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 사거리 역 근처 건물 2층에 자리 잡은 강북 법당은 번화가에 위치해 있지만 법당 안으로 들어서면 정갈하고 조용한 곳입니다. 오늘은 강북에서 가정 법회를 시작하셨던 이중인, 박현진 님의 이야기 전하고자 합니다. 부처님 법 만나 삶의 고비를 무탈하게 넘길 수 있었다는 도반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강북법당에서 활동 중인 이중인 & 박현진 님
▲ 강북법당에서 활동 중인 이중인 & 박현진 님

사이비 종교집단에 잘못 들어온 건 아닐까?

박현진 님: 저는 원래 불교 신자였지만, 기복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평생 빌면서 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늘 있었습니다. 마침 지인이 “선생님 그냥 한번 들어 보세요” 하면서 법륜스님의 동지 법문 CD를 주었습니다. 집에 와서 듣는데 스님의 법문이 쉽고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그 때 문득, “아, 이 스승님에게 공부하면 내 삶이 달라지겠구나!” 했습니다.

그때는 아이들로 인해서 힘든 시기였습니다. 아들은 자기표현이 확실한 아이였습니다. 반면 제 남편과 저는 각자의 부모에게도 고집이나 주장을 잘 안 했던 착한 아들, 착한 딸로 자랐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와는 다른 성향인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얘랑 나랑은 전생의 원수였나?' 아들 보기가 두려워 집에 들어가기가 싫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고집부리는 아이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아 불안했고, 집안에만 있는 제 모습을 보면 사회에서 나만 도태되는 것 같아 우울했습니다. 삶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스님의 동지 법문 CD를 듣고 지인에게 스님이 계신 곳이 어디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주 일요일에 바로<천일결사 입재식>이 있는데 함께 가겠느냐고 의사를 물어와서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스님을 보고 마치 사람들이 교주를 보는 것처럼 얼굴이 180도 바뀌는 겁니다. 너무나 환희에 찬 얼굴이었고, 그래서 깜짝 놀랐고 바로 후회했습니다. “나 사이비 종교 집단에 잘못 들어온 거 아닌가?”(웃음) 맨 뒤에서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혼자 어떻게 집으로 가야 하나. 여기 차가 없었던 것 같은데. 택시를 타고 가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던 중에 스님께서 하시는 회향 법문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맞다. 나 스님이 법문을 듣고 여기까지 찾아 왔지!”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007년에 천일결사 입재식, 정토불교대학에 입학을 했고, 2008년에는 경전반을 졸업하고 법륜스님과 도반과 함께 하는 인도성지순례도 다녀왔습니다.

이중인 님: 집에 오면 항상 아내가 틀어놓은 스님의 법문을 그냥 들었습니다. 어느 날 피곤해하던 저에게 아내가 머리도 식힐 겸, 불교대학 과정에서 떠나는 경주남산순례를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경주남산순례에 갈 때 지인을 데리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아내를 따라갔던 경주남산순례에서 스님께서 해주신 우리의 숨은 역사 이야기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의 좋은 기억 덕분에 더 적극적으로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 후 아내가 매일 아침에 하는 백일기도를 따라서 해보았습니다. <깨달음의 장>에도 다녀왔습니다. <깨달음의 장> 수련도 아내의 권유로 간 것이었는데, 그때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행복학교를 맡고 있는 박현진 님 & 강북법당에서 일요 법회, 거리 모금, 경전반 담당을 맡고 있는 이중인 님
▲ 행복학교를 맡고 있는 박현진 님 & 강북법당에서 일요 법회, 거리 모금, 경전반 담당을 맡고 있는 이중인 님

남편을 걱정하는 다른 마음

박현진 님: 우리 남편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술은 약한데 절주를 못해 술을 마시는 날이면 매번 필름이 끊겨서 새벽에 인사불성이 되어 들어 오곤 했습니다. 신혼 때부터 보아왔던 이 습관이 몇 년이 지나도 안 변하고, 오히려 점점 횟수가 늘어나서 밤 12시가 되면 제 심장이 막 뛰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더니 나중에는 숨 쉬는 것도 힘들어져 이대로 살다가는 내가 죽겠구나 싶었습니다. 술 때문에 이 사람이 객사할 것만 같아서 정말 불안했습니다.

이 사람 다치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으로 안절부절못했고 그때마다 저는 혼자서 생각이 지옥으로 갔습니다. 남편이 술을 마시면서 하는 행동이 마치 나를 괴롭히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런 사람이랑 계속 살아야 할까?' '어떻게 이 사람을 믿고 살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만약 남편과 이혼을 하면 애들은 내가 다 데리고 살아야겠다’ 고 생각 했는데 그다음이 문제였습니다. '나 혼자 두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먹고살지?'

그때는 제가 불교대힉에 다니면서 매일 스님 법문도 듣고 있었는데, 어느 날 지인이 '진짜 남편을 위해서 걱정하는 것인지, 혹은 다른 마음이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을 제게 던졌습니다.

'나는 남편을 정말 걱정해서 하는 소리였는데, 그게 아니라면 내가 자각하지 못한 무슨 다른 마음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다음 날 아침 기도를 하면서 문득 '남편이 다치면 나에게 손해가 생긴 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다치면 돈을 못 벌어올 거고, 그럼 이 가정과 아이들을 내가 책임져야 하는 거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제가 너무 이기적인 사람으로 느껴졌습니다.

“내가 아이 둘을 양쪽에 끼고 남편 등에 올라타서, 발 하나 땅에 대지도 않고 남편 등에 업혀가려고 했구나.” 그래서 늘 남편의 건강을 걱정했고, 남편은 사고 나거나 다치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날 아침 너무 미안해서 남편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 남편이 마시는 술에 대해 내가 일으키는 괴로움은 놓아버렸습니다. ‘남편의 인생이지 내 인생이 아니다’ 하면서 남편에게 지어주었던 보약도 끊었습니다. 남편은 성인이니까 스스로 자기 인생에 책임을 지고, 아이 둘은 스무 살이 될 때까지만 챙기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혹시 남편이 밖에서 술을 먹고 잘못되더라도, 내가 과부가 되더라도 그것 또한 나의 인생이다. 그때부터 남편과 제 삶을 분리를 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봉사소임으로 쌓은 행복한 자신감

이중인 님: 술 마시는 것은 많이 줄었습니다. 직장 생활하다 보면 술자리도 업무의 연장선이라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2007년 말부터 아내와 함께 입재식에 참여한 후 아침 기도를 하려면 몸이 힘드니까 술 마시는 양도 줄었고, 자연스럽게 술자리 횟수도 줄었습니다. 기도를 매일 빠지지 않고 10년 정도 했는데 그게 마음에 중심을 잡아 주었습니다. 평소에 제 주장을 잘 하지 않고 수동적이었는데 매사에 조금 더 당당해진 것 같습니다.

그 사이 두 번 정도 고비가 더 있었습니다. 제가 다른 부서로 옮겨서 2년 가까이 있었는데 초반에는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아 힘들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속 사정은 제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습니다. '저 사람은 다른 부서에서 혼자 왔으니 우리가 대신 일을 하자' 하고 저를 배려하기 위해 그들끼리 나눈 대화가 제게는 험담처럼 들린 거였습니다.

또 한 번은 새로운 직장에 들어갔는데 제가 그동안 하던 업무와 달라서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 일로 법사님과 상담을 하면서 제가 놓쳤던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고, 상사에게 저의 힘든 상황을 말씀드리자 그 부분을 조정을 해주셨습니다. 답답했던 문제가 해결되고 숨통이 트여 다시 일을 재미있게 하게 되었습니다.

정토회 와서 불법을 만나고 삶의 고비도 넘기고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정토회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임을 맡아 하다 보면 제게 부족했던 자신감이 생깁니다. 한 번은 회사의 간부들이 모이는 곳에서 발표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토회에서 담당을 하면서 사회를 보았던 경험 덕분에 발표를 긴장하지 않고 편안히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어디 가서 걸식을 한다고 해도 잘해 낼 자신이 생겼습니다(웃음).

예전에는 아들에게 말하기 힘들었지만 요즘은 '미안하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때 아들도 제 사과를 받아줍니다. 아마도 이런 것이 ‘정진’의 힘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 부처님

박현진 님: 아들은 고집이 너무 세서 엄마인 저와 씨름이 잦았습니다. 저를 공부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준 이가 바로 우리 아들 부처님입니다.

2007년 7월에 <깨달음의 장>에 갔습니다. 거기에서 제가 아들을 낳고 4주 만에 산후우울증이 왔던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때부터 아이 때문에 힘들어했습니다. 아이와 저를 위해 휴가를 낸 줄 알았던 남편이 시댁에 가고 없었습니다. 계속 우는 아이 때문에 저는 잠도 못 잔 상태에서 다 버리고 도망가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남편이 너무 원망스러웠고, 아이가 내 발목을 잡는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아들이 엄마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심했습니다. 아이 엄마들과의 모임에서 제가 화장실에 다녀 간 사이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아이가 불안해하면서 엄마를 계속 찾는다고 엄마들이 제 아들에 대해서 얘기를 해줬습니다. 옆에서 제 아들을 지켜보던 엄마들이 얘기해줘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아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의 장>에서 제 밑 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산후우울증이 왔던 그 시기부터 내 마음에서 계속 아이를 떼어놓고 있었던 것을, 아들의 손을 꼭 잡고는 다녔지만 엄마의 마음은 아들한테 닿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내게 요구 사항이 더 많았던 거였구나.' 그러니까 아이는 엄마 사랑을 못 받은 거였고, 그런 아이는 늘 허전했던 것입니다.

알아차리고 나니, 아들한테 너무 미안했습니다. 저에게 떼쓰는 것을 보면 화가 올라오긴 하지만 '미안함이 너무 크니까, 내가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내가 진정한 사랑을 안 줬으니까' 하면서 아들이 보여준 모습을 오롯이 다 보았습니다. 그 이후로 너무 감사하게도 사춘기를 잘 보냈습니다.

훈련소 퇴소식을 마친 아드님과 함께
▲ 훈련소 퇴소식을 마친 아드님과 함께

양파처럼 까도 까도 모르는 내 안의 나

박현진 님: 그냥 이렇게 이 길을 계속 가는 것입니다. 양파처럼 까도 까도 모르는 내 안의 내가 있더라고요. 정토회 활동을 하면서 내 안의 모르던 나를 다 만났습니다. 가정이라는 작은 울타리 안에만 있었으면 절대 드러나지 않았을 내 모습들을 정토회 활동을 하면서 다 경험하게 된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수행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우리 아들입니다. '이만하면 됐겠지. 엄마 이제 편안하게 살면 안 될까? 이제 한 발 멈추면 안 될까?' 하고 집에 들어가면 여지없이 시험에 들게 하는 우리 아들이 있어서(웃음) '아직 멀었구나' 하고, 법당으로 다음 날 또 나가고 하던 것이 이젠 습관처럼 그냥 나오게 됩니다.

이중인 님: 정토회에서 수행의 끈 놓지 않고 이렇게 꾸준히 가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스무 살 되면 다 집에서 나가야 한다’고 이미 다 주입해 놓았습니다.
정토회서 시키는 일은 처음에는 하기 싫지만 하고 나면 뿌듯한 마음이 들어 좋습니다. 쓰이는 존재도 즐겁습니다. 봉사한다 생각하지 않고 ‘여기에 와서 노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마음도 가볍습니다.


정토회를 다니면서 자신의 변화를 이뤄가고 계신 두 분을 모습을 보면서 정토회 1년 차인 햇병아리 리포터도 희망을 가져 봅니다. 앞으로 그려나갈 두 분의 삶의 궤적이 궁금해집니다.

피곤하셨을 텐데 인터뷰에 적극 응해주신 두 분에게 감사한 마음입니다. 인터뷰를 마치니 여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갑니다. 삶이 힘겨워 지친 분이 계시다면 <강북법당> 일요 수행 법회에서 두 분을 만나 보세요. 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만드시길 바랍니다.

글_박희진 희망리포터 (노원정토회 강북법당)
편집_권지연(서울제주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