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광명지회
상큼한 대자유인

29년, 한 세대에 해당하는 이 시간. 김복분 님이 정토회와 인연 맺은 시간입니다. 온라인 전환 후 광명 법당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그 길에 우뚝 서 있는 김복분 님을 만났습니다. 광명 법당이라는 큰 나무를 심고 키우고, 괴로움에 처했던 많은 사람이 쉴 수 있는 넓은 그늘을 만들었던 김복분 님의 이야기, 들어볼까요?

발심한 이유

제가 정토회를 처음 만난 것은 1993년 홍제동에서 독서실을 할 때였습니다. 남편과 저는 둘 다 불자였던지라 남양주 흥국사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남편과 독서실을 할 때 종일 독서실을 지키는 남편 일을 잠깐 교대해 주기 위해 홍제역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길거리에서 정토회 청년들(지금은 법사님들)이 《월간 정토》지를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월간 정토》지엔 당시 조계종 종정이시던 서암 큰 스님이 정토회 법당에 법문하러 오신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큰오빠가 출가한 인연도 있고 해서 서암 스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눈이 번쩍 띄였습니다. 남편과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서암 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홍제동 법당에 간 것이 정토회와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가보니 코로나로 올봄에 없어진 광명 법당쯤 되는 작은 법당과 부엌이 있었습니다. 법당 벽에 ‘1차 만일결사1’라고 쓰인 작은 액자가 붙어 있던 것이 기억납니다.

예비 결사자의 날(앞줄 가운데)
▲ 예비 결사자의 날(앞줄 가운데)

그 후 둘째를 갖게 되고 배 속의 아이를 위해 100일 기도를 시작하며 100일 생활법문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들었습니다. 1년간 법당에 꾸준히 다녔는데, 그때 참 좋았습니다. 눈빛이 형형한 40대 초반 지도 법사님, 공양도 대중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초파일 연등 행사 때는 밤에 네 살 난 아들을 업고, 홍제동 동네를 돌며 석가모니 정근을 했습니다. 초파일 때 지도 법사님이 대중들과 함께 춤을 추던 기억도 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도 법사님은 남이 떠받들길 원치 않고 신도들과 공평하게 생활하였습니다. 원칙에서 티끌만큼도 벗어나지 않는 모습에 ‘정말 원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구나’ 감동 받았습니다. 지도 법사님과 법사님들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아, 이렇게 따라만 가도 되는구나’하고 발심했습니다.

악화일로

그런데 둘째를 낳고 반년 후에 ‘동맥류’라는 병이 발견되고, 수술 후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또 안양으로 이사하고 아이들 키우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러갔습니다. 뭐라도 해볼까 할 때 또 병이 재발하여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살아났습니다.

몸이 좋아지니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남편이 운영하는 인쇄소에서 일을 도왔습니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고집이 센 우리는, 작은 것에도 의견이 달라 사흘이 멀다고 말다툼을 했습니다. 남편은 화가 나면 술을 마시고 저는 그런 모습이 보기 싫었습니다. 그렇게 매일 닭싸움을 하고 살았습니다. 신경정신과 상담도 받아보았지만 좋아지기는커녕 악화일로였습니다.

남편 김용부 님과 함께
▲ 남편 김용부 님과 함께

그래서 저는 2006년 12월 서초동 정토법당에 가서 남편을 불교대학에 입학시켰습니다. ‘불교대학을 다니면 좀 반성을 할 테니 고쳐 써야겠다’라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천성적으로 착한 사람이라 술 마시는 것 말고는 고칠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복하게 불교대학을 다니는 남편을 보며 저도 불교대학, 경전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죽음의 문턱까지 저를 몰아 붙쳤던 병, 남편이 술 마시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저. 이렇게 스스로를 서서히 알아가며 오로지 아이들을 바르게 키워야겠다는 일념으로 하라는 대로 봉사를 했습니다. 주어진 봉사는 어떤 것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했습니다.

18시간이나 걸리는 수술도 성공해서 살아남은 저는 그 어떤 것도 겁나지 않았습니다. 또 문경 시골 출신이라 일에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진짜 두려움이 없느냐?’라고 다시 물으신다면 저는 정말 두려움이 없습니다. 봉사가 힘들다고 하는데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됩니다. 병도 발견이 되었으니 위험하긴 하지만 수술받고, 그 후엔 별로 아프지도 않고 깔끔하고 좋은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식단 관리 잘하고 마음을 잘 다스리면 괜찮습니다.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스승님 가르침에서 제가 느낀 이치를 믿고 불안해하지 않고 그냥 가면 됩니다.

파리와 법회를?

2008년, 무변심 법사님이 남편에게 당시 우리가 살던 광명 집에서 법회를 열어보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집이 좁아서 안 된다고 했지만 ‘괜찮다’고 하여 가정 법회를 열었습니다. 당시에 가정 법회가 잘 되던 도봉구 김경례 님 집에 가서 어떻게 하나 도반들과 함께 참여해 보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비디오 테이프로 법문을 듣고 나누기를 했습니다. 콩나물, 시금치, 무채 나물을 정성스럽게 차려 점심공양을 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는 거면 나도 할 수 있겠다’ 하여 시작했습니다.

대학생이던 아들이 충수염으로 수술을 받았을 때는 입원한 병원의 의사, 간호사, 직원들에게 북한 동포 돕기 동참 서명을 받았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봉사를 했지만 당시엔 진심으로 저를 본다기보다는 ‘면피성 참회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존심 때문에 말로는 못 하고, 마음으로 ‘남편에게 잘해줘야지’ 하고 집에 가면 그런 날은 더 불만스러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내가 어리석구나’ 하면서도 오랫동안 반복되었습니다.

천성적으로 의심과 부정적인 측면이 많았던 저는, 남들이 저에게 잘해줘도 ‘진심으로 저러나, 나를 이용하려고 저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또 걱정도 참 많았습니다. 가정 법회를 열 때도, 또 광명 법당을 개원하고도 ‘사람이 안 오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아주 높았습니다. 사람이 안 오면 ‘내가 뭘 잘못한 건가’ 하는 자책이 밀려왔습니다. ‘다른 곳에는 그렇게 사람이 많이 오는데, 다른 데는 잘 되는데...’ 하면서 지기 싫은 마음, 잘나고 싶은 마음으로 힘들어했습니다.

그러고 있을 때 전국 총무, 부총무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유수 스님이 ‘도반이 없으면 파리하고 법회를 해도 괜찮으니 한 명이라도 법문 듣고 자유롭고 행복하면 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는 ‘수처작주’라고 ‘언제 어디서나 내가 주인’이라는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2013년 광명법당 개원(뒷줄 부처님 오른쪽 두 번째)
▲ 2013년 광명법당 개원(뒷줄 부처님 오른쪽 두 번째)

그렇게 2009년부터 4년 반 동안 가정 법회를 하다 2013년에 광명 법당을 개원했습니다. 법당이 있으면 좋겠다는 본부의 권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명 시내를 모조리 다녀보고 얻은 법당은 목탁 소리 때문에 민원이 발생해 1년 만에 다시 이전했습니다. 다시 6개월 동안 발품을 팔아 어렵게 법당을 구해 그 자리에서 8년간 법당을 운영했습니다. 그 후 코로나19로 인하여 온라인으로 전환하고 문을 닫았습니다.

상큼하고 가볍게

개원부터 2017년까지 5년간 광명 법당 부총무로 일했습니다. 원래 저는 매우면 맵고 짜면 짜다고 하는 단순한 사람인 데다 원칙주의자입니다.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오빠는 출가하고 어머니와 작은오빠, 동생과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일해서 동네 논을 차근차근 사들였습니다. 어머니는 나가 놀지도 못하게 하고 공부하라고도 안 하고 일만 하라고 했습니다. 융통성 없는 저는 시키는 대로 했고 노는 게 습관이 안 됐습니다.

성격이 이렇다 보니 법당을 운영할 때도 원칙을 고수하고, 위에서 내려오면 내려오는 대로 했습니다. 그러니 같이 일한 도반들이 힘들었을 듯합니다. 행복학교2를 할 때는 ‘김복분에게는 알리지 마라. 정토색이 너무 강해서 안 된다’ 이러며 쉬쉬했지만 제 귀에는 그 이야기가 다 들어 오니 빙그레 웃음이 났습니다.

그래도 옆을 보지 않고 여기까지 오다 보니 이제 걸리는 것이 없습니다. 술 좋아하는 남편에게 불만도 많았지만 술은 남편에게 보약이 맞습니다. 또 남편이 술 잘 마시는 덕에 저는 저대로 자유롭게 수행, 보시, 봉사를 마음껏 할 수 있었습니다.

불법 만나기 전에도 부지런히 일은 했지만, 지금처럼 상큼하지가 않았습니다. 늘 불만이 많고 의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상대를 믿습니다. 만약 상대가 무슨 일을 안 했다면 ‘안 한 이유가 있겠지’ 이렇게 받아들이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흥겨웠던 광명 법당 행사(네 번째줄 왼쪽에서 두 번째)
▲ 흥겨웠던 광명 법당 행사(네 번째줄 왼쪽에서 두 번째)

봉사, 안하면 자기만 손해

아이들은 잘 성장해서 각자 하고 싶은 일하며 독립해서 잘살고 있으니 얼마나 가볍고 행복한지 모릅니다. ‘대자유인’이란 이럴 때 쓰는 말 같습니다. 그러니 이 좋은 법을 알릴 수 있을 만큼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처음엔 잘 몰랐던 SNS도 아들딸한테 물어보고, 도반한테 물어보고 합니다. 지금은 불교대학 돕는 이를 하고 있습니다.

이젠 정말 바라는 게 없습니다. 아무런 두려움도 없습니다. 살아서 인연 따라 쓰이는 대로 쓰이고, 움직일 수 있으면 움직일 수 있는 만큼 하고, 때가 되면 새 몸을 받을 수도 있으니 편안하게 가면 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가정 법회, 광명 법당을 하면서 제일 보람 있었던 일은 괴로움에 가득 차서 왔던 사람이 괴로움을 여의고 점차 밝은 얼굴을 되찾은 것이었습니다. 저같이 늘 부족하고, 늘 배고픈 사람도 불법을 만나 이렇게 행복해졌으니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반들에겐 부지런히 정진하고, 봉사하고, 지도 법사님 살아계실 때 질문할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함께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자긍심을 갖게 하는 일인지 모릅니다. 어떤 분들은 봉사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안 하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금요일 저녁 전화로 2시간 인터뷰를 했습니다. 30년 가까운 긴 세월 안에 녹아있는 김복분 님의 이야기를 밤새 듣고 싶었습니다. 오래전에 경주 남산에서 지역별 노래자랑을 할 때 김복분 님의 노랫소리가 상대에게 묻히자 ‘당당하게, 크게 부르라. 뭣 때문에 주눅 들어 사는냐’라고 호통치던 지도 법사님의 말씀을 듣고 더 당당하게 살려고 노력했다는 일화가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법당은 법당일 뿐, 나는 나 좋은 만큼만 가서 듣고 오면 된다’는 이기적이고 얕은 생각에 젖어있던 저에게 큰 감동을 주신 김복분 님에게 고맙습니다.

글_희망리포터 정진아(인천경기서부지부 광명지회)
편집_허란희(강원경기동부지부 용인지회)


  1. 만일결사정토회는 개인의 행복과 정토세상 실현을 위해 1993년 3월 만일결사를 시작. 3년을 정진하면 개인의 의식 흐름이 바뀌고, 30년을 정진하면 한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으로 3년 단위로 천일결사 정진을 이어오고 있음 

  2. 행복학교 행복해지고 싶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종교적 의식이나 프로그램을 배제하고, 법륜스님의 행복 메시지를 통해 개인과 사회의 행복을 이야기하고 소통하며, 지금 이 순간 행복해지는 연습을 함께 하는 곳.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12강 구성으로 진행되고 있음.
    행복학교 신청: http://hihappyschool.com 

전체댓글 26

0/200

광효이상헌

광명법당에 처음 갔을 때 복분보살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도반과 충돌도 해가며 법당을 꾸려 가던 모습도 떠 오릅니다. ^^
지금은 여여하게 살고 계시는 보살님..
건강하시고 거사님과 행복하게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2022-01-10 08:26:09

박신영

수처작주 언제 어디서나 내가 주인 도반님의 나누기 감동입니다. 저도 당당하게 어디서나 내가 주인으로 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1-12-28 05:59:24

남연옥

정토회와 함께한 30년의 세월을 글로나마 느껴보았습니다.
30년 .. 저는 감히 생각치도 못할 세월인데.. 이렇게 대단하신 김복분님과 매주 함께 할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매주 도반님들과 김복분님.이은미님과 함께 같이 하는 시간이 참 뜻깊고 소중한 시간임을 다시 한번 더 느끼게 되네요♡

2021-12-09 11:36:49

전체 댓글 보기

정토행자의 하루 ‘광명지회’의 다른 게시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