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6.9.1.
“기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뒤, 무엇에 의지해 살아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에 지난 6월에 있었던 즉문즉설 법문을 소개해 드립니다.

기도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뒤, 무엇에 의지해 살아야 할까요?

“과거 저는 10년 동안 매달 절에서 도반 다섯 명과 함께 조상 합동 제사를 지내며 복을 비는 기복적인 불교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토경전대학에서 공부하면서, 경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기만 해도 복을 준다는 가르침의 뜻이 제가 생각했던 의미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기도하고 경을 읽고 절을 하면 부처님도 도와주시고 조상님도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딘가에 기대고 의지하던 한 가닥 희망이 사라진 것 같아 허전하고 섭섭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하면 됩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예전에는 기도하며 바라고 의지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마치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어린아이처럼 허전하고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저의 이런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면 될까요?”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래요? 허전할 때는 빌면 되죠. 어린아이가 산타클로스를 찾는 것은 봐 줄 만하잖아요. 낭만적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산타클로스가 굴뚝으로 들어와서 선물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있다면 조금 바보스럽잖아요. 두 살짜리 아이가 ‘엄마, 나 어디서 나왔어?’ 하고 물으면 엄마가 배꼽을 가리키면서 ‘여기서 나왔어’ 이러잖아요. 그런데 스무 살 된 딸이 똑같이 물었는데 또 배꼽을 가리키며 ‘여기서 나왔어’ 한다면 맞지 않겠죠. 이처럼 사람의 수준이나 처지에 따라 물음의 답이 다른 겁니다. 그래서 복을 비는 기도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어요. 다만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고 의지하는 것은 조금 어리석을 뿐입니다.

좌절과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는 기도가 희망을 주기도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나에게도 길이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가 성취되고 안 되고가 아니라 희망을 잃지 않게 해 준다는 점이에요. 예를 들어 암에 걸렸을 때 ‘죽기 싫어. 열심히 기도하면 나을 거야’ 하며 기도하는 것도 하나의 희망입니다. 살고자 하는 의욕이 있어야 병을 치료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하잖아요. ‘나는 이제 끝났다’ 이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더 빨리 죽을 수 있습니다. 부도가 나거나 사업이 망했을 때도 ‘이제 끝났다’ 하며 자살해 버리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그럴 때 기도하면 다시 일어설 수도 있습니다. 결국 기도는 그 사람에게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므로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조상에게 제를 올리면 복을 준다고 믿는 것은 희망이라기보다 욕심이 아닐까요? 대학에 가려면 공부를 잘해야지, 기도만 해서 갈 수 있다면 뭐 하러 공부하겠어요? 장사를 할 때도 현실에서 해야 할 노력은 하지 않고 기도만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는데도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기도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장사를 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데도 잘 안될 때, 문을 닫을까 말까 할 때 기도하면 버틸 힘을 얻게 됩니다. 희망을 가지니까 버티는 효과가 있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일이 잘될 수도 있잖아요. 기도해서 일이 잘된 것이 아니고,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기 때문에 결과를 얻게 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희망을 잃지 않게 도와주는 역할은 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경전대학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해 보니 알겠지만, 임금이 되고, 부자가 되고, 죽어서 극락에 가는 것은 그래봐야 다 유한한 복입니다. 백 살까지 살아도 어차피 죽게 되고,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져도 결국은 사라집니다.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달으면 내일 죽어도 두려움이 없고, 거지가 되어도 겁날 게 없어요. 세상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두려움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복 아니겠어요. 금강경은 바로 그런 도리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것을 복 중의 복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늘 이 가르침을 수지독송하면 두려울 일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이 없으면 어떻게 할까?’, ‘병이 나면 어떻게 할까?’ 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병이 안 났으면 좋겠다’,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며 도와달라고 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전에서 가르치는 것은 다릅니다. ‘죽을 때 되면 죽고, 병날 때 되면 병이 나도 되고, 재산이 없어도 된다. 산속의 토끼도 사는데 내가 왜 못 살겠는가’ 하는 이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 이치를 깨치면 부자로 살아도 괜찮고, 가난하게 살아도 괜찮고, 부부가 같이 살아도 괜찮고, 혼자 살아도 괜찮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롭게 살아가는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지요. 이것이야말로 진짜 복 아니겠어요. 이런 복을 무루복(無漏福)이라고 하고, 돈을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과 같은 복은 유루복(有漏福)이라고 합니다. 유루복은 언젠가 새어 없어지는 복이지만, 무루복은 새어 없어지지 않는 복이에요. 수행은 바로 무루복을 짓는 길입니다. 여기서 수지독송이라는 것은 글을 읽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런 이치와 원리를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다 보니, 부탄이나 티베트에서는 경을 많이 읽으면 복이 온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경을 한 번 읽는 것도 쉽지 않잖아요. 하루에 일곱 번씩 읽어도 1년이면 겨우 2500독 밖에 안 됩니다. 그러다 보니 경전 내용을 통에 넣어서 한 번 돌리면 한 번 읽은 것으로 퉁 치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돌립니다. 그것도 힘드니까 부탄에서는 물레방아에 연결해서 계속 돌아가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수행이 점차 기복적인 형태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에요. 하나의 문화로 형성된 것입니다. 제가 부탄에 가보면 골짜기마다 그런 물레방아가 설치되어 있어요. 그런 것은 문화로서는 괜찮아요. 연등에 불을 켜는 것도 문화로서는 괜찮잖아요. 그러나 그것을 믿고 그것이 진짜 수행이라고 생각한다면 조금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늘의 별을 보고 ’저것은 내 별, 이것은 네 별‘이라고 하는 것도 문화와 정서로서는 괜찮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해 주는 것도 괜찮아요.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면 조금 어리석은 것이지요. 옛날에는 그럴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앞으로 더 공부 열심히 해서 현명하게 수행의 길 가겠습니다.”

“의지하고 있던 지팡이가 없어졌으니 허전한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부부가 같이 살다가 남편이 죽으면 허전하듯이, 부모한테 의지하다가 부모가 돌아가시면 허전하듯이, 빌기만 하면 된다고 믿다가 그것을 놓았으니 허전한 것이지요. 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법을 바로 알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의지하지 않고도 살아가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함께 살다가 한 사람이 먼저 떠나면 처음에는 혼자 못 살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혼자 사는 것도 괜찮아지듯이 말이에요. 또 하나는 너무 허전하면 재혼해서 살아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지팡이 하나가 없어지면 다른 지팡이를 짚으면 되는 것처럼, 공부하다가 마음이 허전한 날에는 절에 가서 복을 빌어도 됩니다. ‘빌지 말라’ 이런 건 없어요. 남을 해치는 일이 아니잖아요. 허전한 날에는 절에 가서 제도 지내고 빌기도 하면서 살아도 괜찮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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