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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동북아역사기행 넷째날입니다. 오늘은 백두산을 다녀온 후 돈화로 이동하여 발해유적지를 찾아가는 일정입니다.
스님은 새벽수행과 명상하고 원고를 교정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참가자들은 백두산 천지로 이동하기 전에 스탭들이 준비한 간단한 도시락으로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다행히 날씨가 꽤나 맑았습니다. 모두들 백두산 천지를 볼 수 있겠다고 한껏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아침 도시락을 먹은 후 모두 버스에 탑승하여 백두산 입구로 이동했습니다.

오전 7시 40분에 백두산 환승 센터에 도착하였습니다. 기행단은 스탭들이 미리 구매해둔 입장권 덕분에 대기 시간 없이 바로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백두산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백두산 천지까지 가려면 차를 두 번 갈아타야 하는데 백두산 방문객이 워낙 많다보니 사람을 나르는 버스와 승합차도 끊임없이 보였습니다.

승합차를 타고 해발 1600미터 부터 2600미터 까지 이동 했습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맑았던 하늘이 조금씩 흐려졌습니다. 스님이 말했습니다.

“날은 맑은데 천지는 안 보이겠네요”
차에서 내려 천지가 보이는 봉우리까지 걸어올라갔습니다.

백두산 기슭에 피어있는 야생화도 보였습니다.

백두산 봉우리는 많은 인파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스님과 기행단도 천지를 보기위해 능선으로 올라갔습니다. 능선 근처에 다가간 순간, 일행들이 소리쳤습니다.

"와! 보인다!!"

푸름을 가득 품은 웅장한 규모의 천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사진을 찍기가 어려웠지만 그래도 사진을 찍어 봤습니다.

오늘 기행단이 오르는 백두산 천지는 정북쪽으로는 북한을 마주보는 방향입니다. 내 나라 내 땅인 북한에서 백두산에 오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10시가 거의 다 되어 기행단은 다시 승합차를 타고 내려가 장백폭포를 보러 갔습니다.

천지에서 내려가는 길에는 끝도없는 광활한 벌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저 멀리 장백폭포가 보였습니다. 달문에서 빠져나온 천지의 엄청난 물량이 62미터를 하강하여 거세게 내리꽂히면서 협곡 전체에 천둥 같은 소리로 진동을 하며 심장을 울렸습니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장백폭포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한층 돋우었습니다. 스님은 참가자들과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장백폭포에서 소천지로 걸어서 이동하려는데, 관리소 측에서 위험하다는 이유로 걸어서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기행단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차를 타고 소천지로 이동했습니다. 소천지에 도착해서 스님은 대중에서 소천지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저희들이 있는 이곳은 작은 천지라고 해서, ‘소천지’라고 합니다. 천지는 칼데라호인데 이것은 화구원호이기 때문에 호수 모양만 같지 성격은 조금 다릅니다.
백두산에서 화산이 폭발했 때 백두산 주위의 작은 화산들도 많이 분출했습니다. 그때 작은 화산이 분출한 자리에 물이 고였다고 해서 ‘소천지’라고 이름을 붙였고 거울처럼 동그랗게 생겨서 저기 산 위에 ‘은환호(銀環湖)’라고 쓰여 있습니다.

물 밑에 낙엽이 떨어져서 새까맣게 되어 있으니까 수면이 거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이 잔잔할 때 사진을 찍으면 수면 위에서 대칭을 이룹니다. 지금도 잔잔한 편이네요.

제주도의 한라산에서도 화산이 여기저기 분출했는데 그곳은 용암이 진해서. 분출해서 쏙 올라오면 그대로 굳어서 전부 오름이 되었습니다. 즉 봉우리가 되었죠.
여기 보이는 이 나무는 한국에서 자작나무라고 부릅니다. ‘경주 천마도’도 자작나무 껍질에 새겨진 그림이에요. 전설에 따르면 자작나무 껍질에 연애편지를 써서 보내면 성취가 된대요. 관심있는 사람들은 자작나무 껍질을 벗겨 가세요. (웃음)
천지에서 쭉 계곡 따라 걸어 내려오면서 노래도 부르고 하면 좋은데, 올해는 수리한다고 막아놓고 안 열어주네요. 그래서 차를 타고 왔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녹연담까지는 걸어가겠습니다. 녹연담은 물이 옥색이에요. 그곳에 폭포가 세줄기로 떨어지는데 그야말로 작은 비룡폭포 같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곳이예요. 녹연담에서 조별로 사진 찍으면 좋겠지만 거기도 사람이 많고 복잡해서 아마 사진찍을 자리를 못 만들 것 같은데 일단 가 봅시다. 방금 천지에서도 단체 사진을 찍으려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저도 사진을 어렵게 찍었어요. (웃음) 사람들 어깨 너머로 천지만 겨우 보고 나왔습니다.
자, 사람들이 대부분 모였으면 녹연담으로 천천히 걸어가겠습니다.”

스님은 이동하는 길에 백두산 천짓물이 어떻게 산 아래로 내려가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백두산은 흙이 거의 없고 다 용암, 즉 바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들이 자라기는 하지만 나무를 쓰러뜨려 보면 뿌리가 땅 밑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전부 옆으로 벌어져 있어요.
아까 장백폭포 올라갈 때 나무뿌리가 옆으로 벌어져 있는 것을 조각해 놓은 것 보셨죠? 바위 때문에 뿌리가 밑으로 내려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태풍이 불어오면 뿌리째 딱 넘어져 버려요. 그런데 그것으로 의자를 만들어 놓으면 뒤에 펼쳐진 뿌리들 때문에 부처님의 광배처럼 보입니다. (웃음)
백두산 천지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문을 '달문'이라고 해요. 달문으로 흘러나온 물이 장백폭포까지 내려오는데, 그 물줄기가 마치 하얀색 비단을 깔아놓은 것 같습니다. 이를 '승사하'라고 해요. 승사하를 따라 흐른 물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장백폭포'입니다.
장백폭포에서 떨어진 물은 ‘이도백하’라는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데, 그 물이 여기 오면 용암이 굳으면서 갈라진 좁은 틈속으로 아까 그 폭포에서 흘러내려온 엄청난 물이 전부 다 들어가 버려요. 그래서 지금 여기 흐르는 이 이도백하 물은 전부 이 좁은 틈으로 들어가서 마치 땅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지표면에서 사라져버립니다.

이 틈 속으로 들어간 물은, 이 안에서도 다시 경사가 있어서 폭포가 되기도 하고, 지하로 물이 쏙 들어가 버려서 지표에 보이지 않지만 지하 골짜기에서는 다시 폭포처럼 쏟아지며 백두산 아래로 흐릅니다.
이것을 백두산 서편에서는 '제자하'라고 합니다. 여기를 지나면 물이 밖으로 나와서 다시 또 넓은 강이 됩니다. 그러다가 저 아래 지하산림 있는 곳으로 가면 또 용암 갈라진 틈바구니로 물이 들어가 버립니다. 바깥에서 보면 강물이 싹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멀리에서 물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폭포 소리가 시원하게 귓 고막을 울리는데, 그 소리가 점점 커지는 듯 하더니 바위 절벽에서 하얗게 쏟아지는 세줄기의 폭포가 눈 앞에 나타났습니다. 옥빛을 띈 연못으로 물줄기가 떨어지고 있는 장관이 펼쳐졌습니다. 녹연담에 도착했습니다. 흰 물보라가 수면에 반사되어 한층 더 장엄한 풍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녹연담에서 기행단들과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대중들은 녹연담을 본 후 지하산림으로 이동하는 버스를 타세요. 그리고 체력적으로 힘든 사람은 산문으로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지하산림으로 이동하는 사람은 30분정도 숲속을 산책한 후에 산문으로 내려오면 되겠습니다.”
스님은 산문으로 먼저 이동하고, 지하산림에 다녀오려는 기행단은 이승용님 안내로 이동했습니다.


지하산림(地下森林)은 화산 분화로 땅이 침하하면서 형성된 깊은 협곡에, 울창한 원시림이 우거진 자연 풍경입니다. 이끼와 거친 인근 암석, 그리고 시원한 자연을 만끽하며 푸릇하고 울창한 숲길을 걸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지하산림을 둘러본 후, 버스를 타고 주차장으로 이동 했습니다. 오후 2시 45분에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모두 식당으로 출발 했습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스님이 말했습니다.

“백두산 떠나면서 백두산 노래 부릅시다. 힘이 빠질수록 더 힘을 내봅시다. 연달아서 두 번 볼러보겠습니다(웃음).”
차 안에 웃음꽃이 번지더니 이내 한 목소리로 힘차게 백두산 노래를 불렀습니다.


백두산으로 찾아가자♬
우리들의 백두산으로
신선한 겨레의 숨소리♪
살아쉬는 백두산으로
이어서 차량에서 돌아가며 참가자들이 노래 솜씨를 뽐냈습니다. 어느덧 식당에 도착했습니다. 역사기행단은 늦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하루의 절반을 백두산에서 보내고 막 내려온 직후라 밥 맛이 가히 꿀맛이었습니다.

“오늘 천지 못 볼 줄 알았는데, 조신님 기도 덕에 천지를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웃음)”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오후 4시 10분 돈화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오전 일정으로 지친 기행단에게 스님은 말했습니다.

“이제 돈화로 이동합니다. 한 두 시간 정도 걸릴 것 같고요. 돈화는 발해의 첫 번째 수도입니다. 고구려에 홀본산성이 있듯이 발해에는 동모산성이 있습니다. 더운데 백두산 다녀와서 피곤할테니 한 시간 반 정도 자고 그 후에 동모산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후 5시 50분에 휴게소에 도착해서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후, 버스는 다시 돈화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스님의 발해사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이곳은 현재 지명으로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돈화시(敦化市)입니다. 이곳은 발해가 처음 나라를 세운 곳입니다.
고구려가 멸망하게 된 과정을 잠깐 살펴보면, 고구려의 막리지(莫離支) 연개소문이 죽은 뒤 아들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나면서 내부적으로 분열하기 시작합니다. 연개소문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가 남생이고, 둘째가 남건, 셋째가 남산이에요. 연개소문이 죽자 맏아들 남생이 정권을 이어받아 대막리지, 즉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남생이 지방을 순시하러 나간 사이 동생 남건과 남산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남생은 권력에서 밀려나자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당나라에 가서 ‘군대를 빌려주면 남건을 쫓아내고 내가 다시 권력을 잡아 당나라에 복속하고 신하의 예를 갖추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당나라로서는 이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눈엣가시 같던 고구려를 다시 공격할 명분이 생긴 것이죠. 당나라는 군대를 보내 남생의 세력과 연계해서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여러 차례 막아 내면서 국력이 상당히 소진된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어제까지 최고 권력의 자리에 있던 사람이 이제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공격하는 상황이 벌어졌으니 내부의 결속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결국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 의해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고구려는 멸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멸망했다고 해서 고구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후에도 상당수의 고구려 유민이 당나라의 지배에 저항했고, 일부는 신라와 연합하여 당나라에 맞서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696년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 혼란을 틈타 고구려 유민 집단과 말갈 집단도 유배지에서 탈출을 합니다. 그러면서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각각 집단을 이끌었고, 이후 대조영이 이들을 통합해 이끌게 됩니다.
당나라는 장수 이해고에게 군대를 주어 이들을 추격하게 했습니다.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대조영이 이끄는 유민 세력은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 추격군을 크게 물리쳤습니다. 그 뒤 대조영이 이끄는 세력은 더 멀리 이동해서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 돈화 지역까지 오게 됩니다. 이곳은 당시 고구려 옛 영토의 북쪽 변방에 가까운 지역이었습니다. 대조영은 이곳에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을 기반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발해로, 698년에 건국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발해가 이곳에서 처음 나라를 세웠습니다.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했으니까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만에 고구려 유민들이 옛 고구려 영토의 북쪽 끝자락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발해는 이후 빠르게 성장합니다. 제2대 무왕 대무예에 이르러서는 영토를 크게 확장했고, 고구려의 옛 영토를 넘어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넓혔습니다. 이후 제3대 문왕 대흠무 때에는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여 동북아 최대 국가로 성장했습니다. 이것이 발해입니다.

고구려의 옛 영토에서 다시 나라를 세운 발해가 처음 나라를 세운 곳은 고구려의 변방이었지만, 점차 동북쪽으로 세력을 크게 넓히다 보니 결국 발해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발해는 중경 현덕부, 상경 용천부, 동경 용원부 등 여러 수도를 중심으로 넓은 영토를 통치했습니다. 이렇게 발해는 오늘날의 연해주,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에 걸치는 대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열었으며 당시 동북아시아의 최대 제국을 건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돈화의 남쪽 톨게이트를 지났습니다. 돈화 시내로 가는 길에 목단강 상류 지역이 나오는데, 이 일대에 발해가 처음 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지는 동모산이 있습니다. 동모산은 발해 초기의 수도로서 대조영이 698년에 발해를 건국한 뒤 제3대 문왕 때 중경 현덕부로 도읍을 옮기기 전까지 약 56년 동안 수도 역할을 했습니다. 발해는 그 이후 약 230년 동안 존속하면서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찬란한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9세기에는 ‘해동성국’이라고 부릴 정도로 번영을 누렸어요.
그러나 926년에 발해는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의해 멸망합니다. 발해 유민들은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고, 일부는 고려로 넘어오기도 했습니다. 또 일부는 발해를 계승하려는 부흥국가를 세워 세력을 이어 갔습니다.
발해가 멸망했을 당시,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고려로 이어졌고, 북쪽에서는 거란족의 요나라가 등장했습니다. 이후에는 여진족의 금나라, 다시 몽골족의 원나라가 차례로 이 지역의 강자로 등장했습니다.
원나라가 중원을 지배하고 고려까지 침공하면서, 고려는 발해의 옛 영토로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이후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중국에는 명나라가 들어섰고, 다시 발해의 옛 땅에서는 여진족이 성장해 후금을 세운 뒤 청나라로 발전했습니다.
이렇게 만주 지역을 기반으로 한 청나라가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발해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나라임에도 오랫동안 우리 역사 속에서 그 위치를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잊혀진 역사, 잃어버린 역사처럼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실학자들이 발해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발해의 영토가 어디까지였는지, 발해가 우리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등을 연구하면서 발해의 역사가 다시 우리 역사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발해의 역사는 지금도 연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발해의 영토가 워낙 광활해서 오늘날의 북한과 중국 동북 지역, 러시아 연해주에 걸쳐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다 보니 각 나라의 역사적 이해관계가 다르고, 발해의 유적과 유물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놓고도 서로 견해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도 충분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곳도 많고, 특히 과거의 역사가 현재의 국가 간 이해관계와 연결되면 발굴된 유적이나 유물에 대한 해석에도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발해는 지금도 연구해야 할 과제가 매우 많은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단일 민족사라는 좁은 관점을 넘어 '동북아시아 북방 민족사'라는 넓은 시각에서 발해를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만주 벌판을 호령하던 고구려가 멸망하자 그 자리를 발해가 이어받았습니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거란족의 요나라가 차지했고, 요나라가 쇠퇴하자 여진족의 금나라가 차지했고, 금나라가 망하자 원나라가 차지했습니다. 이후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 시기를 지나 다시 여진족이 성장해 후금을 세우고 청나라로 발전했고, 이곳은 청나라의 발흥지이자 본거지가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청나라가 망하면서 장쭤린 같은 군벌이 이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일본에 의해 만주족이 세워지는 상황이 되었다가 지금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발해 역사의 해석을 좁게 우리 민족사로만 한정하면 '잃어버린 고토(古土)'가 되지만, 동북아시아 북방 민족사의 흐름이라는 더 넓은 틀에서 해석한다면, 발해를 이어서 요·금·원·청으로 이어지며 만주 지역이 동북아시아에서 지속적으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해 왔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스님의 발해사 강연을 다 듣고나니, 고구려를 이어받은 우리의 역사라고 생각했던 발해가 한반도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 만주 대륙과 연해주의 광활한 벌판을 호령했던 웅장한 대제국의 역사임이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오후 6시 20분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습니다. 기행단은 어느덧 돈화에 다다랐습니다.


”앞쪽으로 보이는 산이 동모산입니다. 이 동네에서는 성산자산성이라고 부르는데, 역사책에 나오는 동모산이에요. 산이 그렇게 크지는 않아요. 들판 한가운데 섬처럼 우뚝 솟아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산성이라고 하면 환도산성처럼 뒤에 산이 있고 골짜기도 있어야 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벌판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자체로 요새가 됩니다. 다시말해서, 높은 곳에서 사방을 볼 수 있고, 적이 숨어서 급습할 곳도 없어요. 전부 들판이니까 다 눈에 띄잖아요. 그래서 방어성을 쌓기에는 아주 유리한 곳입니다.
우리가 가는 방향 오른쪽으로 넓은 들판이 있고 목단강 변에 ‘영승유지’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발해의 평지성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지만 100퍼센트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평소에는 아래 평지성에서 살다가 유사시에는 동모산으로 들어와서 저항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앞에 흐르는 강은 ‘대석하’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흐르지만 옛날에는 산 밑 옥수수밭 쪽으로 흘렀던 것 같아요. 북쪽은 이 대석하를 자연 해자로 삼았기 때문에 이쪽에는 성벽을 쌓지 않았습니다. 골짜기를 두고 양쪽에 성벽이 올라가고, 작은 봉우리 쪽에는 성문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성벽을 따라 걷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 가까이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하네요. 한때는 쳐다보는도 못하게 했는데, 그래도 지금은 공안이 따라다니면서 멀리서 바라보는것은 허락하고 있습니다”
동모산이 잘 보이는 터에서 공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다시 차를 타고 가다보니 저 멀리 나지막한 산이 하나 보였습니다.

“저 앞쪽에 봉우리가 여러 개 있는 작은 산이 있는데, 그 산을 ‘육정산’이라고 합니다. 봉우리가 여섯 개 있다고 해서 육정산이라고 해요. 육정산은 발해 왕실과 귀족들의 묘지로 쓰였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발해 3대 문왕의 둘째 딸 정혜공주묘가 발견됐습니다. 거기에서 비석이 나왔는데 공주의 일대기를 비롯해서 여러 기록이 적혀 있었어요. 발해 사람들이 자기들에 대해서 직접 남긴 기록이 처음 나온 겁니다.
발해는 중국 역사 기록에도 자세하게 남아 있지 않은데, 이런 자료가 발견되면서 발해사 연구가 활발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발해가 두 번째 수도로 옮긴 ‘중경현덕부’의 왕실 공동묘지에서는 셋째 딸인 정효공주묘가 발견됐습니다. 거기에서는 기록뿐만 아니라 벽화까지 나왔어요. 이런 유적들이 발견되면서 발해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돈화 시내에 다다랐습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속한 돈화시이다보니 간판에서 한글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조선족의 자치지역이기 한자와 한글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고 스님이 설명해주었습니다.
오후 6시 48분, 버스는 강동 24석을 지났습니다.

“여기에서 유명한 유적 가운데 하나가 강동 24개석입니다. 목단강 동쪽에 강동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거기에서 돌 24개가 발견됐어요. 돌이 8개씩 세 줄로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디에 사용했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이게 강동 24개석입니다. 고구려에도 없고 다른 어떤 나라에도 없는 발해의 독특한 유물이에요. 이러한 형태의 24개석은 강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발해의 여러 곳에서 발견됐습니다.”
강동 24석 근처에는 벌써 공안이 와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내려서 보지 못하게 해서 버스에서 지나가며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후 7시, 돈화에 있는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간단히 정비를 했습니다. 저녁식사를 하고 강의를 듣기에는 시간이 점심식사를 늦게해서 시간이 애매했습니다. 우선 저녁강의를 시작 하고 오후 8시 30분에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백두산 잘 보셨습니까? 좋았어요? 힘도 들었죠? 어제는 긴 여정이었고요. 오늘은 높은 여정이었습니다. (웃음)
오늘 올라간 곳이 해발 2,680미터쯤 될거예요, 그보다 더 높이 올라가 본 적이 별로 없죠? 그러니까 어제는 안 가본 길을 가 봤고, 오늘은 못 올라가 본 곳 까지 올라가 봤고, 많은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웃음)
식사 시간에 맞게 도착해서 밥 먹고, 여러분들 조금 쉬고 강의하면 좋은데, 밥 시간이 너무 가까이 붙어 있네요. 그렇다고 강의 끝나고 밥을 먹으려니까 종업원들이 너무 늦게까지 일을 해야 해서 어중간하게 됐어요.
그래서 강의를 하다가 8시 30분에 밥을 먹고 다시 와서 강의를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형편에 맞춰서 같이 살아봅시다. (웃음)
오늘 중요하게 다뤄야 할 이야기는 내일 우리가 가볼 곳인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입니다. 내일은 상경용천부를 중심으로 발해의 역사를 공부하고, 발해의 뿌리는 어디인지, 발해는 어디로 이어졌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발해의 역사가 왜 우리 역사에서 제외되었는지, 그리고 언제부터 또 다시 우리 역사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는지, 오늘날 발해 역사는 어떤 쟁점들을 갖고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 강의 시간에는 발해 역사의 요지를 설명하려 합니다. 고등학교 다녔으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인데 고등학교를 다니고 온 사람이 몇 명 안 되어서 참 문제예요. (웃음) 그래서 앞으로는 기본적인 역사 시험을 치르고 역사기행에 데리고 와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히, 청년들이 좀 문제예요. 젊다는 장점과 잘 모른다는 단점이 결합되어 있어서 제가 보기엔 좀 어리버리한 것 같아요. (웃음) 청년들, 웃자고 하는 얘기예요. (웃음)”
강연장에 웃음꽃이 퍼졌습니다.
“아까 차 타고 오면서 동모산 설명하려고 발해사를 간단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고구려는 어쩌다가 멸망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우리가 아직 고구려 멸망의 역사는 살펴보지 못했죠. 그래서 간단하게 정리해 본다면 고구려는 가장 강성했을 때 5세기 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서기 400년경 광개토대왕부터 장수왕, 문자명왕 때까지가 고구려의 강성한 시기입니다.
고구려가 그렇게 강성하게 된 것은 첫째, 고구려의 건국 이념 때문입니다.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는다"라고 하는 고조선 부흥운동 이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처음부터 제국의 개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 국가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고, 그게 동북아 지역의 다른 민족이나 중원의 중국 세력하고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어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지리적 이점입니다. 고구려는 싸우는 현장에 수도를 두지 않았습니다. 동쪽 변방인 환인이나 집안에 수도를 두고, 대륙 경영 요점으로는 요동성을 두었습니다. 요동성을 중심으로 투쟁을 하다가 전쟁이 불리하면 도망가버리고, 적군이 고구려군을 쫓아오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매복 하고 있다가 다시 공격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고구려를 멸망시키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입니다.
셋째는 그 당시에 중원이 분열되어 있었다는 겁니다. 위진남북조 시기 약 130여 년동안 중국 북방이 분열되어 있었는데, 고구려가 강성하여 북방 세력들과의 경쟁에서 계속 승리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사군도 멸망 시키고, 부여와의 다툼에서도 대소왕을 죽이면서 우위에 섰습니다.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이나, 연나라 모용황의 침입으로 미천왕의 시신과 왕비가 잡혀가는 등 위기도 겪었지만 다 극복해 냈습니다. 그러다 북조를 통일한 북위와 거의 100년간 평화를 유지하면서, 백제를 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며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런데 평화는 반세기 이상 진행되면 내부에서는 사치가 만연하고, 권력 갈등이 생기면서 분열하는 법입니다.

이 시기에 신라가 가야를 통합하고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어 고구려를 침공했습니다. 결국 고구려는 신라에 한강 유역을 빼앗기게 됩니다. 이후 수나라가 130만 대군을 끌고 왔으나 을지문덕 등의 활약으로 고구려에 패해서 망해버렸고, 당나라 당 태종 이세민도 3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서 요동성을 함락시켰으나 안시성에서 양만춘 등의 결사항전에 막혀 결국 실패하고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끊이지 않는 오랜 전쟁을 치르면서 고구려는 국력이 많이 약해졌고, 내부 분열이 일어나면서 결국은 폐망하게 되었습니다.
백제와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가 안동도호부 등을 설치하고 신라까지 계림도독부로 직할하려 하자 신라는 당나라의 안동도호부를 선제공격했습니다. 이때, 신라군과 고구려 부흥군은 협력해서 8년간 대당 항쟁을 벌였고 당나라가 패하면서, 신라와 당나라는 화친을 맺게 되었습니다.
자, 시간이 다 되었네요. 일단 여기까지 하고 저녁식사를 하고오겠습니다”
오후 8시 40분에 식사를 시작하여 20분만에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기행단은 9시에 다시 한자리에 모여 스님이 설명해주는 흥미진진한 발해사를 들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고구려의 지도부는 모두 변방으로 유배시켰고, 중간 간부급인 고구려족과 말갈족, 거란족은 요서 지역인 조양에 나누어 관리했습니다. 이때 마침 거란족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 틈을 타서 대중상이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걸사비우가 말갈 유민을 이끌어 조양에서 탈출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걸사비우와 대중상은 죽고, 대조영이 지도자가 되어 추격해 오는 당나라 군대를 천문령에서 물리치고, 동모산에 와서 세운 나라가 발해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때 고구려 아래에 있던 말갈족이 발해를 함께 세우면서 국가의 상층부까지 올라가 국가 경영을 배우게 되었고, 발해 멸망 이후에는 여진족으로 이름을 바꿔 금나라라는 대제국을 세우게 됩니다. 뿐만아니라 고구려와 발해 영역 안에 소수민족으로 있던 거진족, 여진족, 몽골족도 순서대로 제국을 세워 훗날 동북아 대륙을 통치하게 된 것입니다.
발해는 고구려 옛터를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북부에 있는 흑수말갈이 발해를 무시하고 당나라와 직접에 나서니까, 발해 2대 왕 ‘무왕’은 이들을 침공해서 이 지역을 모두 통합해버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발해 국토의 구성이 변동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진족만 살고 있는 땅이 두 배로 커지면서 인구 구성에 문제가 생긴거죠. 발해의 지배민족은 고구려족이지만 여진족의 수가 절대 다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중국 학자들이 "발해는 말갈족의 국가다" 하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구 구성이 말갈족이 다수인 국가가 된 겁니다.
발해가 얼마나 큰 제국이었나 하는 것은 수도의 성곽 크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평양성이나 신라의 월성이나 백제의 위례성이나 이런 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상경용천부’에 성곽이 있었는데 석성으로 쌓았고, 성곽 한 변의 길이가 4km가 넘습니다. 한 바퀴 돌려면 16km쯤 되죠. 이렇게 큰 성은 그 당시 동아시아에서 당나라의 장안성밖에 없었습니다.
성곽의 구조는 외성이 있고, 북쪽에 치우쳐 내성이 있고, 내성 안에 다시 궁성을 쌓은 삼성 형태입니다. 외성, 내성, 궁성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발해는 2대 무왕 때 흑수말갈을 정벌하고, 장문휴를 시켜 산둥반도를 선제공격해서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3대 문왕 때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으며 유학, 태학, 과거제도 등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발해는 10대 선왕 때 최고 영역을 차지했다가, 15대 때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침공을 받고 순식간에 항복하며 멸망했습니다. 발해가 멸망하고 유민의 일부는 고려에 귀순했습니다. 중국 역사에서는 말갈족이 주였고 영토와 인민이 요나라로 귀속되었으니 중국 역사라고 주장하지만, 고려가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고구려의 정신을 잇는 데서 고려를 건국했으니 발해의 역사적 정통성은 고려에 계승이 됐습니다.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 거란족, 그 뒤에 발해 밑에 있던 여진족이 일어나 세운 금나라, 그 뒤에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까지 북방 민족들이 순서대로 제국을 세워 동북아 대륙을 통치하게 되었고, 발해의 광활했던 영토는 그 이후에는 우리 손을 떠나 천여 년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1800년대 후반기에 우리 유민들이 건너가서 정착촌을 건설하고 연해주와 북간도,서간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자, 이 정도로 설명하고 궁금한게 있으면 질문을 받겠습니다. 많이 졸리죠? 이 때 손든 사람일수록 미움을 받습니다. (웃음) 하지만 이럴 때 일수록 번쩍 손을 들어야 합니다”
용기 있는 청년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결국 조선족도 우리와 같은 민족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데, 사실 한국에서는 조선족을 조금 낮춰 보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조선족 역시 중국을 자기 민족으로 생각하지, 한국을 자기 민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도 조선족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하고, 조선족 역시 우리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것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개선해 나가야 할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옛날에는 자신이 태어난 곳과 사는 곳이 거의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태어난 곳과 사는 곳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 가서 살면서 미국 시민권을 받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러면 미국에서는 그 사람을 한국계 미국인으로 보는 겁니다. 민족적으로는 우리와 같은 한 민족의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국적은 미국에 있는 것이죠.
이처럼 민족적 뿌리와 국적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조선족도 민족적으로는 한 민족의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중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고, 중국 안에서는 조선족이라는 소수민족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여러분이 굉장히 오해하는 게 있어요.

가령 한국계 미국인이 한국에 미국 외교관으로 온다고 하면, 여러분은 ‘한국 사람이 대사로 왔다’라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은 미국 시민이고 미국을 대표해서 온 사람이에요.
중국의 조선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족적으로는 한 민족의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국적은 중국입니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내 정체성이 뭔가?’하고 헷갈릴 수는 있어요. 그런데 이건 한국 사람이나 중국 사람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나는 한국계 중국인이다’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미국이나 영국, 스위스에서 온 사람들을 깔보거나 무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약간 주눅이 들었으면 들었지요. 그런데 동남아에서 온 사람은 괜히 이유없이 깔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못 사는 나라에서 왔다’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현실인 동시에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예요. 현실을 너무 무시하면 이상주의자가 되고, 현실이라고 너무 강조하면 정의에 어긋납니다. ‘남녀 차별도 현실이니까, 인종차별도 현실이니까 현실을 인정하자’하고, 문제 의식조차 없이 그대로 인정하고 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이런 문제들은 하루 아침에 극복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차별에 대해서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봐야 합니다. 하지만 노인들에게 이것을 극복 하라고 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예요. 극복하긴 해야 하는데, 평생 그렇게 살아왔는데 어느 세월에 고치겠어요.(웃음) 노인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느 정도 이해할 필요가 있고, 젊은 우리들은 ‘원래 세상이 그런 거야’하고 현실을 정당화하거나 합리화 해서는 안됩니다. 조선족을 차별하는 시선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지금 동남아 같은 곳에서는 한국에 대한 동경이 굉장히 큽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미국에 가고 싶어 했던 현상보다 훨씬 강도가 강합니다.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 사람하고 대화하고 싶어 하고, 한국 노래를 부르고, 한국 음식 먹으러 가고요. 그만큼 한국의 위상이 달라진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가정 형편이 좋은 아이들은 BTS 공연한다고 하면 돈을 내고 구경 가겠다고 하고, 한국에 여행 가겠다고 하니, 대부분 가정형편이 어려운 동남아 국가의 부모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일이죠. 그래서 우리는 한류의 긍정적인 부분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소비 욕구와 경제적 부담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 거예요. 우리도 모르게 또 다른 차별과 양극화를 초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한국 문화를 소비하게 만드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자립을 돕는 방향으로 이어져야 한류가 지속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여성 권리 향상이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 교육이나 여러 분야를 지원함으로써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지금 젊은이들이 너무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조금 견문도 넓히고, 봉사도 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과 직접 만나면서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는 것이 좀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잘 주무시기 바랍니다.”
10시가 넘어 강의를 마쳤습니다. 긴 하루를 마친 참가자들은 숙소로 이동하여 휴식을 했습니다. 스님도 오늘은 일찍 휴식을 취했습니다.
내일은 동북아역사기행 다섯째 날입니다. 내일은 발해유적지를 둘러보고 봉녕촌, 간도특설대 터등을 방문 한 후 연길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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