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6.10.9. 용성조사 오도일 기념법회
“문명사적 대전환기, 우리가 준비해야 할 3가지 과제”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구미 아도모례원에서 용성조사 오도일 기념법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스님은 두북수련원에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새벽정진과 명상을 마친 스님은 아침식사를 하고 원고를 수정했습니다.

원고 수정을 마친 스님은 농사팀장과 함께 두북수련원의 밭을 둘러보며 김장 준비 상황을 점검했습니다. 잘 정돈된 밭에는 배추와 무가 가지런히 심어져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어 비닐하우스를 살펴본 뒤 논으로 이동해 벼의 상태도 확인했습니다.

"농사 잘 지었네요. 수고했어요."

이어 오전 7시 20분부터 스님은 국제지부의 아루나 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아루나 님은 인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분으로 미국에서 온라인으로 영어불교대학을 마치고 현재 두북수련원 농사팀에서 3개월간 생활하며 정토회 활동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주로 도시에서 살다가 농촌에서 생활하려면 좀 힘들지 않나요?(웃음)”

“아니요. 원래 도시 중심부가 아니라 외곽 지역에 살았고, 농장에서도 자원봉사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이곳 생활이 편안하고 좋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아루나 님은 평생 바쁘게 살아온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 쉬는 것이 오히려 어렵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스님은 과거 봉암사에서 수행했던 일화를 들려주며, 열심히 일하는 것도 하나의 습관이며 그 습관에 끌려가지 않고 자기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도 하나의 습관이거든요. 이것도 카르마예요. 어떻게 보면 좋은 습관이기도 하지만, 자기를 지치게 한다는 점에서는 개선해야 할 습관이기도 해요.

수행의 목표는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열심히 일하는 것이 오히려 스트레스를 가져온다면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이 문제가 해결될까요? 그렇지 않아요. 가만히 있으면 며칠은 좋은데, 시간이 지나면 뭔가 뒤처지는 것 같고, 뭔가 잘못된 것 같은 생각이 일어나요. 그래서 가만히 있는 것이 더 힘든 거예요. 그래서 멈춰도 괜찮고, 일을 해도 괜찮은 것이 자유예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자신의 카르마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알고 필요에 의해서 일을 해야 하는데, 무엇이든 보면 그냥 자동으로 반응해서 일을 하는 것은 카르마대로 살아간다는 거예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다르지 않지만, 마음의 상태는 다른 거예요. 카르마는 좋고 나쁜 것이 아니에요. 그냥 습관일 뿐이에요. 그러나 그 습관으로 인해 나에게 손실이 생긴다면 개선해야 할 대상이 되는 거예요. 만약 개선하지 못한다면 그로 인한 손실을 감수해야 하고요. 그러니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는 연습을 꾸준히 해 나갑시다.”

대화를 마친 스님은 아도모례원으로 이동할 준비를 했습니다. 차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오자, 오랜만에 두북을 찾은 스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두북 공동체 식구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스님은 농사일로 수고하는 공동체 성원들과 한 사람 한 사람 악수를 하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누가 잘해서 이렇게 농사를 잘 지었나요? (웃음)”

두북농사팀 식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스님은 차를 타고 아도모례원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아도모례원은 약 1,600년 전, 인도의 아도화상이 중국과 고구려를 거쳐 신라에 불교를 전하신 곳입니다. 부처님의 도가 처음 열린 곳이라 하여 이 지역을 ‘도개’라 하였고, 모례장자의 집에서 처음으로 불법을 전하셨기에 신라불교 초전법륜성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또한 근세 불교의 중흥조이자, 일제강점기에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불교계 대표로 참여하신 용성진종조사께서 1886년 이곳 모례정(毛禮井) 인근에서 용맹정진하시어 큰 깨달음을 이루신 곳이기도 합니다.

오전 9시 30분 스님은 아도모례원에 도착하였습니다. 신라시대 복색을 한 대구경북지부 정토회원들이 스님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스님은 먼저 법당에 가서 부처님 전에 삼배를 드리고, 이어서 용성조사 전에 삼배를 드렸습니다.

참배를 마치고 종무소에 가니 장미경 구미시의원, 김종미 구미시 문화예술과장 등 내빈들이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내빈들과 함께 차를 마시며 아도모례원 주변을 관광지로 조성하려는 구미시의 계획을 듣고, 성지를 상업적인 목적으로 관광지화하는 것보다는 아도화상의 전법 정신과 용성조사의 민족자주 정신을 국민에게 알리고 선양하는 연수·교육 시설을 보완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오전 10시 대구경북지부 향존법사님의 진행으로 용성조사 오도일 제140주년 특별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도모례원의 마당에 행사장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스님도 자리를 옮겨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대구경북지부는 물론 멀리서는 광주전라지부에서까지 600여명의 정토행자들이 현장에서 함께하고, 온라인으로도 특별법회가 송출되어 전국의 정토행자들이 법회에 참여했습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 봉독 후 국민의례가 이어졌습니다. 이어 대구경북지부 활동가 류지향님, 김수임님의 용성진종조사 행장 낭독이 있었습니다.

유수스님의 내빈소개에 이어 대구경북지부 회원들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공연은 140년 전, 용성스님께서 득도하신 그때의 모습으로 만일 우리를 만나러 오신다면 스님과 어떤 말씀을 나눌지 상상하며 준비한 공연이었습니다.

140년 만에 아도모례원으로 현생 나들이를 오신 용성스님과 정토수행자들의 대화 속에서 지금 우리 정토행자들의 수행길이 스님의 뜻을 잘 이어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어서 ‘온 겨레의 노래’를 함께 힘차게 부른 후, <다시 용성, 내가 세상의 희망입니다>라는 주제로 스님의 기념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도모례원에서 연 용성조사 오도 140주년

“안녕하세요. 오늘은 석가여래 부촉법 제68세이자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를 대표해 서명하신 백용성 조사님의 오도 140주년 기념일입니다. 이 기념식이 신라 불교 초전법륜 성지인 이곳 아도모례원에서 열리게 되어 더욱 뜻깊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 앉아 이 장소의 이름인 ‘아도모례원’의 연유가 된 ‘모례 장자’와 ‘아도화상’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오도 140주년을 맞은 용성 진종 조사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스님은 아도 화상이 신분을 숨긴 채 불교를 전하고 모례 장자가 그를 보호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 공인이 신라와 가야의 통합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하며, 아도 화상의 희생과 헌신이 신라의 성장과 통일의 씨앗이 되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스님은 가야와의 갈등을 넘어 더 큰 미래를 내다보았던 신라의 사례를 오늘날 남북 관계에 비추어 설명했습니다.

경쟁을 넘어 백 년 앞을 내다보는 눈

“지금 우리는 백 년 전에는 상상도 못 할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은 북한과의 과거 역사 때문에 북한이 우리의 경쟁 상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북한은 이미 우리의 경쟁 상대가 아닙니다. 디지털 문명에서 우리의 경쟁 상대는 감히 옛날에는 꿈도 못 꾸던 일본이나 중국, 세계 강국들입니다. 북한과의 갈등으로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는 다만 위험 요소가 있기 때문에 위험 관리는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조금 더 큰 눈을 뜨고 앞을 내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곳 아도모례원에서 되새겨야 할 것은 100년, 200년 앞을 내다보고 씨앗을 심은 아도 화상의 정신과 이를 묵묵히 보호하고 보살핀 모례 장자의 관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문제를 넘어 우리 민족사 전체로 보아도 참으로 거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유럽의 르네상스나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이들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해서 이를 단순히 기독교 운동이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변화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시에는 불교가 가장 선진적인 사상이었기에 불교를 통해 사회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단순히 한 종교의 역사로만 바라보는 것은, 국가의 정책을 다루는 입장에서 볼 때 크나큰 편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서 용성조사의 오도일을 기념하는 것은, 그분이 바로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삶이 아도 화상의 삶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특히 용성조사께서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으셨으니 오도일만큼은 이곳에서 기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뜻에서, 그동안 오도기념식을 해오던 용성조사의 탄생지인 장수 죽림정사에서 아도모례원으로 옮겨 기념식을 열게 된 것입니다.

치열한 수행에서 민족의 독립운동으로

용성조사님은 1864년에 태어나셨습니다. 조선 왕조 500년 역사가 기울어 가던, 고종이 즉위한 바로 그해였습니다. 용성조사님이 만으로 22세, 우리 나이로 23세가 되던 140년 전 1886년은, 조선 왕조가 내부의 모순뿐만 아니라 외부 열강의 침략을 받으며 점점 쇠잔해 가던 시기였습니다. 국운이 다하고 나라가 멸망으로 치닫던 어려운 시절에 태어나 성장하셨습니다. 그런 시대적 혼란 속에서 조사님께서는 불법을 만나 출가해 우선 자신의 무지를 깨치는 수행에 전념하셨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견도(見道)를 거쳐 수도(修道)를 닦고 무학도(無學道)를 이루신 뒤, 마침내 이곳에 이르러 궁극의 깨달음인 오도(悟道)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존재의 본래 면목을 확연히 꿰뚫어 보신 조사님께서는 낙동강을 건너며 자신이 깨달은 바를 노래하셨습니다.

‘금오산 천년의 달이요, 낙동강 만 리의 물결이로다. 고기잡이배는 어디로 갔는가, 예처럼 갈대꽃에서 자는구나.’

확연히 깨달아 한 생각이 사라지니 진리는 본래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경지, 즉 무심의 경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은 후 여기저기 다니면서 보림(保任)을 하셨고 석가여래 부촉법 제68세로 환성지안 조사의 법을 원사하시고, 현실적으로는 석가여래 계대법 제74세를 남원 행준 조사로부터 부처님의 정법을 이어받아 제75세가 되었습니다.

이후 불교 수행 대중을 지도하기 위해서 선원의 선원장과 조실을 맡아 수행자들을 제접(提接)하시다가, 나라가 기울어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졌습니다. 이에 조사께서는 세상으로 나와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독립운동과 무너져버린 불교를 바로 세우는 새로운 불교 운동, 대각교(大覺敎)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조선조 500년 동안 탄압받은 척불의 폐해가 너무나 컸습니다. 부처님의 법은 사라지고 무속 신앙, 민간 신앙과 다름없는 기복적 요소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불법의 핵심 요체인 가르침인 관점을 재정립하기 위해서 5대 수행을 정립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대중들이 불법을 알 수 있도록 한문 경전을 한글로 번역해 재가 신자들도 다 부처님 법을 알 수 있도록 불교 대중화를 하셨고, 일요 불교 학교를 열어 어린아이까지 불교를 알 수 있도록, 부녀 선원을 열어 여성들이 참선할 수 있도록 불교 대중화에 힘쓰셨습니다. 나아가 불교를 넘어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민족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셨습니다. 3·1 독립선언에 참가하시고 옥고도 치르시고, 그 이후에 돌아가실 때까지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셨습니다.

그 뒤 조사께서는 1940년에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때는 참으로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일제가 1937년에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전 세계를 지배할 것 같은 시기였습니다. 결국은 이제까지 독립운동하던 많은 사람도 조선의 독립은 ‘달걀 갖고 바위 치기다’라며 독립을 포기할 만큼 절망적인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조사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고 60년 뒤에 대한민국이 새롭게 일어나리라 내다보시며, 그 공덕을 쌓는 10가지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 유언을 동헌완규 조사, 불심도문 대사께서 지금에 이르도록 이어오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용성 진종 조사께서 깨달음을 얻은 140주년을 기념하며, 아도모례정에서 아도 화상을 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교계의 현안뿐만 아니라 민족사의 현안을 풀어가는 데에도 무언가 기여를 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디지털 문명에 의해서 가장 앞선 위치에 있습니다. 한류가 전 세계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AI 시대, 미증유의 대전환을 맞이하며

하지만 오늘 우리는 또 많은 어려움도 겪고 있습니다. 남북 간에는 ‘두 개의 적대 국가’라고 하는 단절된 상황을 가져왔고, 동맹인 미국으로부터도 투자를 강요당하는 어려운 국면에 놓여 있습니다. 민족과 동맹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를 정착시키고, 인공지능의 발달과 기후 위기라고 하는 미증유(未曾有)의 시대에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나가야 합니다.

저는 지난달에 미국의 유수한 대학 17곳을 방문해 미국의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변화가 워낙 빠르다 보니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다 불안한 것입니다. 이런 불안한 심리를 어떻게 안정시킬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단순한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수행으로서의 불교가 어느 때보다도 지금의 세계에 요구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했던 많은 가치관이 인공지능의 발달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생산적인 노동을 하는 성실한 인간상을 추구해 왔는데, 다음 시대에는 생산 노동을 휴머노이드가 도맡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하는 새로운 큰 화두가 던져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아날로그 시대에 생각이 머물러 있습니다. 불상을 세우고 건물을 지어야 비로소 무언가를 이룬 것처럼 생각하는 과거의 경험이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생각도 바꿔야 합니다. 정토회는 이미 온라인 정토회로 전환했습니다. 과거에는 대형 교회나 대형 사찰이 신도를 모으는 데 유리했지만, 이제는 큰 건물을 갖고 있다고 해서 유리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특히 청년 세대는 기성세대와 전혀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변화하는 시대를 위한 평화재단의 세 가지 과제

오늘 용성조사의 오도일을 기점으로 우리에게는 새로운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이에 평화 재단에서도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며 세 가지 TF팀을 구성하려고 합니다.

첫째, 인공지능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기후 위기가 도래한 이 시점에서 이러한 변화를 인류 문명사에서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기술 발전을 넘어 문명사적 대전환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철기 시대가 도래하면서 진나라와 같은 제국이 출현하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제국주의가 등장했듯이 지금 새로운 기술의 발달로 빈부 격차가 급격히 벌어지고 권력이 집중되는 상황에서 어떤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것인지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남북 관계나 동맹 관계만 다루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넓은 관점에서 시대의 변화를 이해하고 국가의 미래를 그려 나가야 합니다.

둘째,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갈등 구조를 푸는 일입니다. 여야의 갈등은 말할 것도 없고, 여당과 야당 내부에서도 갈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갈등을 넘어 국민적 합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데이터센터를 건설하려면 전력이 필요하고 이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원자력 발전이 필요하다면 단순히 찬성과 반대로 나눌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원자력과 화석연료, 태양광 등 각 에너지원에서 어떻게 공급할 것인지 함께 논의해야 합니다.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충분히 논의해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이것은 어느 정당이 집권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셋째는, 세계를 대하는 우리의 외교적 자세도 달라져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중국이나 미국과 같은 강대국 중심의 외교에 치중했다면 이제는 유럽과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더 많은 국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폭넓은 외교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야 합니다.

이처럼 시대의 변화에 맞춰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를 설정하듯이 정토회뿐만 아니라 종교계도 새로운 과제를 고민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종교를 찾지 않는 시대에 젊은이들이 겪는 불안을 어떻게 해소하고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기존의 종교적 역할만으로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충분히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신부와 목사, 스님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야 할 때입니다. 이제는 불교가 더 좋은지, 기독교가 더 좋은지를 따질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처럼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과거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용성조사께서 당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어떤 새로운 관점을 가졌는지, 아도화상은 왜 먼 인도에서 이곳까지 와서 전법을 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계기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대한민국이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작은 아도화상이 되고 용성이 되어

이러한 뜻을 모아 여러분이 오늘 정한 주제가 바로 ‘우리가 다시 희망이 되자’일 겁니다. 우리 각자가 작은 아도화상이 되고, 다시 용성이 되어 우리 사회에 작은 희망을 만들어 가자는 것이 오늘 여러분이 정한 주제가 아닐까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이 자리에 많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비록 이 장소가 좁고 초라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정신은 위대합니다. 이 위대한 정신을 어떻게 하면 우리 국민과 전 세계에 널리 확산시켜 나갈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하며 오도 140주년 기념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다음 순서는 즉문즉설 시간이었습니다. 활동가들이 중심인 행사였지만 열린 공간에서의 즉문즉설이니만큼 마을 주민들도 함께 앉아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총 다섯 개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 가족에게 계속되는 질병과 불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더 이상 간병하고 싶지 않습니다.
  •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자녀에게 대물림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봉사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어떻게 지회를 운영해야 할까요?
  • 법당 지붕에 사는 박쥐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그중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간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 질문자의 사연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더 이상 간병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의심이 많아지셨습니다. 간병인을 모셔도 거부하시고, 모진 말을 하며 쫓아내십니다. 오빠는 재산만 가져가고 연락도 하지 않아 결국 저 혼자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상황입니다. 남편도 전혀 도와주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남편에게 반찬이라도 문 앞에 걸어 놓고 오라고 부탁하지만, 그것조차 해주지 않습니다. 저는 아홉 살 딸을 키우면서 구미에서 대구까지 출퇴근하며 직장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려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

솔직히 이제는 어머니를 더 이상 간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버릴 수도 없으니, 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간병인의 도움을 모두 거부하시는데,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돼요. 안 해도 되긴 하지만 그렇게 하면 엄마가 문제가 되는 게 아니고 자기 마음에 죄책감이 들어서 안 되는 거예요. 지금은 엄마가 하자는 대로 다 해주려니 너무 힘들고, 그렇다고 안 하자니 약간 죄스러운 거잖아요.

그럼, 중도라는 건 뭘까요?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거예요.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만큼 한다. 그러면 엄마가 볼 때는 좀 부족하겠죠. 그 부족한 부분은 엄마가 감수하든지, 아니면 요양원에 가든지 간병인을 쓰든지 해야겠죠. 딸이 와서 잘해주니까 엄마로서는 당연히 딸이 좋겠죠. 나 같아도 간병인보다는 딸이 낫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계속 잘하면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해야 돼요. 일부러 못되게 할 필요는 없지만, 그냥 하루에 두 번 갈 걸 한 번 간다든지 이런 식으로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로 줄이면 어떨까 싶네요. 그러면 처음에는 당연히 섭섭해하고 욕을 하고 난리가 나겠죠. 그래도 엄마한테 ‘엄마, 나도 살아야 하지 않나?’라고 얘기하면 돼요.

‘엄마가 그러면 안 된다’, ‘엄마가 나쁘다’, ‘나 죽겠다’ 이렇게 말하지 말고, 웃으면서 ‘엄마 나도 애 키우고 살아야 하니까 이 정도밖에 못 해’라고 얘기하면 돼요. 엄마는 섭섭해하더라도 ‘나도 살아야 하니까 이해해 줘’ 이렇게 얘기하면 돼요. 엄마가 정신없을 때도 있지만 정신이 있을 때도 있잖아요.

그러면 엄마가 너무 힘들면 간병인을 이틀에 한 번씩 부른다든지 시간제로 부른다든지 수를 쓰겠죠. 방이 좀 지저분해도 그대로 두고, 대소변을 실수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감수하고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걸 다 깨끗이 하고 살고 싶다면 요양원으로 가야 해요. 요양원으로 가지 않으려면 좀 지저분하게 해놓고 살 수밖에 없어요. 그걸 질문자가 깨끗하게 하겠다고 하면 질문자가 직장을 그만두고 전문 간병인처럼 해야 해요. 그런데 요즘은 부모를 직접 간병해도 일정한 급여를 받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 직장을 그만두고 간병 교육을 받아서 직접 부모를 모시며 간병인이 되는 방법도 있어요.”

“제가 휴직을 한 1년 정도 하고 해봤는데 제가 간병은 못 하겠더라고요.(웃음)”

“남이 하는 게 나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질문자가 엄마의 요구대로 다 해주지 말고, 엄마한테서 조금 떨어지라는 거예요. 엄마를 미워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건 해주고 못 해주는 건 안 하면 돼요. 이게 삼십육계라는 거예요. 삼십육계는 완전히 관계를 끊는 것도 삼십육계지만, 관계를 조금 줄이는 것도 삼십육계예요. 감당이 안 되면 조금 떨어지는 거예요.

여러분도 일이 너무 바쁘면 청소를 좀 덜 해야 해요. 매일 하던 청소를 이틀에 한 번씩 하는 거예요. 저는 일주일에 한 번도 안 해요. 혼자 가만히 있으니까 청소할 일이 없잖아요. 먼지가 조금 쌓이면 어때요? 누가 제 방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니까 냄새가 나는지도 잘 몰라요. (웃음) 그러니까 어느 정도 불편한 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어요. 그걸 전부 젊을 때처럼 다 할 수도 없어요. 요즘 저는 원고 쓰는 것도 그래요. 옛날에는 반드시 다 써놓고 잤는데 지금은 안 그래요. 졸리면 그냥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원고를 써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몸이 못 견뎌요. 어떻게 하겠어요. 안 하는 것보다는 그렇게라도 하는 게 낫잖아요. 그러니까 질문자도 조금 줄이세요. 자기 몸이 감당하는 만큼만 하면 돼요. 그러다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요양원에 모셔야 해요. ‘그러면 불효가 아니냐?’ 할 수 있는데 안 하면 불효지만 할 수 없어서 안 하면 불효가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질문자의 고민이 해결되었는지 질문자의 마지막 답변 소리가 경쾌했습니다.

모두 함께 단체 사진을 찍고 행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행사를 마친 스님은 점심 식사를 하고 1시 40분 서울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연휴 기간이라서 그런지 길이 막혀 5시가 거의 다 되어 정토회관에 도착하였습니다.

저녁에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휴식을 하였습니다.

내일 스님은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청년페스타 행사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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