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1.21. 인도성지순례 11일째_쉬라바스티
“부처님의 제자들은 쉽게 깨달음을 얻었는데, 현대인들은 왜 어려울까요?”

안녕하세요. 인도성지순례 11일째입니다. 오늘은 네팔-인도 국경을 넘어 다시 인도로 이동해 삐쁘라하와, 천불화현탑, 동원정사를 순례했습니다.

오늘은 네팔에서 국경을 넘어 다시 인도로 가야 하기 때문에 새벽 2시에 일어나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3시 10분이 되어 대성석가사에서 국경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버스 안에서 곧바로 새벽 예불을 드렸습니다. 예불이 끝나고 4시에 국경에 도착해 출입국 수속을 시작했습니다. 국경 수속은 인솔 법사님들과 스태프의 안내로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다. 네팔 국경을 통과할 때는 입국에 비해 수속 시간이 짧기도 하지만, 네팔 출입국관리소의 협조 덕분에 1시간 만에 끝이 났습니다. 인도 출입국관리소에서도 예년보다 많은 직원을 배치해 입국 수속이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스님은 보광 법사님에게 인도, 네팔 대사관에 도움을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순례단 중 국경 수속을 일찍 마친 팀은 6시 20분에 인도 측 국경에서 출발해 삐쁘라하와로 이동했습니다. 7시 30분, 스님이 탄 버스가 가장 먼저 삐쁘라하와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탑돌이 동선과 순례단이 앉을자리를 점검했습니다.

여광 법사님이 스님께 순례단의 상황을 알렸습니다.

“스님, 인도 입국 수속은 4대 정도 남았습니다.”

스님은 상황을 듣고 일정을 조정했습니다.

“그럼, 약 1시간 정도 더 걸리겠군요. 후발대가 9시쯤 도착할 것으로 보이니, 선발대는 기다리는 동안 먼저 공양을 하고, 후발대가 도착하면 함께 참배하겠습니다.”

순례단은 스님의 안내에 따라 조용히 도시락을 꺼내 공양을 시작했습니다. 스님도 함께 공양했습니다.


공양이 끝나고 뒷정리까지 마무리될 무렵 후발대가 도착했습니다. 순례단은 모두 가사를 수하고 자리에 앉아 스님께 청법 삼배를 드렸습니다. 스님이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다들 무사히 잘 넘어오셨습니다. 이렇게 빨리 넘어온 경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어제저녁에 네팔 출입국 센터에서 전화가 와서 ‘4시에는 직원이 한 명밖에 없다. 6시에 세 명을 배정할 테니 그때 넘어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4시부터 대기하겠다’라고 했더니, 그 요청에 맞춰 4시에 인원을 증원해 주었습니다. (웃음)

덕분에 네팔 쪽 출국심사는 1시간 만에 끝났습니다. 출국심사가 입국심사보다 상대적으로 더 쉬운 편인데, 인도 측도 1시간 일찍 인력을 증원해 신속하게 절차를 진행해 줘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예전에는 국경 수속을 각 나라에서 1명이나 2명이 수백 명을 감당하다 보니 7~8시간씩 걸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20여 년 동안 우리가 가장 인원이 많은 순례단으로 방문하다 보니, 우리도 대사관이나 외무부에 협조 요청을 하고, 각국에서도 임시로 인력을 증원해 이제는 3시간 만에 국경을 넘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인원이 많다 보니, 선발대와 후발대 간에 시차가 조금 생겼습니다. 그래서 선발대는 먼저 공양을 하면서 후발대를 기다렸습니다. 그래도 선발대가 행사를 먼저 하고 가는 것보다는 낫지요?”

순례단은 웃으며 “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스님은 후발대에도 안내했습니다.

“이제 도착한 분들은 행사를 마친 뒤에 공양을 하시면 됩니다.”

이어서 삐쁘라하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삐쁘라하와는 룸비니에서 차로 15분 거리입니다. 그러나 옛 카필라바스투 지역이 네팔과 인도로 나뉘면서 부처님이 태어난 곳은 네팔에, 삐쁘라하와는 인도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석가족은 부처님의 사리를 가져와 이곳에 탑을 세웠습니다. 이 탑은 1800년대 후반 영국 고고학자들에 의해 처음 발굴되었고, 당시 사리 용기가 발견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전설적인 존재가 아니라, 육신을 지닌 실제 인물임을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이후 인도가 독립한 뒤 추가 발굴이 이루어졌고, 또 다른 사리가 발견되었습니다. 아마 처음 탑을 세울 때 넣은 사리에 더해, 후대에 덧붙여진 탑에도 사리를 넣었나 봅니다.

현재 이곳의 진신사리는 델리 박물관에 보관 중입니다. 박물관에는 사리를 담은 작은 용기와 큰 용기가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요즘 인도는 부처님의 사리를 해외로 순회 전시하기도 합니다. 태국이나 베트남 같은 불교국가에서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큰 관심을 보입니다. 인도는 이를 통해 불교를 활용한 외교를 펼치고 있으며, 성지 관리를 통해 국격을 높이고 있습니다. 예전에 비해 성지 환경도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스님은 옛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습니다.

“30년 전 제가 처음 왔을 때는 대부분이 똥밭이었어요. 순례를 마친 사람들이 ‘벽돌 더미에서 절하고 똥 밟고 다닌 것밖에 기억에 남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웃음)

삐쁘라하와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발견된 중요한 곳으로, 부처님이 역사적 인물임을 증명한 성지입니다. 진신사리탑은 바이샬리, 랑그람, 삐쁘라하와 세 곳에서 발견되었지만, 바이샬리 진신사리는 현재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고 랑그람 진신사리탑은 발굴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현재 우리가 직접 볼 수 있는 진신사리는 삐쁘라하와 진신사리 뿐입니다. 진신사리는 델리 박물관에 가서 친견하겠습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고 예불과 명상, 탑돌이를 했습니다.




삐쁘라하와 진신사리탑 참배를 마친 뒤, 10시에 쉬라바스티로 출발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약 3시간을 이동해 천불화현탑에 도착했습니다. 스님과 순례단은 천불화현탑 입구에서부터 합장하고 염불하며 서서히 탑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탑돌이를 마친 후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스님은 천불화현탑의 역사와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이곳은 쉬라바스티, 사위성의 천불화현탑입니다. 사위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인데요. 원래는 기원정사를 먼저 참배하고 부처님께서 이곳에 오시게 된 배경과 천불화현 사건을 설명했어야 하지만, 오늘은 일정상 기원정사를 나중에 방문하게 되어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왕사성에 계실 때 수닷타 장자의 초청을 받아 이곳 사위성으로 오셨습니다. 수닷타 장자는 부처님과 제자들을 머물게 할 장소로 기원정사를 마련했는데, 부처님과 제자들은 그곳에 머물면서 이 지역 사람들을 교화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위성은 왕사성만큼 교화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왕사성에서는 빔비사라 왕이 자발적으로 귀의했고, 사리푸트라, 목갈라나, 마하가섭과 같은 주요 제자들도 스스로 찾아와 귀의했습니다. 그러나 사위성은 당시 신흥 강국으로 문화적 수준이 다소 낮았고, 신통력을 과시하는 외도들이 성행해 있었습니다. 이런 환경이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쉽게 확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닷타 장자는 부처님 같은 분이 오셨음에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니 안타까운 마음에 부처님께 간청했다고 합니다.

‘부처님, 이곳 사람들은 외도의 신통력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이들이 불법에 관심을 가지도록 방편을 써 주십시오.'

이런 요청은 부처님의 일반적인 행적과는 조금 맞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이 설화가 생겨났는지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부처님께서 상황을 이해하시고 요청을 받아들이신 것으로 보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몇 날 며칠에 사위성 동문 밖에 사람들이 모이게 하라’고 하시고, 정해진 날 땅에 망고 씨를 하나 심으셨습니다. 망고 씨가 바로 싹을 틔우더니, 눈앞에서 자라 큰 나무가 되고, 꽃이 피고, 황금빛 망고가 열렸습니다. 그러더니 망고가 모두 부처님 모습으로 변해 망고나무에 천 개의 부처님이 화현하는 장관이 펼쳐졌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서 부처님의 법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합니다.”

스님은 쉬라바스티 사람들의 특징과 그들의 변화를 설명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했습니다.

“당시 사위성 사람들은 물질적 욕망이 강하고 힘을 숭배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고행주의자나 신통력을 보이는 외도들을 잘 따랐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천불화현을 보여주시자, 이들도 불법에 귀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부처님은 이곳에 가장 오래 머무르셨습니다. 45 안거 중 25 안거를 쉬라바스티에서 보내셨고, 경전의 3분의 1 이상이 이곳에서 설해졌습니다. 초기에는 전법이 어려웠지만, 이후에는 불교의 중심지가 된 곳입니다.”

스님은 늦게 도착한 대중을 위해 다시 한번 설명하고 걸어서 동원정사로 이동했습니다.

오후 3시가 넘어 동원정사에 도착하자 먼저 이동했던 순례객들이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동원정사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동원정사라고 합니다. 원래는 아쇼카 석주가 있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석주가 부러지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현재 이곳이 동원정사가 맞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기록과 위치를 살펴볼 때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우리가 정성껏 참배해 놓고 나중에 아니라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지요. (웃음)

‘사위성’ 하면 가장 대표적인 장소는 기원정사(제따바나)입니다. 동원정사는 ‘뿌르바나’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뿌르’는 동쪽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동쪽의 숲’이라는 뜻이지요. 옛날 수행자들이 숲에서 머물렀던 전통에 따라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곳에는 유명한 재가수행자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기원정사를 창건한 수닷타 장자이고, 다른 한 분은 여성 수행자로 가장 잘 알려진 베사카부인입니다.”

스님은 베사카부인의 삶과 불교에 귀의하게 된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베사카부인은 어릴 때부터 불교에 귀의한 분입니다. 할아버지는 마가다국에서 큰 부자로, 부처님을 집으로 초대해 자주 공양을 올렸습니다. 어린 소녀였던 베사카부인은 이때부터 부처님을 모시는 일을 도왔고, 자연스럽게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을 키웠습니다.

이후 베사카부인은 사위성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시댁도 부자였지만, 할아버지는 베사카부인을 시집보낼 때 시댁 재산보다 더 많은 지참금을 보냈습니다. 또, 변호사 역할을 하는 일곱 명의 현인을 함께 보냈는데, 시댁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 경우 즉시 변호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웃음)

그런데 시댁은 불교를 믿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 쉬라바스티에 계셨음에도 공양 한 번 올리지 못한 베사카부인은 늘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처님의 제자가 탁발을 하러 왔습니다. 당시 시아버지는 유미죽을 끓여 황금 그릇에 담아 먹고 있었는데, 당시 관습에 따라 탁발하러 온 수행자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자신의 교파가 아니란 이유로 돌아앉아 음식을 혼자 다 먹어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베사카부인은 창피함과 미안함에 탁발하러 온 스님께 변명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드시는 음식은 어제 먹다 남은 식은 밥이라 스님께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시아버지가 기분이 상했어요.

‘황금 그릇에 유미죽을 먹고 있었는데, 내가 식은 밥을 먹고 있다고 하다니, 나를 모독하는구나.’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자신을 모욕했다고 여겨 며느리의 자격을 박탈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당시 인도의 관습에 따라 여자가 부당한 대우로 파혼당할 경우, 지참금을 다시 가져갈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 문제로 시아버지와 소송이 붙었고, 베사카부인은 일곱 명의 현인과 함께 소송에서 승소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파혼은 없었던 일이 되었고, 베사카부인은 선언했습니다.

‘저는 원래부터 부처님을 공경하는 불교 신자입니다. 앞으로 이 집에서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결국 이 선언은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베사카부인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법문을 청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시아버지가 부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궁금해 병풍 뒤에서 몰래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웃음)

이후 시아버지는 베사카부인을 ‘나의 법의 어머니’라 부르며 그녀를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베사카부인을 ‘녹자모’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녹자’는 시아버지의 이름인 미라가를 한자로 표기한 것입니다. 이 이름을 딴 강당도 세워졌습니다.”

스님은 베사카부인의 깨달음과 관련된 또 다른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하루는 베사카부인이 사랑하는 손녀가 죽자, 부처님을 찾아와 울며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부인,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한 명이면 좋소, 두 명이면 좋소?’

‘두 명이면 좋지요.’

‘두 명이면 좋소, 세 명이면 좋소?’

‘세 명이면 좋지요.’

‘그럼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사위성의 모든 사람만큼 많다면 어떻겠소?’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위성에서는 하루에 몇 명이 죽습니까?’

‘하루에 한 명 정도는 죽을 겁니다.’

‘그렇다면 부인,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매일 슬퍼해야겠군요.’

이 말씀을 듣고 베사카부인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깨달은 얼굴이 아니네요. 다들 멍한 얼굴이네요. (웃음) 매일 슬퍼해야 하는 사람이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 모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베사카부인은 바로 이 모순을 깨달으신 겁니다.

이분은 경제적 지원뿐 아니라 수행자들의 생활을 세심히 살피고 지원했던 지혜로운 분입니다. 수닷타 장자, 지바카, 그리고 베사카부인은 승단에서의 역할과 기여를 생각할 때, 부처님의 10대 제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중요한 분들이십니다.”

스님은 순례단과 함께 경전을 독송한 뒤 동원정사 앞에 모여 있는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오후 3시 50분, 순례단은 동원정사 참배를 마치고 숙소인 천축선원으로 걸어갔습니다. 천축선원으로 향하는 길에 펼쳐진 풍경이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5시 30분이 되어 천축선원에 도착하니 입구에 주지스님인 대인스님이 나와 계셨습니다.

“스님, 잘 지내셨습니까? 건강하시지요?”

“네, 잘 있었습니다.”

“먼 길 오느라 시장하시지요? 공양이 다 준비되어 있으니 먼저 공양부터 하십시오.”

“그래도 인사 먼저 드려야지요.”

스님과 대인스님은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게 안부를 나누었습니다.

인사를 나눈 후 저녁 공양을 했습니다. 천축선원에서는 4백여 명의 순례단을 위해 따뜻한 밥과 국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오랜만에 따뜻한 국물을 먹으니, 피로가 싹 녹는 것 같았습니다.

공양을 한 후 천축선원 마당에서 저녁예불을 했습니다.

이어서 그 자리에서 저녁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법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대인스님의 인사말을 들었습니다. 대인스님의 인사말을 듣고 잠시 명상을 한 후 즉문즉설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누구든지 성지순례 중에 궁금한 점이 있으면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네 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경전의 내용을 보면 부처님의 제자들은 쉽게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데, 현대인들은 왜 깨달음을 얻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의문이 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쉽게 깨달음을 얻었는데, 현대인들은 왜 어려울까요?

“인도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부처님의 자비심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당시 계급주의 사회에서도 부처님께서는 평등을 주장하시고 중생을 깨우쳐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한평생을 헌신적으로 살아가셨다는 내용이 가슴에 많이 와닿았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야사 비구도 그렇고 야사 비구의 친구들 50명도 쉽게 아라한과를 증득했는데, 현대사회에서는 왜 이렇게 깨달음을 이루기가 어려울까요? 깨달음을 쉽게 이룰 수는 없을까요?”

“요즘 시대가 깨달음을 얻기에 더 쉬워야 하지 않을까요? 부처님 당시에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그때도 부처님은 사람들을 깨우쳤는데, 요즘은 깨우치기가 더 쉽다고 생각해야죠. 왜 요즘 시대에 깨우치기가 더 어렵다는 생각을 해요?

법문을 듣고 깨우쳤다고 말할 때 깨우쳤다는 말은 같은데 그 기준과 내용은 천양지차입니다. 어떤 사람은 ‘알았습니다!’ 하고 겨우 이해하면 그것을 깨달은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미워하고 원망할 뿐만 아니라 본인이 괴로워서 못 살다가 어느 순간에 남편의 고뇌를 이해하고 자신을 자각함으로써 남편에 대한 미움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을 두고 깨달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똑같이 깨달음이라고 말하지만 잠시 괴로움이 없어진 정도가 아니라 인생의 전반적인 고뇌가 사라져 버린 사례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토회에도 그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세속적인 생활을 그만두고 출가하거나 공동체에 들어와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 시대에도 이렇게 번뇌가 없어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을 자세히 안 보니까 못 보는 거예요. 사람을 보더라도 그 사람이 번뇌가 없는 사람인지를 자세히 보기보다는 주로 지위, 부, 인물, 이런 것을 보잖아요.

또한 여러분들은 번뇌가 완전히 없어진 사람만을 찾습니다. 너무 ‘완벽’을 추구하니까 번뇌가 없어진 사람을 못 보는 거예요. 예를 들어 18K 금으로 만든 반지는 금반지일까요, 아닐까요? ‘그게 어떻게 금반지예요?’ 하면서 100% 순금을 찾는다면 90%의 금도 순금이 아닌 가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18K라 해도 금이에요. 그런 것처럼 부모를 원망하고 남편을 미워하고 자식에 실망하고 이렇게 살다가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모두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순간순간 경계에 부딪힐 때는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거나 괴롭거나 미움이 일어나지만, 곧바로 자각하면 금방 사라집니다. 굳이 시간으로 따지면 자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번뇌를 하루 넘기는 법이 없어요. 잠시 사로잡혔다가 놓아버리면서 편안하게 생활합니다. 제 경험으로 봤을 때는 아는 게 적을수록 번뇌가 적어지는 효과가 더 큰 것 같습니다. 정토회 회원 중에서도 초등학교나 중학교까지 공부한 것이 전부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서 탁 자신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 많습니다. 반면에 불교 교리나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을 가지고 계속 머리를 굴려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안다.’ 하는 인식을 놓아버려야 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현대인은 옛날 사람들보다 말귀는 빨리 알아듣는다고 할 수 있지만 오히려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옛날 사람보다 더딘 이유는 자꾸 생각으로 모든 걸 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륜스님 법문을 들어보니 훌륭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저는 법을 이해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하는 말이 본인의 머리로 이해가 되면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머리로 이해가 되면 ‘훌륭하십니다!’ 하고, 내 머리로 이해가 안 되면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다!’ 하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그냥 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스님한테 가까이 와서 ‘스님!’하고 부르면서 좋아하는 마음을 냈다가 제가 톡 하고 외면하면 곧바로 삐져서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바로 확 바뀌어 버려요. 그 사람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이 그렇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고뇌에서 벗어나려면 움켜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움켜쥔 생각은 사람마다 카르마에 따라서 차이가 크게 나지만, 평균적으로 말하면 아는 게 많을수록 어떤 문제를 자꾸 생각으로 풀려고 합니다. 생각을 골똘히 하니까 능력은 커지지만, 대신에 자신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현대인들은 깨닫는 게 좀 더딘데 왜 그럽니까?’ 이런 의문이 드는 것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야심경을 읽어봐도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라고 하잖아요. ‘이 얻을 바 없는 까닭으로’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으려면 무엇을 얻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실은 아무것도 얻을 게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깨달음마저도 얻겠다는 욕망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깨닫지 못했다는 새로운 고뇌가 또 생기는 거예요. 돈을 벌어야 하는데 돈을 못 벌었다고 실망하는 것이나, 깨달아야 하는데 못 깨달았다고 실망하는 것이나, 모두 집착이라는 측면에서는 같은 겁니다. 그럴 때 ‘돈을 벌겠다.’ 하는 말과 ‘도를 얻겠다.’ 하는 말은 아무 차이가 없어요. 얻겠다는 것이 고뇌의 근본이기 때문에 그 대상이 돈이든 도이든 사랑이든 그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얻겠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얻겠다는 생각이 그렇게 쉽게 놓아지지 않는다는 거죠. 여러분들은 돈을 얻겠다고 하다가 괴롭다고 해서 돈이 얼마나 무상한 줄 아는지 깨우쳐 주면 ‘그렇구나!’ 하고 권력을 잡습니다. ‘권력이라는 게 얼마나 무상한 줄 아느냐?’고 깨우쳐 주면 권력을 탁 버리고 이번에는 도를 붙잡는 식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도’가 그냥 돈이나 권력의 대체물에 불과한 수행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깨달음을 체험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자꾸 추상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확 깨우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돈을 조금씩 벌어서 저축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복권을 사서 일확천금을 벌겠다는 것과 똑같은 개념으로 깨달음에 대해서도 접근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도 늘 복권에 떨어진 것 같은 그런 실망을 하는 거예요.

수행은 지금 나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깨어있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을 유지하다가 놓치면 다시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렇게 꾸준히 해나가면 되는데 ‘깨달았다.’, ‘못 깨달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돈을 벌었다.’, ‘돈을 못 벌었다.’ 하는 것과 똑같아요. 복을 비는 기복적인 신앙도 문제지만 욕심으로 깨닫겠다고 하는 우리의 수행 풍토 역시 문제입니다. 마치 벼락부자가 되겠다는 것처럼 단박에 깨우쳐서 도인이 되겠다는 잘못된 수행 풍조 때문에 지금 한국 불교가 매우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발을 안 딛고 늘 허공을 헤매고 있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안개가 짙어지고 날씨가 쌀쌀해졌습니다. 스님은 순례단이 혹시 감기에 걸릴까, 우려하여 일찍 법문을 마쳤습니다.

쉬라바스티에서의 첫날이 저물었습니다. 내일은 앙굴리말라 스투파, 수닷타장자 스투파, 기원정사를 순례할 예정입니다.


2025 3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51

0/200

박민주

고맙습니다

2025-02-14 21:45:03

김종근

감사합니다

2025-02-03 06:18:15

박백국

부처는 소승불교고 지금은 부처랑은 관계 1도없는 대승불교니까 그렇지ᆢ
성철스님이 죽으면서 내가 믿었던게 가짜였다는걸깨달았다고 울면서 죽었고
불교계가 난리가 났었는데 신문에도 났었고
알면서 모르는척 돈되니까 넘어가는겨
가르침은 없는거지 석가가 죽은뒤부터

2025-02-02 15:32:36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