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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 《달마에서 성철까지》라는 책을 읽고 의문이 들었습니다. 선사들의 문답이 말장난 같기도 하고 수수께끼 같기도 해서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어떻게 의사전달이 가능한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전달되는지 궁금했습니다. 대학생 때는 선사들의 구도와 정진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의문을 풀어보려 했지만 풀리기는커녕 모르겠다, 모르겠다 하는 생각만 강해졌습니다.
제 마음속을 가득 채웠던 의문들은 대학 졸업 후 이른 새벽에 출근하고 늦은 밤에 퇴근하는 직장생활 속에서 서서히 잊혀져 갔습니다. 그러다 장거리 출장길에 우연히 라디오에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었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잊고 있던 의문이 다시 올라왔고, 불교 공부를 한번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동학사를 다녀볼까 하던 차에 2018 정토불교대학 신입생 모집 플래카드를 보고 마감 하루 전에 아슬아슬하게 접수하면서 정토회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경상도 특유의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집안 분위기의 1남 4녀의 맏이로 집안에 대한 책임감을 일찌감치 느꼈습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부모님께 걱정 끼칠까 싶어 말 잘 듣는 아이로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려서는 뭐든 궁금하면 물어볼 형이나 누나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철들면서는 여동생들을 챙기며 지냈습니다. 사춘기를 보내면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다른 사람이 실망하지 않도록 살아가는 것이 내 삶을 무기력하고 의미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고민했지만,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대학 때 대자보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접하며 그동안 왜곡된 사회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받았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 어디까지가 진짜일까, 이렇게 사실을 왜곡해서 아는 것은 범죄와 다름없지 않나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고대사, 중세사, 근현대사 등 역사에 관한 책이나 다큐멘터리 등을 보면서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2018년 불교대학, 2019년 경전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젊었을 때 신비하게 바라보던 불교를 담마로서의 불교와 종교로서의 불교로 구분하면서 비로소 제가 궁금해하던 것이 담마로서의 불교였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불교를 생활 속 불교로 받아들인 것이 가장 중요한 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책에서 읽은 달마대사와 양 무제의 대화도 법륜 스님의 법문을 여러 차례 들으며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관해 제대로 알고 싶다는 막연한 고민도 정토회에 와서 하나둘씩 바른 관점을 잡아가며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고, 어렴풋하던 것들이 뚜렷하게 ‘아, 그렇구나’ 하고 알아졌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아무리 바빠도 주말이면 아내 그리고 두 딸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방으로 1박 2일 여행을 가든지 이것저것 아이들에게 많이 보여주는 게 제 할 일이다 싶어 밖으로 많이 나갔습니다. 학원은 여간해서 보내지 않고 대신 가족이 늘 함께했습니다.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아이들도 각자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하고, 아내도 내심 주말엔 좀 쉬고 싶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저 역시 이제는 저 자신에게 충실한 시간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불교대학 졸업할 즈음 수행 맛보기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일주일가량 새벽에 법당에서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다가 매일 법당에서 새벽정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월 마지막 금요일 저녁에 하는 천배정진도 하다 보니 3년이 되었습니다. 천배정진 후 나누기할 때마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도대체 나는 무엇을 알아가고 있는 걸까? 그냥 막무가내로 하는 건 아닌가'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 되는구나 싶을 때도 그냥 한번 해본다는 마음을 냅니다. 새벽기도 덕분인지 예전에 흘려듣거나 잘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들릴 때가 많아졌습니다.
도반들과 나누기를 하다 보면 그때그때 본인의 마음을 잘 관찰하는 도반도 있지만, 저는 그게 좀처럼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장의 깨달음이 없다 하더라도 꾸준히 나아가고 싶고, 더디 오더라도 제 업장을 녹이는 이 길을 몇 발짝이라도 따라가 보자 하는 마음에 기도를 계속합니다. 학교 다닐 때 “가고 가고 가다 보면 알게 되고, 행하고 행하고 행하다 보면 깨닫게 된다”는 말을 어느 책 표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수행이 쌓이고 쌓이면 제 업장도 녹아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합니다.
JTS 첫 거리모금 때 나이 든 거사님 한 분하고 짝이 되어서 모퉁이에 피켓을 들고 서 있는데, 둘 다 이 모금함을 들고 뭘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구호를 외치면 된다고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한참을 서로 멀뚱멀뚱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팍 들었습니다. 차라리 돈을 내면 냈지,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하는 걸 엄청나게 싫어하는구나, 그리고 스님도 하신 일일 텐데 내가 뭐 대단하다고 아무 말 못 하고 이러고 있을까 싶었습니다. 일단 해보자 싶었고 떠듬떠듬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후로 JTS 활동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나가고 있습니다.
전법 활동가가 되면서 영양꾸러미 봉사도 시작했습니다. 세종지회에서는 첫 시작이어서 대상자 발굴부터 시작해야 했는데, 일하다가 전화 받고 연락하고 현장 점검하러 나가는 게 사업하는 저로서는 시간에 쫓겨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여덟 가구를 새로 발굴해서 방학마다 지원할 수 있어 뿌듯했습니다. 연탄 봉사도 기존 대상자 외에 추가로 지원 대상자를 발굴했는데, 할 때는 힘들었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기에 보람이 있었습니다. 정토회에서 ‘소임이 복이다’ 하는데 소임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들이 지나고 보면 나를 성장시키는 과정임을 알았습니다.
한번은 아이를 데리고 차를 타고 나갈 일이 생겼습니다. 아내의 차는 좀 오래되기도 했고 정돈이 안 되어 있는 반면에, 제 차는 사업상 손님을 태우는 일이 빈번해서 비교적 신형이고 관리도 잘 되어 있어서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차가 좋아? 엄마 차가 좋아?”
“엄마 차!”
당연히 제 차가 좋다고 할 줄 알았는데, 아내의 차가 더 좋다는 겁니다. 이유를 물으니, 아내의 차는 좀 지저분해서 마음대로 해도 되어 훨씬 편하답니다. 내가 좋다고 하는 생각과 아이들의 생각이 전혀 달랐습니다. 이제는 방이 어지럽혀져 있어도 잔소리하지 않습니다. 내 기준이 아니라 아이들의 기준을 존중하는 마음을 내니 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해외업체 대리점 업무를 하는데 거래처 간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일본 제품을 한국에 납품하고 관리할 때였습니다. 한국 쪽에서 제품에 하자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일본에 확인해 보니 한국 쪽에서 물건을 납품받으면서 실수로 불량이 생긴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국 업체는 하자의 원인이 납품 시에 생긴 것이란 데이터를 받고도 끝까지 일본 측의 불량으로 우겼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짜증과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양쪽에서 충돌이 생길 때 그 충돌을 완화시키는 것이 내 일이지 않나 싶은 생각에 화를 가라앉히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양쪽 입장에 서서 해결책을 찾는 일은 업무량은 훨씬 늘었지만, 갈등을 해결하고 함께 갈 수 있어 뿌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불교대학 졸업 무렵부터 법당에서 새벽기도 1년, 매월 마지막 금요일마다 하는 천배정진 3년, JTS 거리모금이나 불교대학 홍보 등 법당행사는 대부분 참여했습니다. 경전대학부터는 불교대학 돕는이 소임을 하면서 다른 행사에도 참여하다 보니 새벽 4시 반에 집을 나서서 거의 밤 11시 반 정도에 귀가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새벽에 나가 밤늦게 들어오는 저더러 아내는 가정을 버린 사람 같다고 했습니다. 주말마다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던 때와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는 저에게 아내는 화가 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반대하나 싶었지만, 아내의 입장에서 보니 그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요새는 일이 많아도 한 번씩은 집에 일찍 들어가려고 노력하고, 아내가 먹고 싶다는 음식이 있으면 같이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아내의 화가 모두 풀린 건 아니어서 지금은 전법활동가 소임을 잠시 내려놓고 갑작스러운 제 행보에 놀랐을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며 조금씩 조금씩 관계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올해 초 인도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인도에 도착해서 처음 간 곳이 갠지스강이었습니다. 강물은 생각보다 혼탁했고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정토회 도반을 포함한 순례자나 여행자들, 물건을 팔고 있는 현지인들, 목욕을 하는 사람들,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를 앞에 두고 화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갠지스강은 누군가에게 여행지로, 생업의 현장으로, 살아서 지은 업장을 씻는 곳으로, 또 죽은 후 좋은 곳으로 가는 길목이 되어, 그렇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문득 저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갠지스강이 무엇인지 궁금하였고, 부처님은 어떤 마음으로 이 강을 바라보셨을지도 궁금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함께 배를 타고 있던 어느 법사님이 불타고 있는 화장장을 향해 '나무 지장보살, 나무 지장보살, 나무 지장보살' 하며 염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순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누군가를 위해 지장보살을 염하는 모습에서 나는 어쩌면 실상으로서의 갠지스강을 보지는 못했지만 어떤 살아 있는 따뜻함과 자비심을 마음 가득히 느꼈습니다. 그 자비심이 갠지스강보다 더 크게 여겨졌습니다.
나중에 인연이 된다면 스님의 역사기행도 따라가 보고 싶습니다. ‘가고 가고 가다 보면 알게 되고, 행하고 행하고 행하다 보면 깨닫게 된다’는 어느 글귀처럼 저 역시 수행, 봉사, 보시하다 보면 마음속 의문들을 후련히 풀어내지 않을까 희망해 봅니다.
인터뷰하는 내내 꼭 문학 소년을 마주하는 것 같았습니다. 가슴속에 품었던 오래된 의문들과 매일 마주하는 작은 일상속에서 법에 의지하여 중도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정토회 도반들의 일상은 이런 것이구나 합니다. 일상 속에서 수행, 봉사, 보시를 함께 하는 이재원 님의 마음속 바탕화면에 꽃들이 만개하기를 바랍니다.
글_박선희 희망리포터(강원경기동부지회)
편집_박선희(강원경기동부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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