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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장수 죽림정사에서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근대 불교의 중흥조이신 용성조사님의 탄생 161주기 기념 법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기념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 5시에 두북수련원을 출발했습니다.
장수 죽림정사로 가는 길에 먼저 실상사를 방문했습니다. 실상사 회주인 도법 스님의 건강이 안 좋으시다고 해서 병문안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속도로를 2시간 달려 아침 7시가 넘어 실상사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이 도량에 들어서자 도법 스님이 반갑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건강은 어떠셔요?”
“건강이랄 게 뭐 있어요.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수경 스님께서 도법 스님 건강이 안 좋다고 해서 죽림정사 가는 길에 방문했습니다.”
“맞습니다. 수경 스님이 얼마 전에 다녀갔지요. 괜찮습니다.”
안부 인사를 나눈 후 6월 말에 INEB 정토회 방문단이 실상사를 방문할 예정이어서 행사를 어떻게 진행할지 도법 스님과 함께 도량을 돌아 보았습니다. 곳곳이 정갈하게 잘 가꾸어져 있었습니다.
실상사 공양간에서 함께 아침 식사를 한 후 도법 스님과 차담을 나누고 실상사를 나왔습니다.
다시 차를 타고 30분을 이동하여 오전 9시에 장수 죽림정사에 도착했습니다. 기념 법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역대 전등 조사들을 기리는 다례제를 지냈습니다.
다례제를 마치고 대웅전을 참배한 후 물빛공원에 건립 중인 용성 기념관 공사 현장을 둘러보았습니다.
건물의 뼈대를 이루는 기초, 기둥, 보, 바닥, 벽, 계단, 지붕 등 골조 공사가 마무리되었고, 앞으로 6개월 더 공사를 하여 연말에 준공식을 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현장에서 수고하는 정토회 불사팀과 건축 시공사 관계자들을 격려한 후 기념 법회를 하기 위해 용성 교육관으로 향했습니다.
대전충청 지부를 비롯하여 경남 지부, 부산울산 지부, 광주전라 지부, 행복운동본부 등 전국에서 정토회 회원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0시 정각에 기념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 선열에 대해 묵념을 하고, 정토회 대표 전해종 님이 용성조사님의 행장을 낭독했습니다.
이어서 참석한 내빈 소개를 했습니다. 장수군 의회, 장수문화원, 장수군 교육청, 백용성조사 기념 사업회, 번암면사무소, 장수농협, 번암면 주민 자치 위원회, 이장 협의회 등 지역 사회 인사들이 자리를 빛내 주었습니다. 그중 장수군 의회 이종섭 의원이 기념 축사를 해 주었습니다.
다음은 용성조사님의 탄신일을 기념하여 대전충청 지부 회원들이 기념 공연을 선보였습니다. 용성조사님의 탄생부터 독립운동의 길, 마지막으로 유훈을 남기고 열반에 이르는 순간까지 1막부터 5막까지의 대서사가 10분 간의 연극 속에서 펼쳐졌습니다.
“용성조사의 말씀처럼 이제 대한민국은 찬란한 길을 열어 누구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 길이 바로 우리 눈앞에 있다. 이젠 우리가 하겠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겠다는 외침에 모두가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어서 다 함께 ‘온 겨레의 노래’를 제창했습니다. 이 노래는 용성조사께서 작사하시고 불심 도문 큰스님께서 정리하신 곡입니다. 죽림정사 사찰 안내팀의 선창에 따라 다 같이 힘차게 불러 보았습니다.
다음은 법륜스님이 "용성, 희망, 변화, 그리고 나"라는 주제로 기념 법문을 했습니다.
“오늘은 석가여래부촉법 제68세 용성 진종 조사님의 탄생 161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입니다. 지난해 용성 진종 조사님의 탄생 160주년을 맞아 저희는 이곳 죽림정사 앞에 자리한 물빛공원에서 1만 대중이 모여 한반도의 평화와 대한민국의 국민 통합, 국가의 지속적인 발전을 기원하며 ‘만인대법회’를 열었습니다. 불심 도문 큰스님을 증명 법사로 모시고, 많은 내외 귀빈과 사회 각계 인사, 원로, 정치인들까지 함께해 정토회 회원 1만 대중이 한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일까요. 돌아보면 지난해에는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어 전쟁 가능성까지 우려되는 상황이었는데 연말을 기점으로 기적처럼 미국의 대통령이 바뀌고, 한국 내에서는 계엄 시도가 무산되는 등 중대한 변화들이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한반도의 전쟁 위기는 현저히 완화되었고, 정세 또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새 정부가 출범하고 미국 대통령이 북미 관계 개선에 나선다면, 어쩌면 우리는 지난 72년간 지속된 정전 체제를 종식하고,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 체제로 나아갈 가능성이 열릴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이 시점에서 우리는 더욱 간절하게, 민족과 국민은 물론,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실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용성조사님의 탄생 161주년을 맞아 그분의 생애를 되돌아보면, 대부분의 한국 승려들과는 다른 길을 걸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스님들은 주로 개인 수행에 몰두하거나 중생의 복을 비는 일에 집중합니다. 속세를 떠났기 때문에 세상일에 관여하는 것은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는 관념이 강했습니다. 또한 불경은 한문으로 된 원문으로 읽어야 정통이라는 인식 아래, 지금도 여전히 한문 불경으로 공부하고 염불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용성조사님은 이러한 불교의 오랜 관념과 전통에 변화와 혁신을 불러일으키고, 불교의 지성화, 대중화, 생활화를 추구하셨습니다. 한문으로 된 경전을 한글로 번역해서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셨고, 서울 사대문 안에 절이 하나도 없던 시절에 가정집을 사들여 ‘대각사’라는 절을 세우고 포교당을 열어 대중이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어린이 법회를 열고, 부녀자들을 위한 선원을 운영함으로써, 불교가 스님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뜻만 있다면 누구든 부처님의 법을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맞춰 찬불가를 만들고 풍금을 도입했으며, 복잡하고 어려운 전통 불교 의식을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한글로 바꾸는 데에도 앞장서셨습니다. 지금은 이런 의식들이 보편화되었지만, 지금으로부터 100 년 전에 그런 시도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용성조사님은 당시 가장 민감한 시대적 과제였던 ‘나라의 독립’에도 온몸을 던져 헌신하셨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며 독립을 추구하는 일은 곧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엄혹한 시기에도 스님은 나라의 독립을 꿈꾸며, 끊임없이 활동을 이어 가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셨습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불교는 유교 중심의 사회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1894년 갑오경장에 이르러서야 불교가 정부의 억압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일본 불교가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국내 불교계도 점차 자유롭게 활동할 수는 있었지만 큰 혼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많은 승려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불교를 배우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당시 조선 총독부는 조선을 식민 지배했지만, 조선의 유생이나 관리들과 달리 승려들에게 비교적 좋은 대우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 불교는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고마워하며 친일적인 태도를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조선의 승려로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고 일본 불교를 배척하며, 조선 불교의 고유한 정체성을 세우려 했던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용성조사님은 불교가 조선 왕조로부터 500년 동안 탄압받고, 승려가 사회 최하층 천민으로 대우받던 암울한 시기에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런 신분으로 나라의 독립을 외친다는 것은 곧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스님께서는 그 길을 걸으셨고, 불교 혁신과 동시에 우리 민족에게 독립이라는 희망의 등불을 밝혀 주셨습니다.
용성조사님께서 본격적으로 세상일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무렵부터입니다. 우리는 흔히 1910년 한일 합병 때 나라를 빼앗겼다고 알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1905년 을사늑약 때 이미 외교권을 박탈당하면서 주권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용성조사님은 이듬해인 1906년 해인사로 내려가 대장경 불사를 하며 자금을 일부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임동수 거사를 비롯한 후원자들의 지원을 받아 1907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망명 정부 수립을 준비하셨습니다. 당시 이미 상해에 임시 정부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러나 1910년 조선이 강제로 합병되었을 때, 우리는 곧바로 망명 정부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나라를 빼앗긴 경우, 일부 왕족이 국외로 나가 망명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고종 황제도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는 등 여러 시도를 했지만 결국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조선은 1910년에 나라를 빼앗겼고, 그로부터 9년이 지난 1919년, 전국적으로 3·1 독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해 4월에 상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됩니다. 3월 1일에 독립 선언을 했는데, 어떻게 불과 한 달 만에 임시 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용성조사님께서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상해에 재정적 기반을 닦아 두고, 건물을 마련해 치밀하게 준비해 둔 덕분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용성조사님은 3·1 운동의 막후 기둥이자, 상해 임시 정부 수립의 배후 세력이셨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로서 스님은 결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뒤에서 조용히 후원하는 자세로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후에도 용성조사님은 만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가족과 부상자들을 꾸준히 후원하셨습니다. 또한 윤봉길 의사를 상해 임시 정부에 보내는 등 많은 젊은이들이 독립운동에 나서도록 이끄셨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숨겨진 일화들이 전해지지만, 일제의 혹독한 탄압 때문에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드러난 기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오히려 스님의 활동이 얼마나 완벽하고 치밀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입니다. 오히려 증거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허술하게 움직였다는 뜻일 수도 있겠죠. 우리는 종종 독립운동의 실상을 증명할 기록이 없다 보니, 주로 일제의 재판 기록이나 수사 문건을 근거로 독립운동가들의 공로를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독립운동가를 처벌하기 위해 만든 기록에 이름이 올라가면 훌륭한 독립운동가 되고, 기록이 없으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심지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도 기록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고, 치열하게 헌신하고도 증거를 남기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되는 것입니다. 용성조사님도 늘 철저히 배후에서 움직이셨기 때문에 그 공적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3·1 독립운동 당시, 한용운 스님을 포함한 33인이 독립 선언을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용성조사님까지 잡혀 가면 그 뒤를 누가 책임지겠느냐’ 하는 우려 속에 용성조사님은 뒤로 빠지게 하고 다른 사람들을 앞세웠습니다. 그래서 기록에는 용성조사님이 직접 서명한 것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당시 한용운 스님이 도장을 빌려 달라고 해서 내어 주셨고, 독립 선언이 발표되던 당일에도 ‘사람들이 모인다고 해서 가 봤더니 그런 일이 벌어졌더라’ 하는 식으로 용성조사님의 존재를 감추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용성조사님은 독립 선언서에 도장만 빌려 주고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기록에 남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민주화 운동을 해 본 사람이면 알 수 있는 일이에요. 겉으로 나서는 사람과 뒤에서 실질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은 따로 있죠.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면서도 당대에는 기록을 남기는 것조차 위험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공적을 증명하라며 기록을 요구하고, 그 기록의 유무에 따라 독립운동가로 인정받느냐 못 받느냐가 결정되는 거예요.
기록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중요한 것이 ‘증언’입니다. 불심 도문 큰스님은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수많은 구술 증언을 생생히 간직하고 계십니다. 큰스님의 집안은 증조부, 조부, 부친, 그리고 스님 본인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용성조사님을 후원하며, 그분의 행적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이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인물은 용성조사님이지만, 그 뒤에는 조사님이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뜻을 함께한 동지이자 친구, 그리고 후원자인 사은 임동수 거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불심 도문 큰스님의 증조부입니다. 만석꾼이었던 그는 자기의 재산뿐 아니라 친척의 재산까지 합쳐 삼만 석에 이르는 거의 모든 재산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그 만석꾼들이 바로 남원, 장수, 운봉 지역의 거부들입니다. 이분들은 동학 혁명에서 독립운동을 거쳐,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루기까지 눈부신 기여를 하셨습니다. 이제는 그분들의 공로를 마땅히 재조명하고 제대로 평가해야 할 때입니다.
용성조사님은 당시 일반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회 지도층, 특히 부유층과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활동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순종 왕비의 후원이 각별했습니다. 이 사실은 조선 말엽 사회 지도층에서도 일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쓴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비록 조선이 당시의 사회 지도층에 의해 나라가 망하긴 했지만 그들을 전부 다 나쁘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임동수 거사를 중심으로 하는 만석꾼들의 재산과 왕가에서 나온 재산들은 용성조사님을 통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비밀리에 쓰였습니다.
오늘 용성조사님의 탄생 161주년을 맞아 우리는 다시 한번 그분의 삶과 유훈을 되돌아봅니다. 용성조사님께서는 2025년부터 새로운 대한민국의 길이 열릴 것이라 하셨습니다. 대한정국 800년의 대운이 시작된다고 예언을 남기셨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그 말씀이 막막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대운이 열리기는커녕 닫히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면서 새로운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보입니다. 우울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진취적으로 앞을 향해 나아갈 때입니다. 지난 75년간 끝내지 못한 전쟁 상태를 종식하고, 한반도에 평화 체제를 구축해서, 남북 간 상호 협력과 국민 통합을 실현해야 할 때입니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 정의롭고 바른 대한민국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야말로 용성조사님의 유훈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님의 법문을 가슴에 새기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기념 법회를 마쳤습니다.
내빈들이 퇴장하고 잠시 자리 정돈을 한 후 곧바로 12시부터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현장에 참석한 400여 명의 대중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여는 공연으로 이선호 님이 구성진 목소리로 흥겨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공연의 여운이 남은 가운데 현장에 참석한 분들 중에 누구나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약 한 시간 동안 수행을 하거나 봉사 활동을 하면서 의문이 나는 점을 자유롭게 질문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아들이 이혼한 후 양육비가 부담스러워서 대신 내 달라고 한다며 엄마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아들이 이혼했습니다. 아이는 전 부인이 키우고 있고, 아들은 양육비만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양육비가 부담스러운지 저에게 대신 내 달라고 합니다. 일단 거절하긴 했지만, 또다시 요구할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왜 저럴까’ 하고 생각해 보니 저를 닮아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혹시 제가 원인을 제공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아들이 보기에 엄마에게 돈이 좀 있다고 생각하나 봐요?”
“실은 돈이 없는데 아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두 가지를 의미해요. 첫째, 아들은 엄마에게 돈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요구하는 것이고, 둘째, 질문자 역시 스스로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예를 들어 누가 저에게 ‘스님, 저 죽게 생겼어요. 100만 원만 빌려주세요.’라고 하면, 저는 ‘정토회는 돈을 빌려 주지 않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래도 살짝 마음에 걸리겠죠. 그런데 어떤 사람이 ‘회사가 부도 날 지경이에요. 3조 원만 빌려주세요.’라고 하면 거절하고 나서 마음에 걸릴까요? 전혀 안 걸립니다.
이처럼 마음에 걸린다는 건, 내가 실제로 할 수 있는데 안 하고 있을 때 생기는 겁니다. 아예 할 수 없거나 관심조차 없으면 전혀 마음에 걸리지 않아요. 또 누군가 와서 ‘스님, 마약을 사야 하니 10만 원만 주세요.’라고 해도 전혀 마음에 안 걸립니다. 마음에 걸림이 있고 없고는 ‘그 일이 어떤 성격이냐’ 또는 ‘내가 그것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들 입장에서는 엄마가 빚을 내서라도 도와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요구하는 것이고, 질문자 역시 도와줄 여력이 있으니 ‘도와줘야 하나?’ 하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자에게 돈이 좀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정말 돈이 없다면 ‘네가 어려운 건 알겠는데 엄마도 살기가 빠듯하구나. 이 나이에 내가 빚을 내서 지원해 줄 수는 없지 않겠니?’ 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이건 네 일이지, 내 일이 아니다.’ 이런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상황이 달라져서, 아들이 죽고 며느리도 살기 어렵고 손자는 학교도 못 다닐 정도라면 그때는 돕는 게 맞습니다. 이건 손자라서 돕는 게 아니라 도움이 절실한 사람이기 때문에 돕는 거예요. 그 아이가 이웃집 아이여도 돕는 것이 도리입니다. 그럴 때는 내 일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 태도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에요. 지금은 아들의 문제이기 때문에 관여하지 않아도 됩니다.
질문자는 아들이 또 도와 달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하지만, 내게 돈이 없다면 100번 전화해도 ‘그래, 참 힘들겠구나. 그런데 엄마는 돈이 없어.’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100번이 아니라 1000번을 요구해도 ‘그래, 알았다. 그런데 엄마는 못 준다.’ 이렇게 응대하면 됩니다. 아들의 말을 자꾸 귀담아듣고 마음이 흔들리니까 고민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고민 자체가 도와줄 형편이 된다는 거예요. 정말 도와줄 형편이 안 된다면 줄지 말지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설령 여유가 있더라도 주는 게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안 주면 됩니다. 예를 들어 그 돈으로 술을 마신다거나 마약을 한다면 안 주는 것이 옳은 것처럼 말이죠.
질문자는 아들의 일이고, 손자의 일이기 때문에 마음에 걸린다는 것인데 그게 집착입니다. 결국 질문자의 선택이에요. ‘형편이 되니 주자.’, ‘아들이 힘드니 주자.’, ‘남도 도와주는데 못 줄 이유가 있나.’ 이렇게 생각해서 도와주든지, 그게 아니라면 100번을 전화하든 만 번을 전화하든 ‘그래, 알았다. 그런데 엄마는 못 준다.’ 이렇게 대응하면 됩니다. 싸울 필요도 없어요. ‘네 아이는 네 책임이지, 왜 나한테 떠넘기냐!’ 하고 따지지 마세요. 그렇게 싸운다는 건 그 일이 마음에 걸린다는 뜻이고, 이미 집착이 생긴 거예요. 그냥 부드럽게 ‘그래, 알았다. 그런데 엄마는 못 준단다.’ 이렇게 가볍게 거절하고 넘어가면 됩니다. 전화가 얼마나 오든 신경 쓸 일은 아니에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매달 10만 원씩 내야 하는 게 있는데, 지금 수중에 10만 원밖에 없어요. 그 돈을 내면 다른 데 쓸 돈이 없어서, 다른 사람한테 대신 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러면 나중에 돈이 생기면 그걸 갚는 데 쓸까요? 다른 데 쓸까요? 보통은 그냥 다른 데 써 버립니다. 이처럼 지금 질문자가 돈을 주는 것은, 아들의 책임을 대신 떠맡는 것이지 실제로 아들에게 도움이 되는 건 아닙니다. 돈을 안 주면, 아들은 술을 한 잔 덜 마시든지 밥을 한 끼 굶든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엄마가 해결해 주면, 술을 한 잔 더 마시고 밥을 더 사 먹게 될 거예요. 사람 마음이 그렇습니다.
아들이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결국 손자와 아버지의 관계에도 좋지 않습니다. 손자 입장에서 보면, 아빠가 직접 도와주는 것과 아빠가 방치해서 할머니가 대신 도와주는 건 전혀 다르거든요. 그런 경우라면 아빠와 무슨 정이 생기겠어요. 그러니 이건 전혀 질문자의 일이 아닙니다. 아들이 죽고 없으면 도와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전혀 질문자의 일이 아니에요. 그렇게 관점을 갖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다섯 명과 대화를 나눈 후 오후 1시가 넘어서 즉문즉설 법회를 마쳤습니다.
이어서 점심 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중은 삼삼오오 모여서 각자 싸 온 도시락을 꺼내 맛있게 식사를 한 후 도량을 청소했습니다.
스님도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2시에 장수를 출발하여 서울로 향했습니다.
차로 3시간을 달려 오후 5시에 서울에 도착한 후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평화재단 회의실에서 청년특별지부와 사회활동위원회 책임자들이 모인 가운데 ‘청년 전법’을 주제로 회의를 했습니다.
청년 실업, 저출생, 주택 문제, 사교육비 부담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침체되어 있는 청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작년부터 스님이 청년 축제를 열면 좋겠다고 여러 차례 제안을 했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지난달부터 회의를 시작하여 오늘로 네 번째 회의를 열었습니다.
청년특별지부에서 준비해 온 초안을 검토한 후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마지막으로 스님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11월 7일부터 9일까지 청년 1만 명이 참여하는 청년 축제를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열기로 우선 결정을 합시다. 행사명은 나중에 의논해서 최종 확정을 하겠습니다. 정토회는 수행과 사회적 실천, 두 가지를 함께 지향하기 때문에 청년들이 관심 있어하는 명상만 너무 강조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명상 프로그램을 진행하더라도 명상 방법을 구체적으로 안내해서 제대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필요합니다.
강연의 내용 중에는 코리아 리스크가 바로 전쟁의 위험이라는 점을 청년들에게 알리는 것이 꼭 포함되면 좋겠습니다. 남북 협력은 미래의 한국 경제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도 청년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요즘 청년들은 ‘가난한 북한과 함께 하면 우리가 손해이지 않는가’ 이런 생각밖에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북한과의 협력이 바로 청년들의 밥그릇이 될 수가 있습니다. 남한의 기술과 자본, 그리고 북한의 노동과 자원이 서로 결합하게 되면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에게도 엄청난 이익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강의가 작은 규모로라도 열리면 좋겠습니다.
JTS에서는 인도, 필리핀에서 봉사했던 청년들이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해도 좋을 것 같아요. 저도 곳곳에 강연을 가 보면 대학생 선재수련에 참가했던 청년들이 지금 사회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 봉사 경험을 가진 청년들이 와서 이야기를 들려 주는 것도 요즘 청년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고민들을 바탕으로 계속 연구해서 프로그램을 조금씩 만들어 가면 될 것 같아요. 저는 내일부터 해외 일정을 시작하기 때문에 앞으로는 여러분들이 더 많은 토론을 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네, 스님 잘 다녀오십시오.”
밤 9시가 넘어서 회의를 마쳤습니다.
스님은 내일 해외 출국을 위해 짐을 싼 후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부터는 2박 3일 동안 라오스를 방문하여 JTS 사업을 검토하고 현지 관계자들도 만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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