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6.10.26. 길벗 경주 남산순례
“나이가 드니 함께 천천히 걸을 수 있어 좋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의 방송, 영화, 연극 분야 예술인들의 마음공부와 봉사활동 모임인 ‘길벗’과 함께 경주 남산순례를 했습니다.

스님은 새벽정진과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하루 먼저 내려와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두북에 내려온 길벗 사전 팀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며 일정에 대해 의논하였습니다.

8시 20분, 두북수련원에서 출발해 오늘 순례의 출발지인 삼릉 주차장으로 갔습니다.

9시가 조금 지나자 오전 5시 서울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출발한 두 대의 버스가 도착하였습니다. 평소 서울에서 만나던 도반들을 경주에서 만나니 더욱 반가웠습니다. 참가자들은 준비된 오늘의 점심인 김밥, 떡, 귤을 각자의 가방에 담고 순례를 시작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스님은 길벗을 위해 밤을 삶아서 준비해 주었습니다.

“밤을 가져왔으니 나누어 먹읍시다.”

며칠 동안 비가 내려서 오늘 순례에도 비가 내릴까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도 새벽에 비가 그쳤습니다. 스님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습니다.

“오늘 산책하기에 날씨가 아주 좋네요. 해가 뜨면 더워서 걷기 어렵고, 비가 오면 미끄러워서 걷기 어려운데 오늘은 비도 안 오고 날씨가 딱 좋네요.”

다들 출발할 채비를 마치고 모였습니다. 오늘 순례는 경주 남산 둘레길의 불교 유적을 찾아 걸은 후 월정교와 경주 최부잣집까지 둘러보는 일정이었습니다.

출발에 앞서 스님은 참가자들에게 경주 남산의 지형과 역사적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경주 남산은 남북으로 약 8킬로미터, 동서로 약 4킬로미터 되는 산입니다. 거북이처럼 생겼어요. 남산에는 700여 점의 역사·문화 유적이 남아 있고, 골짜기마다 불상과 탑이 있습니다. 남산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오늘은 천천히 산책하듯이 다녀봅시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도 먹고, 목이 마르면 물도 마시면서 천천히 가면 됩니다.”

스님의 설명을 들은 참가자들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이어 힘찬 구호와 함께 순례를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경애왕릉으로 향했습니다.

스님은 신라 말기의 역사와 경애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어서 소나무 숲 사이로 자리한 세 기의 왕릉인 삼릉을 둘러보며 신라 왕실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왕릉을 둘러본 후 다시 길을 걸었습니다. 오전 10시 무렵에는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세 불상의 모습을 가리키며 설명했습니다.

“이 불상은 7세기경, 삼국통일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봅니다. 가운데 계신 분이 부처님이고, 양쪽에 보살님이 계십니다. 원래는 계곡에 흩어져 있던 불상들을 찾아서 지금처럼 세 분을 함께 모셔 놓은 거예요.”

참가자들은 스님의 설명을 들으며 세 불상의 얼굴과 옷자락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불상을 한 바퀴 둘러본 후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지마왕릉을 지나 숲길을 걷던 중, 스님이 길가에 핀 꽃을 발견하고 참가자들에게 가리켜 보였습니다.

“나팔꽃 보세요. 예쁘죠?”

포석정을 지나 창림사지 3층 석탑을 참배하였습니다.

11시가 조금 지나 스님과 참가자들은 당간지주가 남아 있는 남간사지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두 개의 돌기둥을 가리키며 설명했습니다.

“바닥에 원래 둥근 돌이 하나 주춧돌처럼 있었어요. 그 위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양쪽에서 고정하는 겁니다. 아래쪽도 고정하고 위쪽도 고정해서 깃발을 달 수 있도록 한 거예요. 이것을 당간지주라고 합니다. 절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괘불을 걸 때도 사용했습니다.”

스님은 돌기둥에 남아 있는 흔적도 가리켰습니다.

“여기 보면 총탄 흔적이 있어요. 6·25전쟁 때, 이 부근에서도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참가자들은 당간지주 가까이 다가가 스님이 가리키는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설명을 마친 후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길을 걷다가 스님은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기 감나무 보세요. 은행나무도 보세요.”

늘 도시에서 생활하던 길벗 식구들은 오늘 스님과 함께 남산을 걸으며 깊어 가는 가을을 느꼈습니다.

정오가 지나자, 스님은 점심을 먹으며 잠시 쉬어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산길 한쪽에 자리 잡고 준비해 온 김밥과 간식을 꺼내 먹었습니다. 스님도 참가자들과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점심 식사와 휴식을 마친 후 다시 산길을 걸었습니다.

오후 1시 10분경, 스님과 참가자들은 불곡 석불좌상에 도착했습니다. 바위 안쪽에 부처님이 앉아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흔히 '할매부처'라고 부르는 불상입니다.

“어때요? 할머니 같아요?”

“오히려 소녀 같아요, 스님.”

참가자들은 저마다 불상을 바라보며 한마디씩 했습니다. 스님은 불상 앞에 서서 신라인들이 불교를 받아들인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신라 사람들은 자기 나라가 원래 부처님의 나라였다고 생각했어요. 불교가 외부에서 들어왔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이 땅에 부처님이 계셨다고 믿었습니다. 황룡사에도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부처님인 가섭불께서 수행하셨다는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이 남아 있다는 전설이 있잖아요. 그만큼 이 땅이 본래 부처님의 땅이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겁니다.

신라 사람들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산신 신앙이나 바위 신앙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바위에 불상을 새긴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바위 안에 이미 부처님이 계시는데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불상을 보면 하체는 바위 안에 있고 상체만 밖으로 드러난 것도 있습니다. 자연과 인공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인공적으로 딱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부처님의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스님은 불상의 발과 옷자락, 머리 모양을 하나씩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여기 발이 보이죠? 두 손은 옷에 가려져 있고, 머리는 모자를 쓴 것 같은 모양입니다. 자세히 오래 보고 있으면 아주 친근하게 느껴져요.”

참가자들은 바위 가까이 다가가 부처님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다시 바라보니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던 불상의 모습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기념사진 하나 찍을까요?”

모두 웃으며 불상 앞에 모였습니다. 키가 큰 사람은 뒤로 가고, 앞에 있는 사람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스님도 참가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 촬영을 마친 후 다시 산길을 걸었습니다.

“내려오는 길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히 내려오세요.”

스님의 당부에 따라 참가자들은 발밑을 살피며 천천히 걸었습니다.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탑곡 마애불상군이었습니다. 커다란 바위의 네 면에 불상과 탑, 보살상, 비천상 등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 곳입니다.

스님이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이 바위를 부처 바위라고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사면에 모두 불상 조각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에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쪽이 북쪽입니다. 왼쪽이 동쪽, 오른쪽이 서쪽, 반대편이 남쪽이에요.

절은 보통 남쪽이 정면입니다. 그래서 남쪽부터 동쪽, 북쪽, 서쪽 순서로 보면 되는데, 우리는 북쪽에서 올라왔으니까 북쪽부터 보겠습니다.”

스님은 바위에 새겨진 두 개의 탑을 가리켰습니다.

“북쪽에는 큰 탑이 두 개 새겨져 있어요. 왼쪽은 9층 탑이고 오른쪽은 7층 탑입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지금 남아 있지 않지만, 여기에 새겨진 9층 탑이 황룡사 9층 목탑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처마 끝에 달린 풍경까지 새겨져 있어요. 이런 조각을 통해 당시 목탑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겁니다.”

스님은 바위의 다른 면으로 이동해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보리수 아래에서 명상하는 부처님, 부처님을 향해 앉아 있는 보살상,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천상,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스님의 모습까지 하나씩 짚어 주었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따라 바위를 살펴보니 처음에는 평범한 바위처럼 보이던 곳에서 여러 불상과 조각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 바위에는 불교와 관련된 조각이 30여 개나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바위라고 부르는 거예요. 이 골짜기는 탑이 있어서 탑골이라고 하고, 아까 할매부처가 있던 골짜기는 불곡이라고 합니다.”

오후 2시 20분경, 남산 답사를 마친 참가자들은 버스에 올라 월정교로 향했습니다. 하루 종일 산길을 걸으며 설명을 이어간 스님은 오전부터 쉬지 않고 길벗들을 안내한 탓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오후 2시 30분, 스님과 참가자들은 월정교에 올랐습니다. 평일이라 다리는 비교적 한산했습니다. 스님은 다리 안쪽에 마련된 긴 의자에 참가자들을 앉게 한 후 원효대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오랜 시간 걸어 지칠 법도 했지만, 참가자들은 다시 스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당시 신라에는 세속에 묻혀 사는 스님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중에 대안 대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스님은 늘 다니면서 ‘대안, 대안, 대안이로다’ 이렇게 말했어요. 대안은 ‘크게 편안하여지이다’ 이런 뜻입니다. 원효대사가 초야에 묻혀 사는 대안 스님을 길에서 만났습니다. 이분이 ‘대사, 최근에 쓴 글을 봤는데 너무 감동했소. 그래서 내가 물어볼 게 좀 있으니까, 나하고 얘기를 좀 합시다’라고 대화를 청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초라하게 입은 거지 같은 스님을 무시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원효대사도 이미 해골바가지 물을 먹고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안목이 있는 분이잖아요. 그래서 존중하는 마음을 내서 ‘예, 그러겠습니다’ 하고 따라갔습니다. 대안 대사가 간 곳은 천민촌이었어요. 분황사 뒤에 북천이 있고 북천을 건너가면 ‘부곡’이라고 천민들이 사는 집성촌이 있었어요. 귀족이었던 원효대사는 사람들이 더럽다 여기는 천민촌은 한 번도 간 적도 없고, 갈 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천민촌까지 따라갔어요. 그런데 대안 대사가 그 천민촌 안에 있는 주막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주막으로 들어가면서 ‘주모, 여기 귀한 손님 왔소. 술 한 상 차려 내시오.’ 했습니다. 원효대사는 신라에서 유명한 스님이고 귀족이었습니다. 천민촌이면 평생 오지 않을 곳에 온 것이었지요. 그래도 도저히 주막까지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대안 대사가 ‘원효대사’하고 불러도 그냥 가버리니까 대안 대사가 이렇게 말했어요.

‘대사! 여기 마땅히 구제받아야 할 중생을 두고 어디 가서 별도의 중생을 구제한단 말이오.’

모든 대승 경전에 보살은 중생을 구제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지옥이라도 가서 자기 몸도 버린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 경의 글을 읽고 해설을 해서 일장 논문을 쓴 게 원효의 글이잖아요. 그런데 막상 실제로 천민촌에 들어가는 게 꺼려졌고, 특히 주모가 있는 주막에 간다니까 더 꺼려져서 돌아온 겁니다. 대안 대사가 그 뒤에 대고 큰 소리로 말한 거예요. 보통 사람 같았으면 중이 헛소리한다며 무시했겠죠. 그런데 원효대사는 곰곰이 생각해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수도 없이 중생 구제를 얘기하고 글을 쓰고 설법을 했는데 정말 구제받아야 할 중생을 두고 도망친 거잖아요. 자기를 돌아보니 아는 건 있지만 체험된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내가 수행을 잘못했구나’ 하고 깨닫고 분황사 주지 자리를 내려놓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고는 머리를 기르고 속복을 입고 학승들이 많은 절에 가서 부목으로 일을 했습니다. 보살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죠. 그 당시 신분제 사회에서 부목은 종의 신분이었습니다. 신라 시대만 하더라도 절을 유지하는 방식이 절에 훌륭한 스님이 계시면 왕이 그 절에 땅을 주고 그 땅을 경작할 종을 주었습니다.

부목이 된 원효대사는 스님들을 상전으로 모시고 부엌에서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같이 일하는 하인 중에 한 사람이 원효를 아주 심하게 구박을 했어요. 그래도 원효는 ‘나를 구박하는 그 하인도 보살이다’ 하면서 구박에도 개의치 않고 잘 견뎠습니다.

그 절에는 행색도 초라하고 키도 작고 약간 모자라는 사람처럼 보이는 방울 스님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항상 방울을 갖고 딸랑딸랑 소리를 내고 다녔어요. 이름도 없이 그냥 방울 스님이라고 불리는 분이었습니다. 방울스님은 항상 스님들이 밥을 먹을 때 와서 밥을 안 먹고 나중에 부엌에 와서 ‘행자님, 어디 누룽지 좀 없나요?’ 하고 누룽지를 얻어가서 먹었습니다. 그러면 부목들이 ‘왜 밥 먹을 때 안 먹고 지금 와요!’ 하고 구박을 했는데, 원효는 방울 스님을 불쌍히 여겨서 누룽지를 남겨놨다가 드렸어요. 그렇게 부목이 되어 하심을 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본래 중생이라고 할 게 없구나

그런데 어느 날 그 절에 스님들이 ‘대승기신론’ 이라는 책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스승이 제자들에게 유명한 불경을 주면서 공부하라고 한 거예요. 요즘으로 말하면 박사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서 자기들끼리 둘러앉아서 이런저런 해석을 각자 내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효가 옆에서 마루를 닦으면서 듣자니 말도 안 되는 엉터리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스님,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런 거요’ 이렇게 말을 해버렸습니다. 안 그래도 잘 몰라서 헤매고 있었는데 옆에 있는 종이 개입을 하니까 스님들이 ‘종놈 주제에 네가 뭘 아냐’ 하고 막 성질을 내고 난리를 폈어요. 그러자 원효가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입에서 헛소리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피해버렸습니다. 판이 다 깨지니 제자들이 스승한테 찾아가서 ‘아무리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니까 스승이 원효대사가 쓴 ‘대승기신론소’라는 책을 한 권 턱 주는 거예요. 그걸 읽어보니까 조목조목 쉽게 정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역시 원효대사야!’ 하고 감동을 하면서 그 글을 더 읽어보니 조금 전에 청소하던 부목이 하던 얘기하고 비슷한 거예요. 그 부목이 지금까지는 그냥 종으로만 보였는데 다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원효대사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위기에 처한 것을 알고 밤에 아무도 몰래 절을 빠져나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모두 잠든 후에 문을 열고 나오는데, 문간방에 사는 방울 스님이 방문을 탁 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효, 잘 가게!’ 그때 원효가 확 깨달았어요. 원효는 방울 스님을 불쌍히 여겨서 도와준 거예요. 방울 스님을 부처나 도인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을 못 했습니다. 항상 방울 스님이 불쌍해서 도와줬는데, 오히려 방울 스님은 원효가 보살행을 한 번 해보겠다고 나름대로 수행하는 모습을 다 지켜보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방울 스님의 눈에는 원효의 수행하는 모습이 다 보였는데, 원효에게는 방울 스님이 안 보였죠. 마치 원효의 눈에는 그 절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의 수준이 다 보였는데, 그 스님들은 원효가 안 보였던 것과 같았습니다. 그 스님들은 원효를 공경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원효를 막 구박을 했잖아요. 이때 원효대사는 ‘여기 마땅히 구제받아야 할 중생을 두고 어디 가서 별도의 중생을 구제한단 말인고’ 하는 대안 대사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전까지는 천민촌에 불쌍한 중생이 있는데 자신이 외면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언젠가 천민촌으로 가서 그들을 도와야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본래 중생이라고 할 게 없었던 거예요. 중생이라는 것 또한 어리석은 마음이 짓는 상에 불과한 것이지요.

원효는 방울 스님을 불쌍하다고 여겼는데, 정말로 방울 스님이 불쌍한 거였어요? 원효가 보기에 불쌍한 거였어요? 원효가 보기에 불쌍한 것이었습니다. 모양과 형색을 보고 불쌍하다는 상을 지었고, 또 그걸 구제한다고 노력했던 겁니다. 눈을 뜨고 보니 방울 스님은 불쌍하지도 않고 구제할 것도 없었던 거예요. 그것처럼 부곡에 사는 천민들은 불쌍한 중생이 아니었습니다. 원효는 크게 깨닫고 나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다시 천민촌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그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유명한 원효를 버리고 친구가 되기 위해

그런데 새로운 난관에 부딪혔어요. 부곡에 사는 천민들이 원효대사 오셨다고 우러러 떠받들어 버리니까 아무리 친구가 되려고 해도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이건 누구 책임일까요? 내가 그들을 불쌍하게 본 건 내가 어리석어서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이제 눈을 뜨고 너와 친구가 되겠다고 갔는데 그들이 성인이 오셨다고 떠받들어서 친구가 안 되는 건 그들의 책임이라 할 수 있잖아요. 내 눈이 어두워서 부딪힌 건 내 책임이지만, 상대의 눈이 어두워서 나한테 와 부딪힌 건 상대의 책임이듯이요. 그러나 원효는 이것도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유명한 원효라는 허상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원효는 그 유명한 원효를 버려버렸어요. 즉, 요석공주와 물의를 일으키고 파계를 한 겁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원효대사를 추앙하던 모든 사람이 ‘훌륭한 줄 알았는데 순 엉터리였구나’ 하고 원효를 비난하고 무시해 버렸어요. 세상에서 매장이 된 거죠. 그런데 부곡에 사는 천민들은 원효가 자기들과 비슷한 처지가 되어 버리니까 원효와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원효는 뽕따는 아낙네, 술 파는 사람, 천민, 뱀 잡는 땅꾼, 이런 사람들과 노래하고 춤추면서 그 노래와 춤 속에 걸림 없는 도리를 넣어서 그들을 깨우쳤습니다. 원효라는 모양과 형상이 없어지고 그들과 하나가 된 겁니다. 동시에 역사 기록에는 온 천지에 원효가 나타납니다. 우리나라에 어디를 가도 원효가 창건했다는 절이 있고, 동굴마다 원효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원효는 없어져 버렸고, 누가 원효인지도 몰라요. 그러나 원효는 곳곳에 나타나는 대승보살의 화현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스님이 원효대사죠. 그런데 원효대사는 신라 시대에 한때 잘 나가다가 파계했다 해서 내쳐진 분이에요. 그러다 500년이 지난 고려시대에 와서 화쟁국사란 이름으로 원효대사의 업적이 복권되었습니다. 요즘 말하면 승려 자격이 없어졌다가 500년 뒤에 자격을 다시 얻은 거예요. 10년 있다가 복권한 것도 아니고, 50년 있다가 복권한 것도 아니고, 사후에 곧 복권한 것도 아니고, 500년 뒤에 복권이 된 분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다른 스님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스님이 되었습니다.

원효대사는 부처님의 경전에 대해서 논문을 쓰는 능력이 탁월해서 신라에서 아주 이름이 쟁쟁했어요. 그분이 쓴 글은 중국에까지 전해지고 일본에도 전해져서 아주 유명했습니다. 중국의 스님들은 원효의 글을 읽고 감동해서 원효 보살이라고 불렀어요. 성인의 칭호를 받은 겁니다. 성인으로 불리면 그가 쓴 글에 ‘논’이라는 칭호를 줍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버금가는 성인의 글을 ‘논’이라고 합니다. 고려 시대 때 대각국사 의천이 중국에 갔다가 그걸 보고 놀라죠. 원효가 우리나라에서는 이름도 안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려로 돌아와서 원효를 복권시킨 거예요. 원효가 쓴 글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왕도 감동했는데, 결국 파계를 하게 되면서 그 이름이 묻힌 겁니다.”

월정교를 둘러본 후에는 경주 향교와 최부잣집을 방문했습니다. 스님은 경주 최씨 가문이 오랫동안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과 그 재산을 사회를 위해 사용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옛날에 천석꾼이라고 하면 고을의 부자이고, 만석꾼이라고 하면 지금으로 치면 재벌 같은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경주 최부잣집은 만석꾼으로 300년을 이어갔습니다. 부자 삼대 못 간다는 말이 있는데 이 집안은 10대가 넘도록 부를 이어간 거예요. 나중에는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데 재산을 사용했고, 남은 재산은 대학을 설립하는 데 썼습니다.”

오후 3시 20분부터는 잠시 자유시간을 가졌습니다. 참가자들은 경주 향교와 최부잣집 주변을 둘러보며 휴식을 취했습니다.

오후 4시, 다시 버스에 올라 저녁 식사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저녁 식사 장소에 도착한 참가자들은 따끈한 칼국수와 파전으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 스님이 먼저 참가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오늘 처음 온 사람은 소감이 어때요? 아무나 한번 이야기해 봐요.”

처음에는 서로 눈치를 보며 웃었지만, 이내 한 사람씩 일어나 소감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오늘 바위 부처님을 처음 뵈었는데요. 신라 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부처님의 마음으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도 그런 마음으로 잘 살아가겠습니다.”

“오늘 스님께서 월정교에서 원효대사 이야기를 들려주셨잖아요. 원효대사가 자신의 법을 전하기 위해 광대처럼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여기 계신 길벗들도 각자의 재능으로 법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좋은 하루였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걱정했어요. 그런데 70대이신 스님도 걸으시는데 저도 걸어야 하지 않겠나 싶었습니다. 막상 걸어 보니 정말 따라가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완주해서 너무 기쁩니다.”

참가자 중에는 노래로 소감을 전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성악을 전공한 한 참가자가 고운 목소리로 ‘스승의 은혜’를 부르자 모두 감탄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어 한 참가자는 목 상태가 좋지 않다면서도 ‘Rise Up’을 불렀습니다. 힘든 일이 있어도 다시 일어나겠다는 내용의 노래였습니다. 또 다른 참가자는 ‘언젠가는’을 불렀습니다. 익숙한 노래가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함께 따라 부르며 따뜻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참가자들의 소감이 끝나자 스님도 마지막으로 인사말을 했습니다.

“저도 나이가 들어서 다리가 아프고 그런데, 오늘은 천천히 걸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옛날에는 제가 하도 빨리 걸으니까 사람들이 ‘스님 늙고 나서 봅시다’ 그랬어요. 그런데 이제는 스님이 늙고 병드니 걱정하면서도 함께 천천히 걸을 수 있다고 다들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것도 좋은 일입니다.” (웃음)

참가자들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저는 여기서 태어나고 여기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 대해 많이 알고 있어요. 사람들이 ‘스님은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아세요?’ 하고 묻는데, 74년을 살았잖아요. 정보가 누적이 된 겁니다. 동네에서 오래 살면 어느 감나무의 감이 맛있는지, 수많은 밤나무 가운데 어느 밤나무의 밤이 맛있는지, 가재를 잡으려면 어느 골짜기로 가야 하는지, 풀을 베려면 어디로 가야 많이 벨 수 있는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을 보면 손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잖아요. 피아니스트 임현정 씨가 연주할 때 손이 다섯 개나 되는가 싶어요. 여러 소리가 동시에 나니까요. 그런데 그것도 한 분야에 오래 집중하다 보면 그만큼 쌓이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신기한 것이 아니에요.

저는 어릴 때부터 어떤 일이든 궁금하면 자꾸 물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에게 야단도 많이 맞았어요. ‘어른이 말하면 가만히 있지 왜 자꾸 묻느냐’ 하고요. 그런데 지나 놓고 보면 그런 것도 하나의 밑거름이 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오늘 하루 새벽부터 나와서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스님의 말씀에 참가자들은 큰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오후 5시 30분, 모든 일정을 마친 참가자들은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스님도 참가자들을 배웅한 후 두북수련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하루 스님과 동행한 행자님이 걸음 수를 확인하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22,000보나 걸었네요.”

아침부터 참가자들과 함께 걸으며 쉴 새 없이 안내를 이어간 스님도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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