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첫 번째 어긋남
6일(목요일) 오후에 유수 스님과 각해 보살님, 묘덕 법사님, 청주 법당의 실상화 보살님께서 먼저 도착하셨습니다. 뒤셀도르프에서 마중을 떠난 일행은 서둘렀습니다. 하지만 시내의 교통 정체가 너무 심했습니다. 빙빙 돌아 고속도로에 진입해 시속 180km으로 달렸습니다. 운전자의 눈을 백미러를 통해 뚫어지게 바라보아야만 속이 편해지는 정음성 법우는 연신 계기판을 바라보며 초조해 하였습니다. "천천히 가면 안돼요?" 하지만 운전은 운전대를 잡은 사람 마음대로지요. 결국 멀리서 오신 귀한 손님들이 마중 나온 젊은이들을 기다리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냥 다른 차로 가셔도 되었지만, 엄청난 짐(방석 50장) 때문에 짐 실을 봉고차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지요. 짐 실을 때에는 유수 스님의 노가다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이렇게 첫 날을 보냈습니다.
두 번째 어긋남
다음날 7시 5 분에 법륜스님께서 인도에서 도착하시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당초 계획은 스님이 인도에서 도착하시면 곧장 박 정숙 보살님의 치과에 가서 치료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총영사관에서 영사로 근무하시는 양 계화 보살님은 공항 안으로 들어가실 수가 있어 유수스님과 함께 미리 공항으로 떠났습니다. 이 혜정 보살님은 댁에서 봉고를 타고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15분 일찍 도착했고, 짐이 없어 일찍 나오신 스님은 이혜정 보살님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집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스님의 "지엄하신 명령"에 아무 소리 못하고 양 보살님은 댁으로 차를 몰았고, 몇 분 뒤에 도착한 이혜정 보살님은 "프랑크푸르트에서는 프랑크푸르트의 법을 따라야지, 스님 마음대로 하시면 어떡하냐"고 성토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부터는 스님이 뭐라 하시건 상관없이 프랑크푸르트에서 계획한 대로만 움직이자고 다짐했습니다.
세 번째 어긋남
짐을 푸신 스님은 오랜만에 샤워를 하셨고 저희들은 삼배를 올렸습니다. 삼배를 드린 후 공항에서의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그러자 "아, 그래요? 치과 갑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각해보살님 등 서울서 온 일행과 스님은 2 대의 봉고로 치과로 떠났습니다. 먼저 법륜스님께서 박 정숙 보살님께 속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드렸고, 각해 보살님도 진찰을 받으셨습니다. 각해보살님은 치료가 오래 걸릴 것 같아 다른 분들과 함께 월요일에 본격적으로 치료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시계는 이미 10시를 넘었습니다. 12시에 도르트문트에 도착해야 했습니다. 그곳 박 금초 보살님께서 스님 일행을 점심 공양에 초대하셨거든요. 프랑크푸르트에서 도르트문트까지는 1시간 반이면 닿을 수도 있는(?) 거리입니다. 거리가 250km쯤 되지요. 그러니까 박 금초 보살님이 모는 BMW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시속 백사오십킬로로 달려도 시내 구간까지 합치면 2시간 반은 잡아야 하는 거리. 그러나 시계는 벌써 10시 반을 가리켰습니다. 출발 시간이 1시간은 늦어진 것입니다. 2 대의 봉고차가 도르트문트로 출발했습니다.
네 번째 어긋남
도르트문트를 100km쯤 남겨놓은 지점. 시계는 거의 12시. 정음성 법우가 도르트문트 보살님께 전화를 드려, 12시반이나 1시쯤 도착할 것 같다고 완곡하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사실 초행길이라 시내에서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이거든요. 마침내 도르트문트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표지판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박 금초 보살님이 적어준 지명과 다른 지명이 표지판에 나타났습니다. 도로 번호는 맞는데 표지판 지명이 달라서, '다음에 다시 표지판이 나오나 보다' 하고 그냥 달렸는데 표지판은 나오질 않고, 차는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고, 시간은 없고... 그래서 일단 도르트문트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언제 박 금초 보살님댁에 도착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두 봉고차가 서로 헤어지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제대로 길을 들어섰습니다. 그 다음 지방도로 표지판을 찾아 한참을 달렸습니다. 그런데 이 표지판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시계는 2시가 다 되어갔습니다. 빠져나가야 할 길을 한참 지나 길을 되돌아 왔습니다. 마침내 갈 때는 보이지 않던 도로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그 길로 빠져 나와 또 한 번 두 봉고차의 실세들이 어디로 갈까 논의했습니다. 거의 목적지 근처에 도달했습니다. 길을 가는데 멀리서 손을 흔드는 게 보였습니다. "아, 저기구나!" 2시가 조금 넘어서야 도착해서 늦은 점심공양을 했습니다. 한 시간 정도를 해맸습니다. 선도차를 운전한 제게 뒷 차에 타신 스님은 웃으시면서 "왠 고집이 그렇게 세냐? 길을 모르면 차를 세우고 물어서 가지?" 하셨습니다. '스님 그게 아니고, 지도가 이상하고, 도로 표지판도 이상하고...' 차가 한참 헤맬 때 스님은 곤히 오수를 즐기셨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싶습니다.
다섯 번째 어긋남
공양후 즐겁게 환담을 나누었습니다. 유수스님과는 프랑크푸르트 정관에 대해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원래 계획은 2-3시쯤 공양을 마치고 이비인후과 의사인 박 보살님의 남편인 아이트너 거사님에게 각해 보살님과 법륜스님이 진찰을 받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4시로 늦추어졌습니다. 치료를 받으시러 두 분이 떠나시고, 청년들은 7시의 뒤셀도르프 법회 준비를 위해 4시 반경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6시가 넘어서 뒤셀도르프에 도착했습니다. 또 약간(?) 돌아서 늦어진 것입니다. 1시간이면 될 거리인데... 법회장에 도착하니, 당초에 법회장으로 쓰기로 했던 방을 누군가 쓰고 있어서, 그 옆방에서 법회를 하기로 하고 준비를 했습니다. 그곳은 학교 교실이라 책상을 모두 들어내고, 다른 교실에 있는 의자를 가져 오고, 걸게를 걸고, 법문 테이프와 책을 진열하고... 그러다 보니 스님은 벌써 도착하셨고, 시계는 예정 시간인 7시를 넘어섰고... 7시 20분이 되어서야 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법문 도중 진찰 결과를 말씀해 주셨는데, "고춧가루와 콩에 알레르기가 있으니 김치도 못 먹고 두부도 된장도 못 먹게 생겼다, 알레르기 없는 고기만 먹어야 할 판"이라고 하셨습니다. 쌀에 대해서도 알레르기가 있는지 모르니 검사를 하자는 것을 거부하시고 오셨답니다. 검사를 한 아이트너 거사님은 함께 법회장에 와서 법회가 끝날 때까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묵묵히 앉아 있었습니다. 이번 여름에는 백두산 기행을 스님과 함께 할 예정이랍니다.
여섯 번째 어긋남
스님의 법문은 끝날 줄을 모릅니다. 이런 경험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왜 시간을 7시에서 9시까지라고 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학교 관리인이 법문 도중에 와서는 언제 끝나는지를 물었습니다. '스님께 물어보세요' 할 수도 없는 노릇. 그게 정답이기는 하지만... 10시경에 법문과 질의응답이 끝나고 법회를 마쳤습니다. 학교 관리인이 다시 와서는, "강의장 몇 시까지 빌렸지?"하며 따지듯 묻습니다. "미안해, 30분만 있으면 다 정리하고 갈 거니까, 봐 줘"했습니다. 어깨를 툭 치며 알았다고 갑니다. 걸게를 걸 끈도 충분하지 않았고, 끈을 자를 칼도 없고, 책걸상 정리에 걸리는 시간도 고려하지 않았고 법회시간이 길어질 것에 대해서도 대비하지 않았고... 그 날 법회를 준비하면서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다음부터는 강의장도 제대로 된 것을 빌리고, 준비도 제대로 해야겠다, 작은 것 하나 소홀히 함으로써 법회 전체 준비에 차질이 오게 되는구나' 등등
일곱 번째 어긋남
여독이 풀리지 않으신 각해 보살님은 저녁 공양 준비차 법회 도중 미리 댁으로 떠나신 이 상호 거사님 부부를 따라 가셨습니다. 법회가 끝난 후 두 분 스님과 실상화 보살님은 이재욱 거사님의 차로 먼저 숙소인 이상호 거사님 댁으로 떠났습니다. 정리를 다 하고 남은 이들은, 다음날 뮌헨으로 떠날 봉고차로 미리 짐을 옮겨 실은 다음 두이스부르크의 이 상호 거사님 댁으로 떠났습니다. 이번에는 헤매지 않고 '단칼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스님을 모신 차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상하다고 의아해하고 있는데 차가 한 대 도착했습니다. 스님이 타신 차였습니다. 그 차에는 네비게이터라는 장치가 있습니다. 그러니 길을 몰라도 걱정이 없지요. 그런데 워낙 빨리 달리다보니 기계가 "우회전하세요" 하는 말이 나오면 이미 차는 그 길을 지나친 후가 되고 말지요. 고속도로에서 그렇게 한 번 길을 지나치면 수십 킬로미터를 돌아야 하지요. 그래서 또 30여분 정도 '헤맨 끝에' 집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재욱 거사님은 초범(?)이 아닙니다. 이상호 거사님 댁을 여러 번 오셨으면서도 오실 때마다 실수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2001년 2월 순회법회 때도 그런 적이 있거든요. 하지만 젊은 저희들도 깜박깜박하는데 고희를 바라보는 이 재욱 거사님의 그런 실수가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더 이상의 어긋남은 없다
여덟 시에 뮌헨으로 떠날 예정이었습니다. 700킬로의 거리라 적어도 7-8시간을 잡아야 하고, 법회는 5시에 시작하기로 되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늦게 잠을 잤고, 아침 공양과 환담이 이어지다 보니 출발이 9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새로 운전대를 잡은 법광(신 관섭) 거사님은 자타가 공인하는, 길 눈이 트인 분이고, 동행하는 임 경원 법우는 뮌헨에서 7 년 공부한, '토박이'라 할 만큼 그곳 시내 지리를 잘 알아 별 걱정이 없었습니다. 이 상호 거사님 댁에서는 천일 결사 입재자들을 위한 각해보살님 친견 법회가 열리고, 뮌헨 법회 준비팀은 9시에 뮌헨으로 내려갔습니다. 스님은 친견법회후 비행기로 뮌헨으로 떠나시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부지런히 밟은 덕택에, 중간에 박 정숙 보살님이 고속도로 휴게소까지 가지고 오신 김밥과 떡으로 천천히 점심을 먹고도 4시쯤에 뮌헨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복잡한 시내를 지나 법회장에 도착하니 법회장 입구에는 스님의 사진이 칼라로 붙어 있었습니다. 작은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아, 저렇게도 할 수 있었구나'. 칼라 사진으로 법회 광고를 할 생각은 전혀 못했거든요. 신록을 배경으로 환히 웃고 계시는 스님의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습니다. 많은 학생들과 보살님들이 법회에 참석했습니다. 법회장의 크기도 적당했고, 분위기도 매우 좋았습니다. 법문을 마치고 많은 분들이 다과를 함께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녁 9시 반에 프랑크푸르트로 출발했습니다. 중간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뮌헨 보살님들이 준비한 김밥으로 저녁을 먹었습니다. 길눈이 트인 법광 거사님 덕에 400km의 거리를 그것도 야밤에 3시간만에 달려 새벽 1시 반경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운전자의 눈을 감시하는 또 다른 눈이 있었습니다. 내내 감시하는 것은 아니구요, 잠오면 자다가 이야기할 때는 이야기 하다가 제 심심하면 그때서야 감시자의 눈길을 운전자에게 보내는 그 눈 말입니다. 아무 소용도 없는 피곤한 짓을 하는 그 눈. 누구냐구요?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일요일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대중 법회와 수계법회, 천일결사자 친견 법회가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도착하니 이미 거의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습니다. 대중 법회를 마치고, 보살님들이 준비하신 비빔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뮌헨서 오신 보살님은 "역시 절밥이 맛있어" 하셨습니다. 그곳은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자선기관이었고, 우리가 한 달에 2 번 장소를 빌려 법회를 하는 곳이지요. 프랑크푸르트 보살님들 손이 워낙 커서 이번에도 많은 음식이 남았다고 하네요. 공양후에는 수계자들이 불러야 할 노래를 연습했습니다. 성악을 전공하신 법광 거사님 덕에 쉽게 노래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수계 법회를 통해 19명이 새로 5계를 받고 불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직 불명을 다 기억하지 못해 여기서는 몇 분만 불명으로 적었음을 이해해 주시길... 저녁은 한국 식당에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안 은길 거사님의 빽이 통하는 식당이라 음식이 푸짐하고 맛도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매운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저녁에 프랑크푸르트 정토회 정관 문제와 향후 일정문제를 토의하고 순회법회 공식 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일요일 아침에 법륜스님은 미국 뉴욕으로 떠나셨습니다. 공항에 가니 한국과 미국의 축구가 중계되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출국장으로 들어가신 후, 법광거사님과 임 경원 법우는 남아서 축구 승전보를 가져 오기로 하고, 유수스님 등 일행은 치과로 가셨습니다. 유수스님도 박 정숙 보살님께 '시꺼먼 속'을 다 내보이셨고, 묘덕 법사님도, 실상화 보살님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각해 보살님께서는 그렇지 않아도 한국에서 치과 치료를 하셔야 할 상황이었는데, 이번 순회법회 중에 말끔히 치료를 하셨습니다. 너무 잘한다고 칭찬을 많이 해 주셨습니다. 승전보 대신 비겼다는 소식을 가지고 온 두 분과 함께 우동과 짜장면으로 점심 공양을 하고 숙소인 이재명 거사님댁으로 와서 짐 정리를 했습니다.
또 하나 어긋난 게 있었네.
오실 때에는 방석 50장 때문에 대형 여행용 가방 6개에 작은 가방 3개 등 짐이 무척 많았습니다. 이 가방을 다 채우기로 했습니다. 어떻게요? 가방에 가방을 넣으면 가방이 금방 차게 됩니다. 그렇다고 가방에 가방만 넣은 것은 아닙니다. 뭐가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오실 때 가져오신 가방을 다시 다 채웠습니다.(갯수는 많이 줄었지요. 가방 속에 가방이 들어가서) 그런데 한국에 도착하신 묘덕 법사님이 정음성 법우에게 전화를 했답니다. 아침에 커피와 빵으로 공양을 하기로 대중에게 이야기하고 나서 보니 커피가 많이 안보인다고요. 박스 하나를 빠뜨리고 짐을 싼 결과이지요. 다음 인편에 보내는 수 밖에요. 마지막 어긋남이었습니다.
먼 길 오셔서 가르침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연로하신 두 분 보살님께서 무사히 여행을 마치셔서 너무 기쁩니다. 실상화 보살님은 젊은 저희들에게도 힘들 정도의 빡빡한 전체 여정을 빠짐없이 참여하시면서 많은 조언을 주셨습니다. 다음에 언제 이런 기회가 또 있으려나 싶습니다. 하지만 저희들로서는 그런 기회를 많이 만들고 싶습니다. 가르침 주신 모든 분께, 뒤에서 법회를 준비해 주시고 도와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진을 보실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2002년 6월 13일, 법륜스님 독일 순회법회를 정리하며 智山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