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반여법당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나요?

해운대구에 위치한 반여법당은 부산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동 단위의 법당입니다. 소법당이지만 있을 것은 다 있는 알찬 법당인데요. 오늘의 주인공 김미연 님은 봄 불교대학 담당자입니다. 얼마전 가게의 작은 화재 사고로 종아리 근육이 파열되는 사고에도 수요일 사시 예불만큼은 깁스를 한 채로 진행하였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씩씩하게 만들었을까요? 화장기 없는 얼굴에 두 개의 보조개가 매력적인 김미연 님을 만나 보았습니다.

갈등의 서막

인터뷰 당일 도반들과(왼쪽에서 세 번째 김미연 님)
▲ 인터뷰 당일 도반들과(왼쪽에서 세 번째 김미연 님)

시아버님은 시어머니가 40대 중반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렇다 보니 시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대단했습니다. 젊었을 적부터 자식들을 위해 절에 많이 다니셨는데, 어느 날 당신이 자식과 같은 집에서 산다면 자식이 단명한다는 소리를 들으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절을 의지하며 거의 들어가 살았습니다.

당시 온 가족이 반대하였지만 막내아들이 10대임에도 불구하고 절에 공양주로 들어갔습니다. 초기에는 시어머니와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냥 믿고 따랐습니다. 저에게는 큰딸과 두 살 터울의 쌍둥이까지 세 명의 딸들이 있습니다. 쌍둥이가 태어나 100일이 되기 전부터 병원 생활을 하였습니다. 둘 다 동시에 입원시킨 적도 허다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아이들을 봐주시기는 했지만 당신대로 절에 가야 하는 사정이 있었기에 산후조리 도움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신랑과 식당을 운영 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너무나 바쁠 때였습니다. 식당일, 집안 살림, 제사까지 혼자 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 보니 남편과 잔 다툼도 잦을 때였습니다.

2016년쯤 제사 때 시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신 뒤로 한마디 의논도 없이 그냥 너희 집에서 살겠다 하셨습니다. 곧 가시겠지 생각했지만, 시골에서 짐들이 하나씩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 어렸을 적 자그마한 고사리손이라도 필요할 때는 도움을 안 주시더니, 애들이 다 큰 후에야 도움을 주겠다 하시는 시어머니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모둠별 두북 울력때의 모습(가운데 김미연 님)
▲ 모둠별 두북 울력때의 모습(가운데 김미연 님)

미움은 나를 괴물로

어느 날인가 갑자기 가게 주방에 들어오시더니 이것저것 시어머니의 간섭은 시작되었습니다. 거의 30년간 절밥을 드시며 생활하신 시어머니의 내공은 대단했습니다. 소심한 성격에 용기 내어 한마디 할 때면 벽을 마주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말 좀 하려 하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알았다” 하시며 철벽을 쳤습니다. 아예 먹히질 않았습니다.

가게에서 제가 할 일과 시어머니가 할 일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영역을 침범하시는 시어머니... 본인은 도와주고 싶어서였겠지만 하는 방식이 전혀 다르니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가 크게 터졌습니다. 시어머니께서 저 모르게 반찬을 다시 쓰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께 그러면 안 된다고 단호히 말씀드렸고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손님상에 나가는 겉절이 속에 익은 고기가 끼어 있었던 겁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이게 어디 아들 도와주는 거냐, 이건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이대로 소문나면 이 가게는 완전 끝이다, 하지 마라, 어머니랑 일 못 한다 하며 선을 그었습니다. 또한 당신이 부산에서 청도까지 절에 가는 바쁜 길에도 제가 가게에 나왔는지 확인 전화까지 하시던 시어머니가 그때는 정말 미웠습니다.

온라인 수업 전 정갈한 모습의 김미연 님
▲ 온라인 수업 전 정갈한 모습의 김미연 님

이런 일들이 일상이 되다 보니 어떻게 하면 같은 말을 해도 시어머니께 상처가 되는 말을 해볼까 궁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공 백 단의 시어머니에 대한 저의 마음은 이미 괴물이었습니다. 이런 갈등 속에 저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남편에게 고자질하기였습니다. 처음에는 잘 받아주던 남편이 ‘나보고 도대체 어쩌라고!’ 하며 불같이 폭발하였습니다.

몸은 숙여도 마음은 꼿꼿이

그때 ‘아, 한계점에 왔구나. 더는 물러설 것이 없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당시 남편도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이러다가 내 신랑 스트레스받아 죽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저의 여건상 개인적인 시간을 빼기 어려워 미뤄왔던 정토불교대학에 제 발로 입학했습니다.

그때에는 큰딸과의 갈등도 있었습니다. 입학 후 혼자서 108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저런 일들로 감정의 기복은 심해지고 혼자 괴로워 500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해소가 안 되었습니다. 그때 저의 마음을 보니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까 하는 기복적인 생각으로 몸만 숙였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절을 해도 그 근본을 모르니 몸만 힘들 뿐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잘났다 생각을 했던 것인지 도저히 숙이지 않았습니다. 저도 <깨달음의 장1>에 다녀와 다른 사람처럼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불교대학 입학 후 2개월 만에 <깨달음의 장>으로 향할 만큼 절박했습니다.

올해 봄불교대학 입학식에서(왼쪽에서 네 번째 김미연 님)
▲ 올해 봄불교대학 입학식에서(왼쪽에서 네 번째 김미연 님)

배신감은 분노로

손아랫동서와 같이 식당을 오픈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본을 대고, 동서네는 기술을 댔습니다. 처음에는 장사가 정말 잘 되었습니다. 우리 식구들 다 먹고 살았으니까요. 가부장적이고 돈에 대한 집착이 있는 남편은 야무지게 가게를 꾸려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작은 해프닝이 큰 오해를 낳고 말았습니다.

근무 시간 중에 직원 한 명이 테이블에 발을 올려 쉬고 있는 모습을 남편이 본 것입니다. 그 일이 화근이 되어 동서와, 동서가 데리고 온 일 잘하는 직원까지 모두 가게를 그만둬 버렸습니다. 또 휴가철까지 겹치게 되어, 휴가 가는 직원들의 부재까지 겹치니 상황은 참 난감하게 흘러갔습니다.

그때는 정말 정신없었습니다. 우리 쌍둥이 막내딸 수술 날짜까지 잡아놓은 터라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앞뒤 볼 것 없는 저의 사정에 동서를 말려보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밤에는 병원에서, 아침엔 버스에서 꾸뻑꾸뻑, 낮에는 가게에서 쳇바퀴 도는 저의 일상 속에 저의 몸과 마음은 피폐해져 갔습니다.

법당 행사에서(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미연 님)
▲ 법당 행사에서(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미연 님)

어느 날 우연히 일을 그만둔 직원의 SNS를 보게 되었는데 눈이 뒤집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사정 봐달라고 부탁했던 동서와 그 직원, 그리고 휴가철 부재중이었던 직원들까지 모조리 같은 장소, 같은 시간대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는 물놀이 사진을 본 것입니다. 아무리 형님네가 미워도 그렇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하는 배신감은 분노로 바뀌어 그때부터 동서가 너무나 미웠습니다.

신의 한 수

우리 동서가 참 예쁩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도련님하고 잘 살고, 예쁜 조카들까지... 제가 정말 좋아했습니다. 그랬던 만큼 그 미운 감정은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깨달음의 장>에서 보낸 저의 4박 5일은 정말 신의 한 수 였습니다. 천운이었습니다.

7~8년 묵고 묵은 동서에 대한 미운 감정이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책에서나 보았지 내가 경험할 줄 알았을까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습니다. 동서를 향한 큰 미움이, 그 마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때 저는 동서의 마음을 본 것이 아니라, 제 마음을 보았습니다.

대학생 인도 선재수련에서 봉사하는 쌍둥이 딸들
▲ 대학생 인도 선재수련에서 봉사하는 쌍둥이 딸들

‘아! 화낼 일이 아니었구나’라고요. 어디에도 화 날 일이 없다는 것, 그 누구도 나를 화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니 더는 미운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깨달음의 장>에 다녀온 후 시어머니께 한마디 하였습니다. “어머니! 우리 웃으며 살아요”

나는 원래 행복한 사람

태어나 병원 입원의 반복으로 늘 애태웠던 쌍둥이 딸들이 어느새 22살이 되었습니다. 2019년에는 대학생 인도 선재수련이라는 프로그램에도 다녀왔습니다. 마침 미술을 전공하는 딸들이었기에 수자타 아카데미의 벽화를 그리며 너무나 잘 적응하고 잘 쓰이고 왔습니다.

직접 밥을 해 먹고, 인도성지순례자들의 가사를 세탁하는 봉사를 하며 인생에 큰 경험을 해봤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JTS거리모금행사에서는 페이스페인팅을 하며 능력대로 잘 쓰이고 있는 딸들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막내딸은 현재 대전법당의 봄불교대학 학생이기도 합니다.

저는 반여법당 봄불교대학 담당자 소임을 맡고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 여파로 온라인 수업을 하고 있는데, 우리 딸들의 역할이 한몫하고 있답니다. 컴퓨터 사용이 익숙하지 않은 터라 딸들에게 구글사용법, 온라인사용법, 컴퓨터 사용법 등을 배우고 있습니다.

쭈~욱 발 담그고 행복하게

인도 수자타아카데미 벽화그리기 봉사하는 쌍둥이 딸
▲ 인도 수자타아카데미 벽화그리기 봉사하는 쌍둥이 딸

그리고, 저에게 깨달음의 가르침을 주었던 동서도 경전반 학생이기도 합니다. <깨달음의 장>까지 다녀와 수행하는 도반애를 나눌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동서의 변화 또한 온 가족이 느낄 정도이기에 뿌듯한 마음과 대견한 마음이 큽니다. 저는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라는 큰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지금 제가 하는 소임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그러다가 완전 정토에 빠지는 거 아냐?”라는 남편의 걱정스러운 말에 걱정마라 라고 하였지만 생각해보니 ‘빠져도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쭉 발 담그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원래 그 누구에게도 화낼 일 없는 행복한 사람이니까요.


리포터는 어느 해 동짓날에 맛있게 먹었던 단팥죽이 기억납니다. 김미연 님이 직접 만든 팥죽이었는데요. 한 숟가락을 입에 넣으니 따뜻하고 달콤했지요. 동글동글하고 매끈한 팥 속의 달짝지근한 맛, 다 아는 맛, 친근한 맛 같지만 일단 한 입 넣으면 포르르 몸이 녹아드는 달달한 단팥죽. 김미연 님은 왠지 단팥죽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터뷰 하며 김미연 님의 편안함이 저에게도 고스란히 스며드는 듯합니다. 행복을 전하는 일은 100번 말로 해서 될 일이 아니지요. 내가 행복하면 상대에게 전이되는 법! 행복을 전하는 수행자 김미연 님을 응원합니다.

글_ 정지혜 희망리포터(해운대정토회 반여법당)
편집_ 이종명(전주정토회 전주법당)


  1. 정토회 수련 프로그램. 4박 5일 

전체댓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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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성

많이 힘든 시간이었을텐데 멋지게 잘 이겨내고 살아가시는거 같아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어요.
동서에 대한 마음을 풀어 가시는 모습이 바르게 보는 혜안을 얻으신거 같아요. 부처님 법 안에 다같이 살아가고 있음이 감사합나다.

2020-08-06 17:12:31

무승화

"원래 그 누구에게도 화낼 일 없는 행복한 사람" 이란 고백과 따님도 재능봉사를 하는 가정을 일구시는 도반님, 응원합니다.

2020-08-06 13:24:51

박혜진

저도 마음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는 말에 같은 마음입니다. 내가 행복해야 주변의 모든 사람이 행복한 것 같습니다.

2020-07-25 02: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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