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사하법당
하마터면 내 인생, 억울할 뻔 했어요

무서움에 떨었던 어린 시절, 원망이 가득했던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장년이 되어서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무감각하게 일만 해왔다고 지난 날을 회고하는 강순자 님. 정토회에서 불법을 만나 지난 세월도 따뜻하게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불법을 만나지 못하고 원망 속에서 어리석게 살다가 노년이 되었으면 어쩔뻔 했냐며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불법 속에서 삶의 기쁨을 알아가고 있는 강순자 님의 수행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부처님 오신날 공양간 봉사 중인 강순자 님 (앞줄 왼쪽 1번째)
▲ 부처님 오신날 공양간 봉사 중인 강순자 님 (앞줄 왼쪽 1번째)

눈물, 콧물이 대변해 주는 나의 10대

시골 산청, 가난한 집안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가난으로 시골 생활이 힘들었던 부모님은 우선 오빠들만 데리고 부산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엄마는 곁에 없었지만, 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시골의 자연 속에서 언니와 저는 마냥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다 제가 9살이 되던 해에 시골에 남아있던 할머니, 언니, 그리고 저도 부모님이 계신 부산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불행은 시작되었습니다. 아버지는 365일 술을 드셨고, 주사를 부렸습니다. 오빠들은 아버지가 보기 싫다고 이미 집을 비웠고, 언니는 빨리 결혼해서 집을 나가 버렸고, 할머니와 엄마는 저항하지 않습니다. 어린 저는 피할 도리 없이 여자는 그렇게 살아가는 줄 알고, 그 불안을 고스란히 견뎠습니다. 하늘만 어둑해지려고 해도 저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였습니다. 뚜벅뚜벅 들려오는 아버지의 발소리에 제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습니다. 비가와도 태풍이 몰아쳐도, 춥든, 덥든 저는 매일 쫓겨 났습니다. 아버지가 언제 지쳐서 방에 들어갈까? 노심초사하며 집 주변을 배회했습니다.

연등만들기 봉사 중인 강순자 님
▲ 연등만들기 봉사 중인 강순자 님

하루는 아버지가 술을 유독 많이 마시고 들어왔습니다. 평소보다 심한 술주정으로 가족들을 괴롭혔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어머니가 온몸을 떨었습니다. 서 있지도 못해 털썩 주저앉으며 더 심하게 몸을 떨었습니다. 이불을 3개나 덮어서 진정시키려 하였으나, 그 무거운 이불도 함께 떨렸습니다. 그 순간 매일 하늘이 어스름 해지기 전부터 쿵쾅거리며 가슴 졸였던 저의 공포의 시간이 분노로 폭발하였습니다. 온몸으로 울 부 짓 듯 아버지에게 '인간쓰레기' 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막내 딸에게 그 소리를 듣고는 밤새 자신의 주먹으로 이마를 찧었습니다. 아침에 보니 이마에 피멍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일상은 지속되었습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엄마는 아침 식사 준비를 했고, 가족들이 빙 둘러앉아 식사를 했지만 아무도 말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일터로 오빠와 저는 학교로 갔습니다. 그런 일상이 제가 성인이 될때까지 지속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저를 불렀습니다. “내일부터 학교 가지 말고, 미싱공장가라.” 그 한마디에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그냥 눈물만 쏟았습니다. 무작정 집 밖으로 뛰쳐나와 멈춘 곳은 우리 동네에 우두커니 서 있는 탱자나무 앞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때가 생생하게 기억이 나서, 그때를 생각하면 목이 메이고 눈물이 납니다. 탱자나무 앞에서 눈물, 콧물을 폭포처럼 쏟아내었습니다. 그때 나이 14살. 중학교 1학년. 아직 한 학기도 다 다니지 않았는데, 날벼락 같은 통보였습니다. 불안해 하지 않고 웃으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학교였는데, 가난해서, 여자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복종해야 함을 알았기에 그저 울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저의 유년 시절은 너무 불행했고,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습니다.

주장을 못 하는 나

두북에서 농사 울력중인 강순자 님
▲ 두북에서 농사 울력중인 강순자 님

저의 생활은 똑 같은 일상의 무한 반복이었습니다. 밤마다 아버지를 피해 도망 나오고, 아침이면 엄마가 차려주신 밥을 아무 말 없이 먹고, 미싱 공장 가면 주어진 일만 했습니다. 20대가 되었지만, 제 손에 남는 것은 없었습니다. 억울하고, 원망스럽고, 늘 저만 피해를 본 것 같았습니다. 더는 이 집에서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달력 뒤에 장문의 편지를 써놓고 야밤에 조용히 집을 나와 버렸습니다. 어디를 가든 여기보다는 나을 거란 생각이었습니다. 전 여인숙 주방에 취직했고, 그곳에서 머물 수 있었습니다. 미술학원도 다니고 평소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하면서 나름대로 평화롭게 지냈지만, 내가 덩치가 작고, 만만하게 보이는지 항상 피해를 보는 일이 생겼습니다.

저에게는 편안한 안식처가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여인숙 사장님 남편의 회사 직원이었던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만난지 3개월 만에 결혼까지 했습니다. 키가 크고, 근면, 성실 했으며,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이 남자에게 나의 인생을 기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콩깍지는 금세 벗겨졌습니다. 15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듯 군대 입대를 한 남편은 병장 말년 휴가 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쭉 혼자 살다 보니 모든 것을 다 혼자 결정하며 살아온 습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다른 사람 의견은 듣지도 않고, 일방적인 통보만 했습니다. 결혼생활 내내 저를 통제하려 했습니다. 내 옷, 아이 옷 할 것 없이 간섭하고, 우리 가족 4명 외에는 이웃과 함께 하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저 역시 억압받고 살았던 세월에서 벗어나 이 남자를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부부간에 늘 갈등이 있었습니다. 힘든 결혼 생활이었지만, 다행히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랐습니다. 남편과 저의 교육관이 너무 달랐지만, 아이가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남편 몰래라도 배우게 해 주었습니다.

쉼 없이 주간, 야간으로 노동자의 최전선인 봉제 공장에서 9년을 일했습니다. 늘 그랬듯 남들 하기 싫어하고 힘든 일들은 저에게 왔습니다. 억울했지만, 어떠한 주장도 못 하고 그냥 그렇게 사는 게 당연 한 줄 알았습니다. 처절하게 생존에만 급급했습니다. 일할 때 미싱 기계가 생명인데, 자주 고장이 나서 수리를 요청하면 수리가 될때까지 일감이 밀립니다. 그런 일이 비일비재 했고, 관리자는 자주 짜증을 냈습니다. 제 잘못이 아닌데, 제가 잘못한 것처럼 상황이 만들어질 때도 많았습니다. 그날도 기계가 고장이 나서 관리자에게 고쳐달라고 했더니 대뜸 화를 내면서 “알았다. 가 있어라.” 하는데 그 말이 왜 그렇게 서럽던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말투가 9년 동안 참고 견딘 저를 무시하고 깔아뭉개는 듯 느껴졌습니다.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라, 사직서를 냈습니다. 그렇게 9년 동안 일한 봉제 공장의 생활을 마쳤습니다.

동경만 했던 정토 법당으로 발을 디딤

주간부 통일의병 도반들과 함께 (왼쪽에서 3번째)
▲ 주간부 통일의병 도반들과 함께 (왼쪽에서 3번째)

오가며 전봇대에 붙어있는 법륜스님의 불교대학 전단을 봤습니다. 주,야간으로 일을 하다 보니 공장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동경만 해오던 사하법당에 용기 내어 찾아갔습니다. 시작은 설레었지만, 법당 가는 길은 힘들었습니다. 그동안 억울하기만 했던 제 삶도 벅찬데, 저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법당에 나오는 다른 도반들은 다 잘나 보이고, 나누기할 때 너무 말을 잘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 한 것 같아서 마음이 쪼그라들었습니다. 잠재되어 있던 피해의식을 만났습니다. 정토회에 남고 싶은데, 저에게는 왠지 소임도 오지 않는 것 같고, 능력있는 사람에게는 소임이 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나의 피해의식이 만들어 낸 생각이었습니다. 누가 나를 밀어내지 않았는데, 제 눈에는 다들 초롱초롱해 보여서 그들이 거리감을 두는 듯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습관대로 생각하면서도 정토회가 너무 좋아서 어떤 소임이든 하면서 법당에 다녔습니다. 정토회에 첫 발을 디뎠던 4년 전의 저를 되돌아보면 서러운 마음이 올라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불법으로 찾은 새로운 삶

불대 도반들과 서울 평화시위 (왼쪽에서 1번째 )
▲ 불대 도반들과 서울 평화시위 (왼쪽에서 1번째 )

법문은 열심히 살기만 한 저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습니다. 제가 몰랐던 게 너무 많았습니다. 저 스스로가 억울함, 원망, 무서움, 불안함으로 제 마음을 딱딱하고 비좁게만 했음을 알아차립니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게 뭔지 전혀 모르고 살았습니다. 학습의 경험도 없고, 사람을 만난 경험도 없었으니 모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하마터면 평생 모르고 죽을 뻔했습니다. 불법을 만나 삶의 이치를 알아갑니다. 법문을 듣고 매번 다 이해하거나 깨닫지는 못하지만, 어느 순간 탁 '아! 이게 그런 거구나' 하는 순간이 많아지며, 법문이 법비가 되어 스멀스멀 젖어들었습니다. 그렇게 서서히 저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억울함이 녹아 눈물이 되어 흘렀습니다. 이전의 억울함으로 흘렸던 눈물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항상 쫓기듯 숨 가쁘게 살아온 저로서는 명상이 참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의 숨이 코끝에서 가슴으로 아랫배로 들어갔다 다시 제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을 느낍니다. 스님의 꾸준히 하라는 말씀을 의지처 삼아 해본 덕을 보는 요즘입니다. 생명체 하나 살아갈 수 없던 메마른 땅에 호미로 땅을 갈아 엎고, 생명의 영양분을 뿌리며 땅을 일구어냅니다. 법비로 물을 주고, 엎드려 절하니 저절로 참회가 됩니다. 불법에 기대어 매일 나를 돌이키고 알아차리니, 제 마음이 지렁이가 살 수 있는 기름진 땅이 되어갑니다. 눈물로 저를 표현하기보다 당당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엄마, 잘 가요.”

엄마가 입관하기 전, 마지막으로 진심을 담아 속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엄마 고생한 거 다 알아요. 제가 모르면 누가 알겠어요. 엄마 부디 좋은 곳으로 가세요. 막내딸이 엄마 너무너무 사랑해요. 잘 가세요.” 엄마를 그렇게 보내 드렸습니다. 49재는 사하법당에서 했습니다. 엄마는 당연히 49재 받을 자격이 있다고 제가 주장했습니다. 손수 만든 음식으로 49재를 잘 마쳤고, 보내드리는 제 마음이 좋았습니다.

인도성지순례 중 제일 기억에 남은 곳이 수자타 아카데미입니다. 아이들을 보면서 저 부모님들은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배우고, 친구들과 선생님과 함께 학교생활 하는 아이들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뿌듯할까? 엄마가 생각나면서 기억에 없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중학교 자퇴하기 전 엄마가 학교에 찾아왔을때, 담임선생님 앞에서 심각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모습. 우리 딸 학교 못 보낸다고 말하는 엄마의 가슴은 오죽 했을까? 내가 자식을 키우면서 돈이 없어 학원을 못 보낼 때, 전문대 보낼 때도 정말 미안하고 서러웠는데, 우리 엄마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느껴졌습니다. 그 순간 원망이 아닌 깊은 사랑을 느꼈습니다. 엄마의 아침밥으로 우리 가족은 뭉칠 수 있었습니다. 엄마의 사랑을 불법을 통해 알게 되었기에, 엄마를 더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또 엄마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으신 아버지를 보니 너무 늙고 야위어 보여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무섭고, 원망스럽기만 했던 아버지도 이제는 다르게 보입니다. 그 시절 왜 그렇게 했냐고 가끔은 따져 묻고 싶을 때도 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늘 불행한 기억만 생각났었는데, 딱 한 가지 좋은 기억이 있습니다. 집에 아버지가 누워 있었고, 엄마와 저는 그 옆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웃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저의 눈을 보며 제 말에 호응도 해주고 고개도 끄덕입니다. 그때 제 마음은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닙니다. 너무 좋으니까요. 얼마 전부터 제 기도문은 '고맙습니다. 이대로 충분합니다.' 입니다. 아버지가 없었으면 태어나지도 못했고, 우리 아들, 딸도 못 만나고, 너무 예쁜 손자, 손녀도 못 볼 뻔했습니다. 정토회에 들어와 불법을 만나서 삶의 기쁨을 온전히 느끼며 삽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어느 순간부터 애쓰지 않아도 옅어졌습니다.

2018년 인도 성지순례인도성지순례 떠나기 전 (앞줄 왼쪽에서 3번째 )
▲ 2018년 인도 성지순례인도성지순례 떠나기 전 (앞줄 왼쪽에서 3번째 )

수행법회로 뿌리 내리는 마음

수행법회는 지렁이가 영양분 가득한 땅에서 건강하게 살도록 돌보듯, 저 자신을 돌보는 것 입니다. 도반들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솔직한 나누기를 통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 되니 더 잘 들립니다. 도반의 나누기에서 저를 보게 되고, 마음의 중심을 잡아가는 과정을 듣고 있으면 '나도 저렇게 해 봐야겠다. 저렇게 하면 되는구나.' 라는 희망도 생깁니다. 그리고 수행법회에 참석할수록 정토회의 취지가 명확하게 들리고, 제 삶의 방향도 바로 섭니다. 자연스럽게 사람을 이롭게 하고, 나누게 됩니다. 자신을 타인과 늘 비교하고, 무시 당한다고 서러워 하던 것에서 벗어나, 형편껏 보시하고, 봉사를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마음 편한 곳이 없습니다.

주부가 부엌에서 살림 사는 게 일상인지라, 공양간에서 봉사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필연적으로 환경에 관심이 가게 되어 음식물 쓰레기 처리와 지렁이 키우는 일이 법당에서 저의 소임입니다. 소임으로 정해졌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제가 주체가 되어 행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행복한 고민이 시작됩니다. 음식물 쓰레기를 어떻게 지렁이에게 줘야 지렁이가 튼튼해질까? 음식물 쓰레기를 어떻게 말려야 잘 마를까? 고민하다 보니 건조대를 손수 만들게 됩니다. 법당 오자마자 지렁이 통 뚜껑부터 열어보게 됩니다. 그 자체가 기쁨입니다. 도반들은 그런 저에게 “잘하고 있어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괜찮아요. 좋아요.”라고 합니다. 그런 말을 들어본 경험이 없어, 불교대학 학생 때는 그 말이 저에게 하는 말로 들리지 않고 허공을 떠돌아다녔는데, 지금은 그런 긍정적인 언어들이 저의 몸속에 스며들면서 스스로에게도 사랑스럽게 말을 건넵니다. “고비고비 잘 견뎠다. 대견하다. 고맙다. 잘하고 있다.” 도반들의 지지와 위로가 제 마음을 튼튼하게 합니다.

정초기도 후 단체 사진 (둘째 줄 4번째 )
▲ 정초기도 후 단체 사진 (둘째 줄 4번째 )

봉사로 우뚝 서다

어느 날, 카톡으로 "옷 방에 법복 있어요. 챙겨서 입으세요."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도반이 강순자 이름표가 붙어 있는 법복을 선물한 것입니다. 메시지를 보자마자 이걸 내가 받아도 되나 싶고, 막연히 부담스러운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나는 법당의 중심인물도 아닌데, 이걸 입을 자격이 되나? 이걸 왜 나에게 줄까?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물을 준 도반이 “이번에 법복 맞춰 입었는데, 저희 엄마가 법복은 엄마가 해 주는 거래요. 엄마한테 못 배운 거 법당 가서 배우게 된다고 했어요. 보살님 선물 하나 챙겨 드리고 싶어요. 티 안 나는 봉사 많이 하셨잖아요. 그게 진정한 봉사죠. 제가 받은 선물 보살님께 드리고 싶어요. 혹시나 부담 가지 실까 봐 제 마음 전해요. 보살님 엄마 보내드리고, 그 마음에 법복 입혀 드리고 싶어요.”라고 하는데, 어찌나 말도 이쁘게 하는지 거절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챙김을 받는 느낌입니다. 저를 알아봐 준 도반의 지지가 저를 우뚝 서게 합니다. 제 안의 용기와 마음의 중심잡이가 됩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큰 소임이 왔습니다. 천일결사 10-1차 모둠장! 모든 것이 개편되어 복잡하고 혼란스럽지만, 이 법복을 입고 마음껏 봉사하고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정토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법복은 부담이 아니라 도반들의 확실한 응원입니다. 타인으로부터 저의 얘기를 듣고, 제가 그 말을 인정해 가는 과정이 저의 불안을 녹입니다. 살맛이 나니 행복합니다.

나는 수행자 강순자입니다

저는 참회의 시간이 좋습니다. 참회의 시간으로 제가 아프기도 하지만, 그 상처가 또 다른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제 상처가 치유로 되돌아옵니다. 이미 치유가 되고 있으니 어떤 상처를 만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저에 대한 믿음이기도 합니다. 법사님 만나면 뭔가를 얻어오게 되고, 그걸 수행 삼아 정진하다보면 제 삶의 방향은 행복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정토회는 제가 끝까지 있을 곳입니다. “나는 정토회 사하법당 소속 정토회원 강순자입니다.” 


도반들은 강순자 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든 분별없이 받아들이고 흔쾌히 자기 마음을 말합니다. 모르면 물어보고, 잘 듣고 자기화를 시켜 체득해 나갑니다. 그리고 기분 좋게 나눕니다. 늘 함께하고 싶은 도반이라며 방긋방긋 미소를 짓습니다.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도반들도 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강순자 님은 내 이야기 들어줘서 고맙다며 추어탕 한 그릇을 사주셨습니다. 희망리포터는 강순자 님의 인생을 들을 수 있어서 이 소임이 감사했습니다. 헤어질 때 제 두 손을 잡으며 정성스럽게 잘 가라 하십니다. 그 동안의 삶을 살아낸 그 손결이 제 손등에 머물렀습니다. 재봉틀 앞에 앉아있는 그 아이가 떠올라서 살짝 눈물이 났습니다. 고맙다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고맙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글_허승화 (사하정토회 사하법당)
편집_서지영(홍보국 홈페이지운영팀)

전체댓글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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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희

잘 읽었읍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이내요. 감사합니다.

2020-04-03 15:48:28

정이다

감사합니다.... 살아온 얘기, 수행얘기를 들으며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좀더 따뜻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수행하겠습니다.

2020-04-02 11:34:53

백상희

제가 잘못으로 저도 모르게 김미화님의 댓글에 신고를 눌러버렸네요..어떻게 하나요? 정말 미안합니다. 그냥 댓글을 읽다가 전혀 모르고 눌러버렸습니다. 실수로요...정말 미안합니다. ㅠㅠ

2020-04-01 22:4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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