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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동북아역사기행 둘째날입니다. 스님과 기행단은 환인에서 고구려의 홀본산성을 둘러보고, 집안으로 이동해 장군총,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 국내성을 방문하였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하고 원고를 교정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기행단도 오전 6시부터 버스에 개인짐을 실으며 일정 시작을 준비 하고, 몇몇 사람들은 호텔 앞에 있는 호수 근처에서 잠시 산책을 하며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오전 6시 30분부터 기행단과 아침식사를 하기위해 호텔식당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배식시간이 길어져 공양시간이 예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공양을 마친 후 7시 20분에 기행단은 홀본산성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스님은 이동하는 차량에서 홀본산성에 대한 설명을 했습니다.


“고구려가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삼았던 도읍지인 홀본(忽本)산성으로 가겠습니다. 고구려는 적의 방어를 막기 위해서 홀본에 산성을 세웠습니다. 평상시에는 평지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평지에도 성을 세웠는데, 이 평지성과 산에 있는 산성이 한짝으로 되어있는 것이 고구려 성의 구조입니다. 평지에 있는 성은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허물어지고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운 반면에, 산성은 산 위에 있고 성벽이 대부분 돌로 되어있어서 아직도 그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가는 홀본산성에 고구려 왕이 일상적으로 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강변에 평지성으로 추정되는 성터가 있는데 그 곳에서 일상생활을 하다가 적이 침공해서 수도 방어가 어려워지면 평지에 있는 왕궁을 버리고 산성에 들어가서 항전을 했습니다. 홀본산성은 항전을 하는 방어성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렇다보니 지형지세가 아주 험준한 곳에 세워졌습니다.”
스님이 설명하는 중에 창 밖으로 멀리 홀본산성이 보였습니다.

“저 앞에 산이 보이나요? 다섯 여신의 모양이라고 해서 ‘오녀산성’이라고도 부르는데 저것이 졸본성, 홀본산성입니다. 보통은 안개가 짙어서 잘 안보이는데 오늘은 멀리에서도 잘 보이네요. 홀본산성은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높이가 거의 100m 이상 되는 수직 절벽입니다. 그런데 산 위에는 평평한 지형이 있어서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고 샘터도 있어요. 그래서 홀본산성은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형입니다. 한 명이 백 명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의 천혜의 요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사방이 절벽으로 막혀 있고, 서쪽에 사람이 기어오를 수 있는 통로가 하나 있습니다. 적군도 그 길을 통해서만 올라올 수 있기 때문에 서쪽 통로에만 성벽을 쌓고 성문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 올라가 성문터와 성벽의 흔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절벽 밑까지는 차로 가고 절벽은 계단으로 올라갈 예정입니다.”
어느새 기행단을 태운 버스가 홀본산성 아래에 있는 매표소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입구에 있는 박물관을 간단하게 관람했습니다.


스님과 기행단은 절벽 아래까지 올라가는 셔틀 버스로 옮겨 타고 이동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니 ‘오녀산성’이라 적힌 비석이 있었습니다.

비석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은 후, 올라갈 때는 서문쪽으로 올라가고 내려올 때는 동문 쪽으로 내려오기로 하고 기행단은 홀본산성을 향한 천 개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기행단을 먼저 보내고 가장 뒤에서 지팡이 2개를 짚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심장이 약해 무리가 갈 수 있어서 쉬어가며 계단을 올랐습니다.

“제가 어느새 이렇게 되어버렸네요.(웃음)”
스님보다 먼저 올라간 기행단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향상법사님과 이승용님의 현장설명을 들으며 홀본산성을 둘러보았습니다. 스님도 주변에 함께 오르는 일행에게 중간중간 현장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홀본산성은 그야말로 자연 지형 자체가 천연절벽으로 이루어져 난공불락의 성벽 같았습니다. 산성에 오르는 길은 매우 가파르고 험준했지만 절벽길을 뚫고 성위로 올라서니 땅이 평평하고 주변이 탁 틔였습니다.
기행단도 천개의 계단을 모두 오르고나니 모두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고구려를 공격했던 적군들도 이 길을 올라와서 싸워야하는데 올라오다가 힘이 다 빠져서 싸울기운이 남아있지 않으니, 옛 기록에도 이 산성을 배경으로 전쟁했다는 기록이 거의 없을 정도로 홀본산성은 천혜의 요새였다고 합니다.
산 정상부 끝자락에 서서 아래를 굽어보니 거대한 댐을 조성하면서 생긴 푸른 호수와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세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방의 경계를 살필 수 있는 요충지이자 웅장한 기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동문 근처에 있는 성벽으로 이동해보니, 고구려사람들의 독창적인 기술이라는 ‘개이빨식 축성법’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는 성벽을 쌓을 때 돌을 서로 맞물리게 쌓아 성벽이 무너지지 않게 하고, 겉은 평평하게 쌓아 적군이 성벽을 타고오르기 어렵도록 설계한 고구려인들의 독창적인 기술이라고 합니다.

초소로 추정되는 곳곳에서는 초기 온돌 양식인 구들의 흔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온돌 문화를 고유하게 발전시켜 온 민족은 전 세계에서 한민족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친숙한 구들 터를 이곳 홀본산성 정상에서 마주하니, 웅장한 문화와 자주적 기상을 가슴에 품었던 고구려인이 바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였음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풀 숲 사이에 큰 돌들이 보이고 가끔씩 나무 사이로 쌓여 있는 성의 흔적을 따라서 홀본산성 동문방향으로 내려왔습니다. 무릎이 좋지않아 내려오는 길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스님은 양손에 지팡이를 짚고 다른 사람들과 속도를 맞추어 내려왔습니다.


절벽 아래로 내려오니 10시 45분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기행단과 함께 다시 셔틀 버스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왔습니다.
홀본산성 답사를 마친 후, 집안으로 이동했습니다. 스님은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고구려가 졸본에서 집안으로 수도를 옮기게 된 배경과 국내성 시대의 역사를 설명했습니다.

한 시간 정도 이동 시간이 남아 기행단은 잠시 휴식을 취했습니다. 집안에 다다르자 스님이 사람들을 깨웠습니다.
“자. 이제 다들 일어나세요. 원래 집안으로 오는 길은 남로와 북로 두가지 길이 있습니다. 남로는 길이 험중하지만 빠르게 이동할 수있고, 북로는 조금 편하지만 돌아서 오는 길입니다. 원래는 남로로 이동하기로 해서 국도로 가는 줄 알았는데, 기사님들이 새로 생긴 고속도로를 탔다고 해서 제가 깜짝 놀랐어요. 그래서 저는 한숨도 안 자고 지켜봤습니다.(웃음) 터널을 14개나 지나왔어요. 그러니까 이 험준한 첩첩 산골에 터널을 뚫어서 새 고속도로를 만든거예요. 평소 4시간 걸려서 이동하는 곳을 지금 1시간 반만에 왔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신기해서 잠이 안와야 하는데 여러분들은 참 잘 자네요.(웃음)”
버스 안에서 웃음소리가 터졌습니다.
버스가 압록강변을 따라 이동했습니다. 압록강 너머에 북한땅이 가까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국경변이기 때문에 철조망이 쳐져 있었습니다.


“압록강변입니다. 강 건너의 북한을 볼 수 있습니다. 남의 집에서 우리 집을 담 너머로 보고 있네요.”
북한 땅에 있는 산 속의 뙤기밭도 보였습니다.

이동하는 길 군데군데에서 고구려시대 돌무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왼쪽에 돌무덤이 보이죠? 가운데 파헤쳐진거에요. 서대묘라고 불리는데 미천왕의 무덤이라고 추정 됩니다. 자세히보면 산 밑에 돌무덤의 개수가 매우 많습니다. 돌무덤을 만들 때에는 네모지게 축대를 먼저 쌓고 그 안에 강돌을 넣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축대가 무너지고 강돌이 드러나니까 저렇게 돌무지처럼 보이네요.”
지나가는 길에 가장 규모가 크다는 천추묘(千秋墓)도 보았습니다.

오후 1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에 도착했습니다.

홀본산성에도 다녀왔던터라 기행단도 마침 출출했습니다. 점심식사를 맛있게하고 1시 40분에 집안 박물관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집안 지역에서는 한국어로 유물이나 유적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게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박물관 안에서 자유롭게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스님은 차 안에서 기행단에게 설명을 하기로 했습니다.
“한번 주욱 둘러보시길 바랍니다.”
기행단이 집안 박물관을 둘러본 후 차에 오르자 스님이 말했습니다.

“이 박물관에서 중요했던 것은 벽화입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단군신화와 관련된 벽화예요. 생활풍속도의 한쪽 구석에 신단수가 있고, 그 나무 아래에 곰이 앉아 있습니다. 또 사람이 화살로 호랑이를 쏘는 모습도 그려져 있었습니다. 이게 6세기경의 그림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고구려 시대에 단군신화와 관련한 내용이 벽화에 그려져 있었다는 거예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화살촉입니다. 화살촉 끝이 뾰족하지 않고 무디거나 둥글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생긴 화살은 동물이 가슴이나 목, 다리에 맞으면 충격을 받아서 잠시 기절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때 동물을 사로잡아서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했다는 거예요. 당시에는 동물의 몸에서 피가 나면 제사에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동물을 잡는 것보다 상처가 나지 않도록 잡는 것이 더 중요했던거죠.”
스님은 고구려 시대 무덤 양식에 대해서도 설명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가는 곳은 집안에서 약간 북쪽에 있는 태왕향입니다. 광개토대왕을 태왕이라고 부르잖아요. 그래서 이곳에 태왕릉이 있고, 동네 이름도 태왕향입니다. 이곳에 광개토대왕릉이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장수왕릉이 있습니다. 먼저 장수왕릉을 본 후에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마지막으로 광개토대왕릉을 보겠습니다.
고구려시대에 무덤을 만드는 방법은 고인돌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돌을 쌓고 그 안에 관을 넣은 다음 그 위에 큰 돌을 덮는 구조입니다. 그러다가 점점 무덤을 크게 만들면서 돌이 옆으로 밀려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가장자리에 축대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점점 커져서 2층, 3층으로 올라가고 결국 7층까지 쌓게 된 겁니다. 7층까지 쌓으면 안에 있는 돌이 바깥으로 밀려나오는 힘이 커지겠죠. 그것을 막기 위해서 ‘호석’이라고 하는 큰 돌을 무덤 옆에 기대어 놓았습니다. 무덤을 보호하는 돌이라는 뜻입니다. 한 개에 15톤에서 25톤 정도 되는 큰 돌을 옆에 받쳐 놓은 거예요.

장수왕릉에는 한 면에 세 개씩 모두 열두 개의 호석이 있었는데 하나가 없어져서 지금은 열한 개가 남아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릉은 크기가 더 크기 때문에 한 면에 다섯 개씩 모두 스무 개의 호석을 받쳐 놓았습니다.”
기행단은 장수왕릉인 장군총에 도착해서 스님이 설명해준 내용을 바탕으로 장군총을 둘러보았습니다. 스님은 장군총 앞에서 참가자들과 조별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참가자들도 각자 장군총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스님은 기행단과 함께 장군총에서 광개토왕비로 이동했습니다.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위대한 업적과 고구려의 건국 설화를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세운 초대형 비석입니다. 광개토대왕비는 훼손을 막기 위해 거대하고 웅장한 유리관 내부 중앙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스님은 기행단과 함께 유리관 외부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내부로 들어간 뒤 비석 주위에 일렬로 길게 줄을 서서 관람했습니다.

광개토대왕비는 압도적인 크기로 위용을 자랑했습니다. 위로 높게 거칠고 거대하게 솟아오른 응회암 돌기둥 사면에 또렷하게 새겨진 수 천자의 비문은 마치 고구려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나타내는 듯 했습니다.

비석 바로 근처에는 거대한 광개토대왕릉이 위치해 있어,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웅장한 기상이 동시에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
기행단은 광개토왕릉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광개토대왕은 39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서거했습니다. 보통 왕이 살아있을 때 수십년에 걸쳐 능을 축조하는데 왕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무덤을 완성할 시간이 대단히 부족했습니다. 고구려의 무덤 축조방식은 축대를 쌓은 후 돌을 채워넣는 방식인데, 광개토대왕릉은 강돌을 모을 겨를이 없어 인근 산에서 쉽게 채취할 수 있는 산돌을 끌어 내부를 채워 넣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식되기 쉽고 약한 산돌은 세월이 흐르면서 바람과 비에 부식되고 삭아 내리면서 결국 무덤 내부가 내려앉았습니다. 그래서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였던 광개토대왕릉의 외벽이 무너져 내렸고 오늘날 언덕처럼 붕괴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기행단은 오후 4시에 환도산성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동하는 길에 스님은 환도산성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국내성은 평상시에 궁궐로 쓰이는 도성이었고, 환도산성은 비상시에 왕과 백성이 피난하여 적과 맞서 싸우던 고구려의 핵심 산성이었습니다. 사방이 가파른 절벽으로 쌓여있고, 앞쪽은 ‘통구하(通溝河)’라는 강물이 흐르고 있어 천혜의 요새 역할을 했습니다. 내부에는 샘터와 연못, 망대, 궁터 등이 갖추어져 있어 산성인 동시에 한때는 궁성으로도 직접 사용되었습니다. 고구려가 제국으로 성장해 나가던 400여 년 동안 세 차례나 국내성이 함락되는 치열한 대규모 외세 침략을 겪으며 국가적 위기를 극복해 낸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
환도산성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남문인 옹성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고구려 특유의 개이빨식 축성법으로 성벽이 단단하게 쌓아올려져있었고, 성 내부의 넓직한 터가 큰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환도산성 밖으로 내려오면 성 아래 평지와 골짜기에 수백 기의 고구려 돌무지무덤이 넓게 펼쳐져 있었는데 ‘산성하 무덤떼’ 였습니다. 스님은 아침에 홀본산성을 힘들게 올라서인지 다리가 아파서 조금 휴식하기로 했습니다. 그 동안 이승용님이 안내를 맡았습니다.

산성하 무덤떼를 가만히 살펴보니 고구려의 무덤 양식이 어떻게 발전해 갔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제일 초기의 무덤들은 시신을 모신 관 위에 단순히 자연 돌이나 강돌을 수북하게 쌓아 올린 형태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방단계제식 돌무지무덤으로 형태가 변화했습니다. 기단을 1단 만들고, 그 위에 2단, 3단을 계속 계단처럼 올려 쌓으면서 무덤은 점점 더 높고 거대해지는데 이러한 계단식 석조 기술이 극치에 다다른 형태가 바로 아까 보았던 장군총이나 광개토대왕릉 같은 7단 크기의 거대한 석조 피라미드입니다.


이 산성하 무덤떼는 오전에 보았던 홀본산성을 비롯해 장군총, 광개토대왕릉 및 비, 국내성과 함께 고구려를 대표하는 유적지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이 전체가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전 세계에 고구려의 위상을 알리고 있다고 합니다.
산성하 무덤떼까지 둘러 본 후에 기행단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 국내성으로 이동했습니다.

고구려의 옛 성벽이 현대 중국 도시 한복판, 높게 솟은 아파트 단지들 사이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모퉁이 구간은 직각이 아니라 살짝 45도로 깎인 형태로 성벽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성벽 바로 건너편으로는 서쪽을 흘러가는 통구하 강물이 보이고, 강 너머 멀리로는 아련하게 북한 산자락의 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성벽 바로 옆까지 민가와 창고가 바짝 붙어 있었고, 주민들이 성돌을 뜯어가 담벼락을 쌓거나 돼지 막사 울타리로 쓰는 바람에 성벽이 많이 훼손되고 가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네스코 지정 이후 민가들이 빠져나가고 주변이 정돈되면서, 지금은 성벽을 따라 푸른 잔디밭과 보도블록 산책로가 깨끗하게 이어져 시민들이 정답게 걸어 다니는 도심 공원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돌을 뼛조각처럼 뾰족하고 모나게 가공해 서로 물려 쌓는 고구려 고유의 '개이빨식 축성법'도 눈에 보였습니다. 풀로 덮여 있어도 가로 결이 보이는 걸 보니 고구려 석공들의 작품임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기행단은 오늘 일정의 마지막 장소인 국내성벽을 모두 둘러보고 오후 6시 30분경에 저녁공양을 한 후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8시 40분, 스님은 숙소 2층 강당에서 저녁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종일 걷는 일정이었기에 기행단도 피로감이 몰려왔지만, 스님의 강의가 시작되자 귀를 기울였습니다.

“제가 처음 역사기행을 시작한 것은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면서였습니다. 그해 여름에 베이징을 방문하고 연길에도 갔습니다. 연길에 가서 조선족 자치주 지도를 하나 구했는데, 그 지도를 자세히 보니 발해 유적지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유적지도 여러 곳에 표시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이건 현장에 가서 직접 공부해봐야겠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역사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참가자를 교사로만 한정했습니다. 선생님들이 직접 현장학습을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발해사를 중심으로 역사기행을 준비했습니다.
199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첫해에는 답사팀을 구성해서 진행했습니다. 그 다음 해인 1994년에 여행사 사장이면서 안내를 하던 분에게서 북한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정일 장군의 초대를 받아 북한에 다녀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분이 북한에 가보니 아이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해서 아주 작고, 굶어 죽는 사람도 봤다고 했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중국 조선족들이 한국에 오는 것이 유행이었기 때문에, 북한을 비난하려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중국 공산당원이고, 김정일 장군의 초청을 받아서 북한에 다녀왔는데 내가 왜 북한을 비난하겠습니까?’
그 당시에 저는 인도에 수자타 아카데미를 설립한 지 1-2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 아이들의 생활 형편도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해 역사기행을 갔을 때 그 분에게 인도 아이들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말했습니다.
'지금은 세계화·국제화 시대이기 때문에 내 민족, 내 나라라고 무조건 돕는 것이 아니라 더 열악한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이 사진을 보세요. 인도의 불가촉천민 아이들이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북한 아이들은 이것보다 더 심각하다는 겁니다. 저는 그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이 다른 사람들이 식사하는 동안 잠깐 시간을 내서 어디를 다녀오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따라갔더니 압록강변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유람선이 다니고 있었는데, 우리는 모터보트를 타고 압록강을 따라 위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얼마쯤 올라가니 건너편에 마을이 보였습니다. 지금의 ‘만포’ 지역이었습니다. 북한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마을을 바라보니 강을 사이에 두고 불과 10~20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사람들의 모습이 제가 인도에서 보았던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점은, 인도에 가면 아이들이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고 구걸을 합니다. 그런데 북한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어요. 낡은 부두가 하나 보여서 그쪽으로 지나가려는데, 일곱 살이나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아주 작은 아이가 앉아서 돌멩이를 가지고 낡은 쇠붙이를 똑똑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영양실조에 걸린 것처럼 아주 삐쩍 마른 모습이었어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애야, 애야‘하고 불렀더니 안내하던 분이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아이도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들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우리를 쳐다보는 듯했는데, 제가 부르니까 오히려 더 고개를 숙여버렸습니다. 그 때 안내하던 분이 그러더군요.
‘조선 아이들은 구걸할 자유도 없습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조국의 체면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면 안된다고 배운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배를 좀 가까이 대보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국경이기 때문에 지나가는 것은 괜찮지만 배를 대면 큰일 난다는 거예요.
저는 그때 다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새도 이쪽에 먹이가 없으면 저쪽으로 날아가서 먹이를 찾아 먹습니다. 그런데 나는 돈도 있고 음식도 있는데도, 바로 눈앞에서 굶주리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아무것도 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줄 수 없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가 국경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국경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바로 눈앞에 있는 굶주린 아이에게 아무것도 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북한에 대해서 특별히 적대 감정이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약간 진보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도 북한 나름대로는 잘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북한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는 이야기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직접 북한에 다녀와서 한 이야기도 믿어지지 않았던 거예요. 북한이 부유하게 살지는 않더라도 20세기에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한때 우리보다 더 잘 살기도 했으니까요. 저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고 인도까지 가서 학교를 지었는데, 정작 바로 턱밑에 있는 내 동포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내가 동포의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그 때부터 북한 동포 돕기를 시작했습니다. 역사기행을 하면서 국경 지역을 다니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북한의 현실을 알게 되면서 북한 돕기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는 북한의 실상을 직접 아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티브 린턴 박사처럼 북한에 직접 다녀온 외국인이 있으면 초대해서 강연을 듣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매달 답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 내부에 어려움이 있다면 그 주변에서 무언가 알 수 있지 않을까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신의주에서 시작해서 압록강을 따라 장백까지 올라가고, 다시 두만강을 따라 훈춘까지 다니면서 현지 상황을 기록하고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북한 난민들을 만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북한 난민 돕기 활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압록강을 따라 답사하다 보면 수풍댐 때문에 강을 그대로 따라갈 수가 없어서 환인 쪽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환인이 고구려의 첫 수도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졸본성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몰랐어요. 옛날에는 터널이 없어서 차가 고개를 넘어갔는데, 고개에서 환인을 내려다보니 산 하나가 딱 보였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저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지도나 자료가 충분히 있던 때도 아니었습니다.
우선 고개 밑으로 내려가서 무조건 산만 보고 걸어 올라갔습니다. 두 시간쯤 올라갔는데 넓은 길이 하나 나타났어요. 더 올라가니까 오늘 우리가 처음 내렸던 주차장 부근까지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부터 절벽이라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산 위에서 케이블카 같은 것이 내려오는 거예요. 아무도 없어서 일단 타고 있었더니 조금 있다가 군인들이 와서 같이 타고 올라갔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정상에 방송통신탑이 있었고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이었어요. 어쨌든 그렇게 해서 산 위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무엇을 깨달았느냐? '내가 천손은 천손이구나.' 하늘에서 두레박이 내려와서 저를 데려다 주었잖아요.(웃음)"

“농담입니다.(웃음) 이렇게해서 제가 찾아간 곳이 여러분이 오늘 답사한 홀본산성, 즉 졸본성이었습니다.”
스님이 들려주는 30년 전 역사기행 이야기에 빠져들어 모두 밤이 깊어가는 줄 몰랐습니다. 스님은 오늘 하루 답사한 내용들을 다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었습니다. 고구려의 성곽구조,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옹성의 구조, 오늘 걸었던 국내성과 환도산성 일대의 지형등을 설명하고, 이어서 장군총의 구조와 광개토대왕비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서도 다시 설명했습니다.
오늘 답사한 내용을 모두 정리한 후 스님은 내일 일정을 안내했습니다.
"내일 가장 중요한 것은 압록강을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북한에 직접 가볼 수 없으니까 하루 종일 강 건너 북한을 바라보면서 가는 겁니다. 특히 임강에서 장백까지 구간이 중요합니다. 압록강을 따라서 백두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골짜기들이 이어지는데, 1도구, 2도구, 3도구 하는 식으로 24도구까지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장백까지 간 뒤 백두산 산록을 돌아 이도백하까지 가게 됩니다.
장백 앞산에는 발해시대의 탑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발해시대의 유일한 탑입니다. 이름은 영광탑인데 원래 이름은 아니고 나중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영광탑은 절에 세운 탑이 아니라 무덤탑입니다. 지하에는 발해식으로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는 봉분 대신 탑을 세운 겁니다.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자기들의 전통적인 장례문화와 불교문화를 결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날 일정을 모두 안내한 뒤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제가 이 정도로 정리 말씀을 드렸고요. 끝난 줄 알았죠? 이제부터 강의입니다. 오늘 저녁에 원래 하기로 한 강의는 고구려 역사예요.(웃음)”
강연장에 대중들의 웃음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스님은 고조선 멸망후 다물사상을 계승하여 동북아 대제국이 된 고구려의 성장 과정과 건국설화, 건국이념, 문화등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이어갔습니다.
오늘 강연은 스님이 역사기행을 시작하게 된 계기부터 북한 동포 돕기로 이어진 과정, 그리고 지금의 역사기행 코스가 만들어진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어 매우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대중들은 저녁 강의를 마치며 큰 박수로 스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습니다.

내일은 동북아역사기행 셋째날입니다. 압록강을 따라 이동하여 발해 시대의 영광탑을 참배한 후, 백두산 천지 아래 마을인 이도백하(二道白河)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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