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8.4. 동북아역사기행 2일째, 홀본산성, 집안(集安)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인 홀본산성에 도착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동북아역사기행 2일째입니다. 오늘은 오전에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인 홀본산성을 둘러보고, 오후에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과 환도산성을 둘러보는 일정입니다.

기행단은 숙소에서 새벽 5시에 기상하여 곧바로 버스에 짐을 싣고 홀본산성으로 향했습니다.

홀본산성이 가까워지자 옛날에 '비류수'라 불렸던 '혼강(渾江)'이 나타났습니다. 홀본산성은 혼강을 끼고 환인의 북동쪽 해발 800미터의 오녀산(五女山) 높은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오전 6시에 홀본산성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어제 보기로 했던 홀본산성을 오늘 아침에 보게 되면서 일정이 빡빡해졌습니다. 서둘러 산 중턱까지 올라가는 미니 버스로 갈아탔습니다.

미니 버스에서 내려 ‘오녀산 산성’이라고 적힌 비석 앞에서 먼저 도착한 1호차, 2호차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올라가세요. 저는 맨 뒤에 가겠습니다.”

산 중턱에서 정상까지 천 개의 계단이 쭉 놓여 있었습니다. 스님은 심장과 무릎이 좋지 않아 대중을 먼저 올려 보내고 맨 뒤에 서서 등산 스틱을 짚고 천천히 걸어 올라갔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던 계단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살짝 비가 내린 뒤라 더위가 한풀 꺾여 날이 선선했습니다.

스님보다 일찍 산성 서문에 도착한 대중은 이승용 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습니다. 홀본산성은 그야말로 절벽 위에 산성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고구려성의 특징인 개이빨식 축성법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참 설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드디어 스님이 서문에 도착하자 대중은 박수를 치며 기뻐했습니다.

서문 이후부터는 다시 스님이 설명을 이어 갔습니다.

"우리는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인 홀본산성에 도착했습니다."

전망대를 둘러본 후 행궁(行宮) 터를 지나 ‘천지’라는 팻말이 적힌 작은 연못을 지났습니다.

“이곳은 사시사철 마르지 않아서 성 안으로 식수를 공급했던 연못입니다. 말이나 짐승들이 물을 마시도록 아래쪽에도 작은 연못을 따로 분리해 놓았습니다.”

계속 길을 걷자 양식 창고 터가 나오고 이어서 병영 터가 나타났습니다.

“여기는 당시 병사들이 움막을 치고 구들을 놓아서 생활했던 곳입니다. 말하자면 군인 숙소예요. 이 구조는 불이 들어가는 골이 세 개니까 ‘세 구들 집’입니다. 저쪽에서 불을 때고, 여기에 굴뚝이 있는 거예요. 이러한 주거지가 쭉 발견된 겁니다.”

온돌이 있었던 흔적을 계속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온돌은 우리 민족에게서만 보이는 고유한 문화인데, 이곳이 고구려의 성이 틀림없구나 싶었습니다.

“저기는 구들의 뚜껑을 덮어 놨고, 여기는 뚜껑을 벗겨 놓았네요. 이것은 ‘한 구들 집’, 즉 구들이 한 개 있는 주거지예요. 여러분 모두 보일러 세대인데 구들이 뭔지 알아요?”

“예.”

“환인과 집안(集安)의 고구려 유적은 중국 정부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한 곳입니다. 중국에서는 소수 민족의 역사, 즉 ‘지방사’라고 부르는데, 실제로는 옛날 우리나라인 고구려의 문화유산입니다.”

산성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던 다양한 유적지들을 살펴본 후 드디어 남쪽의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한 장대에 도착했습니다. 고구려 당시에는 장수가 전투를 지휘하는 곳이었습니다. 아침에 날이 흐려서 전망을 볼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구름 사이로 풍경이 보였습니다.

“이야! 오늘은 전망이 잘 보이네요. 우리 중에 복 지은 사람이 있나 봐요.”

두 개의 장대에는 안전장치가 잘 마련되어 있어서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최근에 새로 설치를 했다고 합니다.

“입장료가 아깝지 않네요.”

장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혼강의 모습은 마치 백두산에 올라가서 천지를 보는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 탄성을 내지르며 삼삼오오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멋진 풍경을 뒤로하고 정상에서 동문으로 이어지는 일선천 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갔습니다.

절벽 아래로 내려오자 동쪽 성벽이 시작되는 해발 600미터 지점에서 샘터가 나타났습니다. 스님은 샘터에 손을 담가 본 후 설명을 이어 갔습니다.

이 샘터는 산 정상의 천지와 우물만으로 부족한 물 공급원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산 정상은 모두 절벽이라 서쪽에만 성벽과 성문을 만들면 될 텐데, 8부 능선 주변으로 굳이 동문과 남문을 만든 이유는 아마도 이 샘터에서 물을 공급받기 위한 목적도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동쪽 성벽이 있었던 흔적을 따라 산길을 걷자 곧이어 동문이 나타났습니다. 동문에는 공(工)자형 성문이 남아 있어서 고구려 때의 성의 특성을 잘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동문입니다. 동문이 왜 중요하냐면 성벽이 쭉 연결되다가 성문을 달려면 이렇게 구멍을 뚫어야 하잖아요. 그러면 적이 그곳으로 공격해 들어오니까 방어를 할 수 있게 옹성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성벽이 이어지다가 약간 둥근 모양으로 연결되도록 한 다음 거기에 성문을 단 거예요. 이렇게 옹성 구조를 만들면 적이 공격해 들어올 때 이쪽에서만 공격하는 게 아니고 저쪽에서도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 동문은 옹성이 공(工)자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직선으로 된 성벽에 성문이 달려 있으면 적에게 뚫리기가 쉬워요. 그걸 보완하려고 성벽이 어긋나게 만나도록 하고, 그 사이에 성문을 만들어서 옆으로 들어가도록 해 놓은 게 공(工)자형 성문입니다.

성벽 바깥쪽에 쌓은 돌은 적이 기어 올라오지 못하도록 마치 시멘트를 발라 놓은 것처럼 매끄럽게 해 놓고, 안쪽에 쌓은 돌은 무너지지 않도록 길쭉한 돌을 서로 엮어 쌓았어요. 앞이 무너져도 뒤가 무너지지 않게 만든 거죠. 하지만 저렇게만 놔두면 사람들이 밟고 올라올 수 있으니 왕궁의 성벽 같은 경우는 표면에 회를 칠해서 더 미끄럽게 만듭니다.”

비록 이끼와 풀로 덮여 있었지만 동쪽 성벽과 공자형 성문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오늘은 동쪽 성벽을 제대로 봐서 입장료가 하나도 안 아깝네요.”

동문을 지나자마자 남문이 나타났습니다.

“자, 여기는 남문입니다. 이것은 남쪽 성벽이에요. 저기 꼭대기에 점장대 보입니까? 여기서부터 절벽 밑으로 연결해서 성벽을 쫘악 쌓아 놓은 거예요. 그래야 이곳으로 못 들어오니까요. 여기도 성벽의 아랫부분에는 성벽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남문까지 보고 나와 다시 미니 버스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면 밥을 빨리 먹어야 해요. 그래야 호텔에서 그릇을 치우고 점심 준비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9시 20분부터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서둘러 식사를 한 후 10시에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집안'으로 향했습니다. 이제 기행단은 요령성을 지나 길림성으로 들어왔습니다.

환인에서 집안으로 가는 길은 북로와 남로가 있습니다. 남로로 가면 고구려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험준한 산들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볼 수가 있는데, 오늘은 일정이 급해서 도로 사정이 좋은 북로로 이동했습니다. 이동하는 동안 버스에서 스님이 고구려의 건국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생생한 고구려의 역사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지금 저희는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였던 환인을 떠나, 두 번째 수도였던 집안으로 가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역사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37년에 건국하여 668년 당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하기까지 총 705년간 유지되었습니다. 약 7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부여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어서, 부여와 고구려를 합쳐서 거의 1000년의 역사로 보기도 합니다. 방금 홀본산성에서 본 바위에 크게 '천 년의 역사'라고 쓰여 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고구려 천 년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이 되었을까요?

고조선이 한 무제의 침공으로 멸망한 후, 고조선의 땅에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면서 우리 민족은 옛 땅을 되찾기 위해 투쟁을 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 민족의 나라가 다 망한 게 아닙니다. 삼조선(또는 삼한) 가운데 하나인 번조선이 멸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여의 왕은 한나라와 싸우는 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고두막’이라는 인물이 의병을 일으켜 다물군을 이끌고 한나라의 침공을 물리치기 위해 투쟁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여의 왕위에 오르자 기존의 부여 왕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부여'를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고구려의 건국 신화에 따르면 고주몽은 동부여에서 세 친구와 함께 탈출해 남하한 뒤, 졸본의 홀본산성에 자리를 잡고 나라를 세웠다고 합니다. 주몽은 어릴 때 자라면서 금와왕의 친자가 아니라는 이유, 그리고 서자라는 이유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왕궁에서 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태자인 대소의 모함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도망을 가게 된 것이죠.

또 다른 기록에서는 고주몽이 부여 왕족 출신으로 졸본 부여의 공주였던 소서노와 혼인하고 그녀의 두 아들을 양자로 삼은 뒤, 북부여의 왕위를 계승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에 따르면 고주몽은 단순히 새로운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부여 왕통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고구려’라는 국호를 통해 자신의 통치의 정당성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원전 37년에 고주몽이 나라를 세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몽의 아들 유리가 주몽을 찾아옵니다. 주몽은 동부여에 있을 때 예씨 부인과 결혼을 했었다고 합니다. 위험을 느끼자 어머니와 아내를 두고 혼자 도망을 왔던 거죠. 도망을 와서 소서노와 결혼해 살면서도 늘 어머니와 아내인 예씨 부인에 대해 마음을 두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들이 찾아와서 자기가 예씨 부인에게서 태어난 주몽의 적자라고 얘기를 한 것입니다. 옛날이야기에는 유리가 자신이 적자임을 증명하는 증표를 가지고 옵니다. 고주몽이 부여를 떠날 때 칼을 부러뜨려서 그 칼끝을 마루 밑에 묻어 두며 ‘만약에 내가 떠난 뒤 아들이 태어난다면 이 증표를 가지고 찾아오면 아들로 인정하겠다.’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씨 부인에게서 태어난 유리는 많은 노력 끝에 그 징표를 찾아서 주몽에게 갔고, 주몽은 그가 자기 아들임을 확인하자 적자임을 인정하고 태자의 지위를 유리에게 주게 됩니다. 그리고 한 5개월 후에 주몽이 죽게 됩니다.

이로 인해 많은 정치적 혼란이 일어나죠. 소서노와 두 아들, 비류와 온조라는 북부여 세력을 기반으로 주몽이 왕이 되었잖아요. 그러나 주몽도 이주민, 유리도 이주민이었습니다. 이주민인 유리에게 태자의 자리가 주어지고 결국 왕위에 오르게 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그 후 온조는 백제를 건국했습니다. 그러니 소서노는 남편을 내세워서 고구려를 세우고, 아들을 내세워서 백제를 건국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녀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정치 지도자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유리왕은 즉위 후 정치적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수도를 옮겼습니다. 소서노 세력의 기반이 있는 홀본성은 정치적으로 자기 기반이 아니었으니까요. 옛날에는 수도에 살던 토착 정치 세력의 권력이나 기득권을 없애려면 수도를 옮겨야 했습니다.

역사 기록에는 어느 날 제사를 지내려고 잡아둔 돼지가 도망을 가버렸다고 합니다. 도망친 돼지를 며칠 추격해서 잡고 보니 그 주위 환경이 너무 좋았다고 해요. 그곳이 바로 지금의 집안, 즉 환도산성과 국내성이 있는 곳입니다. 날씨도 온화하고 적을 방어하기도 아주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수도로 하면 어떻겠냐고 건의했고, 왕이 그 말을 듣고 수도를 이곳 집안으로 옮겼다고 해요. 물론 토착 세력들은 천도를 강력히 반대했겠죠. 그 반대 세력들을 물리치고 유리왕은 A.D. 3년에 이곳 집안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천도와 관련하여 이런 돼지 얘기가 나온 이유는 아마도 수도를 옳기는 데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신이 점지하는 일이다.’ 하고 종교적으로 설득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국내성은 427년에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425년간 고구려의 수도였습니다. 국내성이 수도였던 425년간은 고구려의 역사에서 거의 60퍼센트의 기간을 차지합니다. 고구려가 가장 강성한 시기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는 왕릉과 귀족의 무덤이 만 1000개가 넘게 산재해 있습니다. 그러니 고구려 문화의 진수가 이곳 집안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버스로 2시간을 이동하여 12시 30분에 집안에 도착했습니다. 가장 먼저 장군총으로 향했습니다.

장군총 주차장에 도착하자 중국 공안이 나타나서 일대일로 질문을 하며 신원 확인을 했습니다. 직업, 주소 등을 다 기록하도록 해서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중국 공안은 유적지 안에서 설명하는 것도 일절 금지했습니다. 신원 확인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스님이 버스 안에서 장군총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장군총은 7단 규모의 거대한 돌무덤입니다. 1단은 4개 층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3개 층으로 되어 있어서 총 22개 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약 1100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12개의 호석으로 4면이 받쳐져 있었습니다. 호석은 중력의 영향으로 무덤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고구려의 가장 대표적인 무덤이 이곳 장군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5단에 무덤실이 있습니다. 피라미드처럼 쌓고, 그 위에 무덤실이 있는 구조입니다. 무덤실에는 문이 있고, 그 위에 큰 돌을 덮어서 지붕을 만들었습니다. 그 위에 다시 제단을 설치해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덤 위에 있던 제단은 목조 건물이어서 현재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무덤은 일부 금이 가고 약간 붕괴되긴 했지만, 아직도 완전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덤의 바깥은 큰 돌로 쌓여 있지만, 내부는 강에서 오랜 시간 닳아서 동글동글해진 강돌로 채워져 있습니다.

장군총은 현재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장수왕은 오래 살았기 때문에 비교적 여유를 갖고 무덤을 만들어서 그 안에 채워진 돌이 다 강돌입니다. 강돌은 부서지지 않고 단단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무덤이 붕괴되지 않고 현재까지 가장 원형(原形)에 가까운 완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큰 돌을 그냥 쌓은 게 아니라 깎아서 골을 판 후 돌을 딱 맞추어 넣었습니다. 즉 아랫돌과 윗돌 사이에 윗돌이 그냥 얹혀 있는 게 아니고 골을 파고 딱 끼워 넣은 것입니다.

무덤실 안에는 두 개의 댓돌이 있어서 왕과 왕후 두 분을 모셨습니다. 어떤 무덤은 댓돌이 세 개가 있는 곳도 있어요. 고구려에서는 두 번째 왕후는 첩이 아니고 정식 왕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과 제1왕후, 제2왕후를 무덤실 안에 함께 모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원 확인이 끝나고 드디어 장군총에 입장했습니다. 참가자들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장군총의 모습에 탄성을 내질렀습니다.

조별로 기념사진을 찍고, 방금 스님에게 배웠던 내용을 되짚어 보며 장군총 곳곳을 살펴보았습니다.

스님의 설명처럼 호석 하나가 부서져 없어졌는데, 신기하게 그쪽 면의 돌들은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바닥돌에 홈을 파서 윗돌을 끼워 넣은 정교함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큰 돌들을 어떻게 다듬고 옮겨 왔을까 보면 볼수록 놀라웠습니다.

장군총의 뒤쪽에도 작은 무덤이 있었습니다. 스님이 이 무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 작은 무덤은 아마도 왕을 모셨던 후궁인 비빈들의 무덤일 수 있다고 추정됩니다.”

다음은 광개토 대왕릉비와 광개토 대왕릉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책에서는 실감할 수 없었던 웅장한 크기에 모두 놀라워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전체 이름은 국강상 광개토 경평안 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입니다. 이 비석은 우리나라 비석 가운데 제일 큰 비석입니다. 이 비석의 앞 부분 여섯 줄까지 주몽왕이 고구려를 세운 이래로 광개토 대왕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역사적 정통성이 기록되어 있고, 그 아래에 광개토 대왕의 치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개토 대왕릉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능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광개토 대왕릉은 장군총의 거의 두 배입니다. 장군총의 가로 세로 길이가 약 33미터라면, 광개토 대왕릉은 약 65미터 정도 됩니다. 길이로는 거의 2배 크고, 면적은 4배, 부피는 8배까지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덤의 크기는 어마어마하게 크지만 왕이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무덤 공사를 오래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강돌로 채우다가 나중에는 산돌을 채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산돌은 강돌처럼 동글동글하지 않고 모가 나 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며 돌이 부서져서 무덤이 붕괴된 것으로 보입니다. 무덤 옆에는 돌이 그 옆으로 삐져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약 30톤 정도 되는 호석을 세웠습니다. 광개토 대왕릉은 무덤이 워낙 크니까 한 면에 다섯 개의 호석을 세워 놨는데도 붕괴가 되었어요. 안에 있는 자갈돌이 다 밖으로 드러나서 멀리서 보면 밖에 쌓아 놓은 판돌은 잘 안 보이고 큰 돌무지, 즉 자갈을 쌓아 놓은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원래 장군총과 똑같은 형태의 무덤인데 붕괴가 되어서 그렇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광개토 대왕릉은 그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져서 본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그 크기와 엄청난 규모에 압도되었습니다. 평양에서 만주 벌판까지 드넓은 영토를 호령했던 선조들의 기상이 느껴져 가슴 뭉클한 감동이 느껴졌습니다.

장군총과 광개토 대왕릉을 본 후 오후 2시 30분에 식당에 도착하여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점심을 30분 만에 빠르게 먹은 후 오후 3시가 넘어 환도산성으로 향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며 창밖으로 멀리서 환도산성의 전체 모습을 전망할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버스 안에서 환도산성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우리들이 도착한 이곳이 환도산성입니다. 옆에는 통구하(通溝河) 강이 흐르고 산성이 기슭으로 죽 이어져 전체 길이는 7km 정도입니다. 환도산성의 입구인 이곳 남문에는 옹성이 있는데, 입구가 동그랗게 반원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한 옹성입니다. 아침에 홀본산성에서 본 옹성은 아주 작은 옹성이었다면, 이곳은 정말로 커다랗게 산골짜기를 뺑 돌아가면서 반원으로 만들어 놓은 옹성입니다.

유리왕은 기원 후 3년에 고구려의 수도를 지금의 집안으로 옮겼습니다. 평지성은 압록강변과 통구하 사이에 있는 국내성이고, 다른 한쪽에서 적을 방어하는 성이 환도산성입니다. 환도산성은 우리가 앞에서 본 홀본산성만큼 험준하지는 않지만, 앞은 통구하가 흐르는 절벽이고, 성안에는 두 개의 산골짜기를 끼고 있기 때문에 수량이 풍부하고, 성 안에 일정한 농토가 있어서 위급할 때는 얼마든지 적과 장기간 대치할 수 있는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산성을 쌓고, 압록강변에는 평지성(平地城)인 국내성을 쌓은 것입니다.”

환도산성에 도착하자 산기슭을 따라 웅장한 성벽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참가자들은 감탄하며 성벽을 바라보았습니다.

산성을 둘러보기 전에 다 함께 성벽이 잘 보이는 남문의 옹성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스님의 안내에 따라 환도산성을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성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연못이 나타났습니다. 스님은 이 연못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요동 태수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이 연못의 잉어를 잡아 적군에서 보내 줌으로써 우리는 아직 식량이 넉넉하다는 인상을 심어 주어 스스로 물러나도록 하여 무사히 환도산성을 지켜냈다고 합니다.

연못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2.5km 떨어져 있는 국내성이 훤히 보이고, 적들의 침입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전망대가 나타났습니다.

전망대 앞에는 솔숲 속에 병영 유지로 추정되는 곳이 있었습니다. 발굴 중에 1000년 전의 인분이 섞인 흙무더기가 발견되어 화장실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학자들의 발표가 있었다고 합니다.

산성의 깊숙한 곳에는 왕이 머물렀다고 하는 궁전 터가 있었습니다. 선조들의 숨결을 차분하게 느껴보았습니다.

“환도산성은 내부가 매우 넓기 때문에 여러 개의 무덤과 왕궁 터가 있습니다. 환도산성은 왕이 일시적으로 피난 가는 행궁이었지만, 국내성이 함락되어 불타고 난 뒤에는 국내성을 포기하고 한동안 환도산성을 정식 수도로 삼았습니다. 행궁이 아니라 정식 왕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아주 넓은 왕궁 터가 있는 것입니다.”

환도산성을 나오면서 다시 한 번 성벽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제는 개이빨식 축성법이 눈에 쏙쏙 들어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볼수록 정말 천연의 요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도산성을 나오자 산성하 무덤떼가 나타났습니다. 탁 트인 들판에 큼직큼직한 무덤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스님이 무덤떼를 바라보며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환도산성 아래에는 ‘산성하 무덤떼’라고 해서 수많은 무덤이 강변에 펼쳐져 있습니다. 경주에 가면 볼 수 있는 봉황대 고분처럼 여기에도 큰 무덤들이 있습니다. 이 무덤들은 2층짜리도 있고, 3층, 4층, 5층짜리도 있습니다. 현재는 많이 파괴되었지만, 처음에는 돌을 쌓고 시신을 넣은 후 그 위에 판돌을 덮는 단층형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층, 3층, 4층에서 많게는 7층까지 쌓는 무덤 방식이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천천히 무덤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이승용 선생이 인솔하실 거예요. 저는 좀 쉬겠습니다.”

“스님, 쉬세요.”

참가자들은 이승용 님의 안내로 산성하 무덤떼를 한 바퀴 돌며 자세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작은 적석총 무덤부터 커다란 방단계제식 석실분의 형태까지 고구려 무덤의 변화 과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산성하 무덤떼까지 본 뒤 기행단은 이제 국내성으로 향했습니다.

오후 5시가 되어 국내성에 도착했습니다. 환도산성에서 버스로 불과 5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국내성의 북동쪽 모서리에 전체가 모인 가운데 스님이 설명을 이어 갔습니다.

“저희들이 지금 서 있는 곳에서 쭉 이어지는 성벽이 국내성의 동쪽 성벽입니다. 그리고 저쪽으로 여러분이 걸어가실 곳이 북쪽 성벽입니다. 이곳은 성벽 두 개가 만나는 모서리입니다.

국내성 성벽에 숨겨진 고구려의 지혜

모서리는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부서져서 점령당할 확률이 제일 높습니다. 왜냐하면 적은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데, 방어는 한 면에서밖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서리는 방어에 항상 불리합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성벽의 모서리 부분을 동그랗게 원형으로 만들었어요. 이렇게 하면 모서리를 공격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방어의 면적을 넓힌 거예요. 보통 성벽에는 모서리 부분이 딱 각이 지고, 그 위에 망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국내성은 모서리 부분이 원형으로 굽어 있고, 양쪽으로 ‘치’라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치’라는 것은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서 바깥으로 쌓아 놓은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고구려 국내성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쪽으로는 해자(垓子), 즉 수로가 있습니다. 자금성에 가면 성 밖에 큰 수로가 있지 않습니까? 국내성 역시 해자가 있었습니다.

성벽은 밑에서부터 단을 약간씩 안으로 쌓아 피라미드 식으로 만들고, 그 위에는 수직으로 쌓았습니다. 그 높이가 약 12미터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까지 7미터의 성벽이 남아 있었는데, 현재는 많이 파괴되어 3미터도 안 남은 상태입니다. 지금은 성 안에 아파트가 많은데, 원래 유네스코에 등록할 때 10년 이내에 이 안에 있는 아파트를 다 철거하고 복원하겠다는 조건이 있었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국내성은 425년간 수도 역할을 하는 동안 세 번 함락당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적이 국내성까지 침공해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 때는 동천왕이 국내성을 버리고 옥저까지 도망가서 겨우 죽음을 면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전연의 모용황의 침입 때는 적이 북쪽으로 들어올 거라고 예상하고 왕이 군대를 전부 끌고 북쪽으로 갔는데, 남쪽에서 급습을 당하여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니까 모용황이 아버지의 시신을 파헤치고 왕후와 어머니를 납치하고 백성 만 명을 인질로 삼아서 데리고 떠났다는 불행한 역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 국내성에서 안정적인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고구려가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할 무렵, 중국은 북위가 중원을 통일하고, 북위와 고구려가 결혼 동맹으로 화친을 했기 때문에 그 후 약 100년 동안은 전쟁이 없었어요. 그래서 장수왕 때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백제를 공격하는 남진 정책을 쓸 수 있었습니다.”

갑자기 중국 공안이 설명을 못하게 해서 스님은 설명을 중단했습니다. 기행단은 이승용 선생의 안내로 국내성의 북동쪽 모서리를 출발하여 북쪽 성벽을 따라 걸었습니다.

세월의 흐름으로 인해 허물어진 성벽이 많았습니다. 도로를 낸다고 성벽이 절단이 나 있기도 하고, 집을 만드는 데에 성벽의 돌을 가져다 썼다가 다시 제멋대로 쌓아 두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구간에서는 고구려인들이 독특한 축성법으로 아주 견고한 성을 쌓았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북쪽 성벽을 따라 걷다가 서쪽 성벽으로 방향을 틀자, 저 멀리 환도산성에서 흘러내리는 통구하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산 너머로 기울어가는 해가 통구하의 물결 위에 고요히 내려앉아, 석양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서쪽 성벽은 강을 따라 휘어지게 쌓기도 하고, 배수로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특히 서쪽 성문은 공자형으로 만들어 홍수와 적의 침입을 동시에 대비했습니다. 성벽의 곳곳에 고구려인들의 지혜가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국난의 시기에 수도를 안전하게 보호하며 수도 가까이에서는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로 말을 타고 나가서 저 만주벌, 요동벌에서 적과 싸우며 나라를 방어했습니다. 그러므로 실질적인 수도는 여기 국내성에 있었지만, 고구려인들의 주 활동 무대는 여기가 아니고 요동성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쪽 성벽으로 방향을 틀자, 드디어 압록강이 나타났습니다. 압록강 너머에는 북한 땅이 보였습니다. 산 위에 우뚝 솟은 굴뚝 위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북한 땅을 바라보며 북한동포돕기운동을 처음 시작하게 되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제가 북한동포돕기운동을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은 바로 여기서 맺은 인연 때문입니다. 1994년부터 압록강을 따라 역사 기행을 했는데, 그때 ‘북한에서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저는 처음에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북한이 가난하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어떻게 주민들이 굶어 죽느냐? 말도 안 된다.’라고 하니 진짜라고 하는 거예요. 저에게 보여주겠다면서 저를 배에 태워서 압록강을 따라 쭉 올라가 만포시에 이르렀습니다.

압록강 너머, 굶주린 아이가 말없이 있었습니다

배를 타고 북한에서 5미터 정도 되는 거리까지 가까이 접근하자, 정말 초라하고 여윈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때 부둣가에는 한 어린아이가 앉아서 손에 돌멩이를 쥐고 쇠붙이를 땅땅땅 두드리고 있었어요. 비쩍 마른 아이의 모습은 처참했습니다. 제가 ‘얘야, 얘야.’ 하고 불러도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어요. ‘아니, 왜 아이가 대답도 안 하냐.’고 물으니 같이 갔던 중국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조선 아이들은 구걸할 자유도 없습니다.’

그의 말은 북한에서는 외부인에게 뭘 달라고 하면 조국을 망신시키는 거라고 교육을 시켜서 아이들이 굶어 죽어도 구걸을 안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배를 세우세요. 먹을 것을 좀 줍시다.’ 했더니 안 된다고 했습니다. 배를 타고 지나가는 것은 괜찮지만, 배를 세우면 불법 입국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주머니에는 돈도 있고, 이쪽 중국 땅에는 먹을 것도 풍부한데, 내 눈앞에 굶고 있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없었습니다. 새도 저쪽에 먹을 게 없으면 이쪽으로 날아와서 먹을 수 있고, 짐승도 건너와서 먹고살 수 있는데, 사람은 그럴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한쪽에는 음식이 넘치는데, 국경을 사이에 두고 바로 옆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사람이 잘살기 위해 민족도 만들고 나라와 국경도 만든 것인데, 현실은 짐승보다도 못한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무렵 저는 인도에서 한창 수자타 아카데미를 만들어서 가난한 아이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정작 내 동포는 내 옆에서 굶어 죽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멀리 인도까지 가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게 스스로 모순처럼 느껴졌습니다.

인도보다 더 가까운 곳, 내 동포가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북한동포돕기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북한의 식량 부족으로 일부 주민이 굶어 죽는 정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직접 조사해 보니, 아사자 수가 엄청났습니다. 그래서 정토회 전체가 북한동포돕기운동에 나서게 되었고, 국경을 넘어온 북한 난민들을 돕는 일도 시작했습니다.

제가 바로 이 앞에서 배를 탔습니다. 저기서 배를 타고 올라가면 북한의 만포시가 보입니다. 1960년대에 이미 북한 쪽에는 도로가 다 놓여 있었고, 반대로 중국 쪽은 도로가 전혀 없었어요. 1960년대에 중국에 대기근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되자 조선족 10만여 명이 북한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때 북한은 그들에게 일자리와 집을 주고 정착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식량난 초기에는 그 옛날 일을 기억하는 어른들이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오는 난민들을 잘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국경을 넘어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고, 젊은 사람들은 예전 일을 잘 모르니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정부도 단속을 시작했습니다. 강제 송환이나 인신매매 같은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북한 안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한 인도적 지원, 중국으로 넘어온 사람들을 돕기 위한 난민 지원, 그리고 북한과 중국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 문제에 대응하는 활동을 동시에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탈북 여성들이 인신매매나 성매매로 고통받는 현실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가 큰 과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적 지원은 ‘JTS’가 하고, 인권 보호는 ‘좋은벗들’이 하고, 한반도 평화 문제는 ‘평화재단’이 하는 식으로 역할 분담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결국 역사 기행을 계기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 기행과 북한동포돕기운동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지금 상황을 보면, 북한 쪽 도로는 아직도 포장이 안 되어 있고 엉망이에요. 반면 중국은 압록강 상류까지 도로를 새로 뚫고 포장을 해 놨습니다. 밤이 되면 북한 쪽은 깜깜한데, 이쪽 중국은 번쩍번쩍하죠. 1960년대에는 북한이 번쩍이고 중국 쪽이 암흑이었는데, 이제는 천지가 바뀌어 버린 거예요. 불과 40년 만에 벌어진 일입니다.”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새는 지금도 자유롭게 압록강 이쪽저쪽을 오가고 있었습니다. 안내를 마친 스님에게 기행단은 뜨거운 박수로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압록강변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저녁 7시 50분에 강당에 모두가 모였습니다. 강의를 하기 전에 즐겁게 노래를 함께 부른 후 스님이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지도를 가리키며 기행단이 6박 7일 이동하는 경로가 어떻게 되는지 한눈에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오늘 하루가 길었죠?”

“네.”

“오늘은 고구려를 듬뿍 만끽한 날입니다. 왜 우리는 중국의 변방인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일부 지역을 기행하고 있을까요? 바로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이 한반도와 만주라고 하는 우리 민족의 과거 활동 주무대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한반도로 치우쳐져 있어서 이곳이 우리와 중국 모두에게 변방이 되어 있지만, 과거에는 이 지역이 우리 역사의 중심 무대였습니다.

어제와 오늘, 우리는 주로 고구려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고구려의 가장 큰 특징이 피라미드식 돌무지무덤입니다. 아시아에서 이런 피라미드식 무덤을 가지고 있는 종족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고구려의 독창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하 문명이 발굴되고 있는 중국 조양 지역에서는 4500년에서 5000년 전에 이미 큰 규모의 옛 돌무지무덤들이 수십 개씩 만들어져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런 무덤들도 거의 피라미드식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고구려는 배달 문명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배달 문명을 계승한 고조선, 고조선을 계승한 부여, 부여를 계승한 고구려인 것이죠. 더 올라가서 보자면 우리 민족의 선사시대 무덤의 양식이 고인돌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모두 고인돌에서 발전해 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우리가 조금 더 연구하면 그동안 신화처럼 생각해 왔던 배달 문명, 고조선 문명, 북부여, 고구려로 연결되는 민족사의 정통성을 정리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지역은 또한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활동 지역이었습니다. 우리가 가는 골짜기마다 독립운동의 흔적이 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큰 전투와 승리만 주로 다루지만, 실제로는 골짜기마다 애환이 있었고 많은 희생이 따랐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행을 통해 우리는 나라의 독립을 위한 희생자들의 보이지 않는 얼과 피도 함께 새겨 보고자 합니다.”

이어서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청년 두 명이 번쩍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요하 문명이 우리 민족의 뿌리라는 설명을 듣고 자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며, 하지만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역사를 복원할 수 있는지 궁금해했습니다.

요하 문명이 나의 뿌리라면, 우리는 어떻게 역사로 복원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동안 나의 뿌리를 고구려, 백제, 신라 정도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세계 문명 중의 한 축인 요하 문명이 나의 뿌리라고 생각하니까 자부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중국에서는 벽화 같은 것조차도 안 보여 주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중국 정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요?”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대가 정직하고 신사적으로 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못한 게 현실입니다. 상대가 이익을 추구하거나 부당하게 하는 걸 가지고 문제 삼는 건 해결에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미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트럼프처럼 중국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겠다는데 우리가 그걸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좋고 나쁨을 떠나 이것을 하나의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이 상황에서 나와 우리가 어떻게 대응을 하는 게 우리가 지금보다는 더 나은 쪽으로 갈 수 있느냐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중국의 국가 정책을 한번 봅시다. 현재 중국 영토 안에는 56개의 민족이 있습니다. 중국은 예전에는 중국을 한족의 나라라고 생각했어요. 청나라는 만주족이 중원을 침입해서 300년간 지배했던 나라입니다. 그래서 중국은 청나라를 물리치고 자기 나라를 되찾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족이 바로 중국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족이 곧 중국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영토적으로 45퍼센트는 자기네 땅이 아닌 것이 됩니다. 중국이 이걸 자발적으로 포기할 리가 없겠죠. 없는 것도 뺏으려는 마당에 왜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으려고 그러겠어요. 청나라가 망하자 티베트는 독립을 선언해서 잠깐 독립국이 되었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자마자 바로 군사적으로 공격해서 독립을 무산시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달라이라마는 인도로 망명했고요.

그래서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은 56개 소수 민족의 나라라고 자신을 정의합니다. 한족의 나라가 아니라 중화민족이라는 단어를 만든 거예요. 56개 민족이 모여서 중화민족이라는 큰 틀을 만들었고,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중화민족의 나라라는 겁니다. 그래서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과거 역사도 다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정의를 내린 거예요. 만약에 조선족이 100만 명 살고 있다고 하면 조선족의 과거 역사도 다 중국 역사의 일부로 보는 것입니다. 그들의 영토 안에 있는 과거의 역사는 다 중국 역사의 일부라는 거죠.

그래서 중국사는 중심사와 변방사가 있다는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당나라는 중심사에 들어가고, 발해는 변방사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당나라가 중심사일 때, 동쪽에서는 소수 민족인 말갈족, 고구려족이 발해라는 국가를 건설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표기할 때도 반드시 ‘당조 시기 발해국’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영토 안에 있는 모든 역사에 대해 통합을 추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우리가 우리의 조상들이 옛날에 어떻게 살았는지 둘러보는 여행에 대해서까지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우리의 역사마저도 정파적이고 사관적인 관념에 치우쳐 오히려 우리의 역사 밖으로 배격했습니다. 예를 들어 발해사를 우리 역사에서 배격했죠. 신라와 발해가 서로 갈등 관계에 있다 보니 신라 중심적 사관에서 발해는 우리나라가 아니잖아요. 신라를 계승한 고려에서도 발해는 우리 역사의 일부가 아니었고, 고려를 계승한 조선도 발해를 우리 역사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 실학이 들어와서야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으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발해의 역사가 우리 역사의 절반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중국은 다른 민족의 역사도 큰 틀에서 자기 역사의 일부라고 하는 사관을 갖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의 역사도 어떤 정치적 이유로 우리의 역사가 아니라는 관점을 가지니까, 우리의 역사는 점점 작아지고 중국의 역사는 점점 커지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문명사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방 문명의 중국사와 북방 문명의 우리 역사로 구분하여 볼 수 있어야 우리 주위에 있던 같은 계열의 소수 민족들은 다 우리 민족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즉, 고조선 시기에는 고조선 백성이 되었고, 고구려 시기에는 고구려 백성이 되었고, 발해 시기에는 발해 백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발해가 멸망하자 이들 소수 민족이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거예요. 발해의 땅에 살던 백성의 한 부분이 독립을 해서 거란족은 요나라를 세우고, 여진족은 금나라를 세우고, 몽골족은 원나라를 세워 강성해진 것입니다. 우리는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와서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 왔는데, 이것만 가지고 우리 역사라고 보는 것은 민족적 관점에 너무 치우친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의 규모가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 민족사에 대해 잘못된 신념을 가지면 너무 폐쇄적인 관점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역사를 문명사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미래 사회는 문명의 충돌이다.’라는 말도 하잖아요. 문명사적으로 접근하여 우리 민족사를 재정립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최근 들어 한류가 일어나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 있는데, 문명사적인 큰 틀에서 보면 우리는 앞선 문명의 창조성을 계속 이어 왔습니다. 고려 시대 금속활자와 조선 시대의 한글부터 거북선, 측우기까지요. 우리 역사가 한쪽으로 계속 축소된 측면도 있었지만, 그 뿌리에서부터 독창성을 갖고 있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지금 세계 최고 문명을 자랑하는 미국과 약간의 주종 관계에 놓여 있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일본을 거치지 않고 최첨단 문명을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했어요. 우리의 창조성이 외부의 선진 문명과 결합하자 새로운 창조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한류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열등의식을 가지면 절대로 창조성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상고사를 공부함으로써 문명적 자존심을 가져야 합니다. 독립 운동사를 공부하면서 비록 힘에 밀려서 졌지만 끝까지 당당하게 싸웠던 자존심을 가져야 합니다. 현대 문명에 들어와서 우리가 좀 더 노력해서 기술적인 면을 극복하면 세계적인 선진 문명을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한편으로 굉장히 부족한 부분도 갖고 있습니다. 첫째, 자긍심이 부족하고, 둘째, 모방성이 강합니다. 모방을 통해 첨단까지 왔는데, 과연 창조성이 얼마나 있느냐 따져보면 지속 가능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젊은이들이 극복해 내면 우리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세대적인 희망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개인의 희망은 있을지라도 세대적인 희망이 없어요. 예를 들어, 1980년대를 경험한 세대는 민주화에 대한 자긍심이 있었고, 그전에는 산업화에 대한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세대적인 희망이 조금 부족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음 세대로 갈수록 잠재적 성장 동력이 확대되기보다는 점점 소진되어 가다가 결국 포물선을 그리며 밑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어 보여요.

이런 창의성을 가지려면 우선 민족적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개인에게 상처가 있으면 수행을 통해서 치유를 해 나가듯이 민족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역사 기행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두려움보다 당당함과 포용성이 필요합니다. 당당해야 포용할 수 있지, 당당하지 못하면 포용할 수 없습니다. 역사 기행에는 그런 치유적 측면도 있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역사를 바라보는 시야가 한층 넓어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밤 9시 30분에 강연을 마쳤습니다. 대중은 뜨거운 박수와 함성으로 스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내일은 새벽 5시에 숙소를 나서서 고구려인들이 천제를 지낸 곳인 국동대혈(國東大穴)을 보고 이어서 압록강을 따라 이동하면서 강 건너편 북한 땅을 보며 '북한의 현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발해 시대의 영광탑을 참배한 후, 백두산 천지 아래 마을인 이도백하(二道白河)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2025 9월 정토불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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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소년

중고시절에는 역사는 암기과목이라 좀 꺼리는 경향이 있었는데, 스님의 역사기행 글을 읽으며 생각이 바뀌고 있고
민족에 대한 자긍심과 새로운 관심을 일으켜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역사는 미래를 보는 거울이다"란 어록처럼 배우고 또 생각합니다^^

2025-08-07 11:42:10

김소영

멋집니닷!

2025-08-07 10:29:29

이미진

"개인에게 상처가 있으면 수행을 통해서 치유를 해 나가듯이 민족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역사 기행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두려움보다 당당함과 포용성이 필요합니다. 당당해야 포용할 수 있지, 당당하지 못하면 포용할 수 없습니다. 역사 기행에는 그런 치유적 측면도 있습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

2025-08-07 10: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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