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8대 성지를 15박16일 기간동안 방문합니다.
네팔과 티베트의 경계는 북쪽으로 8,000m 이상 되는 큰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다. 그러나 남쪽으로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산은 점점 낮아져 룸비니 지역에서는 전혀 볼 수 없으며 완전한 평원을 이룬다. 그나마 히말라야산과 가까운 이유로 개울에 많은 돌들이 뒹굴고 있다. 고락푸르에서 북쪽으로 오다 보면 소나울리를 지나 바이라하와를 거쳐 서쪽으로 가면 발가하와에서 20Km 정도 떨어진 곳에 룸비니가 있고, 계속 더 올라가면 카필라바스투성이 나온다. 바이라하와에서 오른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 로히니강이 흐르고 있는데, 이 강을 경계로 카필라성과 마야부인의 고향인 콜리성이 위치하고 있다. 한참 가물었을 때 이 강줄기 때문에 두 나라가 전쟁 직전까지 갔으나 부처님이 말리신 기록이 남아 있다.
네팔은 인구의 50% 이상이 불교도이지만 국교는 힌두교이다. 인도사람처럼 보이는 얼굴은 대부분 힌두교도들이고, 몽골리안들은 거의 불교도들이다. 히말라야 등반으로 외국인이 많이 왕래함으로 인도보다는 국가정책이 개방적이며, 인도보다 경제가 궁핍하나 생활수준은 거의 같다.
네팔에 위치한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는 불교성지 중에서 제일 먼저 황폐화되었던 것 같다. 현장스님이 왔을 때 이미 폐허가 되어 완전히 정글로 덮여 있었고, 강도가 많아 순례객들이 이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불교가 사라지고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이 곳을 다행히 아쇼카 석주의 명문을 근거로 커닝험이 찾아낸 곳이다.
보드가야 주위는 부처님이 성도하시기 전 6년간 고행하신 곳이며, 부처님이 성도하신 곳이며, 성도하신 뒤에 교화하여 1,000명의 제자를 한거번에 두게 된 곳으로 수행과 성도와 교화의 사례가 같이 공존하는 지역이다. 이 곳은 가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나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곳이라 하여 특별히 보드가야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처님은 룸비니에서 태어나 약 28Km 떨어진 카필라바스투에서 29살 까지 왕자로써 성장하셨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리고 카필라바스투에서 출가하여 바이샬리를 지나 라즈기르로 들어오면서 두 분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그 곳에서 아라라까리마와 웃타카라마푸트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드디어 스승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지만, 그것이 완전한 해탈의 길이 아님을 알고 다시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그 당시 수행자들이 모여들던 곳인 가야로 오신 것이다. 여기서 6년간 정진을 하시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시게 되었다. 성도 후 옛 도반인 다섯 비구를 찾아 서북쪽으로 걸어가셔서 바라나시 근방에 있는 사르나트에서 다섯 비구에게 첫 설법을 하시고, 다시 보드가야로 돌아와 가섭 삼형제를 교화하셨다.
바라나시에서 도시의 혼잡함을 벗어나 가로수 길을 따라 북동쪽으로 약 7Km 떨어진 곳에 잔디밭이 넓게 펼쳐진 공원이 있다. 이 곳이 부처님의 초전법륜 성지인 사르나트이다. 박물관을 지나 사슴동산이라고 써 놓은 곳으로 들어가면 녹야원이다. 이 곳을 중심으로 왼쪽은 다르마라지크 스투파, 오른쪽은 다메크 스투파이다. 다르마라지크 스투파를 지나 뒷쪽에 물간다쿠티가 있는데 녹야원이란 뜻이며, 다메크 스투파보다 더 오른쪽으로 신축한 삐죽한 모양의 건물이 현재의 녹야정사라고 불리우고 있다. 다르마라지크 스투파에서 조금 왼쪽으로 가면 아쇼카 석주가 있고, 그 옆으로 원래 녹야정사가 있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 아쇼카왕 때 이 곳에서 수백 명의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정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때의 정사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발굴해 놓은 자리만 남아 있다.
5세기에 이 곳을 다녀갔던 법현스님은 이 곳에 두 개의 승원이 있고 승려가 살고 있다고 했고, 그 이후의 현장스님의 기록에는 담장과 중각이 즐비하여 아름다우며 정사가 있어 1,500명의 승려들이 면학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주위에는 다르마팔라가 조직한 마하보디 소사이어티에서 세운 절과 여러 개의 학교가 있고, 티베트 사람들이 지은 절과 대학이 있다. 티베트 대학은 인도정부에서 후원하고 있기 때문에 학비는 무료이다. 인도정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도 불구하고 티베트 난민들을 위해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마가다에서 바이샬리를 거쳐 쿠시나가르까지 이르는 길은 북서쪽으로 뻗어 있으며, 가던 방향으로 계속 연장하여 보면 그 곳은 카필라성과 이어진다. 이로 미루어 부처님의 마지막 유행은 고향인 카필라성을 향한 것이 아니었을까. 머리를 북쪽으로 두신 것도 고향을 향한 것이었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쿠시나가르는 고락푸르의 동쪽 55Km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부처님께서 교화의 긴 여정 끝에 열반에 드신 곳이다.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쿠시나가르처럼 작은 마을, 외진 시골에서 열반에 드시려는 것은 그만 두시옵소서"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지금은 이처럼 작은 마을이지만, 옛적에는 그렇지 않았느니라"라고 하시며 쿠시나가르는 부처님 이전에 매우 풍요롭고 번영하였던 마을이었으며 먼 미래에 이 곳이야말로 성스러운 곳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아난존자가 그렇다면 숲에서가 아니라 말라족의 성안에서 열반에 드시면 어떻겠느냐고 청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여래의 마지막 열반을 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다 나를 만날 수가 있어야 한다. 내가 만약 성안에서 열반에 든다면 어떤 사람은 나를 친견하고 싶다 하더라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해서 왕족이든 천민이든 짐승이든 누구라도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다 이 곳에서 여래의 마지막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곳은 불자들은 물론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성스러운 마을이 되었다.
라즈기르는 강대한 북인도의 군주국가 마가다국의 수도였다. 인도에서 산을 보기는 참으로 드문 일인데 바이바라 언덕과 비푸라 언덕, 라트나 언덕, 찻타 언덕, 소나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는 천연의 요새이다. 라즈기르는 빔비사라왕이 머물고 있던 구 왕사성과 아들인 아잣타삿투왕에 의해 건리됩 신 왕사성으로 나뉘어져 있다. 2,500년 전에 쌓은 옛 성의 방벽은 길이가 무려 40Km나 되며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 중에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성벽이라고 한다. 당시 강가강 북쪽의 강대국이었던 코살라국을 의식해 튼튼히 쌓은 것으로 보인다.
북인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꽃피우던 왕사성은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고장이다. 카필라바스투를 떠나 출가하여 이 곳에서 두 분의 스승을 만나 수행하였고, 빔비사라왕과 첫 만남을 갖게 된다. 성도 후 천 명의 비구를 이끌고 돌아와 오랫동안 머물며 교화 설법하시며, 빔비사라왕은 물론 사리푸트라와 목갈리나 등 유능한 제자가 귀의하였고 최초의 불교사원인 죽림정사를 기증받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관개용수의 부족으로 파탈리푸트라로 수도를 옮겨 이 곳은 차츰 황폐해졌다.
불교의 쇠락으로 이 곳 불교성지는 소수의 바라문과 자이나교도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이 곳 라즈기르는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의 중요한 수행처로서 현재에도 많은 자이나교 사원이 세워져 있으며 신자들의 순례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쉬라바스티는 강가강 서북쪽에 위치한 코살라국의 수도였다. 그 당시 인도에는 300여 개의 나라가 있었으나 코살라국과 마가다국은 고대 북인도를 형성하고 있었던 16개의 나라들 중 가장 강력한 군주국가였다. 코살라국은 매우 호전적이고 다혈질의 기질을 가진 국가로 강한 군사력으로 번영을 이룩했던 나라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폐허로 변해 버린 채 드넓게 펼쳐진 밀림의 모습만 말없이 보여줄 뿐 세월의 흐름에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마가다국은 오랜 문화와 전통을 갖고 있는 온화하고 역사 싶은 나라라고 한다면, 코살라국은 신흥 국가로 경제, 정치, 군사력은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했지만 문화, 종교, 사상적인 면으로는 뒤처지는 편이었다. 전쟁을 좋아하며 거칠고 강한 기질을 가진 코살라국은 수행자를 존경한다거나 그 중요성을 전혀 몰라 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데 무척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한 이유로 자이나교와 아지비카교 외에도 많은 외도들의 사상이 매우 팽배해 있었던 이 곳을 배경으로 여러 가지 사건과 부처님을 비방하고 위해하는 무수한 일화가 경전에 많이 나온다.
부처님은 도를 이루시고 3년째 되던 해 사위성에 첫발을 디디신다. 그 이후 이 곳은 부처님의 중요한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경전상에 쉬라바스티를 배경으로 한 일화가 많고 또 많은 경전을 설할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께서 45년간의 교화여정 중에 이 곳 사위성에서 24안거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 중에 19안거를 수닷타장자가 부처님을 위해 마련한 기원정사에서 머무셨는데, 주변에는 숲이 우거져 있고 밝고 안온하여 수행처로는 아주 적합한 장소로 부처님이 아주 사랑하셨던 곳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파탈리푸트라까지가 마가다국 영토이고, 강을 건너 북쪽은 경전에 자주 나오는 밧지족의 영토였다. 파트나에서 세계에서 가장 긴 10Km가 넘는 마하트마 간디 브릿지를 건너가면 인도 최대의 바나나 집산지인 하지푸르를 지나 8대 성지 가운데 하나인 바이샬리가 나온다.
파트나를 흐르는 강가강은 북쪽 히말라야에서 내려오는 칸타키강, 골고라강, 야무나강이 합쳐진 강가강과 데칸고원에서 흘러오는 손강 등 네 개의 강이 모여 하나가 되어 흐르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이 네 개의 강에 비유하여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세상에는 브라흐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계급 차별이 있지만 내 법 안에는 없다. 네 개의 강이 결국 하나가 되어 흐르듯 내 법 안에서도 하나가 된다."
바이샬리는 북인도 일대의 교통, 문화, 경제의 중심지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여 그 당시 가장 화려하고 부유했던 아름다운 도시였으며, 자유로운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언론과 새로운 사상을 마음껏 누리던 인도 최초의 공화국이었다. 그래서 열반경에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으로 밧지족의 나라가 망하지 않는 법 7가지를 설하시는 모습이 있다. 역사적으로 공화국제도의 기원이 이 곳이라 해서 지금도 인도 중앙정부에서 국회가 개원할 때면 관리들이 이 곳 카라우나 포칼 연못에서 물을 떠 가지고 가서 성수로 사용하며 의식을 집행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도리천에 올라가 3개월간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법을 설하시고, 이 곳으로 하강하신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하늘과 인간세계를 잇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장소로 더욱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하여 아쇼카왕은 이 곳 상카시아에 많은 스투파와 대규모의 사원을 건립하였고, 또 아쇼카 석주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발굴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불교유적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고, 현재 불교의 유적지로 추정되는 허물어져 있는 탑 위에 힌두사원을 세워 링가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 아쇼카 석주의 머리 부분인 코끼리 두상만이 그 곳을 지키고 있다. 상카시아를 상징하는 조각으로 세 개의 계단이 있고 가운데 부처님을 모시고 좌우로 범천과 제석천이 시립하고 내려오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지금 이 곳에 남아 있는 것은 계단은 다 부서지고 발 모양만 세 개 남아 있을 뿐이다.
유일한 석가족의 후예로 붓다라는 성을 갖고 있는 불교인들이 이 지역에 아직 살고 있다. 인도에 불교가 없어졌을 때도 조상 대대로 불교를 믿어온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상카시아 근방 메인뿌리, 이따와란 도시에 불교청년회를 조직해 회원이 2,000명이나 되고, 인도 전역에 그 지부를 갖고 있으며 힌두어로 된 불교잡지를 격월로 발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