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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북미순회강연 열여섯째 날입니다. 오늘은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New Jersey, USA)에서 영어 강연을 했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오전에는 일정이 없어서 모처럼 휴식을 취했습니다. 오늘은 정토회 미주회관이 있는 워싱턴 D.C.로 이동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숙소를 나서며 지난 며칠 동안 뉴욕에서의 일정을 지원해 준 김명호·유정희 님에게 스님의 책을 선물하며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점심시간에는 뉴욕 지역의 오래된 정토회 활동가분들과 만남이 있었습니다. 식당으로 향하면서 스님이 말했습니다.
“30년 전 미국 활동 초기에 함께 고생하신 분들과의 만남이에요.”

1년 만에 마주 앉아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 공양을 했습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뉴욕 지역 회원들이 함께 모여 정진도 하고 대화를 나눌 법당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흘렀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니, 오프라인에서 도반들을 만나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더 필요로 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공양을 마치고 다 함께 사진을 찍으며 내년의 만남을 기약했습니다.

뉴욕에서 1시 30분에 출발하여 4시에 프린스턴 대학교에 도착하였습니다. 강연 준비를 도와준 불교학생회 이승은 님이 스님을 맞이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교는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에 위치한 대학입니다. 1746년 ‘뉴저지 칼리지’로 설립되어 1756년 지금의 프린스턴으로 옮겨 왔습니다. 아이비리그 대학으로, 미국을 대표하는 명문 대학 가운데 하나입니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상징적 건물인 나소 홀(Nassau Hall)도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 시기인 1783년에는 당시 의회 역할을 하던 대륙회의가 이 곳 ‘나소 홀’에서 열렸다고 합니다. 오래된 건물과 커다란 나무가 어우러진 캠퍼스 곳곳에서는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강연장으로 이동하니 오늘 스님을 초청한 매튜 교수님이 있었습니다. 10년 전에 매튜 교수님을 통해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강연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오늘 이 자리도 만들어졌습니다.


4시 30분, 강연 시간이 되자 강의실은 청중들로 꽉찼습니다. 자리가 부족해 서서 강연을 듣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00여명의 청중이 함께하는 가운데 열 아홉 번째 북미순회강연이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고 이 자리에 온 것은 아닙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자기 좋을 대로 살면 됩니다. 즉, 자기 좋을 대로 사는 것이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네 좋을 대로 살아라'하고 말했는데 조금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이 그만큼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붓다는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보다 자연스럽게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기 좋을 대로 사는데 만약 괴롭다면, 이것은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그 괴로움은 자기가 만들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는 한 번 돌아봐야 합니다.'왜 괴롭지? 이게 괴로워할 만한 일인가?' 이렇게 살펴보면 어쩌면 별일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붓다의 가르침은 우리가 괴로움 없이 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니르바나’라고 합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목표는 죽어서 천당에 가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복을 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니르바나에 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대화를 나눕니다. 대화 중에 스스로 '어, 별것 아니네?', '어, 이렇게 하면 되겠네?' 한다면, 이것을 스스로 알아차렸다, 깨달았다 해서 한문으로는 ‘자각(自覺)’이라고 말합니다. 주제는 어떤 것이든 관계가 없습니다. 본인이 가장 간절한 주제를 선택하면 됩니다. 그리고 대화는 친구 사이에서 대화를 나누듯이 그렇게 편안하게 얘기하면 됩니다. 그러면 시작해 보겠습니다.”

사전 질문자 2명과 현장 질문자 3명이 있었습니다.
저는 제 진로에 대해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반면에 주변 동기들은 이미 진로를 결정한 것처럼 보여 조바심이 납니다. ‘성공' 혹은 '성공적인 삶'을 무엇입니까?
우리 삶에 정해진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인가요? 꼭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하나요?
괴로움(고통)의 정의가 무엇인가요?
가족, 친구, 인간관계, 직업과 같은 외적인 것들과 내 마음 속의 행복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나요? 외적인 것들을 추구하면서도 내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평등, 독재, 사회적 억압과 같은 사회 구조적 문제 속에서 개인은 어떤 태도와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지 불교적 관점이 궁금합니다.
“What is the definition of suffering?”
(괴로움의 정의가 무엇인가요?)

"괴로움이라고 할 때는 부정적 심리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병이 나면 육체에 통증이 있는 것처럼 정신적으로는 괴로움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러면 그 괴로움을 굳이 나눈다면 어떤 종류가 있을까요? 예를 들면 초조, 불안, 근심, 걱정, 두려움, 화남, 미움, 원망 이런 것들이 모두 괴로움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슬픔, 외로움, 아쉬움도 괴로움에 들어가고, 허전함, 방황, 이런 것도 괴로움에 들어갑니다. 부정적 심리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도 괴로움에 들어가고요. 이런 부정적 심리가 없는 상태,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를 ‘니르바나’라고 말합니다."
“Um, then how would you deal with suffering that is outside your control? For example, a lot of students here are very passionate about teaching, teaching psychology, but then they might have to choose economics due to financial reasons, or you know, not wear the shoes that they want to wear. ”
(예를 들면, 누군가가 심리학이나 다른 과를 하고 싶은데 경제적인 이유로 경제학과를 골라야 된다거나, 돈을 잘 버는 과를 골라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
“누구의 이야기 입니까?”
"Probably mine, probably others."
(저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도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제가 시작 전에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 상태에 놓인 나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런 상태에 있는 다른 사람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까?”
“Well, my problem specifically, for example, when I was starting university, I was kind of pushed to choose a major, but I wanted to be feasibility. So, for many years, I kind of carried this discrepancy with, you know, suffering. While I quite enjoy my current job, but then I always kind of think about that, yeah.”
(제 문제입니다. 나중에 돈이 안 되더라도 오랜 시간 동안 공부하고 싶었던 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에 진학하면서 미래에 돈이 될 수 있는 학과를 전공할 것을 강요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이 괴리감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지금도 내가 원래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네, 그 괴로움의 원인은 내가 좋아하는 과를 했다, 안 했다의 문제가 아니고 집착이 문제입니다. 저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승려가 됐어요. 제가 지금 승려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계속 '과학자가 됐으면, 과학자가 됐으면 좋겠는데' 하고 이미 지나간 일에 집착하고 있는 것 과 같습니다. 그러면 심리가 부정적으로 일어납니다.
이때,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승려를 그만두고 그냥 과학을 하든지, 승려를 계속하려면 과학을 그만두든지, 선택의 문제입니다. 저는 이것을 결합시켰습니다. 승려가 됐으니까 불경을 연구해야 했습니다. 저는 불경을 과학적으로 연구했어요. 그리고 불경에 있는 신화적 요소를 제거했습니다. 가능하면 붓다의 초기 가르침을 되살리는 관점으로 불교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불경만으로는 붓다의 초기 가르침을 되살리는 공부를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불경이라는 것이 붓다가 말한 건지, 기록하는 사람이 그렇게 쓴 건지를 구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구분하려면 인류 문화사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질문자 또한 선택의 문제입니다. 괴로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괴로워하는 것은 선택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선택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릅니다.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것과 저것을 두고 선택을 망설이는 이유는 선택하려는 것에 좋고 나쁨이 있는 게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안 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돈이 없어서 돈을 빌릴까 말까 망설인다면, 왜 망설일까요? 돈은 빌리고 싶지만 이자 쳐서 갚기가 부담스럽잖아요. 안 빌리면 지금 궁하고, 빌리면 지금은 좋은데 나중에 부담이 되는 거죠. 그 망설임은 선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데서 나오는 겁니다. 빌렸으면 기꺼이 갚아야 하고, 갚아 보니까 힘들면 다음부터는 빌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내가 조금 더 자립하는 것입니다. 빌리기는 하고 갚기는 싫은 마음이 종교적 믿음을 가져옵니다. 절이나 교회에 가면 ‘열심히 기도하면 안 갚아도 된다’고 가르치잖아요.(웃음)”
“Understood, thank you so much.”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As a professor who frequently counsels students on academic, future, and Buddhist practice concerns, I feel cautious and hesitant to guide them since I do not possess a formal Dharma lineage. Therefore, I would like to ask for your advice on how someone without a Dharma lineage can properly guide and help others.”
(저는 학생들을 상담하는 교수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찾아와 학업, 진로, 현재와 미래에 대한 고민, 자신들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불교나 수행에 대해 제게 묻곤 합니다. 일반인으로서 학생들에게 불교에 대해 이야기할때 어떻게 조언해 줄 수 있을까요?)
“자연 생태계의 모든 생명체들을 한번 보십시오. 작은 벌레도 스스로 살아갑니다. 토끼도, 다람쥐도 자기 스스로 살아갑니다. 모든 생명은 스스로 살아가는 힘,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 새끼인 경우는 부모가 도와야 합니다. 즉 성체가 될 때까지요. 그 뒤에는 각자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새끼를 돕는 것은 생명의 본능적 행위입니다. 즉 각자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보호하는 본능, 이걸 생물학적으로는 개체 보존의 본능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새끼를 보호하는 어미의 본능은 종족 보존의 본능입니다. 이 두 가지 본능이 없으면 생물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족 보존의 본능은 새끼일 때만 작용합니다.
사람을 자연 속에서의 하나의 생명체로 봤을 때, 성체를 대략 13세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회적으로는 18세, 19세를 성인으로 규정합니다. 왜냐하면 교육 과정이 많이 길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에는 더 이상 부모가 돌봐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즉 각자 자기 생명을 스스로가 유지해야 합니다. 즉 자연적인, 생물학적으로만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정신적인 작용이 매우 큽니다. 새끼일 때만 돌보는 것이 아니고 노인을 돌보기도 하고, 환자를 돌보기도 하고, 또 내 자식이 아니라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돌보기도 합니다.
이건 자연 상태에 없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착하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즉 '선'이라고 규정하는 거예요. 그러나 선은 의무가 아니라 선택입니다. 좋은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돼요. 좋은 일을 안 한다고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러나 다른 생명을 해치는 것,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 다른 사람을 성적으로 괴롭히는 것, 욕설을 하거나 거짓말을 해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 술을 먹고 취해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경우, 이러한 것들은 삼가는 게 좋다고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은 반드시 복수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내가 만약에 다른 사람을 한 대 때리면 상대는 나를 한 대 때리는 게 아니라 두 대나 세 대 때리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기준으로 볼 때는 손해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이죠.
즉, 내가 어떤 사람을 한 대 때렸을 때, 그가 나를 볼 때는 내가 나쁜 사람이겠지만, 내가 나를 볼 때는 어리석은 행동이에요. 세상에서는 좋은 행동과 나쁜 행동이 있지만 나를 기준으로 볼 때는 지혜로운 행동과 어리석은 행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선악 개념이 없습니다. ‘어리석거나 지혜롭거나’로 구분합니다.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이러한 관점이 자연스러움입니다.
그러니까 도우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어쩌면 도울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어렵다고 도움을 요청할 때, 그때 필요한 만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도우면 됩니다. 붓다는 다른 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한 적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찾아와서 요청할 때만 응답을 했습니다. 즉, 질문을 했을 때에만 대답을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에게 많은 학생들이 와서 어떤 이야기를 하면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해결해 줄 수 없는 경우에는 내 능력의 부족에 대해서 자책을 하게 됩니다. 그의 괴로움이 나의 괴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전염병이 옮는 것과 같이, 정신적인 괴로움이 옮겨가는 겁니다. 그냥 들어주면 됩니다. 한 80%는 들어주면 대부분 해결이 됩니다.

상담은 어려운 게 아닙니다. 들어주고 공감해 주면 됩니다. '아, 그래서 힘들구나.'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어떤 해결책을 요청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내가 경험한 바가 있으면 그가 참고할 수 있도록 '나는 이렇게 했다'라고 하면 됩니다. 그러나 내가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나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뭐가 어렵습니까? 남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어려워지는 거예요. 제가 여러분과 이렇게 주제에 관계없이 대화를 하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우려를 합니다.
‘물어서 스님 모르시면 어떡하죠?’ 저는 그게 제일 쉽습니다. '나도 모르겠다.'하면 되잖아요. 이거보다 더 쉬운 게 어디 있어요? (웃음) 다른 사람이 나에게 질문을 했을 때 내가 아는 이야기이면 그를 도와줄 수 있습니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이면 나한테 큰 도움이 됩니다. '아, 내가 이걸 몰랐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대화를 하면서도 제가 알 수 있는 부분이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것이고, 제가 모르는 부분이면 저한테 큰 도움이 되는 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아무런 부담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뭐든지 얘기해 보자고 하는 거예요.
친구가 둘이 앉아서 차 마시면서 이야기할 때 주제를 정할 필요가 없잖아요. 무슨 이야기든지 할 수 있죠. 그때 친구한테 '어, 나 잘 모르겠는데?' 그게 뭐가 문제예요? 이런 일을 하는데 계를 받고 안 받고, 승려이고 아니고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대화하는데도 무슨 자격증이 있어야 합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Thank you”
(감사합니다. 스님)
6시에 강의실을 비워줘야 했습니다. 현장에는 질문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강연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청중들의 큰 박수로 오늘 강연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스님은 오늘 강연에 초청해 준 매튜 교수님에게 스님의 책을 선물했습니다.

강의실에서 나와 스님은 오늘 강연을 준비하느라 고생한 봉사자들과 다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늘 강연을 총괄해서 준비한 정토 회원 허은실 님은 어제 콜럼비아 대학 영어강연까지 2개의 강연을 동시에 준비했습니다. 허은실 님은 프린스턴대학 강의가 늦게 결정되어 준비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서 걱정했지만, 학생회와 협력해서 행사 마무리까지 잘해 낼수 있었다고 합니다.

스님은 허은실 님과 불교학생회장 이승은 님에게 책을 선물했습니다.
법해 법사님은 오늘 함께한 봉사자들과 나누기를 진행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질문자들과 스님의 대화를 듣는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스님의 답변이 유머가 있어 재미있었고, 질문자들의 복잡한 문제들도 아주 간단하게 풀어주셨습니다.”
“행사가 잘 끝나서 기쁩니다. 젊은 학생들이 많이 와 주어서 고마웠어요. 담마 토크에 관심을 갖는 모습을 보니 미래가 밝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교수님과 몇 달 동안 일정을 조율했습니다. 원래는 더 큰 강연장을 요청했는데 이번에는 이곳에서 열게 되었어요. 오늘 행사를 계기로 다음에는 더 큰 강연장에서 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쁩니다.”
적은 인원이지만 서로 힘을 보태고 의지하면서 똘똘 뭉쳐 행사를 잘 마쳤습니다.
6시 40분, 스님은 차를 타고 3시간을 달려 워싱턴 D.C. 근교에 있는 정토회 미주회관으로 이동했습니다.

10시에 미주 정토회관에 도착한 스님은 저녁 공양을 하고, 정토회 미주회관의 대중들과 인사를 하였습니다.

내일은 워싱턴 D.C.에서 3개의 미팅을 하고, 오후에는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영어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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