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소식

삐따기 이이화님의 역사강좌
6월 5일 정토회관 3층 강당 민족의식과 민중의 삶 :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오시기 전 읽으면 도움이 됩니다. 아래의 자료는 http://user.chollian.net/~hjbonghjbong/lee/lee.htm 여기서 가져왔습니다. 그는 평생을 삐딱하게 살아왔다. 남이 다 가는 넓은 길에서 튕겨나와 좁고 가파른 길로 멀리 돌아왔다.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재야사학자란 명칭의 ‘재야’가 그걸 뭉뚱그려 드러낸다. 한마디로 대학졸업장이 없고 학위가 없는 그가 명문대 정통코스를 거쳐 줄을 잘 선 보수적 사학자들 사이에서 빛나는 건 이런 남다른 ‘삐딱이 정신’ 때문이다. 그 정신은 때론 높은 사회 벽에 부딪혀 콤플렉스로 불거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기존 학계에 도전하는 반골기질로 그의 몸을 단련시켰다. 주역 사상의 대가였던 선친 “내가 정상으로 밟아온 게 하나도 없어. 어릴 땐 집에 돈이 없어 학교를 못 다녔지만 나중엔 갈 수 있어도 안 갔어. 꼭 그놈의 학위를 따야 하나 싶더라구. 학위증 내놓고 글 쓰는 건 아니잖아.” 재야사학자 이이화(61)씨는 후배들 사이에서 작은 거인으로 통한다. 158㎝에 48㎏, 작은 몸 어디에 그런 깡다구가 있나 싶게 그는 말힘, 글힘이 세다. 2000년 초에나 완간될 예정인 24권짜리 <한국사 이야기>(한길사 펴냄)를 내놓기 시작한 요즘, 그는 다시한번 그 삐딱이 정신을 가다듬고 있다. “처음에 책을 24권이나 쓴다 하니까 정신이 바짝 들더라구. 내 잘 모르는 고대까지 두루 훑어야 하니 마음을 독하게 먹었지.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내가 사회활동을 딱 끊기로 결심한 거야. 기왕에 나와있는 책보다 뛰어나지 못할 바엔 쓰지 말자, 하는 각오로 홀로 의병처럼 전북 장수 산골로 숨었지. 장수가 겨울에 굉장히 추운 곳입디다. 바닥에 누우면 벽에서 바람소리가 ‘솨아’ 나면서 귓볼이 떨어지고 손이 곱아 책장이 잘 안 넘어가. 그런 땐 조선 실학자들을 생각했어요. 글 하나 잘못 쓰면 옥에 가고 밥 굶고. 그렇다고 자기 글이 언제 세상 빛을 볼지 기약없어도 죽어라 공부하고 글쓰던 그 사람들에 비하면 난 얼마나 행복한가. 참자, 견디자, 했지.” 한 2년쯤 지나선 김제 월명암으로 옮겨 고시생들이 쓰던 1평 반짜리 골방에서 원고를 썼다. 누워서 자료를 뒤지다 지루해지면 선친을 떠올렸다. 주역 사상의 대가였던 야산 이달이 그이다. 물질문명을 거부해 일절 자기 이름의 재산을 지니지 않았던 사람, 평등한 세상을 지향하고 일제에 협력하기 싫어 그를 따르던 이들과 산 생활을 했던 의인. 선친이 그에게 준 건 이름 석자뿐이었으나, 그가 이제껏 만난 사람 가운데 제일 존경하는 분이자 진실로 세속을 초탈했던 도인이었다. “내게 야인 기질이 있다면 그건 선친의 피 때문일 거요. 그분이 일제 식민주의와 서양 제국주의 세력을 결연히 물리쳤으니까. 16살에 가출할 때까지 아버님께 한학을 배웠는데 그게 내 공부의 가장 큰 바탕이 됐어요. 한문 강독을 한국적으로 하셨지. 내가 허균의 개혁사상이나 북벌론을 사상사적으로 검토하게 된 원동력이 바로 아버님의 위정척사론과 후천개벽사상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산 속에서 배고픈 생활을 하며 한학만 익히던 이이화 소년은 한두번 내려가본 도시의 신식문물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작정 산을 내려와 학교에 들어갈 길을 찾았다. “별별 일을 다 하며 입에 풀칠을 했지. 여관 보이 노릇 할 때였는데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었으니까, 남녀가 통금 가까워 들어오는 거야. 둘이 티격태격 좀 소음이 심하겠어. 방음이 전혀 안 되는 여관방에서 공부가 될 리가 없지. 그래 소설만 들입다 읽은 거야. 그래도 그 소설 나부랭이 읽은 덕이 있어요. 쓰는 글이 당대인들이 많이 쓰는 입말로 구수하게 가는 거야. 논문쓸 때 상투적으로 ‘상계서’니 ‘전계서’니 하던 한문투 용어를 ‘위의 책’ ‘앞의 책’으로 내가 처음 고쳐 쓴 것도 이 시절 경험이 커요. ‘생활사’에 애정을 가진 것도 이 시절 남독과 잡독으로 얻은 ‘뽀시락 상식’에서 힘입은 거야. 뽀시락이 뭐냐고? 아 거, 쥐들이 움직일 때 ‘뽀시락’ 소리 나잖소.” 그는 일제식민사학이 우리 역사를 “태정태세문단세”나 외우는 죽어있는 학문으로 오도했다고 했다. 이들을 따르지 않은 나머지 진보사학자들은 북으로 가거나, 아니면 산으로 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역사를 가슴에 품고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다. 80년대 젊은 진보적 사학자들이 모여 만들었던 역사문제연구소(이하 역문연)가 제기하려 했던 것도 이런 시대정신이었다. 아들뻘의 후학들과 역문연을 이끌며 수많은 글을 발표한 그는 특히 동학 100주년 사업과 대중적 역사서 출간으로 청년 역사학도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제 조상 캐는 게 역사가 아니에요. 역사는 근엄해야 해. 역사는 점잖아야지. 컴컴한 연구실 안에서 지들끼리 속닥속닥 즐기는 게 어찌 역산가.” 그는 시인 고은과 소설가 김주영씨가 북한에 갔다는 얘기를 듣고 가슴을 쳤다. “정작 갈 사람은 여기 있는데.” 그는 <한국사 이야기>를 제대로 마무리하기 위해 북한에 가고 싶다고 했다. <한국사 이야기> 24권은 죽을 때까지 그가 등에 업고 갈 짐이 될 모양이다. 쓴 걸 읽어보니 벌써 다시 써야겠다 싶은 부분이 많다고 한다. 그는 “써놓고 고치는 일도 좋은 것이여. 내 죽는 날까지 이 책의 3분의 1 이상은 고칠 생각”이라고 말했다. 잠결에 고대인과 대화 “먼 과거로 돌아가 그때를 산 인간들이 어땠을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부대끼다 보면 생각이 많아. 꿈도 많이 꾸지. 잠결에 고대인으로부터 귀중한 얘기를 들어 ‘이거다’ 무릎을 쳤다가 깨고 나서 다 잊어버린 일도 있어. 장강같이 흐르는 역사의 큰 줄기를 더듬다보면 세상이 하찮게 보여. 아옹다옹 뭘 얼마나 더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저것들이 지랄인가, 욕할 때도 있고. 인간의 지배욕과 권력욕이 참 대단하구나 새삼 놀랄 때도 많지.” 그는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니 이것저것 참 잡문을 많이 썼어. 그게 대부분 역사 속 인물들 얘긴데 여기저기 잡지에서 청탁해 오는 대로 응하다 보니 나중에 한권 책으로 묶기 위해 그렇게 됐어”라며, “난 숨기는 게 하나도 없어”라고 웃었다. 자유직업자로서 먹고 살기 위해 썼고, 그게 역사 대중화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내 이름을 한글로 써놓으면 예쁜 여자 이름 아니오. 어떤 군인이 글만 보고 내게 편지를 썼어. 젊은 여자분이 어쩜 그렇게 역사에 대해 아는 게 많으세요, 하고. 사람들이 이렇게 사람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는 것이여. 환상을 버리시오. 역사에 대해서도 환상을 버려야 해. 개혁의 단초가 거기 있소.” 한겨레21 1998년 07월 16일 제216호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