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천안지회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는 정반장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은 대전충청지부 천안지회 정반장 정보성 님입니다. 어느 영화에 나왔던 홍반장처럼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무슨일이 생기면 꼭 나타나는 분이라서 정반장이라는 별명을 붙여보았습니다. 남의 일 봐주느라 제 실속은 없어 보였던 홍반장의 삶이 얼마나 잘 사는 것이었는지 때마침 만난 주인공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정반장, 정보성 님의 솔직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들어보겠습니다.

누군가 말하길 정토회 행사에 가면 어디든 항상 제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 뭐할 사람이 없네?”라고 하면 제가 배워서라도 하려고 합니다. 우리 아버지도 항상 남에게 손해 안 끼치고, 남의 일도 자기 일처럼 도와주었는데 제가 닮았습니다.

귀하게 자랐습니다

어머니가 45세에 저를 낳았습니다. 병약했던 제가 초등학교에서 우등상을 타니까 부모님이 기대를 품었습니다. 부여에서 중학교까지 다니고 어머니랑 대전으로 나왔습니다. 생각해보니 저는 가난했지만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귀하게 자랐습니다. 그래서 철이 없었습니다. 너무 받기만 하고 살아서, 감사할 줄도 몰랐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밤이면 이불에 누워 몰래 울었습니다. 잠들면서 울고, 꿈꾸다 깨서 울었습니다. 꿈에서는 어머니가 살아있었습니다.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것 같아,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의지처가 사라진 두려움도 컸습니다. 의지했던 그 마음만큼 괴로움도 오래 갔습니다.

‘아버지’라는 숙제

통일의병대회에 참석한 정보성 님
▲ 통일의병대회에 참석한 정보성 님

예전에는 개인 사찰이 많았습니다. 계룡산에도 조그만 절이 많았는데 아버지도 산 중턱에다 암자를 하나 세웠습니다. 아버지는 혼자 머리카락을 깎고, 목탁 치고 절하며 기도했습니다.

경을 읽다가도 “학교 가면 뭐 하냐. 학교에서 가르치는 거 소용없다.”라고 세상을 욕했습니다. 어릴 때 친척들에게 무시당하고 핍박받았던 얘기를 할 때면 감정이 복받쳐 세상을 욕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또 저러네! 자기도 똑같으면서 세상 탓을 하네!’라며 속으로만 불만을 쌓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욕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고는 저에게 “죄짓지 마라, 살생하지 마라, 남한테 잘해라.” 이런 얘기를 하는데, ‘자기는 맨날 엄마한테 욕하면서 왜 저러지?’ 하는 반감이 쌓였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를 괴롭히는 아버지를 많이 미워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그 미움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크게 슬프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제 인생에 답이 안 보였습니다. 전공도 재미없고 공부도 하기 싫었습니다. 한번은 강의실에서 동기들과 후배들을 데리고 밤새 술을 마셨습니다. 조교가 쫓아와서 “너희들 밤늦게 강의실에서 술 먹고 떠들면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제가 조교에게 욕하면서 교탁을 던지려고 했습니다. 처음이었습니다. 술에 취해 긴장이 풀어지니까 안에 쌓였던 불만이 밖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에 대해 가졌던 불만과 반항심이 성인이 되어서는 세상에 대한 불만과 반항심으로 바뀌었습니다.

드디어 만난 정토회

첫 직장을 서울에 잡았는데 서울살이가 힘들었습니다. 서른 한 살에 회사를 그만뒀는데 아버지는 뭐라고 안 했습니다.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면서 마음공부 하고 싶다니까 한번 해보라며 지지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땅도 없고, 농사 경험도 없어 시골에서 할 수 있는 경찰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스님을 만나기 전까지 제 마음은 뿌리 내리지 못해 붕 떠 있고, 비구름 낀 하늘처럼 어둡고 답답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직장 동료의 소개로 처음 즉문즉설을 들었을 때, 구름이 걷히자 드러난 파란 하늘처럼 환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진짜 불교는 이런 거구나!’ 용하다는 스님들만 보다가 법을 쉽게 설명해 주는 스님을 만나니 오히려 충격이었습니다. 때마침 홍성에 법당이 열려, 저는 아주 자연스럽게 2014년 가을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경전대학에 입학하면서 정토불교대학 진행을 맡았습니다. 문 연 지 얼마 안 된 작은 법당이라 봉사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잘 몰랐던 만큼 정성을 쏟았기 때문인지 진행자 하던 그때가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학생일 때는 만날 뒤에서 졸았습니다. 진행자가 되어서는 앞에서 졸 수 없어 정신을 바짝 차리니, 법문이 잘 들렸습니다.

정토불교대학 홍보중인 정보성 님
▲ 정토불교대학 홍보중인 정보성 님

당시 정토불교대학, 경전대학은 각각 1년 과정이었습니다. 봉사할 사람이 없어서 그 두 개를 동시에 맡아 진행한 적도 있습니다. 어떤 날은 학생이 아무도 없어서 혼자 수업하기도 하고, 추운 겨울밤에 혼자 법당을 지킬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운동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해서 약속과 술자리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에 서너 번씩 법당에 가야 하니까 사생활이 저절로 정리되었고, 제 삶도 함께 정돈되었습니다. 어느새 정토회가 1순위가 됐습니다. 직장에서 부서를 옮길 때도 근무가 편한지 승진에 도움이 되는지 보다, 되도록 정토회 일정에 맞출 수 있는지를 따져서 이동했습니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나눔의 장1>에 다녀오고서야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많이 털어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어머니 얼굴도 몰랐습니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낳자마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형제가 없는 진짜 독자였습니다. 사촌들은 있었지만, 아버지를 무시하고 함부로 했다고 저에게 자주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처음부터 속세와 어울릴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인터뷰 중인 정보성 님
▲ 인터뷰 중인 정보성 님

‘아버지도 이해받고 인정받고 싶었을 텐데, 어머니는 들로 산으로 다니며 자식들 먹여 살리고 키우느라 아버지 얘기를 안 들어줬구나.’ 아버지가 겪었을 외로움이 느껴졌습니다. ‘세상에 의지할 곳이 없어 종교에 의지했구나. 그럴 수 있었겠다. 그렇게밖에 못 사셨겠다.’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서 이해하니 미움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죄송함과 괴로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부모님에게 감사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생각에서 나오던 감사가 어느 날부터 가슴에서 나왔습니다.

오해가 이해로

아내가 제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고 얘기했습니다. 무표정하게 있으면 자기를 못마땅하게 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아내의 오해라고 생각하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내가 정말 그런가?’ 싶어 아내가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할 때 제 마음을 관찰했습니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쳐서 몰랐는데 아내의 행동 하나, 말투 하나에 걸릴 때가 많았습니다. ‘왜 저렇게 그릇을 탁탁 놓지? 발걸음이 왜 저러지?’ 이렇게 아내의 말과 행동을 불편해하는 제 마음을 알아차리자, 비로소 ‘내가 정말 그랬구나!’하고 아내의 불만이 이해되었습니다. <정일사2> 정진할 때 ‘아내 이해하기’를 수행 과제로 삼았습니다. 쉽게 되지 않아서 다음 정진 때 더 연습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로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전교육(왼쪽에서 두번째 정보성 님)
▲ 집전교육(왼쪽에서 두번째 정보성 님)

편안한 진행자의 탄생

저는 수줍음이 많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까 두려워 자신 있게 말도 못 했습니다. 남한테 속마음을 얘기해본 적이 없어서 마음 나누기 순서가 영 불편했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려 뛰쳐나가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나눔의 장>에 다녀올 무렵, 정토회에 ‘행복한 회의’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운동의 가장 큰 목적은 ‘모든 사람이 회의에 참여했다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모두에게 발언 시간이 충분해야 합니다. 진행자는 한 사람이 발언을 독점하지 않도록 하고, 너무 짧게 발언하는 사람에겐 화제를 주어 더 말할 수 있도록 조정해야 합니다.

천안지회 행복한 회의 진행자 교육(뒷줄 가운데 정보성 님)
▲ 천안지회 행복한 회의 진행자 교육(뒷줄 가운데 정보성 님)

‘행복한 회의’ 담당 소임을 맡아 교육받고 실습하면서 ‘이게 진짜 회의 아닌가! 진짜 마음 나누기 아닌가!’하고 감동하여 울컥했습니다. 일 년 동안 매주 법당을 돌며 ‘행복한 회의’를 설명하고 실습교육도 진행했습니다. 전체를 파악하면서도 개개인을 살필 여유가 생겼습니다.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의 진행자를 할 때도 여유가 생겼고, 회의를 주재할 때도 당황하지 않고 편안할 수 있었습니다.

남은 숙제: 겉과 속이 같자

저는 뭘 해도 즐겁고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일상화되어 감지조차 할 수 없는 불안함이 항상 안에 있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좋은 사람, 착한 사람으로 남기 위해서, 욕먹기 싫어서, 남에게 안 보이게 노력했을 겁니다. 아마 그만큼 스트레스가 되어,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이것저것 많이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JTS거리모금
▲ JTS거리모금

저를 보고 ‘항상 여유 있고 여여하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항상은 아닙니다. 표현을 안 할 뿐이지, 속에서는 갈등도 있고 물러서는 마음도 있습니다. 저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큼 속에서부터 편안하면 좋겠습니다.

만약 반대로 속에 뭔가가 있으면 밖으로 쉽게 꺼낼 수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욕심일 수도 있지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습니다. 제게 숙제가 남아있습니다. 안팎의 차이가 줄어들수록 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리고 더 자유로울 것입니다.

이거 말고 할 게 없다

취미라는 게 결국 개인의 즐거움을 찾는 놀이인데, 저도 취미 활동한다고 많이 놀아봤습니다. 그런데 정토회 활동하면서 ‘인생 살면서 이거 말고는 딴 거 할 게 없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정토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계속 일할 수 있다는 게 좋습니다. 그러려면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고 생각합니다. 스님께서 “포기하지 말고 붙어만 있어라” 하셨듯이 말입니다.

새물정진(맨 왼쪽 정보성 님)
▲ 새물정진(맨 왼쪽 정보성 님)

“저에게 정토회란 삶에 꼭 필요하고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전히 물러서는 마음이 들고 자주 흔들리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나아가고자 합니다. 조금 더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길을 알았으니, 계속 가야 하지 않을까요?”


정보성 님은 제가 만일결사3 회향 기념 온라인 불교대학에 재입학하여 공부할 때 진행자를 했습니다. 예민하고 까칠하고 분별심 많은 제가 전법활동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내게 한 일등공신이었습니다. 정보성 님 나이가 제가 생각한 것보다 열 살이 많아 놀랐습니다. 나이는 생체 나이보다 ‘마음 나이’가 중요하구나를 알았습니다. 저도 정보성 님처럼 어디선가 누군가에 잘 쓰이며 진짜로 살아있어야겠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사를 통째로 듣는 희망리포터 소임에 감복하여 그날 밤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글_박은영 희망리포터(대전충청지부 천안지회)
편집_이승준(광주전라지부 전주지회)


  1. 나눔의 장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인간관계가 평화로워지는 4박 5일 정토회 수련 프로그램. 깨달음의 장을 다녀온 참여자만 신청하여 참여할 수 있음. 

  2. 정일사정토회를 일구는 사람들의 준말로 정토회 활동가들을 위한 수행 프로그램. 

  3. 만일결사정토회는 개인의 행복과 정토세상 실현을 위해 1993년 3월 만일결사를 시작. 3년을 정진하면 개인의 의식 흐름이 바뀌고, 30년을 정진하면 한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으로 3년 단위로 천일결사 정진을 이어오고 있음 

전체댓글 47

0/200

이순미

안과 밖의 차이를 줄여서 나를 알리겠습니다ㆍ나누기가 지금도 어색하고 가슴 떨리지만 편안하게 하겠습니다

2023-10-02 11:24:03

무구의

고맙습니다.

2023-10-02 09:56:40

박명숙

저도 안과밖의 차이를줄여서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수행자 되기 따라합니다~~ㅎㅎ

2023-10-01 18:51:33

전체 댓글 보기

정토행자의 하루 ‘천안지회’의 다른 게시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