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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3남 1녀의 외동딸이라 부모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가족에게 큰소리치고, 밥 안 먹는 것을 무기로 떼를 썼습니다. 저를 매우 예뻐하는 아버지의 힘을 등에 업고 오빠한테 철없이 굴었습니다. 제게 집안일을 시키지 않아 동네 사람들은 설거지라도 시키라고 성화를 부렸지만, 어머니는 그냥 웃었습니다. 우리 집은 웃는 일이 참 많은 화목한 가정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성품이 온화해서 가을 수확 후 농한기에는 이웃들이 우리 집에 많이 모였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오니 저는 참 좋았습니다. 옆에서 어른들 이야기 듣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대여섯 살 때쯤에는 어른들 대화 중에 한마디씩 톡톡 끼어들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너는 가만히 있어라, 시끄럽다.” 하면서 핀잔을 주었습니다. 평소 예뻐해서 잘못이 있어도 그냥 넘어가 주던 아버지가 갑자기 혼내는 바람에 많이 놀랐습니다. 이웃들이 보는 앞에서 무시당한 느낌, 인정받지 못한 느낌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습니다.
그때 처음 사람들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싹텄습니다. 그 일 이후 세상이 두려웠습니다. 마음에 불안함을 키우며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불편한 상황에는 방어만 했습니다.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항상 다른 사람 눈치를 살폈습니다.
어머니는 슬픈데도 웃었습니다. 아버지가 밭에서 일하다 씻지도 않고 방에 들어오면 세숫대야에 물을 떠다 발을 씻기며 웃었고,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도 웃었습니다. 모든 힘든 일을 웃음으로 해결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재혼 이야기가 나올 때쯤, 저는 장남이면서 가장이었던 남편과 서둘러 결혼했습니다. 남편의 존재만으로 의지가 되었기에 맏며느리의 무게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시집에서 보낸 신혼생활 3년은 가슴이 답답하고 막막했습니다. 결혼 당시 막내 시동생은 5학년이었고 다른 시동생들도 모두 학생이라 남편 월급만으로 생활했습니다. 임신한 몸으로 새어머니가 있는 친정으로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주위에 편안하게 찾아갈 곳이 없어 밤이면 시집 동네를 배회하다 비닐하우스에 웅크리고 있기도 했습니다. 시집 방문은 늘 열려 있고, 넷이나 되는 시동생들은 이방 저방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임신한 몸으로 씻는 것도, 옷 갈아입는 것도 불편하고 힘들었습니다.
하루는 남편과 외식하고 참외를 사 들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시집에 가까워질수록 똑같은 생활의 반복이 두렵고 갑갑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문득 검정 비닐 안에 든 참외가 눈에 띄었습니다. 자동차 창문을 열고 참외를 하나 던졌습니다. 속이 조금 후련했습니다. 불만을 얘기하면 남편은 참으라고만 했습니다. 참외를 또 던졌습니다. 숨쉬기가 조금 편해졌습니다. 남편이 안 된다고 할 때마다 참외를 하나씩 던졌습니다. 마지막 하나까지 다 던졌습니다. 희열을 느꼈습니다. 저를 내던질 수는 없으니 참외를 대신 던졌습니다.
아들 둘이 연년생이라 둘째 아이는 시어머니가 데리고 자는 날이 많았습니다. 둘째가 21개월쯤 되었을 때 시어머니가 새벽 농사일을 나간 사이 아이가 할머니를 찾으러 방 밖을 나갔다 사고가 났습니다. 시집과 시동생들에 대한 부담감으로 제 자식 소중한 걸 모르고 살았습니다. 둘째 아이를 잃고 슬픔을 가슴에 묻고 살았습니다. ‘엄마의 역할을 좀 더 잘했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라고 자책했고, 시집에 대한 불평 대신 그저 주어지는 대로 조용히 살았습니다.
큰아들 하나라도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이 더했습니다. 아들은 컴퓨터 게임을 좋아해 밤 9시가 넘어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피시방을 찾아다니며 술래잡기를 했고, 아이를 이해하기보다 제 식대로 하니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게임학과로 진학해 지금은 관련 직장에 취직했습니다. 한 발짝 뒤에서 바라보면 있는 그대로 괜찮은데 제 틀에 맞추다 보니 서로를 괴롭혔습니다. 부모의 역할은 다만 지켜보고 격려할 뿐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사춘기 중학생 시절, 음악과 과학 시간에는 얼굴을 마주 보게 책상을 배치하고 수업했습니다. 맞은편 친구들이 다들 저만 쳐다보는 것 같고, 모든 눈이 저에게만 쏠린 듯해 쑥스럽고 부끄러웠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노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불안감이 올라오면 겁을 먹었습니다. ‘내가 또 불안하구나’. 불안한 걸 알면 더 불안했습니다. 이럴 때 “너 왜 얼굴이 빨개져?”라고 누가 물으면 더 안절부절못했습니다. 한때는 집에서 발소리만 들려도 불안했습니다.
명상을 꾸준히 하면 불안감이 적어지고 자신의 업식을 알아차린다는 법륜스님의 말씀에 일요 명상과 4박 5일 명상을 꾸준히 했습니다. 어느 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너 얼굴 빨개진다, 빨개진다.” 하니 제 얼굴이 정말 빨개졌던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바깥에서 누가 자극을 줘서가 아니라 내가 만든 거였구나! 아무도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내가 이래라저래라 만든 거네! 삶에 대한 두려움을, 내 무덤을, 내가 만들었구나!’
그 깨달음 후 명상 지도를 하는 법륜스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제 귀에 팍팍 꽂혔습니다. 중생을 깨우치려는 그 마음이 오롯이 제 가슴 안으로 들어차 눈물이 났습니다. 누군가 제게 조언이나 지적을 하면 진지하게 들어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저를 공격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어릴 때 아버지에게 들었던 핀잔도 평생 안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제야 보니 아버지의 핀잔은 자식을 사랑하는 한 방법이었을 뿐입니다.
사월 초파일, 허둥지둥 법당에 들어서는데 저만 빼고 우리 기수 도반들이 모두 한복을 입고 봉사했습니다. 그 모습에 저는 무척 당황스럽고 소외된 기분이었습니다. ‘나를 빼? 왜 나만 뺐지? 나를 미워해?’ 총무가 미웠습니다. 서운한 마음에 ‘정토회를 그만 다닐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나는 잘할 거다. 나는 틀림없이 여기서 내 문제를 해결하고 나갈 거다.’라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천도재 행사하면서 허둥지둥하는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내 부족한 부분일 수 있겠다, 내가 이 사람 저 사람, 이 절 저 절, 밖을 기웃거리며 바빴지, 늘 이렇게 한 발만 담그고 있었지.’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숙였습니다.
정토회에서는 실수가 수행과제가 되고, 남들이 무시할까 걱정했던 일은 나누기로 풀 수 있어 좋습니다. 과거에는 남보다 튀고, 인정받고, 꼭 필요한 주인공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지금 바로 웃을 수 있는, 주인공이 아니어도 행복한, 사람이길 바랍니다.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앞장서려면 긴장된다고 법사님에게 질문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앞장서서 잘하도록 도와주고, 남이 잘되는 것을 지켜보라” 이 답을 들었습니다. 제가 원하던 답과 거리가 멀어 당황했지만, 욕심이나 시기심이 생길 때마다 법사님의 말씀을 새기며 돌아보았습니다. 그 모든 것이 내 안에 인정받고 싶은 마음, 상처받을까 두려워했던 마음이 근본 뿌리임을 알고 나니 굉장히 부끄러웠습니다.
수행과제를 해결하고 좋아하는 도반을 보면 저 또한 무척 기뻤습니다. 도반의 즐거움이 제 기쁨이 되는 재미를 조금씩 느낍니다. 지치고 힘들어하는 도반은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그저 있는 그대로 봅니다. 아침 일찍 못 일어나는 도반은 깨워주고, 조금 더 발심할 수 있도록 격려도 합니다. 도반들이 소임을 선뜻 받지 않다가 금방 돌이켜 “가벼운 마음으로 한번 해볼게요”라고 받아줄 때, 기쁨으로 보람으로 남습니다. 주위를 살피고 전법하며 사는 오늘, 더는 애쓰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지금 이대로 고맙습니다.
김경미 님은 어머니 이야기를 하며 제게 물었습니다. “슬픈데 웃는 거 아세요? 슬픈데 웃는 거!” 기사를 쓰는 내내 저는 김경미 님 어머니의 웃음과 함께 했습니다. 온 세상이 다 같이 ‘하하하’ 따라 웃었습니다. 저는 ‘고통이 없어야 웃는 것이 아니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더 크게 웃는 것이다.’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김경미 님의 조용조용한 웃음도 크게 크게 들립니다.
글_곽정란 희망리포터(대구경북지부 구미지회)
편집_도경화(대구경북지부 동대구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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