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6.7.3. 종교인 모임 스리랑카 평화순례 4일째(자푸나, 만쿨람)
“희귀병으로 가족에게 피해를 주느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는 게 맞을까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자푸나에서 힌두사제들과 미팅을 하고 만쿨람에서 구호물품을 배분하였습니다.

스님은 새벽정진과 명상을 마친 뒤, 오전 5시 30분이 되자 아침 산책을 하기 위해 숙소를 나섰습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주변이 깜깜했습니다.

“근처에 자푸나성이 있으니 산책을 가봅시다. 지도를 보니 별모양으로 생긴 특이한 성이에요.”

툭툭을 타고 5분 정도 달리니 성곽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매표소가 아직 문을 열지 않아 성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 외곽을 따라 한 바퀴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성곽을 따라 걷자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습니다.

"일찍 오길 잘했네요. 바람도 시원하고 좋네요. 한낮이었으면 더워서 둘러보기 힘들었을 거예요."

성을 둘러보며 스님이 설명했습니다.

"이 성은 해자가 있고 해자 밖에 또 성을 쌓은 이중 성곽으로 되어 있네요. 이런 이중 성곽은 평지에 성을 쌓을 때 주로 만드는 방식이에요.“

성곽 모퉁이에 이르자 스님이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여기가 대포를 설치했던 자리입니다. 옛날에 포르투갈이 최신 화승총과 대포를 앞세워 캔디 왕국과 전쟁을 벌였는데, 하필 그날 비가 많이 와서 화약이 모두 젖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활을 가진 캔디 왕국 군대에 패했다고 해요."

40~50분 정도 성곽을 따라 천천히 산책을 한 뒤 다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오전 7시 아침식사를 하며 하르샤님과 함께 스리랑카에서의 협력사업에 대해서 의논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협력사업을 어떤 방식으로 추진할지 논의하면서, 얼마 전 스님이 부탄에 다녀온 영상을 함께 보았습니다.

영상을 보며 마을개발은 주민들이 스스로 계획하고 참여하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에 의견을 모았고, 주민들이 길을 포장하거나 농수로·상수도·울타리 설치 등을 직접 추진하면 필요한 자재를 지원하고, 지방정부나 신뢰할 수 있는 NGO가 함께 관리하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또한 한국과 스리랑카 종교인 교류 확대, 그리고 며칠전 이슬람 학교에 가서 보았던 하모니 센터 같은 화해센터 조성 등 다르마샥티에 관한 지원 방안도 의논했습니다.

8시 30분 숙소에서 출발하여 날루르 칸다스와미 사원(Nallur kandaswamy devasthanam)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날루르 칸다스와미 사원은 스리랑카 북부 자푸나(Jaffna)를 대표하는 힌두교 사원으로, 스리랑카 타밀 힌두교 신앙의 중심지입니다. 불교의 성지인 아누라다푸라가 싱할라 불교의 상징이라면, 이곳은 북부 타밀 공동체의 정신적 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종교시설이 아니라 스리랑카 타밀인의 문화와 정체성을 상징하는 장소였습니다.

8시 50분 사원에 도착하였으나 복장에 대해서 엄격한 규칙이 있었습니다. 여자를 제외한 입장객들은 모두 상의를 탈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승려복인 가사는 괜찮으나 다른 종교인분들의 복장으로는 입장이 어렵고, 스님에게도 가사 이외의 상의를 탈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스님 일행은 입장을 하지 못하고, 외부에서 단체사진을 촬영한 뒤 다음 미팅장소로 이동하였습니다.

9시 10분 날라이 수도원(Nallai ThiruGanasambanthar)에서 힌두 지도자들과 미팅을 하였습니다.

수도원의 대행 주지인 아루티루 무루간(Mr. Aruthiru murugan Adeenam) 스와미가 참석자들을 환영하며 인사를 전했습니다.

이어 자푸나 지역의 현실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자푸나는 1983년부터 2009년까지 이어진 스리랑카 내전 당시 타밀족 무장조직 LTTE의 정치·문화적 중심지였으며, 정부군과 LTTE 사이의 치열한 전투가 반복되면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전쟁 기간 정부가 힌두 사원과 성지가 있는 토지를 군과 경찰의 통제 아래 두었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상당수 지역이 계속 통제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사원을 자유롭게 참배하지 못하고, 토지를 활용한 경제활동도 할 수 없어 지역 경제가 크게 침체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박종화 목사님이 스와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처럼 스리랑카에도 카스트가 존재합니까?"

"스리랑카에도 같은 제도가 있지만,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폭력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으며 비교적 평화롭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스님도 물었습니다.

“조금 전 힌두 사원에서 남성이 상의를 벗고 입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전통인가요, 종교적 의미가 있습니까?”

“오랜 전통에 따른 관습입니다. 불교 승려의 가사는 복장은 예외적으로 허용했지만, 일반인은 대통령이나 총리라도 동일하게 상의를 벗어야 할 만큼 엄격하게 전통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싸지 스님이 말했습니다.

"지난 전쟁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떠났습니다. 약 100만 명이 해외로 이주하거나 망명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많은 분들이 1년에 한두 번씩은 고향에 와서 집을 청소하고 손질합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와 살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전에 제가 영국에서 타밀인 3000여 명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 가운데는 '당신들은 자유를 위해 싸우지 않고 해외로 도망간 사람들이다'라는 비난을 듣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진정한 영웅은 지도자도 아니고 종교 지도자도 아닙니다. 집을 잃고 쫓겨나 야자나무 아래에서 살아야 했던 평범한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입니다.' 사실 저는 이 전쟁 과정에서 중재와 화해를 위해 여러 활동을 했기 때문에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장소를 옮겨 또 다른 미팅을 했습니다.

10시 20분에 스님과 일행은 시바구루 아티남(Sivaguru Atheenam)에서 힌두사제들과 미팅을 진행했습니다.

스님이 물었습니다.

“지금 타밀인들이 제일 원하는 게 무엇인가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예를 들면 독립인가요? 자치권의 확보인가요? 아니면 차별 없는 평등권의 보장인가요?”

“우리는 우리의 문화, 종교 전통을 지키고 싶습니다. 자치권을 원합니다.”

“주민투표를 했으면 합니다."

"주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요.”

“군대가 점령하고 있는 사원과 토지를 빨리 돌려 받고 싶습니다.”

대표 힌두사제님은 북부 타밀 주민들은 가장 먼저 평등한 권리와 실질적인 지방자치권을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전쟁도 결국 오랫동안 정치적 권리와 자치권을 보장받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인도-스리랑카 협정을 통해 지방자치가 약속됐지만, 실제로는 경찰권과 토지에 대한 권한이 넘어오지 않아 주민들의 불만이 계속 이어졌다고 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로 꼽은 것은 토지 문제였습니다. 내전 당시 군이 주민들의 사유지와 사원 부지를 장기간 점령하면서 농사를 짓지 못했고, 생계도 함께 무너졌다고 합니다. 최근 들어 일부 토지가 주민들에게 반환되고 도로와 어장이 다시 개방되면서 생활이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사제님은 아싸지 스님에 대한 존경을 표했습니다.

“꼭 소개하고 싶은 분이 있습니다. 아싸지 스님은 30여 년 전 이곳에서 내전이 가장 치열하던 시절, 평화를 위해 가장 먼저 자푸나를 찾은 불교의 지도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자푸나의 타밀 주민들은 일반적으로 불교 스님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전쟁 과정에서 불교계가 정부 편에 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싸지 스님만은 예외입니다. 당시에는 총탄이 날아다니고 폭탄이 터지고 지뢰가 곳곳에 묻혀 있어 누구도 쉽게 이곳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싸지 스님은 직접 자푸나를 찾아와 LTTE 지도자와 정부 관계자, 정치인, 지역 주민들을 두루 만나며 평화를 위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정부나 정치권이 평화협상을 논의하기도 전부터 먼저 현장을 찾아 화해와 대화를 이끌었던 분이 바로 아싸지 스님입니다.”

11시 40분 장소를 이동해 스리랑카 힌두 의회(All Ceylon Hindu Congress)로 이동한 후 힌두 의회에 관한 소개를 들었습니다.

힌두 의회는 스리랑카 전역의 힌두 사원과 사회단체를 아우르는 대표기구로, 자신들은 '힌두'보다 고대 사이바(Saiva)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시바신을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믿으며, 사랑과 평화, 번영을 실천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라고 했습니다. 사이바 전통은 모든 종교와 신앙을 존중하는 것을 중요한 가르침으로 삼고 있으며, 사람마다 문화와 전통은 달라도 결국 하나의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힌두 의회는 사제들만의 조직이 아니라 전국의 힌두 사원과 다양한 사회단체가 함께하는 연합기구로서 종교와 사회를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잠시 힌두 의식으로 기도를 한 후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만쿨람으로 이동하기 위해 차량에 탑승하였습니다.

오후 2시경 만쿨람 선한목자회(Good Shepherd)에 도착하였습니다.

스님은 이번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다르마샥띠 측에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한국의 종교인들이 스리랑카를 방문하는 만큼, 단순히 만나고 대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려운 이웃을 함께 돕는 의미 있는 활동도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선한목자회(Good Shepherd) 수녀님들이 내전 피해 지역을 직접 찾아가 가정을 일일이 방문하며 생활 실태를 조사했습니다. 각 가정에 꼭 필요한 생필품을 확인하고 배분 계획을 세웠으며, 구호물품 준비와 배분까지 해주었습니다.

선한목자회는 가톨릭 여성 수도회로, 스리랑카에는 1869년부터 활동해 왔습니다. 여성과 아동 보호를 비롯해 빈곤층과 사회적 약자를 지원하고, 교육과 직업훈련, 미혼모와 가정폭력 피해자, 인신매매 피해자 보호, 교정시설 사목과 상담 등 다양한 사회복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오늘 배분을 진행할 만쿨람(Mankulam)은 스리랑카 내전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 가운데 하나라고 했습니다. 오랜 전쟁의 상처가 지금도 주민들의 삶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한쪽 눈을 다친 사람, 목발에 의지해 걷는 사람, 팔을 잃은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내전 당시 남부에서 살던 많은 타밀 주민들이 가진 것 없이 북쪽으로 피난을 와서 대부분의 가정이 전쟁으로 가족을 잃었고,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활 기반을 충분히 회복하지 못한 채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후 2시 30분부터 스님과 종교인들은 만쿨람의 300가구에 구호품을 배분했습니다. 총 10가지 품목(쌀, 밀가루, 설탕, 소금, 콩고기, 병아리콩, 달, 건고추, 홍차, 성냥 2개)을 배분 했습니다.

스님은 쌀을 배분하고, 목사님, 교령님, 교무님, 신부님 모두 각각 한 종류씩을 맡아 구호품을 배분했습니다.

300가구 모두에게 물품을 배분하고 나니 50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종교인분들이 한마디씩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보람된 일이었어요. 나눔을 함께한다는 것보다 행복한 일은 없어요. 스리랑카 와서 이렇게 행복한 경험을 해봅니다.”

“행복한 고생 속에서 꽃이 피어납니다.”

“나눔은 모두에게 은혜를 주고, 자비를 주고, 사랑을 줍니다.”

“오늘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도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아싸지 스님도 한마디 나누었습니다.

“프로그램이 잘 준비되었네요. 배분이라는 게 어려운 일인데 종교인분들이 함께해주셔서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스님과 종교인분들은 수녀님들이 준비해준 바나나와 차를 마시며 잠시 휴식하였습니다.

오후 3시 40분이 되자 오늘의 숙소가 있는 담불라로 이동하기 위해 모두 차량에 탑승하였습니다.

오후 7시 30분 이틀전에 묵었던 담불라 숙소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스님은 식사 후 원고를 수정하고 휴식하였습니다.

내일은 콜롬보로 이동하여 가톨릭 등 기독교 지도자들과 회의를 하고 다르마샥티와 한국 종교인들과의 회의를 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어 지난 4월에 있었던 즉문즉설을 소개합니다.

희귀병으로 가족에게 피해를 주느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는 게 맞을까요?

“저는 장애가 있는 사람입니다. 고칠 수 없는 희귀 난치병을 앓고 있는데요. 제 병으로 인해 가족과 부모님께 큰 피해를 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살기가 싫습니다.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요?”

“어머니와 가족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내가 살아서 엄마한테 피해를 주는 게 더 커요, 아니면 내가 죽어서 엄마한테 피해를 주는 게 더 커요?’ 하고 물어보세요. 그러면 어머니가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살아 있으라고 하시겠죠.”

“그렇다면 질문자는 지금도 어머니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더 큰 피해를 주고 싶다는 이야기인가요? 지금은 피해를 덜 주고 있으니, 죽어서 확실하게 더 큰 피해를 주고 싶다는 뜻인가요? 심보가 고약하네요.”

“남편과 딸이 저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아서요.”

“어떤 상처를 받았다는 건가요?”

“저 때문에 안 들어도 될 욕을 남에게 듣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남편에게도 물어보세요. ‘내가 죽는 게 당신에게 편한가요, 아니면 내가 짐이 되더라도 살아 있는 게 더 나은가요?’ 하고 물어보세요. 질문자 마음대로 결정하지 말고, 상대에게 물어보고 결정하세요. 만약 ‘죽어버리는 게 낫다.’라고 한다면, 그때는 죽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질문자는 지금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고 말하고 있으니,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어 제가 다리를 다쳐서 휠체어를 타고 이동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휠체어를 밀어 주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제가 그들에게 신세를 지는 것은 맞습니다. 그럴 때 저는 이렇게 물어볼 겁니다. ‘이렇게 신세를 지는 게 나은가요, 아니면 제가 없는 게 나은가요?’ 그랬을 때 상대방은, 조금 힘들더라도 제가 살아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겁니다. 질문자가 만약 죽는다면, 살아 있을 때보다 가족에게 더 큰 피해를 주게 됩니다. 가족에게 더 큰 피해를 주고 싶어요?”

“아니요.”

“그런데 지금 피해를 주고 싶다고 말하고 있잖아요. ‘내가 죽어서 너희 가슴에 못을 박아놓고 가야지.’ 하는 식의 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집안에 누군가 자살을 하면 가족들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그러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살 수 있을 때까지 살다가 죽으면 됩니다. 질문자가 일부러 안 죽어도 언젠가는 죽게 되지 않겠습니까?”

“죽기는 할 텐데, 좀 더 빨리 죽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어차피 죽을 건데, 빨리 죽어서 뭐하겠어요? 자연스럽게 죽으면 가족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가족에게 큰 피해를 주게 됩니다. 마음이 왜 그렇게 못됐어요? 어떻게 내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떠날 생각을 그렇게 계속해요? 물론 죽으면 본인은 편할 수도 있겠죠. 그 점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본인 좋자고 가족에게 피해를 주면 되겠습니까? 내가 살아서 가족에게 주는 피해보다 내가 죽었을 때 주는 피해가 훨씬 더 큽니다. 그렇다면 피해를 적게 주는 것이 나을까요, 더 크게 주는 것이 나을까요?”

“적게 주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연히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6 여름명상

전체댓글 6

0/200

무위성

종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는 스님의 활동에 감사드립니다.

2026-07-06 08:16:29

최상훈

고맙습니다.

2026-07-06 08:10:18

정태식

“‘이렇게 신세를 지는 게 나은가요, 아니면 제가 없는 게 나은가요?’
그랬을 때 상대방은, 조금 힘들더라도 제가 살아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겁니다.
질문자가 만약 죽는다면, 살아 있을 때보다 가족에게 더 큰 피해를 주게 됩니다.”
----------
신체적 결함이 불편하기는 해도 스스로 죽을 만큼 불편한 것은 아닙니다.

2026-07-06 07:26:28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