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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강좌]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금강은 다이아몬드를, 반야는 지혜를, 바라밀은 피안의 세계에 도달함을 가리킵니다. 줄여서 <금강경>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에 담긴 지혜가 다이아몬드처럼 가장 값지고 소중하고 견고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다이아몬드가 세상 모든 물질을 다 깨뜨리듯 <금강경>의 지혜로써 중생의 어리석음과 번뇌를 깨뜨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금강경>을 수지독송受持讀誦하고 위타인설爲他人說하는 큰 공덕과 기쁨’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 (7)
金剛般若波羅密經


법륜스님 본지 발행인


4. 妙行無住分(1)

걸림 없이 베푸는 삶
다만 내가 없음을 관觀하라.
내가 없음을 보게 되면 곧 사람이 없는 것이요,
사람과 나, 둘을 함께 잊으면 곧
자심自心이 적멸寂滅할 것이요,
자심이 적멸한즉
일체중생이 모두 적멸하리니,
중생이 이제 고요하면
부처도 반드시 구할 것이 없도다.

復次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行於布施
부차수보리 보살 어법 응무소주행어보시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수보리 보살 응여시보시 부주어상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하이고 약보살 부주상보시 기복덕 불가사량 수보리 어의운하 동방허공 가사량부 불야 세존
須菩提 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수보리 남서북방사유상하허공 가사량부 불야 세존
須菩提 菩薩 無住相布施 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수보리 보살 무주상보시 복덕 역부여시 불가사량 수보리 보살 단응여소교주

“또한 수보리여! 보살은 법에 머문 바 없이 보시를 행할지니, 이른바 색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며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법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느니라.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보시하되 상에 머물지 않느리라. 왜냐하면 만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이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남서북방 사유상하 허공을 가히 생각하여 헤아릴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여! 보살은 응당히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지니라.”


원래 당신 것이니 도로 가져가시오
제3분에서 부처님은 보살이라면 모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내야 하지만 한없는 중생을 제도했더라도 한 중생조차 제도한 바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가르침을 들은 수보리의 마음속에 한 가지 의심이 일어났습니다.
‘보살이 무량한 희생과 봉사를 하였으나 한 중생도 제도된 바가 없으며 애초에 제도받을 중생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면, 과연 베푸는 이는 누구고 베풂을 받는 이는 누구란 말인가? 그렇다면 애써 남을 도울 필요도 없고, 보시를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금강경>은 행간에 숨어 있는 수보리의 이런 의심을 읽어낼 수 있어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늘 수보리의 마음속 질문을 알아채고 답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부처님은 수보리의 의문에 가르침을 주십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코로 냄새 맡아지고 혀에 맛이 느껴지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들에 집착해서 보시하지 마라.” 스승의 벼락 같은 깨우침에 수보리는 비로소 자신이 또 상에 집착했음을 깨닫습니다.  제4분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復次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또한 수보리여! 보살은 법에 머문 바 없이 보시를 행할지니,
이른바 색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며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법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느니라. 수보리여! 보살은 마땅히 이렇게 보시하되 상에 머물지 않느니라.”

보시는 자비심으로 남에게 아무 조건 없이 재물이나 불법을 베푸는 걸 말합니다. 보살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섯 가지 덕목을 실천해야 하는데, 이를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고 합니다. 바라밀이란 태어나고 죽는 현실의 괴로움에서 번뇌와 고통이 없는 경지인 피안으로 건넌다는 뜻으로,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보살 수행을 말합니다. 육바라밀은 보시布施바라밀, 인욕忍辱바라밀, 지계持戒바라밀, 정진精進바라밀, 선정禪定바라밀, 지혜智慧바라밀을 이릅니다.

그런데 <금강경>의 이 구절은 자칫 잘못해 마음에 머무르는 보시라면 행하지도 말라든지, 상에 머물 바에야 아예 보시하지 말라는 식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부처님이 강조하는 바는 ‘보시를 행하되 집착 없이, 머문 바 없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보시할 마음을 낸 자가 좀 더 전진할 수 있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경계에 끌리지 않고 상을 버릴 때만이 아무 바라는 바 없는 보시, 그래서 온전히 기쁨과 행복만을 가져다주는 보시를 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 이런 이치가 잘 드러납니다. 아무 바라는 마음 없이 자식을 낳고 키우며 사랑을 베풀었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모습은 대부분 그렇지 못합니다. 자식에게 실망하고 원망하며 괴로워하는 부모가 대부분입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은 상대를 위해 끊임없이 베푸는데 도무지 아무 보람이 없다고 불평하는 부부가 많습니다.

상대에게 기대를 많이 하면 할수록 상대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내 마음이 춤출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 사이의 갈등은 이해관계와 그로 말미암은 기대감 때문에 생깁니다. 사람들은 늘 손익을 계산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비단 물질적인 것만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가까운 사람과의 갈등은 손익계산이 오히려 물질적인 데 있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상대에게 큰 기대감을 걸어놓고 그것 때문에 울고 웃습니다.

상대에게 베푸는 것으로 내 할 일은 모두 끝났다는 마음, 베풀었다는 생각마저 없이 행하는 보시는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며 번뇌를 소멸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자기는 실컷 고생만 했지 그에 비해 얻는 것은 변변찮다고 억울해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수고한 만큼, 아니 그 이상의 대가를 받고자 하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기대를 가지고 베푸니 복이 와도 만족스럽지 않고, 자기가 기대했던 만큼 충족되지 않으니 공든 탑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흥부는 제비 다리 하나 고쳐주고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얼핏 보면 노력은 적게 하고 큰 소득을 얻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본질은 그게 아닙니다. 비록 작은 행위일지라도 바라는 마음 없이 베푸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보시의 결과가 현상적인 복으로 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대하는 마음이 없다면 대가가 어떻든 서운해하거나 억울해할 일이 없습니다. 속상할 일이 없으니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복이 아니겠습니까?

기대하는 마음 없이 베풀면 금강석처럼 변하지 않는 큰 복이 옵니다. 이것이 상에 머무르지 않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원리입니다. 사람들은 빚을 갚을 때 돈을 빌려주었던 사람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감사 인사를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빚을 갚는 사람과 같은 자세가 바로 무주상보시의 마음입니다. 마치 빚 갚는 마음으로 ‘원래 당신 것이니 도로 가져가시오’ 하는 마음으로 베풀 때, 양보했다는 상을 버리고 양보할 때, 비로소 상대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해집니다.

상을 버린 보시는 베풂을 받는 상대가 아니라 베풂을 행하는 나에게 기쁨과 행복을 선물합니다. 내 기쁨을 위해 베풀고 있음을 자각하고, 내 베풂을 받아주는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보시해야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행복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서암 큰스님이 젊은 날 수행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스님이 거지 움막에 들어가 발우를 내놓고 목탁을 치니 움막에 있던 이들이 쭈뼛대며 난감해했습니다. 아무리 남에게 얻어먹고 사는 거지라도 수행승이 와서 탁발을 하니 무엇이든 내주고 싶기는 한데, 막상 시주하기에 마땅한 음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줄 게 없어요.”
“지금 먹고 있는 밥을 좀 주시면 됩니다.”
“아니, 이걸 드실 수 있겠어요?”
“예.”
“그럼 드리지요.”
스님이 음식을 받아먹으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더랍니다. 그들은 동냥 음식을 거리낌 없이 받아먹는 스님이 고마워서 밥을 내주면서도 조금도 아까운 줄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에게 무언가를 베풀 수 있게 해준 스님이 고마웠습니다. 나누는 기쁨은 이런 것입니다.

남에게 도움 받는 일을 기뻐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내가 형편이 어려운 걸 알고 친구가 매달 100만 원씩 도와준다면 과연 내 마음은 그저 좋기만 할까요? 돈을 받으려고 친구를 만날 때마다 내 기분이 어떨까요? 그 친구 앞에서는 왠지 주눅이 들어 당당하지 못하고, 친구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기 마련입니다. 그의 부탁이라면 그것이 내 능력에 부치거나 올바르지 못한 일이어도 거절하기가 어렵습니다. 남의 도움을 받는 사람은 그만큼 종속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 살 만해지면 어려운 시절에 도움을 받았던 사람을 만나기 싫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남에게 도움을 받으려면, 그들이 보기에 내 모습이 불쌍해야 합니다. 그러니 도움 받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사람은 자기 존재를 불쌍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물질적 보시에만 적용되는 얘기가 아닙니다.
베푸는 마음을 내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사랑받으려 하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해받으려 하지 말고 이해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도움 받으려 하지 말고 도움 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보살핌 받으려 하지 말고 보살펴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 이 글은 월간정토 2019년 7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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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댓글 1개
  •  서정희 2019/08/07 13:24
    마치 빚 갚는 마음으로 ‘원래 당신 것이니 도로 가져가시오’ 하는 마음으로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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