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6. 5. 17. 워싱턴 미주정토회관 명상홀 개원식(1부), 정토회원 즉문즉설(2부)
“수행의 핵심은 자각입니다. 스스로 알아차릴 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오전에는 워싱턴 미주정토회관 명상홀 개원식이 있고, 오후에는 정토회원들과 즉문즉설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명상홀 개원식 준비로 여러 정토행자들이 미주정토회관을 방문했고, 숙박하며 개원식 준비를 했습니다. 법당에 방석이 꽉 찰 정도로 많은 정토행자들과 함께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했습니다.

스님은 아침 식사를 대중들보다 먼저 하고 주변 공원으로 산책을 다녀왔습니다. 화창한 봄 날씨였습니다.

오전 10시 미주정토회관 명상홀 개원식이 시작되었습니다. 국제지부 북미유럽지회 동부 모둠장 이화영 님이 사회를 맡았습니다. 북미동부 해외지부, 국제지부, 행복운동본부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개원을 기념하여 테이프 커팅을 했습니다. 스님을 중심으로 해서 명상홀 개원에 힘써주셨던 분들을 앞으로 모셔서 리본 커팅을 했습니다. 그리고 단체 사진 촬영을 했습니다.

삼귀의, 반야심경 봉독으로 본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미주정토법인 사무국장(Secretary)인 법해 법사님이 추진 현황과 경과보고를 해주었습니다. 7년 동안 진행된 과정들을 사진과 함께 볼 수 있었습니다.

명상홀 개원을 축하하는 공연이 있었습니다. 우정민 님이 ‘사랑의 슬픔’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해 주었습니다. 익숙한 선율이 명상홀을 꽉 채웠습니다. 이후 내빈 소개와 법해 법사님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지도법사님을 모시고 명상홀 개관식을 할 수 있어서 기쁘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동안 시공업자와의 문제, 코로나, 카운티와의 소통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주신 덕분에,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불사를 하면서 정말 제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업자가 야반도주할 때는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깨라고 있는 것이구나.’ 이것을 제일 크게 깨달았습니다. 이런 과정들 속에서 내 모습을 여실히 보고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비록 학습비가 많이 들었지만 정말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소중한 체험과 경험이었습니다. 손해를 본 만큼 더 열심히 해서 여러분들과 함께 이곳을 좋은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저의 일입니다. 앞으로 이곳이 북미동부를 중심으로 해서 깨달음의 장, 나눔의 장, 명상수련까지 그리고 교육연수 프로그램, 농사 일수행도 같이 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나는 이곳의 주인이다.’라는 마음으로 자주 오셔서 조감도를 보며 함께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마음껏 이용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해외지부 담당 법사인 묘덕 법사님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저는 한국에 있는 많은 분을 대표해서 명상홀 개원식에 참가했습니다. 긴 시간을 보내고 개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힘들게 마련이 되었는데,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수련 공간 수련입니다. 힘들게 지은 만큼 여러분들이 잘 사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정말 명상홀 개원을 축하합니다.”

명상홀 불사 담당을 맡고 미주회관 실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민덕홍 님의 인사말도 들었습니다.

“미주정토회관 불사 담당했던 민덕홍입니다. 지난 7년간 오랜 시간이 걸려서 드디어 완공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많은 분께서 관심 가져주시고, 함께 응원해 주시고, 함께 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조감도에 있는 모습으로 함께 차근차근 잘 만들어 가겠습니다. 많은 분의 정성이 모여 지어진 것이니 여러분들이 자주 방문하셔서 잘 쓰였으면 좋겠습니다.”

인사말이 끝나자, 테이블을 세팅하고 청법가와 삼배로 스님께 명상홀 개원식 기념 법문을 청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모두 모이고 또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주정토회관 명상홀 개원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지난 7년여 동안 여러 우여곡절 끝에 오늘 이렇게 무사히 준공식을 하게 됐습니다. 처음 계획했던 만큼 충분히 넓은 공간은 되지 못했지만, 당분간 이 정도 공간이면 수련하는 데 큰 불편은 없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바이올린 연주를 해주신 우정민 님께도 감사 말씀드립니다. 연세가 많으신데도 옛 솜씨가 그대로 남아 있네요. 또 불사를 위해 애써주신 법해 법사님과 민덕홍 거사님께도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법해 법사님은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고, 민덕홍 거사님은 2차 불사 때 업자한테 맡기지 않고 모든 일을 직접 책임지고 짓느라 정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두 분께 박수 한번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있는 이곳은 원래 생활 공간으로 사용하고, 여기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델라웨어(Delaware) 지역 등에 별도의 수련 공간을 마련하려고 여러 곳을 둘러봤습니다. 공간을 제공하겠다는 분도 계셨고요. 그런데 실제로 수련장을 운영해 보니까 거리가 너무 멀면 효용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 수련장은 시내에서 차로 2시간 30분 정도 걸립니다. 처음 개원 했을 때는 공간이 생겼다고 열심히 나무도 심고 또 증축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거리가 너무 멀다 보니 찾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어요. 결국 지금은 문을 닫아놓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수련장은 한 시간 이내 거리에 마련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지금도 LA에서도 적절한 장소가 있는지 주변을 물색하고 있습니다. 시애틀의 경우는 시내 안에 수련장을 마련해 두니, 비록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좁기는 해도 활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따로 수련장을 구하지 말고, 이곳 미주회관 안에 수련장을 짓는 게 더 낫겠다는 판단으로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3층 건물로 지을 계획이었습니다. 현재 이 공간은 원래 지하 창고였는데, 이 위에다가 저쪽 기존 건물하고 연결해서 2층, 3층을 올리려고 했어요. 그렇게 하면 규모가 지금보다 1.5배 정도 큰 한 층이 약 100평 정도 규모가 되기 때문에, 2층은 숙소로 쓰고 3층은 법당으로 만들어 명상센터를 조성하려고 설계 도면까지 다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스님은 원래 계획했던 명상센터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명상홀이 완성되기까지의 어려움들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습니다. 기존 정화조가 크기가 작아서 계획대로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화조를 설치해야 하는 문제, 공사를 진행했던 업자가 돈을 받고 하청업자에게 돈을 지급하지 않아서 하청업자가 고발한 상황, 지하 땅이 파헤쳐진 채로 공사가 중단되고, 업자는 야반도주를 하고, 그 상황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이 덮치면서 오랫동안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하수구 관련 법령이 바뀌었고, 이런 상황 속에서 현실적으로 계획대로 공사를 재개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정화조를 새로 설치하지 않고 물을 사용하지 않는 조건 속에서 허가가 나오다 보니 현재 명상홀의 공간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미주정토회관의 명상홀 불사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서울 정토사회문화회관을 짓는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이 많았던 사례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무튼 불사라는 것은 이렇게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집 하나 지으면 두 번은 짓고 싶지 않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우리 미주 정토회도 그런 과정을 겪었습니다. 정토회에서 건축 관련 일을 하는 분들이 모여 불사위원회를 구성해서 진행했는데도 결국 그런 일이 생기더라고요. 이런 어려운 과정을 겪어서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이 정도라도 만든 것이 큰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공간이면 당분간 수련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님은 불사의 어려움에 대해서 언급하며, 어렵게 준공된 미주정토회관의 명상홀이 잘 활용될 수 있도록 실내와 실외 도량을 잘 가꾸고 꾸밀 수 있도록 회원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이렇게 어렵게 불사를 한 목적에 대해서 이어서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공간을 마련하는 이유는 결국 수행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신적인 활동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이고, 하나는 철학이고, 하나는 수행입니다. 불교 안에도 종교적 영역이 있고, 철학적 요소가 있고, 수행적 영역이 있어요. 종교의 중심은 믿음입니다. 철학은 원리와 법칙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수행은 실천하는 경험입니다. 자기가 직접 자기 변화를 경험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수행은 아이가 공부를 안 하는 것을 보고 괴로울 때 ’나는 왜 괴로운가?‘를 자기에게 묻습니다. 토끼가 공부 안 하고 뛰어다녀도 안 괴롭고, 강아지가 공부 안 하고 뛰어다녀도 안 괴롭습니다. 남의 아이가 공부 안 하고 놀아도 별로 괴롭지 않아요. 그런데 왜 내 아이만 공부 안 하고 뛰어다니면 괴로운가를 보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원래 공부보다 놀고 싶어 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존재입니다. 예전에는 화투 놀이 한다고 야단쳤고, 만화책 본다고 불태우기도 했고, TV 본다고 혼내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게임한다고 핸드폰 뺏고 난리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아이들의 특징인 거예요. ‘우리 아이가 놀고 싶어 하는구나‘ 이렇게 본다면 화가 날 일이 아닙니다. 결국 화가 나는 이유는 아이 때문이 아니라, 아이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는 집착 때문입니다. 남편이 어디 들러 술 한잔 먹고 늦게 들어오면 아내는 늦게 들어온다고 화를 냅니다. 그런데 술집 주인 입장에서 보면 그 남편은 좋은 손님입니다. 늘 와서 팔아주고 가니까요. 같은 행동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결국 괴로움은 아이 때문에, 남편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욕구에 대한 집착, 나만 생각하는 편견과 무지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울 때는 바깥을 탓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대하는 나의 관점입니다. 사람을 그대로 두고, 가게를 그대로 두고, 직장을 그대로 둔 채로도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때 가게가 안 돼도 괜찮다는 체념이 아니라, 괴롭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더 나아질까’를 차분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그만두는 선택도 할 수 있습니다. 아이와의 관계에서도, 화를 내기보다, ‘노는 것도 좋지. 그런데 계속 이렇게 놀기면 하면 너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하며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다는 거예요. 이렇게 관점을 바꾸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은 수행이라고 하면 명상을 하거나, 절을 하거나, 경전을 읽는 것을 떠올립니다. 경전을 읽으면서도 ‘우리 애가 공부 잘하게 해주세요.’ 하고 빈다면, 그것은 수행이 아니라 종교입니다. 절이나 명상을 하면서도 비는 마음이라면 그것 역시 종교적 행위예요. 그래서 형식만으로 수행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수행적 관점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수행적 관점이 잡혀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원인은 바깥에 있다’라는 관점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법문을 들을 때는 ‘아, 그렇구나.’ 하고 이해하다가도 막상 상황이 닥치면 예전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럴 때는 ‘내가 또 놓쳤구나.’ 이렇게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겁니다. 화를 버럭 냈다면, ‘아, 내가 또 놓쳤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다시 본래 자리로 되돌아오는 거예요. 이 연습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 절을 하거나 명상을 하면 수행에 해당하지만, 형식만으로 수행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를 살펴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은 대부분 수행적 관점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수행적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존경할 만한 인격이 형성된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불교가 2600년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점차 주류가 종교로, 또 철학으로 변화해 왔습니다. ‘부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 ‘죽어서 좋은 곳에 간다.’ 하는 식이 되면, 그것은 수행이 아니라 신앙이 됩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수행으로서의 불교는 새로운 불교라는 이름으로 여러 번 되살아났다가 다시 종교로 기울기를 반복해 왔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종교냐 철학이냐를 따지기보다, 수행적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행적 관점을 가지면 그 사람이 무엇을 믿는지,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떻게 감각에 반응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입니다. 어떤 종교를 믿든, 어떤 사상을 갖고 있던 그것이 본질이 아니에요. 어떤 상황에 부딪혔을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어떤 행위를 선택하는지가 수행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종교를 초월한 입장에 서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토회가 종교적 요소나 철학적 요소를 전부 배제하는 것은 아니에요. 일부 그런 요소들이 있습니다. 굳이 비율로 말하자면, 종교적 요소도 일부 있고, 불교를 공부하다 보면 철학적 요소도 함께 있어요. 다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중심이냐 하는 점이에요. 정토회에서는 수행적 요소가 중심을 이룹니다. 그래서 제가 사람들과 즉문즉설을 할 때를 보면, 거기에는 종교적 색깔도 철학적 설명도 거의 없어요. 그저 그 자리에서 수행적 관점으로 대화를 나눌 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삶에는 ‘문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정토회의 문화 속에는 불교문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종교적 요소를 함께 담고 있어요. 또 수행에도 나름의 원리가 있는데, 그 원리를 설명하다 보면 철학적 요소가 생깁니다. 그래서 정토불교대학에서는 이론과 철학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즉문즉설에서는 그런 이론이 필요 없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종교를 믿는지, 어떤 사상을 갖고 있는지 묻지 않습니다.

수행적 가르침은 사실 단순하지만, 그것을 연습해 몸과 마음에 익히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혼자서도 연습하고 이렇게 함께 모여 나누기도 하면서, 조금씩 체화해 가는 것입니다. 농구를 배우려면 어떻게 하면 돼요? 공을 골대에 넣으면 됩니다. 원리는 아주 쉬워요. 그런데 실제로 해보면 잘 안 들어갑니다. 그래서 계속 연습해야 합니다. 연습하면 점점 성공률이 높아집니다. 처음에는 열 번에 한 번도 못 넣다가, 한 번 들어가고, 그러다 열 번에 일곱 번, 여덟 번까지 올라갑니다. 그렇다고 매번 다 들어가냐 하면 그건 아니에요. 아무리 잘하는 선수라도 열 번 중에 한 번은 안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수행도 이와 같아서, 연습을 통해 점점 깨어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꾸준한 연습이에요. 이렇게 반복해서 익혀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상입니다. 이론으로는 ‘일상에서 깨어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늘 살아오던 대로 살기 쉽죠. 결국 습관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습관을 불교에서는 카르마(Karma)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 그 반복된 패턴이 바로 나의 삶을 끌고 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조금만 관찰하면 금방 드러납니다. ‘저 사람은 화를 잘 내네.’, ‘저 사람은 먹는 걸 좋아하네.’, ‘저 사람은 욕심이 많네.’ 이런 것들이 다 습관이에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데이터입니다. 그 사람의 행동 패턴이 쌓이면, 그 사람을 예측하고 심지어 조종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조종당하며 사는 존재가 됩니다. 지금 우리는 정말 내가 주인이 되어 살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자각하고 알아차리면서 내 인생의 주인 되기

그런데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나를 내가 알아차리는 순간에 전환이 일어납니다. 화가 일어나는 순간 ‘아, 내가 화가 나고 있네.’ 하고 알아차리면, 그 화에 끌려가지는 않습니다. 반응은 하지만 휘둘리지는 않는 상태가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에 끌려다니는 존재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 세상을 굴리는 존재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끌려가지 않을 때 우리는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세상을 굴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세상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카르마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카르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 우리는 이 무지를 깨기 위해서 ‘깨달음의 장’에도 참여하고,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아서 나누기하는 ‘나눔의 장’에도 가는 겁니다. 또 때로는 혼자서 생각에 끌려가지 않고, 오롯이 알아차림만 유지하는 연습인 ‘명상 수련’도 합니다. 이런 연습을 통해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맛, 감촉, 그리고 생각이라는 이 모든 감각으로부터 점점 자유로워집니다. 실제로 그런 변화를 경험하는 분들이 있어요.

즉문즉설을 듣기만 했는데도 삶이 훨씬 가벼워졌다든가, 자유로워졌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가족 관계나 주변 환경에서도 이전보다 훨씬 덜 휘둘리게 되었다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이 변화의 계기는 사람마다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수련 프로그램을 통해 변화를 느끼고, 어떤 사람은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깨닫기도 합니다. 남들보다 가난하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이 인도를 다녀온 뒤, 자신보다 훨씬 어려운 환경에서도 웃으며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 순간, 이것이 가난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어느 순간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 이 ‘자각’이 핵심이에요. 수행은 결국 자각입니다. 스님이 뭐라고 하든, 남이 뭐라고 하든 그건 부차적인 문제예요. ‘내가 욕심이 많구나.’, ‘고집이 세구나.’ 하고 스스로 알아차릴 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카르마란 무엇일까요? 바로 자각하지 않는 상태, 앎이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화를 내고는 대개 세 가지로 변명합니다. 첫째, ‘나도 모르게 화를 냈다.’라고 합니다. 둘째, ‘습관적으로 그랬다.’라고 합니다. 셋째, ‘무의식적으로 그랬다.’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는 결국 같은 말이에요.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에서 반응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자동 반응이죠. 바깥 환경에 의해 조종당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 자동 반응을 알아차림으로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반복하면 우리의 뇌에는 그것을 자동화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같은 반응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 그다음부터는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반응하게 돼요. 이렇게 되는 이유는 자동화 될 때 에너지가 덜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일에 익숙할수록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죠. 대신에 알아차림이 없어서 습관대로 반응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을 불교에서 카르마라고 합니다. 몇 번 반복된 반응이 자동화되어, 외부 자극에 따라 자동으로 반응하는 상태입니다. 효율은 높아지지만, 그 순간 나는 주인이 아니에요. 나는 모르는 상태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방식은 단순합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면 조종할 수 있어요. 돈을 좋아하면 돈으로, 지위를 좋아하면 지위로, 칭찬을 좋아하면 칭찬으로 움직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같은 경우를 보면, 칭찬에 잘 반응하는 성향이라고 알려져 있잖아요. 그래서 각국 정상들이 ‘당신이 최고다.’ 하고 치켜세우는 방식으로 접근하기도 합니다. 외교라는 것도 결국 사람의 심리를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이런 방식들이 연구되고 활용됩니다. 반대로 압박을 활용하는 방식도 있어요. 사람은 위협을 받으면 불안해지는데, 바로 이 불안을 이용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100원짜리 물건을 갑자기 ‘10원에 팔아라.’ 하고 강하게 밀어붙이면,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버팁니다. 하지만 계속 압박을 받다 보면 ‘그럼 20원이라도….’ 하면서 타협하게 됩니다. 무역 협상에서 높은 관세를 먼저 제시했다가 조금 낮춰주는 방식도 비슷한 원리이죠. 원래 없던 것이었는데도, 사람은 ‘그래도 줄어들었다.’라고 느끼며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이 역시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는 방식이에요. 이런 일도 몇 번 겪다 보면 눈치채게 됩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대부분 영향을 받아요. 그래서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을 더 정교하게 조종할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 문제가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수행은 나를 보호하는 힘을 기르는 것

사실 이런 방식은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서 여자를 좋아하면 미인계를 쓰고, 돈을 좋아하면 뇌물을 쓰는 식으로 사람을 다루는 방식은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습니다. 이런 다양한 자극과 경계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는 것, 이게 바로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길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조건 하지 마라가 아니라는 겁니다. 무엇을 하든 내가 알아차리고 선택하면 됩니다. 독이 든 음식이라도 그 사실을 알고 선택했다면 그것은 내 책임입니다. 그러나 좋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먹었다가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면, 그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선택입니다. 그래서 수행은 나를 보호하는 힘을 기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내가 중심이 되어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중생은 도둑과 함께 살면 도둑질을 배우고, 욕하는 사람과 함께 살면 욕하게 됩니다. 하지만 수행자는 같이 살아도 물들지 않습니다. 욕하는 사람 곁에 있어도 욕하지 않고, 도둑과 같이 있어도 도둑질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오히려 주변 사람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욕하던 사람이 욕을 줄이고, 함부로 살던 사람이 스스로 절제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이런 삶을 위해 정토회가 만들어졌고, 우리가 이렇게 함께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 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에요. 종교는 개인의 자유입니다. 기도하든, 어떤 의식을 하든 그것은 각자의 선택이에요. 다만 정토회라는 이름으로 ‘여기서 기도하면 서울대에 합격한다.’ 이런 식으로 홍보하는 건 안 돼요. 정토회는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수행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정토회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수행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수행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없애버렸다는 뜻은 아니에요. 현실 속에서는 종교적 요소도 일부 있고, 철학적 요소도 함께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이런 요소들을 완전히 배제하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중심을 두느냐입니다. 정토회는 그 중심을 수행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수행하기 위한 공간으로 이 명상홀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 불사에 참여했다고 해서 극락에 가는 것도 아니고, 복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이 공간을 통해 함께 공부하고, 나누기하면서 조금 더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누군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말로만 하지 말고, 직접 해보세요.’라고 말합니다. 봉사를 하든 보시를 하든, 그것을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사의 표현으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정토회는 바로 그런 마음 위에서 운영됩니다. 누군가는 보시로, 누군가는 봉사로, 그렇게 함께 만들어 가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마련된 것도 많은 분의 정성과 참여 덕분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준비되어 있으니 함께 드시고, 점심 이후에는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스님 법문이 끝나고 입정 후에 정근과 희사, 사홍서원을 끝으로 1부 미주정토회관 명상홀 개원식이 끝났습니다. 구법당으로 이동하여 점심 공양을 했습니다.

개원식 점심 공양은 비빔밥, 오이냉국, 떡, 과일입니다. 공양팀은 뉴욕 정토회원들이 맡아 정성스럽게 준비했습니다. 참석자들이 법당에 옹기종기 모여 점심 공양을 했습니다.

삼삼오오 모여서 담소를 나누며 비빔밥을 먹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법해 법사님이 앞으로 나와서 ‘스승의 날’ 축하 시간을 안내했습니다. 스승의 날은 지났지만, 스님을 만나서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시간이 오늘이어서 정토행자들이 준비를 했습니다. 수제 케이크에 초를 켜고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불렀습니다. 정토회원이 감사의 꽃다발을 들고 스님께 드렸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스님은 케이크의 초를 불었습니다. 함께한 정토회원들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정성껏 준비한 시간이었습니다.

이후, 스님께 인사를 드리러 오는 회원들도 있었습니다. 콜로라도에서 3일동안 승용차를 타고 미주회관으로 온 가족들이 드디어 스님을 만났습니다. 회원들은 각자 먹은 그릇을 정리하고, 법당에 즉문즉설 할 준비를 했습니다. 명상홀에서 2부 즉문즉설을 진행하려고 했으나, 새집 냄새가 빠지지 않아서 구관 법당에서 즉문즉설을 하기로 했습니다. 공양 장소였던 법당은 즉문즉설 장소로 세팅되었습니다.

오후 1시 30분부터 스님은 오늘 모인 정토회원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전 질문자는 총 3명이었고, 현장 질문자가 4명이었습니다. 회원들의 솔직한 질문으로 즉문즉설 시간은 진지하면서도, 한 번씩 시원하게 웃으면서 가벼워지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아래와 같은 주제로 대화가 오갔습니다.

  • 한의사인데 두 달 전 환자에게 고소를 당한 후 괴로움을 겪었는데, 수행 정진 후 많이 편해졌습니다. 그래도 아직 '망하면 어쩌나' 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답답해집니다. 차라리 확 망해서 깨우치든지, 지금 여기에서 탁 놓고 방긋 웃고 싶습니다.
  • 옳고 그른 것은 없고,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상이 일어날 뿐이라고 들었는데, 사람을 죽이거나 성폭행하는 것들에도 적용할 수 있는지요?
  • 저희 언니는 19년 전, 스스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님께는 심장마비로 속였는데, 3년 전 제가 술을 마시고, 자살인 것을 얘기했습니다. 엄마를 볼 때마다 미안하고 죄책감이 듭니다.
  • 앞의 질문자가 성추행 1년 후에 고소했다고 했는데, 그 기간이 5년이든 10년이든 언제든 고소를 할 수 있나요?
  • 변화가 빠른 시대, 우리 인류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요? 남북 관계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데, 스님은 어떻게 보고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 박근혜 정부 때는 '통일은 대박이다'라고 해서 들떠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학자가 '대한민국은 불교 지도자가 나와서 남북을 통일한다.'라고 예언했다는데, 법륜 스님 생전에 통일된 한반도를 볼 수 있을까요?
  • 행복학교, 불교대학, 경전대학까지 과정을 마쳤습니다. 불교 공부를 하면서 느낀 것은 처음에는 용어 하나하나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것 같았는데, 왜 화두는 스스로 깨달아야 할까요? 선문답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은데, 구체적이고 세세한 설명이 없는 이유가 있을까요?

질문을 하고 싶어서 손을 번쩍 든 회원들이 있었으나, 멀리에서 온 회원들이 귀가하기 위해서는 먼 길을 차량으로 이동해야 해서 아쉽지만 여기까지 하기로 했습니다. 스님은 마지막 정리 인사말을 했습니다.

"이래도 해보고 저래도 해보세요. 모르면 우선 물어서 알아야 하겠지요. '아는 것이 힘이다', 또는 '아는 것이 병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아는 것이 병이라는 것을 깨려면, '아는 것‘을 뛰어넘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일 때가 있고, 아는 것이 병일 때가 있습니다. 모를 때는 아는 것이 힘이 되고, 아는 것에 집착할 때는 병이 되는 거예요. 아는 것이 전부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르는 것이 전부라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이 이리 바뀌든 저리 바뀌든 상관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세상이 좋게 바뀌도록 최선을 다하되, 그게 좋게 바뀐다 안 바뀐다는 결과는 장담 못 합니다. 결과는 인연이 되는 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력을 적게 하거나 내버려둔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화적으로 가도록, 갈등이 없도록 하는 것이 목표지만, 우리가 노력해서 줄일 수도 있고, 노력했는데도 더 할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노력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주어진 조건이 내가 노력한 것보다 힘이 훨씬 더 강하면, 노력한 것이 무색해지는 것입니다. 노력한 것이 안 보이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의 노력이 세상의 힘보다 조금 더 세면 우리의 힘에 의해서 세상이 변화하는 것이지요. 그게 꼭 우리 노력의 강도만이 아니라 세상 변화의 힘이 얼마나 크냐와도 관계가 있다는 것이죠. 내가 했는데 실패했다는 것은 노력 부족일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둑을 아무리 쌓아놓아도 비가 더 많이 오면 둑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둑을 안 쌓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연 따라 한다, 인연 따라 한다는 것이 아무 노력도 안 하고 대충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방향을 잡고 노력은 하되, 너무 집착하지 마라.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은 그게 우리 뜻대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며 마치겠습니다.“

그룹별로 단체 사진을 찍고, 책 사인회를 한 후, 회원들은 스님이 한국에서 직접 가지고 온 쑥떡을 맛보았습니다. 스님과 법사님들이 쑥을 직접 채취하여 만든 쑥떡입니다. 쑥 향이 진하게 나서 쑥떡을 맛본 회원들이 좋아했습니다. 차 시간 때문에 서둘러 귀가해야 하는 회원들은 귀가 떡과 기념 책을 받아서 서둘러 나갔고, 회관에 남은 회원들은 행사 뒷마무리를 했습니다.

스님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하고 내일 한국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며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 오전에 회관을 나와서 공항으로 이동하고 오후에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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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식

“결국 괴로움은 아이 때문에, 남편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욕구에 대한 집착, 나만 생각하는 편견과 무지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울 때는 바깥을 탓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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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달을 동시에 보면서 기뻐하는 사람도 있고 슬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2026-05-20 07:05:51

이수정

고맙습니다.

2026-05-20 06:54:10

차덕환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받아드리 겠습니다.

2026-05-20 06:3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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