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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스님은 아침 공양 후 울력에 나섰습니다. 가늘고 보슬보슬한 비가 내리는 아침이었습니다.

지난 겨울 스님은 텃밭에 상추와 고수 씨앗을 뿌리고 비닐로 덮어두었습니다. 비닐을 걷어보니 이제 막 여린 싹이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날이 따뜻해지면 비닐 안의 열기가 올라 싹이 타들어 갈 수 있습니다. 보호막이 되어주던 비닐이 이제는 걷어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스님은 비닐 안에 철사를 꽂아 비닐과 흙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먼저 상추밭에 철사를 꽂은 후 비닐을 씌워 작은 비닐하우스를 만들었습니다. 가는 빗줄기가 계속 내려 비옷을 챙겨 입고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한번 쓴 비닐은 버리지 않고 깨끗이 씻어 고수, 상추를 심어둔 뒷밭에도 같은 방식으로 덮어주었습니다.




부추밭까지 마무리하고 나서야 울력을 끝냈습니다.


한 시간 반의 울력을 마치고 스님은 곧바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오전 10시 40분에 두북수련원을 출발해 고창군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고창군에서 스님을 초청해 ‘군민행복 고창포럼’을 개최했습니다. 고창군청 뿐만 아니라 인근 사찰인 선운사에서도 스님을 꼭 초청하고 싶다고 함께 요청했기에 스님도 바쁜 가운데 시간을 내었습니다.
두북수련원에서 고창군까지 동서를 가로질러 고속도로 위를 3시간 30분 동안 달렸습니다. 중간에 휴게소에서 우동 한 그릇을 가볍게 먹은 후 오후 2시 10분에 고창군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강연이 열리는 곳은 고창군 문화의 전당입니다. 강연장 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강연을 듣기 위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강연 시간보다 50분 일찍 도착하여 사전 미팅을 했습니다. 전북방송 부회장님과 전북일보 부국장님, 그리고 중국 심양에서 동북아 경제·문화 교류를 이끌고 계신 동북아 경제문화촉진회 부회장님까지 총 세 분이 스님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찾아오셨습니다.

세 분은 평소 스님의 활동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동안 동북아 지역의 문화 교류를 위해 자신이 해온 일들을 소개하고, 이후 계획에 대해서도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스님은 동북아 역사기행 프로그램을 자세히 소개하고, 이 프로그램을 잘 활용하면 한국과 중국 국민 간에 반한 감정과 반중 감정을 상쇄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어 유의미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이 외에도 한국과 중국이 어떤 분야에서 서로 교류의 폭을 넓혀 가면 좋을지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미팅을 마쳤습니다.
“강연 전에 사전 차담이 있어서 일어나야겠습니다. 충분히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고 생각하시면, 강연을 마치고 추가로 대화를 나눕시다.”
시간이 다 되어 서둘러 강연이 열리는 고창 문화의 전당으로 함께 이동했습니다.

강연장 옆 대기실에는 전북 출신 국회의원인 안호영 의원, 고창군 심덕섭 군수님, 선운사 부주지 초우스님, 혜수스님 등 지역 인사분들이 자리하여 스님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해외 일정도 많으시고 바쁘신데 이렇게 먼 길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인사를 나눈 후 잠시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먼저 군수님이 고창의 자랑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희 고창에 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유산이 무려 7개나 됩니다. 선사시대의 흔적인 고인돌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을 시작으로, 드넓은 갯벌은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판소리의 본고장답게, 신재효 선생이 판소리를 집대성한 이 땅의 판소리와 고창 농악은 각각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고창 지역 전체는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도 지정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재작년에는 세계 지질공원 인증과 함께, 동학농민혁명 포고문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며 7개를 채웠습니다. 유네스코가 운영하는 5개 프로그램에 하나씩 모두 들어가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고창을 '세계유산 도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스님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실제로 외국인 관광객도 많이 옵니까?"
군수님은 잠시 머뭇거렸습니다.

"아직 교통이 불편해서 외국인까지 많이 찾아오지는 못하고 있고요. 국내 관광객은 작년 한 해 1,230만 명이 다녀갔습니다. 관광지로서 인지도는 많이 높아지고 있는 편입니다."
스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관광객이 많이 오면 지역 경제에 실제로 도움이 됩니까?"

군수님이 솔직하게 답했습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기만 하면 솔직히 귀찮기만 하지요. 와서 하룻밤 묵고, 밥도 먹고, 지역 경제와 연결이 되어야 하는데, 그냥 왔다 가기만 하면 쓰레기만 버리고 가는 형국이 됩니다. 그래서 요즘은 체류형 관광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7개의 세계 유산을 품고 있으면서도 아직 그 가치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강연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안호영 의원님, 심덕섭 군수님, 선운사 부주지 초우스님, 혜수스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강연장으로 향했습니다.

이번에 전북도지사에 출마한 안호영 의원과 심덕섭 군수님의 인사말이 끝나자 큰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스님이 무대 위로 걸어 나왔습니다.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전에 먼저 스님이 인사말과 더불어 즉문즉설의 원리와 취지를 소개했습니다.


“어떤 것이 건강한 것일까요? 100미터를 12초에 달려야 건강한 것입니까? 턱걸이를 100번 해야 건강한 것입니까? 건강하다는 것은, 아프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아이도 아프지 않으면 건강한 것입니다. 시각장애가 있어도 다른 질병으로 아프지 않다면 우리는 건강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행복한 것일까요? 괴롭지 않은 것이 행복입니다. 이것이 열반의 개념입니다. 괴롭지 않은 것이 곧 행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행복이라고 생각합니까? 즐거움을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기분 좋은 것을 행복으로 삼으니, 필연적으로 괴로움이라는 불행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행복과 불행이, 즐거움과 괴로움이, 고(苦)와 락(樂)이 돌고 돕니다. 이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고와 락이 윤회하지 않는 것, 그것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열반을 뜻합니다. 그래서 저와 대화하다 보면 대부분 '스님, 별일 아니네요.' 하고 말하게 됩니다. 별일 아님을 아는 것, 이것이 최고의 깨달음입니다.
"어떤 분은 '남편이 죽었습니다' 하며 괴로워합니다. 남편이 죽었는데 왜 슬픕니까? 결혼하기 전, 남편이 없을 때도 혼자 잘 살지 않았습니까. 남편이 없는 것은 본전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또 만나고 싶으면 새로 만나면 되고, 같이 살아보니 귀찮으면 혼자 살면 됩니다. 선택의 여지가 넓어진 것입니다. 웃을 일까지는 아니지만, 울 일도 아닙니다. 이렇게 관점을 잡으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건물이 하나 있는데 안 팔려서 괴롭다고 합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고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싸게 내놓으면 금방 팔립니다. 많이 받으려 하니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강연장에 정치인들도 참석하셨습니다. 이 가운데 한 분이 도지사로 출마한다고 해봅시다. 그동안 국회의원직을 잘 수행해야 도지사로도 출마할 수 있습니다. 도지사 선거에서 떨어져도 본전입니다. 공부를 5등 하다가 2등을 했으면 잘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1등이 아니면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2등도 잘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도지사 선거에 출마했다는 것만으로도 성공입니다. 출마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조마조마할 필요가 없습니다. 떨어져도 국회의원이니 본전입니다. 떨어져서 괴롭다면 관점을 잘못 잡은 것입니다.
오히려 '이 사람이 더 잘하겠다 싶으면 이 사람을 찍어주십시오.' 하고 상대 후보를 격려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전라북도가 잘되고 대한민국이 잘되는 것이 중요하지, 내가 잘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도민이 보시기에 이분이 나보다 도지사를 더 잘할 것 같으면 이분을 찍어주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대를 비방하는 방식으로만 선거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술을 마셔야 사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술을 마시지 않아도 술값만 내면 됩니다. 우리가 생각을 너무 좁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별것 아닌 일로 늘 고뇌합니다. 저와 대화하다 보면 심각하다고 생각했던 일에 대해 '별거 아니네요.' 하고 깨닫게 됩니다. 최고의 깨달음은 별일 아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보다 낮은 수준의 깨달음은 '이렇게 하면 되겠네요' 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답을 찾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답을 찾아 실천하는 사람보다, 아예 할 일이 없는 사람이 더 높은 경지입니다. '별거 아니네요' 하고 아는 것은 더 이상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그보다 더 높은 깨달음입니다.
사람들은 제가 좋은 답을 준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제가 남의 인생에 답을 줄 수도 없습니다. 대화하다 보면 본인이 '별일 아니네요.' 하든지, 또는 '알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다.' 하고 스스로 정리하게 됩니다. 이렇게 자립을 돕는 것이 부처님이 하셨던 설법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묻고 저것도 묻고, 갈수록 물을 것이 많아진다면 그것은 깨우침이 아닙니다. 의지심을 키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평생 한 번만 물으십시오. '아,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되겠구나. 그렇게 보니 별거 아니네.' 이렇게 관점을 바꾸어 나가면, 내가 가진 에너지를 나를 괴롭히는 데 쓰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위해 쓸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남을 돕게 되는 이유는 에너지가 남기 때문입니다. 에너지가 남으니 남을 돕는 데 에너지를 쓸 수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수행해서 그때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표가 아닙니다. 단박에 깨쳐서, 죽을 때까지 깨어 있는 상태로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죽을 때 깨달으면 무슨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럼, 지금부터는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어서 사회자가 스님 곁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스님과 나란히 앉은 사회자의 뒤로, 작은 메모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강연장 입구에서 미리 받아 둔 것들이었습니다. 청중들은 자리에 앉기 전, 스님에게 묻고 싶었던 말을 그 작은 종이 위에 저마다 적어 냈습니다.

사회자가 메모지를 한 장 떼어 들었습니다. 잠시 내용을 훑은 뒤, 청중을 대신해 스님에게 질문을 건넸습니다. 한 장, 또 한 장. 저마다의 사연과 고민을 담은 질문들이 하나씩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형제 관계, 부모님과의 관계 등 현생의 삶이 너무 고달프다며 전생이 있는지, 전생에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토록 힘든 것인지,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스님, 전생이 있습니까? 전생에 제가 어떤 삶을 살았길래 현생이 이렇게 고달플까요? 부모님과의 관계도 어렵고, 형제간에도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덜 힘들게 살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전생이 있느냐는 질문은 '신이 있느냐'라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제가 '신이 있다'라고 말하면 믿는 분도 있고, '중이 헛소리한다'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반대로 '신이 없다'라고 말해도, 또 누군가는 '헛소리한다'라고 하겠지요. 결국 전생이 있느냐 없느냐는 진실의 영역이라기보다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전생이 있다, 없다'라는 답 자체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신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있듯이, 전생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두 사람은 믿음이 다를 뿐이지, 누가 맞고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믿음의 문제를 객관적 사실로 증명하려고 하면 관점이 어긋납니다.
부처님 당시의 일화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부처님이 어느 날 한 바라문 집에 걸식하러 가셨습니다. 바라문은 당시 인도에서 가장 높은 신분 계층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걸식은 거지처럼 '밥 좀 주세요' 하고 구걸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는 그릇을 들고 집 문 앞에 조용히 서 있습니다. 밥을 주고 안 주는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존댓말로 '식사하세요'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것도 명령형입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식사하세요'라고 하지 않고 '공양이 준비되었습니다. 부처님, 때를 아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준비는 해 두었으니, 드실지 말지, 언제 드실지는 당신이 결정하십시오'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수행자가 '방 좀 주세요, 돈 좀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달라고 요구할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그저 서 있을 뿐이고, 주고 안 주는 선택은 상대에게 있습니다. 이 점에서 수행자와 거지의 차이는 '달라고 하느냐, 그냥 받느냐'에 있습니다.
그런데 집 앞에 서 있는 부처님을 보고 바라문은 기분이 상했습니다. 사지육신 멀쩡한 사람이 왜 일해서 벌어먹지 않고 얻어먹느냐며 화를 내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부처님은 빙긋이 웃으셨습니다. 바라문은 '내 말이 우습냐?' 하며 더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때 부처님이 물으셨습니다.
'바라문이여, 당신 집에 손님이 가끔 옵니까?'
바라문이 '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부처님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손님이 올 때 선물을 가져옵니까?'
바라문이 '가져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부처님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 선물을 당신이 받지 않으면 그 선물은 누구 것입니까?'
바라문이 '가져온 사람 것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빙긋이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욕을 선물했는데, 내가 웃으면서 받지 않으면 그 욕은 누구 것입니까?‘

바라문은 그 말을 듣고 탁 깨달았습니다. 부처님께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공양을 올렸습니다. 재가자가 공양을 올리면 부처님은 법문으로 보시하십니다. 부처님이 바라문의 질문에 자세히 법문하시자, 바라문은 듣고 깨달아 기뻐하며 부처님의 열렬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잘 살펴봅시다. 상대가 욕할 때 우리는 보통 맞대응하기 쉽습니다. '왜 욕하느냐?', '네가 얻어먹으러 왔잖아', '내가 언제 달라고 했느냐?' 하며 말다툼이 이어집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저 둘은 전생에 원수였나 보다. 보자마자 싸우는 걸 보니 다음 생에도 원수로 만나겠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른바 삼생의 악연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부처님처럼 웃으면 어떻게 됩니까? 처음 만났는데도 공양을 올리고 법문을 듣는 좋은 인연으로 이어집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전생에 좋은 인연이 있었기에 이생에도 이렇게 좋은 인연이 되었겠구나. 이생에 좋은 인연을 쌓았으니 다음 생에도 좋은 인연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삼생의 선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생이 선연이 될지, 악연이 될지는 언제 결정됩니까? 전생에서 이미 정해진 것입니까, 아니면 지금 여기서 정해지는 것입니까?"
"지금 결정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가 욕할 때, 내가 같이 욕하느냐 웃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결국 상대가 나에게 욕할 때 웃을 수만 있으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가 욕하면 나도 욕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부처고 뭐고 싫다, 지금 당장 나도 욕을 해야 한다'고 여기니 부처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는 길은 단순합니다. 욕을 들을 때 웃을 수 있느냐, 배우자가 외도를 했는데도 웃을 수 있느냐, 누군가에게 빌려준 돈을 못 받고도 빙긋이 웃을 수 있느냐,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그게 잘 안되니 부처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생이든 이생이든 결국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한 번 웃으면 삼생의 악연이 소멸하고, 한 번 성내면 삼생의 악연이 지어집니다. 전생이 있느냐 없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명쾌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스님의 답변이 끝나자, 사회자가 추가로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책을 써 오셨습니다. 1988년에 쓰신 『실천적 불교사상』에서부터 『반야심경』까지 여러 책을 내셨는데, 그 가운데 몇 가지 내용을 제가 마음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중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괴로움은 괴롭게 된 상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에서 온다.' 이 말이 조금 어렵습니다. 지금 내가 힘든 것이 바로 괴로움인데, 그것이 내 생각에서 온다는 말씀이지요.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나가다가 갑자기 달려온 차에 치여 교통사고가 나서 한쪽 다리가 부러졌다고 해봅시다. 다리가 부러진 지금 상황은, 안 부러졌을 때와 비교하면 좋은 상황입니까, 나쁜 상황입니까?”
"나쁩니다.“
“나쁘다고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사고로 다리가 두 개 다 부러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럼 한 개만 부러진 것은 두 개가 부러진 것보다 나은가요, 나쁜가요?”
“두 개가 부러진 것보다는 더 낫죠.”
“우리는 교통사고로 다리가 하나 부러졌다고 하면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안 부러졌을 때와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리가 하나 부러진 상황을 두 개가 부러진 상황과 비교하면 더 나은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다리가 하나 부러진 상황은 나쁜 상황입니까, 좋은 상황입니까?"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좋은 상황이네요. 하나만 부러졌으니까요.” (웃음)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리가 하나 부러졌을 때 늘 '안 부러진 상태'와만 비교하니까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통사고나 화재로 많은 사람이 죽고 몇 명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고 해봅시다. 죽은 줄 알았는데 어떻게든 살아났거나, 중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면, 죽은 사람과 비교했을 때 이 사람은 행운입니까, 불행입니까?“
"행운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었는데 이 사람은 살았기 때문입니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집니다. 이처럼 우리가 겪는 어떤 상황도 본래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의 상황일 뿐입니다. 불교 교리로 표현하면 이것을 '공' 또는 '실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이 개입되면, 이렇게 비교할 때는 나쁜 상황이 되고 저렇게 비교할 때는 좋은 상황이 됩니다. 그렇다면 좋다, 나쁘다는 것이 상황에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까?“
"마음에 있습니다."

"맞습니다. 좋고 나쁨은 정신작용이지 현실의 사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것을 '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면 어떤 것은 좋게 되고, 어떤 것은 나쁘게 됩니다. 즉, 좋고 나쁜 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라고 합니다. 이 말은 '금'이라고 하면 금이 되고 '은'이라고 하면 은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좋고 나쁨, 옳고 그름, 맞고 틀림 같은 모든 상대적 판단이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어차피 한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면, 좋게 일으키는 것이 낫습니까, 나쁘게 일으키는 것이 낫습니까? 대부분은 좋게 일으키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나쁜 마음을 더 자주 일으킵니다. 그래서 스스로 불행해집니다. 자기가 만든 생각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지금 혼자 살고 있습니다. 승려 기준으로 보면 70세가 넘어서까지 혼자 사는 것은 성공입니까, 실패입니까?"
"성공이죠."
"저와 함께 출가해서 지금까지 환속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열 명 중 한 명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승려 기준에서는 성공입니다. 그런데 일반 세속 기준으로 70세가 되도록 결혼을 못 했다고 하면, 대개 실패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성공이다, 실패다, 좋다, 나쁘다는 본래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의 사실일 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성공이 되기도 하고 실패가 되기도 합니다. 승패는 결국 자기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체유심조'입니다.
더럽고 깨끗함도 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습니다.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깨달은 이야기가 그 예입니다. 그 원리는 『화엄경』에도 나옵니다. 원효대사도 이론으로는 '깨끗함과 더러움은 본래 없고, 다 마음이 짓는다.' 이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시고는 토했습니다. 그때 원효대사는 아는 것을 실천하는 데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그 실패 속에서 '아, 마음이 짓는 것이구나' 하고 확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 실패는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그러고 보니 실패도 좋은 것이네요."

"그러니 이 법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삶 속에서 시시때때로 그대로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법당에서 기도하고 내려오다가 넘어져 다리가 부러졌다고 합시다. 그때 '재수 없다. 부처님께 기도해도 영험이 없네'라고 생각하면, 자기가 믿어 온 신앙을 스스로 부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안 부러진 다리를 붙잡고 '그래도 기도했더니 한 다리는 괜찮다'라고 생각하면, 신앙도 지키고 마음도 덜 무너집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에 다니느냐 절에 다니느냐가 아니라,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입니다. 우리 삶에는 본래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가난 때문에 깨닫는 사람도 있고, 부유함 때문에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과 부유함이 깨달음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은 자기 마음작용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스님, 저는 남자 복이 너무 없습니다. 결혼을 세 번이나 했습니다. 첫 번째 남편은 사별했고, 두 번째 남편은 도망갔고, 지금 세 번째 남편과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생 결혼을 한 번 해보는 것이 복입니까, 세 번 해보는 것이 복입니까? 관점에 따라 세 번 결혼해 보는 것이 복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싫어서 이혼했다면 비난을 받을 수 있지만, 상대가 죽거나 떠난 것은 자기 책임이 아니니 도덕적 비난 없이 다시 결혼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왜 결혼은 한 번 해야 하고, 세 번 하면 나쁘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이 바로 관념입니다. ’결혼을 여러 번 했으니 불행하다', '아이가 없으니 불행하다'라고 스스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이가 없는 것이 오히려 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옛날에는 딸을 낳으면 전생의 죄라고도 했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들을 낳는 것이 복입니까, 딸을 낳는 것이 복입니까?"
"딸을 낳는 것이 복입니다."

"맞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집안이 거덜 나고, 딸을 낳으면 반지라도 하나 얻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이 만들어낸 기준일 뿐입니다. 여기서 '공'이라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옳고 그름이 본래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법은 '공'하지만 인연에 따라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나는 누구다'라고 고정된 것이 없지만, 아이를 낳으면 엄마가 되고, 결혼하면 아내가 되고, 부모에게는 딸이 되고, 학교에 가면 학부모가 됩니다.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인연을 맺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지금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그렇게 받아들이고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계속되면 계속 불행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불행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결국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입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사전에 마련된 방식대로 사회자가 메모지를 한 장씩 읽어 나갔습니다. 그러다 스님이 자리에서 한 가지를 제안했습니다.

"이렇게 하지 말고, 청중석에서 손을 들고 직접 질문하면 어떨까요?"
방식이 바뀌자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객석 여기저기서 조심스레 손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한 군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몸이 몹시 아픈데, 스님 손을 한번 잡으면 나을 것 같습니다."
스님이 따뜻하게 답했습니다.
"강의 끝나고 나가면서 그렇게 합시다."

직접 손을 들고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바뀌자 강연장에 활기가 돌았습니다.
강연이 마무리될 무렵에는 오히려 손을 들고 싶은 사람들이 더 늘어났습니다. 아쉽지만 시간이 다 됐습니다. 사회자가 마지막으로 제안했습니다. 스님과 군수가 무대 위에 앉은 채로 청중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 둘, 셋!"

셔터 소리와 함께 사진 촬영을 마치자, 스님이 다시 청중을 향해 돌아앉아 마무리 말씀을 이어갔습니다.

"질문하시는 분들 중에 죽음을 걱정하는 분도 있었는데요. 죽음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지금 살아 있을까요? 죽었을까요?"
"살아있어요."
"죽음을 걱정하는 건 다 살아있는 사람이 하는 일이에요. 죽으면 죽음에 대해 걱정할까요, 안 할까요? 죽음을 걱정하는 건 낭비예요. 그때 가서 보면 되는 거예요. 결혼도 안 한 사람이 벌써 애를 어떻게 키울지 걱정하는 것하고 똑같아요. 결혼을 할지 안 할지도 아직 모르잖아요. 애는 낳아보고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미래를 너무 생각하면 뇌가 착각을 합니다. '내가 미래에 결혼하면 어떻게 되지?' 하고 생각하면, 뇌가 그 미래의 일을 지금 일어난 것처럼 착각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근심과 걱정이에요. 반대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면, 뇌가 또 지금 일어나듯이 착각해서 괴로움, 미움, 원망이 생겨요. 이런 감정들은 다 과거의 기억을 지금 일어난 것처럼 뇌가 착각해서 일으키는 겁니다.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오는 게 근심, 걱정, 초조, 불안입니다. 괴로움, 분노, 화, 미움, 원망은 다 과거를 생각할 때 오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지 말고, 오지도 않는 미래를 생각하지도 말고, 지금 여기 깨어 있어라’ 하고 가르치는 겁니다. 지금 여기 아무 문제가 없어요. 항상 '지금 여기 아무 문제가 없다.' 하는 관점에 서면 여러분 모두 나날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즐거움이 행복이 아니에요. 괴롭지 않은 것이 참 행복입니다."
말씀이 끝나자 강연장에 큰 박수가 울려 퍼졌습니다.

스님은 곧장 아까 그 질문자를 찾아갔습니다.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힘겹게 서 있던 그분이 스님을 향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스님은 그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습니다. 그리고 나지막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조용히 용기를 북돋워 주었습니다.

강연장을 나오자 고창군청에서 스님에게 꽃다발을 건냈습니다. 그리고 현수막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한 번 더 찍자고 청했습니다. 스님은 환하게 웃음을 머금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문화의 전당을 나온 스님은 강연 전에 만났던 동북아 경제문화촉진회 부회장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한국과 중국 사이에 문화 교류가 촉진될 수 있을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다음에는 심양에 오셨을 때 연락 주십시오. 스님께서 하시는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네, 그러겠습니다.”
30분 간 미팅을 한 후 오후 5시 30분에 고창군을 출발하여 서울로 향했습니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 창밖으로 해가 저물었습니다.

해가 저물고 보름달이 떠올랐습니다. 음력을 보니 오늘이 정월대보름이었습니다.

보름달 아래에서 쉼 없이 고속도로 위를 달려 저녁 8시 30분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원고 교정과 여러 가지 업무들을 본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과 미팅을 하고, 오전에는 수행법회 생방송을 한 후, 오후에는 상반기 해외 일정에 대해 실무자들과 의논을 하고, 저녁에는 두북수련원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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