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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손님이다."
20년 전, 남편이 내게 한 손님(A라고 하자)을 가리키며 했던 말이다.
"앗, 사장님 손님(A)오시네요."
10년 전, 직원이 했던 말이다. 그렇다. 이사를 가서도 우리 매장을 찾아주는 A 손님은 나만 상대할 수 있는 손님이다. 남편과 직원은 A 손님만 오면 슬쩍 자리를 비켰다. 그러나 나도 이젠 온몸으로 버겁다. 내 마음속에서는 열두 번도 더 ‘그냥 그 동네에서 사세요’라는 말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이 서리 콩 튀긴 거 딱딱해? 안 딱딱해? 이 반건조 오징어는 맛있어? 맛없어? 저 밑에 있는 걸로 꺼내 봐. 나 바빠. 빨리빨리 꺼내봐."
A 손님은 물건 하나를 사기 위해 열 개, 스무 개를 다 뒤집는다. 물건 고르는 정성이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이날도 역시나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튀긴 서리 콩 한 봉을 사기 위해 진열된 것들을 다 끄집어냈다.
"빨리 골라봐. 어떤 게 좋은 거야? 응? 빨리빨리 봐봐. 골라줘."
처음에는 내가 순진해서 A 손님의 말을 진심으로 듣고 물건을 정성껏 골라줬다. 그러나 나도 정토회 밥을 먹은 지 15년, 노련한 사람이다. 선택은 그 사람에게 맡길 뿐, 절대 골라주지 않는다. 내가 골라주면 다음번에 이 말을 들어야 한다.
“자기가 골라준 물건, 안 좋았어!”
그 여러 번의 경험이 나를 단련시켰다. 물건이 좋으냐 물어도, 맛있냐고 물어도, 내 대답은 똑같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다고.... 난 이렇게 A 손님 앞에만 서면 한결같은 사람이 된다.
말이 길었다. 나를 한결같게 만드는 그 A 손님이 온 것이다. 사실 그 A 손님이 오면 살짝 기대하는 마음도 있다. ‘오늘은 내 마음에서 어떤 분별이 올라올까?’ 왜냐하면, A라는 손님에게 단 한 번도 분별심이 올라오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싫다, 좋다’라는 한 생각에 사로잡히지만 않으면 손님들을 대할 때 재밌다.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탐구로, 수행과제로, 삼기에 좋다. A 손님이 왔을 때, 가게에는 B 손님과 C 손님 두 명이 더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물건을 헤집으며 고르고 또 고른다.
"콩이 갑상선 저하증에 나쁜 거 아냐? 나 갑상선 저하증이란 말이야." 그러면서 계속 튀긴 서리 콩을 다 꺼내서 뒤적거리다 겨우 하나를 선택했다. 봉지에 담아 달란다. 어짜피 차를 가지고 와서 그냥 들고가도 되는데 꼭 봉지를 찾는다.
우리 매장이 비닐 대신 보자기를 쓴 지 7년이 넘었다. 정토회 환경 담당이었던 한 도반의 권유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보자기에 싸가는 것을 창피하다고 했던 손님들이 지금은 집에 있는 보자기까지 갖다주며 동참한다. 이렇게 최대한 비닐을 안 쓰려고 하지만 먼 곳에서 오는 손님의 경우는 비닐을 쓰기도 한다.
문제는 그 비닐봉투에서 시작했다. 카운터 안쪽에 비닐이 있다는 걸 아는 A손님은 손을 뻗어 비닐을 왕창 뜯는다. 말릴 틈도 없다. 자기 비닐 쓸 일 있다며 뜯어가는 것이다. 그것도 한두 장이 아니라 묶음의 1/3 정도를...
‘아, 또 시작이네. 아니 어떻게 매번 올 때마다 저러냐. 한두 번도 아니고. 부끄럽지도 않나?’라고 내 입은 움찔움찔했고, 가슴은 불타는 용광로가 되었다. 이미 얼굴은 열이 올라 붉게 달아올랐다.
A 손님 : "나, 비닐 필요해. 빨리 더 줘. 멀리서 여기까지 오는데 이 정도 서비스는 해줘야지. 백화점은 서비스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아니, 그럼 그냥 백화점을 가세요! 뭐하러 기름값 아깝게 여기까지 와요?’라는 말이 곧 튀어나오는 걸 꾸역꾸역 삼키느라 체할 뻔했다. 그때 매장에 있던 B 손님이 A 손님의 비닐 뜯는 행동을 흘낏 봤다. 난 속으로 ‘아싸,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구나’를 생각하며 뿌듯했다. 이해받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내 편으로 굳히기 위해 나는 분별심을 잠시 버리고, 최대한 친절한 모습으로 A 손님을 보냈다. A 손님이 가고 B 손님이 내가 기다리던 말을 꺼냈다.
"아니, 그 A 손님은 왜 마스크를 제대로 안 끼세요? 지난번에도 마스크를 턱에 걸치더니 오늘 또 그러시네. '마스크 똑바로 끼라'는 말이 여기까지(자신의 목을 가르키며) 올라왔는데 겨우 참았어요. 정말 타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도 안 하는 사람 같아요."
헉, 나는 몰랐다. A 손님이 마스크를 끼지 않았다는걸.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비닐 뜯어가는 행위를 같이 비난할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내가 보지도 못한 마스크 이야기다. 그때 B 손님이 다른 C 손님에게 묻는다.
B 손님 : "A 손님, 마스크 안 쓴 거 보셨죠?"
C 손님 : "마스크 안 썼어요? 저는 그건 못 보고, 갑상선 저하증이라길래 뭐 먹으면 좋은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어요."
나 : “그럼 비닐 뜯어가는 것에는 마음이 안 불편했어요?"
C 손님 : "그냥 뭐, 독특하다는 정도?"
B와 C 손님과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이건 뭐지? 왜 다르지?'라며 잠시 멍했다. 그러다 우리 셋은 빵 터졌다. 우린 모두 각자가 쓰고 있던 안경의 색깔로 A 손님을 본 것이다.
‘옳고 그름이 없다는 말이 이런 것이구나.’ 나는 비닐 뜯어가는 것에 짜증 났지만, B 손님에게 그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되었다. 심지어 C 손님은 비닐뿐만 아니라 마스크까지도 문제가 안 되고, 자신이 궁금한 걸 물어보지 못한 아쉬움만 있을 뿐이었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경험이었다. 우리 세 사람은 서로 본 것이 다름에 재밌어했다.
나 : 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우리가 지금 똑같은 상황을 봤는데 생각이 다 달라요. 내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저는 왜 저 손님은 올 때마다 남의 물건을 공짜를 가져갈까, 걸렸거든요. 그래서 마스크는 전혀 눈에 안 들어왔어요.
B 손님 : 저는 사장님이랑 C 님이 A 님 마스크 안 쓴 걸 못 봤다는 게 더 놀라워요. 어떻게 못 보지, 싶어요. 제가 코로나로 사람들 마스크 안 쓰는 것에 엄청 민감하거든요. 그래서 그것만 제 눈에 보이네요. 다 저처럼 생각하는 줄 알았어요.
C 손님 : 제 딸이 갑상선 저하증이라는 진단이 나와서 A 님이 갑상선을 말하길래 귀가 번쩍했어요. 그래서 다른 행동은 안보였어요. 저는 어떻게 치료했는지 묻고 싶었는데 못 물어 아쉬워요.
이 경험은 또 한 번 내가 사물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내가 본 것이 꼭 옳은가를 되묻게 했다. 마스크를 안 쓴 겉모습도 제대로 못 본 내가 그 사람을 정확히 봤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 스승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 백번 공감 가는 날이었다. 상대의 행동을 탓하지 말고, 내가 어떻게 살면 좋을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 지금 나는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 분별을 안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을 내고도 알아차리고 돌아보는 힘. 어느새 수행자의 싹이 조금 자랐다.
글_권영숙(홍보시스템팀 정토행자의 하루)
편집_권영숙(홍보시스템팀 정토행자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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