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파리법회
서울에서 파리까지, 나는 어디서나 정토행자입니다
파리열린법회 담당자 박지현 님

[유럽지구 파리열린법회]

서울에서 파리까지, 나는 어디서나 정토행자입니다

파리열린법회 담당자 박지현 님을 소개합니다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은 동경의 도시파리에도 정토행자들이 열심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2008년 10월부터 시작한 불교대학은 2016년이면 4기 불교대학 개강을 앞두고 있고그사이 경전반도 1기를 마쳤습니다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꾸준히 열린법회를 담당하고 있는 박지현 님을 인터뷰하면서 정토회와의 인연이 무척 오래되었음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박지현 님은 2006북한의 식량난과 난민 실태를 국제사회에 알린 공로로 '사단법인 좋은벗들'로부터 감사패를 받았습니다전법하기 어려운 척박한 외국에서 수행과 전법의 줄을 놓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박지현 님을 통해 아름다운 정토행자의 모습을 봅니다.

정토회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했나요?

제가 27살 때 즈음그러니까 1987년 정도였던 걸로 기억해요불교 철학에 관심이 있어서 금강경이나 반야심경 강의하는 곳을 찾다가 친구소개로 홍제동 정토법당에 처음 가게 되었어요그때 스님은 아직 출가하기 전이셨고 아직 소수의 사람이 있던 때였죠그래서 반야심경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처음 들었던 강의가 강하게 인상에 남은 건 아니었지만분위기는 뭔가 달랐어요기복신앙은 아니었고좀 젊고 이성적이고 실천적인 느낌이 들었어요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보고 싶었으니까 그런 점은 좋았지만그렇다고 제가 철저하게 사회 참여적인 운동을 원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뭔가 조금은 부담스러운 분위기도 있었지요그래도 사람들은 참 좋았어요좋은 사람들이고 바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죠그래도 열심히 참여하기보다는 적당히 왔다 갔다 하면서 인연을 이어가다가 제가 인생에서 아주 큰 불행을 당했을 때 큰 전환점이 되었죠.

 

위기의 순간에 구명보트가 되어준 정토회

결혼 한지 몇 년 안 된 32세 때제가 사고로 남편을 잃게 되었어요젊은 시절 그때는 혼자 모든 걸 감내하기가 너무 힘들었고 정신이 없었어요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게 정토회였어요그래서 장례식을 도와달라고 전화를 했지요그렇게 제가 가장 힘든 시기에 도움을 받고는 정토회와의 인연이 급속도로 진전이 된 거랍니다남편을 잃고 정신이 없을 때 슬픔에 빠지지 말라고 스님이 기도문 주신 것도 많이 도움이 되었고어찌 살아야 할지 두려움이 앞설 때 돌아갈 곳이 있다는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준 것도 정토회였죠.

어찌 보면 이성적이길 원했었지만철저히 이성적이었다기 보다는 결국은 내가 힘들 때 붙잡을 수 있었던 단 하나의 구명보트였다고나 할까요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정토회라는 단체를 더 이해하게 되고스스로 모습도 알아가면서 인연이 깊어진 거니까 결국은 잘 된 일이죠나란 사람이 별로 이성적이지도 않았고내가 추구하던 행복도 너무나 부서지기 쉬운 거였고그리고는 막연히 잘나고 싶었던 젊은 시절의 허상에 비해 현실의 나는 참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죠내가 내 인생을 맘대로 사는 것 같았는데 그런 일을 당하게 되니까 뭔가 나의 의지를 벗어난 삶의 흐름에 좀 더 겸손해지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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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한민족 포럼에 참석한 법륜스님과 함께 (왼쪽 두번째 

 

파리에 오기 전까지 정토회에서 어떤 활동을 했나요?

제가 직장생활을 10년 정도 한 36살인 1996년에회의가 들었어요직장 속에서 부딪히는 문제도 버거웠고이렇게 그냥 살다 죽으면 인생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그래서 우선 1년을 놀아 보자고 직장을 관두고 여행을 다니면서 쉬고 있었는데스님이 부르시더니 북한 동포돕기 운동을 해야겠는데네가 국제부를 맡아서 해보면 좋겠다.” 라고 하시더군요그래서 흔쾌히 그러겠습니다.” 했어요할 수 있다면 기꺼이 뭔가 도와드리고 싶었어요사실 제가 외국인 회사에서 일했다고 해도 영어를 그렇게 잘한 것도 아니고 능력도 부족했지만정토회에 진 빚도 있고좋은 일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하고 싶었어요그래서 1996년 10월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우리 민족 서로 돕기 불교운동본부’(1996.12 설립)에서 일하고 생활하게 되었어요처음에는 우리 민족 서로 돕기 불교운동본부였지만 1999년 5월에 좋은벗들로 단체가 바뀌어서 2000년 10월까지 일했고잠시 개인 사정으로 실무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2004년 11월에 평화재단이 창립되면서 거기서 국제부를 맡았지요그러다가 2006년 9월에 지금의 남편을 따라 프랑스로 이주하게 된 겁니다.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다면?

우리가 북한 동포돕기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1996년 후반에는 북한 상황이 심각한 때였어요만성적 경제위기에 있던 북한이 2년에 걸친 대홍수를 겪으면서 대량 아사가 시작되었지요. 1997년 즈음에는 두만강 변에서 찍은 주검의 사진을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그걸 알리기 위해서 스님이 정말 온 힘을 기울이던 때였는데그러기 위해서 북한 식량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한 조사를 1997년 9월부터 연변지역에서 시작했고그것에 근거한 보고서를 만들고 번역해서 미국 정부에 알리고 인도적 지원을 요청하는 일들에 힘을 쏟던 시기였어요연변지역에서 몇 명의 실무자들이 긴급 지원이나 조사를 위해서 일했고한편으로는 1997년 말부터 나진 선봉지역에 공장을 세워서 어린아이들에게 지속해서 영양식을 지급하고정부 채널을 통한 식량 원조또 100만인서명운동(1997년 8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던 때였어요소수의 인력으로 일하자니 밤잠을 안자고 일해야 했고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큰일을 하자니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어요.

지금도 가끔 생각하면 끔찍한 일 중 하나가 대인지뢰 금지활동으로 1997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죠디 윌리엄스가 그다음 해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공항에서 기자회견을 하는데 저보고 통역하라는 거예요그래서 제가 그런 거 못 하니까 전문가를 찾아야 한다고 했는데그냥 하라고 해서 하게 됐어요그렇게 많은 기자 앞에서 제가 서본 적도 없고 조그만 실수라도 그게 얼마나 큰 문제가 되겠어요!!! 암튼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해요무식하니까 용감한 거라고별 해프닝 없이 지나간 게 감사할 뿐이죠사실 이런 무모함이 전반적인 우리의 일 방식이었어요그때는 그게 최선이었거든요그렇게 성심껏 달걀로 바위를 치는 일을 반복하신 게 사실 스님이셨답니다.

 


▲ 
2009년 불교대학 졸업식과 수계식 (뒷줄 가운데)

  

다만 할 뿐이라는 스님의 뒤를 따라

미국으로 가서 북한 상황을 알려야 하니까스님이 저보고 미국 행정부에서 북한 문제에 관심이나 관련이 있을 만한 몇몇 군데에 팩스를 보내서 약속을 잡으라는 거지요그래서 그때 미 행정부 조직을 보면서 담당이 누군지 찾아 여기저기 다짜고짜 팩스를 보내는 식이었어요. '우리는 이런 단체인데대표인 법륜스님이 북한 식량 상황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싶어 하니까 만나주면 좋겠다'는 내용의 팩스를 여기저기 보낸 거예요그러다가 어딘가에서 답변이 오면 스님이 만나서 보고서 전달하면서 설명하고요이런 일을 꾸준히 지금까지 이어가시고 계신 거지요.

 

지금은 제이슨같이 유능한 통역자가 있어서 스님의 말씀이 잘 전달되어 좋지만그 당시는 정말 상황이 열악했어요영어도 못하는 스님이 혼자서 보고서를 잔뜩 복사해서 괴나리봇짐에 지시고 홀몸으로 미국으로 가서의문과 호기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미국 정부요인들에게 그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셨을지 상상이 가나요달걀로 바위 치기 같았던 활동을 20년이 되도록 성심으로 지속하고 계시니까 이제는 정말 제대로 된 대접과 존경을 받으며 스님의 견해를 전달할 수 있잖아요이런 점이 스님을 보면서 참 존경스럽고 놀라운 점이에요.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은 정토회에서 봉사한 것

돌이켜보면전 스님을 아주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함께 일할 수 있었던 큰 복을 갖은 사람이었어요제가 봉사한다고 한 일이었지만사실 제 업식이 스님 옆에서 많이 닦여지고 밝아진 시간이어서 제가 얻은 게 더 많지요스님과 현장 실무자들과 중국 국경 변에서 탈북난민무리를 만났던 일외신기자 데리고 탈북난민 취재 했던 일미국 외교관계위원회 관계자와 탈북난민 인터뷰했던 일, USAID 책임자와 국경 방문 했던 일 등다 기억에 남는 일이었죠. 6차에 걸쳐 보완하면서 1998년 12월에 완성한 <북한식량난민 1,694명 면담조사결과보고서>가 그 당시 실무자들이 총력을 기울였던 업무였고요, 1999년 6월에 발행한 <중국 내 탈북식량난민 인권보고서 중국 3성의 2,479개 마을조사>도 버금가는 중요한 일이었어요그 이후 이 보고서들이 국내/국제사회에서 공공연하게 ‘300만 명 아사라는 언급을 가능하게 했고다양한 연구의 참고자료로 쓰이게 되었거든요그 당시 인권보고서를 쓰면서 난민들이 쓴 글을 읽으며 참 많이 울었어요한 사람 한 사람의 글이 정말 너무 가슴 아팠고특히 중국에 팔려 와서 성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북한 여성의 글을 읽을 때면 가슴이 미어지면서 누군가는 이런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분연함도 느끼곤 했죠.

  

 
▲ 
8-5차 천일결사 입재식에 참석한 파리법회 도반들  


단 한 명이 남을지라도

앞으로 정토회 활동에 열정을 갖고 할 후임이 나올 때까지 내 자리를 지키면서 전법 할 생각이에요지금은 좀 주춤하고 있지만다시 시절 인연을 만나면 꽃이 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순간순간 깨어 행복하게 법을 전하며 살겠다고 다짐해봅니다.

 

_신재숙 희망리포터

전체댓글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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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영

정토회의 역사를 들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시는 스님과 선배 도반님들 감사합니다.

2015-11-29 20:47:25

천진경

감동입니다.

2015-11-27 08:03:21

한주연

박지현 보살님, 감사합니다. <br />저희가 그런 공덕을 지금까지 잘 살고 있는 거군요. <br />좋은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br />신재숙 보살님께도 좋은 글 감사드려요~

2015-11-25 20:3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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