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인도성지순례 10일째입니다. 오늘은 네팔의 탄센에 가서 해돋이를 보고, 부처님이 성장하신 카필라성과 쿠단을 순례했습니다.
탄센은 설산을 볼 수 있는 고원 지대로, 해발 2,000m에 위치해 있습니다. 순례단은 탄센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3시에 출발했습니다. 차가 출발하자 대부분 잠에 들었습니다. 새벽 5시, 목탁 소리와 함께 모두 잠에서 깨어 기도를 드렸습니다.
6시가 넘어 탄센에 도착했습니다. 아직 사방이 어둑했지만, 일찍 가게를 여는 주민들 덕분에 거리가 환했습니다. 스님과 순례단은 차를 피해 한쪽으로 줄을 서서 길을 따라 산으로 향했습니다.
산으로 가는 길에 붉은 기운이 동쪽 하늘을 가득 채웠습니다.
“일출 시간이 7시라고 했는데, 이제 해가 뜨려고 하나 봐요. 서둘러 올라갑시다. 일출은 산 위에서 봐야지요.”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게 쉽지 않았지만, 스님은 순례단에게 설산과 일출을 보여주기 위해 숨을 고르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어느덧 주변 산봉우리들만 보일 정도로 높은 곳까지 올라왔습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 덕분에 히말라야 산맥과 안나푸르나가 선명히 보였습니다.
“저기 보이는 산이 히말라야 산맥이고 안나푸르나입니다.”
스님은 일출이 잘 보일 만한 장소를 찾아 자리를 잡았습니다. 곧 붉은 태양이 산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어, 저기를 보세요. 해가 뜨기 시작합니다.”
스님의 말이 끝나자 순례객들 사이에서 감탄과 환호가 터져 나왔습니다.
일출을 감상한 후, 스님과 순례단은 넓은 평지로 이동해 도시락으로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공양을 마치고 순례단은 다 함께 둘러앉아 장기자랑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엊그제 왕궁터에서 못했던 춤과 노래를 더 할 수 있는 시간을 드릴게요. 또 어두운 곳에서 플래시를 켜가며 공연했던 분들도 오늘은 밝은 무대에서 다시 한번 해보세요.”
순례단은 혼자 또는 여럿이 신나는 노래와 춤을 선보였습니다. 어느덧 8시 20분이 되었습니다.
스님이 놀이를 마무리하며 말했습니다.
“장기자랑을 더 하고 싶지만, 마을 주민들이 9시에는 버스를 움직여 달라고 했습니다. 내려가는 길에 다치지 않도록 천천히 갑시다.”
내려오는 길에는 새벽과는 또 다른 청명한 설산의 모습을 한 번 더 볼 수 있었습니다.
산을 내려오니 아홉 시가 넘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부처님이 자란 곳인 카필라성으로 출발했습니다. 3시간 30분을 달려 12시 40분에 카필라성에 도착했습니다. 순례단은 카필라성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잠시 명상을 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카필라성의 역사와 부처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희는 지금 카필라바스투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의 현재 도시 이름은 네팔 타올리하와(Tauliyahawa)입니다. 우리는 지금 카필라성 안에 들어와서 태자 궁터 옆에 앉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 앞쪽이 동쪽입니다. 저 앞에 보이는 성문이 태자가 출가했다는 동쪽 문입니다. 경전에서는 ‘마야 부인이 아기를 낳으러 동쪽 문으로 나갔다’, ‘태자가 동쪽 문으로 나가서 늙은 자를 봤다’, ‘부처님이 출가할 때 동쪽 문을 뛰어넘었다’ 하는 것처럼 동문이 여러 번 나옵니다. 이렇게 동문이 강조되는 이유는 아마 동쪽 문을 나가야 세상과 연결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입니다.
부처님이 출가를 결심하게 된 계기
부처님께서는 룸비니에서 태어나 바로 이 카필라성으로 왔기 때문에 아시타 선인이 태자의 관상을 봤다는 곳도 이곳 카필라성 안입니다. 부처님은 이곳에서 12살 때까지 두 분의 스승에게 공부를 배웠는데 아주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인물도 괜찮은 촉망 받는 젊은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꿈은 아들이 훌륭한 왕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석가족은 나라가 작으니까 늘 주위의 강대국으로부터 시달림을 받았기 때문에 아들이 왕이 되어서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부모의 꿈이고 나라의 희망이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께 늘 ‘전륜성왕’이라는 지칭이 따라붙는 이유입니다. 태자는 깨달음의 길로 가려고 했지만 ‘전륜성왕’의 길을 가라고 하는 부모의 권유 사이에서 많은 번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본인에게 미련이 전혀 없으면 부모의 권유가 있더라도 미련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경전의 기록과 달리 태자에게도 왕이 되어서 세상 일을 잘 다스려 보려는 꿈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왕으로부터 어느 한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위탁받아 다스리면서 여러 정책을 펴면서 세상을 평화롭게 할 만한 시도를 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자신이 꿈꾸던 세상을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끝내 출가의 뜻을 굽히지 않게 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아버지가 죽어야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는 제도였기 때문에 왕자 중에는 이것을 참지 못하고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거나 아니면 나이가 들어도 왕위를 물려받지 못할 때는 출가를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출가한다고 했을 때 정반왕이 ‘나에게 불만이 있어서 출가하려는 것이냐?’ 하고 묻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절대로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하고 대답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정반왕은 태자가 출가의 마음을 갖는 이유가 ‘혹시 왕위를 빨리 물려받지 못해서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자신이 왕이긴 하지만 태자에게 권한을 주어서 세상을 통치하는 일을 해보게 합니다. 이렇게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왕의 방책도 있었지만, 부처님 자신도 젊은 시절에는 통치 행위를 통해 세상을 평화롭게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시도를 해본 결과 ‘새로운 길이 어떤 길인지는 모르지만, 기존의 이 길은 아니다!’ 하고 최종 결론이 난 것이 29살 때입니다. 그래서 왕위는 물론 부모, 아내, 아들까지도 뒤로 하고 집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런 부처님의 출가 과정에 대해서 좀 현실적으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유년기와 유학기를 지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중고등학교 시절을 지난 거예요. 그리고 이제 성인의 길을 가는 예법에 따라 성인식을 하고 계속 아버지를 따라 같이 다니면서 왕이 어떤 일을 하는지 배우는 시기를 맞이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농경제에 참석하게 됩니다.
농경제란 왕은 금으로 만든 쟁기를 들고, 대신들은 은으로 만든 쟁기를 들고, 농민들은 그 뒤에서 철로 만든 쟁기를 들고 한꺼번에 밭갈이를 하는 행사입니다. 이 행사는 엄청나게 화려하고 장엄해서 왕의 권위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자는 농경제에 처음으로 참석해서 다 해진 옷을 입고 몰골이 형편없는 농부가 쟁기질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모습이 너무 불쌍해 보여서 ‘당신은 왜 이렇게 고통 속에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농부에게 ‘착취가 너무 심해서’라는 대답을 듣습니다. 그래서 왕궁의 부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굶주림과 과로에 기반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에 대한 의문은 나중에 부처님이 연기법을 깨달은 후 해명이 되지만, 그때는 처음으로 현실에 직면한 거예요.
또 그런 농부가 쟁기질을 편하게 하려고 소를 채찍으로 때리는 것을 보고 ‘농부의 편리함을 위해 축생은 저렇게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쟁기로 땅을 갈아엎자, 거기에서 작은 벌레가 나옵니다. 그러자 새가 와서 그 벌레를 잡아먹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가 죽어야 하는가. 함께 사는 길은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은 주로 소년 시기에 많이 하죠. 여러분도 어릴 때는 다 해진 옷을 입고 구걸하는 사람을 보거나 불쌍한 사람을 보게 되면 ‘왜 저렇게 되었을까?’ 하고 의문을 가졌지만, 나이를 먹으면 만성이 돼서 으레 ‘인생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잖아요. 인도에 처음 오면 구걸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울컥합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면 옆에 따라와서 ‘박시시’ 해도 그냥 새소리 바람 소리처럼 듣고 지나가잖아요. 그런데 부처님은 농경제에서 목격한 장면에 굉장한 자극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행사장에서 나와 나무 밑에 앉아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할까? 함께 행복해지는 길은 없을까?’ 이런 생각을 골똘히 합니다.
정반왕은 장엄하게 농경제를 하는 모습을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아들을 데려왔는데 주위를 보니 아들이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리저리 찾다가 어느 나무 밑에 아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골똘히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나 거룩해서 정반왕은 자기도 모르게 절을 하게 됩니다. 정반왕이 부처님께 절을 했다는 기록이 경전에는 세 번 나옵니다. 첫 번째, 부처님이 태어나시고 얼마 되지 않아 아시타 선인이 관상을 보고 집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되고 출가하면 부처가 되겠다는 예언을 하자 감동해서 절을 합니다. 두 번째, 염부수 나무 아래에서 명상하는 것을 보고 절을 합니다. 세 번째, 깨달음을 얻고 붓다로 돌아왔을 때 절을 합니다.
함께 행복해지는 길은 없는가?
농경제 이후로 명랑하던 고타마는 갑자기 말이 별로 없어지고 항상 골똘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부모와 스승에게 ‘왜 하나가 살기 위해 다른 하나가 죽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아무도 그 질문에 답을 주지 못했어요. 어릴 때는 선생님이나 부모님은 뭐든지 다 안다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학식이 높은 스승도 왕자가 경험한 현실에 대한 의문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라’, ‘안 죽으려면 네가 열심히 해야 된다’ 하는 것이었어요. 오늘날 우리가 세상에서 배우는 공부라는 것은 경쟁에서 이기는 공부, 남보다 돈을 많이 버는 공부, 시험을 쳐서 남을 떨어뜨리고 내가 합격하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것을 성공이라고 합니다. 타인과 비교해서 이기는 게 성공의 개념인 거예요. 얼굴로 이기든, 키로 이기든, 힘으로 이기든, 뭐든 비교 우위에 서는 것이 성공이고, 그것이 곧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태자가 제기한 문제는 ‘함께 행복해지는 길은 없는가?’입니다. ‘왜 꼭 하나가 죽어야 다른 하나가 사는 것인가?’, ‘왜 하나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는 불행해야 하는가?’ 하고 의문을 가진 겁니다. 나중에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뒤 빠세나디 왕에게 했던 법문 중에 ‘타인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아서는 안 됩니다’ 하는 유명한 말씀도 어릴 때 가졌던 문제 의식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왕궁에는 태자의 의문에 대답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 혼자 사색하는 시간이 늘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추구해 온 행복이 타인의 고통 위에 있었구나
태자가 세속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출가에 뜻을 두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사문유관(四門遊觀)입니다. 경전에는 태자가 동쪽 문으로 나가서 늙은이를 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인이 거동이 불편해서 뒤뚱뒤뚱하는 모습, 무릎이 아프고 허리가 불편하고 가래가 끓는 모습, 늙었다고 가족들이 외면하는 모습이 아주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태자는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저렇게 되는 것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 지점이 굉장히 중요해요. ‘불쌍하다’ 하고 느끼는 것에서 시작해서 ‘나도 저렇게 되는가’ 하는 쪽으로 생각이 옮겨갑니다. 타인을 보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나와 남을 분리하지 않고 ‘나도 저렇게 된다’ 하는 쪽으로 바뀐 겁니다. 즉 노인의 고통이 나의 문제로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태자는 점점 시간이 흘러 늙어가게 되는 것을 마치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래서 한가하게 즐기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붓다가 본 왕궁 밖 중생의 현실을 사문유관이라는 이야기에 집약해서 경전에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타마가 그 나이에 늙은 사람을 처음 봤겠어요? 어릴 때도 집안의 할머니들은 이미 다 늙었을 텐데요. 여기서 단순히 늙은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불교가 사회적 현실에서 멀어져 철학으로 바뀌어 가면서 생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늙은 사람이란 결국 왕궁 밖에서 사는 세상 사람들 대부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90퍼센트는 노예 신분이었습니다. 일반 시민은 10퍼센트에 불과했어요. 그리스와 로마도 10퍼센트의 시민들을 위한 문명이었습니다. 그리스의 민주주의, 스파르타의 군국주의, 이런 말들도 10퍼센트의 지배층이 민주적으로 살았느냐, 절대 왕정 하에 살았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밑에 있는 90퍼센트의 사람들은 어느 체제에 있든 다 노예 계급이었습니다. 붓다가 동문으로 나가 만난 사람은 늙은 노예였습니다. 남문으로 나가 만난 사람은 병들었는데 보호받지 못하고 버려진 노예였습니다. 서문으로 나가 만난 사람은 죽었는데 시신이 수습되지 못하고 버려진 노예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목격한 것을 의미하는데, 나중에 지배 질서를 합리화하는 쪽으로 불교가 변질되다 보니 그 모습이 추상화되어서 인간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숙명론 같은 개념으로 정립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나중에 경전에 기록된 것을 한번 읽어 보세요. 늙음, 병듦, 죽은 시신에 대한 묘사를 보면 모두 버려진 노예의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병원에 누워 있는 환자의 모습이나 노인정에 있는 노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고타마는 그런 모습에서 세상의 모순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결국 자신이 추구해 온 쾌락이나 행복은 타인의 고통 위에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전통적인 브라만 사상에서 고타마의 의문은 도저히 이해도 되지 않고 해결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북쪽 문으로 나가서 한 수행자를 만나 대화를 하면서 스스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됩니다. 그것이 출가였습니다.
경전 기록을 보면 부처님이 출가를 결심한 것이 대략 열여섯 살에서 늦어도 열아홉 살 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이 부처님을 결혼시킨 것이 열아홉 살 무렵으로 되어 있기도 하고, 어떤 경전에서는 부처님이 결혼을 먼저 하고 사문유관이 뒤에 나오는 것도 있습니다. 고타마가 세속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과 집을 떠나 출가자의 삶을 사는 것 사이에서 번민하고 있을 때, 왕은 아들을 결혼시키고 세상의 쾌락을 선물합니다. 그리고 나라의 일부 지역을 떼어 주고 그곳의 통치를 맡깁니다. 고타마가 그곳에 가보니 헐벗은 농민들이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살고 있었어요. 그는 농민들을 노예 신분에서 풀어주고, 소의 코뚜레를 다 잘라서 야생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니 통치가 되었겠어요? 노예를 다 풀어주는 것은 그 당시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경전 기록으로만 보면 인류 역사에서 노예 해방을 제일 먼저 한 사람이 부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문유관 이후로 번민하던 부처님은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도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더 망설이다가는 출가를 못 하겠다’ 하는 뜻으로 ‘장애이구나(라훌라)’ 하고 말하며 출가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둘째, 인도 사회의 풍속에 의하면 후사를 이을 아들이 생겼기 때문에 출가를 허락받을 수 있었던 겁니다.
죽을지언정 깨닫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
드디어 고타마는 동쪽 문을 뛰어넘어 출가를 했습니다. 쉽게 말해 야밤에 도주를 한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밤에 몰래 성문을 열고 나갔는데, 이것을 경전에서는 ‘유성출가(踰城出家)’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을 타고 성을 뛰어넘었다는 식으로 표현한 겁니다. 부처님은 왕이 되지 못해서 출가한 것이 아니라 왕위가 주어졌으나 그것을 버리고 출가했습니다. 그것은 세속을 그냥 떠난 게 아니라 세속을 초월한 것입니다. 세속을 뛰어넘었음을 상징하기 위해 ‘유성출가’라고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출가하면서 이렇게 다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을지언정, 독약을 먹고 죽을지언정, 깨닫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 내가 출가한 것은 누구의 꼬임에 빠져서도 아니고, 나 혼자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도 아니고, 일체중생을 고뇌에서 구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출가를 했기 때문에 부처님의 출가는 연애에 실패해서, 사업이 망해서, 고시에 떨어져서 인생무상을 느껴서 출가하는 것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것입니다. 부처님은 ‘내가 출가하여 도를 얻으면 다시 돌아와 모든 사람과 새로운 길을 나누겠다’ 하는 큰 원을 세우고 출가를 한 겁니다.
부처님은 출가만 하면 금방 도를 이룰 것 같았는데, 며칠 해보니 어땠을까요?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벌레가 물고, 짐승 울음소리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지금까지는 왕궁에서 추위나 배고픔이나 벌레 따위는 전혀 모르고, 그저 ‘진리가 뭘까’ 이런 생각만 했는데, 막상 숲 속에 혼자 있어 보니 전혀 도하고는 관계없는 문제에 신경이 쓰였습니다. 밥 생각도 나고, 따뜻한 잠자리 생각도 간절하고, ‘괜히 출가했나’ 하는 생각도 났겠지요. 여러분들이 성지순례를 와서 ‘괜히 왔나’ 하듯이요. (웃음)
그런데 경전에는 그런 모습을 다 부처님이 번민했다고 기록하지 않고 마왕이 유혹했다는 식으로 기록했습니다. 한 번은 부처님이 결심을 하고 길거리로 나가 탁발을 해서 음식을 얻어왔어요. 얻어 온 음식을 먹는데 도저히 못 먹겠는 거예요. 그걸 억지로 먹었다가 토해버렸어요. 부처님은 자신의 모습이 너무 한심했습니다. ‘이렇게 혼자서 수행해서는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스승을 찾아가기로 합니다. 이렇게 해서 남쪽으로 스승을 찾아 내려가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여러분도 ‘여기 괜히 왔다’ 하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괜찮습니다. 다만 돌아가지만 않으면 돼요. 힘든 고비만 넘기면 점점 괜찮아집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순례를 다닐만하죠?”
“네!”
“저는 깨달음 자체는 그리 어려운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붓다가 보여준 위대한 교화력은 그가 오랜 시간 많은 번민을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단번에 출가한 것이 아니라 십 년간 망설였던 것이 나중에 깨달음을 얻은 후에 사람들을 교화할 때 큰 도움이 되었을 거예요. 본인 스스로 경험해 봤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떤 문제로 고민하는지 깊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부모 때문에 출가를 망설이는 사람에게 부처님은 단호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본인은 그렇게 십 년을 망설여놓고, 제자가 미련이 있어 보이면 바로 집으로 돌려보냈어요. 한 번은 흉년이 들자 한 비구를 안거 기간에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비구의 어머니가 집에 온 아들을 붙들고 늘어졌어요. 가지 말라고 말로 해서 안 되니 ‘그럼 부인하고 하룻밤만 자고 가라’ 하고 간청을 했습니다. 비구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아서 하룻밤을 자고 왔는데, 돌아와서 명상을 하는 중에 자꾸 번뇌가 생겼습니다. 이 일을 부처님께 말씀드리자 ‘너는 집으로 돌아감이 좋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출가 전에는 무슨 일을 했다 해도 출가를 허용했지만, 출가를 한 뒤에도 번민이 생긴다면 계속 수행 생활을 하기 어렵다고 본 겁니다.
실제로 부처님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부처님을 추상적으로 보기보다 그분의 일생을 현실 속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날 세상의 문제에 대해 만약 부처님이라면 어떤 관점을 가지실까’ 하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삶이란 역사적이고 구체적이며 사회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또 철학적으로 연구해도 그런 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성지순례를 자꾸 권유하고, 부처님의 일생을 공부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도 불교를 참 좋아하다가 한때 불교의 현실에 너무 실망해서 모두 그만두어 버리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십 년 공부한 것이 너무 아까워서 부처님의 일생을 다시 한번 봤습니다. ‘진짜 부처님은 어떤 사람일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불교가 맞는가’ 이런 관점을 갖고 부처님의 일생을 다시 집중적으로 보면서 새로운 발심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성지 설명이 끝난 후, 순례단은 경전을 독송하고 잠시 명상을 했습니다. 명상을 마친 뒤, 모두 함께 ‘부처님 출가의 노래’를 불러보았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스님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여러분도 출가를 하는 것이 저는 제일 좋다고 생각해요. 어떤 것보다도 권유할 만합니다. 그런데 출가를 할 거냐 말 거냐 망설인다면, 출가를 할 자격이 안 됩니다. 출가란 깨닫는 즉시 바로 하는 겁니다. 오늘 여기에서 깨닫는 바가 있다면 스님을 따라 바로 출가를 해버리는 거예요. 미리 집에 가서 준비하는 시간을 갖겠다고 하는 건 출가할 수준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출가를 망설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출가를 했다고 가정해 보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밥을 얻어먹고 분소의를 입고 나무 밑에서 자고, 이렇게 생활한다고 한번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먹고 있는 것은 걸식하는 것보다 낫죠? 입고 있는 옷과 잠자리도 훨씬 낫고요. 나무 밑이나 숲 속에서 혼자 있는 것보다는 말 안 들어도 가족하고 있는 게 낫습니다. 이렇게 출가를 하겠다고 마음을 내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지금 여러분들의 생활에 일체 불만이 없어집니다. 그게 먼저 되어야 해요.
남편하고 도저히 못살겠고, 애 하고 도저히 못살겠고, 사업이 안 돼서 도저히 못살겠고, 이런 이유로 출가하기 때문에 출가를 하고 나서도 마음이 흔들리는 겁니다. 출가를 해놓고도 남편보다 더 멋진 남자를 만나거나, 마누라보다 더 이쁜 여자를 만나거나, 내가 회사를 운영할 때보다 절을 운영해서 돈이 더 생기게 되면, 벌써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진정한 출가란 자신의 카르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출가를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부처님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일체 사는 데에 불만이 없어집니다. 그것부터 먼저 해보면 어떨까요? 그게 되면 굳이 출가할 필요도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들은 불평이 있어서 출가를 하기 때문에 출가하면 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불평이 있어서 출가했다는 것은 ‘이 길보다 더 좋은 길이 없을까’ 하는 관점에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에 또다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왕궁도 싫다고 버려야 세속에 대한 미련이 없어집니다. 그래야 불평불만이 없어지고 출가 생활에 오롯이 집중할 수가 있는 겁니다.
스님들도 굉장한 결심을 하고 스님이 된 것 같지만, 선방이나 강원에 있는 스님들조차 음식을 제대로 안 준다고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절에 사는 스님들도 불만을 갖게 되는 첫 번째 요인이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선방들도 숙소에 대한 불평이 가장 많이 들어온다고 해요. 요즘은 개인마다 1인실을 안 주면 아무도 선방을 안 갑니다. 전화해서 1인실이 있는지 물어본 후에 입방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거가 끝날 때는 ‘회향비는 얼마 줘요?’ 이렇게 물어봅니다. 스님들을 흉보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세상살이가 이렇다는 거예요. 그러니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고 거룩해지는 게 아닙니다. 스님이 됐다고 해서 당장 내 카르마가 없어지지 않아요. 그 성질, 그 욕구가 어디 가겠어요? 이발했다고 출가가 되면 이발소만 갔다 오면 다 출가가 되겠죠. 그럼 부처님이 왜 필요해요? 이발사가 필요하죠.
그래서 여러분들도 우선 먹고 입고 자는 것에 대해 불평불만이 없어져야 합니다. 안 먹으면 오히려 살 빠져서 좋지 않아요? 먹으면 배불러서 좋고요. 맛있으면 살쪄서 좋고, 맛없으면 살 안 쪄서 좋은 겁니다. 늦으면 늦어서 좋고, 일찍 가면 일찍 가서 좋습니다. 이렇게 어떤 경우에도 괴롭지 않은 연습을 먼저 해봐야 해요. 그래야 같은 일을 해도 재미가 있습니다.
불평불만이 생기는 이유는 자신의 카르마 때문입니다. 자기 취향, 자기 입맛, 자기 기질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불평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불평불만이 생겨도 금방 ‘내가 또 집착했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입이 조금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건 괜찮아요. 그러나 계속 입이 나와 있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좋은 일도 욕심을 내면 안 돼요. 출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출가하기 전에 다른 것은 놔두고라도 먹고 입고 자는 것에 대한 불평불만으로부터 먼저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이게 자유로워지면 함께 일하기가 굉장히 쉬워요. 우리가 일을 할 때 늘 준비하는 게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입니다. 물론 대중의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은 그런 걸 항상 잘 챙겨야 합니다. ‘출가 수행자니까 아무거나 먹고 아무 데서나 자라’ 이러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먹고 입고 자는 것에 대해 불평불만을 갖지 않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수행자들이 모인 집단에서 도를 논하며 싸우는 게 아니에요. 종파 때문에 싸우는 것도 아니에요. 대부분 생활 문제를 갖고 싸우고, 자기 성질에 안 맞아서 떠나게 되는 겁니다. 이 문제는 머리를 깎는다고 해결이 안 되고, 승복을 입는다고 해결이 안 됩니다. 모두 자신의 카르마를 극복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카르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진정한 출가입니다.”
스님의 말씀이 끝나고, 동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동문 밖에 마을 아이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습니다. 스님은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동문을 지나 논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주차장으로 향했습니다. 작년과 길이 달라져 헤맬 뻔했지만, 조금 전에 과자를 받은 소녀가 앞장서서 안내해 준 덕분에 주차장까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오후 4시가 되어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이동해 쿠단에 도착했습니다. 순례단은 쿠단 입구에서 줄을 맞춰 입장한 뒤 탑돌이를 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스님이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쿠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 후 12년, 성도 후 6년째 되던 해에 아버지 정반왕의 초청을 받고 이곳 카필라바스투를 방문하셨습니다.”
스님은 이어 부처님 생애와 쿠단의 역사적 배경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 후 마가다국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이후 바라나시에서 첫 설법을 하시고, 다시 마가다국 왕사성으로 돌아가 빔비사라왕을 교화하며 죽림정사를 창건하셨습니다. 이곳에서 사리푸트라, 목갈라나, 마하가섭 등 주요 제자들의 귀의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다 수닷타 장자의 초청으로 코살라국 수도 사위성으로 이동하셨고, 프라세나짓 왕이 귀의한 후 쉬라바스티에서 많은 설법을 펼치셨습니다. 쉬라바스티는 카필라바스투와 가까운 곳입니다. 당시 마가다국 왕사성에서 부처님의 명성은 높았지만, 카필라바스투까지는 소문이 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쉬라바스티에서 부처님의 이름이 알려지자 마침내 고향에도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정반왕은 부처님께 쉬라바스티가 가까우니 고향을 방문해 달라고 요청하며 사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사신들은 정반왕의 서신을 전달하러 갔다가 부처님 법문을 듣고 깨우쳐 출가해 버렸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왕의 상심이 커졌습니다. 그때 우다이라는 대신이 자원했습니다. 그는 인물이 좋은 데다 카필라바스투에서 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유명했습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저는 부처님께 귀의하지 않을 겁니다.’
정반왕은 그를 보내며 안심했습니다. 설마 노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수행자가 될 리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다이는 기원정사에 도착해 조용한 분위기에 압도되었습니다. 1,250명의 대중이 기침 소리 하나 없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는 뒤에서 조용히 법문을 듣다가 결국 깨우침을 얻고 출가했습니다. 다만 정반왕의 서신은 전달했습니다.
‘부처님, 대왕께서 수심이 깊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7일 후에 고향으로 가겠다고 전하거라.’
결국 부처님은 출가 후 12년 만에 카필라바스투로 돌아오셨습니다. 정반왕은 기다리지 못하고 이곳까지 나와 천막을 치고 부처님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이를 기념해 세운 탑터가 바로 쿠단입니다.
천막을 치고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건 인도 문화입니다. 제가 부탄에 갔을 때도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부탄 사람들은 손님을 집에서 기다리지 않고 길가에서 먼저 맞이합니다. 몇십 리 밖에 나와 천막을 치고, 풀을 깔아 자리를 마련한 뒤 차와 다식을 대접합니다. 그런 뒤에야 집으로 손님을 모셔갑니다. 부처님이 오신다고 하니 이곳에서도 그런 예우를 갖춰 맞이했던 것이죠.”
스님의 설명이 끝난 후 순례단은 경전을 독송하고 예불을 올렸습니다.
참배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아이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스님은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 준 후 버스를 타고 대성석가사로 갔습니다.
숙소에 도착하니 어느덧 오후 6시가 되었습니다. 저녁 공양을 하고 법당에서 저녁 예불을 드린 후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이로써 네팔에서의 순례 일정이 모두 끝났습니다. 내일은 다시 국경을 넘어 인도로 입국한 뒤, 쉬라바스티로 이동해 순례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0
최상훈
고맙습니다 ^^
2025-01-28 20:27:24
자성
함께 순례하는 기분으로 매일 하나씩 읽어내려갑니다.
고맙습니다.
오늘은 좀 답답함이 있네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이
타인의 불행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지 않는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고의든 아니든 내가 행복하면 누군가는 불행한게 현실인거 같은데...
2025-01-26 21:42:01
월광
스님의 하루팀분들 영상팀분들 부처님 스님과 성지순례단분들 대성석가사보현스님과 가족분들 일체중생 자연의 한량없는 은혜속에 스님의 하루를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참 고맙습니다.