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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으로 함께 하는 부부, 삶을 바꾸다
정아영 님, 이승준 님은 부부입니다. 정토회와 인연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직장 일과 육아, 봉사까지 잘 해내고 있는 전주지회의 자랑입니다. 남편 눈치를 보며 활동하는 도반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두 부부는 ‘정토행자의 하루’에 실릴 만한 자격이 없어 부끄럽다고 말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정진하겠다는 다짐을 ‘시위를 떠난 활처럼 살겠다’라는 발원문으로 전했습니다. 평범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 더 본받고 싶은 정아영, 이승준 부부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부모의 그림자 아래 ♤ 정아영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려서부터 상실감과 열등감이 컸습니다. 세 살부터 일곱 살까지는 외가에서, 이후 대학 입학 전까지는 여동생과 함께 친할머니 집에서 자랐습니다. 나이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는 제 또래에 맞는 옷이나 필요한 학용품을 제때 챙겨주지 못해 힘들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조손 가정의 자녀가 저밖에 없었습니다. 놀림 받지 않으려 친구들을 먼저 공격하는 일이 잦아 초등학교 6년 내내 거의 매일 싸움을 했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좋은 직업을 가져야 하고 돈도 많이 벌어야 하며,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골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부밖에 방법이 없다고 믿어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전부 돈과 지위로 판단했습니다. 제가 돈과 지위를 가지지 못한 것은 부모님 지원이 없었기 때문이라 여기며 부모님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이혼 후 어린 딸 둘만 두고 나간 부모님과 20년 만에 재회했을 때에는 돈도 없고 성공하지도 못한 부모님의 모습에 더욱 실망하고 싫어했습니다. 이러려고 나를 버렸나 싶었습니다. 24년 9월, 보리수 정진 중 화분 정리 ♠ 이승준 어린 시절 말 잘 듣는 소극적인 아이였습니다. 어머니는 의상디자이너였지만 사업이 기울어 빚이 많았고, 아버지는 빈민가에서 자라 마흔까지 119 구조대 소방관으로 일하며 늘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첫아들인 제게 위험한 일은 절대 못 하게 했고 자전거도, 친구들과 시내에 나가 피자 먹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사로 전직하신 후에는 제가 판사, 검사가 되기를 바라며 공부 압박이 더 심했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기대와 바람을 인정하고 그 길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부모님의 삶을 이해하기 때문에, 미워할 수 없었습니다. 스무 살에 법대에 진학했으나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았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아버지에게 법 공부를 그만두겠다고 어렵게 말했고, 아버지는 화를 내긴 했지만 제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제가 법대를 그만둔다는 말에 어머니는 일주일째 식사를 하지 않았고 저는 다시 법 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전히 공부할 수 없었고, 학원 강사 일로 생활비를 벌어 23년간 다른 일을 찾아 방황했습니다. 방황이 길어 늦은 나이에 군에 입대했습니다. 장교로 약 4년의 군 생활을 하게 된 김에, 제게 맞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서 군을 나오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군 생활이 체질에 맞아 524명의 장교 후보생 중 수석으로 임관해 국방부 장관상을 받았습니다. 직업 군인처럼 전력으로 4년을 보내니 정작 ‘내가 원하는 일’을 찾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전역 후 부모님은 “따로 원하는 일이 없으면 로스쿨에 1년만 다녀보자”라고 했고, 2학년이 되자 “변호사 시험 딱 한 번만 봐 보자”라며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별 뜻도 없이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역시나 변호사 업무는 제게 맞지 않았습니다. 진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돈이 없었습니다. 소송은 대부분 정의와 무관했고, 누가 더 잘하나 겨루는 ‘그냥 싸움’으로 느껴졌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안 보이던 사람도 막상 소송이 시작되면 적나라한 욕망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점잖아 보이는 사람들도 변호사 앞에서는 속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니 인간에 대한 신뢰가 많이 깨졌습니다. 또 수임료를 준 만큼 승소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전화로 빈번히 이루어지는 압박을 견디기도 어려웠습니다. 24년 4월, 광주전라지부 5.18 역사기행 사진 봉사 삶이 멈춘 순간 만난 정토회 ♤ 정아영 남편과는 달리 저는 원하던 변호사가 되었고, 돈도 그럭저럭 벌었습니다. 그런데도 항상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어떤 물건에 꽂히면 비싸더라도 꼭 사야 했고, 모임에 갈 때는 미용실에서 머리 손질에 메이크업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초라하면 밖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 일을 많이 하다 보니 고객이 돈으로 보였습니다.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수임료가 높은 사건은 무조건 이겨야 했습니다. 자존감은 점점 낮아지고, 남과 비교하며 늘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에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 아이를 유산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가진 아이라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에 고통을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재판도 미뤄둔 채 온 가족이 두세 달 정도 집에만 있었습니다. 잠옷만 입고 지내며 세수도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과 눈만 마주쳐도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즈음 첫째 아이가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글자에만 집착해 자폐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습니다. 제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상상에 불안이 점점 커져 고통이 컸습니다. 그러던 중, 3년째 정토 불교대학을 권유하던 도반의 전화에 그해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25년 2월, 2차 만일결사 1차 천일결사 제8차 입재식 공연 ♠ 이승준 평소 아내가 ‘불안 수준’이 높았습니다. 아내가 저에게 많이 의지하는 편이라, 자식 둘을 키우는 기분이었습니다. 아들도 돌보고, ‘큰딸’ 같은 아내도 챙겨야 했고, 변호사 일도 해야 했습니다. 점점 몸이 지쳐가니 아내에게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아들을 돌보다 잠깐 쉴 틈이 생겨도 반드시 아내를 챙겨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매일 지쳐 잠드는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아내가 둘째 아이의 유산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힘들어했습니다. 이 땅을 벗어나면 나아질 거로 생각해 독일 이민을 구체적으로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불교대학을 다니기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아내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법륜스님 법문을 흉내 내고 따라 하는 아내의 표정이 마치 첫 만남 때처럼 대범하고 긍정적이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갑자기 바뀌지?’라는 궁금증이 생겨 저도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의심을 넘어선 첫걸음, 배움의 시작 ♤ 정아영 고객은 돈과 스트레스를 함께 주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경전대학에서 금강경을 배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괴로운 마음을 굴복시키는 방법에 대해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더 도와주는 마음을 내라 대답하셨습니다. 처음엔 ‘내가 이미 충분히 도움을 준 것 같은데 왜 더 마음을 내야 하지? 라고 생각하며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법륜스님을 믿고 저를 힘들게 하는 고객들에게 직접 적용해 보았습니다. 고객에게 전화가 걸려오기 전에 먼저 전화를 걸어 고객이 궁금해할 만한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전화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걸 느꼈습니다. ‘누군가를 도우면 내가 덜 괴로운 것’이 맞았습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불교대학 수업 중 적은 노트 기록을 다시 필사하고 복습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노트를 한 번 더 필사하는 과정에서 수업 내용이 다시 기억나고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자랑스러워 남편에게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24년 12월, JTS 영양꾸러미 활동 ♠ 이승준 열심히 전달해주는 아내 덕분에 저는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을 다니기 전부터 수업 내용을 다 알았습니다. 아내는 집에 놀러 오는 제 친구들에게도 정토회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 확신이 있으니 아내의 말에 힘이 실리는 것 같았습니다. 법륜스님이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되풀이하거나 제 이해 수준을 벗어난 어설픈 믿음을 가지라고 설득했다면 따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스님의 하루’ 속에서 매일 매일의 일상을 보여주는 스님에게 감동했고, 실제로 따라 해보는 과정에서 ‘아 이렇게 하니 정말 되는구나’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같이 하니 더 힘이 됩니다 ♤ 정아영 저희 부부는 아침 정진도 같이하다 보니, 알람을 못 들어도 다른 한 명이 깨워줍니다. 정진 후에는 잠깐씩 느낌이나 마음을 이야기하며 서로 많이 독려합니다. 물론 둘 다 알람을 못 듣고 잘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정진을 한 날과 안 한 날의 감정과 평정심 유지 정도가 크게 다릅니다. 늦게 일어나더라도 정진을 하면 같은 일에도 짜증이 덜 나는데, 정진을 안 하면 금방 무너지고 쉽게 화가 납니다. 이런 정진을 배우자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습니다. ♠ 이승준 아내가 어딘가에 ‘투자하자’라고 했을 때, ‘이걸 해서 잘 되면 변호사 일을 관둘 수 있겠다.’ 싶어 동의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이 상황이 괴롭기만 했을 텐데 왜 괴로운지 정확히 알고 방향을 찾을 수 있느니 덜 괴로웠습니다. 우리가 어리석었음을 둘 다 잘 알기 때문에 서로 탓하지도 않습니다. 수행을 며칠 안 하면 서로가 “아, 수행해야겠다”라고 말합니다. 수행하면 괴롭지 않게 차분히 “내가 벌인 일이니 내가 해결해야지”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사건 이야기, 상대하기 힘든 의뢰인 이야기를 주로 했습니다. 지금은 정토회, 법륜스님 말씀으로 이야기의 주제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덕분에 더는 괴로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고, 정토회 활동이 부부의 공통취미가 되어 더 좋습니다. 24년 11월, 평화재단 20주년 기념행사 사진 봉사 조금씩 달라져서 크게 변한 나를 봅니다 ♤ 정아영 가장 크게 변한 점은 불평과 불만이 줄어든 점입니다. 예전에는 많고도 많은 제 흠은 보지 못하고 남의 단점은 열 개도 넘게, 너무나 쉽게 찾아내는 사람이었습니다. 불평과 의심은 기본이고, 훌륭해 보이는 사람도 분명 이면에 나쁜 점이 있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불법을 배우고 나서는 도반이 가진 장점을 먼저 생각합니다. 아직도 불평이 남아 있긴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많이 줄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줄었고, 제 안의 불안도 훨씬 가라앉았습니다. 저보다 훨씬 큰 괴로움을 겪은 도반들이 수행으로 편안해진 모습도 목격했습니다. 그러면 저 또한 불안할 일이 없고, 정토회 활동을 하기에 늦은 나이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사실 저는 처음부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 이승준 일을 대하는 관점이 많이 변했습니다. 예전에는 ‘원하는 일’과 ‘원치 않는 일’을 나누어 생각했지만, 지금은 ‘모든 일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 키우는 일도, 아내를 챙기는 일도, 변호사 일도 소임도 모두 ‘원래 내 몫’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습니다.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었는데 정토회에서 나누기를 많이 하면서 대중 앞에서 말하는 두려움과 부담감도 줄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저를 더 자유롭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이제 ‘부끄러워도 최소한 할 수는 있다’라는 게 포인트입니다. 24년 11월, 죽림정사 용성기념관 안내 ♤ 정아영 정토회를 만난 이후 가장 잘한 일은 개업변호사에서 법원 소속 조정변호사로 직업을 바꾼 것입니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분쟁 당사자 간 합의를 돕는 조정제도는 다툼을 조기에 정리하도록 돕기 때문에 낭비되는 시간과 에너지를 줄일 수 있습니다. 더욱 많은 사람의 괴로움을 덜고 세상에 긍정적인 이바지를 할 수 있습니다. 정토회의 방향과도 맞고, 적당한 월급을 받으니 이 길로 간 것이 가장 잘한 선택입니다. ♠ 이승준 제가 가장 잘한 일은 아내의 정토회 활동을 적극 지원한 것입니다. 아내가 죽림정사 안내팀 소임과 보리수9기 활동을 하면서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아내가 조금 편해지면 남편은 훨씬 편해진다.’라는 사실을 많은 남편이 잘 모릅니다. 저는 아내의 정토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우리 가족은 수행하며 살아야 더 좋고, 아이도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지금 어린이집에 다니고, 때가 되면 초등학교에 갈 것입니다. 그것을 멈출 방법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모가 사회에 이바지하고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살면, 아이가 그걸 보고 따라 배우는 것이지 달리 가르칠 방법도 없습니다. 법륜스님 말씀처럼 시위를 떠난 활처럼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니 망설이는 만큼 손해입니다. 이승준 님과 정아영 님을 익산에서 만났습니다. 주인공 부부는 제 일정을 고려해 전주에서 익산까지 와 주었습니다. 3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 내내 부부의 이야기에 깊이 빠졌습니다. 이승준 님은 저의 직전 희망리포터 모둠에서 모둠장이었습니다. 지난 모둠에서 함께한 시간이 좋았던 만큼, 유쾌하고 따뜻한 두 도반의 이야기를 더 잘 전하고 싶었습니다. 글을 정리하는 동안 두 도반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몽글몽글해졌습니다. 직접 만나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글강지윤 희망리포터 편집곽정란
뒤늦게 맞잡은 손_2025 애광원 민들레집 봄나들이
몸이 불편해 반나절의 나들이에도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JTS는 매년 몸이 불편한 애광원 생활인을 대상으로 나들이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5월 16일에 창원지회와 진주지회 회원들의 봉사로 진행된 애광원 생활인들의 봄 나들이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설렘 5월16일 나들이 당일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오전에는 비예보가 없었는데, 실상사에서 스텝 사전 모임을 하는 도중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빗줄기가 세차지 않아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봉사자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새벽 6시에 창원을 출발하여 7시40분즈음 서진주IC에서 진주지회 봉사자를 태운 버스는 9시 즈음 실상사에 도착했습니다. 조별로 모여 첫마음 나누기를 하고 있는 사이, 저 멀리서 애광원 민들레집 버스가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짝지와의 만남 사전교육에서 애광원 민들레 가족이 오면 길게 두 줄로 환영해 주자는 계획을 세워두었는데, 버스가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 환영 대열을 차리지 못한 채 버스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버스에서 애광원 생활인들이 내리고 짝지 봉사자 이름을 부르면 손을 번쩍 들고 마중나가는 모습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느티나무 아래 애광원 민들레집 식구들과 짝지가 만나 오전 프로그램을 위해 실상사 경내로 이동했습니다. 오락가락하던 비가 제법 굵어지면서 생활인들의 건강을 위해 애광원 선생님들은 우비를 준비해 주셨고, 봉사자들도 우비와 우산을 준비했습니다. 실상사를 둘러보기 전에 잠시 느티나무 아래에 모여 생활인들과 봉사자들은 서로 인사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 나들이는 향상법사님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향상법사님은 싱그러운 5월, 천년고찰 실상사를 둘러보며 좋은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는 인사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어서 애광원 사무국장님도 민들레 가족들은 산책이나 나들이가 매우 힘든데 정토회 봉사자들 덕분에 이렇게 나들이를 할 수 있어서 고맙고 감동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휠체어 사용법 및 주의점에 대해 애광원 선생님의 자세한 안내가 있었습니다. 잘 쓰이는 기쁨 오늘은 봉사자 2명과 생활인 1명이 짝지가 되어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처음에 차에서 내려서 생활인을 만난 봉사자들은 모두 설레는 마음도 있지만, 혹시나 도움이 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긴장되는 마음도 많이 나누었습니다. 잘 쓰일 수 있어서 기쁘다는 마음은 모두가 한결같았습니다. 진주지회 이년옥 님은 우리가 이 분들의 팔다리가 되어 쓰일 수 있다는 게 큰 기쁨이라고 하였고, 서울에서 온 최현기 님은 서울에 있을 때는 소통이 안되는 사람들이 힘들었는데 애광원 생활인들과 소통을 하다보니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도 어렵지 않겠다는 마음이 든다고 나누었습니다. 천년고찰 실상사 오전에는 천년고찰 실상사를 둘러봅니다. 해설사 이범정 님과 함께 실상사 둘러보기를 시작했습니다. 천년고찰답게 실상사에는 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있습니다. 대나무숲을 둘러본 후 실상사 주법당인 약사전과 보광전을 차례로 둘러보았습니다. 대나무숲에는 세월호 사고 추모 상징인 리본 모양이 기와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빗소리와 바람소리가 어우러져 세월호 추모 기와 문양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대나무 숲을 나와 약사전으로 이동했습니다. 약사전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철로 만든 약사불상을 참배하고, 보광전에서는 직접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참배하는 생활인들도 있었습니다. 함양 상림숲으로 11시즈음 단체 사진을 찍은 후 점심을 먹기 위해 함양 상림숲으로 이동했습니다. 실상사에서 함양까지는 30분 정도 걸리지만 비가 오는 날씨라서 천천히 이동했습니다. 버스 안에는 생활인과 짝지 봉사자가 함께 앉아서 이동했고, 자리가 불편했는지 자꾸 일어나려고 하는 생활인도 있었지만 그래도 밝은 얼굴로 바깥 풍경도 보면서 편안하게 이동했습니다. 식당에 도착해서 애광원 선생님들은 생활인을 한 명 한 명 안전하게 내려주고 봉사자들은 대기하고 있다가 생활인들과 함께 식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사전답사를 여러 차례하면서 적당한 식당을 찾는 수고로움 덕분에 공간도 넓고 깨끗하고 음식 맛도 좋은 장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전에 교육 받았듯이 봉사자 짝지들은 가위를 사용해서 생활인들이 먹기 편하게 음식을 잘게 잘게 잘라서 앞접시에 담아 주었습니다. 점심을 먹는 동안에 비가 더 많이 내렸습니다. 비가 안왔더라면 상림숲길을 걸으며 향상법사님의 해설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매우 아쉬웠습니다. 함양 산삼주제관 1시 20분즈음 일정을 변경하여 실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산삼주제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생활인이 버스를 타고 내리는 일은 모두 애광원 선생님들의 수고가 필요한 일이라서 도움이 되지 못하는 봉사자들의 마음은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산삼주제관에 미리 연락을 해 두어서 주제관 관계자분의 친절한 안내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간식과 휴식시간을 위해서 옆 건물로 이동했습니다. 비가 오지만 생활인의 특성상 계속 걷는 것을 좋아하는 분들은 실내에서 계속 걷기도 하고 밖에 우산을 쓰고 비옷을 입고 나름 바깥 산책을 하기도 했습니다. 걷기를 멈추지 않는 생활인은 걷다가 봉사자 팔에 기대어 졸기도 하면서도 계속 걸었습니다. 간식을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곧바로 레크레이션 시간을 가졌습니다. 창원지회 강정순 님이 사랑으로 노래를 함께 부르며 레크레이션을 시작하였고, 봉사자 진주지회 이선우 님의 신나는 민요도 이어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향상법사님께서 애광원 선생님들께 법륜스님의 《혁명가 붓다》도서를 한 권씩 선물해 주셨고, 애광원측에서도 깜짝 선물로 거제에서 유명한 쌀빵을 봉사자들 한 명 한 명에게 선물해 주었습니다. 아쉬운 헤어짐 궂은 날씨에 장시간 실내에서 활동하는 것이 휠체어를 타는 생활인에게는 무리가 되는 일이라고 합니다. 지친 생활인들을 위해 바닥을 정리하고 바닥에 좀 더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었고, 컨디션이 회복되어 조금 일찍 저녁 식사 자리로 출발했습니다. 저녁식사를 마무리한 후 5시즈음 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비가 많이 내려서 마무리 인사를 충분히 하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버스까지 베웅을 나가면서 마지막 시간을 함께 나눴습니다. 봉사자들은 힘든 기색없이 오늘 하루 잘 쓰일 수 있어서 기쁘다는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느낌은 통한다며 생활인과 같이 많이 웃었다는 봉사자도 있었습니다. 버스 탑승 후 길가에서 떠나는 버스를 보고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마무리로 봉사자들의 나누기를 전합니다. 애광원 생활인들을 처음 봤을 때는 짠한 마음이 들어 울컥했지만 있는 그대로 소중하게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별없이 태어나 분별없이 살아가겠구나 하는 생각에 내가 더 나은 것이 있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낯을 많이 가리던 생활인이 뒤늦게 제 손을 잡아 주어서 그래도 잘 쓰였구나 싶었습니다. 애광원 선생님들의 밝고 헌신적인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글과 사진김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