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정토행자의 하루
사라진 200만원

우리는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좋아하는 드라마 속 조인성 배우가 저에게 상처를 줄 일도, 제가 상처를 받을 일도 없겠지요. 혹자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거리를 둬야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가장 가까운 타인인 가족과의 오해와 상처를 이해와 표현으로 풀어나가는 편집자의 이야기입니다.

치사한 딸

“선용이 방이 해지는 서쪽이라 얘가 안 풀리는 거래. 엄마방 붙박이장 떼면 선용이 침대랑 책상이랑 다 들어가니까 그거 떼고 방 바꿀라고...”

몇 년 전 대기업에 철썩 붙어서 집안 자랑이었던 남동생은 4년 째 공무원 시험을 붙잡고 있는 엄마의 아픈 손가락입니다. 마음이 답답할 때면 점집을 약방 드나들 듯 다니는 엄마는 최근 점집에서 남동생의 방이 해 뜨는 동쪽이여야 동생이 잘 풀릴 거라는 점괘를 받았답니다.

“어휴... 그게 방을 바꾼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요.”

마음을 다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동생에 대한 안쓰러움과 절에 다니면서도 아직까지 기복에 휘둘리는 엄마에 대한 답답함이 엉키어서 저도 모르게 한숨 섞인 푸념이 튀어나옵니다.

“아니, 내가 내 돈 들여서 방 바꾸겠다는데 너 반응이 왜 그러니? 엄마도 오죽 답답하면 이러겠니?”

갑자기 버럭 화를 내는 엄마에게 저도 똑같이 대들어 버립니다.

“그런 쓸데없는 데에 쓸 돈 있으면 작년에 빌려준 돈이나 먼저 갚아요.”

아차! 이게 아닌데.

작년 코로나로 일자리를 잃은 엄마는 아파트 대출 상환할 돈이 없다며 저에게 어렵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평생 자식들에게 짐 되기 싫다며 칠십이 가까운 나이에도 식당에서 일을 하는, 신념이 강한 엄마입니다. 돈을 빌려 달라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힘들었을지 알기에, 또 나 사는데 바빠 미처 엄마의 상황을 헤아리지 못한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200만원을 송금했습니다. 돈을 보내고 나니 잔액 12만원. ‘다음 달 월급날까지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까짓 거...’라며 저도 큰 마음먹고 돈을 보낸 터라 잊지 못하고 있었나 봅니다.

결국 치사하게 돈으로 협박하는 딸이 되어 버렸습니다.

감쪽같이 사라진 200만원

“...... 엄마가 언제 돈을 빌렸어? 얼마를? ...... 엄마도 사는 데 정신없어서 잊었나보다. 알았어. 일주일 내로 갚을게. 끊어라.”

엄마가 울먹이며 전화를 끊는 사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꼭 알아야만 하는 저는 또 화가 차올랐습니다. ‘내가 생활비도 안남기고 그렇게 큰돈을 빌려줬는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지?’ 감정이 복받친 저는 통장내역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송금한 내역을 찾아서 엄마한테 보여줄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통장내역을 아무리 뒤져봐도 엄마에게 보낸 200만원이 보이지 않습니다.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금액은 정확하니 200만 원으로 금액을 설정하여 출금내역을 여러 번 검색해 봤습니다. 200만원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도대체 제가 보낸 200만원은 어디로 간 걸까요?

미꾸라지처럼 숨어버린 화

다음 날, 휴무인 남편과 함께 작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모든 통장내역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12월 18일에서야 나타난, 작년 중 유일하게 엄마에게 송금한 내역.

받는 사람: 엄마
출금액: 200,000원
잔액: 1,204,769원

 드디어 찾은 송금내역
▲ 드디어 찾은 송금내역

‘0’ 하나를 덜 눌러 20만원만 보내놓고, 잔액 120만원을 12만원으로 잘못보고 한 달을 어찌 버텨야하나 고민했던 겁니다. 같이 200만원을 찾던 남편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엄마에게 올라왔던 마음은 미꾸라지처럼 바위 속으로 쏙 숨어버렸습니다. 기가 막힌 상황에 처음 느껴보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 쳤습니다.

무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제 머릿속에 세워둔 계획에는 송금한 내역을 떡하니 보여주고, 이 돈은 갚지 않아도 되니 쓸데없이 점집 드나들지 말라고 엄마에게 약속을 받아낼 작정이었는데 말입니다.

제가 송금하고나서 엄마는 별다른 연락이 없었기에, 금액이 잘못됐으리라 생각도 못했습니다. 통장에 찍힌 20만원을 보면서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딸도 코로나로 상황이 힘든 것이라 생각하고 아무 말없이 넘어갔던 걸까요? 돈을 다시 보내달라 말도 못하고 대출금을 갚지 못해 전전긍긍했을 엄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옵니다.

엄마에게 얼른 문자부터 보냈습니다.

엄마 미안해
작년 12월에 엄마가 200만원 빌려달라 해서
내가 이체를 했는데
어제 확인해 보니까 ‘0’하나를 덜 눌러서 20만원만 보냈었네
나도 잘못했고 오해가 있었어요
어제 말한 돈은 갚을 거 없으니 그리 알아요

 엄마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 엄마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고슴도치들

사과하는 날을 차일피일 미루다 추석 덕분에 자연스럽게 엄마를 만났습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저와 남편을 반겨주는 엄마입니다.

감정표현이 서툰 저는 가벼운 저녁 술자리에서 웃기고도 슬픈 지난 실수 이야기를 꺼내며 ‘나의 잘못이었다, 내가 엄마 마음을 몰라줬다’며 미안한 마음을 두루뭉술하게 표현했습니다. 상대의 눈을 보고 정확하게 무엇을 잘못했다,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저입니다. 여느 때처럼 엄마는 일찌감치 용서하고 풀었다는 듯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자기주장이 강한 것을 똑 닮은 엄마와 저는 참 많이 다투었습니다. 서로 생채기 내는 말을 주고받은 후에야 ‘그 때 그 속뜻은 결국 나를 위한 거였구나!’ 하고 항상 뒤늦은 후회를 하곤 했습니다. 또 직접 얼굴을 보고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도 어쩜 그리 똑 닮았는지 시간이 지나면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없던 일로 만들고 하하호호 지냈습니다.

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여리면서 여린 마음을 감추기 위해 가시를 세우고 있는 사람들. 가까이 다가갈수록 서로의 가시에 찔려 아파하는 사람들. 엄마와 저는 고슴도치 같습니다.

엄마와 딸은 고슴도치
▲ 엄마와 딸은 고슴도치

느려도 괜찮아

무엇이든 정확하게 표현을 해야 하는 동생은 이런 엄마와 저의 서투른 감정표현을 싫어합니다. 이미 이야기 전말을 다 알고 있는 동생은, 제가 술자리를 빌어 두루뭉술하게나마 미안한 마음을 전달하기까지 많은 용기를 냈다는 것을 알고는 저를 칭찬합니다.

“언니가 결혼하고부터인지 정토회를 만나서부터인지 사회성이 많이 좋아졌어.”

이 짤막한 경험으로 저는 제 많은 업식을 발견했습니다. 마음이 급하면 숫자를 잘 틀리는 저도 발견하고, 마음이 올라오면 저를 지키기 위한 가시를 세우기 바쁜 저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또 ‘미안함’을 표현할 때 많이 서툰 저도 알아차렸습니다.

문득, 이만해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정토회를 만난 초기에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업식을 찾아서 빨리빨리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업식을 가지고 있는지 돌이켜 볼 줄 아는 것만으로도 참 기특한 일이라는 것을요.

정토회를 만나 끊임없이 저를 돌아보고 제 업식을 발견하고, 또 느리지만 아주 천천히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침 기도를 마치고 저에게 속삭여 봅니다.

‘느려도 괜찮아.’


글_정토행자의하루 편집팀

전체댓글 23

0/200

서영수

회원님 이야기를 보며 아버지를 향한 제 어려움이 되돌아봐집니다. 감사합니다:)

2021-11-30 17:52:20

이의수

수행담 잘읽었습니다^^

2021-10-12 13:18:50

박기용

잘 읽었습니다 저도 해당되는 내용이라 많은 공감과 위안을 얻어 갑니다
'느려도 괜찮아 꾸준히 나아가자'

2021-10-11 09: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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