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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8 (스리랑카 4일째) INEB 이사회, 스리 마하보디트리 참배
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스님이 스리랑카에 머문지 4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전에는 INEB 이사회에 참여하였고, 오후에는 불교인들이 성지로 여기는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보리수나무를 참배했습니다.nbspnbsp새벽 6시, 이곳 일정에 따라 명상시간이 되자 스님은 홀에 앉아 1시간 동안 명상을 했습니다. 어제 INEB 폐회식을 하고 대부분이 고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오늘 아침 명상에는 스님을 비롯해 세 명만 참석을 했습니다.nbspnbspnbsp9시 30분부터는 INEB 이사회가 열렸습니다. 먼저 이번 대회에 대한 간략한 평가가 있었고, 이어서 명예회원과 자문위원 등의 명단을 검토하고 새로운 회원 영입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특히 젊은 불교 지도자들을 더욱 양성해야 한다는 의견은 모두에게 공감을 얻어 박수를 받기도 했습니다.nbspnbsp▲ INEB 이사회nbsp그리고 INEB 원로이신 슐락 박사님과 INEB 현 회장을 맡고 있는 하르샤 씨는 이번 회의에 법륜 스님이 특별히 참가해 준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이사회가 진행되는 동안 특별히 의견을 내지는 않고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지 경청만 했습니다.nbspnbspnbsp무엇보다 이사회에서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은 INEB 2015년 활동 보고와 2016년 사업 계획이었습니다. 우선 다음 INEB 컨퍼런스는 2017년 11월 대만에서 하기로 하였고, 2018년 이사회는 부탄에서 열기로 했습니다. 이 외에도 불교와 무슬림 간의 교류 행사, 불교와 힌두교 간의 교류 행사, 기후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네트워크 구축, 리더십 양성을 위한 교육 등을 다양하게 펼쳐나갈 계획이라고 합니다. 사회적 실천을 위한 영어 학교도 열 예정인데 각국의 불교 지도자들은 영어 학교에 대해서는 무척 높은 관심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INEB 이사회를 모두 마치고 회의 참가자들 모두 다같이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벌써부터 다음 행사에 대한 기대로 설레여 하는 듯 ‘원, 투, 쓰리’ 하자 환하겟 웃었습니다.nbspnbspnbsp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는 대만에서 온 전커 션 비구니 스님이 찾아와 “어제 불교의 근본 가르침을 잘 짚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라며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자 스님은 앞에 앉으라고 한 후 담소를 나누었습니다.nbspnbsp▲ 대만에서 온nbsp전커 션 비구니 스님nbsp“사회활동에 참여하다 보면 불교의 근본 가르침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nbsp“불자라면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해나가야죠.”nbsp“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저 부처님 가르침만 미화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nbsp“대부분은 부처님께 복을 비는 것이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죠. 그러나 붓다 담마를 공부한다면 개인수행과 사회활동이라는 두 가지가 함께 갑니다. 보살은 상구보리하고 하화중생한다고 하잖아요.”nbspnbsp“上求菩堤 下化衆生?” nbspnbspnbsp“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하는 두 가지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게 아니에요.”nbspnbsp“스님의 법문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마련되어 있나요?nbsp“예, 일주일에 한 번씩 2년에 걸쳐 수업을 듣도록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로 배우는 주제는 ‘불교란 무엇인가?’예요. 다른 종교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배웁니다.”nbspnbsp“올바른 관점을 갖는 게 굉장히 중요하지요.”nbsp“맞습니다. 일단 붓다 담마에 대해서 알아야 해요. 불교는 종교로서의 불교가 있고, 진리로서의 불교가 있어요. 우리 정토회에서 배우는 불교는 종교로서의 불교가 10퍼센트 정도, 진리로서의 불교가 90퍼센트 정도 되기 때문에 타 종교인들도 모두 와서 공부할 수 있습니다.nbspnbspnbsp두 번째로는 부처님의 일생에 대해 배웁니다. 붓다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배웁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인격에 대해 잘 몰라서 부처님을 그저 신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 번째로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 즉 테라바다에 대해 배웁니다.네 번째로는 ‘불교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배웁니다. 테라바다, 마하야나, 바즈라야나, 선불교를 차례로 살펴봅니다. 그래서 선불교로서의 정체성도 가지면서 다른 불교의 갈래도 모두 포용할 수 있도록 해요. 그게 첫 1년에 해당하는 불교대학 과정에서 배우는 내용이에요.nbsp다음 해는 경전반 수업입니다. 경전반에서는 ‘반야심경’, ‘금강경’, 6조 혜능대사가 남긴 ‘육조단경’, ‘법성게’를 차례로 배웁니다. ‘화엄경’이 너무 길고 방대하기 때문에 의상조사라는 스승이 그 내용을 요약해 놓은 것이 ‘법성게’입니다. 그리고 3대 승찬조사가 쓴 ‘신심명’을 배웁니다.nbspnbsp첫 해는 근본불교와 불교의 역사에 대해 주로 공부하고, 다음 해는 대승불교와 선불교에 대해 주로 배웁니다. 대승·소승 불교와 선종·교종에 대해서 서로 반대되는 내용이 아니라 공통되는 부분, 다시 말해 전체에서 통일되는 부분을 중심으로 배웁니다.”nbspnbsp“강의하는 다른 스님들이 계시는지요? 아니면 스님 혼자 가르치시는지요?”nbspnbsp“수업은 저 혼자 가르칩니다.”nbsp“공부 외에 명상이나 다른 수련도 하나요?”nbsp“예, 졸업하려면 반드시 수행과정을 거쳐야 해요. 또 다양한 분야의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하면서 생활 속에서 실천을 해야 합니다. 학기 중에도 일주일에 몇 시간, 혹은 한 달에 몇 시간씩 자원봉사 활동을 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nbspnbsp“2년 과정을 마치면 졸업장을 받을 수 있습니까?”nbsp“예. 그리고 계를 받습니다.”nbsp“불교대학과 경전반에 참여하는 일반 신도들이 많습니까?”nbsp“예. 봄과 가을, 1년에 두 번 입학식이 있는데 한 번에 3천 명 정도가 등록합니다.”nbsp“그 많은 사람들을 혼자서 어떻게 가르치세요?”nbsp“영상강의이기 때문에 다들 자기 동네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nbsp“그렇군요. 대단합니다. 대화 감사합니다.”nbspnbsp스님은 ‘정토불교대학’의 학사 과정에 대해 설명을 한 것이었는데, 이를 듣고 대만 비구니 스님은 매우 놀라워습니다. 한번에 그렇게 많은 대중이 불법을 공부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나 봅니다.nbspnbsp이어서 슐락 박사님이 찾아와 스님에게 “일찍 가봐야 할 것 같다”고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의 가르침과 활동에 대해 항상 존경합니다.”라며 합장을 하자, 스님은 환하게 웃으며 슐락 박사님의 두 손을 꼭 잡았습니다.nbspnbspnbsp두 분은 20년 전 INEB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교류와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데, 변치 않는 두 분의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습니다.nbspnbsp원래는 내일 아침에 이곳 세바란카 파운데이션에서 공항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는데, 스님은 “행사가 모두 끝났으니 오늘 공항 근처로 이동했다가 내일 아침은 닥터 아리예야트네 박사님을 뵙고 가야겠다”고 하시며 곧바로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닥터 아르야트네 박사님은 스리랑카에서 ‘사르보다야’ 운동이라는 마을개발 운동을 통해 INEB 초창기에 많은 감동을 보여주면서 INEB를 태동시킨 원로 중 한 분입니다.nbspnbsp짐을 모두 챙기고 버스가 출발하려고 하자, 지난 4일 동안 스님 일행의 숙소와 식사를 꼼꼼히 잘 챙겨준 세바란카 파운데이션의 스탭 ‘지나’ 씨가 눈물을 보이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짧인 기간이었지만 정이 많이 들었나 봅니다. 스님 일행도 아쉬움을 달래며 버스 창 밖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nbspnbspnbsp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아누다라푸라에 있는 스리 마하보디 사원에 nbsp잠시 들렀습니다. 원래 방문이 예정된 곳이 아니었지만 스님은 “아쇼카대왕 때 그 아들이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하기 위해 보드가야에 있는 보리수나무를 가져와 심었는데, 그 나무가 바로 이 나무”라고 소개하며 “잠시 참배하고 가자”고 했습니다.nbspnbsp▲ 스리 마하보디 트리nbsp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자 보리수 나무 주변으로 축대가 둘러쳐져 있어 나무를 직접 만져보지는 못하게 되어 있고, 멀리서 바라보며 둘레를 돌 수 있도록만 되어 있었습니다. 스님은 합장을 하고 보리수 나무 주위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그리고 법당으로 들어가 헌화를 한 후 잠시 예불을 올렸습니다.nbspnbspnbsp이 사원의 보리수 나무는 기원전 3세기 경, 인도 비하르주에 있는 보드가야에서 묘목을 가져온 것이라서 불교도들에게 큰 의미를 가지는 곳입니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다 하는 바로 그 보리수 나무의 직계 혈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원의 보리수 나무를 보디 트리라고 부르는데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이 나무에게 기도를 하며 주변을 돌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nbspnbspnbsp보드가야의 보리수나무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설이 있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원전 3세기 경 아쇼카왕의 아들이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이곳으로 묘목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드가야에 있던 그 보리수 나무는 1876년 폭풍우로 쓰러져 죽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여기서 다시 묘목을 가져가서 보드가야에 보리수 나무를 새로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쓰러져 죽은 나무에서 씨앗을 채취해 다시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nbspnbsp▲ 사원 입구에 아쇼카왕의 아들이 보리수나무의 묘목을 들고오는 모습이 조각된 모습nbsp어떤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스리 마하보디 사원‘의 보리수 나무가 석가모니의 보리수 나무의 혈통을 이었다는 것이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보리수 나무로 알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보드가야에서 가져와서 심었다고 하는 원줄기가 되는 나무가지는 황금색 받침대로 떠받치고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nbspnbspnbsp밤 9시가 다 되어 공항 근처의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숙소로 향하는 길에 해가 저물었습니다. 붉은 태양이 지평선으로 사라지는 찰나에 도로 양쪽에 호수가 나타나 장관을 이루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조금 더 가니 해가 지기 전에 바다도 잠깐 볼 수 있어서 스님 일행 모두 웃음을 띠며 피곤함을 녹일 수 있었습니다. nbspnbspnbsp숙소에서는 늦게까지 이번 INEB 행사에 대해 평가회의를 했습니다. 여러 의견들이 있었는데, 특히 스님은 “지하수 오염으로 인한 주민들의 질병 문제가 지금 스리랑카에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며 “나중에 JTS에서 다시 답사를 와서 어떻게 도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지 파악하고, 한국에서도 더욱 조사를 해보면 좋겠다”고 당부했습니다. 또 매년 6월마다 동남아 스님들을 초청해 정토회를 견학하고 방문할 수 있게 하고 있는데, 올해는 비구니 스님들도 소외되지 않도록 더 잘 챙길 것을 당부하면서 이번 INEB 행사에서 경험한 것을 교훈으로 삼을 것을 일러주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이번 행사 기간 동안 통역 자원봉사를 해준 이진아씨가 공항으로 먼저 출발을 해야 해서 다함께 배웅을 해주며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스님은 “수고했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기념사진도 함께 찍어주었습니다.nbspnbsp내일은 새벽 5시에 숙소를 출발해 스리랑카에서 사르보다야 운동을 이끌었던 닥터 아리야트네 박사님을 찾아뵌 후 콜롬보에 들러 재작년에 INEB 정토회 방문단에 참여한 인연이 있었던 스님을 만나고 곧바로 공항으로 이동해 인도로 다시 들어갈 예정입니다. 인도에서는 상카시아에서 석가족들을 위한 수련이 있습니다. nbsp nbspnbsp ※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nbsp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분들은 지금 신청하세요.nbspnbspnbsp
2016.1.27 (스리랑카 3일째) INEB 기조발제 ‘총체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INEB 컨퍼런스에서 ‘총체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주제로 기조 발제를 했습니다.nbspnbsp어제 INEB 참가자들은 구조적 폭력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우리 개인의 일상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에 대해 토론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총체적 개발’에 대해, 그리고 ‘총체적 개발을 가시적으로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주제로 이번 INEB의 핵심적인 토론이 이뤄졌습니다.nbsp먼저 컨퍼런스를 시작하기에 앞서 중국 스님들과 대만 스님들이 함께 앞으로 나와 챈팅을 함께 해주었습니다. 중국과 대만은 우리 나라의 남한과 북한처럼 양국 사이가 좋지 않은데 오늘 행사장에서 스님들이 함께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모두 큰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남한과 북한도 국제 행사에 이렇게 함께 자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상상도 해보았습니다.nbspnbsp▲ 중국 스님들과 대만 스님들이 함께 기도하는 모습nbspnbsp예불을 마치고 곧바로 컨퍼런스가 시작되었습니다. 사회자는 미얀마에서 온 ‘사이 샘 캄’ 씨. 먼저 사회자가 스님을 소개했습니다. 알고보니 이미 법륜 스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분이어었습니다.nbspnbspnbsp“오늘 기조 발제를 해주실 분은 우리에게 큰 영감을 주시는 분입니다. 한국의 정토회에서 오신 법륜 스님을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법륜 스님은 아주 저명한 스님이십니다. 우리 미얀마에서는 매년 미얀마 스님들이 정토회를 방문합니다. 방문을 마친 뒤 한 유명 미얀마 작가가 법륜 스님과 정토회에 대한 기고문을 써서 미얀마 사람들에게 전했는데, 법륜 스님의 업적을 소개하는 서문의 제목을 ‘A Simple Monk’라고 붙였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총체적 발전에 대한 스님의 관점을 오늘 나누어주실 것입니다.”nbsp사회자의 소개가 끝나자 국제 불교 지도자들은 큰 박수로 스님을 맞이했고, 이어서 스님의 기조 발제가 시작되었습니다.nbspnbsp“여러분들 앞에서 발표하게 되어 대단한 영광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주제는 ‘총체적 발전’입니다. 아마 우리가 사는 세계가 총체적으로 발전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데 대한 문제제기인 것 같습니다. 물질적인 발전이 빠르게 진행되는 데 비해 우리의 영적 개발, 즉 정신적 발전이 더딘 것도 문제입니다. 지역적으로도 일부 지역은 빠르게 발전하는 데 비해 다른 지역은 낙후되어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불균형 발전도 문제가 됩니다. 또 ‘오늘날 우리의 발전이 과연 지속 가능한가?’도 큰 문제입니다.nbspnbspnbsp붓다의 말씀을 종합해 생각해보면 ‘총체적 발전’, 다시 말해 ‘지속 가능한 발전’이야말로 우리들의 행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행동 동력은 욕구입니다. 사람들은 욕구를 따라 행동합니다. 사람들은 욕구가 충족되면 즐거워하고 충족되지 않으면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욕구가 다 충족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또 그 욕구가 충족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들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얻는 즐거움에만 너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즐거움과 괴로움’이라고 하는 고와 락이 계속 되풀이됩니다. 이것을 붓다께서는 윤회, ‘삼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nbsp어떻게 하면 이 즐거움이 지속 가능해질 수 있는지가 붓다의 과제였습니다. 이 윤회에서 벗어나서 열반, ‘닙바나’를 얻는 것이 목적입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함께 행복을 누리되 그 행복이 미래에도 괴로움에 빠지지 않는 지속가능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욕구를 따라가서 얻는 만족을 통한 즐거움은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욕구를 따라 만족을 얻기를 추구하는 것을 쾌락주의라고 합니다. 여기에 반대해서, 욕구를 억제하고 억압하는 것을 고행주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긴장을 초래하기에 이것 또한 열반에 이르는 길이 아닙니다.nbspnbspnbsp붓다는 보드가야 근교에서 6년 동안 고행하면서 이 두 가지 모순에 대해서 새로이 중요한 발견을 했습니다. 욕구를 따라가는 것도, 억압하는 것도 다만 욕구에 속박되고 있다는 뜻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둘을 떠난 제3의 길을 발견했는데 이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그것은 욕구를 따르지도 억압하지도 않고, 욕구를 욕구로서 다만 알아차릴 뿐입니다. 붓다는 이 중도를 통해 결국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가 얻은 깨달음을 ‘연기법’이라고 합니다. 연기법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개별적인 독립체로서 함께 모여 있는 집합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분적으로 관찰하면, 다시 말해 일부분만 바라보면 독립된 존재인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혹은 총체적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nbspnbspnbsp이것은 붓다가 고타마 싯다르타로 살았던 어린 시절에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이기도 했습니다. 어린 고타마는 농경제에 참여했다가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가 죽어야 하는가? 함께 사는 길은 없는가?’라는 큰 의문을 가졌습니다. 스승과 부모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거기에 답을 하지 못했기에 그는 스스로 사색했습니다. 성 밖으로 나가 세상을 보았을 때 그런 현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동쪽 문으로 나가서는 늙었지만 보호받지 못하고 버려진 사람을 보았습니다. 남쪽 문으로 나갔을 때는 병들었지만 보호받지 못하고 치료받지 못한 채 버려진 사람을 보았습니다. 서쪽 문으로 나갔을 때는 죽었음에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길거리에 버려진 시체를 보았습니다. 붓다는 단순히 사람이 늙고 병들어 죽는 모습을 본 것에 그치지 않고, 보호받지 못하고 버려진 사람, 즉 그 당시에 사회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아픔과 연민을 가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궁중 안에서 누리는 풍요가 성 밖 노예들의 그런 고통 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코살라국의 빠세나디 왕이 질문했을 때 붓다가 이렇게 답합니다. ‘타인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지 마십시오.’ 이런 대답은 그의 어릴 때 겪고 깨달은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nbspnbspnbsp붓다가 자란 전통적인 브라만 문명의 가치관과 신앙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북쪽 문으로 나갔다가 브라만 문명에 반대하는 비주류 문명인 사문류의 수행자를 만나고, 그를 통해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문류에 합류하고자 출가했고, 6년의 수행 끝에 결국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나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의 관계 속에 있고 가족의 일부라는 것, 우리 가족이라는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관계 맺은 마을의 일부라는 것, 우리 마을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 마을과 함께 이 지역의 일부라는 것, 이 지역이라는 것이 다른 지역과 더불어 이 나라의 일부라는 것, 우리 나라라고 하는 것이 이웃 나라와 더불어 인류의 일부라는 것, 사람들이라는 것도 결국은 다른 생명과 더불어 전체 생명의 일부라는 것, 생명이라는 것 또한 생명 아닌 것과 더불어 함께 있다는 것, 존재라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것과 더불어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사물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nbspnbsp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붓다의 가르침, 즉 붓다 담마를 따른다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볼 게 아니라 우리 삶의 토대로 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을 정복과 개발의 대상으로만 봤기 때문에 오늘날의 환경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공기를 오염시키고, 물을 오염시키고, 우리가 먹는 음식을 오염시켜서 결국 우리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나라만의 발전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웃 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결국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자기중심의 욕망, 자기중심의 주장과 견해, 자기주장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탐진치’가 우리 고통의 원인이라고 붓다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nbspnbspnbsp따라서 오늘날의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소위 말하는 소비주의, 즉 많이 생산해서 많이 소비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버려야 합니다. 소비주의를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소비를 줄이면 가난한 사람들과 나눠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비를 줄이면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 우리 개인적으로는 삶에 헐떡거리지 않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명상만 한다고 마음에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올바른 이해 위에 우리 삶을 실천해가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 불교인들마저도 불교의 발전이 마치 이 세상의 물질의 발전과 같은 것인 양 여기며 소비주의에 휩쓸려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을 좀 더 총체적으로, 종합적으로 보고 생활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nbsp이번 컨퍼런스의 핵심 주제가 되는 근원적인 내용을 말씀해주신 것에 대해 참가자들 모두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nbspnbspnbsp사회자는 “아주 심오한 메시지를 전해주셨습니다.”라고 하며 스님의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공감했습니다.nbsp심포지엄이나 포럼에 가면 교육이니 뭐니 하는 분야별 이야기를 흔히 듣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겉으로 드러난 증상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스님은 소비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그것을 붓다의 가르침에 비교함으로써 우리가 배워야 할 근원적인 부분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오늘 INEB 참가자들이 ‘총체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고민하려면 스님이 지적한 ‘인간의 욕망과 소비주의’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첫 번째 패널로 스리랑카의 현재 국회의원이면서 스님이기도 한 ‘챔피카 라나와카’ 스님의 발표가 이어졌습니다. 스님은 “영성을 강조해 마을 단위에 있는 스님들의 지지를 얻어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고 소개하면서, “총체적인 개발을 실현하려면 영성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더불어 현재 스리랑카에서 화학비료를 많이 사용해 지하수가 오염되고 있는 문제 등 영성의 부족으로 인해 생긴 많은 문제들을 열거해 주었습니다. nbspnbsp▲ 첫 번째 패널, ‘챔피카 라나와카’ 스님nbsp두 번째 패널로는 스웨덴의 아리가또 단체에서 온 ‘한스 우코’님이었는데, 아이들을 위한 여러 활동들을 하면서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게 되었다며, 타인을 보살피고자 하는 마음을 아이들을 돕는 활동들을 하면서 일깨울 수 있다고 소개해 주었습니다.nbspnbsp세 번째 패널로는 미얀마의 Development Foundation에서 온 ‘한스 반 윌런스워드’님이었는데, 대안적인 삶을 이야기할 때 비즈니스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그 대안을 논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면서 자신은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 지속가능한 대안으로 ‘사회적 기업’을 생각하게 되었다며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불교 지도자들이 기업인들도 불교를 배울 수 있게 인도해야 하며, 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은 소비행위 자체가 또다른 투표권의 행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환경을 파괴하거나 불공정한 방식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 제품에 대해 불매 운동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nbspnbsp▲ 세 번째 패널, 한스 반 윌런스워드nbsp이렇게 기조발제와 패널들의 발표가 있은 후 간단히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러 가지 질문들이 오간 후 오전 세션을 마쳤습니다.nbspnbsp식사를 하러 이동하기 전 참가자 단체사진 촬영이 있었습니다. 언어와 국적, 문화가 서로 다른 곳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참여 불교’를 주제로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을 기뻐하며 환한 웃음을 띠었습니다.nbsp▲ 다 함께 기념사진 촬영nbsp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스님은 nbspINEB의 현재 회장이면서 이번 대회를 주관한 세바란카 재단의 ‘하르샤’ 님과 INEB의 창립 원로인 ‘술략 시바락사’ 박사님과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하르샤님은 한국 방문 일정 때 법륜 스님을 꼭 뵙고 싶다며 스님의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문의했고, 술략 박사님은 스님의 바쁜 해외 일정들을 듣고선 “유명한 사람은 원래 전세계를 돌아다니고, 나처럼 유명하지 않은 사람은 집에만 머무른다”고 웃으며 농담을 했습니다.nbspnbsp▲ 술략 시바락사 박사님과 하르샤 씨.nbspnbsp그러자 스님이 “박사님처럼 유명한 사람은 사람들이 박사님을 찾아오기 때문에 집에만 머무르시면 되는데, 저처럼 유명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안 찾아오기 때문에 제가 직접 다 돌아다녀야 하는 것”이라고 말해 더 큰 웃음을 주었습니다.nbspnbsp낮에는 무척 덥기 때문에 점심 식사 시간을 여유롭게 가진 뒤 오후 1시 30분부터 오후 세션이 시작되었습니다. 오후에는 ‘오픈 스페이스’라는 제목으로 자유롭게 토론하는 시간이 주어졌습니다.nbspnbspnbsp먼저 오전에 패널들의 발표를 들은 후 자신이 가장 열정적으로 토론해보거나 활동해보고 싶은 내용을 각자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참가자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둥글게 앉았습니다. 사회자가 “물건을 판매하듯이 자신의 의견을 잘 포장해서 시장에 내어놓아 보라”고 하자 다양한 주제들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nbspnbsp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미래에는 로봇과 싸워야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지적하는 사람, 닭고기 1kg을 먹기 위해서는 곡식 7kg이 필요하다며 채식의 중요성을 말하는 사람, 파리 협약은 불충분하다며 탄소 방출을 줄이는 적극적인 방인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 등 모두가 한 가지씩 의견을 내어놓았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50여 명의 참가자들의 발표가 있은 후 거의 마지막 즈음에 스님도 함께 대화해보고 싶은 주제 한 가지를 발표했습니다.nbspnbsp“저도 물건을 만들었는데 판매는 포기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스님이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물건은 판매할 수 없어요. nbspnbspnbsp저는 ‘까르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까르마를 얼마만큼 변화시킬 수 있고, 얼마만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입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엄마의 상태가 어떠한지가 아이에게는 굉장히 큰 영향을 줍니다. 자살이라든지 여러 가지 우리들의 번뇌의 문제가 여기서부터 비롯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더 자세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nbsp스님의 발표에 많은 참가자들이 관심을 보였지만 워낙 다양한 제안들이 많이 나와서 이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해보지는 못했습니다. 농담이긴 하지만 스님도 판매를 포기했고요.nbspnbsp이어서 50여 명의 발표 내용을 비슷한 주제끼리 다시 합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크게 6가지 주제로 그룹이 만들어졌는데, 스님은 종교 간의 차별 문제를 주제로 한 그룹에 들어가 함께 토론을 했습니다.nbspnbspnbsp그룹 참가자들은 처음에는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하나의 공감대를 찾았습니다. 각 나라마다 종교 구성이 다수와 소수를 점유하는 정도가 각기 다른데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는 일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분은 영국 식민지 시절 땅을 강제로 빼앗기고 이주하는 과정에서 무슬림과 불교 간의 갈등이 빚어졌고 지금 불교는 소수가 되어 차별받고 있다고 했고, 인도네시아에서 온 분은 무슬림이 다수인데 다수인 무슬림이 소수인 기독교를 탄압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이야기하면서 법규정을 통해서라도 이런 차별을 철폐시켜 나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또 이런 변화를 위해 INEB에 정부 단체 관계자를 다 참가시킬 필요가 있음도 덧붙였습니다. 특히 무슬림은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는데 지역에 따라 소수가 되기도 하고 다수가 되는 점을 이야기해 모두가 흥미롭게 들었습니다.nbspnbsp토론 내용을 경청한 스님은 여러 가지 의견들을 하나의 관점으로 다시 정리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종교 차별은 종교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다수가 소수를 어떻게 포용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미얀마, 스리랑카, 태국에서는 불교가 다수이지만 방글라데시에는 불교가 소수이죠. 또한 인도에서도 소수입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는 무슬림이 다수이지만 필리핀에서는 무슬림이 소수예요.”nbsp그리고 다시 많은 토론이 있은 후 한 사람이 스리랑카에도 급진적인 행동을 하는 BBS라는 단체가 있음을 이야기하자 모두가 놀라하며 순식간에 화제가 되었습니다. 스님은 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스리랑카 불교인들도 상처가 있음을 이해해야 해요. 우선 영국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불교의 자기 정체성을 탄압받았습니다. 그런 후 기독교가 갑자기 들어와서 확대가 되었어요. 거기에 대한 스리랑카 불교인들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지금은 다수의 기득권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탄압받았던 기억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nbspnbsp그리고 스리랑카 불교인들은 타밀족에 대해서도 저항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타밀족이 인도로부터 스리랑카로 침범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지금만 생각하면 다수 기득권인데 과거에 소수자로서 겪었던 피해의식이 함께 작용하기 때문에 BBS와 같은 승려들의 극단적인 행동들이 나오는 겁니다. 미얀마도 그런 성격이 있어요. 불교가 민족주의와 결합이 되어 있어서 종교의 형식을 빌리지만 사실은 민족주의적인 저항과 관계가 있습니다.”nbsp스님의 이야기에 모두 공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여기에 한 분은 “미얀마의 경우 불교의 정체성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함께 지적해 주었고, 또 한 분은 “갈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종교 간에도 서로 교류를 하면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신 그 방법이 폭력적이지 않아야 한다.”고 덧붙여 주었습니다. 스님은 이 이야기들을 듣고 다시 스님의 생각을 나누어 주었습니다.nbspnbspnbsp“다수가 소수를 포용해야 한다는 것은 잘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은 대부분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소수자들에게도 ‘분노를 갖고 저항만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분노를 통해서는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습니다.”nbsp스님의 이야기에 모두가 공감하자 캐나다에서 오신 분은 “소수가 오히려 포용적인 자세를 취할 때 감동을 주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의견을 덧붙여 주었습니다.nbspnbsp토론을 곧 마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방글라데시에서 온 분은 더 많은 이야기를 토로하고 싶어 했습니다. 시간 제약이 있음에도 너무 길게 이야기하려는 이 분을 모두가 꺼려하는 눈빛을 보내자 스님은 “방글라데시 불자들은 상처가 많아요.”라고 하면서 이 분을 감싸주고 마음을 진정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nbspnbsp▲ 답답함을 토로하고 싶어하는 방글라데시 참가자nbsp토론을 마치면서는 한 명씩 돌아가며 총체적인 발전과 구조적인 폭력을 없애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씩 만을 말해보기로 했습니다.nbspnbsp“가능한 많은 다양한 그룹들에게 손을 뻗어서 다가가는 것이 중요합니다.”“종교 간 대화를 할 때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후변화를 위해 같이 행동하는 것과 같이 실제로 협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nbsp“불법에 기초해서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다양성을 수용하면서 함께 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nbspnbsp긴 시간의 토론 내용이 짧은 한 문장으로 명쾌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언인지 한 마디로 정리해 주었습니다.nbspnbsp“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nbspnbsp참가자들은 스님이 아주 중요한 점을 이야기해 주었다며 공감을 표하면서 토론을 마쳤습니다.nbspnbsp마지막으로는 전체 참가자가 한 자리에 모여서 소감을 한마디씩 나누는 것으로 폐회식을 갈음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자신이 감동받은 것을 이야기했는데, ‘참여 불교’를 주제로 전세계의 사람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함께 행동할 수 있음을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습니다. 스님의 차례가 되자 스님도 짧게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nbspnbspnbsp“저는 한국에서 왔고요.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좋았고, 특히 젊은 사람들이 많아서 더 좋았습니다. 특별히 좋았던 것은 이슬라믹 부디스트를 만난 것입니다.” nbspnbsp이슬라믹 부디스트는 어제와 오늘 스님과 함께 토론한 ‘야야 키스비야’씨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슬라믹 부디스트란 표현에 참가자들도 모두 크게 웃었습니다.nbspnbspnbsp그러자 참가자 중에 한 분이 번쩍 손을 들면서 “여기 스리랑카에도 이슬라믹 부디스트가 있어요” 라고 외쳐서 또한번 웃었습니다.nbspnbsp▲ INEB 폐회식nbsp이렇게 소감 발표를 끝으로 INEB 대회를 모두 마쳤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어제 만난 중국인 교수님이 스님을 또 찾아와 ‘스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며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중국인 교수님은 막시즘을 신봉하다가 최근에 불교공부를 시작한 분인데 스님은 이 분의 어깨를 토닥이며 다시 한 번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 어제에 이어 다시 스님을 찾아온 중국인 교수님nbsp“중국이 옛날에는 마오이즘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마오이즘도 거의 없어졌잖아요. 그래서 텅빈 머리를 이제 불교로 채워야 해요.” nbsp“최근에는 미국이 중국의 모델이 되어버렸어요. 이제 중국을 지배하는 것은 물질주의입니다.”nbsp“그래요. 더군다나 중국 불교도 지금 문제가 많아요. 오직 복을 빌기만 하잖아요. 그것만 가지고는 중국을 변화시킬 수 없어요. 붓다 담마를 공부하고 체득해야 해요. 그래야 중국도 환경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인 빈부격차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nbspnbsp중국이 힘은 세어지고 머리는 텅 비어가기 때문에 큰 문제예요. 그래서 붓다 담마로 머리를 다시 채워야 해요. 미국만 따라가서는 안 돼요.”nbsp“미국을 따라가면서 중국은 많은 대가를 치렀어요. 미국을 모델로 하면 성공할 수 없어요. 성공해도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nbspnbsp“한국이 그러했어요. 경제는 성장했는데 사람들은 그만큼 행복해지지 않았어요. 자살율이 세계 1위이고, 불만족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아요. 출산율은 세계 최저이고요.nbspnbsp한국은 지금 온갖 문제들이 뒤섞여 있어요. 나쁘게 생각하면 혼란스럽고, 좋게 생각하면 앞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항상 서양 문명을 극복할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고 노력합니다. 따라 배우는 것은 이제 끝났어요. 어떻게 이것을 넘어설 것이냐의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nbsp이렇게 격려를 해준 후 스님이 다시 한번 “몸은 중국, 머리는 대만, 이렇게 함께 가야 한다” 라고 말하자 옆에 있던 대만에서 온 닥터 요요씨가 “아주 중요한 포인트를 말해주었다”며 크게 웃었습니다. 닥터 요요씨는 “2003년도에 INEB 한국 행사 때 임진각에 갔는데, 그 때 스님이 말해준 남북 평화의 메시지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하면서 “오늘도 스님의 강력한 파워를 느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습니다.nbspnbsp▲ 대만에서 온 닥터 요요씨.nbspnbspnbsp또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인도네시아에서 온 무슬림인 ‘야야’씨를 다시 만났습니다. ‘야야’씨가 스님에게 감사 인사를 하면서 “불교로 개종하는 것을 고민하면서 많은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자 스님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고개를 흔들면서 “이슬라믹 부디스트가 되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슬람교를 버리지 말고 이슬람교를 믿으면서 붓다 담마도 함께 공부하면 된다”고 하자 ‘야야’씨는 더욱 기쁜 표정을 지으며 스님에게 감사함을 표현했습니다.nbspnbsp▲ 무슬림인 야야씨를 격려해 주고 있는 스님nbsp스님은 한국에 오면 꼭 연락하라고 하면서 연락처를 건넨 후 ‘야야’씨와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nbspnbsp저녁에는 이번 INEB 행사에 참가한 한국인들끼리만 모여서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스님은 통역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한국에서 직접 비행기 티켓을 끊고 온 이진아씨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스님이 “저는 한 가지 주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 이야기하다가 과학 이야기하다가 환경문제 이야기하다가 통일 이야기가 나오면 사드 배치 문제를 이야기하니까 한국말로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생길 수 있는데 그것을 통역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라고 하자 이진아씨는 “스님이 오히려 저의 수준을 헤아려서 말씀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마쳤다”며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금세 밤이 깊어졌습니다. 내일은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INEB 총회가 열릴 예정입니다.nbsp ※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nbsp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분들은 지금 신청하세요.nbspnbspnbsp
2016.1.26 (스리랑카 2일째) INEB ‘오늘날의 구조적 폭력’에 대한 토론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INEB에서 주관하는 불교지도자 컨퍼런스에 참가해 패널들의 발표를 경청한 후, 오후에는 그룹별 토론에 참여해 교류의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아침 8시 30분, 컨퍼런스가 시작되기에 앞서 스리랑카 스님들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스님도 합장을 하고 테라바타식 기도를 함께 따라했습니다.nbspnbspnbsp기도 후 9시가 되자 컨퍼런스의 첫 번째 주제에 대한 사회자의 소개가 있었습니다. 각국에서 온 참가자들이 오늘 함께 고민할 주제는 ‘오늘날의 구조적인 폭력’입니다. 3명의 패널이 나와 이 주제에 대해 각각 발표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컨퍼런스가 시작되었습니다.nbspnbspnbsp첫 번째 발표자인 ‘조안 메이시’는 구조적인 폭력의 하나로 거대 기업의 폭력을 들었습니다. 거대 기업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레이다에 잡히지 않고 로컬 단위에서 기층 민중들이 그 저변을 확대해나가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두 번째 발표자인 인도네시아에서 온 이슬람 단체 활동가 ‘야야 기스비야’ 씨는 많은 이슬람인들이 ‘비이슬람 인과는 친구도 맺지마라’ 하는 식의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는데,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을 잘 읽어보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관용과 존중의 정신이 다 들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본인이 속한 단체는 코란의 언어로 제대로 된 이슬람을 교육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세 번째 발표자인 ‘페레라’ 신부님은 스리랑카에서 신부님을 하고 있는 분이신데 다수가 불교인 이곳에서 소수가 배척받을 때가 있다며 타밀지역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 nbsp nbspnbspnbsp스님은 각 패널들의 발표 내용을 경청하며 공감이 갈 때는 때론 웃기도 하면서 오전 시간을 보냈습니다.nbspnbsp12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발표가 끝나지 않자 스님은 남방불교 스님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러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스님은 웃으면서 “여기서는 오후 불식을 하지 않으면 스님 취급을 못 받는다”고 하면서 이곳에 머무는 동안에는 오후 불식을 하기로 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날이 너무 더워서 스님도 오후에는 더욱 간소해진 차림으로 컨퍼런스홀로 나왔습니다.nbspnbspnbsp식사 후 오후 1시 30분부터 다시 컨퍼런스가 시작되었습니다. 오후에는 ‘World Caffe’라는 프로그램이 열렸는데, 총 세 번에 걸쳐 그룹을 바꿔가며 오늘 주제인 ‘구조적인 폭력’에 대해 자유토론을 하는 방식이었습니다.nbspnbsp먼저 스님은 각각 캐나다, 인도네시아, 중국,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조를 하나 선택해서 들어갔습니다. 각자 자기 소개가 있은 후 사람들은 스님의 소개를 듣기를 요청했습니다. 스님은 왜 출가를 하게 되었는지 어렸을 때 이야기부터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nbsp“저는 한국에서 왔고 고등학생 때 스님이 됐어요. 원래는 과학자가 꿈이었고 종교는 굉장히 안 좋아했어요. 초등학생 때 교회 다니면서 노래도 배우고 좋았지만, 처녀가 아기를 낳았대서 어떻게 처녀가 아기를 낳을 수 있냐고 계속 물었더니 나더러 믿음이 없는 나쁜 사람이어서 지옥 간다는 거예요. 의문이 나서 물었을 뿐인데 왜 나쁘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교회 나가길 그만뒀어요. nbsp중학생이 됐을 때 친구가 절에 가자고 해서 따라갔더니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서서 말을 했다고 해서 어떻게 갓난아기가 설 수 있냐고 물었더니 스님이 ‘그러니까 부처지’ 그랬어요. ‘그럼 저는 태어났을 때 서지 못했으니까 부처가 될 수 없겠네요. 그러면 절에 다닐 필요가 없지 않아요?’ 했더니 스님이 아무 대답을 못했어요. 그래도 절에서는 저더러 지옥 간단 말은 안 했어요. nbspnbsp그러다 고등학생이 되었는데 학교 옆에 있는 절의 스님이 저를 보더니 스님이 되라고 했어요. 그래서 불교 신자도 되기 싫은데 무슨 스님이냐고 했어요. 저는 원래 물리학자나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 스님이 되었어요.”nbsp“어쩌다 상황이 그리 되었습니까?”nbsp스님은 조금 망설이는 듯 하더니 출가한 계기를 얘기했습니다. 모두들 재미있다는 듯이 듣고, 또 질문도 했습니다.nbspnbsp출가의 동기를 설명한 후 스님은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nbspnbspnbsp“저는 종교라는 게 마음에 안 들었어요. 너무나 허황된 소리를 하니까 그런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신비하다고 여기는 것은 모두 무지의 소산이라고, 즉 어떤 현상의 원인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붓다 담마에 대해 공부해보니까 그 가르침이 과학과 같이 합리적이어서 오히려 적응이 잘 되었어요. 저에게 있어서 붓다 담마는 종교를 넘어선 것이었기에,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도 쉽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어떤 현상이나 문제도 근본 원인을 알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nbspnbspINEB와 인연 맺은 것은 1992년입니다. 보스턴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라는 학술대회가 있었어요. 그때 이야기한 주제가 지구환경 파괴, 인류공동체 붕괴, 자아상실이었는데 마침 그 주제 발표를 제가 했습니다. 한국 불교인들 중에 그 주제로 발표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요청이 돌고 돌아 제게까지 와서 국제회의에 참석한 것이 인연이 됐습니다. 그 때 참석한 슐락 시바락사 박사와 아리아트네 박사와도 알게 되었고요.nbspnbsp지금 한국에서는 주로 환경운동, 제3세계 구호활동,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운동,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수행 지도 등을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nbsp스님의 소개를 듣던 인도네시아에서 온 키시비야 씨는 큰 감명을 받았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nbspnbspnbsp특히 스님이 출가하게 된 계기에 대한 말씀 중에서 스승님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놈이 바쁘기는 왜 바쁘냐?’라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대목은 자신이 오래 전부터 고민했던 문제였다며 그 부분이 가장 가슴에 와 닿았다고 합니다. “스님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나요?” 라고 물었지만 첫 번째 토론 시간이 끝나서 스님은 환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습니다.nbspnbsp또 토론 참가자 중에 중국에서 오신 한 분은 “불교의 종착지는 마르크수 주의라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불교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표현했는데, 쉬는 시간이 되자 스님은 중국 분에 대해서 “불교 공부를 좀 더 해야할 것 같다”고 하면서 한 가지 조언을 덧붙여 주었습니다.nbspnbspnbsp“경제나 정치나 권력만 갖고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마르크스 주의는 이론적으로는 불교와 비슷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사회문제에 대해서 설명할 수는 있어도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어요. 인간이라는 것은 사회적 환경도 중요하지만 또한 거기에 사는 개인의 마음이 어떠한지도 중요해요. 예컨대 마르크수 주의는 사회적 환경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을 했지만 개인의 문제, 즉 마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해가 없기 때문에 불완전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불교는 이 마음의 문제를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한문으로 ‘인연’이 뭔지 알죠? ‘인’이 개인 문제라면 ‘연’은 조건, 즉 사회적인 조건 문제입니다. ‘인’과 ‘연’이 결합해야 ‘과’가 생깁니다. 그래서 인연과보라고 해요.”nbsp“저도 내적인 문제와 환경적인 문제를 함께 해결해나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nbsp“그런데 이론만 갖고는 안 되고 직접 경험해야 해요.”nbsp“아까 스님께서 말씀하신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라는 문제가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예요. 자기 자아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답을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찾아야 할 겁니다.”nbsp“아주 좋아요.” nbsp스님은 중국 분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응원의 마음을 보내 주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두 번째 토론 시간에서는 다시 새로운 그룹 참가자들과 ‘내 삶 속에서의 구조적인 폭력’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nbspnbsp먼저 일본에서 온 참가자는 직장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늘 차별받아야 했던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런 후 스님은 차별받은 경험이 없는지 묻자 스님은 “남자이고 스님이고 나이도 비교적 많은 편에 속해서 그 정도로 심한 차별을 받아본 경험이 적다”고 이야기하면서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차별 문제에 대한 스님의 생각을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nbsp대화 중에 미국에서 온 여성 분이 스님의 이야기에 적극 공감하면서 여러차례 질문을 해서 문답 형식으로 계속 대화가 이어졌습니다.nbspnbsp“한국에도 많은 차별이 있어요. 일단 구조적 차별과 문화적 차별이 있습니다. 문화적 차별 중에는 첫째, 여성이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많이 개선됐다고 하지만 아직도 많은 차별이 남아 있습니다. 직장에서의 남녀 차별도 있고요. 또 한국에서는 나이를 갖고 차별하는 것도 많습니다.”nbsp“저는 나이든 사람이 존중받는 게 좋아 보여요. 농담입니다.” nbsp“유교문화권에서는 ‘장유유서’라고 해서 나이 많고 적음을 굉장히 따집니다. 이렇게 대화를 하다가 몇 살인지 물어보고 자기보다 나이가 적으면 바로 말을 놔버려요.”nbspnbsp“존중이라는 건 서로 동등해야 할 텐데 그저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만으로 존중받는다니 흥미롭네요. 나이가 많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고, 더 많이 안다고 할 수도 없고, 단지 오래 살았을 뿐인데요.”nbsp“그래요. 그러나 문화라는 건 그리 쉽게 바뀌지 않아요. 보수적인 사회에서는 변화를 추구하면 예의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기 쉽습니다.”nbsp“우리 모두 각자 다른 문화에서 왔지만 언어적 측면에서는 다들 매우 깨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용하는 모국어를 바꾸라는 게 아니라, 말을 풀어내는 방식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어 같은 경우는 존댓말과 반말이 있는데 이런 위계적인 요소도 예를 들어 세대가 바뀌면 바뀔 수 있겠지요.”nbspnbspnbsp“실제로 지금 한국에서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습니다. 예컨대 남녀차별의 경우,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남자가 차별받는다는 항의가 나올 만큼 여성들의 평등성이 점점 확산되고 있습니다.”nbsp“남자들의 불만이 어떤 건가요? 차별적이던 것이 조금씩 균형을 찾게 되면서, 남자들은 예전에 자기들이 익숙하고 우위에 있던 것이 바뀌니까 불편하게 느낄 수 있겠어요.”nbsp“그렇죠. 그래서 인터넷의 익명 게시판들에서는 여성에 대한 저항이 굉장히 큽니다.” nbsp“한국에서 자살은 어떤가요? 남녀 성비에 따른 차이가 있나요?”nbsp“성비에 따른 차이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자살률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편입니다. 예전에는 일본이 1위였는데 지금은 바뀌었습니다.”nbsp“가장 자살률이 높은 연령층이 어떻게 됩니까?”nbsp“아마도 노인이 가장 많습니다.”nbsp“정말요? 노인이라면 60세 이상 아닙니까? 일본에서도 노인층의 자살이 큰 문제가 되고 있어요. 사회복지체제가 완전히 바뀌어버렸습니다.”nbsp“우선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배우자가 죽은 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문화가 바뀌어서 자식들이 돌보지 않고, 사회보장제도가 아직 충분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합니다.”nbsp“경제적으로 불안정하다고 하셨는데...”nbsp“노인 빈곤층이 많지요.”nbspnbsp“갈 곳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다는 건가요?”nbsp“아직 정부가 제공하는 사회보장이 충분하지 않아요. 그리고 전통적으로는 자식이 나이든 부모를 돌봤는데 지금은 그 전통이 거의 사라졌습니다.”nbsp“노인은 정부 지원이 없고, 가족의 책임이 없고, 노인 자살률이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것은 한국의 급격한 문화적 변화를 보여주는 강렬한 예인 것 같아요. 젊은이는 자기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노인들의 경우에는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문제인 것 같네요.”nbsp“한국은 경제성장의 정도에 비해 사회보장제도가 못 따라 가는 것이 지금 굉장히 큰 과제입니다. 그리고 노령화가 매우 급격히 진행되고 있어요. 사람들은 언제나, 누구나 나이 들게 마련이에요. 이제 베이비붐 세대가 나이 들어가니까 사회 전체의 노령화가 문제가 되고 있어요. 한국은 또한 출산률이 세계 최저입니다.”nbspnbsp“예, 일본도 마찬가지여서 문제입니다.”nbsp“그래서 인구 구성의 불균형이 심합니다. 20대는 총 사망자 중 자살자가 53퍼센트나 돼요.”nbspnbsp“정말입니까? 못 믿겠어요.” nbspnbsp“30대와 40대는 자살률이 20대만큼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살이 3040대의 사망원인 1위입니다.”nbspnbsp“이런 문제가 스님이 하시는 일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며,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원인은 무엇인가요?”nbsp“자살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첫째, 사회적인 빈부격차가 한 원인이에요.”nbsp“한국 20대의 경우 경쟁사회이기 때문에 자살률이 높지 않나 싶은데요.”nbsp“그것도 한 원인입니다. 공부에 대한 부담은 크고 취직은 거의 안 되니까요. 대학을 나와도 직장을 구하기가 아주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이 부모에게 의지해 생활합니다. 두 번째, 젊은이들이 정신적으로 아주 약합니다. 부모의 과잉보호 때문에 독립적이지 못해요.”nbsp“문화적으로 어떤 사이클이라고 볼 수 있겠어요. 부모의 양육이 그런 결과를 낳는군요.”nbspnbsp“세 번째, 어릴 때 엄마가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며 아이들을 키웠기 때문에 아이들이 자라서도 힘들어합니다. 여성의 교육수준이 빠른 속도로 높아졌는데 사회적으로는 아직 남녀 평등이 보장되지 않는 가운데 결혼하니까 부부 갈등이 아주 심합니다. 그리고 여자도 직장에 나가야 하지만 집안일은 여전히 여자가 주로 해야 하니 그 사이의 갈등도 심합니다. 지금도 그런 면이 있지만, 20년 전에는 이런 갈등이 아주 심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기에 그렇게 힘들어하는 엄마 밑에서 어렵게 자란 아이들이 이제 성인이 되어서 그 영향으로 힘들어하는 거예요.”nbsp“굉장히 흥미롭군요. 여성들이 교육수준이 높으면 결혼해서도 배우자와 평등한 것을 모색해서 찾으려고 할 텐데요.”nbsp“지금 젊은이들은 많이 달라졌어요. 남자들이 점점 평등을 받아들이고 있으니까요.”nbsp“남자들이 불편하게 생각하면서도 여자 쪽에서 요구하는 변화들을 받아들이고는 있다는 거네요.”nbsp“지금은 받아들이는 편이지만, 20년 전부터 지금까지의 과거가 문제였지요. 사회가 바뀌면서 문화도 바뀌는데, 전통문화가 바뀌는 속도와 사회가 바뀌는 속도가 안 맞으니까요.nbsp제가 하는 일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의 이런 갈등들을 우리가 붓다 담마를 통해서 어떻게 해소할 거냐’에 주로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은 이런 갈등 속에서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가져서 이 문제를 극복할 것이냐는 겁니다. 이런 갈등을 개인이 어떤 관점으로 바라봐야 하겠느냐가 일단 우선순위예요. 다음이 제도적인 개혁인데, 이건 사회적인 운동이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 모두를 추구해야 합니다.”nbspnbsp“개인수행은 명상과 같은 방식을 통해 하시는지요?”nbsp“아뇨, 사물을 보는 관점을 바르게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상대를 이해하는 거예요. 부모는 자식에 대해 이해가 없고, 자식은 부모를 이해 못하고, 다들 언제나 자기 생각으로만 재단하잖아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개인의 차원에서는 우선 중요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힘을 합쳐서 사회적, 구조적인 변화를 풀어나가야 합니다.”nbsp“개인적인 변화가 사회적인 변화로 이어진다고 이해하면 될까요?”nbsp“아니오, 두 가지 측면에서 동시에 접근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개인 책임으로 떠넘겨도 안 되고, 모든 게 사회문제라고만 봐서도 안 돼요. 사회적인 구조의 변화도 가져와야 하고, 동시에 개인의 자세도 바뀌어야 합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걸 다 개인 문제라고만 말해도 안 되고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고만 말해도 안 됩니다. 원인을 잘 살펴서 제도적인 문제일 때는 제도를 바꾸어야 하고, 개인적인 문제일 때는 개인의 관점을 바꿔야 해요. 그게 불교로 말하자면 ‘인연’의 문제입니다.nbspnbspnbsp쉽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밭에 곡식을 심었을 때 수확량이 얼마가 되는지는 씨앗과도 관계가 있고 밭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씨앗의 문제만 이야기해도 안 되고, 밭의 문제만 이야기해도 안 되고, 두 개를 함께 봐야 해요. 그것이 인연입니다. ‘인’은 씨앗, ‘연’은 밭과 같습니다. ‘인’은 원인이고, ‘연’은 원인이 작용하는 환경입니다. 개인과 사회라는 관점에서도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지요.nbspnbsp원인이 사회적인 데 있을 때는 사회적인 변화를 가져와야지 그걸 두고 개인한테 책임을 물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예컨대 구조적 폭력의 문제를 개인의 잘못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남녀차별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여자 개인의 문제로 봐서는 안 돼요. 노인의 자살 문제를 모두 자살한 노인의 개인 문제라고 보면 안 됩니다. 사회적 조건 때문에 생긴 것이니까요.nbsp‘인연’이 한 단어로 보이지만 한문으로는 ‘인’과 ‘연’이라는 두 개의 단어예요. ‘인’이라는 것은 직접적인 원인을 말하고 ‘연’이라는 것은 그 인이 작용하는 사회적인 환경을 말합니다. 영어 표현인 ‘causality’나 ‘cause and effect’로는 그 뜻을 정확히 표현하기가 어려워요. ‘연’은 ‘condition’에 가깝습니다. 여기 씨앗, 즉 콩이 한 알 있다고 해요. 그러면 콩 싹이 트는 직접적 원인은 씨앗입니다. 그런데 콩을 천장에 매달아 놓으면 싹이 안 트고, 불에 떨어져도 싹이 안 트고, 사막에 떨어져도 싹이 안 터요. 적당한 온도와 습기가 있어야 싹을 틔웁니다. 그럴 때 이 씨앗을 직접적 원인, 즉 ‘인’이라고 하고 온도와 습도와 햇빛 같은 조건을 ‘연’이라고 해요.”nbspnbsp“스님의 명쾌한 설명이 너무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nbspnbsp스님에게 질문을 계속 했던 미국 여성 분은 스님의 명쾌한 설명에 무척 만족해하며 좋아했습니다. 다만 이 내용을 다시 전체 정리 시간에 자신이 요약해서 발표해야 하는데, 스님의 말씀 내용이 너무 깊은 내용이어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다며 스님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nbspnbsp세 번째 토론 시간에는 맨 뒤에 앉으신 방글라데시 스님 한 분의 한 쪽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되어 있고 앞이 잘 보지 못보는 듯 한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자 스님은 토론에 빠지고 이 분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nbspnbspnbsp눈병의 증상이 지금 어떠한지, 혹시 백내장이 아닌지, 수술은 받았는지 등을 체크한 후 스님이 한국에서 가져온 눈 세정제와 몇 가지 약들이 도움이 될 것 같아 다시 숙소로 가서 약을 가져왔습니다.nbspnbspnbsp스님이 직접 눈에 안약을 넣어주고 눈 주위를 휴지로 닦아주자 방글라데시 스님은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INEB 관계자는 이 모습을 보고 “혹시 스님이 의사이셨냐고?” 물어보기도 해서 잠시 웃기도 했습니다.nbspnbsp이렇게 세 번의 토론 시간을 모두 마치고 다시 전체가 빙 둘러앉아 각 그룹별로 토론한 내용을 한 명씩 대표로 나와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날의 구조적 폭력’이라는 주제로 세계 각국에서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nbsp특히 사회자는 우리들은 이런 문제로 대화를 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비행기를 타고 여기까지 온 이상한 사람들인 것 같다고 농담을 해서 모두 크게 웃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오후 토론 시간까지 모두 마치고 저녁 식사 시간을 가진 후 저녁 8시부터는 문화행사가 열렸습니다. 참가자들이 세계 각국에서 오다보니 나라마다 고유의 전통문화를 보여주었습니다. 중국에서 온 참가자들은 다도 공연을 음악과 함께 아름답게 보여주었고, 특히 스리랑카의 세바란카재단에서 스리랑카의 전통 춤을 다양하게 보여주어 큰 박수와 환호를 받았습니다.nbspnbspnbspnbspnbsp공연이 한참 진행 되던 중 스님은 중간에 자리를 빠져나와 숙소로 향했습니다.nbspnbsp이렇게 INEB 첫째날 발표와 토론, 친교의 시간을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인간과 자연, 모든 생명의 총체적인 발전을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가?” 라는 주제로 스님의 기조 발제가 있은 후 여러 패널들과의 토론 시간이 이어질 예정입니다.nbspnbsp ※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nbsp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분들은 지금 신청하세요.nbspnbspnbsp
2016.1.25 (스리랑카 1일째) 사리탑 준공식 및 마하매브나와 명상센터 방문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스리랑카에서의 첫날을 보냈습니다. 내일부터 INEB 국제행사가 열리는데, 행사장에 도착하기 전 인연이 있는 스리랑카 절 두 곳을 방문했습니다.nbspnbsp스리랑카 국제 공항 근처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은 스님은 아침 7시에 숙소에서 나와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숙소에는 작년 6월 INEB 정토회 방문단의 일원으로 참여한 적 있는 앗사지 스님이 직접 찾아와 스님을 환영하고 마중해 주었습니다.nbspnbsp▲ 스리랑카 앗사지 스님nbsp앗사지 스님은 스님을 보자 너무나 반가워하면서 직접 가져온 차량에 스님 일행을 모두 태우고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절인 ‘스리 비수다라마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nbspnbsp공항에서 ‘스리 비수다라마야’까지는 약 2시간 30분이 소요되었습니다. 최근에 중국에서 차관을 받아 고속도로를 건설했는데 한국만큼이나 아주 잘 구축되어 있어서 스님 일행도 모두 놀랐습니다.nbspnbsp▲ 콜롬보에서 마타라까지 곧게 뻗어있는 E03 고속도로nbsp스리랑카의 수도인 콜롬보를 경우하여 한참 동안 남쪽으로 향해 엘피티야 근처에 다다르자 앗사지 스님이 운영하는 ‘스리 비수다라마야’가 나타났습니다.nbspnbsp절 입구에는 마을 주민들이 모두 흰 옷을 입고 나와 양쪽으로 기립을 하고서 열렬히 환영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 스리 비수다라마야nbsp먼저 한 청년이 나와 스님의 발 앞에 엎드려 합장공경의 예를 표하고 꽃목걸이를 걸어주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행렬의 앞에는 전통의상을 한 건장한 청년 6명이 화려한 춤을 추면서 행렬을 이끌었습니다.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청년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열정적인 춤을 보여주었습니다.nbspnbspnbsp오늘은 ‘스리 비수다라마야’ 절에서 사리탑 준공식을 하는 날입니다. 앗사지 스님은 법륜 스님의 스리랑카 방문 소식을 듣고 “꼭 준공식에 참석해 사리탑을 참배하고 축원 기도를 해줄 것”을 스님께 요청했다고 합니다. 특히 앗사지 스님은 작년 INEB 정토회 방문단의 일원으로 참여해 스님의 많은 활동과 설법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 때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오늘 이렇게 열렬히 환대를 해주는 이유도 그 때 받은 감동의 영향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nbspnbsp신발을 벗고 마을주민들이 깨끗이 청소해 둔 계단을 오르자 하얀색 사리탑이 아주 정갈한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이 사리탑은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정성을 모아 건축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절은 생긴지 90년이 되었지만 그동안 사리탑이 없어 마을주민들 모두가 오랫동안 간절히 원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그 꿈이 이루어지는 날인 것입니다.nbspnbsp▲ 스님이 방문한 것을 계기로 준공식을 하게 된 사리탑nbspnbsp스님은 사리탑을 향해 삼배를 하고, 탑을 한 바퀴 돈 후 앗사지 스님과 제막식을 함께 했습니다. 가려진 기념 현판이 모습을 드러내자 마을 주민들 모두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습니다.nbspnbspnbsp기념 현판에는 “1월 25일 법륜 스님이 방문하여 함께 축하해 주었다“는 내용도 함께 들어가 있어서 스님은 앗사지 스님에게 합장을 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nbsp햇살이 너무 뜨거워서 땀이 뻘뻘 흐르는 가운데, 마을 주민들은 천막 아래에 자리를 잡자, 앗사지 스님이 나와 오늘 사리탑 준공식을 하게 된 경위와 한국에서 온 스님 일행을 환영하는 인사말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역사가 90년 정도 되는 우리 사찰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옵니다. 그런데 우리 사찰에는 불탑이 없었습니다. 이 불탑을 세우고자 우리는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가난하고 돈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두들 조금씩 조금씩 정성껏 돈을 모아 아름다운 불탑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그런 가운데 오늘 한국의 법륜 스님께서 이 작은 절까지 와주셔서 우리 마을 사람들은 아주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스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nbspnbsp스님은 작년 6월 한국으로 저를 초대해 유명한 사찰과 자연을 둘러보고 정토회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방문단에는 스리랑카에서 참석한 사람이 저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에 가보고 나서 법륜 스님이 아주 유명한 분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강연장에는 스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세상의 어떤 문제도 불교식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말씀을 해주시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자기의 문제를 상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nbspnbspnbsp바쁜 일정 중에도 이 작은 초대에 응해주셔서 저는 너무너무 행복하고 감사드립니다. 스님 일행은 어젯밤에 스리랑카에 도착했는데 여기 와서 제게 이걸 어떻게 만들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준 보시금을 모아 만들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힘으로 만들어서 스님을 초대한 것입니다. 스님이 여기 참석해주셨기에 우리는 너무나 운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스님 같은 분이 여기 오신 것은 우리 마을이 생기고 나서 처음입니다.”nbsp앗사지 스님이 감사 인사를 거듭 표하자 이를 듣고 이어서 스님이 답례로 축사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다행히 행사 스텝 중에 한국말을 잘 아는 청년이 한 명 있어서 스님의 축사가 통역이 되어 마을 주민들에게 전달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투른 통역으로 인해 스님은 통역하는 청년이 알아들을 수 있게 쉬운 단어로 여러 차례 문장을 바꾸어가며 축사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나무 붓다, 나무 담마, 나무 상가. 먼저 여러분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부처님의 사리탑을 여러분들의 힘으로 만들어 오늘 준공식을 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또 저의 방문을 이렇게 열렬히 환영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nbspnbsp부처님의 탑은 부처님의 몸을 상징합니다.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 우리가 부처님처럼 중요하게 모셔야 하는 것은 바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입니다. 불탑은 그냥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 크고 화려한 탑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질, 즉 하나의 형상에 불과합니다. 탑은 우리 믿음의 상징이기 때문에 사람의 정성이 중요합니다. 이 마을에 사는 여러분 모두가 조금씩 정성을 모아 이 탑을 쌓았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합니다. 기부를 하거나 조각을 하거나 공사에 참여해서 이 탑을 만드는 데 함께하신 모든 분들에게 부처님의 가피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힘을 모아 부처님의 탑을 만든 공덕으로 여러분들이 살아 있을 때는 건강하고 행복하시고, 돌아가시면 부처님의 나라로 가시게 될 겁니다.nbspnbsp여러분 모두의 정성으로 탑은 만들어졌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 여러분들이 여기 와서 탑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붓다 담마,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해야 합니다. 붓다 담마를 알아야 부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붓다 담마를 보는 사람은 곧 나를 본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붓다 담마를 공부해야 합니다. 셋째, 그 붓다 담마에 따라 실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실천을 통해서 붓다 담마를 증득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직접 체험해서 열반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열반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nbspnbsp오늘 이 좋은 자리에 초대해주신 아사지 스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저도 이런 불탑의 준공식에 초대받은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또 여러분들이 다들 환영해주셔서 너무나 기쁩니다. 이렇게 불탑 만든 공덕으로 여러분들 모두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우리 서로 통역이 잘 되면 더 많은 이야기를 하도록 할게요. 통역해주신 분께도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nbspnbsp스님의 축사에 마을 주민들은 “사두, 사두, 사두”라고 하며 공경의 예를 표했습니다.nbspnbspnbsp특히 행사장에는 카톨릭 신부님도 참석해 축사를 해주어서 주목을 끌었습니다. 신부님은 “이런 좋은 가르침을 전해주는 곳이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이웃종교인으로서 축하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 축사를 하고 있는 카톨릭 신부님nbsp행사 후 스님은 신부님에게 “저도 해마다 성탄절이면 성당을 찾아가 축사를 해줄 뿐만 아니라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많은 활동을 신부님과 함께 해오고 있다”며 신부님의 행사 참여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이어서 앗사지 스님이 이곳 절의 사리탑을 동판에 조각한 것을 선물했습니다. 스님은 감사히 선물을 받고 이어서 스님도 한국에서 준비해온 불상을 앗사지 스님께 전달했습니다.nbspnbsp▲ 선물을 전달하는 앗사지 스님nbsp아이들도 신이 났는지 행사장 이곳저곳을 뛰어다녔고, 마을주민들 중에 일부는 한국 태극기를 가지고 나와 흔들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스님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서 축제의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었습니다.nbspnbspnbsp사리탑 준공식을 마친 후 행사에 참여한 스님들, 마을주민들, 한국에서 온 스님 일행 모두가 탑 앞에 서서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늘 마을 주민들에게는 처음으로 사리탑이 생긴 역사적인 날이기에 모두들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nbspnbsp▲ 마을주민들 다함께 기념사진nbsp행사 후에는 근처에 식당으로 가서 공양 접대를 받았습니다. 공양을 위해 함께 자리한 ‘스리 비수다라마야’ 스님들은 정성이 깃든 음식들로 스님 일행을 맞이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공양을 마치고 12시가 되어 다음 방문 장소로 출발했습니다. 다시 차를 타고 북쪽으로 이동하다 휴게소에서 INEB에서 마중 나온 차량을 만난 후 앗사지 스님과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환대를 해주어서 감사하다”고 예를 표했습니다.nbspnbsp오후 5시 무렵에는 크리바스고다 그나나난 스님의 초청으로 마하매브나와 명상센터를 방문했습니다. 그나나난 스님은 법륜 스님이 한국에서 안산시에 JTS다문화센터를 개원한 후 이곳에서 일하는 스리랑카 노동자들을 위해 좋은 설법을 해주고, 다양한 지원을 해주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고 특별히 스님을 초청한 것이라고 합니다.nbspnbsp▲ 마하매브나와 명상센터nbsp마하매브나와 명상센터에 도착하자 웅장한 규모의 법당이 금빛을 발하며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법당 안에 들어서자 크리바스고다 그나나난 스님이 직접 나와 스님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nbspnbsp▲ 마하매브와나 명상센터의 그나나난 스님nbsp스님이 이 절에 대해 질문하자 그나나난 스님은 이 명상센터에 소속된 스님들이 총 800명이 되고, 스리랑카 전체에는 50개의 지부가 있으며, 스님이 되기 위해 교육받고 있는 학생 스님들도 200여 명이 된다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스님의 법명이 ‘법의 수레바퀴, 다르마 짜크라’ 라고 소개하자 큰 웃음을 띠기도 했습니다.nbspnbsp그나나난 스님은 법륜 스님이 안산에서 다문화센터를 개원해 스리랑카 국민들을 도와주고 있는 것에 감사함을 표하면서 스님께 이곳에서 주불로 모시고 있는 불상의 모양을 딴 작은 불상을 선물했습니다. 스님도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한국에서 가져온 종을 스님께 선물했습니다.nbspnbsp▲ 그나나난 스님에게 종을 선물하는 스님nbsp▲ 그나나난 스님이 선물로 준 불상nbsp이어서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수보디 스님의 안내로 마하매브나와 명상센터 곳곳을 둘러보았습니다. 먼저 웅장한 규모의 위용을 자라하는 큰 법당에 들어가 보았습니다.nbspnbsp법당 안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불상이 놓여 있어 스님 일행도 모두 감탄했습니다. 마치 유럽의 거대한 성당을 연상하게 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이 불상 앞에서 삼배를 하자 수보디 스님은 간단히 불상에 대해 소개를 해준 후 아직 공개가 되지 않은 특별한 곳으로 스님을 안내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작은 방 안에 금빛으로 장식된 사리탑이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스님은 이곳은 “아직 재가자들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곳”이라고 하면서 “법륜 스님 일행에게만 오늘 특별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스님은 사리탑 앞에서 합장을 하고 축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축원 기도를 마치고 사리탑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묻자 수보디 스님은 “스승님이 보관하고 있던 부처님의 사리가 들어있으며, 뿐만 아니라 아난존자, 마하가섭 존자의 사리가 들어있으며, 이 외에도 스리랑카 전역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보내주어서 이곳에 안치했다”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왜 이곳이 재가자들에게는 아직 개방되지 않고 신령스럽게 모셔져 있는지 그제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사리탑이 안치된 방의 벽면은 전단향 나무로 장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수보디 스님은 전국에서 신도들이 보내준 전당향 나무로 만들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스리랑카는 국교가 불교인데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부처님을 공경하는지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전당향으로 꾸며진 방의 벽면nbsp또한 법당 옥상에는 스님들만 이용할 수 있는 명상실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법당은 신도들이 참배하기 때문에 시끄러운 반면, 이곳은 아주 한적하고 명상을 하기에 딱 좋았습니다. 명상실에는 방석과 엉덩이 받침 매트가 놓여 있었는데, 스님은 “전통적으로도 명상을 할 때 이렇게 매트를 사용했는지?” 물어보었습니다. 수보디 스님은 “전통적으로는 출가하면 승복이 3개가 주어지는데 그 중 하나를 자리에 깔 뿐이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깔판 천을 보여주는 수보디 스님nbspnbsp다시 1층 법당으로 내려오니 큰 주불 외에도 구석 구석에 제법 큰 규모의 조각상들이 더 있었습니다. 왼쪽에는 마하가섭 존자의 조각상이, 오른쪽에는 아난 존자의 조각상이 그림과 함께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nbspnbsp▲ 마하가섭 존자nbsp▲ 아난 존자nbsp이 외에도 법당 안에는 부처님의 일생과 관련한 다양한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림 하나 하나 세세하게 설명을 들은 후 법당을 나왔습니다.nbspnbspnbsp법당을 나와서는 출가 승려들이 머무는 숙소를 보여주었습니다. 재가자들, 특히 여성들은 절대 출입을 할 수 없는 곳인데 스님 덕분에 스님 일행 모두 숙소까지 자세히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스님들의 숙소nbsp스님들의 숙소 옥상에는 명상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언제든 이곳에서 명상을 할 수 있게 한 것이 특이했습니다. 또 밤이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숲속 곳곳에 바위 동굴을 그대로 명상실로 만든 공간 등이 있다는 소개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자세히 마하매브나와 명상센터를 둘러본 후 안내를 해 준 수보디 스님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스리랑카가 몇 년 전에 쓰나미 피해를 입었을 때 구호활동을 하러 왔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무엇보다 사회적 실천활동도 함께 하면 좋겠다는 조언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무엇보다 사회적인 실천활동도 함께 병행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도 몇 년 전에 쓰나미로 스리랑카 전체가 큰 피해를 입었을 때 30개의 유치원을 지어주는 일을 했었어요. 이 외에도 필리핀 민다나오,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등에서 구호활동을 하고 있어요. 학교를 지어주는 경우가 많고, 장애인 학교를 지어준 적도 있고, 지진이나 태풍 등 자연재해가 났을 때 긴급구호를 하기도 합니다. 인도에는 부처님이 6년 고행한 전정각산 아래에 수자타아카데미를 지어서 기아, 질병, 문맹 퇴치 운동을 하고 있어요.nbspnbsp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자원봉사자이고 월급을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중학생들은 유치원생들을 가르치고, 고등학생들은 초등학교 1,2학년을, 대학생들은 초등학교 3,4학년을,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중학생을 가르칩니다.”nbspnbsp스님의 말씀에 적극 공감하면서 수보디 스님은 지금 마하매브나와 명상센터에서 하고 있는 사회실천 활동 하나를 소개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지금 스리랑카에서는 20년 전부터 큰 재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화학비료를 많이 써서 지하수가 카드뮴, 수은 등으로 오염되어서 이로 인해 만성 신장질환으로 죽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어요. 일반 필터로는 여과되지 않아서 전체 인구의 25가 질병을 앓는 마을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절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깨끗한 물을 주자’ 는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마을마다 정화 시스템을 지어주고, 주민들이 정화된 물을 받아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현재 11개 마을에 정화 시스템을 지어주었습니다. 정화 시스템 1개 당 1만 2천 달러가 듭니다. 정토회에서도 이 운동에 동참해 주시면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nbspnbsp스리랑카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식수 오염 문제에 대해 스님도 그 심각성에 공감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식수 문제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무척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담소를 나눈 후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초대해 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한 후 명상센터를 나왔습니다.nbspnbsp스님 일행은 다시 버스를 타고 내일부터 INEB 대회가 열리는 세바란카 nbsp파운데이션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버스 안에서 스님은 INEB 관계자에게 마하매브나와 그나나난 스님에 대해 스리랑카 기성 불교계에서는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INEB 관계자는 “스리랑카에는 크게 4개의 종파가 있는데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하면서 “그러나 마하매브나와 명상센터가 소속되어 있지 않은 나머지 3개 종파에서는 새로운 방식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기도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아마도 웅장한 규모로 불사를 하는 것에 대해 좋게 보지 않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nbspnbspnbsp그나나난 스님은 젊은 시절 불교에 대해 공부를 하다가 스리랑카 불교가 학문만 있지 수행이 없어진 것 같다고 느낀 후 독자적으로 빨리어 경전을 읽고 수행을 시작했는데, 대중들에게 보다 쉬운 용어로 설법을 잘해서 많은 스리랑카 대중들이 따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곳에 초막 2개를 짓고 시작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웅장한 규모로 성장한 것을 보니 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받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스님은 3년 전에 한국에 와서 스리랑카 노동자들을 위해 설법을 하기도 했는데, 이 때 많은 대중이 모일 수 있는 장소가 없어 정토회 측에 장소 대여를 문의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스님이 안산시에 다문화센터를 개원하고 스리랑카 노동자들을 돕기 시작하면서 다시 인연이 되었는데, 아무튼 여러 인연들이 모여서 오늘 이렇게 만남이 이뤄졌다는 것이 참 묘하게 느껴졌습니다.nbsp버스 앞 맨 앞자리는 그나나난 스님이 선물로 준 부처님이 안전벨트를 하고 앉았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버스 창 밖으로는 보름달이 휘영청 밝아 있었습니다. 보름달을 보고도 일행들이 아무렇지 않아 하자, 스님이 한마디 하며 활짝 웃었습니다. “옛날 혜초 스님처럼 1년이 넘게 배타고 바다 건너 산넘어 왔으면 저런 달을 보자마자 고향 생각이 간절히 났을텐데, 비행기 타고 오니까 아무런 감흥이 없지 뭐.”nbspnbspnbsp이렇게 스리랑카에서의 첫날 밤이 저물었습니다. 내일은 아침 9시부터 세바란카 nbsp파운데이션에서 다양한 주제로 각국 불교 지도자들의 발표와 토론이 이어질 예정입니다.nbspnbsp ※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nbsp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분들은 지금 신청하세요.nbspnbspnbsp
2016.1.24 (인도 19일째)_오후_델리 한국교민 즉문즉설
nbsp오전에 인도 사람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에 이어서 오후에는 델리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nbspnbsp▲ 델리 시내 곳곳에 붙은 한국 교민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 포스터nbsp인도 사람들과 함께한 즉문즉설 강연이 끝난 후 식당으로 이동해 한국문화원 측에서 준비해 준 비빔밥으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nbspnbspnbsp식사 자리에는 한국문화원 원장님 부부, 총영사님, 주델리한국대사 부인이 함께 자리해 식사 후 잠시 담소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특히 스님이 그동안 인도에 있으면서 겪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하자 모두들 공감을 하면서 크게 웃었습니다.nbspnbsp오후 1시에는 오전과 같은 장소에서 한국 교민들을 대상으로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100여 명의 교민들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스님이 무대 위에 오르자 큰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왔습니다. 어린이 한 명이 무대로 올라와 스님께 꽃다발을 건네자 더 큰 박수가 쏟아졌습니다.nbspnbsp스님은 먼저 점심 식사는 다들 하고 왔는지 물어본 후 한국과 인도의 교류는 2천년 전에 아유다국의 공주가 가야에 불교를 전한 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하면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인도의 잠재적인 성장 가능성에 대한 스님의 생각을 먼저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인도는 면적이 330만 제곱킬로미터로 남한의 33배 이상이고, 인구는 12억 5천만 명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습니다. GDP도 세계 7위예요. 명목상 순위가 그렇고 구매력 기준으로는 중국과 미국에 이어 세계 3위입니다. 이처럼 잠재적인 강대국인 인도는 앞으로 발전 가능성도 매우 큽니다.nbspnbsp중국은 국가의 강제적인 힘에 의한 계획경제를 통해 빠르게 성장한 반면, 인도는 굉장히 민주적인 과정을 거쳐서 경제성장을 했기 때문에 초기에 발전 속도가 굉장히 늦었어요. 중국은 앞으로 민주화라는 혼란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았지만 인도는 그런 것을 어느 정도 극복한 상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후 지속적 성장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런 곳에 일찍 와서 터를 잘 잡으셨어요. nbspnbspnbsp벌써 땅값이 많이 올라서 이제는 자리를 잡기에 좀 늦었어요. 제가 20년 전에 왔을 때는 한국사람이 땅을 사기가 쉬웠지만 지금은 한국사람이 사기는 벌써 힘들어졌어요. 도시는 땅값이 서울과 거의 비슷해졌습니다. 여러분들은 다 일찍 와서 돈 많이 벌어놓으셨죠? nbspnbspnbsp중국이 20년 전에는 개발했다 해도 형편없었지만 지금 완전히 변했듯, 앞으로 20년 지나면 인도도 굉장한 변화를 가져올 거예요. 비하르주 같은 시골에 가면 아직도 옛날 모습 그대로지만 델리는 벌써 많이 변했던데요. 제일 눈에 띄는 게 두 가지 같아요. 첫째, 도로를 포장하고 확장하는 곳이 많이 보였어요. 공사 때문에 차 다니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둘째, 새로운 집이며 건물을 많이 짓는 것 같아요. 제가 인도를 다닌지 20년이 넘었는데 처음 10년은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더니 최근 10년은 눈에 띄게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보입니다.nbsp개발이라는 게 꼭 다 좋지만은 않아요. 제가 20년 전에 중국 갔을 때는 조선족들이 착하고 성실했는데 요즘의 조선족들은 돈을 밝힌다고들 하잖아요. 공산주의의 순수함은 노인들에게나 남아 있고, 젊은 사람들은 한국사람들보다 더 영악하게 바뀌었어요. 인도도 좋게 말하면 개발이 되고 질서가 잡혔다고 볼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인도사람이 영악해졌다고 할 수 있어요. 제가 보기에 인도사람들은 다른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 비해 순수함이 좀 적은 편인데, 여기서 더 영악해지면 상대하기 좀 어려울 거예요.nbspnbsp제가 생활해보니 인도는 모든 걸 한국식으로 생각하고 살려면 정말 많이 부딪치고 피곤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만 놓아버리면 세상에 이보다 살기 좋은 곳이 없어요.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요. 중국은 살아보면 경찰국가예요. 온갖 것에 제재와 간섭이 심합니다. 낯선 동네에 가거나 남의 집을 방문하기만 해도 금방 신고가 들어가서 공안이 찾아와요. 인도는 나무 밑에 자든, 남의 집 처마 밑에 자든, 지나가면서 몸을 부딪치든, 밀치든, 밤새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든, 아무 데나 자리 펴고 밥을 먹든 도통 신경을 안 쓰니까 마음대로 살아도 되잖아요. 화장실도 사방에 너무 많아서 곤란할 정도고요. nbspnbspnbsp어떻게 생각하면 불편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참 편한 나라예요. 그래서 저는 인도에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벵갈로르 가 보셨어요? 저는 못 가봤는데, 벵갈로르는 IT산업도 급속히 발전하고 시 전체도 많이 발전해서 아주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인도 사는 사람들에게 제가 지금 인도 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nbspnbspnbsp여러분들이 인도에 살면서 겪는 문제, 수행이나 불교에 대해서 의문 나는 점, 인생에 대한 고민 등 주제에 제한 없이 아무 이야기나 자유롭게 하는 시간이 즉문즉설입니다. 그럼 시작해 보죠.”nbsp스님의 이야기에 인도에서 오래 사신 분들은 박수를 치며 공감을 표했습니다. 어떤 분은 “인도에 살고 있는 우리들보다 가끔씩 오는 스님이 인도에 대해 더 잘 아는 것 같다”며 놀라워 하기도 했습니다.nbspnbsp이렇게 스님이 강연의 시작을 알리자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많은 질문들 중에서 인도에 살고 있는 교민들이 많이 공감했던 질문과 답변을 소개합니다. 델리에 있는 교민들은 주재원으로 나온 경우가 많은데, 한국으로 돌아갈 경우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지에 대해 걱정되는 마음에 대해 묻자 많은 교민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의 마음을 내비쳤습니다.nbspnbspnbsp“저는 델리 인근에서 한국 기업 주재원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지금 5년 정도 인도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나이가 많진 않지만 앞으로 어떻게 가정을 꾸려나갈지, 그리고 한국으로 복귀하면 어떻게 적응을 하고 살지 고민입니다.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제가 여기서 평생을 살 것 같진 않아요. 그래서 복귀를 한다고 해도 한국에서 또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두려움이 좀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 계신 분들도 많이 어렵다고들 하시고요. 아마 3040대 분들, 직장생활 하시는 분들, 자영업 하시는 분들 모두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도에 계속 사는 것도 좋은 방안일 수 있겠지만... 앞으로 인생을 설계하는데 있어서 조언 부탁드립니다.”nbsp“너무 막연한 질문이에요. 질문자는 한국에 언제 갈 거예요?”nbsp“회사에서 들어오라 하면 들어가야죠.” nbspnbsp“그래도 질문자가 생각하기에 언제쯤이 될 것 같아요?”nbsp“제 생각으로는 최소 23년은 더 있을 것 같습니다.”nbsp“그러면 23년 뒤까지 질문자가 안 죽고 산다는 보장이 있어요?”nbsp“아직 젊어서 살 것 같습니다.” nbsp“확실히 그러리라는 보장이 있어요?”nbsp“없습니다.”nbsp“그래요. 여기서 ‘평생 안 살 것 같다’고 말해도 여기서 지금 당장 죽으면 평생 사는 게 되어 버려요.”nbsp“예, 맞습니다.”nbsp그러니 ‘여기서 평생 안 산다’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여기서 살 땐 여기서 행복하게 살고, 한국 갈 땐 한국에서 행복하게 살면 되잖아요. 인도에서도 행복하게 살았는데 한국 가서 행복하게 못 살 이유가 뭐 있어요? nbsp“예, 지금 인도에서 사는 건 무척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을 떠나온 지 시간이 좀 흐르다 보니까 과연 복귀하면 적응을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특히 한국은 인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변화가 있다 보니 직장인으로서 적응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nbsp“변화는 한국보다 인도가 더 많지요. 다만 한국과 인도 생활의 차이는 이거예요. 질문자는 인도에 왔지만 회사에서 주는 한국식 월급을 받으니까 여기 일반 주민보다는 월급이 많은 편이잖아요. 회사에서 준 집도 여기 동네 사람들의 평균에 비해서는 크고 좋아요. 여기서는 내가 사는 위치가 상위 10퍼센트 안에 들어간다면, 한국에 돌아가면 20퍼센트나 30퍼센트 안에 들어가게 된다는 게 차이에요. 서울의 중학교에서 공부를 중간 정도 하는 아이가 시골 중학교에 가면 1등할 수 있지만 시골 중학교에서 1등 하던 아이가 서울의 이름난 학교에 오면 중간밖에 못하는 것과 같아요. 시골에서는 놀아도 늘 1등 했는데 여기서는 죽어라 해도 중간밖에 못한다면 충격이 크죠. 지금껏 자기가 잘 하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그리 잘 못하니까 힘들어요.nbspnbsp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언어가 힘들고 문화가 힘들긴 해도 정신적으로는 내가 약간 상위그룹에 속한단 말이에요. 사람을 부리고 살고, 상사가 있긴 하지만 거의 왕 노릇 하고 살아요. 그런데 한국에 들어가면 회사에서도 위로 층층이 높은 사람들이 포진하고, 집도 여기서만큼 상류에 속하지는 않아요. 평수로 따져도 중간 정도 될 거예요. 그런 차이 때문에 결핍감을 느껴서 사는 게 좀 빡빡해지지요.nbspnbsp그러나 질문자가 한국에 가서 밥만 먹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면 가도 아무 걱정이 없어요. 한국은 사회보장제도가 기본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인도보다 더 걱정이 없죠. 다만 그 상대적인 개념의 차이가 힘든 것뿐이에요. 또 누구나 다 한국에 살다가 인도에 오면 인도에 적응하기 힘들 듯, 인도에 5년이나 10년씩 살다가 한국에 들어가면 다시 적응하는 데 당연히 시간이 좀 걸려요.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학교 졸업하고 10년 가까이 공부 안 하다가 나이 먹어서 대학이나 대학원 가서 다시 공부하려면 힘들죠. 그건 두려워할 일은 아니에요. 장소를 옮기든, 직장을 옮기든, 공부를 다시 하든, 어떤 것이 바뀌면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밖에 없어요.nbsp그러니 첫째는 옮겨가는 데 따르는 적응 시간이 좀 걸린다는 게 하나 있고, 두 번째는 여기서 가졌던 만큼의 지위를 가지지 못하니까 그게 조금 힘들다는 게 있어요. 제3세계에 나오면 위험하고 어려운 점이 없진 않지만 대신 약간 속된 말로 하면 왕 노릇을 좀 할 수 있는데, 도로 들어가면 못하니까요. 그래서 마닐라를 ‘마나님들의 천국’이라고 불러요. 마닐라에 주재원들이 오면 그 지역에서 아주 왕 노릇을 하거든요. 보통 가정부 두 명에 운전수 두 명씩 두고 큰 집에 살다가 한국에 들어가면 다 자기 손으로 해야 하잖아요.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고 생각하세요. 인도 오면 인도에 맞춰서 살고 한국 가면 한국에 맞춰서 살면 되지, 두려워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에요.”nbsp“잘 알겠습니다.” nbspnbsp“내일이라도 발령 나면 들어와서 살면 돼요. 처음에 한국에서 외국으로 발령 내면 싫어하지만 와서 살아보면 여기에도 괜찮은 점이 있어요. 마찬가지로 여기서 살다가 또 한국 오라 그러면 어찌 적응할지 걱정하는데 들어가서 있어보면 또 괜찮아요. 회사에 20년, 30년씩 다니다가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살지 막막한 건 맞아요. 그렇다고 그게 욕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20년간 밥 먹고 살았으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와서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일에 적응해야죠.nbspnbsp제가 상담을 해보면 경찰서장이며 세무서장 했던 사람들이 은퇴 후 제일 힘들어합니다. 자기가 서장 할 때는 부하들이 전부 와서 굽신거렸는데 은퇴하고 나니 자식 결혼식장에 옛날 부하들이 코빼기도 하나 안 내밀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배신감을 느낀다기에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nbspnbsp‘그 사람들이 당신한테 고개를 숙인 게 당신의 인격입니까, 당신의 직위입니까? 직위라면 당신은 이제 직위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고개를 숙일 이유가 없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옛말에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많지만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이 없다고 했어요. 당신이 경찰서장이든 세무서장이든 직장에서만 그 직위의 역할을 하고 퇴근 후 술을 한잔 하거나 밥을 먹으러 갈 때는 그냥 친구가 되어줬다면 상대는 당신이 직위가 없어졌어도 친구니까 왔을 겁니다. 이건 당신이 직장에 다닐 때 자기 직위의 권위만을 갖고 사람을 대했지, 사람과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던 과보입니다. 현 상황은 당신이 만든 것이지, 그 사람들이 배신한 게 아닙니다.’nbsp여기 살면서 여기에 익숙했던 것을 움켜쥐고 한국에 가면 사는 게 힘들듯이 한국에 살던 버릇을 여기 와서 움켜쥐고 있으면 또한 힘들어요. ‘로마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라는 말처럼 여기서는 여기 사정에 맞추어 적응하고, 한국에 돌아가면 또 한국 사회 안에 맞춰서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또 내가 사장 할 때는 사장을 했더라도 그만뒀으면 그냥 한 사람으로 돌아가 줘야 해요.nbspnbspnbsp그걸 못 버리면 ‘내가 옛날에는 그래도 한 자리 했는데’, ‘떵떵거리고 잘 살았는데’ 이런 생각에만 빠지면 노후에 살기가 굉장히 어려워져요. 서울역 앞에 노숙자가 300명쯤 되는데 노숙자 중 농민이 한 사람도 없어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일용직 노동자도 한 명도 없어요. 거기 있는 사람들은 첫째, 거의 다 남자입니다. 어쩌다 여자가 한두 명 있긴 해도 거의 남자에요. 둘째, 직장에서 중간 이상의 지위를 가졌거나 작은 식당이라도 하나 열어서 자기가 사장 노릇을 했던 사람들이에요. 노숙자들이 대부분 과거 경력이 화려합니다. 사정이야 어쨌든 직장을 그만두거나 가게가 망했는데 집에는 회사 간다고 하고 나와서 빙빙 돌기만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정신적인 어려움을 못 이겨서 술도 마시고, 결국은 알콜 중독에 빠져 노숙자가 됩니다. 대부분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들이에요. 지금이라도 가서 막노동하면 될 텐데 옛날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렇게 못하고 소위 ‘폐인’이 되어가는 거예요.nbspnbspnbsp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은 항상 지금 깨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늘 웃고 살 수 있습니다. ‘과거에 내가 어땠다’ 이게 늘 우리를 괴롭힙니다. ‘나는 어릴 때 가난했다’, ‘어릴 때 성추행 당했다’, ‘어릴 때 학대 받았다’, 늘 이런 과거 생각 때문에 힘들어요. 또 반대로 ‘내가 어릴 때 공부 잘 했다’, ‘어릴 때 예뻤다’, ‘젊을 때 잘 나갔다’ 이런 생각 때문에 인생살이가 피곤해집니다. 그런 생각을 버리고, 현재 주어지는 직위는 주어지는 대로 활용하되 직위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해요. 언제든지 한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자세를 잊지 않아야 사는 게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딜 가서 어떤 직책을 가지고 어떤 상황에 처해도 편안하게 살 수 있어요. 결혼했어요?”nbsp“예, 했습니다.”nbsp“결혼까지 했겠다, 아이도 있겠다, 저보다 젊겠다, 그런데 왜 질문자가 걱정을 해요? 이 나이에 장가도 못 가고 아이도 없는 저도 지금 웃으면서 사는데 질문자가 못 웃을 이유가 없잖아요.”nbsp“죄송합니다.” nbspnbspnbsp스님의 답변을 듣고 나니 질문자는 고민이 사라져버린 듯 오히려 스님에게 죄송하다며 크게 웃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청중들도 함께 웃으며 격려의 박수를 보냈습니다.nbspnbsp무엇보다 지금 살아있는 것에 감사할 줄 알면 늘 웃고 살 수 있다는 말씀이 가슴에 많이 남았습니다. 우리는 늘 과거 생각, 미래 생각으로 괴로워하는데 살아 숨쉬고 있는 지금 현재에 깨어있으면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는 말씀에 질문자도 마음이 편안해진 것 같습니다.nbspnbsp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치고 나니 2시간 30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습니다. 질문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었지만, 스님은 지금 곧바로 공항으로 가야 스리랑카로 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다며 아쉬움을 달래며 마지막으로 격려 말씀을 덧붙여 주었습니다.nbspnbsp“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나중에 행복하게 살겠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마세요. 지금 행복해야 합니다. 옛날에 내가 어떻게 태어났든 어떻게 자랐든 따질 필요 없어요. 지금 안 죽은 것만 해도 성공이에요. 죽은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안 죽고 산 것만 해도 대성공이에요.nbspnbspnbsp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행복해지려면 사물을 긍정적으로 봐야 해요. 이미 일어난 일을 갖고 자꾸 ‘안 그랬으면 좋겠다’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이미 일어난 건 넘겨버리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얼굴에 미소가 돌고 마음이 훨씬 가볍습니다.nbspnbsp인도에 살면서 인도 욕하고 살지 마세요. 그런 사람은 바로 한국 가는 게 나아요. 인도에 살면 조금 불편한 것도 있고 먼지도 많지만 그래도 이곳의 좋은 점을 생각하고 기쁘게 살아야 해요. 부부도 그래요. 이왕 이 남자와, 이 여자와 살려면 기분 좋게 사세요. 욕하면서도 같이 살려면 피곤하잖아요. ‘이 사람 아니면 누가 나랑 살아주겠어’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nbspnbspnbsp종업원들에 대해서도 ‘나 같으면 그 돈 받고 일 안 할 텐데 일해주니 참 고맙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일 잘 하고 못 하고를 너무 따지지 말고요.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살면 좋은데 자꾸 자기 생각대로 따지니까 인도 사는 게 지옥이고 스트레스잖아요. 그러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살면서 이 좋은 부처님의 나라에서 행복을 얻고 가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nbsp비행기 시간이 다 되었지만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안내해 주려고 온 힘을 기울이는 스님의 모습에 교민들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스님의 이야기에 교민들도 큰 힘을 얻은 듯 곳곳에서 환호성도 터져나왔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강연을 모두 마치고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매년 인도 성지순례를 올 때마다 델리 교민들을 잊지 않고 법문을 꼭 설해주고 가시는 스님께 모두들 너무나 고마워하는 모습이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스님은 곧바로 한국문화원을 출발하여 델리 국제공항으로 향했습니다. 강연을 예정보다 늦게 마친 것도 있고, 인도 공항은 늘 검색대 통과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이어서, 여러 우여곡절 끝에 보딩을 끝마칠 시간인 6시에 겨우 맞춰서 비행기에 탑승했습니다.nbspnbspnbsp하마터면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었는데 스님은 비행기 탑승을 무사히 마치고 나서 방금 전 법문 때 했던 말씀을 인용하는 듯 “여러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비행기를 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해서 함께 동행한 수행팀도 모두 웃었습니다.nbspnbsp저녁 6시 30분에 델리를 출발한 비행기는 3시간 30분을 비행하여 10시에 스리랑카 콜롬보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공항에서 걸어나오니 정토회 국제부 최정연 팀장과 통역 봉사자 이진아님이 반갑게 스님 일행을 맞이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인도는 날씨가 무척 추워서 아침 저녁으로 파카를 입어야 할 정도였는데, 스리랑카는 열대 지방이어서 밤에도 30도를 웃도는 무더위에 땀을 계속 흘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스님 일행은 공항 근처 숙소로 이동해 짐을 풀고 먼 길을 달려온 여독을 풀었습니다.nbspnbspnbspnbsp내일은 작년에 INEB 정토회 방문단에 참여해 스님과 인연이 되었던 적이 있는 스리랑카의 앗사지 스님을 만나 스님이 운영하는 절의 탑 준공식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INEB의 주관으로 열리는 국제 불교 지도자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대회장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nbspnbsp ※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nbsp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분들은 지금 신청하세요.nbspnbspnbsp
2016.1.24 (인도 19일째)_오전_인도인 통역 즉문즉설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델리 한국문화원에서 인도인들을 대상으로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nbspnbsp어젯밤 델리 불자회에서 운영하는 법당에서 하룻밤을 주무신 스님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예불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아침 식사 후 원고 교정 업무를 보고 8시 30분에 델리 한국문화원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 델리 불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법당nbsp강연 시간보다 30분 일찍 도착해 한국문화원 원장님과 담소를 나누었습니다.nbspnbsp▲ 델리 한국문화원nbsp▲ 인도인 대상 통역 즉문즉설 강연 안내 포스터nbsp최근에 인도 정부에서 U·P주의 ‘아요디아’에 한국불교 전래 유적지를 가꿀 수 있게 1만㎡ 정도의 땅을 마련해 주기로 하였는데, 이와 관련해서 스님은 원장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가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래한 사람이 바로 당시 아요디아 왕국에서 온 공주와 장유 화상인데, 그래서 아요디아는 한국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곳입니다.nbspnbspnbsp10시 정각이 되어 스님은 원장님과 함께 강연장으로 향했습니다. 스님이 강연장으로 들어서자 한국문화원 지하 대강당을 가득 메운 70여 명의 인도인들은 큰 박수로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한 인도인 대학생이 대표로 스님께 꽃다발을 건네자 더 큰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nbspnbspnbsp한국문화원 원장님의 소개로 무대에 오른 스님은 먼저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했습니다. nbspnbsp“안녕하세요? 제가 힌디어를 할 줄 몰라서 닥터 쁘리앙카가 통역을 하겠습니다. 제가 인도에 처음 온 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 힌디어를 별로 못 배웠어요. ‘나마스떼’, ‘잘디 잘디’ 이것밖에 몰라요.” nbspnbsp오늘 즉문즉설 통역은 JTS가 보드가야 근교 불가촉천민 마을에 세운 학교 ‘수자타아카데미’ 교장직을 맡고 있는 쁘리앙카 박사님이 해주었습니다. 쁘리앙카 박사님은 한국에서 8년 간 불교학을 공부해 동국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작년 2월에 수자타아카데미 교장선생님으로 취임했습니다. 또 정토회에서 공동체생활을 오랫동안 했기 때문에 스님의 법문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오늘도 아주 통역을 잘해 주었습니다.nbspnbsp▲ 통역을 담당한 쁘리앙카 박사님nbsp인사말에 이어서 스님은 2천년 전부터 있었던 한국과 인도의 각별한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한국에 불교가 들어온 지는 2,000년 정도 되었습니다. 당시 인도 아요디아 왕국의 공주가 장유 화상이라는 스님과 함께 배를 타고 한국 남쪽의 가야라는 작은 나라에 도착해 그 나라를 세운 김수로왕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기록에 보면 아들을 10명 낳았는데 장남은 가야 왕의 성인 ‘김’씨를 이었고, 둘째와 셋째 아들은 인도에서 온 공주가 하사 받은 성인 ‘허’씨를 이었고, 7명은 출가해서 스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에 온 최초의 인도 스님이 머무른 절이 가야정사입니다. 가야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을 지었어요. 오늘날 김해, 마산, 부산에 이르는 한국 동남부지역인데 지금도 한국 안에서 불교세가 가장 강한 지역입니다. 그리고 인도 공주의 장남이 대를 이은 성씨인 ‘김해 김’씨가 한국에서는 인구의 10퍼센트 정도를 차지합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한국에 왔을 때 ‘한국 사람의 10퍼센트가 인도계’라고 말한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국과 인도는 이미 2,000년 전에 문화적 교류뿐 아니라 혈연적 교류가 있었습니다.nbspnbspnbsp아요디아 공주가 가야에 온 지 300년쯤 뒤 중국을 통해서 한국에 불교가 다시 전래되었습니다. 그리고 6세기 정도 되어서는 한국이 완전히 불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3개의 나라가 서로 경쟁하고 있었는데 불교를 믿는 국가가 중심이 되어 하나의 통일국가를 형성했습니다. 14세기까지 한국은 불교왕국이었지만, 15세기에 중국에서 유교가 들어와서 500년간 유교왕국이 지속되었습니다. 이 500년간 불교는 탄압을 받아 많은 절이 파괴되었습니다. 200년 전에는 카톨릭이 전래되었고, 100년 전에는 개신교가 전래되었습니다. 이후 한국은 20세기 초엽에 36년간 일본의 지배를 잠시 받았고, 독립과 동시에 남북이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남한은 미국의 영향력 하에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nbspnbsp그러다 보니 기독교가 급속히 전파되었습니다.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학교와 병원 등에 많이 투자하고 활발히 선교 활동을 했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기독교를 많이 믿게 되었어요. 지금은 기독교 인구가 불교 인구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불교는 500년 동안 유교에 탄압을 받았고, 근대 서양문명이 들어올 때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다가, 이제야 자리를 잡아서 한국 불교가 새롭게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은 문화적으로 보면 전통적인 불교국가라고 할 수 있지만 오늘날의 한국은 사실상 기독교적인 영향력이 더 큰 나라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저도 어릴 때 교회에 다녔을 정도로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교회를 많이 갔었어요. 교회에 가면 다양한 서양문화를 접하고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한국의 전통문화가 많이 위축되었지만, 이제는 경제적으로 좀 여유로워지면서 전통문화를 하나하나 다시 복원하고 있는 중입니다.nbsp불교라고 하지만 두 가지 서로 다른 성격이 있습니다. 하나는 종교로서의 불교이고, 하나는 진리로서의 불법인데 이 두 가지 개념이 서로 다릅니다. 종교로서의 불교는 문화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고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로서 아시아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nbspnbspnbsp그러나 진리로서의 불법은 종교적인 개념을 초월합니다. 개인이 어떤 믿음이나 종교를 갖든 그것은 진리를 배우는 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과학과도 아무런 모순이 없어요. 2,600년 전에 고타마 붓다가 편 가르침은 종교로서의 불교라기보다는 진리로서의 담마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어떤 종교나 현대문명에도 구애받지 않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가르침입니다. 여러분들이 제기하는 어떤 질문이나 의문에도 같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가르침이지, ‘그것은 믿음이기 때문에 대화를 할 수 없다’ 이런 요소는 없습니다.nbspnbsp이 담마로서의 불교는 인도에서 일어났지만 오늘날에는 중국, 한국, 일본은 물론 동남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등 전 세계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인도에서 수학이 발달해서 전 세계에 영향을 준 것처럼, 붓다 담마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가’에 대해 훌륭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종교가 힌두교든 무슬림이든 관계없이 다들 붓다 담마를 공부하셔서 2,600년 전 인도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최고의 문명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던 붓다 담마를 잘 알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nbspnbsp붓다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개별적 단독자의 집합이 아니라 모두 연관되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생겨나는 것이지, 원인 없이 결과가 생겨나는 것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현상을 보고 ‘신기하다’, ‘신비하다’고 여기는 것은 어떤 현상의 원인을 모르는 무지로부터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신비로운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잖아요. 그러나 붓다는 ‘신비하다’라고 여기는 생각은 무지로부터 일어나는 것, 즉 원인을 알지 못할 때 일어나는 정신 현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은 오늘날의 천체물리학, 생명공학, 화학 같은 현대과학의 어떤 원리와도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nbspnbspnbsp청년 여러분들은 지금 학교에서 과학, 역사, 문화 등 다양한 학문을 배우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학문적 전공과 관계되어도 좋고 관계없어도 좋으니 어떤 것도 의문나는 게 있다면 저와 함께 대화해 봅시다. 제가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의 문화나 역사나 정치에 대해서 물어도 좋고, 제가 승려니까 불교에 대해서 물어도 좋습니다. 그 외에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면 서로 대화를 해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어떤 괴로움이나 갈등도 좋습니다. 주제에 관계없이 무엇이든지 대화할 수 있다는 자세로 이야기를 나누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질문을 받겠습니다.”nbsp한국과 인도의 각별한 인연에 대한 이야기에 인도인 청년들은 흠뻑 몰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교와 관계 없이 진리로서의 불교에 대해, 어떤 주제든 편안하게 대화해 보다는 스님의 말씀에 모두들 열린 마음이 되었습니다.nbspnbsp스님의 이야기가 끝나자 곧이어 인도인 청년들이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총 6명이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은 약 2시간 30분 동안 다양한 질문에 대해 모두 답변해 주었습니다.nbspnbsp그 중에서 한 가지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어려 곳을 방문하고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부모님의 반대가 심해 고민이라는 질문에 스님은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nbsp“부처님께서 집을 떠나 설법하시고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셨지만 그때 부인이나 가족들이 많이 괴로워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저도 지금 하고 싶은 게 많아요. 다른 곳을 방문하고 돌아다니며 활동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런 활동을 제가 좋아하고 도움도 많이 되지만, 부모님들은 제가 여자니까 집에 있어야 좋다고 생각하세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nbsp“각 나라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미성년과 성년을 구분하는 나이가 있습니다. 이 나이가 옛날에는 15세였고, 지금은 보통 18세에서 20세 사이로 두고 있어요. 인도에서는 몇 살이 되어야 성인으로 봅니까?”nbsp“18살입니다.”nbspnbsp“18세가 넘으면 독립된 한 사람의 성인이 됩니다. 18세가 넘으면 나는 내 인생을 독립적으로 살 권리가 있습니다. 출가해서 스님이 되든, 누구와 결혼을 하든, 외국을 가든 자기 인생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어요. 부처님은 29살에 출가했기 때문에 성인으로서 자기가 자기 삶을 결정한 거예요. 물론 부모님은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반대한다고 출가를 하지 않았다면 부처님은 이 세상에 나올 수가 없었어요. 조그마한 나라의 왕이 된 것에 그치고 말았겠지요. 어려서 돌봄을 받을 때는 부모님이 이 세상에서 제일 은혜로운 사람이지만, 성년이 된 뒤에 부모 말만 듣는다면 그건 부모의 노예이지 독립된 인간이 아니에요.nbspnbsp그러니 질문자는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습니다. 다만 부모님은 세상을 많이 살아보신 분이니까 많은 경험이 있고 나는 경험이 좀 부족해요. 그러니 부모님이 조언을 해줄 수 있어요. 그건 내가 참고로 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나를 나쁘게 하려고 조언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만 해서도 안 되지만, 부모님의 말씀을 내가 참고할 필요는 있다는 거예요.nbspnbsp이 때 또 하나의 조건이 있어요. 독립한다는 것은 경제적인 독립도 포함해야 합니다. 먹고 사는 걸 자기가 해결해야 해요. 부모님이 대학 학비를 도와주거나 부모님 집에 얹혀살거나 용돈을 받는다면 부모님이 스폰서인 셈이에요. 그러면 스폰서의 말을 좀 들어야 해요. 제가 만약 여러분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준다면 여러분들이 제 뜻을 좀 따라야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부모님께 도움은 받으면서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nbspnbsp여러분들에게는 무엇이든지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에게는 반대할 권리가 있어요. 부모님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내가 잘못된 것도 아니고, 서로 의견이 다를 뿐입니다. ‘이걸 내가 어떻게 할 거냐’는 내가 결정하면 됩니다.”nbsp스님의 답변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자 질문한 학생은 한가지 더 물었습니다. 참고로 인도는 여자가 바깥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지금도 굉장히 보수적인 곳입니다.nbspnbspnbsp“또 하나 질문 드리겠습니다. 부모님의 의견이 딸을 대할 때와 아들을 대할 때가 다릅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nbsp“그건 현실이고 문화적인 차이예요. 부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어요. 남자만 출가할 수 있었고 여자는 스님이 될 수 없었어요.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여자도 출가해서 수행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러나 부처님의 어머니와 부인을 비롯한 여성들이 처음 출가를 요청했을 때 부처님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사회적인 분위기와 문화가 여성이 혼자서 수행하기 어려운 조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나무 밑에서 혼자 수행할 수 있지만, 여성이 나무 밑에서 헐벗고 수행하고 있으면 남자들이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하기 때문에 출가해서 수행하기가 거의 불가능했어요. 이렇게 조건이 다르니까 허락을 할 수 없었던 거예요.nbspnbspnbsp그래서 출가를 처음 청했을 때는 승낙하지 않았어요.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승낙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부처님이 카필라바스투에서 바이샬리로 가셨어요. 그러자 이 여성들이 바이샬리까지 따라가서 출가를 또 요청했어요. 그래서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여자는 수행하면 해탈할 수 없느냐고, 즉 열반에 이를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부처님이 ‘있다’고 답하셨습니다.nbspnbsp인도 전통에서는 여자는 해탈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여자는 붓다가 될 수 없고, 전륜성왕이 될 수 없고, 인드라가 될 수 없고, 브라만이 될 수 없고, 자재천왕이 될 수 없다.’ 당시 전통은 여자는 이렇게 다섯 가지가 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있다’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그런데 왜 허락하지 않으십니까?’라고 아난존자가 다시 묻자 부처님이 비로소 출가를 허락하셨어요. 대신 8가지 조건을 붙였습니다.nbspnbsp왜 카필라바스투에서는 허락하지 않다가 바이샬리에서는 허락을 하고, 또 8가지 조건을 붙였을까요? 당시 인도에서 제일 진보적인 도시가 바이샬리였습니다. 다른 도시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했지만 바이샬리 사람들은 그래도 여성의 출가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기에 부처님이 거기에서 허락하신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제한을 두신 이유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nbspnbsp그래서 부처님 당시에 여성 출가수행자인 비구니가 생겼어요. 남성 출가수행자인 비구가 생긴 지 20년 쯤 지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치적으로는 똑같지만 사회 현실적으로는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 부처님이 시간을 좀 끌다가 바이샬리라는 진보적인 도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허락하신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년이 지나자 비구니제도가 없어져버렸어요. 그래서 남방 불교에서는 비구니제도가 없습니다. 인도사회의 여성 차별 때문에 여성의 출가를 인도사회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원래 허락하지 않았는데 아난다가 자꾸 이야기해서 허락을 했기 때문에 여성 출가는 무효다’ 이렇게 주장을 했어요. nbspnbspnbsp그러니 인도의 이런 사회 문화적 배경 때문에 부모가 딸이 자유롭게 다니는 것을 다소 꺼려하는 것은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해는 하되 ‘내가 어떻게 할 거냐’는 내가 결정할 일이에요. 여기 통역해주는 쁘리앙카가 이렇게 nbsp집을 나와서 수행을 하는 데도 집안에서 반대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수자타아카데미에서 봉사를 하고 있을 때 오빠가 찾아와서 혁대를 풀어 때린 적까지 있습니다. 외국 사람과 같이 있어서 물들었다는 비난도 들었어요. 이렇게 저항이 많았습니다. 쁘리앙카의 조카도 함께 봉사를 했었는데, 조카는 집안에서 억지로 결혼을 시켜서 결국 나갔어요. 그래도 쁘리앙카는 부모와 갈등하면서도 끝까지 남았습니다. nbspnbspnbsp지금은 관계가 다시 좋아졌어요. 결혼시키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돈도 안 들고 좋잖아요. nbspnbsp그러니까 이런 인도사회에서 여성이 조금 자유롭게 지내려면 한국이나 미국이나 유럽보다는 조금 더 이겨내는 힘이 강해야 해요.nbspnbsp그렇다고 이런 인도문화를 나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문화는 서로 다릅니다.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의 방향에 따라 실천하기가 조금 어려울 수도 있지만, 그건 비난할 대상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대상입니다. 여성이 혼자서 독립할 수 있도록 제일 먼저 길을 열어준 사람이 붓다예요. 여자는 세 가지에 묶여 있다고 합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보호자고, 결혼하면 남편이 보호자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이 보호자예요. 그런데 비구니가 됐다는 것은 남자 없이 자기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거예요. 여성이 독립적 인간임을 최초로 선언한 분이 붓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붓다의 나라인 인도는 위대한 나라예요, 하하.” nbspnbsp스님은 큰 웃음 소리에 인도인 청년들도 큰 박수로 공감을 표했습니다. 여기까지 답변을 모두 마치고 약속한 시간이 다 되자 스님은 마지막으로 짧게 인사말을 덧붙였습니다.nbspnbsp“질문이 더 있겠지만 시간이 제한되어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내년에 와서 또 할 테니 그때 또 많은 질문을 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nbsp인도인 청년들은 이제 막 자기 고민들을 꺼내놓기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벌써 마칠 시간이 되어 아쉽기만 했습니다. 내년에 또 오실 것을 약속한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습니다.nbspnbsp이렇게 강연을 모두 마치고 참석한 인도인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활짝 웃는 모습을 보니 오늘 강연이 너무나 좋았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 강연을 들은 인도인들과 기념사진nbsp집으로 돌아가는 한 인도인 청년에게 강연을 들은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평소 힘들어할 때가 자주 있었는데 스님의 답변을 들으니 부모님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며 기쁜 표정을 지었습니다.nbspnbsp▲ 스님의 영문 책을 구입하고 있는 인도인 청년들nbsp이어서 한국문화원에서 준비해 준 비빔밥으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원장님은 맨 앞에서 가장 열심히 강연을 들었는데, 인도인들에게도 이렇게 좋은 강연을 들려줄 수 있어서 무척 고맙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오후 1시부터는 한국 교민들을 대상으로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됩니다...nbspnbsp ※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nbsp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분들은 지금 신청하세요.nbspnbspnbsp
2016.1.24 (인도 18일째) 델리 인도국립박물관, C팀 출국
nbsp안녕하세요? 인도에 도착한지 18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C팀을 이끌고 라즈가트를 참배한 후 델리 인도국립박물관을 안내했습니다.nbspnbsp아그라에서 하룻밤을 잔 후 6시 30분에 숙소를 출발했습니다. 순례를 하는 동안에는 매일 새벽 3시, 4시에 출발을 했는데, 어제 일정 공지 시간에 스님이 “비싼 호텔에 잤으니 조금이라도 본전을 더 뽑아야 하잖아요.” 라고 하자 모두들 무척 기뻐했습니다.nbspnbspnbsp어제가 무슬림의 휴일인 금요일이어서 타지마할 관람을 하지 못했는데, 그래서 오늘은 가장 먼저 타지마할을 찾았습니다. 타지마할 입구에 도착하자 아침 7시가 되었습니다. 문은 열었지만 아침 일찍이라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그래도 아그라에 왔는데 타지마할을 안 볼 수는 없어 모두가 티켓을 끊고 입장을 했습니다.nbspnbsp▲ 타지마할 관람을 위해 입장하는 대중들nbsp타지마할 관람을 마치고 나온 분들에게 소감을 물어보니 “안개만 자욱했다. 흰 벽 앞에서 사진을 찍고 왔다”는 대답을 하며 웃었습니다.nbspnbsp9시에 델리로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세 사람이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일정을 연기할 수는 없어 결국 스탭 한 사람을 남기고 전체는 출발했는데, 다행히도 마지막에 출발한 버스가 세 사람을 길에서 발견하여 10시가 되어서야 겨우 델리로 출발했습니다. 알고보니 릭샤꾼이 주차장으로 가자는 얘기를 아그라성으로 가자는 얘기로 잘 못 알아듣고 아그라성으로 가는 중이었다고 합니다. 대중들은 무사히 버스에 올라탄 세 사람을 향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nbspnbsp아그라에서 델리로 가는 길은 지금껏 성지순례를 다니며 보았던 풍경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6차선 고속도로가 한국처럼 깨끗하게 펼쳐져 있고, 델리에 가까워질수록 양 옆으로 아파트가 줄줄이 건축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깔끔한 복장에 신발을 신고 다니는 풍경이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성지순례를 할 때 보았던 맨발에 헐벗은 차림의 인도인들, 허름한 집들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풍경이었습니다.nbspnbsp▲ 아그라와 델리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야무나 익스프레스nbsp특히 델리 근교의 노이다 지역은 엄청난 규모의 공단이 들어서서 막 성장하는 인도 산업의 태동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 노이다 공단nbsp고속도로를 달리는 중 버스 안에서는 어젯밤 숙소에서 미리 싸둔 주먹밥을 꺼내 먹었습니다. 마지막 여정의 아쉬움을 달래며 쉴 새 없이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nbspnbsp델리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라즈가트’입니다. 라즈가트는 인도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마하트마 간디를 화장한 곳입니다. 넓은 공간에 잔디밭으로 둘러싸여 공원처럼 잘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간디를 화장한 후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고 해서 지금도 계속 불꽃이 타고 있도록 해놓고 있었습니다. 순례단은 간디의 뜻을 기리며 불꽃을 항해 잠시 묵념을 한 후 라즈가트를 나왔습니다.nbspnbspnbsp▲ 라즈가트nbsp라즈가트를 나와 길을 건너니 간디 박물관이 나왔습니다. 간디의 전 생애가 다양한 사진들로 전시가 되어 있었는데, 시간이 넉넉지 않아 주마간산 식으로 훑어 보고만 나왔습니다. 간디가 얼마나 인도 민중의 행복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쳤는지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다음은 델리 인도국립박물관을 관람했습니다. 검색대를 통과해 대중들이 모두 박물관 입장을 마치자 스님의 설명이 곧바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박물관 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는 얘기를 미리 들었기에 다들 기대감을 안고 서둘러 입장을 했습니다.nbspnbsp박물관 입구에 마련된 인더스문명관을 시작으로 마지막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곳까지 스님은 차례대로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먼저 인더스문명관에 들어섰습니다.nbspnbspnbsp“입구에 보면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인더스문명을 설명해놨습니다. 인더스문명은 한 두 군데에 집중된 게 아니라 여기 지도에 점으로 표시되어 있듯 한 250군데가 됩니다. 구자라트가 있는 하류 지역에서 펀잡 지방까지 인더스 강 유역 전체가 옛날에 문명이 발달한 곳이에요. 여기는 도시문명이 발달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초원지대입니다. 도로도 포장이 되어 있었고, 공중 목욕탕과 신전 등 건축물 뿐만 아니라 조각이나 염주, 흙으로 만든 소품 같은 것도 아주 발달했어요.nbspnbspnbsp이것은 청동기 유물입니다. 우리 나라도 청동기로는 주로 제기로 사용했습니다. 나중에는 무기를 좀 만들었지만 그 시대의 농기구는 대부분 석기를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토기가 유명합니다. 토기를 보면 아주 사실적으로 조각이 되어 있습니다.nbsp고대 4,500년 전 유적지 사진인데 굉장하지요? 여기는 모헨조다로입니다. 모헨조다로나 하라파는 유물이 발견된 마을 이름이에요. 여기는 주로 토기와 작은 화살촉, 바늘 같은 것들이 많이 나왔어요. 이런 목걸이는 요즘 걸어도 좋을 정도로 장신구도 굉장히 발달했습니다. 너무 오래 되었으니까 큰 물건들은 다 파괴되고 작은 소품만 땅속에서 나온 거예요. 그러나 많은 소품에 마차가 있는 걸 보면 당시에도 마차가 발달했다는 걸 알 수 있어요.nbspnbsp우리나라도 아직 세계에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기 전이어서 그렇지, 요하문명이라고 해서 지금부터 5,0006,000년 전에 세계에서 최고로 발달한 배달문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중국 땅에 있어서 우리가 접근하기 어렵지만 엄청난 유적과 유물들이 지금도 많이 발굴되고 있어요.nbspnbsp배달문명을 창시한 환웅 천황님께서 환인으로부터 떠나오실 때 천부인 세 개를 가져왔다고 해요. 그 천부인 세 개가 청동거울, 청동검, 청동방울입니다. 그러니까 환웅은 청동기문명의 소유자였다고 볼 수 있어요. 세계 최고의 문명 집단에서 일파가 떨어져 나와서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nbsp이런 유물들이 박물관 안에서는 많이 볼 수 있으니 흔해 보이지만 모두 역사교과서에 나오는 유명한 것들입니다. 대부분은 토기와 석기이고 청동기가 더해집니다. 청동기가 발달해서 많이 쓰여진 것은 3,0004,000년 전이지만 청동기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은 6,0007,000년 전 쯤까지 보고 있습니다. 요즘은 유물 발굴 기술이 발달되어서 연구에 큰 진척을 이루었어요. 신석기 문명도 8,000년 전 쯤으로 보다가 지금은 10,000년 전 쯤으로 보고 있고요.”nbspnbsp▲ 당시 시신이 매장된 모습을 그대로 복원해놓은 것nbsp이어서 마우리아왕조 때의 유물이 전시된 곳으로 이동했습니다.nbspnbsp“여기는 마우리아왕조, 즉 아쇼카왕 때 작품입니다. 사르나트에서 우리가 봤던 네 사자머리 석주가 있지요? 아쇼카왕 시절은 아직 부처님을 사람 형상으로 묘사한 불상이 나오기 전입니다. 아쇼카석주의 머리에 있던 것은 사자와 코끼리와 소와 말인데 각자 동서남북을 가리킨다고 해요. 여기도 부처님을 법륜으로만 표시해놨지 불상으로는 표시하지 않았어요.nbspnbsp▲ 부처님 대신 법륜 마크를 조각한 모습nbsp이 그림은 부처님이 태어났을 때 아시타 선인이 부처님을 보고 ‘이 세상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되고 출가하면 부처를 이루리라’라고 예언하는 모습입니다.nbspnbsp▲ 아시타 선인의 예언을 표현한 굽타 시대의 작품nbsp여기서도 무릎에 아기를 안고 있지만 아기를 사람 형상으로는 아직 그리지 않았습니다. 정반왕과 아시타선인이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에요. 여기는 1세기 경 작품들입니다.”nbsp다음은 쿠샨왕조 때의 유물이 전시된 곳으로 들어섰습니다.nbspnbsp“여기서부터는 쿠산왕조 시대입니다. 쿠샨왕조는 마우리아왕조 다음에 인도를 통일한 왕조이고 시기상으로는 1세기에서 3세기 정도예요. 또 활석처럼 맨질맨질한 돌 위에 아주 예쁘게 새겨놓은 이런 조각들을 ‘나가르주나콘다’ 양식이라고 해요. 저런 양식은 남인도, 특히 첸나이 인근에 많습니다.nbspnbsp들어오자마자 정면에 있는 여자 조각상이 마투라 양식입니다. 마투라식은 붉은 사암을 쓰고 여성의 아랫도리를 노출하는 게 특징이에요. nbspnbsp▲ 마투라 양식nbsp오른쪽에 줄지어 있는 게 전부 나가르주나콘다에서 발굴된 나가르주나콘다 양식입니다. 여기 그림들은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그린 거예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한 장면 한 장면씩 그림으로 표현했어요.nbsp▲ 나가르주나콘다 양식nbsp이게 초기 불상입니다. 1세기 즈음의 간다라 양식인데 여길 보면 부처님 머리가 처음에 어떤 모양이었는지 알 수 있어요. 끈을 묶어서 뒤로 늘어뜨린 것을 이렇게 잘라버렸잖아요.nbspnbspnbsp이 끈 묶은 자리가 초기에는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 모양이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모양이 되었어요.nbspnbspnbsp그러다가 나중에는 우리가 아는 구불구불하고 동글동글한 모양으로 조각의 표현이 변한 거예요. 지금 이 불상은 묘사가 무척 사실적이에요. 그리고 신체 모양이 굉장히 당당하고 힘이 있어 보입니다.nbspnbspnbsp조선시대 불상들은 어깨가 올라오고 고개가 쭈그러져 있잖아요. 불교가 억압받다보니 그래요. 그리고 이 때는 좌상보다 입상이 많습니다. 천천히 걷기는 하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활보하는 자세가 많아요. 또 대부분 서서 설법하는 모습입니다. 앉아서 명상하는 상보다 교화하는 상이 많아요.”nbsp다음은 굽타시대의 유물이 전시된 곳에 들어섰습니다.nbspnbsp“다음은 굽타시대, 즉 45세기 경의 불상 작품들입니다. 굽타시대는 벌써 불교만이 아니라 힌두교도 상당히 다시 복구해서 숭상하던 때예요. 중국 유교도 비슷합니다. 공자의 유교가 한나라 시대에 국교가 되었다가 불교가 들어오고 나서 수당 때는 불교가 번성했어요. 그러다 송나라 때 와서 불교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유교가 새로이 부흥했는데 그게 주자학입니다. 유교는 유교지만, 초기의 유교보다 상당히 이론화된 유교라고 볼 수 있죠. 힌두교도 마찬가지여서 원래 브라만교가 쇠퇴했다가 불법의 영향을 받아 다시 힌두 신앙으로 재정립하게 되었어요. 그러니 힌두교는 사실 불교보다 더 늦게 나왔다고 볼 수 있어요. 브라만교가 있고, 불교가 나오고, 불교가 쇠할 때 불교의 영향을 받은 힌두교가 다시 일어난 것이니까요.nbspnbsp이 시대는 벌써 힌두교가 다시 부흥해서 불교와 양립하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불상도 많지만 신상이 아주 많아요. 그리고 신상과 보살상이 잘 구분되지 않아요. 보살상이 머리를 깎은 스님이 아니라 머리를 기른 상이다 보니 이름이 신이라고 붙어 있으면 신상이고 보살이라고 붙어 있으면 보살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불상은 완전히 모양이 다르니까 알아보기 쉽지요.nbsp이런 불상은 사르나트 양식입니다. 여길 보면 ‘A.D 5세기, 굽타, 사르나트’라고 써놨습니다. 허리에 이런 띠가 있고 얼굴 모양이 이런 것은 사르나트 양식입니다.”nbspnbsp▲ 사르나트 양식nbsp사르나트 박물관에서도 보았던 사르나트 양식을 이곳에서도 보니 무척 반가웠습니다. 다음은 신상들이 많이 전시된 곳을 둘러보았습니다.nbspnbsp“여기는 7세기 이후 12세기까지의 작품들입니다. 인도가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힌두 왕국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에 불교도 융성하고, 힌두교도 융성하고, 서로 섞이기도 했던 시기입니다. 이때는 주로 신상이 많습니다. 우리 한국 불교에서는 보살상이나 불상이 앉아 있는 자세가 많은데 여기 보면 한쪽 다리를 내려놓고 있어요. 경주 남산 칠불암 위쪽에 있는 신선암의 마애보살반가상이 저런 자세예요. 인도 신상 중에는 저렇게 앉아 있는 신상이 아주 많아요.nbspnbsp▲ 한쪽 다리를 내려놓고 있는 신상nbsp불상처럼 생겼는데 남자 성기가 그려져 있으면 불상이 아니라 마하비라상입니다. 자이나교의 실질적 창시자인 마하비라를 묘사한 거예요.nbspnbsp▲ 자이나교의 마하비라상nbsp자이나교는 무소유 사상을 강조해서 옷을 안 입으니까 자이나상도 그렇게 표현했어요. 여길 보면 불상과 비슷해 보이지만 좀 투박하고 아랫도리가 노출되어 있잖아요. 이건 불상이 아니라 자이나상이에요. 인도에는 자이나교도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가슴에 다이아몬드처럼 마름모꼴 모양이 있는 것도 자이나상입니다. 이렇게 옷을 입은 자이나상은 백의파의 것입니다. 자이나교의 교파에는 나체파와 백의파, 이렇게 두 가지가 있는데 백의파는 옷을 입습니다.nbsp이것들은 힌두 사원에 한 부분씩 장식되어 있던 게 떨어져 나온 거예요. 독립된 한 개의 상이 아닙니다.nbspnbsp팔이 여러 개 있는 이런 신상이 변한 게 관세음보살상이에요. ‘관세음보살은 천수천안이다’라고 해서 조각하거나 그릴 때 40개 팔을 그리는 게 여기서 나왔어요.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아이들이 연극할 때 맨 앞의 아이가 손을 코끼리 코처럼 잡고 뒤에 아이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손을 내밀던 게 이런 모습을 표현한 거예요. 앞에서 보면 이 신상처럼 손이 여럿인 양 보이잖아요. 모르고 보니까 뭐가 뭔지 몰라 ‘왜 저러나’ 싶었죠? 불상이든 신상이든 마하비라상이든 인도 안의 같은 문화다 보니 비슷한 점이 많아요.nbsp이 상들은 머리를 깎지 않았어요. 머리를 묶고 옷도 화려하게 입었습니다. 이건 보살상, 즉 보디사트바상입니다. 이건 마에트레야, 다시 말해 미륵보살이에요. 2세기 작품이라고 되어 있네요. 12세기 간다라 미술기의 작품이어서 조각이 사실적입니다.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서 그래요.”nbsp이렇게 안내가 계속 이어지던 중 드디어 부처님의 진신 사리가 모셔져 있는 곳에 다달았습니다. 스님이 앞에 보이는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가르키자 모두들 탄성을 지르며 그 앞에 멈춰 섰습니다.nbspnbspnbsp“저 앞에 보이는 금으로 만든 탑 안에 부처님의 진신 사리, 즉 부처님의 유골이 모셔져 있습니다. 원래 그냥 모셔져 있었는데 태국 분들이 기증을 해서 저 안에 모시게 되었어요. 이게 여러분들이 참배했던 삐쁘라하와에서 나온 사리예요. 너무 가까이 가진 말고 삼배 드리겠습니다. 왼발을 한 발 내밀고 합장을 한 채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는 ‘우슬착지’ 자세를 취하고 고개 숙여 인사드리는 것을 세 번 하겠습니다.”nbspnbspnbsp스님의 말씀대로 다함께 우슬착지로 공경의 예를 표했습니다.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은 엊그제 순례단이 직접 참배한 곳이라 진신 사리의 친견은 더욱 뜻깊었습니다. 다시 스님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nbspnbsp“금강경에 ‘편단우견 우슬착지 합장공경 이백불언’이라고 나오죠? 지금도 제가 시골의 석가족들에게 가면 석가족들이 무릎을 꿇고 스님의 발에 이마를 대며 인사합니다. 그게 최대로 경의를 표하는 인사법이에요. 그걸 형식적으로 흉내내는 것이 고개 숙여 반 절하면서 손을 발에 대는 거예요. 정식 인사법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발에 대는 것입니다.nbspnbsp사리는 무슨 보석이 아니에요. 부처님을 화장하고 남은 유골을 사리라고 불러요. 우리가 존경해마지않는 부처님의 육신의 한 조각이 남아 있는 겁니다.nbspnbsp▲ 부처님의 진신 사리nbsp처음에는 유골을 8군데에 나눠서 모시다가 나중에 아쇼카 왕이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기념탑들을 쌓으면서 그 한 군데 한 군데마다 사리를 넣은 거예요. 사리가 부처님의 징표잖아요. 우리가 외국에 불교를 전할 때도 이 사리를 가져가서 탑을 쌓아야 그게 붓다의 징표가 됩니다. 그래서 모든 불교신앙의 중심은 절이 아니라 탑입니다. 탑 옆에 있는 승당은 그냥 스님들이 사는 집에 불과했어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이제 탑은 그냥 장식물이 되고 불상이 중심이 됐죠. 인도에는 따로 대웅전이라는 것이 없고 탑 안에 그냥 불상을 모셨어요.nbspnbsp아래쪽을 보면 사리함이 있어요. 원래는 사리가 저 사리함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탑을 처음 발굴했을 때 탑 안에서 저 사리함이 나왔고 그 속에 사리가 들어 있어요. 그런데 보면 사리함이 두 개입니다. 처음에 영국 사람이 발굴했을 때 사리가 발견되어서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인도가 독립하고 나서 더 깊이 파봤더니 아래쪽에서 또 다른 사리함이 나왔어요. 시대에 따라 탑을 덧붙이면서 아마 사리를 구해서 넣었나 봐요.”nbsp특히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코 앞에서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니 모두들 믿기지가 않는지 꿈인지 생시인지 여러번 꼬집어 보면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습니다. 2600여 년 전 고통받는 중생들의 행복을 위해 평생을 길에서 살다가신 분의 흔적을 보며 찬탄 공경하는 마음이 절로 일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불교 유적에 대한 부분만 스님이 자세히 안내를 해준 후 나머지 미술 작품이나 조각품, 신상 등에 대해서는 안내를 하지 않고 그냥 둘러보기만 했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어 1층부터 2층, 3층까지 모든 곳을 꼼꼼히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특히 2층에는 코끼리 상아에 부처님의 일생을 아주 정교하게 새겨놓은 작품이 있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스님도 유심히 살펴보며 이 그림은 부처님의 어떤 모습을 표현한 것인지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 코끼리 상아에 새겨진 부처님의 일생nbsp▲ 5비구에서 처음 설법하는 모습nbsp이렇게 박물관 관람을 모두 마치고 각자 사는 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델리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버스 안에서 스님은 “공항에 가면 짐 챙기느라 분주하니까 미리 작별 인사를 하겠다”고 하면서 인사를 건넸습니다. nbspnbsp“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성지순례를 잘 마쳤습니다. 모두들 안녕히 돌아가시기 바랍니다.”nbsp스님의 작별 인사에 모두들 환호를 하며 박수 갈채로 화답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준비와 노고 덕분에 제27차 인도 성지순례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nbspnbsp차가 막히지 않아 비교적 여유있게 공항에 도착해서 차분히 짐을 챙긴 후 게이트로 들어갔습니다. 스님은 게이트로 들어가는 대중들 한 명 한 명에게 모두 악수를 건네며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특히 각 차량별 담당 소임을 잘 수행해 준 차장님 3명을 따로 불러 얇고 부드러운 인도 천을 선물했습니다. C팀은 외국에서 오신 분들과 정토회 회원이 아닌 일반인들이 많아 조장과 차장이 특별히 더 수고가 많았습니다. 스텝도 부족해서 차장이 거의 스텝 역할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님은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하나 해야겠다고 해서 선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뜻밖의 선물에 차장님들은 깜짝 놀라하며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nbspnbspnbsp대중들이 모두 떠나고 스님은 델리 불자회에서 운영하는 법당으로 향했습니다. 매년 인도 성지순례를 마치면 스님은 델리 불자회에서 마련한 강연회에 참석해 즉문즉설을 해주었는데, 스님과는 아주 오랜 인연을 맺어오고 있는 분들입니다. 법당에 도착하자 델리 불자회 회원 분들이 스님께 환영의 마음을 담아 꽃다발을 건넸습니다.nbsp▲ 델리 불자회nbspnbsp작년에 법당이 구르가온 지역으로 새롭게 이전을 했는데, 스님은 새 법당을 둘러보며 고생했다고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1년 만에 다시 델리를 찾아준 스님께 모두들 삼배로 인사를 올렸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대중들을 모두 자리에 앉히고 서로 소개를 시켜주었습니다. 특히 델리 불자회 분들은 남편이 한국 기업의 주재원으로 나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닙다.nbspnbspnbsp이런 저런 근황을 물어보며 담소를 나누다가 델리 불자회 회원들은 스님 일행이 쉴 수 있게 배려해주며 일찍 법당을 나왔습니다.nbspnbsp이렇게 지난 15일 동안 A팀, B팀, C팀 세 팀으로 나눠 진행된 제27차 인도 성지순례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그동안 성지순례를 함께 하는 마음으로 스님의 하루를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말씀 드립니다.nbspnbsp오늘밤 델리 불자회에서 운영하는 법당에서 하룻밤을 주무신 스님은 내일 한국문화원에서 오전 10시에 인도인들을 위한 즉문즉설 통역 강연을, 오후 1시에 한국 교민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을 연이어 할 예정입니다. 저녁에는 INEB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스리랑카로 갑니다.nbsp ※ 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nbsp쉽고 명쾌한 강의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신 분에 한해 법륜 스님과 함께 떠나는 인도 성지순례에 우선적으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nbspnbspnbsp nbsp
2016.1.22 (인도 17일째) 아그라, 성지순례 정리 강연
nbsp안녕하세요? 인도에서 맞이하는 17일째 아침입니다.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성지순례단 C팀을 이끌고 아그라에 도착했습니다.nbspnbsp송수신기에서 들려오는 유수 스님의 새벽예불 소리에 맞춰 각자 숙소에서 기도를 마친 성지순례단은 6시에 버스에 탑승하여 상카시아를 출발했습니다. 원래 6시 30분에 출발 예정이었으나 대중들이 6시에 모두 탑승을 완료하는 바람에 30분 일찍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새벽 5시부터 짐을 다 챙겨서 버스 앞에 가져다 놓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스님은 “좋아요. 한국에 돌아가시면 기도도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셔서 꼭 챙겨 하세요” 라며 웃었습니다. 내일 모레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에 잠을 설친 사람들이 많았나 봅니다.nbspnbsp상카시아에서 아그라로 가는 길은 안개가 자욱해서 버스도 가다서다를 반복했습니다. 인도의 겨울 날씨는 이렇게 항상 안개가 짙어서 특히 기차의 경우 6시간 이상 연착되는 것은 기본입니다.nbspnbsp▲ 안개가 자욱한 도로nbsp11시가 다 되어서 아그라의 외곽에 다달았을 무렵 스님은 이제 30분만 더 가면 아그라 성에 도착한다고 알려주면서 아그라, 아그라 성, 타지마할, 인도의 역사 전반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아그라는 인구가 100만명 정도 되고요. 인도의 근대 왕조였던 무굴제국의 수도였습니다. 그래서 무굴제국의 왕궁이었던 아그라 성이 유명하고요. 또 여러분들이 잘 아는 타지마할이 가장 유명합니다. 그리고 무굴제국을 완성시킨 사람이 악바르대제인데요. 악바르대제의 무덤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4050km 나가면 악바르대제 때 새로운 왕궁을 건설했지만 30년 정도 밖에 사용하지 못했던 시켄드라바드 유적지도 있습니다.nbspnbsp▲ 아그라성nbsp오늘 우리가 가는 아그라성은 악바르대제 때 지은 겁니다. 야무나강의 서쪽 면에 지어져서 동쪽 면은 야무나강을 해자로 하고, 성벽을 높이 쌓아서 그 안에 궁궐을 지었습니다. 1565년에 짓기 시작해서 1573년에 완공을 했다고 하니까 8년 내지 9년 걸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 역사와 비교하면 시기는 한 100년 앞서지만 악바르대제는 청나라의 강희제와 비슷합니다.nbspnbsp악바르대제의 뒤를 이은 사람이 ‘자한 기르’이고요. 자한 기르 때 영토가 더 넓어졌고, 자한 기르 다음에 왕위에 오른 사람이 타지마할을 만든 ‘사자한’입니다. 사자한은 왕위에 오르고 나서 영토를 더욱 더 넓히고 선정도 많이 베풀었다고 해요. 그런데 부인을 워낙 사랑해서 그 부인을 위해서 무덤을 만든 것이 타지마할입니다.”nbsp야무나 강을 건너자 곧바로 높게 솟은 붉은 성벽으로 이루어진 아그라성이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nbspnbsp아그라성 앞 주차장에 버스를 정차시키고 모두 내려서 점심 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제밤 숙소에서 미리 해 둔 전기밥통의 밥과 반찬으로 맛있게 식사를 한 후 아그라성을 구경하러 들어갔습니다.nbspnbsp▲ 아그라성 앞에서 점심 식사nbsp대중들이 아그라성을 관람하는 사이 스님은 먼저 숙소로 돌아와 저녁 프로그램 준비 상황을 점검한 후 원고 교정 등 업무를 보았습니다.nbspnbsp대중들은 오후 3시에 숙소로 들어와 조별로 성지순례 소감문 작성과 소감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15일 동안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직접 글로 쓰며 다시 정리해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nbspnbsp오후 5시에는 강당에 모여 조별로 한 명씩 소감문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총 12명을 각 조를 대표해서 발표를 했는데, 각기 느낀 점이 정말 다양했습니다.nbspnbsp▲nbsp소감문 발표nbspnbsp스님은 대중들의 발표를 유심히 경청하며 틈틈이 메모를 했습니다. 발표가 모두 끝나자 한 사람 한 사람 마다 인상 깊었던 부분을 언급해 주면서 모두가 다시 한번 명심했으면 하는 부분은 자세히 설명을 보태주었습니다.nbspnbspnbsp특히 길거리에서 극빈자들의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한 것과 관련해서 부처님의 ‘사문유관’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더 유심히 살펴볼 것을 강조했습니다.nbspnbsp“인도의 빈곤 실태를 보면서 빈곤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 여러분들도 동참하겠다는 마음을 냈다는 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 이번 여정에 캘커타가 안 들어갔는데 제가 인도에 처음 왔을 때는 캘커타로 들어왔어요. 캘커타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빈곤 도시 중 한 곳이어서 인도 중에서도 구걸하는 사람이 특히 많은 편이에요. 그 때는 방 하나에 200루피 하는 게스트하우스에 주로 묵었는데, 한번은 인도 전통 무용 공연을 보러 캘커타 시내에 있는 5성급 호텔에 갔었어요. 그런데 안에 들어가니 궁전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릇도 전부 금빛이고, 건물 안은 죄다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수영장도 있고, 야자수도 무성했어요.nbspnbspnbsp그런데 호텔을 들어갔다가 나오면 바로 호텔 입구에서부터 장애가 있는 걸인들이 엎드려 있거나 동전통을 끌고 기어다닙니다. 저는 거기서 사문유관을 봤어요. 부처님이 왕궁에 있다가 왕궁 밖에 나갔을 때 대면했을 정황이 너무나 절실히 다가왔습니다.nbsp한 소년이 이런 정황에 부딪혔을 때 인간의 생각은 결국 두 가지로 흘러가요. 하나는 ‘내가 저런 꼴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는 겁니다. 이게 지금 우리들이 따르는 세속의 길이에요. 결국은 경쟁에서 이기는 거예요.nbspnbsp또 다른 하나는 ‘함께 행복해지는 길이 뭘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타마가 처음에 궁 밖으로 나가서 농경제에 참여했다가 농부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저들의 불행 위에 나의 행복이 있구나’ 하고 자각했지만,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해결 방법을 부모님이나 스승님들에게 물어도 아무도 답을 못해 주었기 때문에 그게 고뇌가 되었어요. 그것이 더 구체적으로 다가온 게 사문유관이 아니었나 해요.nbspnbspnbsp경전을 읽어보면 고타마가 마주친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의 묘사가 아주 구체적입니다. 늙었는데 보호받지 못하고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사람, 즉 가족과 일가 친척이 모두 떠나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모습, 턱은 숨에 차고 가래가 끓고 눈이 안 보이고 다리가 떨리는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어요. 당시에는 노예가 늙어서 쓸모가 없으면 갖다 버렸잖아요. 병든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길거리에 버려진 행려자의 모습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도 그냥 죽은 게 아니라 죽은 시신이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모습이에요.nbspnbsp그 당시 인도 사회에서는 90가 노예였어요. 민주정치를 꽃피웠다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시민은 1020이고 나머지는 모두 노예였으니까요. 지금도 인도에서 상위 카스트라고 하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가 전 인구의 15에 불과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상위계급이 자꾸 늘어나게 마련인데, 늘어난 게 15라고 하니 그 당시에는 10도 안 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nbsp이런 것을 인도에 와서 직접 보고 느꼈기 때문에 저는 부처님에 대한 이해를 좀 더 깊이 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책에서 ‘사람은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다’ 이런 식으로 좀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배워요. 그런데 호텔 앞에서 제 나름의 사문유관을 경험하면서 사춘기의 소년이었던 부처님이 어떤 사유를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고뇌하다가 결국은 모순을 회피하는 게 아니라 극복하는 쪽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 가셨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nbspnbspnbsp오늘날 여러분이 한국이나 미국, 독일, 일본에 살다가 여기 들어오면 그게 바로 사문유관인 거에요. 여러분들이 사는 나라가 궁궐이고, 여기 도착하면 성 밖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한국에 있다가 여기 오면 부처님이 성문 밖을 나갔을 때 받았던 혼란과 충격을 직접 경험해보게 되죠. 그러니 나중에 집에 돌아가면 사문유관을 다시 읽어보셔야 해요. 그냥 ‘동문으로 나가서 늙은 사람을 보았다’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늙음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고 병든 모습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지 잘 살펴보세요.nbsp이처럼 사문유관을 확실하게 체험해야 붓다의 출가를 이해하게 됩니다. 출가가 확실히 이해돼야 불법을 이해한다고 볼 수 있어요. 왕위를 버리는 출가 없이 우리가 불법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nbspnbsp그 대표적인 예가 위제희부인이에요. 위제희부인도 부처님 법문을 듣고 엄청나게 좋아하며 부처님께 공양도 올리던 독실한 불교 신자였어요. 그런데 그 때의 불교는 불교가 아니었어요. 위제희 부인은 남편이 왕이고 아들도 왕이 될 사람이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였어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남편과 아들이 왕위를 두고 싸우는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둘이 싸우면 하나는 이기고 하나는 질 수밖에 없잖아요. 남편이 이기면 아들이 죽고, 아들이 이기면 남편이 죽어요. 이 세상 어떤 여자도 그런 고통을 겪는 여자는 없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여자가 된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제일 행복하지도 않지만 제일 불행하지도 않아요. 그래서 어중간한 게 원래 좋아요. nbspnbspnbsp위제희부인이 이 모순을 알기 전에 알았던 불법은 불법이 아닌 거예요. ‘아, 부처님 말씀 참 논리적이다, 합당하다, 부처님 인격이 훌륭하시다’ 하고 자기 행복에 겨워서 그저 좋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그 모순에 딱 처하자 위제희부인은 ‘나는 이 세상이 싫습니다. 이런 괴로움이 더 이상 없는 세상을 원합니다’라고 했어요. 그 내용이 기록된 경전이 ‘관무량수경’입니다.nbspnbsp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합니다. 부처님도 6년 고행을 하셨어요. 이렇게 일부러 고생도 하는데, 우리가 일부러 고생할 필요도 없이 그냥 주어지는 고생이야 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앞에 주어진 인생, 주어진 고행을 굳이 피할 필요가 없어요. 부처님은 왕위를 버리고 일부러 그 길을 가셨는데, 우리는 왕위가 주어지지도 않았으니 버릴 것도 없잖아요. 얼마나 쉬워요? nbspnbspnbsp인생의 고뇌를 알려면 결혼도 해보고, 이혼도 해보고, 아이가 말을 안 들어서 고생도 해봐야 하는데 저절로 아이가 말을 안 들어주잖아요. 인생을 경험하려면 일부러도 고생을 해 볼만한데 공짜로 주어지는 것을 굳이 피할 필요가 없고, 그걸 갖고 ‘죽는다, 산다’ 야단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nbsp이것이 재앙이 곧 복임을 아는 거예요. 한편으로 보면 재앙이고 불행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사실은 복이고 행복이에요.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느냐에 따라서 재앙이 되기도 하고, 복이 되기도 합니다.nbspnbsp‘일체유심조’라는 말을 외우기는 쉽지만 그걸 경험하기는 쉽지 않아요. 우리가 불경과 교리를 공부해도 해탈이 안 되는 이유는 신해행증 중에서 해, 즉 이해할 뿐이지 그것을 경험해서 증득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지는 인생 경험의 기회를 굳이 회피할 필요는 없어요. 지은 인연의 과보를 안 받으려고 회피하면 그게 내내 따라다녀요. 부처님께서 ‘지은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가 없다, 깊은 산속 깊은 바다속에 숨는다 하더라도’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그걸 보면 요즘 새로 개발한 미사일이 생각나요. 열추적기 달린 신형 미사일은 아무리 피해도 끝까지 따라다니잖아요. nbspnbsp그러니까 우리가 이걸 터득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락이 고임을 터득해야 했는데, 우리는 불행이 곧 행복임을 터득해버리면 인생이 자유로워지겠죠. 붓다의 가피가 우리가 말하는 복으로 안 오고 재앙으로 오는 줄 알아야 해요.nbsp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은 고뇌를 통해서 들린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아무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도 잘 안 들리지만 우리가 굉장한 고통에 처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구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며 부처님의 복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지금 우리가 구하는 것은 윤회의 세계 안에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nbsp그런 데서 여러분들이 성지순례를 하면서 사문유관을 조금이나마 느끼셨길 바랍니다. 사문유관을 느끼게 되면 삶이 조금 달라져요. 여기서 마냥 힘들어하고 ‘지저분해서 다시는 인도 쳐다보기도 싫다’ 이런 게 아니었다면, 앞으로 여러분들의 삶에 여러분들도 모르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돌아가서 또 잊어버리고 지내더라도 한번 경험한 건 늘 쌓여 있어서 여러분들의 삶에 크든 작든 변화를 가져와요.nbspnbspnbsp구걸하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돈을 줬든, 주지 않았든, 귀찮아했든, 그건 다 내 까르마의 반응이거든요. 그걸 감싸줬다고 해서 잘 했고, 그걸 내쳐서 잘못한 건 아니에요. 저도 제일 처음에 왔을 때는 외면하고 내쳤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통해서 자기를 보는 게 중요합니다.”nbsp부처님이 경험한 사문유관을 오늘날에 비유하면 한국이나 선진국은 부처님이 출가 전에 살았던 왕궁과 같고, 이곳 인도의 극빈자들의 삶은 성 밖의 사문유관과 같다는 말씀이 다시 한번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인도 성지순례는 부처님의 사문유관을 직접 경험해보는 시간이었던 셈입니다.nbspnbsp각각의 소감문에 대한 스님의 생각을 모두 들려준 후 마지막으로 스님은 문화 기행과 성지 순례의 차이점을 알려주면서 이제 성지순례를 마치면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면 좋겠는지 강조하면서 강연을 마쳤습니다.nbspnbsp“아잔타 석굴이며 엘로라 석굴, 산치 대탑 같은 곳에 가면 오늘 아그라 성 보았듯이 구경거리가 많아요. 그러나 그것은 순례가 아니라 문화기행이에요. ‘이건 몇 세기에 마련했고 이건 언제 작품이고 이건 무슨 양식이고...’ 이렇게 문화와 예술 작품을 보는 겁니다.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우리가 다녔던 길은 문화기행이 아니라 순례예요. 순례는 거기에 허물어진 벽돌더미가 없어도 큰 상관이 없어요. 여기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것이 내 삶에 어떤 교훈이 되느냐가 중요합니다.nbspnbspnbsp그리고 문화기행은 편안하게 하는 것이 좋아요. 문화기행이나 여행은 호텔에 자고, 설명도 자세히 듣고, 사진도 찍으면서 즐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순례는 일부러 고행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렇다고 편안하지도 않아요. 여러분들이 따로 호텔에 잔다고 해도 우리가 그동안 묵었던 순례자 숙소와 크게 차이가 날까요? 우리가 다녔던 것보다 더 빨리 갈 수 있을까요? 우리가 타고 다닌 차보다 더 좋은 차를 타고 우리가 먹은 밥보다 더 맛있는 밥을 먹을까요? 아니에요. 안개 없는 날, 안 추운 날만 골라서 다닐 수도 없어요. 큰 도시가 아닌 시골 유적지에서는 어차피 호텔에 들어가도 난방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호텔에 가면 좀 낫지 않겠냐고 하지만, 제가 다 시도해 봤는데 오십보백보예요. 호텔이 세수 좀 하기 쉬운 정도예요.nbspnbsp그리고 우리는 14일 동안 10대 성지를 다니는데 문화기행을 온 분들은 8일 만에 다 다니려니 더 바빠요. 기원정사에서 마주쳤을 때 봤겠지만 도착해서 입구만 겨우 보고 30분 만에 갔잖아요. 사위성에서는 아예 차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설명만 듣고 갔어요. 하루에 두 군데씩 보려니 아무리 설명을 줄여도 시간이 부족한 거예요. 그래서 돈 많이 들인다고 꼭 좋은 게 아니에요. 궁금하면 나중에 여행사 상품으로 다시 한 번 와서 비교해 보세요.nbspnbsp그래서 순례는 고생을 좀 하는 게 좋아요. 방금 고생을 좀 더 하게 해달라는 제안도 있었는데, 고생을 좀 더 하면 느끼는 게 더 많긴 해요. 그런데 여기서 고생 더 시켰다가는 거사님들한테 제가 맞아죽을 것 같아요. 거사님들 이야기 들어보니까 제가 머리카락만 붙었으면 벌써 다 뜯겼을 것 같은데, 머리카락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nbspnbspnbsp우리가 성지에 가든, 여기에 오든, 뭘 하든, 결국 하는 이야기는 ‘어떻게 인생이 행복해질 거냐’입니다. 그저 경전이 나오면 경전 이야기를, 부부싸움 이야기 나오면 부부싸움 이야기를, 고생한 이야기 나오면 고생한 이야기를 소재 삼을 뿐이에요. 결국은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가질 때 행복해지느냐가 핵심이에요. 술을 마셔도, 밥을 먹어도, 남녀가 함께 있어도 이 이야기 빼고 할 이야기가 뭐 있겠어요? nbspnbsp앉아서 뭘 먹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연애도 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술도 마셔야 한다며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간단하다. 공부하는 여자랑 둘이 앉아서 술 마시면서 공부 이야기를 하면 된다.’ 둘이 이야기하면서 술도 마시고 연애도 하고 공부도 하고, 이렇게 셋 다 할 수 있어요. nbspnbsp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진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이 종교화되어 있는 불교는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점도 인정해야 해요. 불교는 종교 가운데 하나이지만, 불법은 ‘종교 가운데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종교를 넘어서 있습니다. 종교의 범주에 들어가는 요소도 있지만 넘어서 있어요. 그 안에는 과학의 요소도 있고, 인문학의 요소도 있고, 문화사의 요소도 있지만 그런 특정한 범주를 넘어선 진리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의 개인 신앙이 무슨 종교이고 무슨 종파인지 너무 따지지 마세요. 그건 그냥 개인이 좋은 대로 하세요. 교회 다니고 싶으면 다니고, 성당 다니고 싶으면 다니고, 다른 종파인 절에 가고 싶으면 가면 됩니다. 천주교 쪽은 좀 멋있잖아요. 음악이 웅장하게 울리는 가운데 뭐라 뭐라 하면 ‘또한 사제와 함께’ 엄숙하게 말하잖아요. 교회에 가면 또 노래 부르고, 이것저것 재미있어요. 절에 가면 무릎을 꿇고 앉아서 목탁 치고 염불하니까 좀 재미는 없지요. 대신 조용하게 지내려면 절이 좋지요.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다 귀찮으면 아무데도 안 가면 돼요. nbsp그러나 모든 인간은 종교가 뭐든, 종교가 있든 없든, 행복하기를 원해요. 오늘 행복했다가 내일 괴로움이 되는 이런 행복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바뀌지 않는 행복, 속박으로 도로 바뀌지 않는 자유가 열반과 해탈입니다. 그런 행복을 조금이라도 확대해나가고 싶으면 이 마음 공부를 해야 합니다. 마음 공부를 하면 이런 요소를 성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논어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서양 철학에서도 일부 발견할 수 있고, 과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어요. 꼭 불경을 읽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눈을 좀 크게 뜨고 멀리서 관조하면 행복의 윤곽을 잡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건 좁히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없고, 넓히면 우주를 다 집어넣어도 어디 들어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고 하잖아요.nbspnbsp그런 관점에서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내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없다’, ‘어릴 때 무슨 경험을 했다’, 이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고요. 제일 중요한 것은 무슨 경험을 했든 안 죽고 지금 살아 있다는 거예요. 우여곡절을 겪고도 지금 살아 있으니 나는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산 사람은 다 행복해야 해요. 죽은 뒤의 세계는 죽은 뒤에 가서 보면 되니까 우선 놓아두고, ‘지금 내가 행복하다’ 이것을 중시해야 합니다.nbspnbspnbsp성지순례 온 것이 몸은 좀 고단하고 고생은 좀 했지만 여러분들 삶의 큰 양식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nbsp마지막까지 애정어린 조언을 듬뿍 쏟아내어 준 스님에게 모두 큰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강연을 모두 마치고 저녁 만찬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난 15일 동안 낡은 순례자 숙소에서 세수도 제대로 못하고 꾀죄죄하게 다녔는데, 오늘은 고급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는 데다가 푸짐한 저녁 식사가 차려져 나왔습니다.nbspnbsp스님은 “그래도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세수는 하고 가야하니까 오늘은 호텔에서 자는 것”이라며 웃음을 보인 뒤 테이블 별로 건배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한껏 흥이 오른 만찬장의 분위기를 이어서 조별로 장기자랑 시간이 펼쳐졌습니다. 어떤 조는 트로트를 부르며 성지순례 내용으로 개사를 해서 부르기도 했고, 어떤 조는 빨간 목도리를 통일되게 걸치고 나와 신나는 댄스를 보여주었고, 어떤 조는 바보 분장을 하고 나와 재미있는 율동과 구호를 보여주어서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nbspnbspnbspnbsp▲ 조별 장기자랑 시간nbsp준비할 시간도 별도로 주지 않았는데 짧은 시간에 순식간에 팀웍을 발휘해 재미있게 장기자랑을 보여주는 모습을 보며 15일 동안 동고동락한 내공을 가득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친교의 시간을 통해 성지순례단은 더욱더 하나가 된 기분입니다.nbspnbspnbspnbsp장기자랑 시간을 모두 마친 후 스님은 내일 아침에 출발할 때 숙소에 두고 가는 물건이 없도록 각별한 주의를 당부한 후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nbspnbsp내일은 아침 6시 30분에 숙소에서 나와 먼저 타지마할을 관람한 후 곧바로 델리로 이동해 라즈가트와 간디 박물관, 델리 박물관을 연이어 관람하고 공항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스님은 성지순례단을 공항까지 배웅한 후 델리 정토법당에서 주무실 예정입니다.nbspnbsp ※ 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nbsp쉽고 명쾌한 강의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신 분에 한해 법륜 스님과 함께 떠나는 인도 성지순례에 우선적으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nbspnbspnbsp nbsp
2016.1.21 (인도 16일째) 상카시아, 성지순례 회향식
nbsp안녕하세요? 스님이 인도에 도착한지 16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늘 스님은 성지순례단 C팀을 이끌고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10대 성지를 순례하는 여정 중 마지막 순례지인 상카시아로 향했습니다.nbspnbsp새벽 3시 20분에 일어나 짐을 챙겨 버스에 올라탄 순례단은 4시 정각에 쉬라바스티를 출발했습니다. 이른 출발이지만 늦게 일어나 허둥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새벽에 출발하는 일정이 이제는 모두들 익숙해진 것 같았습니다.nbspnbsp버스에서는 곧바로 새벽예불과 천일결사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버스 안이든 어디든 순례자들의 기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nbspnbspnbsp기도가 끝나자 버스에 불이 꺼지고 모두들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쉬라바스티를 출발하여 럭나우를 거쳐 상카시아로 가는 여정은 10시간에 이르는 대장정입니다. 성지순례 기간 중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하는 일정이기도 합니다.nbspnbsp창밖으로 날이 밝아오자 잠시 차를 세우고 화장실을 다녀오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순례 기간 동안 늘 그래왔듯 여자는 왼쪽, 남자는 오른쪽으로 흩어져 자연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해결하고 버스에 다시 탔습니다. 어제 비가 내려서 그런지 뿌연 안개를 한껏 머금은 인도의 아침 공기가 제법 상쾌하게 느껴졌습니다. nbspnbspnbsp한참을 달리다가 도로 변에 짜이가게가 있는 곳에 버스를 세우고 점심 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순도순 야외에서 먹는 식사가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된 것 같습니다.nbspnbspnbsp도로에 자욱한 안개는 운치를 더했습니다. 그동안 날씨가 제법 따뜻해서 이상기후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오늘은 안개가 자욱한 원래의 인도 겨울 날씨를 제대로 만끽했습니다.nbspnbspnbsp먼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버스 안에서는 차량 별로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동안 버스에서 내리고 올라타기 바빠서 소개도 제대로 못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오랜만에 한 분 한 분의 인생 이야기를 마음껏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서로가 내어놓는 진솔한 이야기에 마음이 활짝 열린 순례객 중에서는 신나게 노래를 한가락 뽑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두들 ‘참 좋은 사람들을 성지순례에서 만났다’며 기쁜 표정이었습니다.nbspnbsp▲ 자기소개 시간nbsp즐겁게 자기소개 시간이 이어지고 있는 사이 스님이 “곧 강가강이 5개의 지류로 나눠지기 전의 원류가 되는 강가강을 지날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강변 모래사장 위에 기도를 하기 위해 모인 힌두교 순례자들이 빼곡이 천막을 치고 있는 풍경이 펼쳐졌습니다.nbspnbsp순례객들은 스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모두 잠에서 깨어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스님은 웃으면서 한마디를 보태었습니다.nbspnbsp▲ 5개의 지류로 나눠지기 전의 원류가 되는 강가강nbsp“우리들이 하는 성지순례를 고생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보다 훨씬 더 부자인 사람들도 저렇게 강변에 한 달씩 천막을 치고 기도를 해요. 굉장하죠?” nbspnbsp힌두교 신자들이 얼마나 믿음이 굳건한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강했기 때문에 무슬림이 침공해도, 기독교가 들어와도 지금까지 이어져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nbspnbsp새벽 4시에 쉬라바스티를 출발한 버스는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드디어 상카시아에 도착했습니다. 약 10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가사를 수하고 향에 불을 붙이고 탑을 한 바퀴 돈 후 예참 불공이 시작되었습니다.nbspnbsp▲ 상카시아 스투파nbsp이 탑은 부처님이 도리천에 올라가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법을 설한 후 하강한 곳으로 하늘과 인간 세계를 잇는 상징적 의미를 지난 장소라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은 부처님이 태어난지 일주일만에 돌아가셔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느 해 안거 때 도리천궁으로 가셔서 마야부인에게 석 달간 법을 설하고 하강하셨다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후 아쇼카 왕은 이곳에 석주와 대규모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nbspnbspnbsp예불을 마치고 이어서 스님은 10대 성지순례를 무사히 마친 대중들을 위해 간절히 축원 및 발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순례한 인연공덕으로 한반도의 평화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발원하는 스님의 모습에 순례객들도 합장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했습니다.nbspnbsp발원 기도 후 스님은 다른 성지에서 했던 것과는 달리 해탈주 삼독을 함께 하자고 했습니다. 이곳은 부처님이 어머니의 은혜를 갚고자 했던 의미가 있는 곳이어서 우리들도 돌아가신 부모님과 조상 영가님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하자는 것이지요.nbspnbspnbsp이어서 스님은 상카시아 성지가 갖는 의미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저희가 도착한 이곳이 부처님의 8대 성지 가운데 8번째 성지인 상카시아입니다. 인도말로는 ‘상키사’라고 부릅니다. 유래는 이렇습니다. 부처님께서 어느 해 안거철에 어디에도 안 계셨다고 해요. 그래서 부처님이 어디 계시나 싶어서 모든 제자들에게 물어봐도 부처님과 안거를 같이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중들은 목련존자가 신통 제일이니까 목련존자에게 부처님이 어디 계신지 알아봐 달라 부탁했습니다. 목련존자가 신통으로 온 우주를 살펴보니까 부처님께서 도리천에 계셨어요.nbspnbspnbsp부처님의 어머니 마하 마야대비는 부처님이 태어나고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어요. 나머지 대중은 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해탈을 얻었는데 어머니는 먼저 돌아가셔서 이 좋은 법을 만나지 못하셨잖아요. 비록 복을 지어서 천상에는 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해탈은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도리천에 계신 것을 보고 부처님께서는 그곳으로 가서 설법을 하셨습니다.nbspnbsp부처님이 안 계시자 부처님을 너무 그리워한 대중들이 목련존자에게 ‘그럼 부처님이 언제쯤 오시냐?’ 묻자 ‘안거 끝나고 오신다’고 대답했습니다. 어디로 오실 것인지 여쭤보라고 하자 다시 목련존자가 가서 여쭈었더니 ‘상카시아 성 밖으로 오겠다’고 대답하셨다 해요. 저기가 상카시아 성인데 여기가 성 밖이예요. 그 때가 9월 보름이었어요. 인도 달력으로는 7월 보름입니다. 그래서 보름이 되자 이곳에 많은 대중들이 모여들었다고 해요. 부처님을 가운데로 모시고, 인드라신과 범천 즉 브라만 신이 옆에 시립을 해서 하강을 하셨어요. nbspnbsp그래서 이 모습을 표현한 조각에는 항상 계단이 세 개가 새겨져 있습니다. 하늘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는 것을 표현한 겁니다. 그리고 가운데에 부처님이 계시고 양쪽에 두 신이 있는 모양입니다. 조각에 부처님의 얼굴을 새기기 전까지는 계단의 가운데에 부처님의 발자욱 두 개를 새겨 놓았어요. nbspnbsp▲ 상카시아스투파 앞에 모셔진 조각. 부처님의 하강 모습을 표현.nbspnbsp nbsp이 때 어떤 비구니 스님이 자신이 맨 앞에서 부처님이 내려오시는 것을 가장 먼저 마중했다고 했어요. 그래서 절을 하면서 ‘부처님, 제가 첫 번째로 마중을 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부처님께서 ‘아니다’ 그러셨어요. 비구니 스님이 주위를 아무리 돌아봐도 자기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 그렇게 얘기하시니까 ‘그럼 누가 먼저 부처님을 마중했습니까’ 하니 부처님께서 ‘수보리가 가장 먼저 나를 보았느니라’ 하셨어요. 그런데 수보리는 그 때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영축산에 있었거든요. 수보리는 명상을 하다가 부처님을 뵈러 가려고 일어났는데 그 때 제법이 공한 도리를 깨쳤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 도로 앉았는데 이것을 부처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수보리가 가장 먼저 나를 봤다’고 하신 겁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법을 보는 자 나를 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육신을 보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보는 자가 나를 본다는 뜻입니다.nbspnbsp그리고 부처님은 열반에 드실 때도 이런 말씀을 하셨죠.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이니라.’ 이런 말씀 때문에 금강경에도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모두 다 진리를 보는 자가 여래를 본다는 얘기와 같은 뜻입니다.nbspnbsp그런데 아직 저도 도대체 어떤 사건이 있었기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는지는 확실하게 잘 모르겠어요. 연구가 좀 더 되어서 어떤 사건이 이런 식으로 표현되었는지 밝혀보아야 할 것 같아요. 물론 신앙적으로는 당연히 부처님이 천상에 올라가셨다가 내려오셨다고 얘기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인류문화사적으로 보면 어떤 스토리가 이렇게 변한 것인지는 앞으로 우리가 더 연구를 해봐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nbspnbspnbsp다만 브라만 신과 인드라 신이 부처님을 시립했다고 하는 것은 깨달은 자 ‘붓다’가 신들의 위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붓다가 처음 깨달음을 얻었을 때도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났다’ 고 하셨잖아요. 또 태어나실 때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라고 표현된 부분, 또 여래의 10대 명호 중에 ‘천인사’, 즉 사람과 신들의 스승이라고 표현한 것 등을 보면 인도인들은 신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는데 깨달은 자, 붓다는 신들의 스승이 되는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인도에는 700만의 신이 있다고 할 정도인데, 그 당시 인도에서 최대의 신이 인드라신과 브라만신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두 신이 부처님을 시립하고 옹호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도의 불교는 신을 부정하지 않고 그 모든 신이 부처님을 옹호한다고 해서 불법을 옹호하는 호법 선신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종교의 신앙이나 믿음을 존중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믿음과 신앙으로는 해탈할 수가 없다는 점은 분명히 한 것이죠.nbspnbsp각자 자기 신앙을 갖는 것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카톨릭 신자나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불법을 공부하는 데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부처님을 믿고 불법을 공부해도 되고, 하나님을 믿고 불법을 공부해도 되고, 종교 없이 불법을 공부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불법은 일반 종교와는 차원이 다른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기존에 있던 여러 종교들과 갈등을 빚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도 대웅전 옆에 칠성각, 산신각을 지어서 각자의 전통 신앙을 믿을 수 있게 해주었잖아요. 그것처럼 저도 만약 서양에 가면 법당도 짓지만 그 옆에 성당도 하나 지어주고, 교회도 하나 지어주어서 각자 자기 신앙을 믿게 해줘야겠죠. 즉 남의 신앙에 대해서는 좋으니 나쁘니 하는 이야기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개인의 자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nbspnbspnbsp다만 여기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스님으로 출가한다는 것은 가족 관계에서는 굉장히 불효가 되잖아요. 애지중지 키워 놓았는데 자식이 출가를 해버리면 부모 입장에서도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요. 부인 입장에서도 남편이 출가를 하거나, 자식 입장에서도 부모가 출가를 하면, 얼마나 무책임하게 느껴지겠어요. 좋게 말하면 출가란 정으로 묶여 있는 인간 관계를 뛰어 넘어서 일체를 평등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을 존중하기 때문에 나만, 내 가족만 위하는 태도를 넘어선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진리가 좋더라도 이런 것이 당시에 사회적으로 전파되는 과정에는 갈등 관계가 생길 수밖에 없었겠죠. 특히 우리 나라의 경우 효사상이 크니까 더 심했습니다.nbspnbsp그래서 상카시아의 설화는 ‘부처님의 출가가 불효가 아니다’, ‘출가가 가족 관계를 부정한 개념이라기 보다는 정에 매여서는 안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는 것을 알려준다고 볼 수 있어요. 부처님도 출가하고 성도하신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친척들을 다 출가시키고 해탈하도록 하셨잖아요. 우리 나라에서처럼 유교문화에서는 효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출가가 문제가 되었는데, 인도 문화에서는 출가 자체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상카시아에서 이런 설화가 나온 것을 보면 가족 관계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아우르려고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nbspnbspnbsp모든 것을 다 끊어버릴 수 있어도 부모의 정은 끊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수행자가 되어 절에 들어와 있어도 마음 깊숙한 곳에는 부모에 대한 정이 다 남아 있어요. 이렇게 부모의 정이 남이 있는 것이 사실 수행에는 굉장히 장애입니다. 그러니 자식이 성년이 되거나 출가를 하게 되면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 정을 좀 끊어줘야 해요. 그래야 자식이 자기 뜻대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왜 자꾸 자식에게 끈을 묶어서 옭아매려고 해요? 평생 동안 투자한 것 찾아먹으려고 그러는 거예요? nbspnbsp그래서 제일 좋은 것은 은혜를 안 입는 것인데 부모의 은혜는 안 입을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 은혜 조금 줬다고 평생 따라다니면서 ‘내가 너를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하잖아요. 불자라면 이것을 좀 풀어주셔야 해요. 스무 살까지는 보살펴주고 스무 살이 넘으면 정을 탁 끊어서 자유롭게 살도록 해주세요.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살더라도 서로를 너무 속박하지는 말자 이런 얘기입니다.nbspnbsp그러니 이런 의미가 깃든 곳에서 순례를 마쳤으니 불보살님과 천신들에게도 감사해야 하지만 조상님들께도 감사해야겠죠? 그래서 방금 전에 해탈주를 함께한 것입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안 입은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어요? 스님도 이런 말을 해도 어릴 때 부모님이 젖 먹이고 밥 먹이고 옷 입히고 해주었으니까 자랄 수 있었던 거잖아요. 부처님도 아무리 부처가 되었어도 부모님의 은혜는 갚아야 했겠죠. 부처님이 부모님의 은혜를 갚은 방법은 무엇이었겠어요? 바로 설법을 해서 깨우쳐주는 것이었습니다.nbspnbspnbsp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도 바로 이곳에서 부모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의 은혜’ 노래를 함께 불러 볼까요?”nbsp“네”nbspnbsp스님의 제안에 따라 다함께 ‘어머님 은혜’ 노래를 불렀습니다.nbspnbspnbsp“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은혜는 가이 없어라.” nbspnbsp많은 순례객들이 갑자기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거나, 조용히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nbspnbspnbsp머나먼 이국 땅에 와서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니 그 마음이 더 애틋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부모님의 은혜는 아무리 헤아려도 그 은혜가 한량이 없겠죠.nbspnbsp스님의 설명이 끝나고 경전을 함께 독송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성지순례의 마지막 경전 독송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지순례를 마치면서 전법을 다짐하기 위해 부루나존자의 전법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부루나존자는 아주 거칠고 사나운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도 기꺼이 들어가서 전법을 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순례객들은 그 내용을 가슴에 새기며 우리도 이 좋은 법을 널리 전할 것을 다짐했습니다.nbspnbspnbsp다시 버스를 타고 5분 쯤 가니 스님이 상카시아 석가족을 위해 담마센터를 지어주려고 마련한 부지가 나타났습니다. 아직 담마센터는 지어지지 않았고 주위에 벽만 네모나게 둘러쳐져 있었습니다. 순례단 일행이 부지 안으로 들어서자 많은 석가족 청년들이 나와서 환영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스님은 짧게 이곳 부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 상카시아 담마센터 부지nbsp“이곳은 상카시아 석가족들을 위해서 담마센터를 지어주려고 저희가 사놓은 부지예요. 제일 안 쪽은 숙소와 학교를 짓고, 가운데에는 수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홀을 만들고, 입구에는 상카시아스투파를 재현해서 지어주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nbspnbsp저희들이 방금 전 참배한 상카시아스투파가 석가족 불자들과 힌두교 브라만들 사이에 분쟁이 좀 있어요. 석가족들은 불교 탑이니까 자기들이 관리하겠다고 하고, 브라만들은 ‘무슨 소리냐. 우리가 조상 대대로 여기서 기도해 왔는데’ 이러고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싸우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내가 지어줄게’ 이랬거든요. 그런데 아직 못 지어주고 있어요. 돈도 돈이지만 공사할 사람이 없어요. nbspnbsp이 앞에 계신 분들이 모두 석가족 청년들입니다. 제가 전정각산에 앞에 수자타아카데미를 처음 세웠을 때 여기 있는 청년들이 와서 학교를 운영했어요. 다함께 인사를 하겠습니다. 나마스떼.”nbspnbsp이곳에 오겠다는 한국인 책임자가 아직 없어서 담마센터가 지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참 안타깝게 들렸습니다. 누군가가 인도불교 부흥을 발원하며 이곳에 오기를 간절히 기원해 보며 담마센터 부지를 돌아서서 나왔습니다.nbspnbspnbsp원래는 이곳 부지에서 매년 회향식을 했는데 오늘은 날씨가 춥다며 석가족 청년들이 담마센터 부지 옆에 있는 법당 안에서 회향식을 할 수 하도록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순례객들은 모두 법당으로 이동했습니다.nbsp법당 입구로 들어서자 석가족 청년들은 순례객 한 명 한 명에게 환영의 의미로 꽃목걸이를 걸어주었습니다. 스님이 맨 먼저 입장하자 스님에게는 엄청나게 큰 꽃목걸이를 걸어주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습니다.nbspnbspnbsp두 사람이 스님의 꽃목걸이를 부축하는 가운데 스님이 먼저 앞으로 가자 뒤이어 순례객들이 법당 안으로 들어섰습니다.nbspnbspnbsp삼귀의 반야심경을 봉독하며 드디어 제27차 인도 성지순례 회향식이 거행되었습니다.nbspnbsp▲ 제27차 인도 성지순례 회향식nbspnbsp스님은 순례단으로부터 청법가와 삼배를 받고 순례를 회향하는 마음 자세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우리는 부처님이 처음 법바퀴를 굴리신 바라나시 사르나트, 초전법륜 성지에서 구리가장자처럼 삼귀의 오계를 받고 가사를 수한 후 10대 성지를 하나하나 발로 밟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면서 또 거기서 설해진 경전을 읽으면서 순례를 했습니다. 부처님이 천상에서 하강했다고 하는 오늘 이곳 상카시아를 끝으로 이제 순례를 마치게 되었습니다.nbspnbspnbsp한국에서 출발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난 15일 동안 여러분 모두에게 주어진 조건은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곳에서 자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행동을 하는 등 똑같은 조건에 있었음에도 각자가 얻은 소득은 조금씩 다 다릅니다. 처한 환경이 달랐다면 몰라도 똑같은 환경 속에 있었음에도 우리가 얻은 소득이 각자 다르다면 그것을 우리는 자기 업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그릇에 따라서 얻은 소득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이 그릇을 앞으로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이 좋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그릇에 행복을 담을 수도 있고 불행을 담을 수도 있습니다. 그 그릇을 가볍게 할 수도 있고, 무겁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하는 것입니다.nbspnbsp그런데서 여러분들이 15일 간 순례를 한 인연 공덕으로 삶이 가벼워지고 더 기뻐지고, 나만을 생각하는 삶에서 가족, 이웃, 나라, 인류, 만생명을 생각하는 쪽으로 조금 넓어지거나, 그저 먹고 입고 자는 것에 급급하는 데서 해탈과 열반 쪽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깊이가 깊어지거나, 이런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그래서 순례한 이 시간과 경비가 아깝지 않도록 결산을 잘 해나가시기 바랍니다.nbspnbspnbsp어떤 분들은 ‘저는 별로 감흥이 없었는데 어떡하죠?’ 이런 질문들을 해요. 감흥이 없었던 것은 나쁜 것이 아니에요. 감흥이 없었으면 감흥이 없는 것이 현실이고, 기뻤다면 기쁜 것이 현실이에요. 그 어떤 것도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눈물이 안 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눈물이 날 것이라는 내 기대에 안 맞은 것일 뿐입니다. 눈물이 나야 할 이유도 없고, 감흥이 커야 할 이유도 없고, 감흥이 없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떤 반응이든 내 업식에 따라서 일으킨 반응인데 내 업식에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나는 이런 업식이구나’ 하고 다만 알아차릴 뿐이어야 합니다.nbspnbsp제가 3호차를 타고 왔는데 한 거사님이 나누기를 하면서 여기 와서 다른 건 몰라도 담배라도 하나 끊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가 순례를 하면서 중도를 배웠잖아요.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해서 피우면 쾌락이고, 피우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면 고행이 됩니다. 내가 얼마나 더 참을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피우고 싶어하는구나’ 이렇게 다만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피우고 싶다고 해서 피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피우고 싶은 것을 이를 악 다물고 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하는구나’ 알아차리면 됩니다. 피우고 싶어 하는 이유는 습관이 되었기 때문에, 즉 중독성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업이 주인인 것입니다. 습관이 하자는 대로 내가 따라다니는 것이죠.nbspnbspnbsp그러니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겠다. 습관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되겠다. 습관을 따라가지 않으니 이 습관이 난동을 부리는구나. 자기 하고싶은 대로 못하게 한다고 난리를 치는구나.’ 이렇게 다만 알 뿐이어야 합니다. 담배를 피워야 한다, 안 피워야 한다, 좋다, 나쁘다, 자꾸 이렇게 접근하지 말고, ‘이 욕구를 안 들어주니 다른 것으로 시비를 해서 불평불만을 만드는구나. 몸을 아프게 만드는구나. 30년 피운 것도 이렇게 난동이 심한데 몇 생을 습관들여 온 것은 얼마나 난동이 심하겠느냐.’ 이렇게 다만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nbspnbsp거기에 끌러가면 노예가 되고, 그것을 억압하면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니 다만 알아차리고 내버려 둡니다. 난동을 피우면 난동을 피우는대로 그냥 놓아두면 시간이 흐르면 제풀에 꺾여서 나가 떨어집니다.nbspnbspnbsp그러니 여기 와서 당장 업식을 바꾸거나 고치지는 못할지라도 지금까지 내가 노예로 살았던 그 업식에 내가 어떻게 대응을 할지 터득해서 이것 하나는 계속 연습을 해나가야 합니다. 비록 연습을 하다가 실패해서 업식을 따라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시도해 보고 또다시 시도해 봐야 합니다. 누에고치가 자기 입에서 난 실로 고치를 만들고 그 속에 갇혀서 답답하게 살아가듯이 내가 지은 업식에 내가 갇혀서 평생 감옥살이를 해왔는데, 누에고치가 나비가 되어 그 구멍을 뚫고 훨훨 날아가듯이 이제 여러분들도 업식의 굴레를 뚫고 자유롭고 행복한 해탈과 열반을 목표로 그 길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nbspnbsp오늘 가사를 반납하게 되지만, 수행이 무슨 가사에 있겠습니까. 그러니 순례를 하는 기간 동안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되겠다 하는 이치를 알았다면 이것이 큰 소득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성지순례를 한 인연공덕으로 더 행복해지고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길 바랍니다.nbspnbspnbsp사실 고생한 건 별로 없잖아요. 잘 놀았으니까요. 그럼에도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하는 말로 인사를 드립니다.” nbspnbsp스님이 격려 말씀에 모두들 크게 웃으며 기쁜 마음이 되었습니다. 비록 성지순례는 이렇게 끝이 나지만 수행자로의 삶은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nbspnbsp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곧이어 가사를 반납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다함께 삼배를 하면서 ‘그동안 출가수행 잘했습니다. 밖에 가서도 수행 잘하겠습니다.’ 하고 다짐을 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순례객들이 호궤합장을 한 상태에서 수계식 때 받았던 가사를 고이 접어서 머리 위로 올리니 각 조별로 법사님들이 지나가면서 가사를 받았습니다.nbspnbspnbsp가사를 여법하게 반납하는 대중들을 보며 스님은 “불가에서는 일곱 번까지 출가를 거듭할 수 있다”고 하면서 웃었습니다. 언제든 다시 출가를 하라는 말씀이었는데, 아마도 가사를 벗을 때의 시원섭섭한 마음을 달래주려 하셨나 봅니다.nbspnbsp이어서 순례객들은 13일 동안 성지순례를 안내하고 진행해 준 법사님들께 감사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각 차량을 담당한 차장님들, 조원들을 위해 머슴 역할을 톡톡히 해준 조장님들, 실무 스텝들이 차례로 일어나자 역시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nbspnbsp▲ 순례를 안내해 준 법사님들께 감사의 박수를 보내는 순례객들nbsp모두들 아쉬움이 컸는지 서로를 부둥켜 안으며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15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24시간 고락을 함께했기에 정이 많이 들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사홍서원을 끝으로 회향식을 마친 후 법당 밖으로 나오니 석가족 청년들이 준비한 성지순례단 환영 행사가 조촐하게 열렸습니다. 이미 마당에는 석가족 청년들이 따뜻한 짜이와 식빵, 사브지를 정성껏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nbspnbsp순례단은 짜이와 식빵, 사브지를 맛있게 먹으며 추위를 녹였습니다. 석가족 청년들은 “날씨가 추우니 짜이를 일인당 세 잔씩 마셔야 한다”고 하면서 웃음을 보였습니다.nbspnbspnbsp상카시아에는 전 인도에서 석가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데 약 200만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대부분 힌두교이고 절도 없고 해서 스님은 오래 전부터 이곳 석가족 집성촌 마을에 불상 점안식을 해주고 법회와 수련도 일 년에 한 차례씩 해오고 있습니다. 스님은 순례객들에게 석가족 청년들의 불교 부흥 활동에 많은 후원과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습니다.nbspnbsp이어서 석가족 청년들을 대표해서 수바스지가 순례단을 환영하는 인사말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 석가족 청년회 대표 수바스지nbsp“한국에서 이곳까지 오셔서 성지순례를 무사히 마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환영하기 위해 멀리서 석가족들이 왔습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대부분 자녀들, 부인들과 함께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nbspnbsp법륜 스님이 인도를 방문하셔서 25년 전부터 이곳에 석가족들을 위한 절도 지어주시고, 법문도 해주시고, 많은 지원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매년 한국인들이 이곳에 방문해주시는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전에는 1년에 한 팀씩 방문하셨는데 이번에는 세 팀씩 나뉘어서 와서 더 기쁘고 좋습니다.nbspnbsp짜이와 음식을 정성껏 준비했으니 맛있게 드세요. 성지순례를 마치셨으니 보다 더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nbspnbsp수바스지의 환영 인사에 순례단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며 응원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nbsp이 때 수바스지의 부인이 갑자기 보여서 스님이 덧붙여 소개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여기 옆에 분이 수바스지의 부인이에요. 수바스지는 20대 때 저를 만났어요. 제가 인도 불교 부흥을 위해 평생을 바칠 사람은 손을 들어라고 할 때 손을 든 사람이에요. 그런데 평생을 안 바치고 이 부인한테 장가를 갔어요.nbspnbspnbsp그래서 제가 이 부인한테 ‘남편이 나와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남편을 나한테 줄래? 아들을 나한테 줄래?’ 물으니까 자기 남편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안 되고 3년 후에 준다고 대답했어요.” nbspnbsp스님과 수바스지 가족의 재미있고 깊은 인연에 모두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석가족 청년 한 사람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소개가 될 때마다 큰 박수가 쏟아졌습니다.nbspnbsp그리고 스님은 석가족 청년들에게 인도불교 부흥을 위한 일에 사용하라고 보시금을 전달하면서 그 취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저는 뭐든지 공짜로 주는 것은 없습니다. 항상 반반씩 함께 참여하도록 합니다. 자기들이 절을 지으면 저는 불상을 기증하고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래서 동네마다 절을 짓고 있어서 제가 매년 인도에 올 때마다 점안식을 해주거든요.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불상 값을 기증하도록 하겠습니다.” nbspnbsp석가족 청년들은 보시금을 받은 후 감사 인사를 하면서 자신들도 스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면서 건넸습니다. 석가족들은 인도 과자 세 상자와 숄을 스님에게 전달했습니다.nbspnbspnbsp소박한 선물에 순례객들은 웃으며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nbspnbspnbsp웃고 박수를 치면서도 순례객들은 스님이 발원한 인도불교 부흥 사업이 이 석가족 청년들을 시작으로 활짝 꽃피우기를 간절히 기원해 보았습니다. nbspnbsp이렇게 석가족들과 순례단이 서로 조금씩 친해져갈 무렵, 이제는 행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석가족들은 아쉬운 마음이 컸는지 다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습니다. 왁자지껄한 가운데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법당을 나왔습니다.nbspnbsp▲ 석가족과 정토회 성지순례단 모두 함께nbsp옛날 고구려, 백제, 신라 시대에는 인도 승려들이 우리 나라에 불교를 전하러 왔었는데, 1700여 년이 지난 지금 인도에는 불교가 거의 사라지고, 이제 다시 우리들이 인도 사람들에게 불교를 전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 사실이 참 묘한 인연처럼 느껴졌습니다. 은혜를 받고 다시 그 은혜를 갚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nbspnbsp아쉬움을 뒤로 하고 석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한 후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숙소에서는 저녁 식사로 라면을 조별로 끓여 먹었습니다. 성지순례 기간 때 먹는 라면 맛은 천하일미였습니다.nbspnbspnbsp식사 후 저녁에는 성지순례 회향의 기쁨을 다시 상기하며 조별로 마음 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서로 정이 많이 들었나 봅니다. 나누기가 진행되는 방마다 웃음과 박수가 끊이질 않았습니다.nbspnbsp▲ 성지순례를 회향하며 조별 마음나누기 시간nbsp내일은 각자 방에서 새벽 5시에 예불과 기도를 한 후 6시에 아그라를 향해 출발합니다. 이제 성지순례를 모두 마쳤기 때문에 아그라에서는 타지마할과 아그라포트 등을 구경하며 순례자가 아닌 여행객이 되어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nbspnbsp ※ 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nbsp쉽고 명쾌한 강의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시면 법륜 스님과 함께 떠나는 인도 성지순례에도 우선적으로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nbspnbspnbsp nb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