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6.8.13. 동북아역사대장정 여섯째날_도문, 용정
“역사를 통해 현재를 알고, 미래를 준비합니다.”

스님과 기행단은 4시 30분부터 버스에 짐을 싣고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했습니다. 이제 새벽부터 일어나 이동하는 것도 기행단에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5시에 기행단을 태운 버스는 인근 연길 시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참가자들은 버스에서 내려 시장에 가서 아침 공양을 하였고, 스님은 차에 앉아 원고를 수정했습니다. 원고를 수정하고 있는데 한 조선족 아주머니께서 스님이 온 것을 알고 찾아왔습니다. 연길 시장에서 아들과 장사를 같이 하고 있는데 아들 때문에 속이 상하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스님의 법문을 듣게 되어서 이제는 잘 지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이 만들었다고 하며 음식을 가지고 와 스님에게 공양을 올렸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연길에서 출발한 기행단은 봉오동 전적지로 이동했습니다. 7시, 봉오동 전투터로 들어가는 봉오동 저수지에 도착했습니다.

도문시 종교국장으로 수월스님의 화엄사 옛터에 절을 지을 수 있도록 노력하신 김학길 님이 스님을 만나기 위해 나와 있었습니다. 스님이 김학길 님을 기행단에게 소개했습니다.

봉오동 전투터에는 공안이 막고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단체 사진을 찍으려고 했지만 사진도 찍을 수 없게 한 공안이 고함을 지르며 무례하게 굴어 사진도 찍지 못하고 버스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어 한반도 끝자락으로 가보기 위해, 최북단으로 이동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교통경찰이 기행단의 버스를 막아섰습니다.

“최북단에 가는 것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경찰은 큰 버스가 들어가면 회차가 어렵다는 이유로 진입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납득이 바로 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버스를 돌려 도문 시내로 가야만 했습니다.

8시 10분, 도문 시내의 두만강 광장에 도착했습니다.

광장 옆에는 두만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너머로 북한이 바로 보였습니다. 기행단은 두만강변을 산책하고 사진도 찍었습니다.

그 사이 스님은 원고 수정을 마치고 차에서 내려 두만강 광장으로 갔습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려던 스님은 우연히도 과거 JTS에서 북한의 온성군에 농업지원사업을 할 때 교육 책임자였던 황성일 님을 만났습니다. 황성일 님은 두만강 광장에서 작은 상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황성일 님이 스님을 반가워하며 말했습니다.

“스님을 2015년에 보고 이렇게 다시 만나네요.”

최근 근황을 나누고 스님은 황성일 님에게 스님의 책을 선물했습니다. 헤어지며 스님은 황성일 님에게 인사했습니다.

“조선의 농업 발전을 위해 계속 일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은 김학길 님에게도 최근에 나온 스님 책 「탁. 깨달음」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용정으로 가기 위해 도문에서 두만강변을 따라 이동하려고 했으나 교통경찰이 다시 길을 막았습니다. 차 사고가 나서 길이 막혀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별수 없이 다시 연길 시내로 돌아와 일송정으로 이동했습니다.

일송정은 용정 비암산에 있는 정자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역사와 함께 기억되는 장소입니다. 가곡 ‘선구자’의 배경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어,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떠올리며 찾는 곳입니다.

기행단은 미니버스를 타고 일송정에 올라갔습니다. 그곳에는 정자 하나와 작은 소나무가 있었습니다.

스님은 참가자들과 조별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거사님 한 분이 일송정이 배경인 ‘선구자’ 노래를 몇 소절 불렀습니다. 그러나 바로 공안의 제지가 있어 노래를 중단했습니다. 노래 한 곡도 자유로이 부를 수 없음이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각자 사진 촬영을 더 하고 다시 미니버스를 타고 주차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차에 돌아와 못다 한 ‘선구자’ 노래를 불렀습니다.

12시 20분, 기행단은 점심 식사를 위해 다시 용정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버스는 용문교를 지나 윤동주 시인이 다녔다던 대성중학교를 지났습니다. 전에는 내려서 사진도 찍고 했는데, 이제는 볼 수 없도록 교문을 막아두었다고 해서 차를 타고 지나가며 학교를 잠시나마 보았습니다.

12시 40분, 점심 식사를 위해 식당에 도착했습니다. 점심 메뉴는 냉면이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시원하고 푸짐한 냉면을 한 그릇씩 뚝딱 먹었습니다.

식당 주인이 스님을 마중하며 아주 반가워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윤동주 시인의 생가를 방문하기 위해 명동촌으로 갔습니다. 생가 한 채가 있어 스님과 참가자들은 한 바퀴 둘러보고 나왔습니다. 이어 청년 활동가 한 명이 윤동주 시인의 시를 낭송했습니다. 청년 활동가의 목소리를 통해 시인의 시를 들으니 청년 윤동주가 시를 적어 내려가던 그때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이어 윤동주 전시관이 있어 들어가 보았습니다. 전시관에는 윤동주 시인의 일대기가 적혀 있었고, 시인이 다녔던 학교에서 친구들과 찍었던 사진들, 친필로 남겨진 원고지의 시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전시관을 둘러보니 윤동주 시인의 앳된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27살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에 다들 안타까워했습니다.

기행단은 다시 버스에 올라 다음 일정인 대종교 3인의 묘를 향해 이동했습니다. 오후 3시 50분, 버스는 화룡 시내에 진입했습니다.

4시, 기행단은 대종교 3인의 묘에 가보려 했으나 공안과 교통경찰이 차를 막고 올라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공안은 작년 ‘스님의 하루’에 실린 참가자들 중 세 명이 대표로 절을 하고 있는 사진을 보여주며 문제를 삼았습니다.

기행단은 차를 돌려 청산리 전투터로 이동했습니다.

4시 50분, 청산리 전투터도 공안이 막고 있어 결국 차를 돌렸습니다. 항일운동은 중국과 한국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일인데도 이렇게 차단하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질 것 같아 염려가 되었습니다.

오늘 봉오동, 청산리 전투터에는 직접 가보지 못했지만 이렇게 도문과 용정 지역에 직접 와보니 나라의 독립만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전투를 치렀던 독립군들의 활동이 책에서 읽을 때 보다 더 마음 속에 와닿는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을 생각하니 숙연해지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5시 30분, 기행단은 오늘 묵을 화룡의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짐을 내리고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마지막 만찬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식사를 마쳐갈 때 쯤 스님은 지난 6일 동안 사고없이 안전하게 기행단을 태운 버스를 운전해준 기사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선물과 용돈을 전달했습니다.

저녁 식사 후 잠시 정비 시간을 가진 뒤, 7시 30분부터 스님의 마지막 강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까지 6일 동안의 역사 기행을 마쳤습니다. 역사 기행의 내용은 고구려 이틀, 발해 하루, 독립운동 하루, 이렇게 6일 중 4일이 역사에 배정되었습니다. 남은 이틀 중 하루는 압록강 주변을 돌아보며 북한의 현재 모습과 북한 주민의 삶의 고통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 동포 2500만이 그곳에서 어렵게 살고 있음을 잊지 말자’는 취지를 담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루는 백두산에 올라 천지도 보고 백두산의 자연 풍경을 즐기는 일정이었습니다.

의식 있는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고구려와 발해를 중심으로 이야기했지만, 꼭 고구려와 발해 역사만 공부하려고 온 것은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 우리 민족사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현재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든 관계없이 한국인으로서, 기본 상식을 가진 시민 가운데 조금 더 올바른 의식을 가진 사람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보통은 국민 중 10퍼센트, 즉 10명 가운데 1명만 깨어 있으면 그 사회가 비교적 건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0명 중 1명은 못되더라도 100명 중 1명만 있어도 망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100명 가운데 1명만이라도 보디사트바(Bodhisattva) 같은 마음을 갖고 있으면, 그 사회에 범죄와 사치, 부패가 조금 있다고 하더라도 나름 잘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회 안에 1퍼센트도 건강한 정신과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하고, 10명 가운데 1명 정도가 평균적인 도덕성을 갖추지 못하게 되면 그 사회는 쇠퇴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붕괴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스스로 의식 있는 시민이 되어주기 바랍니다. 기업을 경영하더라도 돈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질서를 지키며, 자신의 수익을 세상을 위해 쓰는 기업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또 정치를 하거나 행정에 참여하는 사람은 주어진 권한을 어려운 이를 돕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행사하면 세상에 더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역사의식이 필요합니다.

현재의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옛날에는 어땠을까?’ 하는 역사의식이 필요합니다. 나아가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하는 사회적 문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은 역사적,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의 인연 관계, 그리고 나와 너의 인연 관계를 올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연기법이라고 할 수 있고, 사회과학적으로 말하면 역사와 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역사 기행은 역사적인 인과관계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신시와 배달에서 시작된 우리 역사의 뿌리

그런 관점에서 이제 우리 역사의 뿌리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학자들이 연구하고 발견한 것을 종합해 보았을 때, 우리 민족은 대략 6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이라고 할 수 있는 신시 개벽에서부터 우리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천(開天), 즉 나라를 처음 세웠을 때의 설화에는 조금 덧붙여진 이야기나 누락된 사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용을 빼먹을 때도 있고, 듣는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내용을 덧붙일 때도 있죠. 그런데 수천 년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처음 그대로 전해진다는 것은 그 자체가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인 일이에요.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지난 시대의 글이나 문화를 해석할 때는 그 시대의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표현의 상징성을 고려하면서 읽고 연구해야 진실에 비교적 근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100퍼센트 진실이라거나 100퍼센트 가짜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합리적인 태도도 아니고 과학적인 태도도 아닙니다.

단군 설화에서 상징하는 바를 살펴보겠습니다. ‘환웅은 하느님의 서자이다’라고 했는데, 아들이면 아들이지 왜 ‘서자’라고 표현 했을까요? 맏아들도 아니고 막내아들도 아니고 서자라는 말은 그가 그 사회의 주류나 적통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똑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환웅이 하늘 아래 인간들이 사는 것을 내려다보니 사람들이 너무 힘들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인간 세계에 내려가 그들을 이롭게 하고 싶습니다’ 하고 뜻을 밝히자 아버지인 하느님이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환웅은 3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내려왔다’고 합니다. 6000년 전 고대에 3000명이라는 것은 매우 큰 규모입니다. 고주몽이 도망 나올 때도 오이, 마리, 협보 등 겨우 3명 데리고 나왔잖아요.(웃음) 그에 비해 환웅은 6000년 전에 벌써 3000명의 무리를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도망을 나온 것이 아니라 허락을 얻어서 온 것입니다. 그는 토착 세력과 결합하여 나라를 세웠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상징적인 언어라고 보입니다. 당시 동북아 문명보다 훨씬 앞선 어떤 문명의 집단을 이름하여 한나라 또는 환국이라고 불렀다는 것이지요. 이때의 ‘한’이라는 나라 이름은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한(韓)’입니다. ‘한’은 순우리말이에요. 그것을 한문으로 옮기다 보니 ‘한’으로 옮기기도 하고 ‘환’으로 옮기기도 한 것입니다. 한문이라는 남의 나라 글로 쓰다 보니 발음에 따라서 표기가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이 순우리말에서 무슨 뜻일까요? ‘크다’는 뜻이에요.

한편, ‘한’이라는 순우리말을 ‘환인’이라고 할 때의 ‘환’으로 읽으면 ‘환하다’, ‘밝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한’은 ‘크다’의 의미도 있고, 약간 표현을 바꾸면 ‘밝다’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나라의 문명에서 한 무리가 빠져 나와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환웅과 그의 무리가 이주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집단으로 이동했다’, ‘상대적으로 앞선 문명에서 새로운 미개척 지역으로 이동했다’라는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미개척지로 이주하면 대부분 현지인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게 인류 역사에 주로 나타나는 일이지요. 그런데 이 집단은 상대적으로 앞선 문명을 가지고 새로운 지역으로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문명을 전하고, 그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려고 갔다고 합니다. 물론 이 부분은 실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후대에 형성된 이상화된 서술일 가능성도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도 거의 부처님이나 보살의 수준에 가까운 이야기예요. 현실의 세속적인 이주 집단의 모습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의 건국이념은 충분히 종교로도 성립할 수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홍익인간(弘益人間)’이고, 두 번째가 ‘제세이화(濟世理化)’입니다. 기독교의 주기도문에도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내용이 있지요. 하늘의 이치와 이상을 이 세상에 실현하겠다는 생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홍익인간 제세이화’는 환웅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러 오면서 내세운 가치관이지 단군이 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여러분 중에는 ‘홍익인간 제세이화’가 단군신화에서 나왔다고 단국의 건국이념으로 왔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이는 시기적으로 단군 시대가 아니고 환웅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환웅이 새로운 지역으로 내려와 새로운 도시를 만들었다는 전승에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신시(神市)’입니다. 신시라는 명칭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신(神)의 도시’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고, ‘새로운 도시’라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신시(神市)라는 명칭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나라의 이름을 ‘배달’이라고 했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이 전승에 따르면 우리의 뿌리가 되는 더 앞선 나라가 있었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동북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만약 쫓겨나서 온 것이라면 이전 사회와 단절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합의를 통해 새로운 지역으로 왔다고 본다면 이전의 문명과 그 뿌리 역시 자신들의 역사로 인식할 수 있겠지요.

신화 속에 담긴 고대 문명의 흔적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이 역사관에서는 환웅이 신시로 이주해 와서 동북아시아 지역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연대는 약 5900년 전으로 잡습니다. 그런데 환웅이 내려올 때 비, 구름, 바람을 거느리고 왔다고 합니다. 비와 구름과 바람이 필요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한편으로는 천기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람들이 이미 농경사회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환웅이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내려왔다는 전승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미 상당한 규모의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정착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농사가 필요합니다.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 그리고 야생 동물을 사냥하는 것에서 가축을 기르는 방식으로 생활양식이 변화하게 됩니다. 또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천부인(天符印)입니다. 전승에서는 하늘의 자손임을 나타내는 세 가지 징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청동거울, 청동검, 청동방울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것이 청동으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그런데 6000년 전이라면 신석기 시대라고 알려졌잖아요. 신석기 시대에 청동기를 다루는 사람들이라면 그 지역에서는 최고로 앞선 문명이겠지요. 이들이 이주해 오면서 청동기를 제작하는 기술을 갖고 왔다고 봅니다.

이주민들이 선진 문명을 가져왔다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학문적으로 보면 ‘6000년 전 청동기 문명’이라는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지요. 하지만 고고학의 발달로 신석기 시대의 연대 자체가 계속 더 오래된 시기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신석기 시대를 약 5000년 전 정도로 생각했지만, 현재는 동북아시아에서도 훨씬 오래된 신석기 유적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소하서 지역에서 발견된 신석기 유물은 9000년 전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고고학이 발전하면서 인류 문명의 기원에 대한 연대도 점점 더 오래된 시기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동북아시아 지역만 하더라도 많은 청동기 유물이 막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약 4500년 전의 유물이라는 것을 이번에 우리가 요녕성 박물관에 가서 직접 보기도 했지요. 이 지역에서 4500년 전 청동기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면, 그 시원이 6000년 전이라는 것이 그렇게 불가능한 이야기만은 아닐 것입니다.

환웅의 천부인 징표를 보면 독특하게 발달한 문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들은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 즉 ‘천손(天孫)’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고대 신앙을 보면 별이나 태양, 달을 섬기는 종족도 있고, 호랑이·곰·사슴·뱀 같은 동물을 토템으로 삼는 종족도 있습니다. 고고학에서는 신화를 집단 간의 상호작용으로 풀어내면 복잡했던 고대사의 수수께끼들이 비로소 매끄럽게 해석됩니다.

환웅의 사람들은 곰이나 바위, 산 같은 자연물을 토템으로 삼는게 아니라 ‘하늘’을 믿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천손(天孫), 천자(天子)라고 칭하였습니다. 하늘을 믿는다는 것은 그냥 높은 곳을 믿는다는 뜻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태양을 믿는다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이들은 이주한 뒤 토착 종족과 협력하기도 하고 갈등하기도 했는데, 단군신화를 보면 그 양상이 잘 드러납니다. 단군이 즉위할 때 ‘웅족’과는 결혼을 통한 동맹 관계를 맺었고, ‘호랑이족’과는 적대적인 관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단군의 즉위 과정은 고대 사회에서 부계뿐만 아니라 모계 혈통 역시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

이처럼 수천 년에 걸친 장구한 역사가 후대에 요약되는 과정에서 3300년의 시기는 ‘환인‘, 1565년의 시기는 ‘환웅’, 2000년의 시기는 ‘단군’이라는 단일 인물로 기호화되었고, 그 결과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는 3대 직계 혈통의 구조로 재편된 것입니다. 이러한 축약 방식은 중국 고대 문명의 삼황오제(황제·전욱·제곡·요·순) 전승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됩니다. 1000년이 넘는 연대를 단 몇 명의 통치 기간으로 환산할 경우 개별 인물의 재위 기간이 수백 년에 이르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따라서 이는 특정 개인의 생애가 아니라, 성씨와 지배 가문의 교체를 수반한 장기간의 ‘왕조 및 시대적 단위’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단군이 즉위하면서 혈통적으로 다른 계통의 사람이 등장했죠. 그래서 나라 이름도 바꾼 것입니다. 그것이 ‘조선’이에요. 우리의 역사에서 조선이 두 번 나오기 때문에 편의상 앞의 조선을 ‘고조선’이라고 부릅니다. 원래부터 나라 이름이 고조선이었던 것은 아니에요. 옛날 조선이라는 뜻에서 후대에 고조선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여러분이 나라 이름을 고조선으로 착각하지 않도록 ‘단군조선’이라고 구분해서 부르는 것이 좋습니다. 단군조선은 약 2000년 가까이 지속되었습니다. 이름이 남아 있는 왕이 47명이나 있어요. 평균 재위 기간이 약 40년 정도이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단군조선이 들어서면서 단군이 한 일 가운데 하나는 신시를 새롭게 정비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상당 부분 질서가 허물어진 상황에서 법질서와 사회질서를 새롭게 정비했다는 것이 단군의 공로입니다. 그 이후 역대 단군들의 치적도 나옵니다. 환웅의 배달 시대를 기록한 역사서 《배달유기》를 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유실되었고, 고구려 시대에 다시 기록한 것도 유실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기록 가운데는 그 내용을 누군가에게 전해 듣고 남긴 것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조건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런 기록이나 전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하필 이 사람들이 나라를 세우거나 활동했을 것으로 보는 지역, 즉 그들의 이동 경로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바로 요하 문명이 발굴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릇이나 옥기 같은 유물이 출토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놀라웠는데, 지금은 신전과 제전, 무덤 등 다양한 유적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배달 시대, 즉 환웅 시대와 단군 시대에는 신석기와 청동기 문명이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매우 이른 시기에 발달하고 꽃피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배달 시대에 청동기가 사용되었겠지만, 현재 출토된 유물 가운데에는 옥기가 가장 유명합니다. 발견된 무덤의 연대도 고조선 시기보다 앞선 배달 시대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탄소연대 측정 결과가 그렇게 보여줍니다. 따라서 우리가 ‘홍산 문화’ 또는 ‘요하 문명’이라고 부르는 시대는 고조선 시대가 아니라 배달 시대와 비슷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고조선 문명’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연대상으로 훨씬 앞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보면 배달, 조선에 이르기까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까지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앞선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사의 뿌리를 이렇게 찾아볼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철기 문명의 등장과 동북아 역사의 전환

그런데 문제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부터 인류문화사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에 본격적으로 철기가 등장합니다. 철기가 최초로 등장한 것은 4000여 년 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늘날의 튀르키예와 시리아 일대입니다. 히타이트 민족이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현재 발견된 유물과 유적으로 보면 이 지역은 인류 최초의 문명이 발생한 곳입니다.

철기 문명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황하문명은은 청동기 사용이 우리보다 늦었지만, 철기를 일상생활과 농업에 사용하면서 우리보다 앞서게 되었습니다. 청동기와 석기는 초원 지역에서는 유용하지만 산림지대를 개척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청동기는 주로 제기나 무기로 사용되었고, 농기구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돌도끼 역시 나무를 자르는 데는 한계가 있었죠. 그런데 철기는 무기로 사용해도 강력했고, 농기구로도 활용도가 높았습니다. 그 결과 곡물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대되었습니다. 그동안 개척되지 않았던 양쯔강 이남 지역이 개발되면서 새로운 나라들이 형성되었습니다. 중원 지역의 생산량이 늘어나고 군사력도 강해졌습니다. 인구도 증가했습니다.

반면 동북아시아 지역은 건조한 초원 지대였고, 무기와 농기구 기술이 뒤처지면서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배달 신시부터 시작된 역사를 6000년으로 본다면, 앞의 3000년 동안은 앞선 문명이었지만 뒤의 3000년부터는 점차 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철기 문명이 도래하는 시기에 우리는 철기 문명을 활용하는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던 거예요. 그리고 약 2200년 전 철기 문명을 기반으로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가 등장하고, 진나라가 망한 뒤 다시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됩니다. 한나라가 동북 지역을 침략하고 고조선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면서 우리는 처음으로 중국과의 경쟁에서 밀린 것입니다.

이 시기부터 동북아 문명은 중국 문명과 갈등 관계가 됩니다. 문명이 앞설 때는 갈등이 있더라도 관리의 문제이지 투쟁의 문제는 아니잖아요. 하지만 문명이 뒤처지기 시작한 상태에서는 투쟁이 됩니다. 우리가 밀리면서 싸우니까요. 그런데 과거에 우리가 앞선 경험이 있으니 쉽게 굴복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갈등이 계속된 것입니다.

투쟁에서 쇠퇴로, 다시 민중의 각성으로

고조선의 멸망 후 부여와 고구려 시대, 고려 시대까지를 이런 의미에서 우리 민족의 투쟁기로 볼 수 있습니다. 약 1000년 동안 밀리면서도 계속 투쟁하고, 회복하고, 다시 또 밀리는 과정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다 고려 중기부터는 밀리는 정도가 아니고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해 버렸습니다. 원나라한테 항복하고, 명나라에는 자발적으로 굴복했으며, 청나라에게 패해서 항복했습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신하의 예만 갖추면 나라 이름은 지킬 수 있었지요. 하지만 일본에 의해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고 일본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갑자기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원나라 때부터 조금씩 밀려 내려오다가 일제의 침략에 이르러 더 이상 투쟁기가 아니라 완전한 쇠퇴기가 된 것입니다. 완전히 굴복당한 것이죠. 이전에는 저항의식과 함께 힘을 가지고 투쟁했지만, 이 시기에는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밀리는 가운데 조선 말엽부터 새로운 자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실학의 등장입니다. 그러나 쇠퇴하는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후 근대 학문이 들어오면서 신학문에 의한 계몽 시기를 거치게 됩니다. 그리고 동학사상이 일어났습니다. 기존의 지배 계급으로는 더 이상 역사를 이끌어 갈 수 없으며, 민중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사상이 등장한 것입니다. 민중이 일어나 동학혁명을 일으키자 지배 계급은 외세를 끌어들여 이를 제압했고, 그 외세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게 됩니다.

민중들이 지배 계급을 타도할 때는 늘 ‘이것이 반역이 아닌가’, ‘내가 역적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의 걸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배 계급이 외세에 나라를 빼앗기고 나니, 이제민중들이 외세와 싸워 나라를 되찾는 데는 그런 마음의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결국 민중의 힘으로 나라를 되찾으면서 ‘민국’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축적된 역사적 경험을 오늘 우리의 삶과 공동체에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입니다.

오늘날 한국이 갑자기 뛰어난 나라가 된 것은 아니에요. 어느 날 갑자기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난다고 해서 한 나라가 단숨에 발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과거의 역사는 우리의 정신 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마치 유전자에 조상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처럼 말이죠.

나이를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가 자기 자신이고, 둘째가 공동체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서로 협력하고 힘을 모아야 합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같은 민족이었던 신라와 고구려도 서로 다른 기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고, 신라는 작은 나라에서 출발해 점차 세력을 넓혀 갔습니다. 좋게 말하면 신라는 현실에 만족할 줄 아는 태도를 가졌다고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미래를 향한 비전이 부족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은 부족한데 꿈만 지나치게 큰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가 중요하겠죠.

역사의식을 오늘의 미래 비전으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지도자들에게도 역사의식과 미래에 대한 비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눠보면 대부분의 대화가 이해관계에 관한 부탁인 경우가 많습니다. 국가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 국민이 겪는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이상적으로 보이더라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요.

여러분이 이번 여행을 통해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심으로 민족의 뿌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둘러본 독립운동사는 1922년 이전의 초기 독립운동사에 한정된 것이라는 점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 당시 세계 최강국 가운데 하나였던 일본의 정규군을 상대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우리는 그 뛰어난 역량을 기억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 승리의 대가로 얼마나 참혹한 희생이 따랐는지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이번 여행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졌더라도 여러분의 인생에 의미 있는 경험으로 남았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법문을 마친 후 스님은 지난 6일 동안 기행단을 안내해주느라 애써준 조신, 전신님에게 선물을 증정했습니다. 대중들의 큰 박수와 환호가 있었습니다.

이어 조신 님의 소감 나누기가 있었습니다.

“이 단체를 맡아 활동한 지 올해로 10년째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기간으로 실제 활동 기간은 그보다 짧지만, 역사기행을 안내하며 늘 ‘이것이 나의 책임이고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마음으로 임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직장생활로 날개를 펼치려고 했으나 러시아까지 오가는 역사기행 안내일에 한 번에 3주 정도의 시간을 내야해 직장생활과 병행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고민 끝에 박사과정에 진학했고, 마침 코로나로 정토회 역사기행이 중단되면서 공부에 집중해 만 4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한국에서 강사로 일하며 방학을 활용해 계속 역사기행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앞으로도 스님께서 기회를 주신다면 이 역사기행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스님이 말했습니다.

“제가 죽고 난 다음은 모르겠지만 살아 있을 때까지는 안심입니다. 감사합니다.”

강의 일정을 마친 스님은 방으로 돌아가 잠시 업무를 보았습니다. 참가자들은 소감문을 작성한 뒤 서로 나누기를 진행했습니다.

참가자들의 나누기가 마쳐질 때쯤 스님은 국제지부와 해외지부에서 온 14명의 참가자를 잠시 만났습니다.

“스님이 해외 일정으로 멀리까지 가면 여러분들이 밥도 먹여주고 온갖 지원을 했는데 차도 한잔 대접 못해서 미안해요. 인도 성지순례 때는 그래도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차 한잔이라도 대접할 수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네요. 그래도 얼굴이라도 보려고 이렇게 불렀습니다.”

이어 지회장들과의 미팅도 진행했습니다. 15명의 지회장이 참석했습니다.

“차라도 한잔 대접을 못해서 미안해요. 그래도 얼굴이라도 보자 싶어서 잠시 보자고 한 거예요. 차 대접을 못할 상황이면 물이라도 주려니까 컵도 없다고 하네요. (웃음)”

우여곡절 끝에 동북아역사대당정이 모두 마무리 되었습니다. 스님도 내일 한국으로의 출국을 위해 짐을 정리하고 휴식을 취했습니다.

내일은 아침부터 버스를 타고 심양공양으로 이동하여 한국으로 출국할 예정입니다.


2026 9월 정토불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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