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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정토담마스쿨과 정토불교대학 학생들과 온라인으로 즉문즉설 시간을 가진 후 유엔 세계 명상의 날 기념행사와 세계 명상의 날 기념 명상법회를 했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오전 8시부터 서울 정토회관 방송실에서 정토담마스쿨 학생들과 온라인으로 즉문즉설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미국, 캐나다, 필리핀, 호주, 프랑스, 일본, 한국, 7개국에서 정토담마스쿨 수업을 듣고 있는 22명의 학생들이 온라인 공간에서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배움에 국경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며 모두가 서로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화상 회의 방에 입장하자 학생들을 대표하여 두 명이 그동안 수업을 들은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먼저 영어반을 대표하여 셀리(Shelley) 님이 소감을 말했습니다.
“It has been very helpful for me to learn about Buddhism. Understanding how the mind works has helped me with my own suffering, and it also allows me to help others prevent suffering as well. We are simply helping others in the world. I enjoy meeting other people around the world who want to learn the same things as I do, and I look forward to the next course. Thank you.”
(불교를 배우는 것은 저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요.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하게 되면서 제 고통을 다루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괴로움을 겪는 것을 예방하는 데에도 보탬이 되었어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어요. 지금은 세계 곳곳에서 저와 같은 배움을 추구하며 이 과정에 참여한 도반들과의 만남을 즐기고 있고, 다음 과정도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오늘은 일본어반 학생들도 참여하여 영어 통역 뿐만 아니라 일본어 통역도 함께 진행했습니다. 정토담마스쿨이 점점 국제적인 모임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어반을 대표하여 사토 유지 님이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私が根本仏教の授業で学んだことの中で、特に心に深く響いたのは、人はそれぞれの人生の過程の中で自分だけの世界観や価値観を形づくり、それが基準となって他者を見るようになる、という点でした。そのため、他人を見るとき、無意識のうちに自分を基準として物事を判断してしまい、その結果、自分とは異なるものに対して違和感や拒否感を覚えたり、誤解が生まれて葛藤につながってしまうということも理解できました。
こうした点を理解できたことで、「ああ、あの人はあの人なりの基準で物事を考えているんだ。でも私はこう考えている」と受け止め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相手を尊重する前向きな視点から物事を判断でき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これからも、「清らかな淨(きよらか)」と「大地を意味する土」の字を用いた淨土ダンマスクールで学んだことを忘れずに、生き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제가 근본 불교 수업에서 배운 것들 가운데 특히 마음에 깊이 와닿았던 점은, 사람은 각자가 살아온 과정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만들어 가고, 그것이 기준이 되어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타인을 볼 때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 사물을 판단하게 되고, 그 결과 자신과 다른 이질적인 것에 대해 위화감이나 거부감을 느끼거나 오해를 낳아 갈등을 만들어 버린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모두 이해하고 나니 ‘아, 저 사람은 그런 기준으로 사물을 생각하고 있구나.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상대를 존중하는 긍정적인 시각에서 사물을 판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도 정토담마스쿨에서 배운 것들을 잊지 않고 살아 가고 싶습니다.)
학생들의 소감 발표를 통해 정토담마스쿨이 삶이 변화하는 경험의 장이 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학생들은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부처님의 일생을 공부해야 수행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사회적·역사적 문제에 대해 불교적 관점을 갖출 수 있다고 강조한 후 학생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두 시간 동안 네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전쟁과 환경 파괴 같은 부정적인 소식이 넘쳐 나는 시대를 살며, 분노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세상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를 어떻게 유지해야 할지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In our time, it can often feel like there is so much information present, and much of what comes to us through our phones and computers takes the form of bad news, such as stories of war, political corruption, famine, and environmental destruction. I often feel that it is my responsibility to stay informed about what is happening to people around the world, but it often leaves me feeling helpless. This feeling can lead to frustration and then to anger, which is a destructive emotion. How can I stay engaged with the world in a way that is helpful and in line with the Five Precepts, while avoiding becoming attached to anger?”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많은 정보 속에 살고 있고,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통해 접하는 것들 중 상당수는 전쟁, 정치적 부패, 기근, 환경 파괴와 같은 부정적인 소식들인 경우가 많아요. 저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자주 느끼지만, 그런 정보들은 종종 저를 무력하게 만들기도 해요. 이러한 감정은 좌절로 이어지고, 다시 분노로 변하는데, 그 분노는 파괴적인 감정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분노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오계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세상과 계속 연결되어 있고, 도움이 되는 태도로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 참여할 수 있나요?)

“어떤 사회 변화를 일으키려면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힘의 근원이 되는 경우는 대부분 분노입니다. 역사적으로도 분노한 군중에 의해 왕정이나 독재를 무너뜨리는 혁명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분노에 기반한 힘은 대체로 폭력적으로 나타나기 쉽습니다. 상대에 대한 복수로 이어지는 폭력은 수많은 비극을 낳기도 했습니다. 분노는 개인 차원에서도 폭력적인 대응을 낳기 쉽고, 사회적·집단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폭력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래서 그 분노가 처음에는 매우 정당하게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폭동이든 혁명이든 폭력적으로 전개되면서 이후의 사회가 오히려 더 비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역시 보복으로 인해 많은 비극을 낳았습니다.
부처님은 분노 없이 사회 변화를 추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보통 분노가 없으면 변화의 동력이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사회의 불의나 모순을 외면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많은 불교도와 승려, 수행자들이 전쟁이나 사회적 불의를 외면한 채 혼자 세상과 고립되는 경향을 자주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앞으로 배우게 될 붓다의 일생을 살펴보면, 붓다는 분노 없이도 세상의 많은 모순을 개선하고자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을 계급으로 차별하는 것을 부정하셨고, 여성의 출가를 허용함으로써 성차별을 부정하셨으며, 전쟁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그 어리석음을 일깨워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배우고 있는 불교는 이러한 역사성과 사회성이 제거된 채, 부처님을 단지 신 같은 존재로만 인식하는 불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불교의 사회적 실천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 북태평양 바다에 거대한 쓰레기 섬이 형성되고 있다는 점, 기후변화와 미세 플라스틱의 위험성 등을 미디어를 통해 접합니다. 또 지구 저편의 어느 나라에서는 독재 체제 아래에서 인권이 침해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고, 자연 재해로 인해 사람들이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소식도 접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실을 알아야 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접할 때 분노가 일어나는 이유는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 자체가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원인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현실을 알게 될 때 분노보다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관점에 서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되, 그것이 해결될 수도 있고 때로는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현실이 매우 나쁜 상황이라고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이보다 더 나쁜 상황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이 최악이 아니라는 점을 자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다음 세대가 이어서 해결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하는 데 머물러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 설 때, 현실을 보고 분노하여 폭력적으로 대응하거나, 혹은 외면해 버리는 두 극단을 넘어 분노 없이 현실을 극복하며 꾸준히 참여하는 중도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제 몸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현재 저는 팔에 큰 통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통증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만약 지금 통증이 없다면 제 몸에 어떤 이상이 있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통증은 매우 불편하지만, 그 통증을 통해 고장 난 부분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엑스레이와 MRI 등 여러 검사를 통해 목 디스크에 문제가 있고, 어깨 인대 하나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하나씩 찾아가고 있습니다. 분노하고 싫어한다고 통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통증을 통해 고장 난 부분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고 그 경중에 따라 더 위급하고 더 중요한 문제를 가려내어 함께 해결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2주 전에 인도네시아 아체 지역에 큰 홍수가 발생했습니다. 저는 뉴스를 통해 그 소식을 접하고 그곳으로 사람을 파견했습니다. 그런데 자카르타에 사는 인도네시아 사람들 대부분은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떤 이유로 정보가 차단되거나 일부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가까이에 있어도 알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면 그것이 없는 일처럼 여겨집니다. 물론 많은 정보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조금만 잘 살펴보면 그 안에 유리한 점도 많다는 관점에 서면 좋겠습니다.”
“Thank you so much for that perspective on how our bodies are related to the world. This is very helpful to reflect on.”
(몸을 예시로 세상을 보는 관점도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들은 내용을 곱씹어 생각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다양한 질문에 답변을 하다 보니 마쳐야 할 시간을 훌쩍 지났습니다. 다음에 다시 궁금한 점을 해소하는 시간을 갖기로 하고 10시가 다 되어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학생들은 그룹별로 화상 회의 방에 모여 마음 나누기 시간을 이어갔습니다.
스님은 휴식할 틈도 없이 10시부터 정토불교대학 학생들과 온라인으로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2000여 명의 학생들이 생방송에 접속하자 삼귀의와 수행문을 낭독한 후 학생들의 지난 달 실천 활동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습니다.

각 교실마다 다양한 환경 실천을 진행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학생들의 소감을 들어본 후 다 함께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웃으며 인사말을 했습니다. 스님은 왜 부처님의 일생을 공부해야 하는지 강조한 후 지난주에 필리핀 민다나오를 방문하여 원주민 학교와 장애 아동 특수 학교 준공식을 하고 온 소식을 공유해 주었습니다.

“불교의 기본 사상에는 사회성이나 역사성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당시의 사회적 모순에 어떻게 대응하셨는지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일생을 공부해 보면,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 역사적·사회적 존재로서의 부처님이 당대의 사회적 모순과 혼란을 어떻게 마주하고 헤쳐 나가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불교가 바라보는 사회적 정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 정의는 무엇인지, 나아가 어떤 관점으로 사회 문제에 대응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일생은 곧 불교의 사회관과 실천관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불교를 접해 오면서, 불교 사상과 교리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점이 무척 좋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불교계에서 일어나는 일들, 절에 계신 스님들의 생활, 종단의 활동 등을 보며 큰 실망을 느꼈습니다. 노동 조건은 열악하고 농촌은 붕괴되며 도시 주민들의 삶이 고통에 놓인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사회 전반에 민주화의 열풍이 불고 있었지만, 불교계는 그러한 사회적 문제를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일부 불교계 지도자들은 독재 정권과 결탁하여 정부로부터 각종 혜택을 받는 데 급급했습니다. 그로 인해 저는 깊은 실망을 느끼며 불교계를 떠나야 하나 하는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다시 부처님의 일생을 공부하면서, 제가 알고 있던 불교가 본래의 불교가 아니었음을 자각하게 되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조금이나마 더 제대로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부처님의 일생을 공부하는 데 거부감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필리핀 민다나오를 다녀왔습니다. 민다나오는 이슬람교와 기독교 사이에 갈등이 있고 MILF(Moro Islamic Liberation Front)라고 하는 이슬람 반군 단체 때문에 오랫동안 전쟁 상태였습니다. 이런 분쟁 지역은 치안 유지가 안 되어 학교가 없습니다. 산에는 원주민들이 사는데 거기는 신인민군이라고 하는 공산 반군 NPA(New People Army)가 활동합니다. 이 지역도 분쟁 지역인데 대부분 흩어져서 소수로 사니까 학교 교육을 받을 기회가 더더욱 없습니다. 이렇게 건강한 아이들도 교육의 기회를 잡기 어려운 조건이다 보니,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교육의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JTS는 군마다 중앙초등학교에 1개의 장애 아동 특수 학교를 만들어 장애가 있는 아이들도 교육의 기회를 얻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오지에 있는 아이들도 교육의 기회를 얻어야 한다. 장애가 있는 아이들도 배움의 기회를 얻어야 한다. 분쟁 지역에 있는 아이들도 배움의 기회를 얻어야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는 제때 배울 기회를 얻을 권리가 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산간 오지에 원주민 학교를 세우고, 읍내에는 장애 아동 특수 학교를 세우고, 분쟁 지역에도 학교를 세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올해는 15개의 학교를 지었습니다. 산간 오지 원주민 마을에 10개의 학교를 짓고, 장애 아동 특수 학교를 5개 지었습니다.
여러분이 준공식 모습을 모두 영상으로 보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으니까 한 개만 보겠습니다. 제가 2년 전 처음 답사할 때의 모습, 마을 주민들이 함께 공사하는 과정, 그리고 지금 학교가 어떻게 완공되었는지 잠깐 보겠습니다.”

이어서 영상을 함께 보았습니다.
영상이 끝나고 다시 스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하나의 학교를 짓기 위해서는 JTS 활동가들이 마을을 10번도 넘게 방문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학교가 제대로 지어집니다. 이렇게 여러분이 낸 작은 보시금이 그들에게는 큰 희망이 됩니다. 여러분께서 보시하신 돈이 허투루 낭비되지 않고 이렇게 알뜰하게 쓰여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되고 있다는 점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학생들은 지난 9월에 입학해 ‘근본 불교’ 교과 공부를 마친 후 ‘인간 붓다’ 교과를 2회차 수업까지 진행했습니다. 지난 학습 내용 중에 궁금한 점이 있는 사람은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두 시간 동안 일곱 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자신의 잘못은 알아차렸지만 후회와 슬픔이 사라지지 않고 독립한 큰아들과의 관계가 마음에 걸린다며, 어떻게 하면 편안한 마음으로 아들을 바라볼 수 있는지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수업에서 참회는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고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런 알아차림을 통해서 마음속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이 수행의 과정이라고 이해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치를 제 일상에 적용해 보면 저는 과거의 잘못은 깨달았는데 아직도 마음이 여전히 불편합니다. 특히 큰 아들을 보는 제 마음이 무거운데요. 아들은 지금 만 19세이고 어릴 적 게임 문제 등으로 아빠와 갈등을 겪었습니다.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이번엔 집에 늦게 오는 문제로 아빠와 다투었고, 친구와 살겠다며 독립을 했습니다. 제가 법문을 공부하면서 되돌아보니 아이를 키울 때 제가 엄마로서 무지했던 것 같습니다. 아이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고, 또 어른들의 가치만 강요해서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제가 지금 후회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을 어떻게 참회로 전환해서 아이를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지금 본인이 잘났다고 생각하니 그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나는 잘난 사람인데 어떻게 잘난 내가 그런 실수를 했지?' 하고 생각하니 본인이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후회가 된다는 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스스로가 잘난 존재가 아니고 잘못할 수도 있다고 알면 됩니다. 본인이 부처님도 아니고 예수님도 아니고 공자님도 아니잖아요. 신사임당처럼 훌륭한 엄마도 아니고 그냥 보통 사람이잖아요. 그러니 어리석기도 하고, 아이를 제대로 못 키울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런 잘못을 할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인정하면 됩니다. 그런데 잘못한 자기를 인정하지 못하니까 자꾸 후회가 되는 거예요. '그때 안 그랬으면...'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겁니다.
요즘은 아이를 안 낳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런데 질문자는 애를 낳았잖아요. 아이가 사고를 쳐서 범법 소년이 된 것도 아니고 고등학교도 졸업을 했잖아요. 그 정도로 했으면 잘된 거예요. 이제 스무 살이 넘었으니까 '자기가 알아서 살겠지, 내 할 일은 다했다. 조금 부족한 게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내 능력은 그 정도밖에 안 되었어.' 이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앞으로 어리석지 않으면 됩니다. 불교도 배우고 정토회도 다니니까 앞으로는 바보 같은 짓을 안 하면 됩니다. 100프로는 아니더라도 예전보다는 좀 나아지도록 하면 됩니다. 아들이 이제는 성인이 됐으니까 어른으로 인정해 주고, 아이의 얘기도 경청해서 들어주세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네 생각은 그렇구나.' 이렇게 인정을 먼저 해 준 다음에 '그런데 엄마 생각은 이랬으면 좋겠다.' 하고 조언도 해주세요. 그렇게 살면 됩니다.

본인이 잘못했다는 걸 알고 난 다음에도 자꾸 후회가 되는 이유는 '나는 잘못할 수 없는 사람이다.' 하는 마음이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잘못한 것을 지금 내가 못 놓는 거예요. 그러나 질문자는 보통 사람이고 잘못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 됩니다. 물론 잘 한 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잘못한 것도 없어요. 그만큼 키운 것도 본인 수준에서는 잘했다고 생각하고, 부족한 것은 앞으로 잘해 나가면 됩니다. 아들이 엄마의 잘못을 얘기하면 '그때 엄마가 부족해서 그랬어. 엄마가 잘못했어.'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죄의식을 가지고 잘못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네가 볼 때는 엄마가 훌륭해 보이겠지만, 엄마가 어리석어서 그랬어. 앞으로 잘할게.' 이런 식으로 말하고 넘어가면 됩니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좀 뻔뻔해도 됩니다."
"지인들이 아들은 지금 뭘 하고 있냐고 물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무겁습니다."
"아들은 지금 아르바이트하고 있어요?."
"네. 일하고 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되죠. '고등학교는 졸업했는데 대학을 안 가고 지금 친구하고 살면서 아르바이트 하고 있어.'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그게 왜 부끄러운가요? 아들이 좋은 대학에 갔다고 하면서 아들을 통해 자기 위세를 좀 떨쳐보고 싶어서 그래요? 아들은 이제 성인이 됐기 때문에 타인입니다. 아들의 성취를 통해 내가 잘나 보이려고 할 필요도 없고, 아들 때문에 내가 위축될 필요도 없어요. 아들이 감옥에 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남을 해치는 것도 아니잖아요. 고등학교 졸업해서 자립했으면 잘한 거예요. '우리 아들은 독립해서 사회생활부터 해보고 나중에 필요하면 대학에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일찍 독립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108배가 수행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장애가 있는 경우 대체 수행은 무엇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108배와 기도문 수행은 어떤 변화와 수행적 의미를 가져다 줄까요?
누군가의 이익과 편리함 뒤에 다른 누군가의 고통과 희생이 있는 현실에서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까요?
법륜스님의 법문에 크게 의지하고 있는데, 언젠가 스님이 법문을 못 하실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스님의 법문을 AI에 학습시켜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 이렇게 해도 괜찮을까요?
수행 덕분에 마음은 편안해졌지만, 일상 대화에서 가볍게 넘기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차갑다고 느낍니다. 수행을 하면서도 공감 능력을 잃지 않고 소통하려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좋을까요?
명상을 통해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의 실상을 알게 되나요? 아니면 순간 순간의 알아차림이 곧 깨달음의 세계인가요?
하기 싫다는 마음이 일어날수록 오히려 일단 해보려는 마음을 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어떤 때는 욕심으로 느껴집니다. 발심과 욕심을 어떻게 구분하나요?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하고 나니 12시가 다 되었습니다. 스님은 어깨와 팔 통증이 심해서 더 질문을 받지 못하고 몸이 건강해지면 다음 시간에 더 많은 질문을 받기로 하고 즉문즉설을 마쳤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1시에는 유엔 세계 명상의 날 한국 위원회 출범식에 참가하기 위해 봉은사로 향했습니다.


행사가 열리는 서울 봉은회관에 1시 40분에 도착한 스님은 유엔 세계 명상의 날 한국 위원회 공동 위원장을 맡은 임원들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공동 위원장은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 원불교 이경열 교무, 대한성공회 윤종모 주교, 국회 마음챙김포럼 대표 조승래 의원, 대한 명상 의학회 이강욱 회장, 한국명상학회 육영숙 회장과 더불어 정토회 지도 법사 법륜스님이 함께 맡았습니다.

오후 2시가 되자 다 함께 행사장으로 이동하여 유엔 세계 명상의 날 기념행사 및 한국 위원회 출범식을 시작했습니다.

한국 위원회는 조계종 선 명상 위원장 금강 스님의 경과보고와 규약 제정, 위원장 및 임원 선출을 통해 조직 출범을 공식화했습니다. 집행 위원회와 자문 위원단에도 명상 의학·교육·시민사회 분야 인사 및 종교계와 명상 현장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진우 스님의 기념사를 시작으로 국내외 각계 각층의 축사가 있은 후 명상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아가고자 하는 어린이·청소년들이 ‘미래세대를 위한 제안’을 발표했습니다.

출범식 말미에는 공동 위원장단이 함께 낭독하는 ‘마음 평안 명상’이 진행되었습니다. 육영숙 한국명상학회장이 ‘관찰’을 낭독하는 것을 시작으로, 조승래 국회의원이 ‘멈춤’을, 윤종모 대한성공회 주교가 ‘연결’을, 이경열 원불교 교무가 ‘자비’를, 법륜스님이 ‘통찰과 용서’를, 이강욱 대한명상의학회장이 ‘이완’을 차례로 낭독했습니다. 마지막에는 하나의 마음으로 평화가 되자는 공동 제창이 울려 퍼졌습니다.

“마음이 밝아지면 세상이 밝아집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 우리는 하나의 마음으로 평화가 됩니다.”

이어서 참석한 각계 각층이 무대 앞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은 후 1부 행사를 마쳤습니다.

2부에서는 ‘세계 명상의 흐름과 한국 명상의 과제’를 주제로 K-meditation 한국 명상 컨퍼런스가 진행됐습니다. 이강욱 대한명상의학회장은 명상의 과학적 연구 성과와 전망을, 혜주 스님은 세계 명상 교육의 흐름과 한국의 과제를, 성해영 서울대 교수는 세계 명상의 흐름 속에서 한국 명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각각 발표했습니다.


스님은 끝까지 행사장에 남아 전문가들의 발표 내용을 경청했습니다.

행사를 마치며 주최측에서 법륜스님에게 닫는 말씀을 요청했습니다. 스님은 간단히 오늘 전문가들의 발표 내용을 들은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세계 명상의 날 한국 위원회가 출범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많은 전문가들의 얘기를 잘 들었습니다. 이런 과제들을 한 사람과 한 단체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힘을 합하고 다중의 지혜를 모아서 함께 풀어 나갔으면 합니다.”

행사를 마친 후 스님은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저녁 6시가 되어 행사장을 나왔습니다.

해가 저물고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돌아온 스님은 저녁 식사를 한 후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다가 저녁 8시 30분이 되어 세계 명상의 날 기념 명상 법회를 하기 위해 3층 설법전으로 향했습니다.

유엔 세계 명상의 날 위원회(WMDC)에서 영국 그리니치 천문대 기준 낮 12시에 맞춰, 한국 시각으로는 밤 9시에 맞춰 명상 종을 치고, 15분간 온라인으로 전 세계 동시 명상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정토회에서도 이에 동참하기 위해 8시 30분부터 사전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정토회 회원들 4천 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먼저 스님이 15분 명상 행사의 취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오늘은 유엔이 제정한 세계 명상의 날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오늘날은 과학 기술 문명이 고도로 발전하여 인공지능을 비롯한 여러 기술들이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발달했습니다. 또한 물자의 대량 생산으로 물질 문명 역시 고도로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에 비례해 현대인들은 더 행복해졌을까요? 한국을 예로 들면, 제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던 1960년 당시 1인당 GDP는 98달러였습니다. 그때는 100달러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1인당 GDP는 약 3만 7천 달러에 이릅니다. 물질적 지수로만 보면 약 370배가 증가한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복 지수는 그만큼 높아지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사람들은 과거의 사람들보다 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번뇌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불안은 더 커지고 갈등은 더 많아졌으며, 결혼 이후 이혼율도 높아지고 자살률 또한 증가했습니다. 이처럼 물질 문명의 발달만으로는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흔히 정신 작용이라 부르거나, 종교적으로는 영성이라고도 하는 이 마음을 정화해야만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야 갈등도 줄어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물질 문명의 발전을 위해 쉼 없이 질주해 왔습니다. 이제는 잠시 멈춰 서서 과연 이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늘 옳다고 주장해 온 나의 생각과 신념, 믿음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돌아보는, 즉 자기 자신을 살피는 성찰이 필요합니다. 이는 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전 인류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환경 운동을 할 때 에너지 절약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5분 전기 불 끄기 운동’을 하듯이, 전 세계 사람들이 잠시 동작과 생각을 멈추고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껴 세계 명상의 날을 제정했습니다. 이날을 계기로 우리 모두가 각성하자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날을 동짓날로 정했습니다. 해가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동지는, 다르게 해석하면 고통이 가장 깊은 시기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가장 어둡다는 것은 다음 날부터 해가 점점 길어지고 빛이 늘어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고통에서 지혜의 빛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 명상의 목표이기 때문에 세계 명상의 날을 12월 21일, 동짓날로 정했습니다. 물론 동지는 해에 따라 21일이나 22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난해 유엔은 12월 21일을 세계 명상의 날로 정했고, 오늘은 그 두 번째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이날을 기해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정오에 종을 울리면, 전 세계 사람들이 모든 동작과 생각을 멈추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곳곳에서 고요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특정 종교에 국한된 행사가 아닙니다. 불교나 힌두교는 물론이고, 개신교, 가톨릭, 유대교, 시크교, 유교 등 어떤 종교를 믿든, 혹은 종교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종교를 초월해 보편적으로 생각을 잠시 멈추어 보자는 취지로 세계 명상의 날이 제정되었고, 오늘 우리는 15분 동안 멈춤과 정적, 고요 적정의 시간에 들어가 보려 합니다. 올해는 전 세계가 같은 시간에 명상을 해 보자는 뜻에서 이러한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대한성공회 박경조 전 주교님께서 ‘기독교에서 바라본 명상의 의미’를 설명해 주신 영상을 함께 보았습니다.

“흔히 명상하면 불교에만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기독교 안에서도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명상의 전통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침묵기도, 관상 기도, 정감의 기도 등 여러 이름으로 부르지만, 표현만 다를 뿐 궁극적으로는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상 기도란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조건은 늘 생각이 복잡하고 감정이 얽혀 있기에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은 그 너머에 사랑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참된 쉼을 얻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 순간을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 여기며, 그분 안에서 집착과 탐욕을 내려놓고 참된 평화와 기쁨, 쉼을 경험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남김없이 드러낸 표징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하신 분이셨고, 그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내게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바탕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믿고, 그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 관상 기도의 길을 걸어갑니다. 오랜 수도원 전통 속에서 이어져 온 이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침묵으로 머물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께 의지하는 기도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참된 평화를 맛보고, 우리 안에는 이웃을 향한 새로운 연민과 사랑의 힘이 솟아납니다.
길과 표현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결국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참된 진리와 생명, 그리고 행복을 향한 같은 길이라고 믿습니다. 세계 명상의 날을 맞아, 여러분 모두가 자기 내면에서 참된 평화를 발견하는 여정을 걸어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어서 처음 명상하는 분들을 위해 스님이 명상 방법을 간단하게 안내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은 불교나 기독교, 힌두교, 무슬림 등 특정한 종교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종교가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 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함께 명상하는 시간입니다. 명상의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어떻게 하면 고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은 호흡에 집중하며 알아차리는 명상을 여러분과 함께해 보고자 합니다. 물론 이 시간에 각자의 종교나 개인적인 방식의 명상을 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특별한 방법이 없는 분들은 ‘수식관’이라 하여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는 명상을 함께 해보겠습니다.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애써 막지 말고 그대로 두고, 호흡만 편안하게 알아차리시면 됩니다. 그러면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쉬게 되어 여러분의 피로가 풀리게 됩니다. 이는 잠자는 것보다도 뇌의 피로를 더 깊이 풀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안내를 마치자 곧 밤 9시 정각이 되었습니다. 스위스, 인도,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도 유엔 세계 명상의 날 위원회(WMDC) 소속 회원들이 화상 회의 방에 접속했습니다.

명상 종이 울리자 불이 꺼지고 다함께 15분간 명상에 들어갔습니다.

모든 것을 잠시 멈추어 보았습니다. 쫓기듯 달려온 세상의 속도를 잠시 내려놓아 보았습니다.

다시 명상 종이 울리고 설법전이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이어서 세계 명상의 날 기념행사를 마치며 스님이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편안하셨습니까?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줄곧 달리기에 바빴습니다. 요즘에는 좋은 유치원에 들어가기 위한 이른바 ‘4세 고시’가 있다고 하고, 좋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7세 고시’도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몰리듯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대로 굴러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허겁지겁 대학까지 마치고 성인이 되었는데도, 막상 스스로 살아가려 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는 상태가 됩니다. 특히 요즘 청년들은 세상과 일상을 스스로 살아가는 데 대해 큰 불안을 느끼는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생각으로 인해 불안을 만들어 냅니다. 지금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어떤 생각을 하게 되면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그 생각이 마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마음에 작용하는 것입니다. 또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면 그 기억이 재현되면서 괴로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고 괴로워질 때는 대개 과거의 기억을 되새길 때이고, 초조하고 불안하며 근심 걱정에 빠질 때는 미래의 일을 골똘히 생각하면서 심리가 불안해지기 때문입니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모든 생각을 멈추고, 지금 여기에서의 내 마음 상태나 호흡에만 집중하면 불안할 일도, 괴로워할 일도, 미워할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편안하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쉬는 시간이 주어져도, 몸은 가만히 있을 수 있어도 생각은 쉽게 멈추지 않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생각이 일어납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정보 처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반면 명상을 통해 어느 정도 생각을 멈추게 되면 우리 몸이 사용하는 에너지는 크게 줄어듭니다. 우리가 쓰는 에너지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은 체온 유지에 사용되고, 두 번째는 운동 에너지입니다. 즉, 몸을 움직이면서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이고, 세 번째가 바로 생각하는 데 사용되는 에너지입니다. 머리는 우리 몸에서 차지하는 부피는 작지만, 데이터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에너지는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동작과 생각을 멈추면 열에너지로 빠져나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에너지 사용이 거의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단식을 해보면 처음 며칠만 조금 힘들지, 사실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명상 중에는 에너지 소모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도 엄청나게 생각을 하고, 오래 앉아 있으면 힘들어하며, 각오하고 용을 쓰느라 오히려 더 많은 에너지를 씁니다. 그래서 편안히 쉬라고 해도, 밤에 잠자는 모습을 보면 코를 골며 마치 큰일이라도 한 것처럼 잠을 잡니다. 처음에는 온몸이 긴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명상할 때는 첫째,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는 한가한 마음을 내는 것, 즉 아무 할 일도 없다는 자세로 임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면 머리와 뇌가 쉬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멈춰야 하는데, 잘 멈춰지지 않는다면 억지로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면 됩니다. 일어나는 대로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자신도 모르게 의도가 개입된다는 점입니다. 한 생각이 잠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에 꼬리를 물며 이야기를 만들어 갑니다. 이것을 망상을 피운다고 합니다. 상념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은 뇌의 자연스러운 작용이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됩니다.
이렇게 명상을 제대로 하면 잠을 자는 것보다도 더 깊이 쉬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잠을 자면서도 꿈을 꾸기 때문입니다. 기억을 되살리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상에 들어가 생각을 멈추거나, 생각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정도가 되면, 자는 것보다 더 뇌가 쉬어져 오히려 잠이 오지 않는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일부러 잠을 안 자는 것이 아니라, 명상 중에 잠과 같은 휴식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즉, 생각을 너무 많이 합니다. 지나간 생각이나 미래에 대한 생각을 반복하다 보면 머리에 열이 날 정도입니다. 컴퓨터를 오래 사용하면 열이 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정신 질환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줄여야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생각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 머리에 쌓인 열을 식히려면 하체 운동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절을 하거나 걷는 등의 활동으로 하체가 튼튼해지면 정신이 맑아지고 머리의 열도 식게 됩니다. 옛말에 손과 발은 따뜻하고 머리는 시원해야 한다고 하지요.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운동할 시간은 거의 없고, 매일 컴퓨터 앞에서 생각을 많이 하며 살아갑니다. 그 결과 신체 건강뿐 아니라 정신 건강도 점점 나빠집니다.
요즘은 초등학생 가운데서도 불안증과 우울증의 비율이 30퍼센트에 가까워졌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우리의 정신 건강 상태는 매우 좋지 않습니다. 스스로가 불안하고 괴로우니,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도 더 심해집니다. 타인의 생각을 듣고 이해하며 포용할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힘들기 때문에 갈등이 깊어지고, 외로움을 느끼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늘어나며 여러 사회적 증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더 심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이 문제는 경제적 성장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정신 건강을 잘 유지하려면 깨어 있음이 필요합니다. 꼭 명상을 하지 않더라도, 늘 깨어서 알아차리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저는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루에 몇 분이라도 이렇게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이 정신 건강을 지키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어떤 종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세계 명상의 날을 제정하고, 이러한 명상을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권유하는 행사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을 하다가 몸이 많이 피곤하면 어떻게 합니까? 중간중간 휴식 시간을 갖고 쉬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뇌에도 중간중간 휴식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런 취지에서 전 세계 사람들이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낮 12시부터 15분 간 명상을 하기로 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도 한국 시간으로는 밤 9시부터 15분 동안 이렇게 명상을 해봤습니다.”

내년 3월에 예정된 세계 명상의 날 포럼은 정토회가 주관하여 한국에서 개최하기로 했습니다. 다음 행사를 기약하며 밤 9시 30분이 되어 세계 명상의 날 기념 법회를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정토사회문화회관 3층 설법전에서 많은 대중이 참석한 가운데 수행의 뜻을 새롭게 다지는 동지 법회를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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