은 농촌 개혁운동 단체인 월진회를 조직했고 지금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소녀와 기념관 영상 1932년 4월 29일 도시락 폭탄을 들고 농촌계몽만으로는 진정한 행복이 이어질 수 없다라고 판단한 윤봉길은 거사를 택합니다. 떠나기 전 아내 배용순에게 물 한 잔을 부탁했지만, 차마 얼굴을 보고 떠나기가 힘들어, 그냥 집을 나섰습니다. 그가 남긴 문장, 장부출가생불환에 모든 결의가 담겨 있습니다. 한인 애국단에 입단 후 찍은 윤봉길 의사 사진과 해설사 윤봉길은 예산군 삽교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 칭다오로 건너간 후, 장사하며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일왕 생일날 일본군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상해사변 전승식을 거행한다는 첩보를 입수합니다. 김구 선생을 만나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고, 김홍일 장군이 주선한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을 지니고 단상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폭탄은 정확히 떨어졌고, 윤봉길 의사는 그 자리에서 체포됩니다. 5월 25일 사형 선고, 같은 해 12월 19일 아침 미간에 총을 맞고 순국했습니다. 향년 스물다섯이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묶였던 형틀과 처형당하는 모습 이 일이 있고 중국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 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라고 말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파장은 훗날 카이로 회담까지 이어집니다. 설명을 끝내자, 주변이 잠시 고요해졌습니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지만 기념관에서 들으니 그 시절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14년 동안 사람들이 밟고 다니다 해방이 되고 윤봉길 의사 유골을 수습하고자 김구 선생님이 수습단을 꾸렸는데,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수소문 끝에 당시 교도소 간수였던 분의 협조를 얻어 위치를 찾았는데, 공동묘지 입구 계단 밑에 사람들이 밟고 다니도록 매장했다는 거예요. 14년 동안이나 사람들이 밟고 다녔다는 거지요.“ 말이 끊긴 자리에 침묵이 내려앉습니다. 아직도 손뼈 7개는 수습하지 못한 채 일본 암장지에 있습니다. 지금은 서울 효창공원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으며, 예산군 덕산면과 서울, 중국 상하이에 기념관이 있고, 일본 가나자와 공동묘지 입구에도 기념비와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많은 나라에 흩어진 그 흔적들이, 윤봉길 의사의 삶이 얼마나 넓은 세상에 큰 울림을 주었는지 말해줍니다. 저한당·광현당, 그리고 도중도에서의 점심 기념관을 나와 약 300m를 걸으면 저한당과 광현당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건지겠다는 신념을 품고 사람들과 함께 글을 읽던 작은 초가집 해가 잘 드는 마당을 둘러보며, 아직도 글 읽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저한당과 광현당 도중도는 삽교천 상류의 물길이 바뀌며 생겨난 섬 안의 섬입니다. 회원들은 그늘에 자리를 잡고 점심 공양을 함께 했습니다. 그동안 들은 윤봉길 의사 이야기를 떠올리며 복습 겸 퀴즈 게임을 펼쳤습니다. 무엇보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6월 현충일이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저물어갑니다. 도중도 다리 도중도 다리에 새겨진 글귀 함께 걸었기에 지회장 박은숙 님에게 오늘 역사 기행의 의미를 질문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오프라인으로 만나는 기회가 많이 줄었어요. 모둠 활동으로는 만나지만, 지회 단위로 함께하는 시간은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자리가 더없이 소중합니다. 온라인이 너무 익숙해진 지금, 이렇게 자주 만나고 즐겁게 지내다 보면, 더 많은 분이 자연스럽게 함께하지 않을까요.“ 정토회 일정이 워낙 촘촘하고, 오랜 온라인 생활이 몸에 밴 탓일까? 소수의 참여 인원으로 시작한 발걸음이 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역사 기행은 함께 걸으며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이야기를 듣고, 같은 감동을 나누는 경험이 되고 그것이 쌓이면서 지회는 단단해지고, 도반의 의미는 더욱 깊어집니다. 그 평화가 지금 우리에게 닿아 있다 윤봉길 의사의 생을 따라 걸으면 한 가지 선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폭탄을 던진 사람이기 전에, 글을 모르는 이웃을 보며 마음 아파하던 청년이었습니다. 지식으로 사람을 깨우고, 깨어난 사람들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야학을 열고, 작은 초가집에서 함께 글을 읽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이 윤봉길 의사를 거사로 이끌었고, 그의 희생이 임시정부를 살리고, 카이로 회담에 영향을 미치고, 평화의 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매헌 윤봉길 의사 어록 탑 윤봉길 의사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글을 읽고 서로 알아볼 수 있는 세상이었습니다. 그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사는 곳입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많은 이들의 헌신 위에 우리가 누리는 평화가 있습니다. 그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기억하고, 이어가는 것이 우리가 현충일에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 될 것입니다. 내년 현충일에는 더 많은 도반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싶습니다. 글, 사진김종호 편집여수연

통일 2026.07.10. 971 읽음

정토불교대학

삶을 바꾸는 공부
정토불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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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체득하는
정토경전대학

※ 정토불교대학 졸업 후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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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생 이야기

우연히 찾아온 정토불교대학과의 만남

윤정숙 님 - 2018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지금까지 남보다 더 가지고, 더 빛나고, 더 잘 입고, 더 잘 살기 위해 살았는데, 어느 날 문득 이게 무슨 큰 의미가 있나? 싶었죠. 우연히 친구와 얘기하다가 알게 된 정토불교대학.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삶의 기준점을 찾고 싶어 입학하게 되었지요. 집착과 이기심이라는 어리석음으로 내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지금은 주변의 모든 것에 감사하며 제 삶에 만족해요.

부부에서 도반으로

이용준·김서화 님 - 2019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부부의 인연으로 만나 이제는 도반으로 서로 힘이 되어 주고 있어요. ‘아내는 이러한 사람’, ‘남편은 이러한 사람’라는 고정관념이 내 삶을 고단하고 힘들게 만들었음을 불법공부를 통해 알게 되었어요. 잘 풀리지 않는 부분도 법문을 들으면 해소가 되고 처방전을 받은 듯 시원해요.

이혼소장을 멈추게 한 정토불교대학

최영미 님 - 2015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13년 내내 총성없는 전쟁과 같았던 결혼생활. 이혼장을 쓰던 중에 정토불교대학 입학홍보문자를 받게 되었어요. 남편과의 싸움은 제 인생의 풀지 못하는 숙제 같았는데, 그게 해결되니까 풀지 못하는 숙제가 없어졌어요. 제가 변하고 나니 남편이 불교대학 홍보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