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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동북아역사기행 다섯째 날입니다. 오늘은 상경용천부를 중심으로 하는 발해의 유적을 답사하고, 용성 스님의 독립운동 활동 근거지였던 봉녕촌과 명월촌을 방문한 뒤 연길로 이동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한 후 원고를 교정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기행단은 새벽 4시 30분부터 버스에 짐을 싣고, 5시에는 숙소 근처에 있는 돈화시장으로 이동하여 아침 식사를 하고 점심 도시락을 준비했습니다.

이제는 시장에 있는 중국인 상인들과 손짓 발짓으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져서 중국 음식 구입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스님은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원고 교정을 보느라 버스에서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참가자 전원 버스 탑승을 확인한 후 오늘 일정을 향해 상경용천부로 출발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다 보니 상경용천부 인근에 있는 경박호가 나왔습니다.

경박호는 길이가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자연 호수입니다. 약 1만 년 전 화산 활동으로 용암이 흘러 강을 막으면서 호수가 형성되었는데, 경박호 바로 인근에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가 있다고 스님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오전 8시 30분, 오늘의 첫 답사 장소인 발해 박물관에 도착했습니다. 상경용천부 성을 보기에 앞서 이승용 님이 궁성의 구조와 오봉루, 발해 기와와 불교 유물 등에 대해 미리 설명해 주었습니다.

발해 박물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한 후, 발해 시대의 절인 흥륭사로 이동했습니다.

사천왕문을 지나 흥륭사 안으로 들어가니, 법당 앞에 거대한 석등이 있었습니다. 발해 시대에 현무암을 깎아서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석등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석등을 지나 발해 시대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 흥륭사 법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스님은 기행단과 함께 대불 앞에서 정성스레 참배를 드렸습니다.


참배를 마친 후 스님은 기행단을 위해 축원 기도를 했습니다.

“불법승 삼보님께 귀의하옵니다. 한국에서 온 150명 역사기행 대중 일동은 발해 시대의 사찰인 흥륭사 대불 앞에 천 년 만에 찾아와 참배를 드립니다. 늦게 찾아옴을 참회드리며 다시 찾아와 참배드릴 수 있게 됨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부처님께 참배드린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회향하오니, 고통받는 모든 중생들의 그 고통이 벗어지고, 이 자리에 참여한 모든 대중이 건강하게 역사기행을 끝낼 수 있도록 천룡팔부 신중님들은 옹호하여 주옵소서.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이어 반야심경을 봉독하고 법당에서 나와 석등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으려 했으나 사찰 담당자가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하여 아쉬운 마음으로 나와야 했습니다.
“스님이 절에 있는데 사진을 못 찍게 하다니...”
스님은 개인별로 절을 더 둘러보고 오도록 안내하고 절을 나왔습니다. 흥륭사에서 나온 기행단이 모두 버스에 탑승하자 이번에는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 궁성 터’를 향해 이동했습니다.
상경용천부는 발해 3대 문왕 때인 755년부터 785년까지 30년간, 발해 5대 성왕 대화여 시기부터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인 132년간, 모두 162년 동안 발해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습니다.
발해 상경용천부의 궁성 터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궁성의 정문이 방어용 옹성이나 복잡한 꺾임 구조 없이 탁 트인 사각형 주춧돌 위에 웅장한 누각 오봉루만 올려놓은 일자형 형태였습니다.

“보통의 성은 가운데 문이 있어야 하잖아요. 이 성문의 특징은 정면에 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양옆으로 문이 두 개 있습니다.

문루의 크기가 우리 대웅전 크기보다 훨씬 더 크지요?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문 위에 이렇게 큰 2층 누각을 지었던 겁니다.”

“우리가 본 것은 성루고요, 오른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제1궁전입니다. 가운데를 중심으로 제1궁전, 제2궁전, 제3궁전, 제4궁전, 제5궁전이 일렬로 쫙 배치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오른편으로는 동궁, 왼편으로는 서궁이 있었습니다. 서궁은 주로 왕후와 가족들이 사는 곳이고, 동궁은 태자와 그 가족들이 살았습니다. 동궁 옆에는 유원지나 놀이터 같은 어화원이 있던 곳입니다.”

상경용천부의 외성부터 마지막 5궁전이 있는 구간까지 함께 걸어보며 옛 발해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발해의 문화적 특징을 보면 고구려 양식을 많이 계승했습니다. 무덤실에 벽화를 그린 것은 고구려와 같은데, 고구려가 돌로 무덤실을 만들었다면 발해는 벽돌로 만들고 회를 칠한 차이가 있습니다. 또 불교를 받아들여 무덤 위에 무덤탑을 쌓았지요.

이 앞쪽에 보이는 것이 궁성의 북문입니다. 문을 단 문틀 자리가 남아 있지요? 외성의 북쪽 성벽이 오다가 궁성 북쪽 성벽 위치에서 약간 뒤로 물러나 연결되는 구조로 되어 있고, 이곳이 내성과 궁성의 북쪽 문입니다.”

“이 궁성 성벽의 모형을 보면 외성, 내성, 궁성의 3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제일 앞에 오봉루라는 성문 누각이 있고, 치성이나 모서리 방어 시설이 없는 걸 보면 그만큼 적의 침공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웠거나 세력이 강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상경용천부의 외성 성곽 한 변 길이가 4km가 넘으니 한 바퀴 돌면 16km나 됩니다. 당나라 장안성 다음으로 동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어마어마한 규모였고, 이를 보면 발해는 강대한 제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스님과 기행단은 궁성의 정문인 오봉루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상경용천부를 다 둘러본 후에 스님과 기행단은 주차장에서 아침에 시장에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떠나며 스님이 말했습니다.
“이로써 발해를 다 봤습니다.(웃음)”
차 안에서 다 같이 ‘황성옛터’, ‘발해를 꿈꾸며’ 등을 노래하며 어제부터 공부했던 발해 역사와 답사 터를 다시금 떠올려 보았습니다.
다음은 흩어진 독립군과 가족들을 돕기 위해 용성 스님이 비밀리에 운영했던 농장, 봉녕촌을 향해 이동했습니다. 스님은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조선인의 간도 개척사부터 용성 스님의 독립군 지원 농장인 봉녕촌과 명월촌의 선농지, 그리고 명월촌을 중심으로 펼쳐진 항일 독립투쟁 역사에 대한 내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땅을 개척하고 마을을 이루게 된 데에는 청나라의 독특한 정책이 배경에 있습니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백두산 일대를 자기 민족의 성지로 여겨 광범위한 지역을 ‘봉금지역’(封禁地域)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출입을 금지하면서 백두산 일대는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습니다.
청나라 말기가 되어 통제력이 약해지자 생활이 어려웠던 조선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조금씩 땅을 개척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논을 만들고 벼농사를 지으면서 새로운 농경문화를 일구었습니다. 정착하는 조선 사람들이 늘어나자 이 문제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청나라는 조선 사람들을 내보내려고 했지만, 조선에서는 이미 많은 백성이 정착해 농사를 짓고 있다며 이 지역을 ‘간도’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두만강 건너 지역은 ‘북간도’, 압록강 건너 지역은 ‘서간도’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청나라의 봉금정책과 조선 사람들의 이주와 개척, 그리고 국경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 맞물리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국경과 영토를 둘러싼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이를 ‘간도 문제’라고 합니다.

간도 지역에 조선 사람들이 하나둘 정착하면서 점점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조선에서 먹고살기가 어려워 두만강을 건너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뒤부터는 이주의 성격이 달라졌습니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뜻을 품은 의식 있는 사람들이 재산을 팔아서 이곳으로 넘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일본의 탄압 때문에 독립운동을 하기 어려우니 국경을 넘어 이곳 간도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들은 조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에 학교를 세웠습니다. 특히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쳐 민족의식을 높이고 나라를 되찾을 인재를 길러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간도 지역은 점점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어 갔습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은 크게 세 지역이었습니다. 연해주와 북간도, 그리고 압록강 건너 서간도였습니다. 이 세 지역은 국외 독립운동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평화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지만 일본은 총, 칼로 조선인을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그러자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비폭력 운동만으로는 어렵다는 인식이 커졌습니다.
‘이제는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확산되면서 국외의 독립운동 근거지를 중심으로 독립군의 무장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1920년 6월에는 봉오동 전투에서, 10월에는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독립군의 활동이 거세지자 일제도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습니다. 이른바 일본 교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훈춘사건을 내세워 만주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고, 독립군을 찾아내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수천 명의 조선인을 학살하고 집을 불태우는 경신대참사를 일으켰습니다. 더 이상 만주 지역에서 안전하게 활동하기 어려워지자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 부대 등을 비롯해 여러 독립군 부대가 러시아로 이동했습니다. 작은 부대는 수십 명, 큰 부대는 수백 명에 이르렀고, 모두 합치면 독립군의 수가 수천 명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많은 독립군을 누가 지휘할 것인가?’
독립군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결국 러시아의 공산주의 세력이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무장 해제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자유시 참변’입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거치며 크게 성장했던 독립군의 무장투쟁은 자유시 참변을 겪으면서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독립군이 목숨을 잃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어렵게 모였던 독립군 부대들도 모두 해산되었습니다.

1921년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을 당시 용성 스님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소식을 뒤늦게 접하게 되었습니다. 출소한 뒤에는 자유시 참변으로 흩어진 독립군과 어려움에 처한 그 가족들을 도울 방법을 찾았습니다.
1922년 용성 스님은 3만 원을 마련해 북간도로 왔습니다. 용성 스님은 이 가운데 2만 원가량을 들여 봉녕촌과 명월촌에 각각 700정보의 땅을 구입했습니다. 용성 스님은 이 땅을 개간해 자유시 참변으로 흩어진 독립군과 부상당한 사람들, 그 가족들이 정착해 살아갈 수 있도록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는 없었고, ‘불교 이상촌을 건설한다’는 명분으로 ‘봉녕촌과 명월촌’ 두 곳에 선농지를 만들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수행하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공동체였습니다.

이러한 용성 스님의 활동은 문학작품에도 흔적을 남겼습니다. 소설 ‘북간도’를 쓴 안수길의 미완성 작품에는 ‘해룡 스님’이라는 인물이 등장해 만주에서 불교적인 이상 공동체를 건설하고 농장을 운영합니다. 해룡 스님이 용성 스님을 모델로 만들어진 인물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1923년에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이 건설되고, 1930년에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명월혼 회의’ 등이 열렸던 것을 보면 이 지역에 설치한 농장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1938년에는 이 지역의 항일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간도특설대’가 조직되었습니다. 특히 간도특설대가 설치된 곳이 바로 명월촌의 중심 지역이었습니다. 독립군과 그 가족들이 터전을 잡고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했던 곳에, 훗날 그들을 탄압하는 부대가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1938년 간도특설대가 조직되면서 조선인 청년들이 조선 독립군을 탄압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백선엽 장군도 젊은 시절 간도특설대와 관련된 이력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가 둘러보려고 하는 곳에는 우리 근현대사의 여러 모습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뒤 평범한 민중들은 아들을 독립군으로 보내고 식량을 내어주면서 독립운동을 도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학살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기거나 집이 불태워지는 고통도 겪었습니다. 젊은 독립투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고, 용성 스님과 같은 분들은 독립군과 그 가족들이 살아갈 근거지를 마련하도록 후원했습니다. 반면 일제에 협력하거나 독립군을 탄압하는 데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의 후손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는 곳이 오늘의 대한민국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역사를 어느 한쪽에 유리하게만 해석해서는 갈등을 끝내기 어렵습니다. 과(過)는 과대로 인정하고 공(功)은 공대로 인정하는 사실에 기초한 역사적 평가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과거의 갈등에만 매이지 않고 우리 국민이 함께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간도 개척부터 독립운동사, 간도특설대 이야기까지 스님의 설명에 스며들어 듣다 보니 버스는 어느덧 봉녕촌을 지나 ‘간도특설부대 옛터’라고 적힌 비석, 명월촌의 옛이름인 ‘옹성납자’라고 불리는 바위 앞을 지나 연길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연길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연길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박물관’이 있습니다. 이곳에 가면 연변 지역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연변은 고구려 시대에는 변방 지역이었지만 발해 시대에는 중심지였습니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요나라와 금나라를 거쳐 청나라의 영역이 되었고 이후 조선 사람들이 이주해 황무지를 개척하면서 연변에서 조선족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전시해 놓은 곳이 연변조선족자치주 박물관입니다.

내일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유적지를 둘러봅니다. 먼저 봉오동 전투가 벌어진 봉오골 앞까지 가보고, 조선족 비율이 높은 도문으로 이동합니다. 도문에서는 조선에서 넘어온 난민들을 돌보며 살았던 수월 스님의 이야기도 살펴보겠습니다.
이어서 용정으로 가서 ‘선구자’ 노래에 나오는 일송정과 용두레 우물, 용정교, 윤동주 생가 등을 둘러보고, 이후 화룡으로 이동해 발해의 두 번째 수도였던 중경현덕부 유적을 지나고, 대종교 3인묘와 청산리 전투터를 찾아가겠습니다.
이렇게 내일까지 둘러보면 이번 역사기행도 마무리됩니다. 오늘 우리가 지나온 길과 내일 둘러볼 유적들을 통해 독립운동의 역사는 몇몇 영웅들만의 역사가 아니라, 이름 없이 희생하고 지원했던 수많은 민중이 함께 만든 역사라는 것을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기행단은 연길에 도착해서 연길박물관을 둘러본 후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스님이 숙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저녁 식사 자리에 대해 잠시 안내를 했습니다.
“오늘 저녁 식사에는 지난 30년 동안 역사기행과 북한 동포 돕기에 함께해 온 이곳 어르신 몇 분을 초대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우리가 북한 난민을 돕고 인터뷰할 수 있었던 것도 이곳 조선족 어르신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때 함께했던 분들은 이제 아흔을 넘기고, 어떤 분은 먼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다섯 분 정도 오신다고 합니다.
북한 난민을 돕는 과정에서 함께 고초를 겪었던 분들, 난민들을 치료해 준 의사,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위험을 막아 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역사기행은 많은 사람의 마음이 모여 만들어졌습니다. 학문적인 조사와 설명은 방학봉 교수님이 맡고, 여행 실무는 조춘호 선생님이 맡고, 저는 전체 조직과 강의를 담당했습니다. 이렇게 역할을 나누어서 지난 30년 동안 역사기행을 해왔는데 방학봉 교수님은 돌아가셨고 조춘호 선생님은 뇌경색으로 쓰러지셨어요.
역사기행 초창기에는 지금처럼 도로가 좋지 않았습니다. 차에 삽을 싣고 다니면서 길이 막히면 직접 길을 고쳐가며 이동하기도 했습니다. 그 험한 길을 오랫동안 운전해 준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도 코로나 기간에 돌아가셨네요. 그 외에도 학교 교수와 정부 관리, 여행사 관계자 등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힘을 보탰습니다.
모두 정토회원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함께하다 보니 모두 정토 식구처럼 되었어요. 이런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역사기행도, 북한 동포를 돕는 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역사기행을 돕고 있는 조신 님은 조춘호 선생님 따님입니다. 이제 역사기행 역할도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저도 이제 따라와서 저녁에 강의만 해주면 될 것 같아요. 그것도 앞으로는 못 할 수도 있고요."
스님이 웃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저는 평생 산에 가든 어디를 가든 남의 뒤를 따라가 본 적이 별로 없었어요. 늘 앞장서서 가다가 돌아보면 사람들이 안 보이곤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꽁무니에 딱 달라붙어서 따라다녀 보니까 그것도 재미있네요.(웃음)”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이어져 온 역사기행입니다. 그 당시 그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역사기행도 없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떠올려 보니 지난 30년의 시간이 꿈처럼 아련하게 느껴졌습니다.
스님과 역사기행단은 오후 5시경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각자 정비를 하고 6시부터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오늘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귀한 손님들이 벌써 도착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님은 손님들을 마중 나갔습니다.

“안 죽고 사니까 이렇게 만나네요.(웃음) 어서들 오세요.”
스님이 나타나자 손님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많은 인사말을 건네지 않더라도 서로 맞잡은 손을 누가 먼저 떼지를 못했습니다. 그저 고맙고 그리웠던 마음만 오갈 뿐이었습니다.

훈춘에서 온 오금숙 님이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사진사님, 스님과 찍은 사진을 꼭 보내주세요. 내가 이제 나이가 드니까 스님이 보고 싶고... 스님 사진을 보면서 힘을 얻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스님은 손님들을 안내하여 식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스님과 손님들이 식당으로 들어오자 식당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역사기행단이 박수로 맞이했습니다.
식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스님은 참석한 연변 지역 어르신들을 한 사람씩 대중에게 소개했습니다. 조선족 사기 피해자를 돕고, 북한 난민 지원 활동에 도움을 주셨던 아리랑 상근협회 이영숙 님을 비롯해 과거 북한 난민을 돕고, 역사기행을 함께 준비했던 사람들의 역할과 인연도 설명했습니다.
올해 아흔한 살인 이영숙 회장님이 참가자들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여러분이 오신 데 대해서 축하를 드립니다! 반갑습니다~~~ 하하하하.”
아흔한 살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또렷한 발음과 목소리, 쾌활한 웃음소리에 온 대중이 크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여러분들을 보니까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더욱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법륜 스님의 지도 아래 10년 동안 배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연변의 조선족 단체가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을 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법륜 스님과 여러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하하하하하.”

이어 방학봉 교수님의 부인인 여든아홉 살의 전금순 님도 마이크를 들고 참가자들의 건강을 기원했습니다. 스님이 너무 짧다며 웃자 이영용 선생님이 마이크를 이어받았습니다.
“우리는 다 한 핏줄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법륜 스님이 해마다 역사기행단을 이끌고 다니시는데, 법륜 스님도 그렇고 여기까지 따라오신 여러분도 진짜 애국자입니다.(박수) 저는 자기 민족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무례한 사람이고, 수치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터전, 말 달리던 그 대지를 후손들에게 전해 주어야 우리가 다시 하나로 뭉칠 수 있고, 자기가 설 자리를 굳건히 할 수 있으며... 자기 삶의 뜻도 빛낼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영용 선생님은 감격한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모두 건강하십시오. 모두 모두 건강하십시오.” (박수)
스님은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웃으며 말했습니다.

“감격해서 말씀을 못 하시네요. 음식이 식기 전에 우선 밥부터 먹겠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스님은 지난 30여 년 동안 북한 동포 돕기와 역사기행을 함께해 온 어르신들에게 작은 선물을 전했습니다. 한 분 한 분에게 선물을 건네자 어르신들은 연신 고맙다며 인사했습니다. 스님은 그동안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애써 온 어르신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동안 민족과 겨레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이 애써 주셨습니다. 그 공로를 저희가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 그 뜻은 저희가 이어 나갈 테니까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편안하게 사십시오.”
참가자들도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역사기행을 함께 만들어 온 조춘호 선생님의 가족도 만났습니다. 조춘호 선생님은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몸이 불편해졌고, 이날은 감기까지 들어 직접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부인과 가족들이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오랫동안 함께했던 사람들은 이제 나이가 들고 세월의 흔적도 깊어졌습니다. 스님도 건강 이야기를 나누다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옛날에는 산에 가면 제가 제일 앞에서 올라갔어요. 뒤에 사람들이 못 따라왔는데, 이제는 지팡이 두 개 짚고 맨 뒤에서 올라갑니다. 세월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30년 넘게 이어진 인연을 뒤로하고 스님은 어르신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조춘호 선생님 댁이 숙소와 멀지 않다는 것을 알고 조 선생님의 얼굴을 직접 보기 위해 잠시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조 선생님 집에 가니 조 선생님이 앉아 있었습니다. 스님은 움직이지 못하고 말을 잘할 수 없는 조 선생님 옆에 앉아서 손을 꼭 잡고 안부를 물었습니다.

“제가 선생님도 못 보고 그냥 가기가 섭섭했습니다. 우리가 안 지가 30년이나 되었는데...”

스님은 조 선생님의 딸인 조신 씨가 여행 가이드 역할을 잘해 주고 있다고 알리면서, 이번 역사기행이 어땠는지도 이야기했습니다. 스님이 이제 나이도 많고 심장도 안 좋아 홀본산성과 영광탑에 올라갈 때 예전과 달리 맨 뒤에서 천천히 올라간다는 소식도 전했습니다. 조 선생님은 말을 잘하지 못했지만 고개를 흔들고 눈을 크게 뜨는 등의 반응을 하며 스님의 이야기를 경청했습니다.
“조 선생하고 방학봉 교수, 우리 셋이 역사기행 만들었잖아요. 조 선생은 역사기행 코스 담당하고, 나는 사람 모집, 강의와 안내는 방학봉 교수, 이렇게 셋이 했잖아요. 이젠 앞으로 조 선생의 여행 역할을 딸인 조신 님이 하고, 나 대신 이승용 님이 강의를 대신하면 되겠어요.(웃음) 세월은 이기는 장사가 없네요.”
저녁 강의 시간이 훌쩍 넘어서 스님은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습니다. 스님은 조 선생님에게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조 선생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년에 또 오겠습니다. 건강해야 해요.”
조 선생님도 얼굴을 흔들며 스님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스님은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제가 중국에 92년에 처음 왔었는데 그때는 30대 후반이었어요. 세월이 벌써 이렇게 흘렀네요.”
호텔에 복귀하니 이승용 님이 대중들에게 독립운동사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마이크를 넘겨받아 강의를 마무리하고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 청년이 상고사와 환단고기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상고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환단고기’가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책에 대한 견해가 갈리는 것 같습니다. ‘위서’라고 비난하는 학자들이 많다고 하지만 저는 ‘환단고기’ 속 고대 이야기들은 우리가 돌아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고대사를 복원하는 데 ‘환단고기’가 어느 정도의 의미가 있는 자료인지, 어디까지 그 이야기를 믿을 수 있는지 스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할 때 등장하는 유화부인의 이야기도 단지 설화라고만 해야 할까요? 물론 그 내용을 지금의 우리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알에서 태어났는지, 해모수의 아들인지 아닌지 말이죠. 그러나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유화부인이 해모수와의 사이에서 고주몽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야 고구려 왕실의 정통성이 강해지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러한 기록을 위서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불교 경전에도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런데 그것을 보고 ‘위경(僞經)’이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자세히 따져보면 그 이야기들은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인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옛날부터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문화적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로마 신화도 오늘날에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해석하여, 그것을 토대로 유적을 발견하기도 하지요.
‘환단고기’ 같은 고대 역사 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라 시대의 누군가가 배달 시대 이야기를 축약해서 기록했을 수 있고, 고려 시대의 누군가도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기록했을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누군가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 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환단고기에는 환인 시대와 단군 시대뿐 아니라 부여와 삼한에 관한 기록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화라고 해서 무조건 위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고대 역사가 설화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히 설화라고 여기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역사적 사실이 설화로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를 연구하고 검증해야 합니다.

‘환단고기’에 대해서도 바로 이러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믿을 수 없다. 가짜다’ 또는 ‘모두 사실이다’라는 양극단의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명백한 역사 기록과 비교하고 검토하면서, 누군가 과장해서 만들었다고 판단되거나 내용이 맞지 않는다면 ‘이 부분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다’ 하고 결론 내리면 됩니다.
반대로 다른 곳에는 아무 기록이 없는데 이 책에만 옛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면, ‘100퍼센트 맞다’ 또는 ‘100퍼센트 틀렸다’고 단정할 것이 아니라 ‘이 빈자리에 새로운 기록이 발견됐으니 진위를 검토해 보자’ 하고 연구 대상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이런 접근이 역사 연구에서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그래서 ‘환단고기’ 같은 책이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도 동굴이나 땅속에서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거나, 이제까지 없던 기록이 나오면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환단고기’는 무조건 무시해야 합니까? 다만, 그 내용이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연구해 나가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내일은 독립운동사를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강의를 마친 후 스님은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습니다.
내일은 동북아역사기행 여섯째 날로 봉오동 전투터, 두만강변, 청산리 전투터 등을 방문하며 독립운동사를 집중적으로 답사할 예정입니다.
동북아역사기행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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