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들쑤시던 고통이 가라앉다
돈도 빚도 다 제가 만든 상인 줄 모르고, 스스로 매몰되어 이십 년을 빚이라는 고통 속에 살았음을 깨달았다는 주말숙 님. ‘너는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할 아이’라는 엄마의 입버릇에 ‘사랑고파병’을 앓았던 아이가 일산지회를 키우는 모자이크 붓다가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아름다운 보리수나무 주말숙 님의 수행담 듣겠습니다. 병원에 가봐라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었습니다. 한 질문자의 질문에 스님이 답했습니다. 병원에 가봐라.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질문자는 저와 너무 닮았으며, 질문도 제가 하고 싶었던 질문이었습니다. ‘병원에 가라니, 그러면 나도 병원에 가야 된다는 말이잖아’ 저는 단 한 번도 제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극히 정상이라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스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저도 환자임을 알았습니다. 그 후 지난 날을 돌이켜 저의 업식을 찾았습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2025년 아파트 앞 마당, 주말숙 님.right 저는 어머니가 나이 들어 생긴 원치 않던 자식이었습니다. 8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나 이름도 아무렇게 지은 ‘말숙’입니다. 언니의 책과 교복을 물려받는 것은 당연했고, 까만색이 보라색으로 바랜 교복을 입고 친구들에게 창피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엄마는 장에 가거나 어디를 갈 때 저를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제가 손녀로 보일까 불편해했습니다. “내가 왜 너를 낳아서 낳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 늦은 나이에, 다들 나를 네 할미라고 한다. 내가 남사스럽다.” 저는 사랑 받는 막내가 아니라 엄마의 몸에 쓸데없이 붙은 혹 같은 존재였습니다. “너는 태어나지 말아야 했을 아이였어.” 기억이 여기에 닿자, 마음 깊은 곳에서 헉 하고 올라왔습니다. ‘아, 이것이구나’ 제가 지닌 불안과 조바심, 그리고 낮은 자존감은 태어날 때부터 ‘온전한 나’로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무엇으로든 나를 삼으려고 했던 그 이유가 이것으로부터 왔구나’ 펑펑 울었습니다. 정진할 때도 울고, 생각날 때마다 울었습니다. 그렇게 한 달 넘게 울면서 저 자신을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정진하면서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완벽한 쥐약, 어둡고 긴 터널 속으로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전교 1, 2등을 다투던 언니가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는 것을 보고, 저는 부모님께 한마디 불평도 못 하고 실업계 고등학교에 갔습니다. 졸업 후 자취하고 회사에 다니며 대학 진학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을 때, 결혼하면 행복하게 해 주고 대학도 보내 주겠다는 남편의 말에 홀딱 넘어가 결혼했습니다. 제가 완벽한 쥐약을 먹었다는 것은 한참 지난 후 알았습니다. 결혼 후 한 해가 지났을 때, 남편은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 육백만 원 전셋집에 살았는데, 빚이 천사백만 원이라고 했습니다. 어찌나 놀랐는지, 하지만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남편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수입이 괜찮았지만, 수입을 훨씬 웃도는 돈을 쓰는 버릇이 고약했습니다. 도박, 증권, 사치로 돈을 탕진했습니다. 2025년 여름 템플스테이 남편은 처음에는 1차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고, 나중에는 2차 금융권도 모자랐습니다. 빚은 끝없이 이어졌고, 월말이면 돈 갚으라고 전화통에 불이 났습니다. 집달관이 쳐들어 와 집안 살림에 빨간딱지를 붙이고 험상궂은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올까 두려웠습니다. 대문 밖에서 발소리가 나면 빚쟁이들이 들이닥치는 것 같아 늘 가슴을 졸였습니다. 두려움에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일조차 힘들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괴로운 날을 보내며 죽어야만 이 고통이 끝날 것 같아 어떻게 죽을지 고민했습니다. 남편의 빚은 그렇게 이십 년 동안 제 삶을 어둡고 긴 터널 속에 가두었습니다. 고난의 세월, 이혼조차 할 수 없어 남편과는 사내 결혼이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다니는 회사 사람들이 저를 알았습니다. 어느 날 회사로부터 남편이 횡령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빚에 쫓기던 남편이 회삿돈마저 손댄 것입니다. 그 순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아득한 절망감이 밀려왔습니다. 회사 사람들에게 부끄럽고 창피했습니다. 법원 집달관에게 전세 보증금을 뺏기고 지하 월세방에서 살던 때입니다. 장맛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던 날이었습니다. 부엌 싱크대 쪽에서 갑자기 물기둥이 치솟아 오르며 집안으로 물이 차기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 동안 양동이로 물을 퍼 날라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비는 계속 내리고, 결국 지쳐 방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습니다. 그러다 남편에게 전화해 욕이란 욕은 있는 대로 퍼부었습니다. 2024년 평화 모둠활동 그렇게 살다 남편을 남편으로 포기한 사건이 생겼습니다. 제가 방송통신대학교를 졸업한 후, 공부방을 운영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남편의 빚 사고도 잠잠했습니다. 살면서 그나마 평온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보지 못했던 채무 변제 독촉장이 다시 집으로 날아왔습니다. 순간 눈이 뒤집혔습니다. ‘그래, 이제 너도 죽고 나도 죽는 수밖에 없겠구나.’라며 방 안으로 들어섰는데, 더운 여름이라 남편은 웃옷을 훌렁 벗고 있었습니다. 방 안의 파리채가 눈에 띄었습니다. 부들부들 떨면서 파리채를 움켜쥐었습니다. 파리채는 속에 철사가 있어 맞으면 피부에 자국이 날 정도로 아픈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이 뒤집힌 저는 남편을 사정없이 후려쳤습니다. “이제는 나도 내 마음대로 살 거다. 그래, 쓰고 싶으면 실컷 써라. 내가 다 갚아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써라.” 하면서 미친 듯이 남편을 때렸습니다. 정신 나간 사람이 칼춤 추듯 했습니다. 이혼도 여러 차례 결심했습니다. 처음 이혼 신청은 조정 기간을 거쳐 판결만 남겨 둔 상태였습니다. 당연히 이혼 결정이 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했습니다. 남편은 빚 때문에 매달 갚아야 하는 이자와 빠듯한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부산에 친구가 운영하는 공장에 막노동이라도 하겠다며 갔습니다. 그곳에서 기계에 눌려 손가락 두 개가 잘리는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입원한 남편은 이혼 법정에 출석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 이혼 결심은 그렇게 무산되었습니다. 그 후로 두 차례 이혼을 결심했지만, 무산되어 이혼을 포기했습니다. 남편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여러 차례 이혼 신청과 취소를 반복하며 법원에 소문이 났을 것 같아 창피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2025년 정토사회문화회관 도량 청정 봉사 후, 향제법사님과 천 일 동안 백팔 배 빚으로 답답한 마음에 가까운 절을 찾았습니다. 법당에서 부처님을 바라보며, “부처님 제발 지금 제가 처한 이 상황을 무사히 넘어가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부처님이 시키는 무슨 일이라도 다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법회에 참석해 예불하고, 스님의 법문을 듣는데 도무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어쩌다 책에서 읽은 선문답 같았습니다. 저의 바람은 부처님이든 누구든 제가 직면한 고통으로부터 당장 헤어나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조급한 마음으로 이 뭣고?를 수행하기에 제 그릇이 터무니없이 작았습니다. 그래서 공양간에서 일했습니다. 공양간 일을 마치면 공양간 보살님이 먹을 것을 잔뜩 챙겨 주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아는 불교란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에게 정토회라는 곳에서 천 일 동안 108배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순간, ‘아 그건 도대체 뭐지? 어떻게 천 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분명 무언가 얻는 게 있으니까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몸으로 하는 절은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정토회의 행복학교부터 시작했습니다. 행복학교에서 기대 이상의 재미가 붙어 진행자님의 권유에 망설임 없이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천일결사 입재 안내가 있자 바로 ‘저요’ 하고 손들고 천일결사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전법회원이 될 때까지 정토회에서의 수행 과정은 일사천리였습니다.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전법회원이 되어 불교대학을 진행하면서 저와 성격이 다른 도반을 만났습니다. 저는 유교적 성향이 강한 아버지에게 정한 것이 있으면 꼭 지켜야 하고, 특히 다른 사람과의 약속은 반드시 어기지 말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정해진 규칙과 시간에 자유로운 도반을 만나 일 하니 무척 힘들었습니다. 약속했던 총연습 시간에 늦고, 학생들의 실천 활동도 자신의 시간에 맞추길 원했습니다. 저는 그 도반에게 “저는 원칙을 세우면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도반님은 너무 자유로운 분이라 제가 참 많이 불편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025년 오프라인 불교대학 진행자들과 며칠 후, 그 도반은 제게 말했습니다. “말숙 님, 말숙 님은 자기만 옳다고 생각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요. 이 세상에 자기만 옳다고 하는 건 없어요.” 그 말을 듣자 ‘이 도반은 정말 자기 좋을 대로만 생각하는구나.’라는 불쾌함이 올라왔습니다. 정토회에서 처음 부딪힌 도반과의 갈등으로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내가 옳다고 할 것이 없다.’라는 명심문을 아무리 되뇌어도 공염불이었습니다. 정일사를 마친 날, 불교대학 담당자로부터 그 도반이 법사님께 받은 피드백을 들었습니다. 제게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확연히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제게 주어진 일은 밤을 새워서라도 해야 하고, 또 열심히 해야 하고, 잘해야 하고, 내 기준에 못 미치면 저 사람은 틀리고 나만 옳다고 고집하는 그런 습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라고 인정하니, 제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나만 옳다고 내세울 것이 없음을 값지게 알았습니다. 따뜻한 말과 지혜 전법회원 교육을 받고 수계를 받을 즈음 간신히 버티며 희망의 빛을 향하던 제게 미래의 불안이 다시 엄습했습니다. 갑작스럽게 남편의 퇴직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건강마저 나빠져 전법회원에서 물러나려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그때 법사님에게 따뜻한 말씀과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법사님은 ‘사랑고파병’과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끌려다니고 있는 제 마음을 알아주고, 남편에게 쌓인 감정을 풀라고 했습니다. 도저히 남편 곁에 못 가겠다고 하니, 법사님은 제 손을 꼭 잡고 ‘남편을 용서하고 받아들여라.’라고 했습니다. 그때 제 손을 얼마나 힘주어 잡았는지 반지 낀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법사님의 한량없는 마음을 느꼈습니다. ‘세상의 진리는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빼면 그 어떠한 것도 진리라 할 수 없다. 과거로부터 전승된 도덕, 진리, 관습, 규칙 등 모두 그렇다.’ 스님의 법문을 이해하며 이십 년 넘게 옥죄어 온 빚의 굴레를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돈도 인간이 편리하기 위해 만든 것일 뿐, 물질만능 시대에 빚을 마치 강도를 만난 것처럼 착각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혔습니다. 빚도 실체가 없고, 적게 먹고 적게 쓰면 언젠가 사라질 것을,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쓰려는 욕심과 조급함으로 자신을 옥죄며 살았습니다. 법문을 듣고 지혜가 열리니 들쑤시던 고통도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2025년 특별 정진으로 받은 찹쌀 300배는 만병통치약 불교대학 첫날, 졸업할 때 열어 보려고 썼던 서원이 생각납니다. ‘고향 친구를 이해하고 싶다.’라고 썼습니다. 제 눈에 고향 친구는 인색하고 약삭빨라 저는 그 친구 때문에 반가운 다른 친구들조차 만나기를 꺼렸습니다. 정진을 통해 친구를 향한 마음의 걸림을 없애려고 했지만, 분별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3년이 넘는 아침 정진으로도 매듭을 풀 수 없었던 친구와의 얽매임은 300배를 하면서 신기하게 풀렸습니다. 원인은 친구에게 기대하는 마음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관점을 바로 잡으니, 기대하는 마음은 친구뿐만 아니라 오빠, 언니, 시댁 어른에게까지 주렁주렁 매달린 고구마처럼 걸려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남을 가르치려는 업식이 강합니다. 불교대학을 진행하면서 학생들의 나누기를 듣고 제 나름의 평가를 했습니다. 실천 활동에서도 그동안 쌓아 두었던 평가를 마치 학생들을 위하듯 줄줄이 쏟아냈습니다. 활동이 끝날 때쯤 비로소 아차 하고 잘못했음을 알았습니다. 자책하는 마음이 들어 집에 오자마자 300배를 했습니다. 300배를 한다고 해서 즉시 마음이 나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300배를 하는 동안은 자책하는 마음이 괜찮다가 일상생활 틈틈이 다시 올라옵니다. 꾸준히 약을 먹어야 아픈 병이 낫듯 300배를 반복하면서 어느덧 제 마음이 치유되었습니다. 300배는 상대와의 갈등뿐 아니라 힘든 봉사를 할 때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봉사하다 물러서는 마음이 생기면 300배를 했습니다. 그러면 무슨 묘약을 먹은 것처럼 어렵게 여겼던 과정을 가볍게 뛰어넘는 힘이 생겼습니다. 300배는 제게 없어서는 안 될 만병통치약입니다. 2024년 JTS거리모금 텅 빈 원, 놓이면 놓이는 대로 저는 특별한 원이 없습니다. 다만 어떤 조건이든 구애받지 않고 살았으면 합니다. 이번 우리 지회 오프라인 불교대학 진행자는 저 혼자 할 것 같습니다. 온라인 불교대학과 달리 오프라인 진행자는 일정 소화에 거의 하루를 보냅니다. 현장에서 진행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정토사회문화회관까지 오가는 시간이 많이 소요됩니다. 지원자가 부족한 것은 그런 어려움 때문입니다. 차기 불교대학에서 어떤 일을 맡았으면 하느냐?라고 묻기에 주어지는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진행자들을 총괄하는 담당 꼭지를 맡을 수도 있다고 하길래, 저는 그것도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제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힘든 소임을 맡으면 또 다른 업식을 만날 수 있어 좋다.라고 생각합니다. 봉사 활동을 확장해 자신의 능력도 확장할 수 있다는 수행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그대로 따르고자 합니다. 좋은 조건이면 그 조건을 바탕 삼아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현할 수 있어 좋고, 나쁜 조건이면 그것을 기회 삼아 나를 성장시키고자 합니다. 스님이 말씀처럼 물 위에 떠 있으면 떠 있는 대로 편안하고, 물속에 빠지면 빠진 김에 진주조개나 주우면 그만이라는 사사무애법계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주말숙 님은 인터뷰가 끝난 뒤, 희망 리포터에게 “오늘 감동적인 ‘나눔의 장’을 만들어 주어 감사하다.”라고 했습니다. 희망 리포터들과 수행담을 나누는 자리가 마치 ‘나눔의 장’처럼 감동적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여러 차례 인터뷰했지만, 이런 인사말은 처음 들었습니다. 정말 참된 수행자는 모든 것을 수행의 관점으로 보는구나 싶었습니다. 언젠가 제게 ‘소임을 잘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수행자의 관점으로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했던 법사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부족했지만, 수행자로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글배병갑 희망리포터 편집이주현
평화의 염원을 품고 대륙을 달리다_2025년 북미지역 평화실천 릴레이 2탄
“독립의 발자취를 따라, 평화의 씨앗을 심다”를 슬로건으로 지난 6월 21일부터 8월 17일까지 이어졌던 북미지역의 평화실천 릴레이, 그 두번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미국 육군사관학교 앞에서 외친 “No War” 뉴욕, 7월 20일 이경원 미국 뉴욕 미국 동부지역 활동가들은 북미지역 평화실천 릴레이의 일환으로 7월 하순, 평화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여러 장소들을 방문했습니다. 지역이 넓다보니 다함께 모이기 어려워, 7월 19일에는 매사추세츠, 오하이오 콜럼버스, 뉴욕 플러싱, 워싱턴 DC에서 각각 12명씩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평화 관련 장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인 20일에는 7명이 한자리에 모여 뉴욕주 웨스트포인트의 미국 육군사관학교 앞에 섰습니다. 그동안 온라인으로만 만나던 동료들을 직접 마주하니 반갑고 신기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원래는 웨스트포인트 전쟁박물관을 방문할 계획이었으나, 내부 수리로 임시 휴관 중이어서 대신 그 앞에 있는 방문객 센터로 향했습니다. 이곳에는 200년이 넘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의 역사와 생도들의 군사 훈련 과정, 각종 전쟁 관련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어 박물관 못지 않게 전쟁의 현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웨스트포인트는 미국 독립전쟁과 미국스페인 전쟁 당시 중요한 요충지였으며, 지금은 미국 육군사관학교의 별칭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나라 독립 유적지는 아니었지만, 미리 준비한 슬로건을 나누어 들었습니다. “착한 전쟁은 없다 오직 평화”와 “우리는 하나 평화를 위하여”를 외치며 평화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각종 전쟁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 웨스트포인트 방문객 센터 웨스트포인트 전시관에서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모아 그때 단체 관광을 온 한 노부부가 우리에게 다가와 한국사람이냐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알고보니 한국전쟁에 참전하신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평화캠페인을 위해 이곳에 왔다고 설명하자, 그분들도 기꺼이 동참하겠다고 해서 “No War” 피켓을 들고 같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우연히 만난 이들과 평화의 메시지를 공유하는 뜻깊은 순간이었습니다. 우연히 만난 한국전쟁 참전용사와 함께 “No War” 피켓을 들고 내부 관람을 마친 뒤, 입구에 전시된 탱크 앞에서 다시 한번 평화를 기원하는 구호를 외치며 사진과 영상을 남겼습니다. 이 활동을 통해 “착한 전쟁은 없다”는 신념이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전시된 탱크 앞에서 평화의 목소리를 높이며 특히 육군사관학교 앞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평화 구호를 외치는 일은 복잡하고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장차 군대를 이끌 장교들을 양성하는 학교 앞에서 전쟁 없는 세상을 외치는 것이 모순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전쟁을 대비하는 이들의 존재 자체가 전쟁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들도 조국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국가 간 평화로운 공존이 실현된다면 개인의 삶 또한 평화로울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웨스트포인트에서의 평화실천 활동을 마친 후, 우리는 인근 베어마운틴 주립공원으로 함께 이동했습니다. 정상에 올라 아름다운 뉴욕의 자연경관을 감상하며 각자 준비해 온 도시락을 나누고 담소를 나누는 시간 역시 무척 소중했습니다. 선배 활동가들의 꾸준한 실천 이야기를 들으며, 개인의 행복을 넘어 우리 사회와 국가, 나아가 전 세계의 행복과 평화를 함께 일궈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달려온 동료들과 함께 뜻깊은 장소에서 평화를 향한 우리의 마음이 하나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평화를 구하는 우리의 마음은 하나 밴쿠버, 8월 9일 황금주 캐나다 밴쿠버 8월 9일 토요일 아침, 캐나다 서부 지역 활동가들의 평화 실천활동을 위해 약속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설렘으로 가득했습니다. 처음 방문하는 장소였고, 온라인으로 뵙던 분들을 직접 만나 함께 활동하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날씨도 더할 나위 없이 빛났습니다. 약속 장소인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서리의 클로버데일 세노타프에 도착했습니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잠시 구경이나 해볼까 하고 세노타프 옆 역사 갤러리에 들어가봤습니다. 기대 이상으로 감동적이었고 덕분에 처음 방문한 이 지역의 역사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세노타프는 우리말로 기념비나 추도비에 해당하는데, 우리가 방문한 클로버데일 세노타프는 1921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캐나다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처음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유엔 평화유지군 활동 등에서 희생된 군인들까지 포함하며 그 의미가 확장되었습니다. 기념비 한 쪽에 새겨진, 한국전쟁중 전사한 군인들의 명복을 비는 “IN MEMORY OF THOSE WHO FELL, Korea, 19501953”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한국전에 참전한 캐나다 군인은 총 2만 6,000명이며 그중 전사자는 516명입니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서리의 클로버데일 전몰 희생자 추모비 기념비는 작고 소박했지만 서리 박물관과 역사 갤러리 사이 광장에 위치해 있어서 외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특히 캐나다의 현충일에는 지역 주민들의 추모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고 합니다. 클로버데일 전몰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평화를 염원하며 총 10명의 활동가가 세노타프 앞에 서서 조용히 구호를 외쳤습니다. 캐나다 밴쿠버, 평화의 씨앗을 심다 이주 앞으로 다가온 법륜스님의 캐나다 밴쿠버 강연 준비 관계로 곧 이동해야 했기에 추모비에서 보낸 시간이 짧았던 것이 좀 아쉬웠지만, 다음에 꼭 다시 한번 방문하리라 마음을 먹었습니다. 캐나다 벤쿠버, 평화의 씨앗을 심다를 외치며 많은 활동가를 직접 만날 기회가 많지 않은데 함께 모여 뜻을 같이 할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특히 한 참가자의 어린 아들도 함께해 더욱 활기가 넘쳤습니다. 이날 함께한 참가자들의 소감을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태평양을 건너 우리나라에 와서 싸우다 돌아가신 젊은 넋이 안타깝고 한없이 고맙습니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싸우고, 목숨을 바쳤을까요?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희생 없이도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랍니다” “기념비 앞에 서니 마음 한편이 묵직하게 울렸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화로운 오늘이 이분들의 용기와 헌신 덕분임을 느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과거와 현재가 맞닿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가치가 마음속에 새겨졌습니다.” “기념비에 선명히 새겨진 ‘Korean War’이라는 문구를 보면서 한국전쟁의 중요성을 다른 나라들도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 느껴졌습니다. 정토회 덕분에 역사를 배우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헬멧을 손에 들고 무릎을 꿇은 병사의 동상을 보면서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한국전쟁 전사자 추모 글을 읽으며, 이 먼 땅 캐나다에서 평화의 씨앗을 품고 한국전쟁에 참전하신 분들께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평화의 사인을 들고 광장을 뛰어다니던 어린아이의 천진한 모습에 웃음과 생기가 넘쳤던 활동이었습니다. 평화를 염원하는 종이비행기를 곱게 접어 날렸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반도의 평화와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우리의 소원이 분명 하나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대를 잇는 평화의 발걸음 시애틀, 8월 16일 박근애 미국 시애틀 8월 16일 토요일 아침, 미국 북서부 지역의 평화 실천 활동이 시애틀의 상징인 스페이스니들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원래 계획은 전 주에 다른 장소에서 모이는 것이었지만, 시애틀 정토수련원 울력과 법륜스님의 시애틀 강연 준비로 바쁜 활동가들의 일정을 조율하기 어려워 부득이하게 한 주 연기하고 장소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육군 박물관에서 스페이스니들로 장소를 옮긴 것은 여러 면에서 더 의미있는 선택이었습니다. 주말에 많은 인파가 모이는 곳이어서 평화 메시지를 전하기에 더욱 효과적이었고, 또한 2017년 한반도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선배 활동가들과 함께 스페이스니들 광장에서 피켓을 들고 전쟁 반대, 평화 수호 캠페인을 펼쳤던 의미 깊은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일정 변경으로 많은 사람이 모이지 못할 것을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남편, 아들과 함께 셋이라도 가서 평화 릴레이에 참여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청년 몇 분이 기꺼이 동참해 주어 총 7명이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스페이스니들 분수광장에서 동선을 함께 의논한 후, ‘No War’, ‘I Want Peace’ 피켓을 들고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청년들의 당당한 발걸음과 환한 웃음, 그리고 피켓의 문구와 색채가 푸르른 여름 빛과 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No War” “I Want Peace” 피켓을 들고 행진 영상 촬영 또한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행진이 처음인 청년들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며 참여했고, 완성된 영상을 함께 보며 터져 나온 웃음 속에는 진정한 행복이 담겨 있었습니다. 단순한 홍보 활동을 넘어, 평화의 메시지가 웃음과 생동감 속에서 더욱 힘차게 전달되는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웃음과 평화의 메시지를 함께 나눈 행복한 시간 개인적으로는 2017년 30대였던 제가 이제 40대가 되어 새로운 청년 세대와 함께 선배들이 했던 평화의 뜻을 이어간다는 사실이 더욱 감격스러웠습니다. 평화를 향한 마음이 세대를 넘어 이어지고 있음을 몸소 확인하며, 평화가 결코 단절되지 않고 계속해서 전승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비록 적은 인원이었지만, 스페이스니들 앞에서 펼친 우리의 작은 평화 행진은 시애틀을 넘어 전 세계로 울려 퍼지는 울림이었다고 믿습니다. “함께한다”는 기쁨이 가득했던 시간 속에서 평화의 진정한 힘을 느꼈습니다. 시애틀의 랜드마크인 스페이스니들 앞에서 이번 활동에 함께한 10살 아들의 마음속에 심어진 평화의 씨앗이 언젠가 미래에 평화가 위협받을 때 당당히 싹트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이 작은 실천들이 결국은 거대한 평화의 물결을 만들어낼 것이라 확신합니다. 글과 사진해외지부 이경원, 황금주, 박근애 편집김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