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6. 06. 22. 용성조사 탄신일 기념 법회, 상무대 강연
“용성진종조사는 대한민국을 세운 공로자 중 한 사람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장수 죽림정사에서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근대 불교의 중흥조이신 용성조사님의 탄생 162주기 기념 법회와 상무대에서의 강연이 있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수행과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념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 5시 30분 두북수련원을 출발했습니다. 여름이지만 날씨가 흐리고 쌀쌀했습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스님이 말했습니다.

“샛날이라고 들어봤나요? 여름인데 모내기할 때 겨울같이 느껴지는 날을 샛날이라고 했어요. 오늘이 샛날이네요.”

어느덧 죽림정사에 도착하였습니다. 스님은 잠시 앉아 오늘 진행할 프로그램에 대해서 사전 검토를 하고, 정토회 공동체에 출가한 행자님의 부모님이 스님에게 인사를 드리러 찾아와 스님은 잠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딸을 애지중지 키웠는데 절에 들어가 버려서 섭섭했겠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니 지켜볼 수밖에 없죠. (웃음)”

“우리 모두가 겪었던 일이에요. 저는 고등학교 때 절에 들어와서 우리 어머니가 울고불고 많이 섭섭해하셨어요.”

스님은 행자님의 부모님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8시 50분 역대 전등 조사들을 기리는 다례제에 참석했습니다.

9시 20분 다례제를 마치고 기념법회에 참석한 내빈들과 잠시 차담을 나눴습니다. 장수군수 최훈식 님, 울산시의원 임채오 님 등이 스님에게 인사를 하러 왔습니다.

10시 용성조사 탄신일 기념 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350여 명의 대중이 참석했습니다. 행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대중은 삼귀의, 반야심경 봉독을 하고, 국민의례, 묵념을 올렸습니다.

다음으로는 청년지부 활동가 두 명이 용성진성조사의 행장을 낭독했습니다.

이어 유수스님의 내빈 소개 후 장수군수 최훈식 님의 기념 축사가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 백용성 조사님 탄신 162주년 다례법회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우리 지역을 방문해 주신 정토회원님들을 환영합니다. 제가 용성조사님 탄신 기념일 법회에 네 번째 오는데 사람은 알면 알수록 가까이할수록 좋은 사람인 걸 느끼는데 그중에 한 분이 용성조사님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지역에서 용성조사님이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고, 제가 장수에서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용성조사님 일대기를 보며 이분이 한국불교가 가고자 했던 길을 걸어오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자기를 희생하며 독립운동을 하셨고, 한국불교가 바르게 나가길 진정으로 원하고 실천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경남지부 회원들이 백용성조사기념관 개관과 용성조사 탄신일을 기념하고, 용성조사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고, 3.1운동의 배경과 과정을 용성조사의 발자취를 중심으로 구성한 낭독극을 시작했습니다.

쩌렁쩌렁한 발성으로 박진감 있게 진행이 되는 낭독극에 청중들도 몰입이 되어 지켜봤습니다. 마지막에는 대중이 다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외치기도 했습니다.

“대한독립 만세!”

낭독극이 끝나고 스님과 대중은 ‘온 겨레의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이어서 대중들은 스님께 청법가와 삼배로 용성조사 탄신일 특별 법문을 청했습니다.

용성 조사, 시대를 깨우다

“오늘은 석가여래부촉법 제68세 용성 진종 조사님께서 탄생하신 지 162주년 되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용성 조사님의 탄생을 기념하며, 부처님으로부터 용성 조사님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부처님의 법을 이어오신 역대 예순여덟 조사님들께 공양을 올리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한 오늘은 용성 조사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되새기며 앞으로 우리가 그 뜻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함께 생각하고 다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백성이 나라의 주인인 새로운 세상

오늘 우리는 용성 조사님께서 태어나신 지 162년이 지난 지금, 그 시대를 다시 돌아보고 있습니다. 용성 조사님께서 태어나신 1864년은 어떤 해였을까요? 예로부터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사람들은 인류 역사를 선천 시대와 후천 시대로 나누어 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세상은 선천 시대이고,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세상은 후천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무엇일까요? 선천 시대는 임금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시대이고, 후천 시대는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시대라는 거예요. 당시에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혹세무민한다고 하여 처형되거나 탄압받았습니다.

1860년,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 ‘사람이 곧 하늘님이다’라는 큰 깨달음을 얻으셨어요. 선천 시대에는 하늘님이 세상의 주인이었고, 왕은 하늘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아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왕을 하늘님의 아들, 즉 천자(天子)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모든 사람이 곧 하늘님이라면 어떨까요? 임금만 하늘님의 아들이 아니고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하늘님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엄청난 선언이었습니다.

이 말은 결국 백성이 곧 나라의 주인이라는 뜻이지요. 최제우 대신사께서 이런 주장을 했으니 당연히 잡혀갔겠죠. 처음에는 그 주장이 아직 충분히 체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곧 풀려났습니다. 이후에 경주를 떠나서 남원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남원 용천사의 조실이었던 혜월 화상께서 최제우 대신사를 숨겨주었습니다. 최제우 대신사는 교룡산성 중턱의 덕밀암이라는 암자의 조실채인 은적당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자신의 사상을 글로 정리했습니다. 동학의 중요한 사상이 그 시기에 집필된 것입니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후천 세계를 여는 데 겉으로 드러난 인물은 최제우 대신사지만, 실제로 그 사상을 정립할 수 있도록 후원해 준 사람은 혜월 화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상은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세상에 전파되기가 어려웠어요. 최제우 대신사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채 다시 경주로 돌아가 법을 펼쳤습니다.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고, 결국 체포되어 1864년에 순교하게 됩니다. 바로 그 해 용성 조사님이 태어나셨습니다. 용성 조사님이 열네 살이 되었을 때, 최제우 대신사를 숨겨주었던 혜월 화상을 찾아가 그곳에서 공부를 했어요. 겉으로 보면 불교만 공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스승이 어떤 분이었습니까? 후천 개벽을 꿈꾸던 사람을 목숨 걸고 후원했던 분이니 그 영향을 받았겠지요.

수행으로 세운 마음의 중심

그러나 스승은 먼저 자기 마음을 깨달아 입지(立志), 즉 마음의 중심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그래야 아무리 어려운 세상이라도 흔들림 없이 꾸준히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때의 열정으로 세상일에 뛰어들었다가 중간에 포기하면 자신도 힘들고, 함께했던 사람들에게도 큰 실망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먼저 수행으로 마음의 중심을 세우도록 한 것입니다.

혜월 화상은 최제우 대신사를 숨겨준 일로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승려 자격을 박탈당했고 사실상 가택연금을 당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되었어요. 당시 본사(本寺)였던 실상사를 오가는 것만 허용되었습니다. 덕밀암에서 실상사까지 가는 길에는 운봉을 거치게 되는데, 그때마다 하루 묵어가던 만석꾼 집의 주인이 바로 임동수 거사였습니다. 죽림정사를 창건하신 불심 도문 큰스님은 법맥으로는 용성 조사님의 손제자(孫弟子)이면서, 가문으로는 임동수 거사의 증손자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스승과 제자의 인연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용성 조사님을 평생 후원하며 막대한 재산을 독립운동과 불교를 새롭게 하는 일에 아낌없이 바쳤던 그 집안의 증손자가 바로 불심 도문 큰스님인 것입니다.

용성 조사님의 위대한 업적은 일제강점기의 탄압으로 제대로 꽃피우지 못했습니다. 나라가 독립한 뒤에는 그 유업이 다시 이어져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제자들이 대부분 친일의 길을 걸으면서 불교계 안에서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불심 도문 큰스님의 원력으로 용성조사님의 공적이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용성 조사님의 사상에는 단순히 불교사상만 담겨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사상과 우리 민족의 역사관, 그리고 백성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개벽 사상이 함께 담겨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용성 조사님은 이렇게 청년 시절을 수행에 전념하며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세상은 서세동점(西勢東漸), 즉 서양 세력이 우리나라에 밀고 들어와서 온갖 이권을 차지하던 시대였습니다. 또 조선을 둘러싸고 일본과 중국이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동학혁명이 일어나 수십만 명이 학살당하는 대혼란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시대에도 용성 조사님은 깊은 산중에서 수행에만 전념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1910년에 국권을 상실했지만, 실질적으로는 1905년에 이미 나라를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자 용성조사님께서 비로소 세상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독립운동을 향한 첫걸음

용성 조사님이 가장 먼저 하신 일은 훗날 임시정부가 세워질 기반을 준비하신 일이었습니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으니, 해외에 임시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셨고, 이를 위해 성지순례를 떠나는 것처럼 위장하여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에 거점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1907년의 일입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나던 바로 그때였습니다. 고종황제가 계속해서 비공식적으로 ‘우리는 일본의 지배에 합의한 바가 없다’라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자,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그 아들 순종을 내세웠습니다. 이후 1910년에 강압적으로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조선은 1905년에 외교권을 상실했고, 1910년에는 국권마저 상실하게 된 것이죠.

그러자 용성 조사는 1911년 서울 근교에 대성초당을 짓고, 봉익동 1번지에 민가를 얻어 대각사라는 절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활동에 필요한 재정적 지원은 전라도의 만석꾼이었던 임동수 거사와 그 주변 친척들의 보이지 않는 후원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이 후원은 독립운동 내내 이어졌어요. 그래서 용성 조사의 재정적 기반에는 운봉의 만석꾼들과 순종비, 그리고 궁중 상궁들의 지원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용성 조사께서는 1912년부터 1918년까지 전국을 다니며 나라의 독립을 이끌 사람을 찾아다녔지만 끝내 마땅한 인물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1918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손병희 선생을 만나 의논하게 됩니다. 손병희 선생은 최제우·최시형 선생의 제자였고, 용성 스님은 혜월 화상의 제자였으니 두 분은 금세 의기투합할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것 같지만 사상적인 맥을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3·1운동의 숨은 주역

천도교는 이미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용성 조사께서는 ‘천도교 단독으로 독립운동을 하면 천도교 독립운동이 되니, 다른 종교와 연대함으로써 민족독립운동이 되어야 한다’라며 연대를 제안하셨습니다. 그래서 3·1운동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 이렇게 세 종교가 함께한 것처럼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천도교가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비용도 대부분 천도교가 부담했고, 기독교의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해 당시 수천 원에 이르는 거금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측과 연대하는 과정에서는 불교의 한용운 선생과 천도교의 최린 선생이 기독교의 이승훈 선생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결과 3·1운동 이후 천도교는 종단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정도로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반면에 불교는 용성 스님과 한용운 스님을 중심으로 개인이 참여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피해가 제한적이었습니다. 당시 불교계 주류는 일제에 협조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종단 차원의 탄압은 없었습니다. 기독교도 교단 전체가 아니라 일부 지도자와 교회를 중심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교단 차원의 큰 피해가 없었습니다. 천주교는 아예 참여하지 않아서 피해가 없었죠. 천도교는 동학혁명 때도 큰 피해를 입었고, 3·1운동 때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후 어렵게 명맥을 이어오다가 남북이 분단되면서 또다시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당시 천도교 신도가 200만 명에서 300만 명에 이르렀던 반면, 개신교 신도는 그 10분의 1 수준인 20만 명 정도였습니다. 다만 개신교는 학교를 지어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3·1운동을 전파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제가 지금 독립운동사 자체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 것만 보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배후의 중심에는 용성 스님과 손병희 선생이 있었습니다.

실패처럼 보였던 위대한 씨앗

오늘날 민주화운동 과정에서도 결과적으로는 학생회장처럼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운동을 주도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배후 조직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니겠어요. 하물며 적발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어떻게 명백한 증거를 남겨 둘 수 있었겠습니까. 용성 스님이 살았던 시기는 태어나실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힘겨운 시대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이 생전에 시도하셨던 많은 일이 당시에는 모두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라의 독립운동도 당대에는 뜻을 이루지 못했고, 불교 개혁운동도 실패한 것처럼 보였어요. 그러나 바로 그 실패가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할 수 있었고, 그분이 뿌린 씨앗에 기초해서 오늘날 불교를 대중화하는 정토회 운동도 이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불교의 지성화를 꿈꾸다

불심 도문 스님께서는 용성 조사님의 평생 업적을 세 가지로 정리하셨습니다. 바로 불교의 지성화, 불교의 대중화,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첫째, 불교의 지성화란 무엇일까요? 조선 왕조 500여 년 동안 불교는 국가의 억불 정책 속에서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습니다. 출가한 스님들을 천민으로 강등시켜 버렸어요. 마치 종을 부르듯이 중놈이라고 부르며 사회적으로 천대했습니다. 출가하면 종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젊은 남성들이 출가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불교는 사회적 리더십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어요. 그래도 신심이 있어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주로 사회적으로 출세할 기회가 거의 없는 여성들이나, 평민 이하의 사람들이 절에 다녔어요. 그런데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글을 알지 못했습니다. 불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불교를 믿다 보니,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께 복을 비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복을 비는 모습만 놓고 보면 산신이나 용왕에게 비나, 부처님께 비나 겉으로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을 거예요. 그러다 보니 불교가 점차 민간 신앙과 구분되지 않게 되었고, 유교 사회에서는 불교를 미신 수준으로 낮게 평가했습니다. 이후 새로 들어온 기독교도 불교를 미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처럼 세상은 불교가 지닌 고귀한 사상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용성 조사께서는 『귀원정종(歸源正宗)』, 『각해일륜(覺海一輪)』 등을 저술하시며, 불교가 단순히 복을 비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되는 위대한 가르침이며 내 마음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지혜를 증득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지성화입니다. 불교는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는 가르침입니다. 수행의 방법에는 참선도 있고 염불도 있고 주력도 있고 강경도 있고 불사도 있습니다. 그래서 용성 조사께서 불교 5대 수행을 제창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은 오늘날 중생들이 겪는 수많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위대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밝히셨습니다.

모두에게 열린 불교, 불교의 대중화

둘째, 불교의 대중화입니다. 당시 불경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었는데, 대중들은 한자를 몰랐습니다. 그러니 불법이 아무리 좋아도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한글은 쉽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용성 조사께서는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셨습니다. 그래서 여성도, 일반인도, 출가하지 않은 사람도 부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법에 귀의하고 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후 세조 때 불경이 대대적으로 한글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 용성 조사께서 다시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대중에게 널리 보급하셨습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하는 삼귀의나 반야심경 같은 의식도 모두 한글로 바꾸고, 의식 절차도 더 간결하게 정리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불교의 대중화라고 합니다.

또 당시에는 남성 중심 사회여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했는데, 용성 조사께서는 부녀 선방을 만드셨습니다. 어린이 불교 학교도 세우셨고, 법당에는 풍금을 들여와서 찬불가를 함께 부르게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어디에서 영향받았을까요? 3·1 운동을 함께 하면서 목사님을 비롯한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교류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좋은 점은 불교에도 적극 받아들였습니다. 소수의 승려만 법을 아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부처님 법을 배우고 이해하며 수행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세상으로 들어간 불교, 불교의 생활화

세 번째는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왜 생활화라는 말이 나왔을까요? 조선 시대에는 억불 정책으로 도성 안에 있던 사찰들을 모두 없애고, 깊은 산속의 사찰들만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서울 사대문 안에 용성 스님이 처음으로 민가를 사들여 세운 절이 바로 대각사입니다. 당시 승려들은 도성 출입에도 제약받았을 만큼 사회적으로 큰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불교가 오랫동안 탄압을 받아왔던 것이죠. 그러다 보니 승려가 된다는 것은 곧 세속을 떠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마치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생각되었고, 불교 역시 세속을 떠난 은둔의 종교라는 이미지가 오랫동안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달랐습니다. 사찰들이 모두 왕궁 가까운 도심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경주나 개성에 가보면 절들이 모두 도시 중심에 있잖아요. 국사와 왕사 같은 최고 지도자도 승려가 맡았어요. 당시 승려들은 사회를 이끄는 중요한 지도층이었습니다.

불교는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고 세상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참여해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나라의 독립이었어요. 2천만 백성이 모두 일제의 억압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데 그 문제를 외면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당시 불교계의 주류는 일제의 통치에 협조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조선 왕조 5백 년 동안 불교가 극심한 탄압을 받아왔는데, 일제가 들어오면서 승려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이전보다 나아졌기 때문입니다. 주지가 되면 사회적 지위도 높아졌고 일본 유학의 기회도 주어졌습니다. 또 일본식 불교 제도에 따라 승려의 결혼도 허용되었어요. 그러니 당시 일부 승려들에게는 일본의 정책이 불교 발전에서 오히려 유리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용성 스님은 승려의 결혼을 반대했고, 절에서 육식하는 것도 반대했습니다. 다시 말해 승려의 대처육식(帶妻肉食)을 반대하며 조선 불교를 일본 불교식으로 바꾸려는 정책에 끝까지 맞섰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저항했을 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불교를 우대하는 것처럼 하면서 실제로는 조선 불교를 일본식으로 변질시키려는 정책에도 반대했던 것입니다. 다만 계율이 있어서 승려가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울 수는 없었기에 주로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역할을 하신 거예요.

3·1 운동은 1919년 3월에 일어났고, 같은 해 4월에는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청사까지 마련되었어요. 그 돈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이 점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승만이 돈을 냈다고도 하는데 당시 이승만이 언제 모금을 해서 그 많은 돈을 마련할 수 있었겠어요? 훗날 미국에서 모금한 자금을 가져온 일은 있습니다만, 그 이전에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용성 스님이 전라도 만석꾼들의 돈을 미리 상해에 보내 두고, 그것을 바탕으로 꾸준히 지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후원했기 때문에 김구 선생이 귀국하자마자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상해 임시정부 요원들과 함께 손병희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그다음으로 대각사를 찾았습니다. 당시 찍은 사진도 지금 남아 있어요. 그 자리에서 ‘용성 스님께서 지원해 주신 덕분에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생활화란 단순히 밥을 먹기 전에 합장하는 것이 생활화가 아니라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데 불교가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환경운동이나 평화운동이 있겠죠. 또 여성에 대한 차별이 있다면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사회의 문제를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해결해 나가는 것이 바로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대각교를 세우고 새로운 불교를 열다

그런데 당시 기존의 불교 종단은 대부분 일제에 협조했습니다. 반면에 용성 스님은 협조하지 않았고 일부 제자들 역시 끝까지 그 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3·1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용성 스님이 서울 종로구 봉익동 1번지에 대각사를 세우고 3·1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감옥에 다녀오자, 일제는 제자들에게 압력을 가해서 결국 절을 팔게 하고 그 돈을 나누어 가진 뒤 모두 흩어지도록 만들었어요. 용성 스님은 다시 봉익동 3번지에 터를 마련해서 이번에는 대각사가 아니라 대각교를 세웠습니다. 왜 이름을 바꾸었을까요? 당시에는 불교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안 좋았기 때문이에요. 불교의 불(佛)자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인 인도의 ‘붓다(Buddha)’에서 온 말입니다. 그것을 우리말로 풀면 ‘크게 깨달음’, 곧 ‘대각(大覺)’이에요. 그래서 불교라는 이름 대신 대각교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곳에서 어린이 불교 학교를 열고,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고, 의식을 바꾸는 다양한 혁신 운동을 펼쳤습니다. 대각교에서 불교를 공부한 사람들은 대부분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계를 받은 뒤에는 윤봉길 의사처럼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입니다. 일제는 대각교를 유사 종교, 지금으로 말하면 사이비 종교로 규정해 폐쇄하고 결국 해산시켜 버렸습니다.

용성 스님은 1940년에 입적하셨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입니다. 입적하실 무렵에는 마지막으로 머무를 곳조차 마땅치 않았어요. 위대한 스승이셨고, 제자들 가운데에는 해인사와 범어사를 비롯한 여러 큰 사찰의 주지를 맡은 이들도 많았지만, 어떤 절도 용성 스님을 모시려 하지 않았습니다. 용성스님을 모셨다가 일본의 탄압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죠. 범어사에서도, 해인사에서도, 화엄사에서도 머무를 곳을 구하지 못하셨고, 결국 서울 종로구 봉익동의 작은 대각사에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용성 조사님은 실패하셨을까요, 성공하셨을까요? 당대만 놓고 보면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3·1운동은 성공한 운동일까요, 실패한 운동일까요? 역시 당대에는 실패했어요.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3·1운동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3 ·1운동은 당시에는 비록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우리 민족이 스스로 독립 의지를 외쳤던 역사적인 운동이었습니다. 3·1운동이 있었기에 우리의 힘으로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나라입니다. 실질적인 정부 수립이 1948년에 이루어진 것은 맞을지라도, 그 시작은 3·1운동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습니다. 이 내용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도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그런데 헌법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고, 특정 지역이나 정치적 성향의 문제도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 규정한 헌법의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 어떻게 이념 문제이고 지역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용성 진종 조사는 대한민국을 세운 공로자 중 한 사람입니다

3·1운동 당시 대부분의 사람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지 않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때 사람들에게 우리나라는 여전히 조선이었기 때문이죠.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항복하면서 조선은 형식적으로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면서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받았습니다. 이에 고종은 조선이 더 이상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고자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일본, 청나라, 서구 열강 사이에서 힘이 약했던 조선은 완전한 독립국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3·1운동 당시에도 사람들은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고, 3·1운동 선언문에도 ‘조선 독립선언서’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비록 3·1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더 이상 임금이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나라, 대한민국을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하게 만든 3·1운동의 중요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바로 용성 진종 조사입니다.

어려운 시기에도 미래를 꿈꾸다

국호가 대한민국이 되고, 국기가 태극기가 되는 일은 당시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꾸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50년 전만 해도 우리는 미국에 가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계의 많은 사람이 대한민국을 방문하기를 꿈꿉니다. 100년 전 그 시대의 사람들이 오늘날 한류가 세계를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어요? 우리는 지금 이러한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분단되어 있고 전쟁의 위험도 안고 있습니다. 강한 국력에 비해 군사적 주권이나 외교권 등 많은 부분에서는 제한된 자주권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렇게 발전했다는 자랑스러움은 있지만, 완전한 독립을 이룬 상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멈추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백용성 조사님의 탄생 162주년을 기념하며, 단지 훌륭한 스님으로만 기리는 것보다 그 어려운 시대에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지금, 그 꿈이 조금씩 실현되어 가고 있음을 되새겨 보았으면 합니다.

갈등을 넘어서 다시 한번 전진하는 꿈을

우리는 아직 미완의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선조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하늘과 땅에서 지켜보는 선조들이 ‘나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구나’, ‘나의 죽음이 조금도 후회되지 않구나’ 하고 말씀하실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날 세계는 다시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새로운 격변의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국내의 정치적 갈등을 넘어, 힘을 하나로 모아 더욱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용성 조사님 탄생 162주년을 맞아 그 뜻을 함께 되새기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한 꿈을 다시 한번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이 자리를 함께해 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탄신일 기념 법회 1부를 마치고 스님은 이어서 정토회원들과의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총 7명의 질문자가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말씀을 체득하고 싶습니다.
  • 저는 일 욕심이 많고 다 해낼 수 있다는 교만한 생각이 있습니다.
  • 알코올중독 남편, 무기력 비만 상태의 딸, 자폐아들이 있는 가정생활로부터 직장은 도피처였습니다. 은퇴 후 어떤 관점으로 살아야 할까요?
  • 남편이 자신의 감정에 따라 저를 함부로 대합니다. 그럴 때마다 모멸감과 피로도가 겹쳐서 감정 조절이 잘 안됩니다.
  • 인연을 따르는 삶과 욕구를 따르는 삶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 시어머니와 10년 계속 떨어져 지냈지만 아직도 비슷한 성향의 사람을 보면 주눅이 들고 긴장됩니다.
  • 우리 모둠에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7명과의 즉문즉설이 모두 끝난 후, 스님과 대중들은 모두 다 함께 외치며 단체 사진을 찍으며 오늘 기념 법회 일정을 마쳤습니다.

“내가 세상의 희망입니다.”

스님은 죽림정사에서 봉사자들이 준비해 준 음식으로 점심 공양을 하고, 서둘러 다음 일정인 상무대에서의 강연을 위해 전남 장성군으로 이동했습니다.

상무대는 대한민국 육군의 주요 교육·훈련 시설이 모여 있는 군사 교육 단지입니다. 군종 법사님의 강연 요청으로 강연하게 되었습니다. 상무대에 도착해 출입 절차를 밟고 경내로 이동했습니다. 강연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해 상무대에 있는 절인 무각사 대웅전을 참배했습니다. 절은 상무대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있었습니다.

스님은 참배를 마치고 강당인 동춘관으로 이동하였습니다. 500여 명의 청중들이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영상으로 스님이 먼저 소개되었습니다. 영상이 마친 뒤 스님이 청중들의 박수와 함께 무대로 올랐습니다.

총 8명의 질문자가 스님에게 질문하고 스님은 법문을 했습니다.

  • 최근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어 그 사람을 피해 다니고 있습니다.
  • 3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요양병원 들어가신 지 일주일 만에 병세가 악화했습니다. 병원에 보내는 걸 찬성한 저는 죄책감이 듭니다.
  • 개인사와 업무 스트레스로 전역 지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전역을 해야 할까요
  • 수도권에서 살다가 장성에 정착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이의 교육 환경이 많이 달라져 우리 아이만 뒤처지는듯한 조바심이 듭니다.
  • 학교 내 일부 과장님들과 관계가 좋지 않아 마주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이 편해지고 그분들을 볼 때도 자연스러워질까요?
  • 결혼 준비와 직장, 공부를 병행하면서 늘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큽니다. 열심히 사는 것과 집착의 차이는 무엇이고, 마음을 가볍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성적을 맞춰서 지금 다니는 학과를 결정했는데 이 길로 가는 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어렸을 적 부모님과의 관계가 많이 서먹했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고 철이 들어서 이제 부모님께 잘해드리고 싶은데 부모님께서 낯설어할까 봐 고민입니다

스님이 앉아 있던 무대에는 스피커가 없어 스님이 질문자들의 질문이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에 스님은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양해를 구하고 질문자들에게 소리를 좀 더 크게 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스님은 질문자들의 질문을 귀 기울여 들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습니다.

8명의 질문자 중 부모님과 서먹한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는 질문에 대한 스님의 법문을 소개합니다.

“소통을 잘한다고 하는 것은 상대가 내 말을 잘 들어줄 때일까요? 내가 상대의 말을 잘 들어줄 때일까요? 소통이 잘 된다는 것은 내가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는 거예요. 부모님과의 대화는 내가 부모님에게 이야길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중요해요. 부모님의 고민, 나에 대한 기대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예요. 거기에 답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아 그러세요. 아 그러세요.’하고 호응만 하면 됩니다. 부모님이 나에게 갖는 기대에 대해서 내가 미치지 못할 때 ‘죄송합니다’라고 하면 돼요. 뭐라고 해도 ‘알겠습니다’ 하면 돼요. 설득을 하려고 할 필요가 없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면 ‘죄송합니다’라고 하면 됩니다. 그럼, 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자꾸 내 생각으로 부모를 설득하고, 부모를 바꾸려고 하니까 갈등이 생기는 거예요. 부모님은 나보다 똑똑합니다. 나는 장가도 못 갔는데 우리 부모님은 시집 장가가서 나를 낳아 키웠으니 나보다 능력이 있고 경험이 많아요. 그런 부모를 설득하려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에요. 다만 그들의 입장을 들어주는 게 중요합니다. 그들이 하라는 대로 다 하라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부모님의 노예일 뿐이에요. 부모님의 입장을 이해하고 ‘아 그러시구나. 이런 걱정을 하시네. 이런 기대를 하시네’ 하고 다만 아는 거예요. 부모님 입장은 그럴 수 있겠구나하고 ‘알겠습니다’, ‘네 고려해 보겠습니다’ 하고 지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 어른들과 소통이 됩니다. 의견충돌할 필요가 없어요.

옛날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부모가 자녀에게 소를 지붕에 올리라 하면 말도 안 된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일단 소를 몰고 와서 지붕 밑에 놓고서는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물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그 이상은 할 수 없으니, 부모님께 물어야 합니다. 그럼, 부모님이 소를 마구간에 갖다 놓으라고 합니다. 이렇듯 꼭 부모가 말하는 걸 다 해야 할 의무는 없어요. 핵심은 대화입니다. 그리고 들어주는 것, 이해하는 것이에요. 그걸 다 해결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해결할 수밖에 없어요. 작은 벌레도 자기가 스스로 살지요. 다람쥐도 자기가 살지요. 사람은 다람쥐보다 나은데 못 살겠어요? 이렇듯 남을 불쌍히 여길 필요가 없어요.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부모가 죽으면 자녀가 못 살 것 같고 자녀가 죽으면 부모가 못살 것 같지만 다 살게 되어 있어요.

작은 일부터 부부지간에 형제지간에 내 말을 하기 전에 들어주세요. 이해해달라고 하기 전에 이해해 주세요. 해결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렇게만 해도 우리는 훨씬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 수 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강연을 마치고 스님 책의 사인회를 하였습니다. 참가 대중들은 본인이 소장한 스님 책을 들고 무대로 올라와 스님에게 사인을 받았습니다. 사인회를 마치고 강당 건물을 나서니, 전남 지역의 정토회원들이 스님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 모여있었습니다. 스님은 잠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오후 6시가 다 되어 무각사 요사에서 군종 법사, 기계화학교장, 상무대 근무지원단장, 금강회장, 금강회 총무 사무관과 함께 차담을 했습니다

군종 법사님이 20년 전 스님이 상무대에서 법문했던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사진첩에 오래된 사진이 깨끗하게 잘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군종 법사님이 부탄 사업에 관한 질문을 해서 부탄 사업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 현재 부탄 사업의 진행 상황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스님의 책을 선물하며 차담을 마치고는 차에 올랐습니다. 10시에 두북수련원에 도착해서 스님은 휴식을 했습니다.

내일 스님은 병원 진료를 받고, 청주에서의 행복한 대화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7

0/200

구자정

고맙습니다.

2026-06-25 07:18:55

정태식

비록 3·1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더 이상 임금이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나라, 대한민국을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하게 만든 3·1운동의 중요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바로 용성 진종 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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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부흥과 대한민국 수립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습니다.

2026-06-25 07:11:21

지명화

고맙습니다

2026-06-25 07: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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