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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부탄에 도착하여 중부 산악 지대의 오지 마을인 판탕까지 이동하기로 한 날입니다.
스님은 어젯밤 방콕 공항에 도착하여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가, 방콕 공항에서 새벽 5시 비행기를 타고 부탄 파로(Paro)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현지 시각으로 오전 7시에 파로 공항 상공에 도착했지만, 현지에는 많은 비가 내리고 짙은 안개가 껴 있었습니다. 결국 비행기는 착륙하지 못하고 한참 동안 상공을 선회해야 했습니다.

결국 착륙이 어려워진 비행기는 인도의 구와하티(Guwahati) 공항으로 회항하여 임시 착륙했습니다. 그곳에서 6시간을 대기한 후, 오후 2시 40분에 다시 파로 공항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날씨는 좋지 않았고, 이번에도 비행기는 공항 주변을 한동안 돌며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오후 3시 40분에 파로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습니다. 착륙하는 순간, 탑승객들은 안도의 박수를 치며 환호했습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수하물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서자, 부탄 중앙 정부의 이시 님이 스님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아침부터 공항에서 스님을 기다려온 이시 님에게 스님은 따뜻한 인사를 건넸습니다.
“오래 기다리느라 수고했어요.”

오후 4시, 파로 공항을 떠나 중부 지역의 트롱사(Trongsa)로 출발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젬강(Zhemgang) 지역까지 이동하여, JTS 부탄 사무실이 있는 판탕까지 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비행기 지연으로 인해 오늘은 중간 지점인 트롱사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습니다. 이에 따라 내일 오전 일정도 급히 조정되었습니다.
트롱사까지 가는 길은 끝없이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산길이었습니다. 비가 계속 내리는 가운데 차는 해발 3,000m가 넘는 고개를 두 번이나 넘었습니다. 중간에 식당에 들러 간단히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차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동행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날이 저물고 밤이 깊었습니다. 파로에서부터 장장 6시간을 이동한 끝에 밤 10시가 넘어 트롱사에 도착했습니다.
내일은 새벽 5시에 판탕으로 이동한 후 오전에는 부다시 초등학교 상수도 보수 현장을 방문하고, 이어서 식수 프로젝트 준공식을 진행합니다. 오후에는 람탕(Lamtang)과 리마퐁(Limapong)에서 새로 지은 4가구의 주택 준공식을 차례로 가진 뒤 주민들과 대화를 나눌 예정입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24일 서초구청 초청으로 열린 즉문즉설 강연에서 스님과 질문자가 나눈 대화 내용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저는 무슨 일을 하든 속도가 느린 편입니다. 항상 제 속도에 맞춰 살았는데요. 30대 후반이 되어 주변을 돌아보니, 마치 제가 자전거를 타고 국도를 달리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조바심이 나서 덩달아 속도를 내다 보면 금세 탈이 납니다. 어떻게 하면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제 속도를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요?”
“우리 속담에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속담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경험이 녹아든 지혜입니다. 누구나 다 황새일 수는 없습니다. 새 중에는 황새도 있고, 뱁새도 있는 법이지요. 황새가 빠르다고 잘하고, 뱁새가 느리다고 못하는 건 아닙니다. 황새를 흉내 내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거예요.
자기 속도대로 하면 됩니다. 내 속도대로 살다가 사회적으로 조금 불이익이 생긴다면, 그건 감수해야죠. 속도를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속도가 느린 사람이 어느 정도 손해를 볼 수밖에 없겠죠. 예를 들어 산에서 나무를 하거나 곡괭이로 땅을 파던 시대에는 남녀 간의 체력 차이 때문에 그에 따라 임금 차이가 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단순히 남녀평등의 문제로만 보면 안 됩니다. 힘을 기준으로 삼는 사회에서는 남성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에요. 마찬가지로 속도를 기준으로 삼는 사회에서는 속도가 빠른 사람이 유리하고, 느린 사람은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곡괭이 대신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잖아요. 포클레인을 다룰 수만 있다면 남녀의 체력 차이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전처럼 힘이 기준이던 자연 상태나 봉건 사회에서는 남성 우위가 당연했지만, 현대 사회는 힘이 아니라 지식이나 기술이 중요하죠. 특히 디지털 시대에는 섬세함과 집중력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오히려 여성이 사회적 생존 환경에서 더 유리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미국에서는 ‘트럼프주의’처럼 남성과 백인 중심의 사회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힘이 기준이던 과거 사회에 대한 향수와 추억이 되살아난 거예요. 불과 50년 전만 해도 미국 사회의 주류는 백인 남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유색 인종이나 여성들이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창의력이나 아이디어 면에서도 여성들이 훨씬 두각을 보이고 있어요. 이번에 세계적으로 흥행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를 만든 사람도 한국계 여성이잖아요. 유색 인종 여성으로서 차별을 겪으면서도 백인 남성 중심의 문화 속에서 더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단순한 개인의 성공을 넘어, 인종 차별과 성차별을 뛰어넘은 신호로 볼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어떤 문명이든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그 문명의 주변에서 반동이 일어납니다.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이 생기고, 그 시기를 지나면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게 되는 거예요.
지금 학교만 봐도 여학생들의 학업 성취도가 더 높습니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여성들이 더 성실하고 집중력이 뛰어납니다. 남학생들은 술자리나 이런저런 잡다한 데 관심이 많지만, 여학생들은 훨씬 학업에 집중력이 높아요. 그래서 요즘 20대 남성들 사이에서 이런 변화에 대한 저항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남녀평등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지만, 남성 입장에서는 유리한 게 없다고 느끼는 거예요. ‘집에서는 아들이라고 특별히 대우받지 않고 자랐고, 학교에서도 여학생과 똑같이 경쟁했는데 왜 군대는 남자만 가고 숙직은 왜 남자만 하는가?’ 하는 불만이 쌓이다 보니 자연스레 저항심이 생겨나는 겁니다. 경쟁에서 밀린 경험이 더해지면서 그 저항이 사회적인 성향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제가 얼마 전 전문가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우리나라 세대별 정치 성향을 보면 70대가 가장 보수적이고, 그다음이 20대 남성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젊을수록 진보적인데, 지금은 오히려 20대 남성이 60대보다 더 보수적이에요. 현재는 40~50대가 가장 진보적이고, 20~30대 초반 남성은 보수 성향이 강하고, 60대는 보수와 진보가 반반 정도라고 합니다. 이런 진보와 보수의 경향은 단순한 정치 이념을 넘어 사회 전반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질문자도 자기 속도를 유지하면서 그로 인한 불이익이 생기면 어느 정도 감수하면 됩니다. 불이익이 쌓이면 속도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사회를 비판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 사회가 그런 기준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이 시스템 속에서 속도가 느리면 다소 불리한 건 어쩔 수 없어요. 그 정도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미국이나 유럽에 갔는데,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식당 출입이나 대학 입학을 제한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인종 차별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고소를 해야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고소해서라도 바로잡아야 해요. 그러나 백인 교수에 대해 나와 비슷한 지원자 가운데 백인 남성이 채용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차별이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비슷한 조건이라면 같은 고향 사람이나 같은 종교인에게 호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런 문화적 친밀감까지 모두 차별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는 감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JTS에서 자선 활동이나 사회 사업을 하다 보면 시민 연대 활동에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기독교 단체입니다. 저만 빼고 다 기독교인이에요. 그러다 보니 종교 모임이 아닌데도 기도하고 시작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걸 문제 삼으면 함께 활동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응을 합니다. 밥을 먹을 때 ‘목사님, 기도해 주시죠.’라고 먼저 제안합니다. 그러면 차별이 아니라 교류가 되죠. 내가 처한 상황이나 조건을 불평하기보다 그 안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질문자도 자기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세요. 다만 그로 인한 불이익이 너무 크다면 조금씩 연습해서 속도를 서서히 높여 보는 것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속도가 시속 10km인데 커트라인이 15km라면, 연습해서 그 기준에 맞추는 노력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그 속도를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열등함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평가 기준이 그렇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조선 시대에는 글을 잘 쓰고 시를 짓는 능력이 과거 시험의 기준이었지만 지금은 영어, 수학, 과학이 기준이 되듯이, 시대마다 평가의 기준은 달라집니다. 지금 이 시대의 기준에 내가 좀 불리하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열등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오늘날의 사회가 속도를 중시하고 있으니, 그 안에서 생기는 불이익은 어느 정도 감수하거나, 병나지 않을 만큼만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저랑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에도 속도가 유난히 느린 사람이 있고, 반대로 아주 빠른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함께 있으면 갈등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래서 속도가 느린 사람은 그 특성을 이해해 주는 게 필요합니다. 내 기준으로만 판단하면 안 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속도가 조금 느릴 수 있지만, 본인은 느리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차이를 인정해 주는 게 필요합니다. 반대로 속도가 빠른 사람은 재능이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성질이 좀 급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얘기예요.” (웃음)
“네, 스님 말씀 잘 받아들이고 잘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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