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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국립공원관리공단 불자회 회원들과 함께 경주 남산 순례를 했습니다.

스님은 오전 9시 두북수련원을 출발하여 9시 30분 천룡사에 도착했습니다. 아침 기온이 조금 쌀쌀했지만 산행하기에는 좋은 날씨였습니다. 천룡사에 도착한 스님은 먼저 부처님과 용서 조사전에 삼배를 올렸습니다.


오랜만에 스님을 뵌 부산울산지부 봉사자들도 스님께 삼배로 인사를 드렸습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불자회 회원들은 틈수골 입구에서 출발하여서 한 시간가량 산길을 따라 천룡사로 올라왔습니다. 잠시 후 34명의 참가자들이 천룡사에 도착하자 스님은 반갑게 웃으며 참가자들을 맞이했습니다.

“어서 오세요. 차 한잔 드세요.”

부산울산지부 봉사자들이 참가자들을 위해 떡과 따뜻한 차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차를 마시며 잠시 숨을 돌렸습니다.
오전 10시 30분부터는 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먼저 천룡사에 얽힌 역사를 들려주었습니다.
“천룡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법회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등산을 하러 왔으니, 야외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훌륭한 법당이 있어서 이곳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천룡사는 용성 조사께서 남기신 10대 유훈에도 포함되어 있는 아주 뜻깊은 장소입니다. 이왕 천룡사에 오셨으니 먼저 이 절에 얽힌 역사를 간단히 들려드리겠습니다.”
스님은 천룡사의 창건과 중창에 관한 기록을 소개했습니다. 천룡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지만, 발굴 조사에서는 고려 초에 중창한 흔적이 주로 발견된다고 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당나라 사신 악붕구가 천룡사를 둘러보고 ‘이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이 절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라고 예언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스님은 이 기록에 후대의 이야기가 덧붙여졌을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우리 민족의 소중한 이야기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과거에는 불교를 널리 전하기 위해 세운 절을 호법(護法) 사찰이라 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세운 절을 호국(護國) 사찰이라 불렀습니다. 사천왕사가 대표적인 호국 사찰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절을 단순히 특정 종교의 유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과 국가를 지키고 발전시킨 역사적 문화유산으로 바라보는 폭넓은 시각이 필요합니다.”
이어서 스님은 신라의 골품제도와 고려 건국의 역사를 설명했습니다. 신라 말기에는 골품제도로 인해 뜻을 펼치기 어려웠던 6두품 인재들이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참여했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최승로의 손자인 최제안은 고려의 최고위직인 시중에 올라 나라의 발전을 기원하며 고향인 경주에 천룡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천룡사는 조선시대에도 중창되었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쇠락했다고 설명하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1819년 유생들이 절에 불을 질러 폐허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화재와 관련된 일화도 들려주었습니다.
“당시 절에 조실 노스님이 계셨는데, 불을 피하지 않고 절에 남아 순교하셨다고 합니다. 시봉하던 스님이 조실 스님을 구하려고 했지만 끝내 움직이지 않으셨다고 해요. 시봉 스님도 큰 화상을 입었지만, 절이 폐허가 된 뒤에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묵언 수행을 했다고 합니다. 기가 막혀서 말을 잃어버렸는지, 아니면 더 이상 세상에 말하고 싶지 않았는지 알 수 없지만 평생 죽을 때까지 말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스님은 이 이야기가 훗날 용성 스님의 수행 인연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먼저 용성 스님이 수행의 길에 들어서게 된 과정과 스승인 혜월 선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용성 스님은 열네 살 때 남원 교룡산성의 덕밀암에서 혜월 선사를 만나 수행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런데 혜월 선사는 승적이 없었습니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선생을 보호하다가 승적을 박탈당했기 때문입니다. 최제우 선생은 관아의 탄압을 피해 남원으로 가서 혜월 선사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덕밀암에 8개월 정도 머물면서 동학의 주요 사상과 경전을 집필했어요. 혜월 선사 또한 학문과 수행에 조예가 깊은 분이었으므로 두 사람이 사상적으로 많은 교감을 나누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스님은 혜월 선사와 최제우 대신사의 만남이 훗날 용성 조사의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서 용성 조사가 어떻게 천룡사에서 수행하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천룡사 화재 때 묵언 수행하신 스님을 평생 시봉한 또 다른 스님이 있었습니다. 남원 실상사 출신의 스님이었는데, 혜월 선사는 용성 스님에게 그 스님을 찾아가 지도받으며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그곳이 바로 이곳 천룡사 터입니다. 용성 조님은 여기에서 수행했고, 유훈 10가지도 이곳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단순한 절터가 아니라 용성 조사님의 사상과 수행의 뿌리가 서린 역사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은 이어서 천룡사 복원의 현황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용성 조사님은 나라의 발전을 위해 천룡사를 복원해야 한다는 유훈을 남겼고, 이를 이어받은 불심도문 스님은 1960~1970년대부터 절터를 매입해 보존해 왔다고 했습니다. 현재는 유수 스님이 중심이 되어 불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문화재 보존과 관련한 법적 제약과 도로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천룡사 복원이 단순히 절 하나를 다시 짓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길게 말씀드리는 것은 단순히 절 하나를 짓는 게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절 하나를 새로 짓는 일이라면 우리가 특별히 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지요. 절은 이미 많으니까요. 그러나 이곳은 조금 특별한 역사를 간직한 절터입니다. 따라서 최소한이라도 반드시 복원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불교인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역사와 민족정신을 배울 수 있는 장소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야기가 길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죠? 여기 안 오면 이런 이야기는 못 듣잖아요. 저는 여기까지 말씀드리고, 이제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공부하면서 갖게 된 질문이 있으면 이야기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어 즉문즉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12월 말이면 정년퇴직을 하는데요. 조금 두려운 마음이 큽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쉬어 본 적이 없는데, 이제는 강제로 쉬어야 한다고 하니까 앞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막막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면 좋을지 스님의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그냥 직장에 계속 나가면 되죠.” (웃음)
“월급 안 받고요?”
“그렇죠. 직장에 이야기해서 자원봉사로 나가겠다고 해보세요. 이것저것 청소도 하고 치우기도 하고, 후배들을 도와주는 일을 할 수도 있잖아요. 자기가 다니던 직장에 자원봉사를 요청해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좀 더 자유로운 상태에서 여러 후배들을 도와줄 수 있겠죠. 정년퇴직이라는 것은 이제 법적으로 월급을 안 준다는 얘기거든요. 일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월급을 안 주겠다는 거예요.”
“생각의 차이네요.”

“그렇죠. 스님은 월급을 안 받으면서도 잘 살잖아요. 그런 것처럼 자기도 월급 받는 데서 월급 안 받는 쪽으로 바뀌는 것뿐이에요. 일은 계속하는 거예요. 노는 게 아니에요. 오늘까지 월급 받고 일하다가 내일 아침부터 월급 안 받고 자원봉사로 일하는 것으로 바뀌는 거예요. 아무 차이가 없어요. 오히려 매여서 일하다가 자유롭게 일할 수 있으니까 더 좋은 점이 생긴 거예요. 전에는 좀 억지로 일했다면 이제는 내가 선택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얘기죠.
그리고 연금도 나오잖아요. 저는 우리 정토행자들에게 퇴직하면 그동안 월급 받고 30~40년 일했으니까 이제는 세상에 필요한 자원봉사를 하라고 권합니다. 해외에 나가서 활동할 수도 있어요.
여기 동국대 교수를 하셨던 분은 조경 전문가예요. 그래서 제가 여기 천룡사 조경 일을 맡아서 해보시라고 했어요. 돈은 안 준다고 했습니다. (웃음) 이제는 월급 받고 일하는 것보다, 내가 가진 재능을, 세상을 위해 쓰는 쪽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것이 국내든 국외든 상관없어요. 저는 해외 봉사활동을 좀 권장하고 싶습니다. 스리랑카든 부탄이든 인도든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가서 활동할 수도 있고, 국내에도 여러 가지 할 일이 있거든요.
앞으로는 인건비가 점점 비싸지니까 시설을 지어놓고도 관리하지 못하는 곳이 많아질 겁니다. 지금은 경제가 성장하니까 괜찮지만, 경제가 정체되면 관리비가 많이 들어서 시설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질 거예요. 그럴 때 자원봉사 조직이 있어서 그런 시설들을 맡아 관리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 이런 자원봉사 조직이 많이 생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경주에 가면 신라 문화유적지가 많잖아요. 노인들도 약간의 용돈은 필요하니까 문화유적지마다 해설사를 배치해서 하루에 네 시간 정도 일하도록 하고, 시간당 얼마씩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해설사 교육을 받아서 그런 일을 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요?
이렇게 자기 전공을 살려서 일할 수도 있고, 공원에 가서 일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길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이제 제2의 인생을 사는 거예요. 돈 받고 일하던 삶에서 벗어나 내 재능을, 세상을 위해 주체적으로 쓰는 거죠. 놀기는 왜 놀아요? 대신 전에는 무리해서 건강을 해쳐가면서 일했다면, 이제는 좀 자유롭게 일할 수 있겠죠. 제가 말하는 노동의 해방은 노동시간을 줄이고 월급을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노동이 놀이가 되는 거예요. 자연의 동물들은 운동을 따로 하지 않잖아요. 자기 먹이를 구하는 노동이 곧 최고의 운동이잖아요. 그런 것처럼 우리도 노동이 놀이가 될 때 그것이 진정한 노동의 해방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려면 월급 받는 데서 벗어나야 놀이가 됩니다. 돈을 내고 하면 다 놀이거든요. 무도장에 가서 돈 내고 춤추면 놀이고, 돈 받고 춤추면 노동이잖아요. 정토회에 돈을 내고 와서 봉사하면 매일 놀러 다니는 게 되는 거예요. (웃음) 그러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심심하면 언제든지 오세요. 저는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무궁무진하게 많으니까 일을 드리겠습니다. 또 너무 많다고 하지 마시고요.” (웃음)
그 외에도 3명의 질문자가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낮 12시 30분, 즉문즉설을 마치고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참가자들은 가을 정취를 느끼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후 1시 20분, 단체 사진을 찍은 후 신선암과 칠불암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님은 천룡사 뒷산의 커다란 바위를 가리키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여기까지 소풍을 왔어요. 저 바위가 그때는 억수로 커 보였어요.” (웃음)

산길을 따라 걷던 스님은 참가자들에게 남산 곳곳에 얽힌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이곳은 봄이 되면 소나무 밑에 진달래가 잔뜩 펴요, 남(南) 남산이라서 진달래가 가장 빨리 피지요.”

참가자들은 스님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능선을 따라 줄지어 걸었습니다. 경주 남산은 어린 시절 소풍을 오고, 출가 후에는 칠불암에서 정진했던 스님에게 남산은 많은 추억이 깃든 곳이었습니다.

올라가다 보니 넓은 바위가 나타났습니다. 바위 위에 올라서니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여기 앉아서 조금 쉽시다. 아이고, 여기도 소나무가 다 죽네요.”


잠시 탁 트인 경치를 바라보며 쉬어 갔습니다. 남산에는 소나무가 많았지만, 최근 소나무재선충 피해로 곳곳에서 소나무가 말라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단풍이 든 것처럼 갈색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사실은 늘 푸르던 소나무들이 죽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스님은 어린 시절부터 보아 온 소나무들이 말라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선암에 도착했습니다.
바위틈으로 걸어서 들어가니 조금 더 넓은 바위 면에 보살상이 하나 새겨져 있었습니다.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입니다.

“이 보살상은 참 예쁘죠? 다리 모양이 특이합니다. 그냥 의자 아래로 편안히 내려놓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걸 ‘유희좌’라고 합니다.”
신선암을 지나니 스님이 어렸을 때 참선하던 곳을 보여줬습니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절벽 끝이었습니다.


“제가 칠불암에서 수행할 때였어요. 여기 바위가 두 개 있거든요. 우리 스님이 저를 바위 끝에 앉혀 놓고 참선을 시켰어요. 당신은 그 옆에 앉으시고요. 조금만 까딱해서 떨어지면 죽는 거예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데, 그래도 밤을 새면 졸음이 오더라고요. 졸음이라는 게 참 신기해요. 절대로 졸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졸음이 와요. 반가부좌를 하면 졸다가 앞으로 고꾸라질 수 있는데, 완전 가부좌를 하면 몸이 쉽게 넘어지지 않거든요. 그래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어요. 뭐 때문에 그렇게 고행을 시켰는지는 모르겠어요. (웃음) 요즘 같으면 아동 학대였겠죠. 그렇게 바위 끝에 앉아서 밤을 꼬박 새웠어요.”
이어서 비탈길을 타고 조금 내려가니 칠불암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곳은 일곱 분의 부처님이 계신다고 해서 칠불암이라고 부릅니다. 남산에는 보물이 많지만, 국보는 없었는데, 이곳의 불상이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면서 현재 남산에 있는 유일한 국보가 되었습니다. 뒤쪽 큰 바위에는 삼존불이 새겨져 있습니다. 가운데 부처님이 계시고 양쪽에 보살상이 있습니다. 한쪽 손은 연꽃을 들고 있고, 다른 쪽 손은 감로수 병을 들고 있어요. 감로수 병은 중생의 몸과 마음의 병을 치유한다는 뜻입니다. 구고구난(救苦救難)이라고 하죠. 중생의 고통을 구하고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연꽃은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앞에 보이는 바위에는 사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동쪽에는 아촉불, 서쪽에는 아미타불이 새겨져 있는 식으로 사방에 부처님이 계십니다. 이것을 사면불이라고 합니다. 뒤쪽의 삼존불과 앞쪽의 사면불을 합쳐 일곱 분의 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에 칠불암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이곳은 절이 없어진 후 민간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기도처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 불심 도문 스님께서 이곳을 구입해 수행처로 사용하셨습니다. 이곳 칠불암과 천룡사, 중생사에 관한 내용은 용성조사님의 유언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월암 스님이 관리하고 계십니다.”

설명을 마친 스님은 참가자들과 함께 예불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예불을 할 줄 아는 참가자가 거의 없어 삼귀의만 함께했습니다.
이후 스님과 참가자들은 잠시 앉아 쉬었습니다. 스님은 이곳에서 수행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여기 와서 수행을 했는데 겨울이 되어 눈이 오면 진짜 신선이 사는 곳 같았어요. 어릴 때는 여기 혼자 살면 사람이 그리워서 누가 온다면 저 밑에까지 마중하러 가곤 했어요.
옛날에는 물이 귀했어요. 샘이 아래에 있어서 물지게를 지고 물을 길었어요. 물지게를 지면 다리가 떨려서 한 발도 못 걸을 것 같아요. 그러면 세 발만 가서 쉰다. 세 발 가면 다섯 발을 가고, 다섯 발 가면 그다음은 열 발 가고. 이런 식으로 참고 참아가며 물을 길었는데, 아래 샘에 한 번 갔다 오면 다리가 달달달 떨려요. (웃음)”
하산할 시간이 되어 참가자들은 짐을 챙기고 내려갈 채비를 했습니다. 산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자, 스님이 물을 길어 오던 샘이 나타났습니다.


“한 모금씩 마셔보세요. 여기 물은 여름이 되면 한 번씩 마르는데, 옛날부터 이 절에 사는 사람이 부정한 짓을 하면 물이 마른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물을 길으러 올 때마다 마음이 좀 부담스러웠어요. 혹시 물이 없을까 해서 스스로 돌아보고는 했어요. (웃음)”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모두 시원한 샘물에 함께 목을 축였습니다. 목을 축인 후 하산을 하였습니다. 스님도 종착지까지 함께 걸었습니다.

오후 4시 30분 종착지인 염불사지에 도착하여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후 식당으로 이동하여 저녁 식사를 하였습니다.

산행으로 허기가 졌던 참가자들은 맛있게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스님은 참가자들에게 오늘 순례에 대한 소감을 나눠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던 참가자들은 소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산행을 함께하며 느낀 감사함과 즉문즉설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이야기했습니다. 특히 스님과 함께 걸었던 시간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는 소감이 이어졌습니다.

“저는 스님을 잠깐 뵙고 오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 함께 걸어주실 줄 몰랐어요.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힘들었는데 앞서 걸어가시는 스님을 보니 다시 힘이 났습니다. 즉문즉설에서도 답을 바로 알려주시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셔서 좋았습니다.”
“저는 작년에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올해 경전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유튜브로 스님의 법문을 듣는 것과 직접 공부하고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오늘 산행하면서도 다른 분들에게 불교대학에 입학해 보시라고 권했습니다. 앞으로도 저 자신을 돌아보며 꾸준히 수행하겠습니다.”
“오늘 첫 번째 질문이 정년퇴직을 앞두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내용이었잖아요. 스님께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해주셔서 생각을 바꾸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오늘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정성껏 도시락까지 준비해 주신 봉사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참가자들의 소감을 들은 스님은 칠불암에 관련된 스님의 에피소드를 하나 더 들려주었습니다.
“제가 아까 시간이 없어서 이야기를 못 했는데, 칠불암에서 수행하면서 경험한 일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20대 중반쯤 되었을 때입니다. 학생들을 지도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때 법장사에서 포교사로 활동하면서 포교당의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예불을 드리고 있는데 누가 문을 계속 두드리는 거예요. 마치 쇠망치 같은 것으로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예불을 하는 중인데 자꾸 문을 두드리니까 슬슬 화가 났어요. ‘누가 이렇게 예불하는데 문을 이렇게 두드리나?’ 그래서 예불을 하다가 멈추고 문을 탁 열었습니다. 한마디하려고 문을 열었는데, 보니까 상이군경이었어요. 옛날에는 팔이 없는 사람들이 갈고리 같은 것을 끼고 다녔거든요. 1970년대니까요. 그 사람이 손에 끼운 갈고리로 문을 두드리니까 쇠막대기로 두드리는 것처럼 소리가 났던 거예요. 그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숙연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기도 중이니까 좀 기다리세요.’
그러고 다시 예불을 드리는데 또 문을 두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나가서 말했습니다.
‘지금 예불 중이잖아요. 뭘 주려고 해도 저쪽 요사채에 가서 가져와야 주지, 지금 내가 예불하고 있어서 가지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뭘 어떻게 줘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내가 언제 뭐 달라고 했습니까?’
그 사람 말이 맞아요. 그 사람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런데 제가 그 사람을 딱 보는 순간 동냥하러 왔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약간 흥분했던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그럼 왜 왔어요?’
‘마음이 너무 답답해서 왔습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요?’
‘어떤 사람한테 마음이 답답하다고 하니까 이 절에 가보라고 하면서 쪽지를 하나 줬습니다.’
그러면서 쪽지를 꺼내 보여주는데, 보니까 제가 만든 포교 전단지였어요. 당시에 제가 포교당 책임을 맡으면서 전단지를 만들어 많이 돌렸거든요. 거기에 뭐라고 적었느냐 하면, ‘마음이 답답한 사람이여, 이리로 오시오.’ 이렇게 적고 어린이 법회, 중고등학생 법회 등 여러 법회 안내를 써놓았어요. 그 전단지를 누군가 가지고 있다가 이 사람이 마음이 답답하다고 하니까 건네준 거예요. 그래서 저를 찾아온 겁니다. 그때 제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마음이 답답한 사람은 오라고 전단지를 만들어 돌려놓고, 정작 마음이 답답한 사람이 찾아오니까 어떻게든 돌려보내려고 했잖아요. 동냥을 좀 줘서 돌려보낼까, 어떻게 설득해서 돌려보낼까, 이런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사람의 사연을 들어보니까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어 상이군경이 되었다고 해요.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니까 부인이 밖에 나가 일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렸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일을 하느라 늦게 들어오면 자꾸 화가 나는 거예요. 부인을 의심하고 문제를 제기하니까 부인도 못 살겠다며 집을 나가는 일이 몇 차례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생각해도 자기로 인해 부인과 아이들에게 너무 큰 고통을 준다는 거예요. 화를 안 내려고 해도 자꾸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리니까 차라리 죽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합니다.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지만 차마 죽지는 못했대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스님이 되는 거였어요. 자기가 없어져야 집안이 편안해질 거라고 생각한 거죠. 차마 죽지는 못하겠고, 스님이 되면 지금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절을 찾아다니면서 스님이 되겠다고 했는데, 가는 절마다 다른 절에 가보라고 했다는 거예요. 이 절은 이런 사정이 있으니 저 절에 가보라고 하고, 저 절에 가면 또 다른 절에 가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전단지를 주면서 여기에 가보라고 해서 저를 찾아온 거예요. 그런데 저도 똑같이 하고 있었던 겁니다. ‘여기는 시내에 있는 포교당이고, 어린이 포교를 하는 곳이라 이런 사정이 어렵습니다.’ 이러면서 자꾸 다른 데 가보라고 했어요.

그때 제가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얼마나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 것이지요. 그때 저는 정말 정성을 다해서 부처님의 법을 전하겠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마음이 답답해서 찾아온 사람을 어떻게든 돌려보내려고 했으니 얼마나 모순된 행동입니까? 그 사실을 제가 자각하니까 멍해져 버렸어요. 지금까지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완전히 부정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혼이 빠진 사람처럼 칠불암으로 올라왔어요. 부처님 앞에 엎드려서 거의 기절하듯이 하루를 보냈습니다. ‘내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차라리 이럴 바에는 죽는 게 낫지 않나?’ 이런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러다가 하루를 그렇게 보내고 정신을 차리면서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저는 그전까지 다른 스님들을 굉장히 많이 비판했거든요. ‘도대체 중이 되어서 뭐 하는 거냐? 출가할 때는 발심해 놓고 지금 하는 행동이 뭐냐? 불교 승려가 그럴 수 있느냐? 불교가 이래서 되겠느냐?’ 이런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사람들만 모순이 있는 게 아니었어요. 나도 똑같이 내 모순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겁니다. 그걸 인정하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내가 그런 모순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자괴감이 들어서 처음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까 ‘내가 포교 전단지를 뿌렸기 때문에 오늘 나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었구나.’ 만약에 제가 포교 전단지를 뿌리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찾아왔을 때 그냥 돌려보냈을 거예요. 그러고도 내가 어떤 모순 속에 살고 있는지 몰랐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열심히 전법 하려고 전단지를 뿌렸기 때문에 그 사람이 찾아왔고, 그 사람을 통해서 제 모순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나 자신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래도 내가 열심히 전법 하려고 했기 때문에 오늘 나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 자각하고 나서 칠불암에서 다시 포교원으로 내려왔습니다. 이 사건 전에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마음이 아주 강했어요. ‘출가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불교가 이래서 되겠느냐?’ 이런 생각이 강했는데, 제 모순을 자각하고 나니까 우리 모두가 자기 나름의 모순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칠불암은 제가 어릴 때 수행을 열심히 했던 곳이기도 하지만, 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나를 돌아보고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던 곳이에요. 우리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자각입니다. 자기가 화가 나든, 욕심이 많든, 고집이 세든, 어떤 모습이든 간에 그것을 자각해야 해요. 자각이 일어나지 않고는 변화하기가 어렵습니다. 즉문즉설도 마찬가지예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우스갯소리도 하고 농담도 하면서, 결국 본인이 스스로 자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겁니다. ‘내가 성질이 좀 급하구나.’ ‘내가 내 판단을 너무 지나치게 신뢰하는구나.’ 이런 자각이 일어나야 변화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자각이 일어난다고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각은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어요.

우리는 불교를 공부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도 처음에는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당위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경험을 하고, 특히 실수도 많이 해보면 그 가르침이 좀 더 깊이 자기 것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불교가 어떻고 부처님 말씀이 어떻고 하는 것은 실제로 법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자기가 정말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라야 어쩌면 부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자기를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이렇게 표현하거든요. 정말 빼도 박도 못하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야 비로소 제행이 무상하다는 것,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꼭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경전을 읽지 않더라도 늘 자기를 살피면 좀 더 진실을 보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거예요.
어제도 인공지능 전문가와 대화를 나누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인공지능에 지나치게 의지하면 인공지능의 노예가 되고, 인공지능을 내가 활용하면 내가 주인이 되는 것 아니겠어요?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돈을 쓰면 돈의 주인이 되고, 내가 돈에 묶이고 집착하면 돈의 노예가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를 지켜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은 이것으로 모든 일정을 마치겠습니다. 앞으로도 또 만납시다.”
스님은 참가자들을 배웅한 후 차에 올라 두북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함께 온 이사님들과 잠시 대화를 나눈 후 배웅하고 휴식을 취했습니다.

내일은 경주에서 행복시민 역사기행에 함께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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