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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에 지난 5월에 있었던 즉문즉설 법문을 소개해 드립니다.
“저는 평소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업식으로 인해 고민이 많습니다. 저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화를 잘 내고, 제 잣대를 들이대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을 냅니다. 그러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닮기 싫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습니다. 싸움과 폭언이 일상이었고, 경쟁과 서열을 강조하던 가정환경의 영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밖에서는 친절한데 정작 가까운 사람에게는 인내심이 없는 제 모습을 자주 봅니다. 화를 참지 못해 욱했다가 사과하고, 또다시 반복하는 일이 계속됩니다. 나름대로 업식을 이겨보겠다고 수행도 하고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행을 하면서도 남을 판단하거나 스스로를 내세우는 마음이 올라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마음도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한마디로 요약하면 ‘성질이 좀 더럽다’ 이런 얘기네요. 성질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앞으로 그것 때문에 후회할 일이 생길 것 같다는 말이죠. 만약에 그런 성질로 결혼하면 이혼할 수도 있고, 연애하면 헤어질 수도 있고, 직장에서도 갈등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예요. 질문자의 말을 들어보면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은 비교적 잘하는데 가까운 사람들과는 잘 안 된다는 거죠. 엄마라든지 동생이라든지,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부딪힌다는 거예요. 그러면 결혼해서도 갈등이 커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이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잖아요. 옛날에는 한 번 결혼하면 평생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으니까 이혼을 큰 문제로 여겼지만, 요즘은 두 번, 세 번 결혼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는 그냥 성질대로 사는 겁니다. 대신 그 성질로 인해 생기는 갈등이나 손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 성질에 누가 날 좋아하겠어? 혼자 살아야겠다.’ 이렇게 마음먹을 수도 있고, 살다 보면 또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어요. 결혼해서 살아보다가 안 맞으면 헤어질 수도 있는 거고요. 이렇게 생각하면 이게 꼭 큰일만은 아니에요.

그런데 두 번째 경우가 있죠. 성질대로 사는 건 편한데, 그로 인한 손실이 너무 크니까 성질을 좀 고치고 싶다는 거예요. 지금 질문이 바로 그 얘기죠. 그런데 성질이라는 건 원래 잘 안 고쳐지기 때문에 성질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사람의 성격도 그렇고 물의 성질, 불의 성질, 쇠의 성질이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로 쉽게 안 바뀝니다. 거의 고정돼 있을 때 우리는 ‘이게 이 사람의 성격이구나.’, ‘이게 이 물질의 성질이구나.’ 하고 말하잖아요. 그만큼 성질이라는 건 본래 잘 안 바뀌는 특성이에요.
그럼 사람의 성질, 즉 성격은 어떻게 형성될까요? 원리를 좀 설명하자면, 우리의 정신작용을 총괄하는 기관이 뇌입니다. 이 뇌에는 어떤 특징적인 작용 방식이 있어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와서 ‘스님 호미 좀 빌려주세요.’ 해서 빌려줬어요. 다음 날 또 와서 ‘호미 좀 빌려주세요.’ 하고, 그다음 날도 오고, 이렇게 여러번 반복하면 어떻게 될까요? 5일째쯤 되면 호미 빌려 달라고 하기도 전에 호미를 줍니다. (웃음) 왜 그럴까요? 여러 번 반복되면 뇌가 ‘아, 저 사람은 호미 빌리러 오는 사람이구나.’ 하고 알아차리기 때문이에요. 좋게 말하면 미리 아는 능력이 생긴 거죠. 이것이 바로 뇌의 특징적인 자동반응 성질이에요.
뇌의 작용 가운데는 같은 일이 반복되면 그것을 하나의 패턴으로 확정 지어버리는 성질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화를 반복해서 내면 ‘저 사람은 화를 잘 내는 사람이다.’ 하고 인식해 버립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동화시켜 버려요. 처음에는 ‘반응할까, 말까’ 생각하지만 몇 번 반복되면 그런 과정 없이 자동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에너지가 적게 들어서 효율성이 높아집니다. 생명체와 정신작용은 기본적으로 효율을 추구하거든요. 그래서 반복되는 행동은 자동화해 버립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상적으로 ‘습관’이라고 부릅니다. 몇 번 반복되면 습관이 생기는 거예요. 이 습관은 의식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작동합니다. 의식이 알아차리기 전에 이미 반응이 일어나는 거예요. 무릎을 망치로 탁 치면 다리가 저절로 올라가는 것처럼 자동반응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화를 내놓고도 ‘아이고, 습관적으로 그랬다.’. ‘나도 모르게 그랬다.’, ‘무의식적으로 그랬다.’ 이런 말을 하잖아요. 다 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이미 습관화된 반응 패턴을 불교애서는 ‘업식(業識)’이라고 합니다. 인도말로는 ‘카르마(karma)’라고 해요. 그런데 인도의 전통문화에서는 이 카르마를 운명처럼 이해했습니다. ‘저 사람은 원래 저렇게 태어났다.’ 이렇게 타고난 성질이라고 본 거예요. 그래서 카르마가 곧 운명이라는 뜻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너는 그렇게 살 운명이다.’ 이런 식이죠. 하지만 불교는 같은 카르마라는 용어를 쓰지만 불교에서는 그것을 운명이 아니라 습관으로 봐요.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지만 습관은 바꾸기 어렵더라도 바꿀 가능성은 있습니다. 이게 큰 차이예요. 인도의 전통문화는 운명을 알아서 운명대로 사는 것이라면, 불교는 운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즉 습관을 바꾸는 거예요. 그래서 운명대로 사는 것이 종교라면, 운명을 바꾸는 것은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자도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행동을 보며 거부반응을 가졌지만, 계속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자랐기 때문에 의식은 반발해도 무의식에는 이미 그것이 습관처럼 자리 잡아버린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주정을 한다고 할 때, 어릴 때는 ‘난 절대로 술 안 먹을 거야.’라고 다짐하지만 나이가 들면 똑같이 술주정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부모가 이혼한 가정도 비슷합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대체로 상처를 받게 되죠. 그래서 의식적으로는 ‘난 절대 이혼 안 할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의식에는 이미 ‘이혼은 할 수도 있는 일’이라는 경험이 입력되어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결혼해서 살다가 어려움에 처하면, 의식적으로는 부모를 떠올리며 이혼을 안 하겠다고 결심하지만, 무의식에서는 이혼할 수 있다는 생각이 한편에서 계속 올라옵니다. 한쪽에선 ‘하면 안 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해도 돼!’ 하는 생각이 동시에 올라오는 거예요.
이런 점을 고려하면 부모의 이혼을 보고 자란 아이가 결과적으로 이혼할 가능성이 더 높아질 수 있겠죠. 반면 부부가 엄청나게 싸우면서도 끝내 이혼하지 않고 사는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겉으로는 ‘왜 엄마는 저렇게 힘들게 살면서도 이혼을 안 하지?’라고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무의식에는 ‘결혼하면 쉽게 이혼하지 않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 이혼을 결정할 때 굉장히 어려움을 겪습니다. 의식적으로는 이미 이혼하기로 결심했고, 이혼서류에 사인까지 해놓고도 마음 한쪽에서는 끝내 결정을 못 내리는 거예요. 이렇게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 탓만 해서는 안 돼요. 그것도 하나의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말을 배우게 된 것도 결국은 습관이 형성된 겁니다. 만약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도 일본에서 자랐다면 일본말을 배웠겠죠. 반복해서 듣고 사용하다 보니 자동화된 거예요. 여러분이 영어를 아무리 오래 배워도 모국어처럼 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영어는 듣고 생각한 뒤에 번역하는 과정을 거치지만, 한국말은 그냥 저절로 나오잖아요. 이미 자동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안 내력이라는 말도 생긴 거예요. 그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에요. 흔히 ‘피는 못 속인다’고 말하지만, 꼭 혈연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보고 듣고 자란 환경의 영향이 함께 들어 있는 거예요.
질문자는 그런 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아버지 것이든 어머니 것이든, 그런 무의식적 습관을 갖게 됐는데 의식은 거기에 저항하는 거죠. 안 좋은 모습을 봤으니까 ‘저건 안 좋아, 나는 저렇게 안 할래.’ 하고 저항하는데 잘 안 바뀝니다. 의식과 무의식이 갈등을 일으키는데 열에 아홉은 무의식이 이겨요. 그래서 옛말에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말도 있는 겁니다. 의식으로 아무리 결심해도 무의식의 힘이 더 강한 거예요. 사람이 긴장했을 때는 의식과 무의식 중에 어느 쪽이 강할까요? 의식이 강해요. 그런데 긴장이 풀리면 무의식이 작동합니다. 그래서 직장에 가면 의식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집에 오면 무의식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겁니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의식이 작동하고 가까운 사람을 만나면 무의식이 작동합니다. 질문자가 밖에서는 괜찮은데 집에만 오면 흐트러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예를 들면 중학생이 내일 시험이라 공부해야 하는데 너무 졸려요. 그래서 엄마한테 ‘조금만 자고 할 테니까 새벽 3시에 깨워줘.’라고 부탁합니다. 엄마가 알았다고 하고 3시에 깨우면 벌떡 일어날까요? 몇 번을 깨워도 안 일어납니다. 잠결에 ‘나 괜찮다니까!’ 하고 고함까지 지르죠. 그러다가 아침에 일어나서는 왜 안 깨웠냐고 화를 냅니다. 왜 안 될까요? ‘시험 봐야 한다.’, ‘공부해야 한다.’라는 것은 의식의 생각이에요. 무의식에서는 ‘그거 안 하면 그만이지.’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친구와 여행을 가기로 했다면 어떨까요? 새벽 기차를 타야 해서 새벽 3시에 깨워달라고 부탁해도, 막상 가보면 이미 일어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무의식에서 그 일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의식이 잠들어 있어도 무의식이 ‘야, 일어나!’ 하고 깨우고, 또 잠깐 못 일어나도 조금만 건드려도 금방 벌떡 일어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의식에 바탕을 둔 마음은 안 다스리고 의식만 붙잡고 살아갑니다. 각오하고 결심하고, 생각만 자꾸 하는 거예요. 그래서 스트레스받는 겁니다. 세상의 윤리는 보통 ‘참아라.’ 하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수행은 다릅니다. 억지로 참는 건 오래가지 못해요. 환경이 바뀌면 금방 풀려버립니다. 군대에서 누가 옆에서 닦달하면 하는 척하지만, 제대하고 나면 다시 안 하죠. 아버지가 야단치면 하는 척하다가도 아버지가 나가면 다시 누워 자버립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스스로 ‘이건 해야겠네. 안 하면 내 손해네.’ 하는 마음이 내면에서 올라오면 훨씬 쉬워져요. 그래서 수행에서는 자각을 중요시합니다. 주변에서 ‘너 고집이 세다.’라고 아무리 말해도 잘 안 고쳐지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 ‘어? 내가 고집이 센가?’ 하고 자각하게 되는 때가 있어요. 그런 자각이 생기면 누군가와 대화하다가도 ‘아, 내가 지금 고집부리고 있구나.’ 하고 스스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면 조금씩 제어가 가능해져요.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성격도 조금씩 바뀝니다.

이렇게 전체적인 원리를 설명했는데, 왜 집에만 오면 자꾸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지 이해가 되셨죠? 집에 오면 아무리 긴장하려고 해도 긴장이 잘 안 됩니다. 또 엄마가 아이를 낳아 키울 때 자신의 카르마가 아이에게 그대로 가는 이유도 마찬가지예요. 갓난아기 앞에서 엄마가 긴장하고 살까요, 편하게 살까요? 그러니까 성질이 다 드러나서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첫째, 자신의 성질이 이미 습관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고치기 어렵다면 생긴 대로 살아도 됩니다. 할아버지도 그렇게 살았고 아버지도 그렇게 살았고 나도 그렇게 산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러 문제가 있더라도 사는 데 큰 지장은 없어요. 대신 그 성질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고치기 어렵다는 것이지 고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고치겠다는 결심이 강해야 합니다.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낼 때마다 바로 천 배를 한다고 정해보세요. 이것을 다섯 번, 열 번 반복하면 화가 올라오다가도 ‘또 천 배를 해야 하네’ 하는 생각이 들어 멈추게 됩니다. 천 배 자체가 성질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면 힘든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무의식이 학습하는 것입니다.
둘째, 꾸준히 반복해야 합니다. 습관이 생길 때 반복이 필요했듯이 습관을 바꿀 때도 반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꾸준히 해야 합니다. 절을 할 때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문을 정해서 할 수 있습니다. 화를 잘 낸다면 ‘화나지 않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화내지 않겠습니다’는 각오와 결심입니다. 그렇게 다짐했는데 다시 화를 내면 약속을 어긴 것이 되어 자괴감이 생깁니다. ‘나는 역시 안 돼’ 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화나지 않습니다’라고 하면 화가 났을 때 ‘지금 습관적인 반응이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놓쳤다면 다시 알아차리면 됩니다. 실패한 것이 아니라 단지 놓친 것입니다. 놓치면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꾸준히 연습하면 습관을 바꿀 수 있습니다. 질문자는 어떻게 해볼보겠습니까?”
“아침마다 108배를 하고 있기는 한데, 108배를 하느라 바빠서 다른 생각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108배만 해도 운동이 되니까 좋습니다. 다만 108배를 하면서 계속 자신에게 암시를 주세요. ‘나는 화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계속 반복하면 화나지 않는 상태가 자기 마음의 기준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러면 화가 일어나는 순간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알아차림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개선해 보고, 그래도 고쳐지지 않으면 그에 따르는 결과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개선되지 않으면 손실을 감수하고, 손실을 겪고 싶지 않으면 알아차리면 됩니다. 놓쳤다면 과보를 받고, 과보를 받지 않으려면 깨어 있으면 됩니다. 이렇게 두 가지를 함께 받아들이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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